다음 생에 할 일들 창비시선 390
안주철 지음 / 창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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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써서 먹고 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원고료라고 해봤자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 시집을 내봤자 시장에서 주목받지 못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시인을 시를 쓴다. 안주철도 마찬가지다. 그가 시를 쓰는 이유는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모진 세상에서 그래도 살아보겠다는 본능이 시에 배어 있다. 안주철의 첫 시집 《다음 생에 할 일들》은 쓸쓸한 시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한 마디로 그의 시가 전체적으로 어두운 편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일까? 마치 그 시의 내용이 내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굴러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슬픔과 소외감은 나만의 것은 아니리라.

 

 

혼자 밥을 먹어도 외롭지 않다. 식탐 때문에
혼자 밤늦게 산책을 해도 두렵지 않다.
미인이 쓰러져 뒹구는 술집 근처에 살기 때문에
책을 읽고 내용을 정리하지 않아도 된다.
말할 사람도 없고
애써 기억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친구를 만나도 심심하다. 친구는
사라진 일자리에 빠져 있고 나는
옆 테이블에 앉은 미인의 다리가 궁금해서
아내와 통화를 해도 할 말이 없다. 애인이라도
생겼다면 거짓말이라도 정성스럽게 할 텐데.
여행지에 도착해서도 신기한 것이 하나도 없다.
사진을 몇장 찍으며 나를 속인다.

 

혼자 밥을 먹으면 눈물이 난다. 식욕이 없어서
혼자 산책을 하면 외롭다. 상점이 모두 문을 닫아서
혼자 영화를 보면 구석에 가서 울고 싶다.
등이 갈라지면서 또 하나의 내가 기어나와
갈라진 등을 두드리며 나를 위로해줄 것 같아서

 

혼자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 집을 지나친다.
더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노인이 되는 법」, 34~35쪽)

 

 

 

고독이라는 감정은 늘 우리를 지배한다. 고독을 극복할 수 있을까. 그늘이 있어도 없는 척 능청스럽게 살 수 있을까. 마음을 정리해도 끝까지 남는 것은 언제나 고독이다. 우울할 때 혼자 있는 것을 못 견뎌 하면서도 끝내 혼자가 되어버릴 때가 있다. ‘혼자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 집을 지나친다/더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는 구절에서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렇다. 외롭지 않으면 결코 길을 떠나지 않는다. 시인은 불가항력적인 힘에 끌려 안식처를 지나쳤지만, 결국 고독을 받아들여 맞서 싸우기로 한다.

 

 


아내가 운다.
나는 아내보다 더 처량해져서 우는 아내를 본다.
다음 생엔 돈 많이 벌어올게.
아내가 빠르게 눈물을 닦는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음 생에는 집을 한채 살 수 있을 거야.
아내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다음 생에는 힘이 부칠 때.
아프리카에 들러 모래를 한줌 만져보자.
아내는 피식 웃는다.
이번 생에 니가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재빨리 아이가 되어 말한다. 배고파.
아내는 밥을 차리고
아이는 내가 되어 대신 반찬 투정을 한다.
순간 나는 아내가 되어
아이를 혼내려 하는데 변신이 잘 안된다.
아이가 벌써 아내가 되어 나를 혼낸다.
억울할 건 하나도 없다.
조금 늦었을 뿐이다.

 

그래도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다음 생엔 이번 생을 까맣게 잊게 해줄게.
아내는 눈물을 문지른 손등같이 웃으며 말한다.
오늘 급식은 여기까지

 

 

(「다음 생에 할 일들」, 74~75쪽)

 

 


사람이 일상에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위로다. 그다음이 칭찬이다. 이는 관심과 공감과 이해에서 나온다. 심적 고통의 늪에 빠졌다가도 누군가가 위로와 칭찬의 손길을 내밀면 대부분 그 아픔에서 해방될 수 있다. 내게 어떤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을 때, 바로 그 순간 나 아닌 누군가에게 그 일을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 순간 아무도 없다면? 있어도 내 말과 생각을 믿어주지 않는다면? 상상만 해도 슬퍼진다. 사랑을 받으려면 사랑을 줘야 하는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사랑을 주기보다 받으려 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이때 단절로 인한 고통은 자신이 변해 살 수 있다는 내 안의 ‘경계경보’다. 사랑을 먼저 주고, 곁에 있어 주며,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갖도록 바뀌어야 한다. 시인은 다음 생에 태어난다는 것을 가정하에 버킷리스트를 만든다. 이름하며 ‘다음 생에서도 행복하게 살 것’. 가족은 시인을 위로한다. 시인은 그런 삶이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같이 아프고 위로하는 가운데 정은 그 어떤 밧줄보다 튼튼해진다. 그 훈훈함도 산 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군고구마 봉지보다 가슴 울린다. 정이 희미해져 가는 세상 속에서 시인은 등 돌린 타자들끼리의 새로운 관계망을 언어로 형성해 보려는 여정에 관심을 가진다. 쓸쓸한 개인들이 힘겹게 친밀성을 획득해가는 과정. 한 달만 지나면 난로보다 사람의 체온이 더 그리워질 것이다. 사람 사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에도 조그만 관심으로 우리는 하나로 연결되고, 따스함으로 삶이 지탱되는 존재임을 또한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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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2015-09-24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헣....이 시집에서 <다음 생에 할 일들>이 참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여기서 또 보게 되네요. 덤덤하고 담담한 시에요, 참.

cyrus 2015-09-24 17:58   좋아요 0 | URL
이 시집 덕분에 안주철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어요. 다음 시집이 기대됩니다. ^^

인디언밥 2015-09-24 14: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닿네요..

나비종 2016-01-04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롭지 않으면 결코 길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이별도 어쩌면 외롭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관계의 떠남`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상에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위로라면, 가장 필요한 사람은 내 삶을 따스하게 지켜봐주는 관람자일까요? 나를 주인공으로 바라봐주는.
 

