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한 여자, 야한 일기
주말에 레포트 준비로 인해서 지난 주 토요일에 있었던 독서모임에 참석하지 못하고 말았다. 독서모임 하루를 준비하기 위해서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읽었는데 말이다.
등교나 귀가할 때는 항상 버스를 타고 다니는데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데 1시간 20분 남짓 걸린다. 그 정도의 시간의 양이라면 버스 안에서 책 50~100페이지 정도는 넉넉히 읽을 수 있는 아주 좋은 자투리 시간이다. 독서모임을 앞두는 날에는 그 시간에 독서모임 선정 도서를 재독할 수 있다.
그런데 지난 번 독서모임 선정도서였던 아나이스 닌의 <헨리와 준>은 버스 안에서 읽기가 난감하였다. 표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책 표지가 강렬한 인상을 줄 정도로 독특하다. 학교 가는 버스에서는 눈치 볼 것 없이 읽을 수 있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스쿨버스를 탈 때는 읽기가 조금은 곤란하였다. 내가 타는 스쿨버스는 항상 학생들이 가득찬 만원버스다.
가끔은 내 옆좌석에 여학생도 앉을 때도 있는데 여학생이 내 옆에서 앉아있을 때에는 선뜻 책을 펼치기가 곤란하였다. 물론 그리 잘 생기지 않는 내가 책 읽는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하는 여자는 없겠지만 만약에 옆에 앉은 여학생이 눈가리개를 하고 있는 여인이 떡하지 그려진 표지의 책을 진지하게 읽고 있는 남학생을 보게 된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나,,,?
한 번은 또 이런 일이 있었다.
평소에 친한 대학동기랑 함께 도서관에서 과제물을 출력하고 있었을 때 일어난 일이다. 강의시간에 제출하게 될 과제물을 내가 컴퓨터로 확인하고 있는 사이에 동기가 무심코 내 가방을 뒤져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가방 안에 들어있었던 것은 책 두 권이었는데 한 권은 전공 교재였으며 나머지 한 권은 바로 아나이스 닌의 <헨리와 준>이었다.
동기가 <헨리와 준>의 표지를 보자마자 하는 말 ,,,
" 너 요즘 외로워서 야한 소설이나 읽고 있냐,, ㅋㅋ"
독서모임 때문에 읽고 있는 책인데 동기의 장난기 어린 말을 듣자마자 당황스러웠다. 나는 절대로 ' 야한 소설 ' 이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하였다. 다행히도 이 친구가 책이랑 사이가 친하지 않아서유명한 소설이라고 대충 얼버무림으로써 무사히 넘어갈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남학생 동기라서 캠퍼스 인생 최대의 위기(?)를 피할 수는 있었다. 만약에 여자 동기나 여 후배가 본다면 평생 야한 소설 읽는 놈 혹은 선배로 제대로 낙인 찍혔을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아나이스 닌의 <헨리와 준>은 ' 야한 소설 ' 이 아니다. ' 야하게 쓴 일기 ' 일뿐이다.
헨리 밀러와 아나이스 닌 그리고 준 밀러
* 국내에서 번역된 이 두 권의 <북회귀선>은 같은 출판사(문학세계사)라는에서 번역되었는데 왼쪽에 녹색 표지는 1991년에 출간되었으며 오른쪽은 <북회귀선> 출간 70주년을 맞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새롭게 출간된 완전 번역판이라고 한다.
