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및 전자전기기구는 어느새 우리 가족의 실생활을 잔인하게 점령해버렸기에 행복한 겨울방학을 맞이하여 스마트폰, 아이패드, 노트북 사용 시간을 제한하기로 했다. 노트북을 켜서 한글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도 전자기기 사용에 해당되기에, 이제 ‘공통 시간’과 아롱이의 ‘게임 시간’에만 노트북을 사용하게 될 텐데, 심각한 유튜브 중독자인 내가 올 겨울에 얼마나 책을 많이 읽게될지 새삼 기대가 크다. 독서의 시간과 유튜브의 시간 중 어떤 것이 작심삼일의 희생자가 될는지. 기대만발! 개봉박두!
1. 올해의 소설 : 엘레나 페란테
페란테의 소설을 한글로, 영어로 1번씩 읽었으니까 총 8권의 페란테를 읽었다. 짧지 않은 시간을 이해하기 어려운 릴라와 답답한 레누 그리고 미친 엑스 니노와 함께했다. 이탈리아 작은 마을에서부터 시작해 험난한 역사의 격랑을 따라갈 때, 나는 한껏 매료되었다. 역사적 상황과 맥락을 다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이야기에, 이 이야기에 나는 사로잡혔다. 올해의 소설은 페란테다.
But when he went out to sea I didn‘t feel able to follow, I returned to the shoreline to watch apprehensively the wake he left, the dark speck of his head. I became anxious if I lost him, I was happy when I saw him return. In other words I loved him and knew it and was content to love him. (220)
2. 올해의 페미니즘 : 가부장제의 창조
재작년부터 이어지는 페미니즘 서적 출간 붐에 올해에도 읽을 책, 읽어야할 책, 읽고 싶은 책이 많았다. 가부장제의 창조, 캘리번과 마녀, 혁명의 영점,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백래시, 페미사이드, 그리고 남근선망과 나쁜 감정들을 찾아 읽었던 게 보람된 일이다.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그 중에 한 권만 고르라면 『가부장제의 창조』를 고르고 싶다. 20년만의 재출간이기도 하고, 가부장제의 역사적 근원에 대한 추적이 정말 대단했다.
다른 인간존재를 잔인하게 대하고 그/그녀에게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노동을 하도록 강제하는 것보다 한수 높은 중요한 발명은, 지배당하는 집단을 지배하는 집단과 완전히 다른 집단으로 지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물론 그런 차이는 노예가 될 사람들이 타지방 부족구성원, 말 그대로 ‘타인들’일 때 가장 명백하다. 그러나 그 개념을 확장하고 노예화된 사람들(the enslaved)을 어떤 면에서 인간이 아닌 다른 것,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 남성들은 그런 지정이 실제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정신적 구성물은 대체로 어떤 현실 속의 모형들에서 나오며, 과거경험을 새롭게 정렬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그 경험은 노예제가 발명되기 이전에 남성들에게 주어졌던 것인데, 그것은 바로 자기 집단의 여성들을 종속시켰던 경험이다. (139쪽)
3. 올해의 기억하고 싶은 책 : 동화 쓰는 법
올해의 기억하고 싶은 책은 동화 쓰는 법, 랩걸,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선언을 꼽고 싶다. 특히 동화 쓰는 법은 친구와 동생들에게 독서 교육을 핑계로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아이는 부모를 부정하고 극복하면서 자란다. 햇빛을 향해 자라나는 덩굴처럼, 자식은 안간힘을 다해 부모의 그늘과 반대 방향으로 자란다. 그래야 억세고 푸른 줄기로 자라날 것이다. 부모의 마음은 쓸쓸하지만, 이는 축하할 일이다. 아이는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64쪽)
그렇다고 삶이 한없이 불행한가? 그렇지는 않다. 걱정이 있고 아쉬움이 있지만, 괜찮다. 내일이 오는 게 싫지 않다. 여태 그렇게 당하고도, 내일은 조금 나을지 모른다는 기대도 없지 않다. 정말 괜찮다. … 언제나 그런 건 아니다. 눈앞이 깜깜하고 사방이 절벽인 때도 있다.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날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그것에 관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나는, 우리는. (123쪽)
4. 올해의 마지막 책 : 역사의 역사, 사실들
올해의 마지막 책으로는 좀 달콤하고 상큼한 연애소설을 읽고 싶었는데, 26일, 27일이 허망하게 지나가버렸다. 마음은 급하고 책을 고를 시간도 없어 서둘러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와 필립 로스의 <사실들>을 펼쳤다. <사기>에 대한 설명이 너무나 열정적이라 제일 만만하다는 <사기열전>, 게다가 집에 비치되어 있는 그 <사기열전>에 도전해볼까 잠시 생각해본다.
