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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절판




한참 아이들과 영어책, 그중에서도 챕터북을 신나게(?) 읽어나갈 때의 일이다. 그때도 이미 읽을 만한 챕터북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수입되고 있어서, 만약 어떤 엄마가 아이에게 영어책만 읽히겠다고 작정(?)을 한다 해도 그게 가능할 정도였는데, 그러다 보니 그 많고 많은 영어책 중에서 내 아이에게 맞는, 내 아이가 흥미를 느낄 만한 영어책을 찾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읽을 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읽을 책이 너무 많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영어유치원은 물론이고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영어 학원에 다니는 것이 자연스러운 나라에서, 영어 학원을 보내지 않겠다고 결심한 한 엄마는 그렇게 아이가 관심을 가질 만한영어책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림책을 웬만큼 읽었지만, 두꺼운 소설책을 읽기에는 아직 부족한 아이에게는 챕터북이라는 징검다리가 있었는데, 그에 속하는 책들 역시 어마어마한 양을 자랑했다. 더욱이 큰아이는 여자아이가 주인공인 내용에 감흥을 느끼지 않았고, 말괄량이가 주인공이면 더더욱 공감하지 못했다. 학교생활의 이런저런 에피소드에도 크게 관심이 없어서 그런 책들을 제하고 나니 이런 종류의 책들만 도전이 가능했다. 동물이 주인공인 책들 혹은 판타지물. 그렇게 우리는 힘겹게 네게 딱 맞는챕터북을 찾아 헤매었다. 내용을 알아야 추천할 수 있으니, 전부는 아니지만 이런저런 책들을 나도 같이 읽었다.

 


그중에 오래 기억에 남는 책이 있는데, 그건 바로 댄 그린버그의 <Zack Files> 시리즈의 첫 번째 책 <잭의 미스터리 파일 1 : 벽장 너머의 세계>이다. 화장실 수납장을 열게 된 잭, 그 속에서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발견하고, 그 너머에, 화장실 수납장 너머에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평행 우주. 평행 우주론의 어린이 버전이다. 평행 우주, ‘우리가 속한 우주가 아닌 또 다른 우주 세계가 존재한다는 건 어디까지나 가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세계가 아닌 평행선상에 위치한 곳에 존재하는 다른 우주. 같은 시간을 공유하지만, 공간과 차원이 다른 수없이 많은 우주. 그리고 그 우주에 살고 있는 나. 혹은 로 보이는 어떤 존재.

 

 


열여섯 혹은 열일곱 살의 소년이 만나 사랑을 느끼게 된 열다섯 살의 소녀는 어느 날 갑자기, 소년의 인생에서 사라져 버린다. 버려진 느낌과 황당함, 슬픔과 외로움을 담담히 감당하던 소년은 소녀가 말해주었던 그 도시를 찾아 떠나고, 그곳에서 그렇게 그리던 소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예전의 연인을 매일 만나면서 그는 그곳에서 잠시 편안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자신에게서 떨어진 그림자의 죽음이 다가오면서 고뇌에 빠지게 된다.

 


소년이 그리던 삶은 여기에 있다. 매일 소녀의 얼굴을 볼 수 있고, 소녀가 내려주는 쑥색 약초차를 마시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일과를 마친 후에는 소녀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삶.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이 바로 이 세계에 있다. 도시의 불확실한 벽, 높고 두터운 벽 안쪽에, 그가 원하는 삶, 그가 바라던 삶이 있다. 하지만, 소년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내가 만나는 소녀, 나와 함께하는 이 소녀는 실체일까. 혹 이전 세계에서 만났던 그 소녀가 실체인 것은 아닐까. 지금의 나는, 혹시 허구가 아닐까. ‘에게서 강제로 떨어져 나가 이제 곧 숨을 거두게 될 그림자가 나의 진정한 실체인 건 아닐까. 소년은 그림자를 살리기로 결심하고 자신은 그 불확실한 벽 저쪽의 도시에 남아있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그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오고 만다.

 


이쪽 현실세계에서 그는 중년에 접어든 특징 없는 남자다. 지방의 작은 도서관의 도서관장으로 일하게 된 그에게 이제 새로운 우주가 열린다. 매일 같은 옷을 입고, 걸어서 출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장을 보고 청소를 하고 다림질을 한다. 신비로운 존재인 이전 도서관장 고야스 씨와의 만남을 접점으로 그는 옐로 서브마린 요트파카 차림의 소년 M**와 더욱 가까워지고, 그를 통해 도시에 대해 듣게 된 서브마린 소년은 바로 그곳, 불확실한 벽 안쪽으로 가고 싶어 한다. 그의 임무였던 오래된 꿈 읽기, 도서관에서 보내는 일상을 서브마린 소년은 원한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장자의 호접몽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평범하면서도 담백한 하루키의 문장들은 하나의 의문, 하나의 질문으로 나를 이끌어간다. 어떤 세계가 진짜일까. 어느 세계 속의 내가 진짜일까. 내 행세를 하는 저 그림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요구되는 특정한 기대나 사회가 원하는 일정한 역할의 수행자로서의 가 아니라, 그냥 나. 나는 어떤 존재일까. 소설 속 고야스 씨는 자신을 단순한 일개의 통과점으로 본다(380). 부모에게서 한 덩어리의 정보를 물려받아 자기 나름의 수정을 더해 자기 아이에게 물려주는 존재, 긴 쇠사슬의 고리 하나(380)로서 말이다.

