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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짓기 - 생명진화의 은밀한 기원 ㅣ EBS 다큐프라임 <생명, 40억년의 비밀> 2
김시준.김현우,박재용 외 지음 / Mid(엠아이디)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생명, 40억년의 비밀. EBS 다큐프라임 시리즈 두 번째 책. 생명진화의 은밀한 기원, 짝짓기.
자연계에 존재하는 가장 신비하고 경이로운 남과 여에 관한 이야기를, 종의 보존 즉, 생존을 위한 진화의 코드로 설명한다. <들어가며>에서부터 감동적이다.
짝짓기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다. 수컷은 암컷의 선택을 받기 위해 같은 종의 수컷과 경쟁한다. 암컷은 더 나은 수컷을 선택하기 위해 같은 종의 암컷과 경쟁한다. 암컷은 수컷을 선택하고 수컷은 암컷을 선택한다.
짝짓기는 애정이다.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애초에 유전자를 서로 교환하기 위해 시작된 짝짓기지만 많은 동물에서 짝짓기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거의 평생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는 늑대의 경우도, 난교를 즐기는 보노보의 경우도, 페로몬으로 서로를 유혹하는 곤충의 경우도 짝짓기는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발전한다. (<들어가며>, 5쪽)
성은 왜 생기게 된 것일까. 수컷은 왜 선택받으려 하고, 암컷은 왜 선택받으려 할까. 성은 나름의 역할이 있는 걸까. 아니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걸까. 짝짓기가 먼저일까, 아니면 애정이 먼저일까. 성은 도대체 무엇일까.
성이란 무엇인가. 성은 감수분열meiosis이며 동시에 유전자 재조합genome recombination이다. 성은 한 개체가 다른 개체와 유전자를, 또한 DNA를 섞는 것이다. 두 개체의 유전자를 섞기 위해서 일단 내 것을 포기해야 한다. ... 세포 분열하면서 염색체도 정확히 반을 나눈다. 이제 나는 반쪽의 내가 된다. 그리고 다른 반쪽을 기다린다. 그 반쪽이 다가온다. 두 반쪽은 기꺼이 하나의 세포가 된다. 두 핵이 모여 하나의 핵이 된다.... 이제 반쪽의 나와 반쪽의 타인이 만나 나도 아니고 타인도 아닌, 내가 아닌 것도 아니고, 타인이 아닌 것도 아닌 새로운 타인 ― 내가 된다. (8쪽)
이 책에 의하면, 성의 애초 목적은 번식도, 유전적 다양성도, 쾌락도 아니다. 진화의 다른 결과물처럼 성도 그 목적이 없다. 진화의 과정 속에 성이 생겨났고, 그것이 좋은 돌연변이의 전파와 유전적 다양성을 가져오고, 나쁜 돌연변이 제거에 효과적이었으며, 면역체계를 유지, 보수 및 최신화에도 유리했기에 성을 가진 생물들이 살아남아 현재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진화에는 목적이 없고, 성도 마찬가지다,라고 이 책은 말한다.
생물을 암수로 나눌 때의 구분법은 생식세포의 크기다. 염색체의 절반만을 넣어둔 아주 작은 크기의 생식세포(정자)를 만드는 쪽은 수컷이고, 유전자의 절반과 함께 수정된 후 하나의 개체로 발생할 때 필요한 영양분과 세포기관 등을 갖춘 큰 크기의 생식세포(난자)를 만드는 쪽이 암컷이다.(53쪽) 짝짓기를 하고 이를 통해 후손을 남기는 긴 타협의 시간 동안, 왜 정자는 작은 크기의 운동성을 갖춘 형태로 발전했는지, 왜 암컷은 난자를 많이 만들기보다는 더 많은 에너지를 가진 소수를 만드는 쪽으로 진화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또한 교미를 빼곤 신체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관인 페니스가 각 동물별로 어떤 식으로 발전했는지, 왜 교미 중에 오르가즘을 느끼는지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짝짓기를 하는 동안 둘은 무방비 상태가 되고 외부 천적의 위협에 완벽하게 노출됨에도 불구하고, 왜 오르가즘이라는 극도의 흥분 상태에 도달하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을 들을 수 있다. 63쪽이다.