 

 

 

 

 

 

 

 

 

 

 

 

 

 

 

 

 

 

 

 

 

페이스북이나 북플을 이용하다 보면 종종 난감한 상황에 빠진다. 친구 관계를 맺은 분의 나쁜 소식을 접했을 때다. 사람들은 감정을 표현하려고 ‘좋아요’ 버튼을 누르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이런 행위를 좋지 않게 생각한다. 마치 나쁜 소식에 좋은 감정을 느꼈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좋아요’ 버튼을 누르는 대신에 댓글에 위로의 말을 남긴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견해를 밝힌 글도 차마 ‘좋아요’를 누르지 못한다. 그 사람의 생각이 싫더라도 예의상 ‘좋아요’를 눌러줄 수는 있다. 그런데 꼭 그렇게까지 모순적인 행동을 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페이스북 최고경영자 마크 저커버그는 지난 15일에 ‘싫어요’ 버튼 기능을 도입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동안 페이스북 이용자들은 나쁜 소식에 대한 공감을 ‘좋아요’ 버튼을 눌러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요구해 왔다. 주커버그는 이용자들의 요구를 반영하여 ‘좋아요’ 이외에 다양한 감정을 표현할 방안을 제시했다. 이 기능이 나온다면 특정인의 부고 소식, 가슴 아픈 이야기, 대중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기분 나쁜 사건 등을 알리는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를 필요가 없어진다. 슬픔, 분노의 감정을 느낀다면 ‘싫어요’를 누르면 된다.

 

그런데 ‘싫어요’ 버튼으로 공감대가 형성되는 상황이 무조건 좋다고 볼 수 없다. 다수의 사람이 특정인을 겨냥한 반감을 표출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특정인을 비하하려고 악의적으로 ‘싫어요’를 누르는 사람이 많아지면,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선량한 사람이 쓴 게시물에 남아있는 ‘싫어요’ 개수는 그 사람의 일생을 파괴해버리는 낙인이 될 우려가 있다. 그 사람은 천 개나 넘는 ‘싫어요’ 개수 때문에 한순간에 ‘마녀’가 된다. 그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들은 ‘싫어요’ 누르기만 바쁘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싫어요’를 누르는 디지털 마녀사냥을 보게 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내가 올린 한 장의 사진이 누군가가 잘못 소개하여 공유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켰다고 생각해보라. ‘싫어요’ 개수가 1분에 수십 개 이상 올라가고, 욕설이 담긴 메시지와 댓글에 시달려야 한다. 감정이 집단으로 분출되어 동일시하는 심리적 현상이 한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정말 무시무시하다. 자신이 유리하게 만들도록 왜곡해서 쓴 잘못된 정보가 ‘좋아요’ 100개 넘어 받는다면, 누구나 그 사람의 정보를 믿는다. 그리고 ‘좋아요’를 많이 받기 위해서 남의 개인정보를 도용하여 자신이 직접 올리는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도 있다.

 

예전에는 무조건 친한 사람의 글과 사진에 ‘좋아요’를 눌렀다. 그런데 이제는 ‘좋아요’ 하나 누르는 일에도 신중하게 하는 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 생각 없이 ‘좋아요’ 누르는 내 모습이 마치 자동차 전면 유리창에 알을 낳으려는 잠자리와 같아 보인다. 투명한 유리창이 물인 줄 알고, 거기에 알을 낳는 잠자리처럼 말이다. SNS 이용자 대부분은 깨끗하고 투명한 척하는 거짓이 진실인 줄 알고 ‘좋아요’를 누른다.

 

한동안 페이스북 접속을 멀리하고, 책에 관한 글을 마음껏 쓸 수 있는 알라딘 서재를 이용하려고 했다. 그런데 알라딘 서재가 ‘북플’로 변신하면서 이곳도 페이스북을 닮아간다. 자신의 일상을 알리는 사진을 공개하는 이웃이 있고, 책 소개를 짧게 알리는 이웃도 있다. 예전에 비하면 A4 1장 넘는 분량의 서평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이웃의 글은 ‘알라딘 서재’로 접속해서 읽는다. 하루에 읽는 이웃의 글은 보통 15~20편이다. 일부 글은 분량이 짧아서 정말 1초에 확인할 수 있고, 긴 내용의 글을 읽으면 3분 정도 걸린다. 진짜 꼼꼼하게 읽으면 5분 걸린다. 이렇게 한다고 해도 ‘친구 관계’를 맺은 모든 분의 글을 일일이 다 읽는다거나, 꼼꼼하게 읽지 못한다. 나 또한 짧은 글과 사진이 주를 이루는 페이스북 환경에 오래 적응된 탓에 조금이라도 긴 내용의 글을 대충 읽는 경우가 있다. 솔직히 다 읽는다는 건 힘든 일이고, 관심 분야를 다룬 글 위주로 읽는다고 보면 된다. SNS 기능상 짧고 쓰는 글은 사람들이 읽기 편해서 좋긴 한데, 정작 책과 관련 없는 정보가 많아져서 아쉽다. 그래서 웬만하면 100자평, 일상을 공개한 사진이 있는 글에는 ‘좋아요’를 누르지 않고, 댓글도 달지 않는다. 글이 지나치게 긴 것도 읽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읽기 적당한 서평의 분량은 A4 용지 1장 반이다. 예전에 서평 한 편 쓰면 무조건 A4 용지 3장 정도 분량이 나왔다. 몇 년 전 모 언론사에 신문 칼럼을 쓰는 방법을 숙달하고 나면서부터 적당한 분량으로 이루어진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야기가 딴 데로 새고 말았다. 결론을 말하자면,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이나 내 감정을 표현하기에 애매한 글이라면 ‘좋아요’를 누르지 않아도 된다. 이럴 때 필경사 바틀비처럼 ‘안 하는 편을 택하겠다.’(I would prefer not to)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 행위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소극적 거절이다. ‘좋아요’를 누르는 행위와 그 개수만으로도 사람의 감정이 정직하게 표현되었다고 볼 수 없다. 또 다수가 열광하는 대상에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 사람을 공감 능력이 떨어졌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좋아요’를 누르는 데에도 남의 시선에 의식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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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9-22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고장 소식에 ˝좋아요˝는 못누르겠더군요.ㄷㄷㄷ

cyrus 2015-09-23 18:07   좋아요 0 | URL
그런데 페이스북에 접속하면 그런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

북다이제스터 2015-09-22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타인만을 위해 북플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Cyrus님께서도 그러실 듯...근데 바틀비가 무슨 뜻인지요?