노골적인 성묘사로 저작이 판매금지 처분을 받은 작가 헨리 밀러. 한때 그의 연인이었던 아나이스 닌의 작품이 그렇듯. 작품 세계처럼 그들의 사랑도 에로틱하고 기묘했다. 겉보기에 둘은 보석과 돌멩이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아나이스 닌은 아름답고 부유한 숙녀였고, 헨리는 그야말로 ‘ 땡전 한 푼 없는 ’ 무명의 작가 지망생에 불과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연결고리가 있었다. 아나이스 닌은 에로스를 강조하는 영국 소설가 D.H.로렌스에 대한 연구서를 저술하며 이런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했다. 헨리는 아나이스 닌이 원하는, 집필한 소설이 너무 외설스러워 그 누구도 출판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은지 4개월 만에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1년 동안 이들은 이후 자신들의 작품으로 승화될 성애에 몰두했다. 헨리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된 악명 높은 소설인 <북회귀선>(Tropic of Cancer, 1934)을 완성할 수 있었으며 아나이스 닌 또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소설가 헨리 밀러와 그의 아내 준 그리고 아나이스 닌의 삼각관계를 그린
필립 카우프만 감독의 <Henry & June>
국내에 개봉되었을 당시에는 헨리 밀러의 소설 제목을 의식해서
<북회귀선>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는데
헨리 밀러의 소설 내용과는 무관하다.
이들의 관계는 헨리의 두 번째 아내 준 밀러가 등장으로 복잡해진다. 성적 에너지가 넘쳐나는 직업댄서 준과 아나이스 닌은 잠시 관계를 맺는다. 이 희한한 삼각관계는 한참 후에 공개된 아나이스닌의 일기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났으며 이 세 사람의 삼각관계를 그린 내용을 영화화한 것이 바로 <헨리와 준>(Henry & June)이다.
영화 <Henry & June> 속 아나이스 닌(마리아 드 메데이로스 役)과
준 밀러(우마 서먼 役)
자신의 남편 휴고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아나이스 닌은 밀러와 사랑의 쾌락을 계속 누린다. 물론 아나이스 닌처럼 밀러에게도 배우자 준 밀러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이들에게 이러한 문제는 전혀 개의할 것이 못 되었다.
국내에서 번역된 아나이스 닌의 일기는 헨리 밀러와 준 밀러와의 관계가 한창 타오를 무렵이었던 1931년부터 이듬해까지 쓴 내용이다. 그녀가 쓴 일기는 총 13권으로 출간되었는데 대중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해준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아나이스 닌이 쾌락주의자가 된 이유
파격적이고 적나라한 성 묘사 때문에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금서 처분이 되었던 <북회귀선>의 작가 헨리 밀러와 그의 아내 준과의 은밀한 삼각관계 거기에다가 성관계 묘사가 여러 차례 등장하고 에로틱하게 느껴지는 표현을 구사하는 그녀의 문장력까지 더해져서 <헨리와 준>을 처음 접한 독자들에게는 ' 에로틱한 책 ' 으로 먼저 느껴지게 된다.
하지만 순전히 독자들의 관음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쓴 글은 아니다. 자신의 내밀한 성적 본능을 그저 충실히 표현하고 있을 뿐이며 성(性)과 관련된 그녀의 체험과 생각 뒤에는 여성으로써 가지게 되는 사랑의 감정이 반영되어 있다. 그녀가 쓴 문장 속에는 그녀의 세밀하고 섬세한 감정이 깃들어져 있다.
나는 들떠 있고, 기운차고,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완전하게 충실하기 위해서, 비밀스럽게 다른 누군가를 만나 지금처럼 관능적으로 살아가고 싶다. 나는 에로틱한 상상을 한다. 고독과 성찰, 글 쓰는 일은 원치 않는다. 쾌락을 원한다.
- <헨리와 준>, 아나이스 닌, 펭귄클래식코리아, p 273 -
아나이스 닌은 일기에서 자신을 성적 본능에 충실하는 쾌락주의자로 선언하기도 한다. 그러나 딱 이 문장만을 가지고 아나이스 닌을 헨리 밀러와 그 아내를 탐하는 양성애적 색(色)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쾌락주의자라고 규정할 수 없다.