크기가 클 뿐만 아니라 영양분과 세포기관을 갖춘 난자를 만들어내는 암컷은 임신과 출산 후에는 새끼를 도맡아 키우는 경우가 수컷보다는 훨씬 더 많다.(65쪽) 암컷으로서는 임신 자체가 위험한 모험일 수밖에 없다. 임신기간 뿐만 아니라, 출산 후 새끼가 일정한 크기로 자랄 때까지 자신과 새끼의 생존을 위해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 암컷이 수컷을 선택할 때 신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암컷은 자손에게 강건한 신체를 물려줄 좋은 유전자를 가진 수컷을 선택한다. 이것에는 예외가 없다. 어떠한 동물의 암컷도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좋은 유전자를 가진 수컷이다.(66쪽)
수컷은 수컷 나름대로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사마귀 수컷은 교미 도중 암컷의 먹이가 되기도 하고, 나비는 정자가 들어있는 주머니인 정포를 암컷에게 바쳐 암컷이 수정하고 알을 만드는데 충분한 영양분을 제공한다. 여치 역시 사정 때마다 암컷에게 정포를 제공하면서 암컷이 다른 수컷에게 가지 못하도록 한다. 제일 흥미로운 곤충은 유럽풍선파리Hilara maura인데, 이들은 암컷에게 짝짓기를 하러 갈 때 작은 곤충을 잡아서 가지고 간다. 곤충 선물을 암컷 앞에 흔들며 춤을 추며 구애한다. 암컷이 허락하면 수컷은 암컷이 그 선물을 먹어치우는 동안 짝짓기를 하는데, 어떤 녀석들은 교미를 더 오래하기 위해 선물을 포장하기도 한다고 하니, 수컷들의 치열한 투쟁이 눈물겹기도 하다.
하지만, 이 친절한 EBS Media 기획팀(이 책의 공동저자들)은 다르게 말한다.
여기까지 읽으며 수컷으로 살기 참 팍팍하네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겠다. 사실은 그래도 암컷이 더 힘들다. 수컷이 주는 먹이 혹은 영양분이라고 해봤자 암컷이 알을 낳고 기르는 과정에서 소비하는 에너지와 시간에 비하면 어림없다. 하루 종일 살림하고 애보고 녹초가 된 아내에게 집에 와서 설거지 한 번 정도하고 유세떠는 식인 것이다. (71쪽)
<짝짓기가 뭐라고>라는 챕터에서는 목숨을 내놓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산란 후 삶을 마치는 암컷 수컷 연어의 삶과 정자기계처럼 단 한 번 결혼비행을 통해 여왕벌과의 교미를 마치자마자 ‘폭발’해버리는 수벌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고, 인간 뿐 아니라 동물과 식물에서도 나타나는 영아살해와 낙태의 예를 볼 수 있다. <성적 강압, 강간>에 대한 꼭지에서는 성적 강압이 지배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여러 동물들의 실례가 소개되는데, 지구 내 최상의 문명을 이룩했다고 자신하는 우리 인간 사회와 너무나 많이 닮아있어 놀라울 뿐이다.
곤충 중에서 대표적인 강간범으로는 밑들이벌레가 있다고 한다. 영어로는 scorpionfly라고 하는데 전갈의 독침과 비슷하게 생긴 수컷의 생식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곤충들은 짝짓기를 위해 암컷에게 선물로 먹이를 가져다주는데, 먹이를 구하지 못하면 그냥 암컷을 포박해버리고 강제로 교미를 한다. 암컷 역시 이런 수컷의 정자가 난자에 닿지 못하도록 조처를 취하도록 진화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파렴치한 수컷은 왜 사라지지 않을까? 그 답이 또한 의외다. 애초에 강간범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암컷들이 파렴치한 수컷의 정자를 수정시키지 않는다면 당연히 그러한 수컷들의 유전자가 후대에 전해지지 않으니 사라져야 할 것 같은데 현재도 건재하다. 즉 이것은 애초에 강간범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란 걸 말해준다. 선물로 줄 먹이가 있으면 먹이를 주고 교미를 하지만 선물로 줄 먹이가 없을 때 암컷이 나타나면 불문곡직하고 강간을 해버리는 것이다. 대부분 실패로 끝나지만 열에 하나 성공한다면 수컷 입장에서는 손해가 아니라는 것이다.(112쪽)
육상에 사는 포유류 중 하나인 ( )의 예도 있다.
( )의 경우 난교형 무리인데 최상위 수컷alpha male이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기 위해 폭력을 휘두른다. 물론 아래 서열의 수컷과 암컷 모두가 최상위 수컷의 폭력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암컷에겐 대단히 불행하게도 다른 서열이 낮은 수컷들도 암컷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때 수컷들의 폭력은 암컷이 다른 수컷과 교미를 하지 못하게 예방하는 의미를 가진다. 무리 밖의 다른 수컷과 교미를 하면 맞는다는 의미. 또한 자신이 교미를 요구할 때 교미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다. (118쪽)
차분히 읽어보면 괄호 안에 들어갈 말은 유인원들 중 하나인 고릴라, 침팬지 혹은 오랑우탄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겠으나(정답은 ‘침팬지’다), 큰 주위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괄호 안에 ‘인간’을 넣고 싶은 충동을 느낄 만도 하다. 영장류 강간에 대한 설명도 그렇다. 자꾸, 만물의 영장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종이 생각난다.