cyrus 2015-09-23 18:11   좋아요 0 | URL
제가 소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군요. 허먼 멜빌이 쓴 소설 제목이 ‘필경사 바틀비’인데 ‘바틀비’가 주인공 이름입니다. ^^

지금행복하자 2015-09-22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떡해요~ ˝좋아요˝ 를 눌렀어요. ㅎㅎ 하지않을 권리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할 권리보다 하지 않을 권리를 좀 더 존중해 줘야 한다고 현재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cyrus 2015-09-23 18:15   좋아요 0 | URL
지루하기 짝이 없는 글에 항상 ‘좋아요’를 눌러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

AgalmA 2015-09-25 00: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시스템과 상황은 계속 발생할테고 근본적으로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건 그것대로 또 통제가 되니까요. cyrus님의 뜻도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또 살다보면 완벽히 자기 의지대로 못할 때도 있고, 본의 아니게 자기 의지와 반대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위축되고 좁은 관계망으로 안전성을 추구하게 되고 좁은 풀pool이 만들어지면서 [좋아요]의 끼리끼리 집단성은 또 강력해지죠. 결국 문제는 순환됩니다. 그래서 바람직한 건 침묵하거나 덮어버리는 것이 아닌,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상대와 주위에 대해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일 겁니다. cyrus님의 이 글도 그런 뜻이 담겨 있을 테고요. 다같이 사는 사회고, 어느 정도가 최선일 지는 각자의 역량에 달려 있겠지요....
책제목도 있듯이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는 뜻은 상대를 지적하는 데 쓰기보다 나나 상대의 실수, 부족함, 기대 미만도 감안하는 데 더 좋은 쓰임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어쨌든 평가는 내 자의와 주관이 바탕이가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사실관계나 잘못을 바로 잡는 건 옳은 일이지만, 그 방식에 있어 상처까지 주는 경우가 많은 거 같습니다. 저도 반성하는 점이고요.
이런 여러 가지가 숙고된 글이라면 좋아요나 싫어요가 문제적이지 않을 겁니다. 어쨌거나 인간은 모든 걸 다 알고 말할 수 없으니 참....
한참 생각해 보고 이 댓글을 썼는데, 부족함이 있더라도 이해 부탁드립니다;

cyrus 2015-09-23 18:36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사실 제가 ‘위축되고 좁은 관계망’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아갈마님의 말씀처럼 저와 ‘친구’ 관계를 맺는 분들만 글을 보게 되고,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남겨요. 그런데 확고한 의지가 꼭 실천되는 건 아니에요. 가끔 짧은 글, 일상 관련 글에서도 ‘좋아요’를 누릅니다. 내가 당신의 글을 보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인 셈이죠. 그래서 제 글에 ‘좋아요’을 눌러주는 분들이 짧은 글을 남겨도 감사의 보답으로 ‘좋아요’를 누릅니다. 이런 과정이 아갈마님이 말씀하신, `강력해지는 집단성`입니다. 저 또한 ‘좋아요’에 신경을 안 쓸려고 해도, 자꾸 그쪽으로 향합니다.

2015-09-22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3 1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살리미 2015-09-22 2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끔 고민하는 부분이네요. 저는 알라딘 서재를 거의 이용하지 않았었고 책을 많이 읽게 된 것도 애들을 키우고 조금 한가해진 최근 몇년의 일이에요. 그동안 독서한 기록들을 수첩에 정리해 놓고 있다가 알라딘에서 북플 앱이 나와서 처음엔 나만의 기록으로 정리를 시작했는데, 역시나 SNS다 보니 자주 보이는 이웃분들과 교류가 조금씩 생기더라고요. 그러다보니 `좋아요`나 `댓글`에 조금씩 신경도 쓰이고요. 그저 내 맘 가는 대로 해보자라고 편하게 생각하고는 있지만 한번쯤 고민해볼 문제이긴 한 것 같아요. 저는 리뷰도 아직은 너무나 서툰데 거기에 `좋아요`를 눌러주시고 댓글로 소통하는 이웃 분들이 계시니 힘이 나는 것만은 사실이고요^^
가끔씩 습관처럼 누르게 되는 것은 자제하려고 애쓰고도 있답니다^^

cyrus 2015-09-23 18:46   좋아요 0 | URL
제가 예전에 생각 없이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달아서 곤혹을 치른 적이 있어서, SNS에 오르는 글을 읽을 때 신중해져요. ^^;;

인디언밥 2015-09-24 14:55   좋아요 0 | URL
저랑 같은 ㅜㅠ 공감해요

오후즈음 2015-09-22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이글엔 좋아요를 누를거예요. ^^가끔 슬퍼요, 화나요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cyrus 2015-09-23 18:50   좋아요 0 | URL
ㅎㅎㅎ 카카오스토리처럼 븍플에 감정 표현 기능이 많이 생긴다면, 북플이 재미있어 것 같아요.

수이 2015-09-23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글을 정말 좋아서 좋아요_를 누르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 누군가의 글이 정말 좋아서 좋아요_를 누르는 경우도 있으리라고 봐, 나도 습관적으로 선호하는 글이나 좋아하는 사람의 글은 읽기도 전부터 먼저 좋아요_를 누르곤 하니까 좀 민망해하면서 이 글 읽고 있지만. 소극적 거절도 좋고_ 깊게 고민하고 생각하고 쓰는 글이라서 좋아해. 북플 기능을 마음껏 활용해서 짧은 단상들이나 주절거림, 사진을 많이 올리는 사람으로서는 좀 많이 찔리네 ㅋ

cyrus 2015-09-23 18:57   좋아요 0 | URL
누님. 제 글 때문에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해요. SNS에 망하지 않는 이상, 글을 짧게 쓰고, 사진을 많이 올리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예요. 변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어요. 그리고 누님은 다른 분들에 비하면 정말 양호한 편이에요. 누님은 이렇게 ‘좋아요’ 눌러주고, 댓글을 달아주잖아요. 그런더 제가 페이스북에서 만난 어떤 분은 하루에 다섯 개 이상 타임라인을 도배해요. 읽어보면 정말 쓸데없는 소리들이에요. 북플에서 누님이 어떤 책 읽는지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