그녀에게 섹스는 짜릿한 쾌감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욕구 충족의 행위이겠지만 이성에게 느끼게 되는 사랑의 감정은 배제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 휴고를 열정적으로는 사랑하고 있지는 않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그의 부드러운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강한 유대감 때문에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음으로써 그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아나이스 닌에게 헨리 밀러는 여성으로써의 성적 본능에 눈을 뜨게 해준 휴고의 성격과는 정반대인 정열적인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즉, 아나이스 닌은 휴고를 통해서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 를, 반대로 헨리 밀러에게는 성적 본능과 결부되는 에로스(Eros)를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준 밀러와의 동성애적 관계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어린시절에 사랑의 부재에 대한 가슴 아픈 기억에서 기인된 것이다. 특히 그녀는 정신과 의사인 알렌디 박사에게 어린시절의 경험을 고백하게 되는데 아버지로부터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원치 않았다. 그는 나에게 못생겼다고 말했다. 내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 내가 직접 해낸 거라고 믿지 않았다. 아홉 살 때 내가 거의 죽을 뻔했을 때을 제외하고, 아버지가 나를 귀여워해 주거나 칭찬해 준 기억은 전혀 없다. 나를 때리던 모습과 차가운 푸른 눈동자로 나를 냉담하게 쳐다보던 모습만 기억이 난다.
- <헨리와 준> 아나이스 닌, 펭귄클래식코리아, p 159 -
3~5세 무렵 여자 아이들이라면 겪게 될 엘렉트라 콤플렉스(Electra complex)를 아나이스는 정신적 성장에서 꼭 거쳐야할 중요한 과정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했다. 아나이스의 아버지는 어린 딸뿐만아니라 아내까지도 냉담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버지로부터 외면받게 되는 자신의 경험을 어머니의 상황과 동일시하게 된다.
이렇듯 아나이스 닌은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받아야 할 사랑의 부재가 평생 마음 속에서 자리잡게 되면서 누군가로부터의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어했다. 아나이스에게는 누구든 상관 없다. 오직 자신에게 사랑의 관심을 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휴고든 헨리 밀러 그리고 준 밀러이든간에 말이다.
사랑의 부재가 만들어낸 여성들의 트라우마
과거에서 비롯된 기억 하기 싶은 경험이 트라우마(Trauma)로 작용하게 되면 사랑의 감정에 대해서 그릇된 인식을 갖거나 인격적인 관계 자체를 회피하게 된다. 비록 사랑을 나눈다고해도 사랑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면 오래 가지 못하게 되는 법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네또츠까 네즈바노바>와 레드클리프 홀의 <고독의 우물>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역시 아나이스 닌처럼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서 정신적인 상처를 안고 있는 비운의 인물이다.
<네또츠까 네즈바노바>에 등장하는 동명 여주인공은 음악가였던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귀족 집안의 양녀로 살게 되었는데 네또츠까는 여전히 아버지의 충격적인 죽음과 부재로 인한 고통에 시달린다. 결국 그런 정신적인 고통으로 인해 귀족 집안의 딸로부터 동성애적 연분을 느끼게 된다.
<고독의 우물>의 스티븐 고든은 여성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캐릭터이다. 그러나 보수주의적 색채가 짙었던 19세기 말 영국 사회는 여성이라는 귀속 지위를 거부하는 그녀의 동성애적 태도를 인정하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 필립 경은 자신의 딸의 성적 취향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하지만 필립 경은 불운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그녀는 잠시나마 정신적인 혼란에 겪게 된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에 등장하는 한나는 앞에서 소개된 여주인공보다 비극적이다.
과거 나치 친위대 활동에 대한 지워지지 못한 기억 때문에 하루하루를 마음 속으로 괴로움을 삼키지만 그런 고통 속에서도 자신보다 한참 어린 마이클에게 그동안 채워지지 못했던 사랑의 감정을 충족시키게 된다.