 


700쪽이 넘는 두꺼운 소설을 따라 읽어가면서도 누가 진짜인지 확신할 수가 없다. 불확실한 벽 저쪽의 도서관장이 진짜인지, 불확실한 벽 이쪽의 오래된 꿈 읽는사람이 진짜인지. 하지만, 이쪽 아니면 저쪽, 이 세계 아니면 저 세계를 고집하던 나의 옹졸함은 어느 틈엔가 사라져 버린다. ‘하나도 빠짐없이 네 것이 되고 싶다던 소녀(110), 당신과 다시 한번 하나가 되고 싶다던 그림자(153), 그리고 본래에 가까운 당신 자신이 되기 위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서브마린 소년(722)은 하나로 연결된다. 나는, 갑자기 사라져 버린 열다섯 살의 소녀이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며 애원하는 그림자이며, 하루종일 책만 읽는 그 서브마린 소년이다. 불확실한 벽 저쪽의 내가 인 것처럼, 불확실한 벽 이쪽의 나 역시 이다. 두 세계에 모두 속하는, 혹은 속하지 않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 그 찰나, 지금 현재만이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고, 이 세계와 저 세계로의 나의 낙하를 받아줄 이는 바로 나, 나 자신뿐이다.

 

 


외출할 때도 굳이 이 두꺼운 책을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섰는데, 다음, 그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고만고만한 아이들과 씨름하는 순간마다 도서관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소설 속 중년의 가 만나는 새로운 우주 역시 도서관이다. 이곳은 안전하고, 시간이 멈춘 곳이고, 그리고 나의 낙하를 받아줄 이가 기다리는 곳이다. 내가, 나를 기다리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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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2-29 10: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일곱번째 좋아요를 누른 사람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책의 리뷰를 단발머리 님이 써주실 줄은 몰랐는데, 뜻밖이라 그런지 더 좋네요. 저는 아직 절반도 못읽었는데 음, 리뷰를 쓴다면 이 방향이다, 라고 혼자 정한 건 있거든요? 그 방향과 단발머리 님의 리뷰가 너무나 달라서 또 놀라고 즐겁습니다. 감상은 역시 독자의 몫이구나 싶고요. 초반에 힘겹게 읽다가 어느 순간부터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되어서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단발머리 님의 리뷰도 아주 즐겁게 읽었습니다!!

단발머리 2023-12-29 10:33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이 좋아요,를 누르신 여섯분들과 이 영광을 ㅋㅋㅋㅋㅋㅋㅋ ‘좋아요‘의 영광을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솔직히 하루키를 많이 (사실은 거의) 안 읽었는데, 몇 권 읽으면서 느꼈던 거는... 계속 읽게 만드는 힘이 정말 대단해요. 자극적이지도, 사건이 많지도 않은데, 이야기가 이리로 저리로 뻗어가는게 말이에요.
다락방님의 생각은 제 리뷰와 완전 다른 방향이라니 그 리뷰, 저도 꼭 읽어보고 싶네요. 가능하면 31일 전에 리뷰 올려주시기를... 간곡히 바라 마지 않습니다.

다락방 2023-12-29 10:46   좋아요 2 | URL
제가 31일 전에 과연 쓸 수 있을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어제도 야근에 오늘도 야근에 내일도 술 모레도 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화이팅!!

단발머리 2023-12-29 10:52   좋아요 0 | URL
아.... 연말에 야근이라니 ㅠㅠㅠㅠㅠㅠ
내일도 모레도 일정이 빡빡하시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화이팅!! (*5)

다락방 2023-12-31 14:23   좋아요 1 | URL
저 이 책 막 다 읽었고 마지막 부분에서 단발님이 왜 이렇게 리뷰를 쓰셨는지 확- 이해됐습니다. 어휴 ㅠㅠ 너무 좋네요 ㅠㅠ 저 하루키가 좋습미다 ㅠㅠㅠㅠㅠ

mytripo 2023-12-29 1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선생님 그래서 학원 없이 영어교육 성공하셨는지 막 여쭤보는 k-학부모..

단발머리 2023-12-29 15:41   좋아요 1 | URL
아이고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학원 없이 영어교육까지는 맞고요. 성공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똑같은 과정을 거쳤지만 두 아이의 영어 성적에 차이가 많아서요.. 결론은, 공부는 각자 하는 걸로.
이렇게 나버리고 말았거든요 😳😳😳

mytripo 2023-12-29 14:20   좋아요 1 | URL
저는 대댓글 왜 때문에 안써지는거죠?
학원 다녔어도 성적 차는 비슷했을 것 같아요. 고생하셨습니다.👍

단발머리 2023-12-29 15:42   좋아요 0 | URL
우앗! mytripo님!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었지만 귀한 말씀에 눈물이....😢😢😢
감사합니다!!

수이 2023-12-30 16: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제목을 보고 깜놀했는데 말이죠 단발님, 물론 이렇게 말하는 건 좀 뻔한 이야기가 되기도 하는데 말이죠. 몸을 던지고 영혼을 던졌을 때 받아줄 수 있는 이가 나 말고 또 어딘가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요. 물론 보편적으로 말하면 일단 엄마라는 존재가 떠오르기는 하지만 그 엄마가 항상 모든 딸아들을 받아주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죠.

단발머리 2024-01-03 20:51   좋아요 0 | URL
나 말고 또 어딘가 나를 받아주는, 나의 낙하를 받아주는 이가 있죠. 제게도 있습니다. 그런 존재가 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님은 이걸 캐치해 내셨으니, 그런 존재의 존재를 아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수이님의 낙하를 받아줄 이!!