만병통치약 2015-09-23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버튼에 공감합니다 버튼, 익명으로 누를 수 있는 어쩌라고 버튼을 적용해야합니다.그러면 저처럼 허영가득한 글에는 어쩌라고가 가득할테지만요 ㅋㅋ 이글에는 공감과 좋아요를 누릅니다.^^

cyrus 2015-09-23 18:59   좋아요 0 | URL
예전에 익명일 때가 좋았어요. 저도 지적 허세 끼가 있는 글을 써서 ‘좋아요’ 수가 많지 않아도 당연한 결과라고 받아들여요. ㅎㅎㅎ

맥거핀 2015-09-23 1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알라딘에서도 누군가를 비판, 비난하는 글에 붙은 `좋아요` 숫자를 볼 때 뭔가 조금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 주장이 타당하고 안 타당하고의 문제와 전혀 별개로 말이죠.) 저는 `좋아요`가 있든 `싫어요`가 있든 중요한 것은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저도 결론적으로는 cyrus님 같이 누르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cyrus 2015-09-23 19:02   좋아요 1 | URL
저는 그게 `편가르기`로 보여서 제가 아는 분들이 논쟁에 휘말리면 그 글에 `좋아요`를 누르지 않아요. 그냥 댓글만 달아요.

해피북 2015-09-24 10: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누르는 ` 좋아요` 는 참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요 ㅎㅎ `힘내세요``고마워요``잘읽었어요` 등 누를때마다 마음을 다해서 누르게 됩니다. 책을 읽는다는게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고 가끔은 외롭게도 느껴지고 힘들게 느껴지더라구요. 때론 이렇게 읽어서 뭐하나. 또 글은 적어서 뭐하지와 같은 지극히 원초적인 질문과 마주할때면 힘들어지기도 하고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혼자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끈기있게 다잡아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한게 사실이더라구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웃님들의 글을 읽을적마다 `좋아요`를 누르고 있어요. 이웃님들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진 않으실까, 이 글을 올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셨을까 등등을 생각하며 `힘내세요, 잘읽었어요`라는 마음을 담아서 누르게 됩니다. 그 글들이 토양이되서 성장(?)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것도 이웃으로써 함께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하는 마음을 담아서 말이죠.

그렇지만, 솔직히 `좋아요`보다 더 좋은건 `댓글`인거 같아요. 그래서 댓글로 소통을 많이 할 수 있또록 생각을 많이 적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무튼 제가 누르는 `좋아요`는 이런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서 오늘도 꾸욱 누르고 갑니다 ㅋㅁㅋ!!!


cyrus 2015-09-24 18:0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저도 ‘좋아요’만 누르는 것보다 ‘댓글’이 달린 게 더 좋아요. 왜냐하면 그 분은 확실히 제 글을 읽었으니까요. 해피북님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이웃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책 선물 주신 거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조만간 인증샷 겸 서평을 올리겠습니다. ^^

인디언밥 2015-09-24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urus님 글이 좋아요~~~ ^0^

cyrus 2015-09-24 18:0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제 글의 입장이 불편하거나 글에 잘못된 것 있으면 댓글 달아주세요.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

하양물감 2015-09-30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페이스북을 주로 하는 터라... 그런 경험을 자주 합니다.
솔직히 제 글에 좋아요가 그리 많이 달리지 않는 편이라 신경을 덜 쓰긴 하지만요..

그런데, 저의 경우에는, 좋아요 많은 글에 좋아요 클릭하지 않고
댓글 많이 달린 글에 댓글을 잘 안달아요..이건 무슨 심뽀인지..ㅋㅋㅋ


cyrus 2015-10-01 13:33   좋아요 1 | URL
솔직하시군요. ㅎㅎㅎ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다는 건 각자 선택이니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페크pek0501 2015-10-03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의합니다. 저도 좋아요를 누를 땐 신중하겠습니다.^^

cyrus 2015-10-07 18:55   좋아요 0 | URL
너무 신중하면 SNS 접속하는 재미가 떨어질 수 있어요. ㅎㅎㅎ
 
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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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정말 싫어.”, “싫으면 시집가.” 어릴 때 친구들과 놀 때, ‘싫다’라고 말하면 그 말에 붙여 ‘싫으면 시집가’라고 대꾸하던 기억이 있다. 옛날 여자가 시집살이를 시작하면 처가에 자주 들릴 수 없게 된다. 부모님들은 딸에게 장난으로 말한다. 이 집구석 싫으면 얼른 좋은 사람 만나서 시집이나 가라고. 그러면 부모님은 딸 속 썩이고, 반항하는 행동을 못 볼 테니까. 장난 같은 말이지만 여기에 혼기에 찬 딸을 염려하는 부모님의 진심이 숨어 있다.

 

