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의 정치 성의 권리』
여성운동가이자 여성학자인 저자 5명이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 트랜스젠더, 퀴어, 성판매, 동성애, 에이즈, 팬픽 등을 이야기하며 한국 사회에서 기만되고 있는 성담론을 좀 더 현실적으로 역설하고자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낸(책소개) 이 책의 목차는 이러하다.
성적 차이는 대표될 수 있는가? 권김현영
괴물을 발명하라: 프릭, 퀴어, 트랜스젠더, 화학적 거세 그리고 의료규범 루인
성매매 피해 여성은, 성노동자는 누구인가? 김주희
엮어서 다시 생각하기 : 동성애, 성매매, 에이즈 한채윤
동성서사를 욕망하는 여자들: 문자와 이야기 그리고 퀴어의 교차점에서 류진희
쉽게 읽히지 않았고, 그래서 급하게, 빠르게, 거의 발췌독 수준으로 읽어갔다. 제일 관심이 갔던 분야는 ‘성매매’에 대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엥겔스의 아이디어에서 가장 문제적인 부분은 성매매를 문명 시대의 가족이 진정한 일부일처를 이룰 수 없도록 만드는 걸림돌로 간주하면서 결과적으로 매춘 여성의 존재를 가족이라는 단위와 완전히 분리된 ‘위협적인 개인’으로 분류했다는 점이다. 성판매 여성들의 존재는 흔히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없는, 울타리에서 벗어난 여자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실제 성매매 공간에서 많은 여성은 가족들 때문에 노동하고, 가족을 만들기 위해 노동하며, 가족한 함께 노동한다. (125쪽)
성매매에 있어 강제냐 자발이냐의 구분 자체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프레임 안에서 성판매를 지속하며 살고 있는 여성들의 만족스러움, 자존감, 희망 등이 읽힐 수 없다. 이들의 일상에 너무 큰 편견의 무게를 부여한 결과다. 사람들은 일상 속 자신의 노동에 대한 만족스러운 평가, 보상을 통해서 자존감이 높아지는 경험을 한다. 이에 대해 타인의 시선이나 자본주의적 보상체계에 너무 매몰되었다고 비판을 앞세우지는 않는다. 성판매 여성들이 자신의 노동을 일상적으로 의미화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들은 만족스러운 보상에 대해서 “좋은 기회였다”, “좋은 사람과의 만남이었다”라고 좋게 평가한다. (137쪽)
‘성매매’에 대해 생각할 때, 사람들이 제일 많이 하는 질문을 나도 똑같이 하게 된다.
1. 그 일 말고 다른 일을 할 수는 없었나요?
2. 그 일을 꼭 해야만 했나요?
결국은 같은 질문이다. 내가 하는 질문이란, 경제적 이유로, 먹고 살기 위해서 ‘성을 이용해야만 했느냐’는 것이다. 정확한 질문인지, 답을 얻을 수 있을 성질의 질문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것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일화가 생각난다.
강신주님의(오랜만에 불러본다, 강신주님. 내 근자에 너무 ‘필립 로스’만 사랑했네. 내 사랑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강신주님~~) ‘다상담’ 고민 사연 중 하나였는데, ‘전문 업소’에서 만난 여성을 사랑하게 된 남성의 이야기였다.
돈으로 ‘여성’을 구매하고, 그녀의 시간을 구매하고, 그녀의 ‘성’을 구매하며 비교적 규칙적인 만남을 가져오던 이 남자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후에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자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자신의 처지가 처지인지라, 둘의 사이는 말 그대로 ‘그대를 사랑하지만...’의 정도였는데... 아, 남자의 질문이 뭐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요는, 그런데도 사랑할 수 있다는 거다.
돈을 매개로 ‘성’을 구매하고, 제공하는 사이로 만났고, 남자가 원하는 특별한 ‘관계’를 위해 두 사람이 ‘관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여자를 사랑한 거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외롭고 쓸쓸한 남자에게, 어떤 여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웃어주고, 그리고 ‘사랑의 최대치’일 수도 있는 특별한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받아들여준다면, 남자는 여자를 사랑할 수도 있겠다.