독서괭 2023-12-31 1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어학원 안 보내기 결심.. 정말 어려운 결심을 하고 해내셨군요. 대단합니다👍👍👍 저도 학원을 많이 안 보내려고(공부학원은) 생각하고 있는데 막상 학년이 올라가면 어찌될지..^^; 아이들에 맞는 영어책 찾는 게 또 일이긴 하더라고요. 아휴.
하루키 리뷰 다들 자기 색깔이 있으셔서 재밌네요. 낙하를 받아줄 이라니, 제목도 너무 멋지고요. 도서관이야기라 조금 당기는 책입니다.
단발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단발머리 2024-01-03 20:54   좋아요 1 | URL
영어학원을 안 보내기는 했는데.... (말줄임표 속에 많은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학원을 안 가면서 공부한다는게 일단 한국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 거는 같아요. 어렸을 때 공부습관이 만들어지면, 괜찮을 거 같기는 하지만... (먼 산)
전 이번에도 하루키가 좋았습니다. 웃긴 구절을 좀 발견했거든요. 소소한 인물의 소소한 유머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님, 내년에도 더 자주 뵈어요! 새해 복 많이많이 받으시고요!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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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뿐 아니라 2023년 현재, 우리 사회 가장 첨예한 주제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 너무 날카로워 책 한권에 모두 다 밑줄 긋는 불상사는 기본값. <페미니즘의 도전> 이후 18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한 우리의 현실에 실망스럽기는 하지만. 포기는 이르다. 다시!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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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2-08 17: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 님도 완독!! 필 승!!

단발머리 2023-12-08 17:57   좋아요 1 | URL
필! 승! 🤨🤨🤨🤨🤨

독서괭 2023-12-08 18: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다들 빠르게 완독을!

단발머리 2023-12-08 18:23   좋아요 2 | URL
얼른 1회독하고요 찬찬히 2, 3, 4회독 가려고요 ㅋㅋㅋㅋㅋ

은오 2023-12-08 2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북다트 아니었으면 이 책 형광펜에 절여졌을 듯합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3-12-08 22:47   좋아요 2 | URL
책이 그래서 형광색

은오 2023-12-09 02:52   좋아요 0 | URL
출판사의 큰그림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12-08 22: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저는 아예 안 그음 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12-12 08:56   좋아요 1 | URL
저두 선생님 책은 1회독할때 안 긋는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참!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ㅋㅋㅋㅋㅋㅋ
 
에이스 - 무성애로 다시 읽는 관계와 욕망, 로맨스
앤절라 첸 지음, 박희원 옮김 / 현암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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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는 <무성애로 다시 읽는 관계와 욕망, 로맨스>. 보라색이 눈에 띄어 읽어야지 싶었어도 계속 미루기만 했는데 알라딘 이웃님들의 흥미로운 리뷰가 계속 올라와서 읽기 시작했다.

 

 


이 세상 가장 중요한 인간 사이의 용무가 섹스, 라고 주장하시는 필립 로스의 소설을 즐겨 읽던 독자로서, 나는 필립 로스의 의견에 반은 동의하고 반은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은 동물이고, 섹스가 동물인 인간이 겪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최고 감각의 지속성, 쾌락의 한도와 한계, 호르몬의 고저를 포함한 신체의 변화 등을 고려했을 때, 성애의 폭발, 성적 끌림 등의 찰나성, 나는 더 큰 방점을 찍는다.

 


이 책은 일반적인 성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모든 사람이 섹스를 좋아할 거라는 생각, 진짜 남자는 섹스를 많이 할 거라는 생각, 새로운 시대를 맞는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은 원나잇에 개의치 않는다는 생각. 책의 문장을 그대로 가져와 본다. “섹스의 과시적 소비는 페미니스트 정치를 수행하는 한 가지 방식이 되었다.” (98) 이 책은 그런 생각에 도전한다.

 


나는 진지한 long-term relationship’에 관심이 많다. 나와 비슷한 입장(?)이었던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저자의 남자친구 헨리는 5년간 개방 연애(open relationship)를 하자고 졸랐다. 애인이나 배우자를 두고 자유롭게 다른 사람을 만나자는 거였다. 저자는 그게 어려웠다. 매달리는 것 같아 싫었지만 그게 잘 안됐다. 괴로웠다.


 

견디다 못한 헨리는 끝내 가을에 나와 헤어졌고 그건 마땅한 일이었다. 헨리는 떠났지만, 나는 우리가 개방 연애를 해야만 하는 이유를 놓고 나눴던 끝없는 대화를 이해하려고 계속 골몰했다. 남자에게는 언제나 딴 길로 새려는 마음이 있고 그게 자연스러운 거라던, 일대일 관계에 목을 매는 건 구식이고 내가 진짜로 노력하면, 정말 조금만 더 노력하면 그 욕망을 누를 수 있으리라던 헨리의 말. (28)

 


오만하고 무모하면서도 겁먹었던 스물두 살의 저자는 오도된 버전의 성 해방(112)을 실천하기로 마음먹었다. 데이트 사이트 오케이큐피드에 로그인을 해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그 남자의 집으로 갔다. 아프게 그리고 형식적으로 섹스는 금방 끝나버렸고, 저자는 득의양양하게 자리를 떴다. 감정 없는 섹스를 실천했다고, 자신은 이제 억압된 사람도 찰거머리도 아니라고, 나는 이제 충분히 진보적인사람이 되었다, 고 느꼈다.