혼자 살기도 벅차서 연애하기도 힘든 청춘이 늘고 있다. 그들 앞에 이런 말장난을 쉽게 하지 못한다. 당사자의 부아를 돋을 수 있다. 좋은 사람 만나 시집가고 싶어도 시집가기 위한 경제적 형편이 마땅치 않다. 얼마 전까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삼포 세대. 그리고 내 집 마련, 인간관계를 포기하는 오포 세대. 꿈과 희망마저 포기하는 칠포 세대까지 나왔다. ‘n포 세대’도 있다. 아예 모든 걸 포기하는 세대이다. 열심히 일해서 다 되는 건 아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평균적으로 산다는 게 힘든 현실이다. 잘 나가는 기성세대들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쉽게 말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아픔을 겪은 만큼 그들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청춘의 불만은 ‘헬조선’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사회가 팍팍할수록 그 사회의 모순을 예리하게 묘사한 소설, 드라마, 영화 등이 인기를 얻는다. 그것들을 많이 찾는 사람 대부분은 팍팍한 사회 속에서 고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윤태호의 웹툰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를 통해 미생도 되지 못한 청춘들은 노동시장으로 내던져진 청년층의 고단한 처지에 공감했다. 고졸 출신이 대기업 비정규직으로 입사해 멋지게 성장하는 이야기가 어느 영웅담 못지않은 카타르시스를 주는 이유도 그만큼 현실에서 실현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장강명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소설 《한국이 싫어서》의 제목만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낀 독자가 많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이 카타르시스만 주는 작품으로 기억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소설로 돈, 학벌, 취업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사는 한국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만족해선 안 되고, 행복한 인생을 위한 해답을 찾아서도 안 된다. 기자 출신 작가는 실제로 호주 시민권을 취득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20대 후반 여주인공 계나의 삶을 구성했다. 그렇지만 계나처럼 ‘이민’이 자신만의 행복을 찾을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지 않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쪽이야.” (152쪽) 계나가 말하는 ‘어떻게’를 독자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떻게 하면 호주 이민을 할 수 있을까 궁금한 독자가 있을 거고, 계나처럼 어떻게 자존심을 지키면서 행복하게 사는지 고민하는 독자도 있다. 이 책으로 ‘어떻게’에 대한 질문의 해답을 찾으려고 한다면 오산이다. 현재의 기쁨을 만족하는 ‘현금흐름성 행복’, 아니면 미래를 위해 차곡차곡 준비하는 ‘자산성 행복’을 위해 살아갈지 고민해야 한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 속에 사회에 대한 불만을 하나씩 품고 산다. 우리는 ‘헬조선’의 쳇바퀴에 벗어나지 못한다고 불만을 늘어놓지만, 지금 어디서 누군가는 비정규직 신세에 벗어나지 못해 이 쳇바퀴에 오를 자격이 못 된 채 살기도 한다. 《한국이 싫어서》의 계나는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선에 있는 중간 지점에 있는 인물이다. 그녀처럼 돈이라도 있으면 행복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라도 있지, 아예 없으면 행복을 위한 도피를 꿈꿀 수조차 없다. 이 소설의 해피엔드는 팍팍한 사회에 지친 독자들을 위한 판타지적 선물처럼 느껴진다. 한국이 싫은데 이 불만을 어떻게 참고 살아야 할까. 뭐라도 손에 쥐면서 이게 뭘까 저게 뭘까 고민이라는 걸 하고 싶다. 이런 답답한 현실 앞에 대고 ‘싫으면 시집가’라는 농담도 할 수 없으니, 참. ‘한국이 싫으면, 시집가!’, 이 한 마디 농담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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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0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0 2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안녕반짝 2015-09-20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넉넉하게 10장 안되게 했는데 분량제안이 있으니 뭔가 할 말을 다 못해서 글이 이상해져 버리더라고요 ㅜㅜ 참여에만 의의를
두자 하고 그냥 올렸어요! 이 책은 재밌나요? <그믐,>은 뭐랄까 문학상에 잘 어울리는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cyrus 2015-09-20 21:42   좋아요 1 | URL
네, 저도요. ㅎㅎㅎ 《한국이 싫어서》에 대해서 쓴소리 더 하고 싶었는데 분량 제한 때문에 더 쓰지 못했어요. 주인공이 고생해서 결국에 행복한 결말이 이르는 이야기가 재미있긴 한데, 사회에 대한 주인공의 불만이 공감되어서 재미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어요. 그래도 《표백》보다는 어두운 분위기가 덜해서 좋았어요. 《그믐》의 서평을 몇 편 읽어봤는데 내용이 조금 어려울 것 같아요.

2015-09-20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5-09-20 21:52   좋아요 1 | URL
저는 평소에 한국소설을 즐겨 읽지 않는 편인데 적립금 욕심 때문에 책을 읽고 글을 썼어요. 한국 시도 마찬가지에요. 시가 관념적일수록 독자는 자꾸 거기서 해석하려고 해요. 마치 수능시험 지문으로 나온 시를 분해하듯이 해석하는 것처럼요. 이래서 사람들이 시를 지루하고 어려운 글로 생각해요.

보물선 2015-09-20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별점이 같으십니다 ㅎㅎ

cyrus 2015-09-20 21:53   좋아요 1 | URL
제가 별점은 짜게 줍니다. ㅎㅎㅎ

2015-09-20 2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1 1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0 2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1 1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1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ㄱㅈㅆㅇ 2015-09-21 0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런 개저씨스러운 농담을 들으면 한 대 치고 싶을 것 같군요.

cyrus 2015-09-21 17:37   좋아요 0 | URL
제 글 어느 부분에 불만을 느끼시는지 모르겠지만, 제 글을 비판하고 싶으면 회원 로그인으로 접속하셔서 좀 더 확실하게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비속어, 모욕적인 단어를 쓰지 않는 비판이라면 받아들입니다. 이런 님의 아리송한 내용의 댓글을 보면 지우고 싶군요.

맥거핀 2015-09-21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여러모로 아무리 봐도 계나보다는 제가 더 한국을 싫어하는 것 같은데, 저는 이렇게 아등바등 한국에 껌딱지처럼 붙어있군요. 안 떨어지려고 애쓰면서..

AgalmA 2015-09-21 11:47   좋아요 0 | URL
어학 연수도 거부했던 me too;;

cyrus 2015-09-21 17:3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대한민국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나저나 아갈마님은 무슨 이유로 어학연수를 거부했는지 급궁금합니다.

AgalmA 2015-09-21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학연수 보내주겠다는 나라가 싫어서ㅎ; 지나고나니 호강을 발로 찬 멍청이가 된!

cyrus 2015-09-21 18:38   좋아요 0 | URL
아이고, 이런... 웃을 수가 없군요.

북다이제스터 2015-09-21 20:24   좋아요 0 | URL
ㅠㅠ

북다이제스터 2015-09-21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못 읽어보고 저자 인터뷰만 들었는데요... 저자 의도는 이민이 아니고 남아서 뭘 할것인지 반감을 느끼도록 일부러 이렇게 썼다고 하더라구요. 정말 그런 느낌 드는 책인가요?

cyrus 2015-09-22 18:15   좋아요 0 | URL
제 생각으로는 작가의 의도가 반은 실패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한국이 싫어서> 서평을 몇 편 봤는데, 정말 이민이 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대부분은 사회에 대한 반감만 확인하는 경우에 그치는 감상이었어요. 사회의 문제점을 자세하게 써서 좋긴 한데, 작가의 의도가 독자에게 제대로 어필했는지 의문입니다.