언제나 내게 최고의 작가, 필립 로스를 읽는다. 대학교 4학년의 로스가, 일주일에 최소 두 권씩 ‘시초부터 현재까지의 영문학 독자적 읽기’를 수행하는 ‘세미나’ 수업을 들으며, 비평을 쓰고 수업 중에 발표하는 장면을 읽고 있다. 스무 살의 로스,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돈이 아닌 정신이라고 확신하는 젊은 작가 로스, 여자 친구와의 성적 모험에 탐닉하는 로스를 읽는다.
5. 올해의 각성 : 밥보다 일기
영원한 것은 없더라고요. 한때 잘나가던 싸이월드가 없어졌습니다. 제 초등학교 동창들이 모였던 ‘프리첼(freechal)’도 유료화 여파로 사라졌습니다. 제가 처음 글을 쓰던 ‘드림위즈’도 없어졌습니다. 무려 8년이나 거기다 글을 썼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예외적인 사례라고 생각하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은 막강한 제국처럼 보이는 페이스북이 20년 후에도 건재할까요? … 저도 드림워즈가 없어졌을 때 그 홈페이지에 있던 글들을 새로 장만한 곳으로 옮기려 했습니다. 근데 한 300개 정도 옮겼을 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걸 언제 다 옮기냐?’
결국 저는 ‘앞으로 글을 더 멋지게 쓰자’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기존 글을 사장시켰습니다. (94쪽)
이 문단을 읽고 이삼일간 진지한 고민에 빠졌더란다. 정말 알라딘이 없어지면 어떻게 하지? 알라딘서재 없어지면 어떡하지? 내가 쓴 글, 내가 달았던 댓글, 내 글에 달린 댓글, 댓글에 달린 대댓글, 대댓글에 달린 대대댓글들 다 어떻게 하지? 결론은 의외로 평범했는데, ‘알라딘이여! 영원하라!’ 혹은 ‘그래서 책은 꼭 알라딘에서만 사기로 했습니다’였다.
글을 쓰는 건 혼자 하는 일이라 탁탁 자판을 누를 때는 별다른 생각이 없고 별다른 생각을 불러 일으킬거라 생각하지 않지만, 글을 써서 노트북에 고이 보관하지 않고 이렇게 공개한다는 건 어디까지나 ‘읽힐 수 있다는 가능성’ 혹은 ‘읽어주었으면 하는 희망’을 전제로 할 것이다. 좋지 않은 글에도 ‘좋아요’를 눌러주시고 다정한 댓글을 달아주시는 알라딘 이웃님들이 계셔 나의 글쓰기는 2018년 한 해에도 즐거웠다. 1년에 300일 넘게 명랑한 나이지만 가끔씩 고민과 걱정, 불안과 무기력이 침공해올 때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알라딘 이웃님들 덕분에 다시 웃고 다시 읽고 다시 쓸 수 있었다. 감사하다는 말을 평소에도 많이 해야겠지만, 특히 이런 시간, 1년을 다 보내고 그리고 이 해의 2-3일을 남겨둔 이 시간 앞에, 고맙다는 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알라딘 이웃님들!
올 한 해도 이모저모로 감사했습니다.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눈 시간들에 고마운 마음 뿐입니다.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부탁을 드리고, 제 사랑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