 


헨리에게 이야기하자 헨리는 축하한다며, 자기가 다 기쁘다고 했다. 그런데 그 여름이 더 지난 어느 컴컴한 밤, 헨리는 마음 한구석에서 모든 게 이상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내 행동이 어떤 면에서는 일종의 벌이자 불신의 신호라는 직감이 들었다고. 헨리는 정확하게 짚었다. 헨리의 기분이 이상했던 건 자기가 내게 1순위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어쩌면 아주 작게나마 있었기 때문이었다.(114)

 

 


강제적 이성애는 가부장제의 근간이다. 과성애 혹은 성애의 과몰입 역시 가부장제를 존속시키기 위한 속임일 뿐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다만, 나는 여전히... 사람은 누구나 진실하고 친밀한 관계를 원한다고 생각한다. 그 상대는 남자일 수도 여자일 수도 있다. 남자는 섹스를, 여자는 공감을 원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자는 여러 여성을, 여자는 한 남자만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서적 만족감을 주는 데에 섹스가 아주 주요한 요소라고 생각하지만, 섹스 없이도 공감과 애정의 정서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섹스를 지나치게 경원시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것이 인생 자체를 바꾸어 버리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지천명이 가까워지고, 매사가 귀찮고, 갱년기가 가까워지고 있는 여성이라 이렇게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니다. 나는 한참(?) 때도 연애가 귀찮았다.

 

 


오히려 내 관심은, 어떤 사람에 대해 느끼게 되는 로맨틱한 감정이다.

 


전 세계 사람들에 따르면 로맨틱한 감정에는 보통 이런 게 들어간다. 심취와 이상화, 신체적·정서적으로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마음, 독점하고 싶은 마음, 내 감정에 답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 상대의 행동을 과하게 생각하는 것, 관심을 보이고 상대에게 공감하는 것, 상대를 위해 자기 삶의 일부를 바꾸는 것, 상대가 반대로 자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갈수록 집착하는 것. (194)

 


저자는 성적 끌림없이도 이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성애 중심의 혹은 이성애강제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동성 간의 감정은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반값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 남성들은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다. 가부장제에서 인간의 기본값은 남성이기에 남자들 사이의 우정은 연대’, ‘의리’, ‘충의뿐 아니라,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당연하다. 그들에게 여성은 성적 대상이기에 진리에 도달하는 그 무엇을 논의할 만한 대상이 아닌 것이다. 이에 반해 여성들 간의 우정은 극히 사적인것으로 치부된다. 남자들의 회합은 정책 연대이고, ‘토의이며, ‘회의지만, 여성들의 회합은 그런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다. <등산 모임>, <골프 모임><맘카페>, <엄마 모임>의 이름부터 그렇다.

 

 


남자들의 우정 혹은 남자와의 우정에 대해서는 나는 잘 모르겠다. 남사친이 하나도 없는 나여서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주위만 둘러보아도, 자기 자신에 대해 엄격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현명한 사람들은 모두 여성들이다. 남성들은 대우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평생을 살다가 갑작스러운 낙하에 크게 상심할 뿐이다. 4살 남동생을 둔 8살 여자아이의 지혜를 남성들은 평생 눈치채지 못하기도 한다. (가끔, 만 명에 한 명 정도로, 딸아이를 둔 남성들이 이를 눈치채는 것 같기는 하다/주의 : 우리 아빠는 아님)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강하고 바른 선택은 내 주위의 도덕적이고(사실, 지나치게 도덕적이기는 함) 진실하며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똑똑한 여성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그들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지는 않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그것도 모르는 일, 체슬러도 말년에는 여성과만 동거함), 친구들과의 로맨틱한 관계를 잘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성애로 다시 읽는 관계와 욕망, 로맨스>의 결론이 내게는 그렇다.

 

 


로맨틱한 관계를 이어가겠다. 그 대상이 꼭 남자일 필요가 없는 것처럼, 여성이 아니어야 할 이유도 없으니. 우정을, 사랑을, 로맨틱한 관계를 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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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2-07 11: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휴, 제가 이 글이 깊은 공감과 동의를 드리며 또 기립 박수도 드립니다.

저는 남사친이 있고 그들중 몇은 특히 너무나 애정하는데 그렇다고 그것이 섹스를 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충분히 관계를 유지하고 싶고 그러기 위해 노력도 할것이고 또 다정한 태도로 임하겠지만 그렇다고 우리 사이에 섹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섹스 없이 그렇게 다정하게 유지되는 관계에 있어서 저는 너무 짜릿합니다. 뭐랄까요, 음, 정말 나 자신과 교류하길 원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요? 물론 섹스를 한다고 해서 나를 원하는 것이 거짓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순수한 나 자신의 내적인 면에 애정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저는 정말 좋습니다. 저는 제가 가진 동성과 이성의 관계들에 매우 만족합니다.

이 책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자꾸 밀어두게 됐는데 단발머리 님으로부터 이런 글을 쓰게 하는 책이라니, 읽겠다는 다짐을 좀 더 굳혀봅니다.

단발머리 2023-12-07 11:24   좋아요 1 | URL
저는 일단 애정하는 남사친이 없습니다. 우정이란 자고로 긴 시간을 들여 서로가 서로에게 공을 들여야 하는데 저의 30대는 모두 가정사에 파묻혀 버렸고.