마키아벨리 2015-09-21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장님 유머로 받자면)시집이나 가라고 자꾸 그러셔서 여자들이 CGV에 많다는...

cyrus 2015-09-22 18:16   좋아요 0 | URL
이 글의 베스트 댓글로 선정하고 싶습니다. ㅎㅎㅎ
 
파수꾼
하퍼 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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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의 관점에서 생각할 때, 비로소 그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퍼 리《앵무새 죽이기》(줄여서 ‘앵무새’)를 끝까지 안 읽어본 사람도 이 유명한 구절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영화 때문이겠지만 그레고리 펙의 얼굴로 그려지는 애티커스 핀처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정의로움, 지혜, 자상함 등으로 점철되는 그의 아빠로서의 언행은 완벽한 아빠로서의 모범이다. 오로지 자신의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면 편견에 사로잡히기 쉽다. 편견으로 비롯된 오독도 마찬가지다. 선입견을 배경으로 어떤 결론을 전제하는 독서는 작품의 진면목을 놓칠 수 있다.

 

금고 속에 잠들어있던 하퍼 리의 원고가 55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다는 소식에 전 세계 독자들은 출간 전부터 큰 기대를 걸었다. 영원히 공개되지 못할 뻔 했던 원고는 《파수꾼》이라는 이름으로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출판사와 언론 들은 《파수꾼》을 ‘《앵무새》의 후속작’으로 소개했으나 예상했던 반응과 다르게 독자의 혹평이 꽤 많다. 인종차별에 반대했던 애티커스의 변절, 여주인공 진 루이즈의 히스테릭한 면에 불만을 쏟아냈다. 전작과는 다른 작품 속 캐릭터와 작품 분위기의 급격한 차이에 독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파수꾼》이 《앵무새》보다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독자의 반응도 많다. 《파수꾼》이 《앵무새》와 비교당해 따분하고 결함이 많은 작품으로 보는 독자평들이 많아서 무척 안타깝다.

 

《앵무새》의 애티커스를 중심으로 본 사람은 애티커스만 보인다. 《앵무새》가 지루한 내용임에도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돌연 절필을 선언한 작가의 유일한 작품이라는 사실이 있지만, 애티커스를 제대로 연기한 펙이 아니었다면 애티커스가 ‘흑인 인권’을 변호하는 미국의 양심으로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은 《파수꾼》을 이해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애티커스만 기억하는 독자라면 당연히 《파수꾼》 속 애티커스의 모습에 실망한다. 하퍼 리의 작품들을 출간한 열린책들 출판사의 마케팅, 그리고 출판사 홍보를 그대로 받아 적은 언론들의 서평 또한 독자의 《파수꾼》 독서를 방해하게 만드는 편견이 된다. 《파수꾼》이 《앵무새》의 후속작으로 알려지면서 《파수꾼》의 줄거리를 파악하지 못한 독자들은 전작인 《앵무새》를 읽게 된다. 출판사는 판매 부수를 올리는 데 성공했지만, 일부 독자들은 《파수꾼》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 

 

 

 

 

 

《파수꾼》 읽기 전에 《앵무새 죽이기》를 잊으시오!

 

 

《파수꾼》을 읽으려는 독자들에게 당부한다.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앵무새》의 줄거리를 모두 잊어버려라. 펙이 분한 애티커스, 《앵무새》의 어린 소녀 스카웃에 대한 기억도 싹 다 잊어버려도 좋다. 《파수꾼》을 독립적인 작품 자체로 읽어 보라. 《파수꾼》의 애티커스에 펙의 명연기를 슬쩍 편입시키는 순간, 독자는 《파수꾼》을 《앵무새》보다 못한 작품으로 본다. 《앵무새》를 감명 깊게 읽은 독자도 이 편견에서 비롯된 오독의 착각에 벗어나지 못한다.

 

진 루이즈는 아버지가 메이콤 주민 협의회 모임에 참석하여 흑인 차별 여론에 동조하는 사실에 큰 실망감을 느낀다. 어린 시절 흑인을 보호해주던 영웅적인 아버지의 모습이 산산이 부서지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여기서 독자들도 충격을 받는다. 그렇게 양심적인 사람이 어떻게 한순간에 변할 수가 있는지. 그 이후로 진 루이즈는 아버지를 증오하고, 흑인 인권 문제의 중요성을 상기시키기 위해 아버지와 삼촌 앞에서 날이 선 태도로 저항한다. 그녀의 저항 의식이 상당히 과격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외국 언론에서는 《파수꾼》의 진 루이즈를 쓸데없이 걱정이 많고, 자기 생각을 뚜렷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미숙한 여주인공으로 본다. 정말 삼촌의 말대로 진 루이즈는 아버지라는 영웅의 결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서적 불구자’일까?

 

진 루이즈는 정말 외로운 여자다. 메이콤 마을에 그녀와 같은 편에 서는 인물이 한 명도 없다. 그녀의 약혼녀 헨리? 그도 역시 메이콤 주민 협의회 소속 회원이다. 알렉산드라 고모는 흑인을 과격하고 버릇없는 인종으로 생각한다. 어린 시절 진 루이즈를 키운 보모 캘퍼니아는 애티커스가 예전처럼 흑인을 위해서 앞장서서 변호해줄 거라고 믿지 않는다. 오랜만에 재회한 친구 헤스터도 흑인 인권 운동이 공산주의자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를 손잡아 이끌어 주는 정의의 파수꾼은 없다. 진 루이즈는 ‘흑인 인권 보호를 주장하는 여성’이다. ‘백인 남성’이 사회를 주도하는 1950년대 미국의 보수적 사회 분위기를 생각하면, 그녀의 진보적인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가 된다.