여자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다. 돈 때문에, 남자가 자신에게 지불하는 돈이 필요해 그를 만났지만, 그 남자는 다른 사람처럼 그녀를 막 대하지 않는다. 강압적이지 않고, 그녀를 존중해준다. 아껴주고, 진심으로 사랑해준다. 그럴 때, 그녀 또한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게 된다.
이 부분은 조금 어렵다. ‘성판매 여성들이 자신의 노동을 일상적으로 의미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다.
2. 『행복한 페미니즘』
이런 책이 나오기를 오래도록 기다렸지만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내가 이 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11쪽)
고 자신있게 말하는 저자 벨 훅스는 이 책 첫 번째 장, 첫 번째 문단에서 페미니즘을 이렇게 정의한다.
간단히 말해,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이다. (19쪽)
이러한 정의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이런 정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정의에 따라 행동하는 여자들을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말하는 것이 왜 어려운 것이겠는가.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부터의 갖가지 차별과 차가운 시선이 두렵기 때문이다.
쏟아지던 질문이 그만 멈추고 마는 곳이 바로 여기다. 대신에 나는 페미니즘의 해악과 사악한 페미니스트들에 관하여 수많은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가령 “걔들이” 남자들을 어떻게 미워하는지, “걔들이” 본성 그리고 신에 대해 어떤 식으로 어깃장을 놓고자 하는지, “걔들이” 어떻게 하나같이 레즈비언인지, “걔들이” 어떻게 다들 직장을 잡아 가지고는 백인 남자들의 밥그릇을 빼앗아 세상 살기 힘들게 만들어 놓는지. (7쪽)
그런 의미에서 알라딘의 “나는 페미니스트다” 키링은 가히 ‘혁명적’ 시도다.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문구가 그렇고, 그 키링을 사은품으로 제작했다는 것이 그렇고, 그 키링이 인기폭발이었다는 것이 그렇다. 아쉬운 건 ’페미니즘‘ 도서를 처음에는 2만원이상, 이틀 후에는 3만원 이상 구매해야 ’나는 페미니스트다‘ 키링을 받을 수 있다는 건데, 근래 알라디너들과의 만남에서 ’만남의 정표‘였던 그 키링이 나만 없어 우물쭈물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성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은 세계 도처에서, 방방곡곡에서,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착취와 억압은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어 왔기 때문에 이제는 ‘억압’의 부정적 느낌을 제거한 채, ‘문화’의 이름으로 작동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한 부정과 저항은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성차별주의의 최대 수혜자인 남자들에 의해, 수혜자의 한쪽 축에 서 있는 일단의 여자들에 의해 거부되거나 부정된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의 젊은 세대 흑인 여자와 유색 인종 여자들은 백인 여성들의 인종주의에 도전했다. 우리의 선배 흑인 여성 동지들과는 달리 우리들 대부분은 압도적으로 백인 중심적인 환경에서이지만 어쨌든 함께 교육을 받았다. 우리는 백인 여성과의 관계에서 결코 종속적 지위에 있지 않았다. 우리는 결코 얌전하게 주어진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여성 운동권 내에서의 인종주의와 백인 우월주의를 비판하는 데에는 우리가 적임자였다. .... 인종은 가장 명백한 차이였다. (131쪽)
그 당시 인종주의와 인종적 차이의 현실을 대면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백인 여성들은, 우리가 인종을 끌어들임으로써 페미니즘을 배신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 우리는 백인 여성들이 백인 우월주의를 벗어 던지지 않는 한, 페미니즘 운동이 근본적으로 반인종주의 노선을 견지하지 않는 한, 백인 여성과 유색 인종 여성 사이에 진정한 자매애는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133쪽)
차별에 대한 항거의 범위 및 주체가 지속적으로 확대된다는 점, 즉 백인 여성, 유색 인종 여성, 어린이, 장애인,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이 처한 불합리와 차별에 맞선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발전 과정 자체는 민주주의 발전 및 확산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추천도서를 하나 발견했는데, 저자가 자신의 책을 추천했다. “결국 내가 이 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한 사람답다.