그럼에도 다락방님이 말씀하시는 남사친과의 우정과 관계에 대해 이해합니다. 혹은 이해한다고 느낍니다. 섹슈얼 텐션만이 인간이 인간에게 선사하는/선사하고픈 감정은 아닐테니까요. 저 역시 남성들과 그런 관계, 섹스 없이도 서로를 지지하고 다정히 대하는 관계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이제 저는 ˝지천명이 가까워지고 매사가 귀찮고, 갱년기가 가까워지는 여성˝이라서요. 저의 모든 에너지를 모아도 될까 말까....

저는 소세지 사러 나갈수는 없고(편의점이 멀리 있음) 퇴근길에 사가는 걸로 할게요. 대동단결!!


잠자냥 2023-12-07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로. 맨. 틱.


˝지천명이 가까워지고, 매사가 귀찮고, 갱년기가 가까워지고 있는 여성이라 이렇게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니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12-07 11:19   좋아요 0 | URL
절대 아니에요.

소세지 전해주는 마음은 사랑이고 애정이지만, 이건 아닙니다. 진짜 아니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12-07 11:23   좋아요 1 | URL
극구부언 수상…

단발머리 2023-12-07 11:24   좋아요 0 | URL
지나치게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닌 것이 아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23-12-07 1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08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은오 2023-12-07 2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제가 바로 언니들에게 성적 끌림 없이 로맨틱한 감정을! 찐한 우정과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다💕 쮸아아아아아아아ㅏ앙압

단발머리 2023-12-08 12:24   좋아요 1 | URL
성적 끌림 없이 로맨틱한 감정을 느끼고 그 사랑을 공개 고백하는 은오님은 진정한 사랑의 대가!!
저는 뽀뽀는 좀 그렇고요. 화이팅을 보냅니다. 뽜야!!!
 
나와 뇌
‘나는 누구인가’와 ‘나는 무엇인가’의 사이에
세계 그 자체 - 현대 과학에 숨어 있는, 실재에 관한 여덟 가지 철학
울프 다니엘손 지음, 노승영 옮김 / 동아시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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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장 8가지는 챕터의 제목과 같다.

 

. 모든 것은 물리학이다

. 살아 있는 존재는 기계가 아니다

. 우주는 수학이 아니다

. 모형은 실재와 같지 않다

. 컴퓨터는 의식이 없다

. 모든 것을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

. 자유의지는 없다

 

 

이 책의 제일 중요한 문장, 이 책의 결론을 포함하는 문장은 이 책의 첫 문단에 나온다.

 

비밀을 하나 알려드리겠다. 살아 있는 존재는 기계가 아니고, 우리 머리 밖에는 수학이 존재하지 않고, 실재하는 세계는 시뮬레이션이 아니고, 컴퓨터는 생각하지 못하고, 의식은 환각이 아니고, 의지는 자유롭지 않다. (21)



이러한 주장, 이러한 결론은 자아라는 의식이 좌뇌의 속임으로써 완벽하게 환상이라는 근래 과학의 최신 유행과는 정반대다. 생명과 의식에 대한 부분이다.

 

 

내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근본적으로 생명과 의식이 포함된다. 끊임없이 현존하는 불가분의 주관적 1인칭 시점도 그중 하나다. 우리는 세계 바깥에 설 수 없으며, 살아 있는 몸으로서 세계 한가운데에 선 채 유일하게 존재하는 시점인 내부로부터 세계를 바라본다. (33)

 

나는 저자의 주장에 수긍하는데, 뇌와 자아, 뇌의 물질성과 영혼에 대해서는 이전에 써놓은 글에 하고 싶은 말을 거의 다 한 것 같다. 내 글에 내 글을 인용하는 나의 게으름을 부끄러워하며. <나와 뇌>, <‘나는 누구인가나는 무엇인가의 사이에서>.

 


 

제일 관심이 가는 부분은 의식에 관한 것이다. <박테리아에서 바흐까지, 그리고 다시 박테리아로>의 대니얼 데닛의 주장은 저자의 주장과 큰 차이를 보이는데, ‘계산주의 마음 이론을 주장하는 대니얼 등은 의식과 계산의 연관성에 방점을 찍는다.

 

계산주의 마음 이론의 핵심은 의식을 가진 존재가 수를 셀 수 있는 것으로 보건대 의식과 계산이 서로 연관된 듯하다는 관찰로부터 도출된다. 그 둘의 관계는 인과적이며 의식이라는 신비한 현상의 원인이 (우리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계산 현상이라는 주장이다. 심지어 충분히 복잡한 계산에서는 항상 의식이 생겨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설명하지 않지만. (155)

 

저자는 인공지능이 의식을 갖고 있다고 믿을 때의 위험(178)을 말한다. 이런 착각이 인권 같은 인간적 가치를 상대화할 위험을 가진다고 경고하며, 생명 없는 물건들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대할 때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자율 주행차는 물론 챗GPT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논의와 엔트로피, 강한 창발과 약한 창발에 대한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지만, 모태 문과인 내가 무언가를 서술할 정도로 이해한 것 같지는 않아 흥미로웠다는 이야기만 남겨 둔다.

 


이론 물리학자에게서 들어야 할 이야기라면 수학과 물리 정도를 예상할 수 있을 텐데 생명과 의식에 대한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물리학에서 설 자리가 없어 보이는데도 자아가 존재할 수 있는가의 물음(152)에 대해 정의상 과학이 다룰 수 없는 사안이라 선언하는 태도 역시 과학의 최첨단을 좌지우지하는 물리학자로서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닌가 싶다.