 

 

 

 

 

 

《파수꾼》을 《앵무새》와 함께 인종 편견을 고발하는 소설로 본다면, 《앵무새》의 명성으로 드리워진 그늘에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불운의 작품이 된다. 진 루이즈는 백인 남성 중심 사회 한가운데서 고군분투하는 외로운 파수꾼이다. 진 루이즈는 외로운 싸움을 통해서 지켜내야 할 정의란 바로 ‘흑인 인권’과 ‘여성 인권’이다. 그녀의 모습은 1950년대 페미니스트 운동을 이끈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행보와 유사하다. 글로리아는 처음으로 흑인과 여성 문제 사이에 동질감을 발견했다. 애티커스와 헨리가 가입한 메이콤 주민 협의회가 백인 남성들에게 독점되어 온 정치권력을 상징한다면, 진 루이즈는 흑인 차별에 동조하는 정치권력에 도전한다. 애티커스와 삼촌은 그녀의 정치적 의견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서 그녀를 가르치려 든다. 맨스플레인(Mansplain, 남자들이 여자에게 무턱대고 아는 척 설명하려 드는 현상)’ 때문에 진 루이즈는 괴로워한다. 애티커스는 흑인을 열등한 민족으로 보는 편견에 확신하면서 흑인 차별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삼촌 또한 조카를 남북 전쟁의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가르치듯이 장황하게 설명한다. 아버지와 삼촌은 자신의 말에 반박하는 그녀를 신뢰하지 않는다. 헤스터는 맨스플레인에 강요당한 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 빌의 흑인 편견을 그대로 믿으면서 옳은 사실인 것처럼 진 루이즈 앞에서 떠들어댄다. 진 루이즈는 숨 막히는 남성들로 둘러싸인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해 주변을 맴도는 신세가 된다. 백인 중심, 남성 중심의 제도 아래서 힘을 못 쓰지만, 진 루이즈는 사회의 억압을 깨닫기 시작한다.

 

애티커스는 좋은 남자가 아니다. 잘못된 편견에 지나치게 확신하고 흑인, 여성의 존재를 침묵시키려는 나쁜 남자다. 아직도 그가 양심이 있는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는가. 《앵무새 죽이기》의 애티커스가 TV에 나오는 완벽한 남주인공이라면, 《파수꾼》의 애티커스는 ‘백인 남성 신화’에 의존하여 사회를 지배하는 남자다. 이들은 여성은 복종하는 존재, 흑인은 열등한 존재로 여긴다. 진 루이즈를 무시하지 마라. 그녀는 남부의 ‘글로리아 스타이넘’이다. 그녀가 파수꾼이 되어 우리에게 외친다. ‘백인 남성 신화’에서 벗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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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5-09-20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독서동아리에서도 읽고 있는데 실망스럽다는 반응이 많아요~~ 앵무새때의 애티커스가 넘 멋있었던거죠~ 균형잡힌 시각과 아이를 기르는데 꼭 필요할 수 있는 덕목. 반듯함과 공정정. 폭 넓은 수용력까지~ 아버지로서의 애티커스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했었거든요~
결국엔 그도 백인이고 남자에 사회의 기득권이라는걸 간과하고 있었던거죠~~

cyrus 2015-09-20 21:08   좋아요 0 | URL
제 생각이지만, 평소에 올바른 성격을 유지한 사람들이 의외로 보수적인 입장을 드러낼 때가 있어요. 애티커스가 그런 유형의 사람으로 보여요. 자신의 생각에 조금이라도 벗어난 타인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수용하기 어려워하죠.

보물선 2015-09-20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파수꾼부터 읽고 있어요.
지난번 북콘 가서 들은 이야기들이 도움이 될듯해요^^

cyrus 2015-09-21 17:42   좋아요 1 | URL
방금 보물선님이 예전에 썼던 북콘 후기를 다시 봤어요. 제가 글에 쓴 내용은 이미 북콘에서 언급되었군요. 나름 참신한 내용이라고 열심히 썼는데... ㅎㅎㅎ

인디언밥 2015-09-20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앵무새와 다른, 독립된 작품으로 읽었어요~ 재료는 같지만 다른 맛, 다른 주제의 글처럼 느껴졌어요

cyrus 2015-09-21 17:4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왠지 <파수꾼> 원고가 맨 처음 발표되었다면, 센세이션 일으킨 작품이 되었을 거예요.

만병통치약 2015-09-21 1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인물을 가지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그려 본다음 먹힐 만한 책을 출판한게 아닐가요? ^^ / 애티커스는 평범한 우리나라 40대 50대 같군요. 함께 할 수 있었을때는 사회를 위해 싸울 때도 있었지만 어느새 기득권을 지켜야할 나이가 되었으니 생존이라는 본능에 충실하는게 아닐까요? 두 모습 다 애티커사의 본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진 루이즈도 나이 먹고 애 낳고 바둥바둥 살다보면......

cyrus 2015-09-21 17:48   좋아요 0 | URL
하퍼 리는 맨 처음에 <파수꾼> 내용으로 썼다가 출판사 편집자가 다시 새로 써보라고 해서 고쳤는데, 그 작품이 바로 <앵무새 죽이기>예요. 그래서 하퍼 리 입장에서는 나름 인물 설절에 고심했을 거예요. 통치약님의 해석에 공감합니다. 애티커스를 기성세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군요. ^^
 
ㅋㅋㅋ

 

 

 

 

 

 

 

 

 

 

 

 

 

 

 

 

 

 

 

 

 

어제 이웃께서 북플에 사진을 올렸다. 몇 쪽인지 잘 모르겠지만,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바우돌리노》(열린책들, 2002) 속에 있는 한쪽 전체를 찍었다. 거기에 이런 문장이 있다. 

 

 

 바우돌리노는 자신이 보았던 사본의 제목 몇 개를 그에게 일러 준 뒤, 또 다른 제목들도 언급했다. 말하자면 비드 존자(尊者)의 『세 번 출산하는 최고의 사건에 대해』, 『부드럽게 방귀 뀌는 기술』, 『배변하는 방법에 대해』, 『머리 빗는 법에 대해』, 『악마들의 조국에 대해』 같이 그가 그럴듯하게 꾸며 낸 것이었다. 이런 작품들은 선량한 참사회원의 놀라움과 호기심을 자극했다. 라에빈은 서둘러서 알려지지 않은 이 지식의 보물을 복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바우돌리노는 오토 주교의 양피지를 지워 버리고 나서 느꼈던 양심의 가책을 치유하기 위해 성실하게 라에빈의 청을 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대체 어떤 것을 필사해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에 그 작품들이 거기, 생 빅토르 수도원에 있는데, 이단의 냄새가 나기 때문에 참사회원들이 그 누구도 볼 수 없게 한다고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바우돌리노가 언급한 사본의 제목이 재미있으면서도 독특하다. 이런 책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에코는 중세 가톨릭교를 풍자하려고 의도적으로 책 제목을 우스꽝스럽게 꾸몄다. 중세 시대의 가톨릭교는 종교에 대한 풍자성이 강한 출판물을 이단 서적으로 규정했다. 가톨릭이 금서로 지정한 책은 불에 태워지기 마련인데 화형에 간신히 살아남은 책은 사람의 발길이 드문 수도원 도서관 비밀 장서실에 보관되기도 한다. ‘위험한 책’을 누구도 쉽게 볼 수 없다. 이 책을 보려면 도서관을 지키는 사서 혹은 수도원장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  