영장류의 강간에서 보자면 오히려 번식은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영장류의 수컷에 의한 강간과 성적 강제, 강압은 명백한 목표가 있다. 그것은 무리 내에서 사회적 지위 문제와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다. 돌고래나 침팬지 등에서 나타나는 성적 강제 혹은 강간은 다른 방법이 없어서 이루어지는 교미의 수단, 혹은 번식의 수단이라기보다는 무리 내의 서열을 확고히 하고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인 것이다. ... 인간의 예를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그 개인적 동기는 번식과는 무관하며 사회적 지위에 대한 욕구나 박탈감 혹은 가학적 쾌락 등으로 변이되었다. 그리고 그 행위 또한 본능이 이끄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된 과정이다. (120-121쪽)
가족 형태에 대한 탐구 역시 흥미롭다. 포유류의 경우 90% 이상이 일부다처제이고, 대규모 떼를 형성하는 물고기들이 다부다처형이다. 포유류의 경우 다부다처형은 흔히 난교형이라고도 하는데, 사자, 침팬지, 보노보의 경우다. 동물의 세계에서 일처다부는 흔하지는 않은데, 일처다부형의 특징은 육아를 수컷이 도맡아 한다는 것이다. 신세계 원숭이의 일종인 타마린 속에 속하는 원숭이들이 그렇다. 일부일처제는 포유류에서는 드물고 오히려 새들의 경우를 살펴봐야 한다. 새들의 경우 전체의 90%가 일부일처제를 선택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알에서 깨어난 후 돌봐야 하는 시간 동안만이다. 표지의 주인공 황제펭귄이 대표적인 예다. 남극의 긴 겨울 동안 이들은 짝을 지어 알을 낳고 부화시키고 키운다. 새끼가 독립하면 이들의 부부관계는 끝이다. 막내 아이의 대학 입학 때까지만 이혼을 유예한다는 근자의 이야기가 생각나는 지점이다.
유전자 차원에서 그리고 진화론적으로 가장 가까운 동물은 침팬지와 보노보인데, 이들과는 구별되는 인간 성의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숨어서 섹스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암컷의 배란기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는 일정한 시기가 되면 여자가 폐경을 한다는 점이다.(220쪽) 이 책에서는 인간 여성에게 발정기 신호가 없어진 것은 상호 신뢰와 정서적 혹은 감정적 교류의 강화 때문이라고 본다. 발정기 신호가 없어짐으로 해서 수컷은 암컷을 감시하기 힘들어졌다. 흔히 구석기 시대라고 하는 시대에, 주변에 다른 남자들도 있는 상황에서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며, 더구나 내 여자의 발정기가 언제인지도 모를 상황에서, 인간 남자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수컷은 육아와 먹이 구하기를 암컷과 함께 함으로써 암컷이 자식을 기르는 과정에 커다란 도움이 되고 이를 통해 다른 수컷과의 교미에 대한 필요성을 감소시키려 했다.(225쪽) 현재에 그 해결책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할지라도, 선택 그 자체로 보아서는 잘한 선택이다. 훌륭한 선택이다.
이 책은 너무 재미있다. 서로의 유전자를 섞고 그를 통해 촉발되는 변이, 수컷의 눈물겨운 노력, 암컷의 숭고한 희생, 여자친구를 위한 곤충의 곤충선물, 거침없는 물고기의 체외수정, 혼자서도 할 수 있다 도마뱀의 처녀생식, 육체파 고릴라의 성적 억압, 시도 때도 없이 성을 탐닉하는 보노보, 그리고 자기는 안 그런 척 옷을 입는 인간의 성에 대한 가감 없는 관찰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책을 읽으며 얼마나 큭큭댔던지, 간만에 정숙하게 숙제를 하고 있는 아들을 의도치 않게 방해하고 말았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웃기냐며 책을 빼앗아간 아들이 펼친 페이지에는 개구리의 짝짓기 사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생명, 40억년의 비밀,을 알고 싶은 분들에게는 부담 없이 읽으시라 권하고 싶지만, 오늘날 이 시대, 이 사회에서 수컷의 위상에 대해 불만이 있는 분들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다. 내가 큭큭대며 웃었던 여러 대목에서, 불끈 화가 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수컷의 생산력이 가족 전체의 부양이라는 책무를 감당하기 힘들었을 옛날에 암컷을 마냥 가두고 있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고, 무리 내에 살면서 다른 이들과의 교류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수컷과 암컷이 같이 자식을 기르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만드는 것이 최선이었으리라. 이것을 모르는 수컷, 남성이 아직도 있기는 하지만. (2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