 



이어서 읽으면 좋은 책들을 골라본다. 읽으려는 건 아니고, 그냥 골라만 둔다.

 

<괴델, 에셔, 바흐>

<박테리아에서 바흐까지, 그리고 다시 박테리아로> 

<생명 속의 마음>

<물고기는 알고 있다>

 






살아 있는 정신은 이 세상 너머에서 비롯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런 정신이라면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살 수도 있지 않을까? 죽음을 극복할 능력을 가진 정신은 생명이 없는 물질보다 훨씬 거대한 것, 인간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만드는 바로 그것임이 틀림없었다. 이것이 이원론의 개념이다. 살아 있는 육체는 생명이 없는 물질로 치부되어 버려졌다. 물론 정교하게 제작되기는 했지만, 불멸하고 비물질적인 정신에 의해 조종되는 기계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 P29

진화와 유전부호가 발견되면서 생명의 본질 자체가 순수한 정보이자 일련의 글자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유전 정보는 유기체를 동물이나 식물의 형태로 조합하는 방법이며, 그 유일한 목적은 자신을 더 많이 복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 논리에는 중요한 허점이 있다. 부호는 읽어줄 사람이 없으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A, C, G, T라는 글자 수십억 개로 이루어진 인간유전체가 바로 그런 예다. - P45

모든 판단은 간접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동료 인간에게 어떻게 느끼는지 묻고 그들의 대답과 우리가 공유하는 경험과 생물학적 기원에 근거해 다른 인간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럴듯하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온전히 이해했다고는 결코 확신할 수 없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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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2-05 16: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책으로 보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걸요!

단발머리 2023-12-05 16:34   좋아요 1 | URL
Falstaff님의 리뷰를 기다리겠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리뷰일테지요!! @@

다락방 2023-12-05 17: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흐를수록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과학과 철학이 같이 들어있다니, 저도 읽어보고싶네요! 좀 어려울 것 같지만..

단발머리 2023-12-06 20:38   좋아요 0 | URL
저는 재미있는 챕터가 3-4개였고 나머지는 다 어려웠어요. 글자만 읽는 심정.... 아시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저는 추천하고 싶습니다^^

공쟝쟝 2023-12-05 17: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데닛이랑 도킨스랑 친하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알았냐고요? 최재천 슨생님이 알려주시더라고요ㅋㅋㅋㅋㅋㅋ 잡채를 포함한 박테리아 책들이 집에 꽂혀 있어요. 그런 과학자들의 책들이요. 대체 찐 문과인 제게 왜 있는 걸까요..... 그러니까 저는 궁금합니다. 아메드 식으로요... 감정은 (나에게) 무슨 일을 하는가. 과학은 무슨 일을 하는가. ...
어쨌든 저는 인간의 정신도 결국 유기체의 한 표현이라는 쪽이고요...... 무엇보다.... 정신과 몸을 나눈 뒤에 위계 지은 서구철학에 비판적이며... 그것을 규정해온 것이 권력이라는.. 희진샘의 주장에 동의하고. 결국은 권력이요... 아직은 여기 머물러있습니다... 여튼 샘의 새 책 <다페도> 부록 제외 마지막 장 너무 어렵고. 선생님이 인용하신 페미니스트 엘리자베스 그로츠의 책은 왜 또 집에 있으며...ㅋㅋㅋㅋ 무엇보다 나 찬드라 모한티 어쩌고의 논문 인용되있는 <탈식민 페미니즘> (미주 352) 책 샀당...!!
단발머리님이 왜 저랑 친구인지 드디어 알 것 같아요. 그냥. 이 글을 본 순간 그렇게 느껴졌어요.

단발머리 2023-12-07 11:18   좋아요 1 | URL
쟝님의 스펙트럼은 넘나 넓어서 보통의 지구인이 감당하기 어려울 거 같아요. 저같은 소시민은 이 얇은 책을 읽고요. 반도 이해 못 해도 리뷰는 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인간의 정신이 결국 유기체의 한 표현이라면, 그러니까 ‘뇌라는 단백질 덩어리의 전기 신호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런 삶, 이런 삶과 죽음이 왜 소중한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의식이 인간 생존을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환상 혹은 인간 문화에 축적된 치밀한 거짓말이라면 말이에요. 그걸 ‘과학적으로‘ 이해한 우리네 삶을, 우리가 왜 소중히 여겨야 하는지 말이에요. 전 그 지점이 솔직히 이해가 안 갑니다.

제가 가진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는 그렇습니다. 나는 전능한 창조주의 창조물이고, 그의 일부(신성)을 소유한 자로서, 지금(현세)과 미래(내세)에 내가 추구해야 하는 ‘특별한 가치‘가 있다는 믿음 말입니다. 인간 중심주의 회개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탈식민 페미니즘> 적어둡니다. 나는 안 살 거에요. 이름만 알아두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12-10 14:52   좋아요 1 | URL
언제나 말씀드리지만 ‘신앙‘ 혹은 ‘믿음‘이라는 측면을 부정할 생각이 저는 없어요. (나는 2주 연속 로또를 믿었지만 로또가 나를 배신한 것은 내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리라.ㅋㅋㅋ)

그러니까 저는 뇌라는 단백질 덩어리의 전기 신호 변화에 경이를 느끼는 쪽입니다. 이를테면 현대의 뇌과학이 밝히는 과정 중인 신경계에 남는다는 물리적 폭력과 고통의 흔적 말예요. 7개월에 거쳐서 세포가 다 교체가 되고 말면 될 일인데 인간은 PTSD를 겪잖아요. 단순히 그 것이 전기 신호의 변화라는 결론이 난다고 한들 01010101010101 2진법으로 다 설명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굳이 이렇게까지 컴플리케이트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 거기에 대해서는 설명 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부분이잖아요? 이 지점에서 불가지론입니다.