 

 

 

 

 

 

생 빅토르 수도원(St. Victor Abbey)은 프랑스 마르세유에 있는 오래된 건축물이다. 생 빅토르는 마르세유에 주둔했던 로마 군인이자 순교자다. 그래서 수도원 외관이 요새와 흡사하다. 이 수도원의 도서관은 수많은 장서를 보관한 곳으로 유명하다. 에코는 이곳 도서관에 이단 서적이 보관된 것으로 설정했다. 폐쇄적인 사회일수록 인간을 유혹하는 금기의 페로몬은 더욱 강렬해진다. 몇몇 수도승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금서를 읽으려고 했고, 금서를 필사한 사본들은 가톨릭의 탄압을 피해 은밀하게 유통되기도 했다. 가톨릭은 하느님의 절대적 권위를 조금이라도 무시하고, 희롱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특히, 웃음을 유발하는 풍자를 신의 진리를 파괴하는 위험한 사상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억압의 시대 속에서도 종교에 지배당한 사회의 모순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풍자한 작가들이 등장했으나, 대부분 이단자로 낙인 찍혀 거대한 불길 속으로 사라져야 했다. 물론, 그들이 남긴 서적도 함께. 그래서 무시무시한 시대 속에 끝까지 살아남은 프랑수아 라블레의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문학과지성사, 2004)이 대단할 수밖에 없다.

 

라블레는 생전에 이 소설을 발표하여 큰 인기를 얻었음에도, 가톨릭에 비판적인 태도를 밝혔다는 이유로 창작 활동에 제한받았다. 에코의 풍자는 라블레의 풍자에 빚을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블레는 에코보다 더 노골적으로 가톨릭을 어리석은 종교로 풍자했다. 그의 소설 《팡타그뤼엘》의 제7장은 생 빅토르 수도원 도서관에 보관된 서적에 관한 내용이다. 라블레는 중세 봉건주의와 가톨릭교회를 풍자하기 위해 식욕이 왕성하고 지식욕이 엄청난 거인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을 창조한다. 팡타그뤼엘은 공부를 하기 위해서 파리에 오게 되는데, 생 빅토르 도서관에 있는 몇 권의 책들이 훌륭하다고 극찬한다. 그 내용을 담고 있는 제7장의 제목이 ‘팡타그뤼엘이 어떻게 파리로 갔는가, 그리고 생 빅토르 도서관의 훌륭한 장서에 관해서’다. 라블레는 특유의 장광설로 도서관에 보관된 책 제목을 줄줄이 나열한다. 이 목록에서 재미있는 제목 몇 개를 골라봤다.

 

 

용자(勇者)들의 코끼리 불알
오르투이누스 선생 저, 모임에서 정직하게 방귀 뀌는 법
타르타레 저, 대변 배설법
건전한 배를 가진 배불뚝이
추기경의 암노새들을 세척하고 염색하는 방법
과부들의 껍질 까진 엉덩이
남녀 악마 소환법
다섯 탁발 수도회의 뚱뚱한 배
신부들의 당나귀 자지

 

 

라블레는 보수적인 가톨릭교회 관계자, 신학자, 스콜라 철학자들의 이름을 우스꽝스러운 책의 저자명으로 거론한다. 심지어 책 제목의 일부는 외설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이런 책을 쓴 적이 없다. 라블레는 장서 목록을 허위로 꾸며냄으로써 독자의 웃음을 유발하여 가톨릭 교리의 권위성을 무너뜨린다. 오늘날 같으면 명예훼손죄에 가까운 표현이다. 실제로 도서 목록에 언급되는 사람들은 라블레와 함께 같은 시대에 살았던 신학자들이다. 자신을 조롱하는 라블레의 문장을 보는 신학자들의 표정이 좋을 리가 없다.

 

에코가 라블레의 개방적인 태도를 모델로 자신의 대표작 《장미의 이름》의 주인공 윌리엄 수사를 창조했을지도 모른다. 윌리엄 수사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 수도승인데 실제로 라블레도 프란체스코회 수도원에서 수도사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윌리엄 수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부 ‘희극론’의 진리를 인정한다. 그렇지만 장님 수사 호르헤는 신의 교리 앞에서 웃는 행위 자체가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중세인들은 엄숙한 종교적 질서 속에서 생활했고 사제들의 역할은 바로 그러한 종교적 규율을 확립하고 지켜나가는 것이었다. 웃음과 풍자는 삶의 원초적 생명력을 일깨우지만, 동시에 권위를 뒤흔든다. 수도사들은 하느님이 가르치는 절대적 진리 위에서 만들어진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는 동시에 자신들을 위협하는 금서의 존재가 두려워서 금단의 장소인 수도원 도서관에 비밀리에 보관했다. 라블레가 근엄한 수도사 출신이면서도 웃음을 통해 사회를 비판하는 건강한 사회를 원했다. 그는 수도사 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진리를 엄숙한 가톨릭교회가 아닌 교회 밖에 들리는 민중들의 웃음에서 찾았다. 이미 라블레는 윌리엄 수사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진리’를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일 듯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2》 중에서, 8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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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9 1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0 1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fledgling 2015-09-19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찾으셨군요~^^ 정말 책 제목이 비슷하네요~ 저는 읽다가 너무 웃겨서 올렸을 뿐인데..ㅎㅎ이렇게도 연결이 되는군요. 페이지는 상권 148페이지 입니다~ 장미의 이름 명대사! 잘 보고 갑니다!

cyrus 2015-09-20 19:22   좋아요 1 | URL
fledgling님 덕분에 저도 몰랐던 사실을 알았어요. 장서를 보관한 곳이 생 빅토르 수도원 도서관이라는 사실에 살짝 소름 돋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