한나는 마이클와의 섹스를 통해서 단순히 성적 쾌락을 얻으려고만 한 것은 아니었다. 뜨거운 사랑의 관계를 가지기 전에 한나는 항상 마이클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을 한다. 한나의 입장에서 책을 읽어주는 마이클의 행위는 단순히 글을 깨우칠 수 있는 하나의 지식 습득 과정 이상을 넘어선 정신적인 교감이 이루어지는 사랑, 즉 한나만이 느낄 수 있는 플라토릭 러브인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 한나는 나치 친위대 활동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으며 마이클이 자신에게 읽어주는 책의 수가 늘어 가고 사랑의 감정이 더욱 깊어질수록 자신을 바라보는 마이클의 사랑에 대해서 회의감과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마이클에게 한나는 어른들만 알 수 있는 성의 세계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으며 사춘기 시절에 충만한 성적 호기심과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해방구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사랑을 느낄 줄 아는 갈대이다
"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
파스칼의 <팡세>에 등장하는 이 유명한 구절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광대불변한 자연 속에서는 그저 가냘픈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이 유명한 구절은 ' 인간 ' 이라는 낱말 대신에 ' 여자의 마음 ' 을 넣어 사용하여 여자들의 표현하는 말로 시시때대로 사랑 감정의 변화가 잦아 이리저리 휘둘리는 여성들의 모습을 뜻하고 있다.
하지만 ' 여자는 마음의 갈대 ' 라는 구절 속에는 당시 남성 중심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여성차별주의적 산물이기도 하다. 거기에다가 ' 바람에 흔들리는 ' 이라는 말까지 붙여주면 여성은 바람기 가득하다는 그릇된 인식을 줄 수 있다. (여성보다는 남성이 바람기에 쉽게 흔들리기 쉬운 존재인데 말이다)
여성이 감정의 이끌림에 유혹받기가 쉬운 이유가 남성보다 감수성이 더 풍부하고 예민한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감정의 유형은 여성들에게만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남성은 여성의 이런 감정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남성은 이성이나 감정보다는 행동이 먼저 앞서기 때문이다.
아픔을 달래는 여자
고개 숙여 우는 그 여자
이 세상에 약한 것이
여자 여자 여자
당신 내 마음 몰라요
내 진정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 몰라요
때로는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도 하지만
그래도 오로지
나만의 남자 남자 남자
행복을 꿈꾸는 여자
사랑을 기다리는 여자
그런 여자 여자 여자
- 설운도의 노래 <여자 여자 여자> 중에서 -
지금까지 살면서 연애 한 번도 해보지 못해서 여자들의 어떤 특정한 감정에 대해서 딱히 뭐라고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내가 그나마 알고 있는 것은 여성의 성격과 감정 그리고 이성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선은 남자와 다르다는 것 그리고 이성 간의 교제를 통해서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공유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듣게 된 설운도의 ' 여자 여자 여자 ' 속 노랫말이 그런 여자들의 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 전에 내 귀에는 중년 아저씨들이 즐겨 부르는 트로트로만 들었지만 지금 다시 노랫말을 곱씹어보니 은근히 낭만적이다.
무엇보다도 이 유명한 히트곡은 부인과의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준 설운도 씨의 세레나데라고 한다. 부인과 심한 다툰 끝에 냉전을 유지하고 있던 시기에 설운도 씨는 갑자기 악상이 떠올라 하나의 노래를 만들게 되었는데 그 곡이 바로 ' 여자 여자 여자 ' 다. 완성된 노래를 부인에게 들려주자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내 생각이지만 여자는 ' 바람에 흔들려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갈대 ' 가 아닌거 같다.
(꼭 모든 여자들이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여자들이 사랑하는 이성에게 관심을 받기 위해서 이쁘게 화장도 하고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는 것처럼 언제나 자신에게 찾아올 사랑과 행복을 찾기 위해서 또는 이성에게 자신의 마음과 관심을 어떻게든 보여주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일종의 ' 구애 ' 방식이라고 생각된다.
여자는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랑을 느낄 줄 알고, 항상 사랑을 느끼고 싶어하는 갈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