『페미니즘 : 주변에서 중심으로』
3.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한때 여러 커뮤니티에서 칼로 절반씩 잘라놓은 도넛 여러 개가 상자 안에 담긴 사진 딱 한 장만이 실린 게시물이 이곳저곳 떠돌았다. 본문에는 어떤 설명도 없고 그저 “여직원들에게 도넛 한 판 사줬더니”라는 제목이 전부였다. 많은 사람들이 ‘다이어트를 핑계로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않고, 사준 사람의 성의를 무시하는 여직원들’을 힐난했다. 그러나 해당 도넛 사진을 구글 이미지 검색 서비스로 검색해보면, 사진의 출처는 엉뚱하게도 외국의 한 유머사이트인 것으로 나타났다. 여직원들에게 도넛을 사준 사람도, 도넛을 먹은 사람도 없다. 이 사건은 여성을 원색적으로 비난한 댓글을 모아 “사진 한 장으로도 여성 혐오가 가능”이라는 게시물이 만들어지면서 폭로되었다. (27-8쪽, <김치녀와 벌거벗은 임금님들>, 윤보라)
문제의 본질은 ‘사건의 실체’가 아니라 ‘사건의 편집’이다. 여성 혐오의 주장 혹은 생각이 사진 한 장을 통해 생산되고, 아무런 확인 없이 재생산될 때, 여성 혐오의 대상은 ‘사준 사람의 성의를 무시하는 특정한 여직원들’이 아니라, ‘여자들, 다이어트를 핑계로 음식을 소중히 다루지 않는 모든 여성들’이 되는 것이다.
‘여성 혐오’에 대해 생각할 때, 나는 여성이 ‘약자’이며 동시에 '소수'이기 때문에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고 생각해왔다. 요즘도 취업과 결혼으로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이 많이 있지만, 외국인의 숫자가 더 많아진다면, 한국인과의 혼혈 2세들의 숫자가 지금보다 더 많아진다면, 그들의 사회적지위가 상승하게 된다면, ‘여성 혐오’는 ‘외국인/ 혼혈한국인 2세 혐오’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남과 북이 하나로 통일되면, 이러한 혐오는 ‘북한 주민들에 대한 혐오’로 발전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현재로서는 ‘여성’이 약자이지만 곧 강자로 변모할 수 있기 때문에 바로 이 시점에 ‘여성 혐오’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성은 ‘소수’가 아니다.
여성은 소수가 아니라 세상의 절반이다. 여성은 외국인도 아니고 무임승차자도 아니다. 여성은 위협적이거나 위해를 가하는 외부인이 아니라 돌봄을 주로 하는 내부자다. 그럼에도 여성 혐오는 이 모든 혐오에 유비적 토대를 이루고 있다. (58쪽, <주체화, 호러, 재마법화>, 임옥희)
이에 더해서 임옥희는 “여성은 힘이 없었기 때문에 혐오의 대상이었던 것이 아니라 여성이 갖고 있었던 힘 때문에 혐오와 매혹의 대상이었다.”고 말한다. 혐오에 겁먹지 말고 한때 여성이 가졌던 힘을 되찾자고 말한다. 지금, 여기서, 다시 메두사의 ‘마법적’인 힘을 되찾자고 말이다. (88쪽)
‘메카니즘’이라면, ‘사물의 작용원리나 구조’를 말하는 것이고, 심리적으로는 ‘어떤 행위를 성취하는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심리과정’을 말한다. (네이버 국어사전) 아이들하고 이야기할 때, “아, 이 놀라운 메카니즘이라니...”라며 가끔씩 이 단어를 사용하는데, 비슷한 상황에서 아롱이가 이 단어를 사용하려 했나 보다. 아롱이가 “아, 이 0000이라니”라고 말할려고 하는데, 마침 생각이 안 난다. 그래서, 네 음절이면서, 이와 비슷한 단어를 떠올리다가 이렇게 말해버린다.
“아, 이 놀라운 페미니즘이라니!!!”
딸롱이와 나는 마주보며 웃음을 빵! 터뜨리고, 누나와 엄마를 웃겼다는 생각에 아롱이도 같이 웃는다. 아, 요즘에 내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너무 많이 사용했나보다.
나는 예전에도 지금도, 무슨 일에도 완전 열심히 한 적이 없는데.
교과서와 참고서다.
아, 이 놀라운 페미니즘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