그리고 ‘인간 정신이 유기체의 한표현이다‘라는 제가 가지고 있는 (이건 믿음이라기 보다는 추론에 가까운데, 이 추론의 자세가 제가 세상에 대해 궁금한게 많은 까닭이기에 당분간은 유효할 예정입니다) 생각이 ‘소중하지 않다‘와 어떻게 연결이 되는 지는 단발님의 생각과 저의 다른 지점 (어떤 인식론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만 소중히 여길 줄 알아요. 그런데 내가 유별나게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고요. 특별하지 않아도 소중할 수 있어요. 저는 소중하게 대할 줄 압니다.

이런 저는. 결국 제가 권력(영향력)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해요. 신성을 소유한 누군가는 그 자체가 신이라고 스스로를 여기고 신성을 일부 소유한 어떤 사람은 그 신앙을 지구와 인간을 살리는 데 쓰죠.

저는 그냥 유교도 뭣도 아닌 세계관 (굳이 따지자면 자본주의라는 신앙과 믿음에 대해 적대적인?? 세계관인 듯...-_-;;;; 하지만 그러기엔 나 돈 좋아하고요?)이며 내가 가치가 있어서 특별한 존재라기 보다는 내가 나인 까닭과 네가 너인 까닭을 끊임없이 제가 물어보는 종류의 인간(?)이기에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가는 과정 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중심주의 덮어놓고 넘어설 게 아니라 인간이 지구(사실 지구가 아니라 인간이겠죠)의 권력이 되는 과정에서 어떤 인식이 위험했는 지는 인간이 셀프로 따져야 한다는 게 요즘 나오는 이야기들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기독교적 세계관이 풍미했던 시절에는 이런 식의 대량학살+지구파괴가 가능한 세계는 아니었죠. (인류세가 아니라 자본세라고 하자는 해러웨이 주장에 동감) 물론 그 시절보다 지금이 더 나쁜지 역시 모르겠지만 지금은 지금을 사니까요. 해당시기에 사활을 걸고 해체해야할 잘못된 ‘믿음‘이 있다면 그걸 질문해야한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유기체인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그것은 ‘믿는‘ 존재라는 뜻에 다름아니거든요. 믿음은 귀하고 때로는 위험하죠. 음......... 이글턴 읽다 말았는 데 제 주장이랑 비슷할 것 같닼ㅋㅋㅋ

단발머리 2023-12-12 18:24   좋아요 0 | URL
이 댓글 너무 소듕합니다. 소듕소듕!!
담에 제가 다시 이 주제에 대해 글을 쓰게 될 때 야무지게 참고하겠습니다!

특별하지 않아도 소중할 수 있어요.

이 부분이 특히 눈길을 끄네요. 저의 생각과는 많이 다른데....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모두 심하게, 엄청나게, 전 우주적인 관점에서 ‘과하게‘ 특별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담에는 그 이야기도 해보겠습니다. 부제는 ‘생명이라는 기적‘ 정도 되겠네요.

서니데이 2023-12-05 2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따뜻한 연말 좋은 시간 보내세요.^^

단발머리 2023-12-06 20:39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따뜻한 댓글 감사합니다.
올 한 해도 감사했어요. 서니데이님도 마무리 잘하시고요~~~ 행복한 연말 되시기를 바래요!!

수이 2023-12-06 12: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고 단발님과 친구라니……. 저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내년에도 사랑할게요.

단발머리 2023-12-06 20:38   좋아요 2 | URL
이유 없이 사랑하는 그 사랑이야말로





 
거짓의 사람들 - 인간 악의 치료에 대한 희망 보고서, 개정판
M. 스콧 펙 지음, 윤종석 옮김 / 비전과리더십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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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위험한 책이다, 로 시작하는 위험한 책, <거짓의 사람들>을 읽었다. 저자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거짓의 사람들>은 정신 치료 과정에서 저자가 만나고 치료했던 여러 환자의 임상과 그 현장에서 맞닥뜨린 악에 대한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책이다. 이 책의 중요한 논거는 악하다는 것을 인간 성격의 한 측면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질병의 하나로 보았다는 점이다. 정신 의학자이며 의사로서 가지고 있는 학문적 배경과 임상 경험을 통해 거짓말을 잘 하는정도를 넘어서 악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찰과 대응이 비교적 소상하게 그려져 있다. 챕터 6에서는 <집단의 이름으로 악을 자행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며, 그 실례로 미국의 베트남전 파병과 민간인 학살을 비롯해 그 곳에서의 악행을 다루었고, 당연히 한나 아렌트의 논의와 다른 철학적 접근도 이야기하고 있다.



챕터 5에서는 축사라는 부분이 다뤄지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릴 듯싶다. 일단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다라고 믿는 사람들과 영혼이란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테고, ‘악한 영의 존재는 실재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그런 건 오로지 사람들의 상상력의 산물이다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을 테다. 저자는 기독교인이면서 정신과 의사로서 오랫동안 이런 악한 영의 존재에 대해 불신해 왔는데, 부인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경험을 한 이후에 생각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나 같은 경우, 대한장로회 통합 측의 엄격하고 경직된 분위기의 장로 교회에 자랐지만,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 여러 장소(기도원 등등)에서 여러 초자연적인 장면들의 일부가 되었던 터라, 그런 서술이 전혀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나는, 인간에게 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고, ‘육체라는 이 껍데기 너머에 (내부에, 이면에) 하나님의 거룩한 일부(하나님의 영)가 거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73쪽의 이 문장들을 이해할 뿐 아니라 믿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 안에는, 인간의 삶 속에는 성스러운 의미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태초에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과연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우리는 신을 닮은 존재로서의 책임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인간의 삶에는 성스러운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73)

 


기억에 남는 부분은 정신 상담을 위해 찾아온 십대 환자악한부모에 대한 이야기다. 전문가인 의사의 조언이나 설명을 듣지 않고 자기변명에 빠진 부모들. 자신들은 괜찮은 정도를 넘어 좋은부모라는 착각에 빠진 부모들을 세세히 관찰한 부분이다. 저자의 결론은 이렇다.

 


사실 그 문제에 제대로 파고 들어가 보면 문제의 진짜 원인은 자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 가정, 학교, 사회에 있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픈 아이 뒤에는 아픈 부모가 있다는 것이다. 부모 생각에는 아이들을 고쳐야 한다고 판단할지 몰라도 대개 서둘러 고쳐야 할 사람들은 바로 그런 판단을 내리고 있는 부모 자신들이다. 진짜 환자는 부모들인 것이다. (105)

 


나는 경험에 의해 악은 후손에게 이어지는 것 같다는 결론을 얻었다. 4장에서 예로 들게 될 그 사람에겐 악한 부모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대물림 현상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오랜 '유전이냐 환경이냐'는 논쟁의 해결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악이 후손에게 내려가는 것은 그것이 유전자를 통하여 전달되기 때문인가 아니면 아이가 부모를 보면서 배우고 따라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부모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려다 그렇게 되는 것인가? 악한 부모를 둔 많은 자녀들이 상처는 받으면서도 악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우리는 모른다. 그리고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과학적인 연구 작업이 지속되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모를 것이다. (145)

 

 

인간 성격 형성에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당연히 부모다. 유전적인 요인의 핵심이 바로 부모이고, 유아기에 특히 절대적일 수밖에 없는 환경적 요인 역시 부모가 결정한다. 정확히는 부모가 결정한다기보다는 부모 자체가 환경이다. 유전과 환경이 부모에게 달려있다. 악한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은 악한사고의 흐름과 생활방식을 학습할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이다. 악한 부모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려다 오히려 더 악한 사람이 되는 경우도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악한 부모를 두었는데도, 끊임없는 노력으로 부모 같은 사람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물론 흔한 경우는 아닐 것이다. 저자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 상황에 대해 모르겠다라고 말한다. 인간 삶에 미치는 다양한 변인을 통제하거나 관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에 나 역시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한다. 알 수가 없다.

 

 


모든 책이 육아서로 읽히던 계절을 지나왔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은 내 자신의 부모됨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이제 아이들이 제법 자랐으니, 이제 무언가를 주기보다는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삶을 구성하고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놓아주는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276쪽 저자의 문장을 그대로 옮기자면 자녀의 독립과 분가를 위해서는 부모가 자신들의 외로움을 견딜 수 있어야만 한다는데 동의한다. 나 역시 그러고 싶고, 또 현재로서는, 부모인 내가, 아이들에게 정서적으로 기대지 않으면서 나 자신의 외로움을 잘 견뎌낼 수 있을거로 생각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남편과 부모님과는 다른, 그러니까 내게 전혀 다른 질감과 무게의 감정을 불러오는 아이들에 대한 내 사랑이, 아이들에게는 물론이고 내게도 각별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완벽하게 구별된 존재이되 하나의 공간 속에 같이 살았던 공존의 시간 말고도 아이와 나만이 공유했던 경험과 느낌이 존재하니 말이다.

 

 


지난주, 출근하는 중에 라디오를 들었다. 10. 29 참사 희생자 어머니의 인터뷰를 듣고 있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날따라 렌즈를 끼고 있어서 눈앞이 금방 뿌옇게 변하는 것을 핸들을 꽉 움켜지고 눈물을 참고 또 참았다. 먼저 죽은 자식의 생일상을 준비하는 마음에 대해서, 나는 모른다. 여행 계획을 맡아했던 아이가 이제 이 세상에 없어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마음을, 나는 모른다. 알 수 없는데. 알 수 없는 내 마음은 같이 울고 있었다. 오히려 그 어머니는 덤덤하신데도 말이다.

 

 

10. 29 참사에 대한 글을 머릿속으로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한다. 내 생각과 내 느낌, 내 글의 뿌연 배경으로서가 아니라, 그 사건의 원인과 현재, 그리고 잃어버린 159명의 사람들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됐다. 서울 한복판을 걸어가다가 갑자기 벌어진 이 참혹한 사고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그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애도를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 한 켠이 너무 무겁다.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들의 절절한 외침이 꼭 실현될 수 있기를 바란다. 책임자가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기를 원한다. 크게 도울 수 없다면, 적어도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싶다. 계속 말하고 싶고, 그리고 또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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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돌아옵니다
    from 책이 있는 풍경 2023-11-02 11:21 
    댓글을 쓰다가 또 길어져서 페이퍼로 씁니다. 저는 이게 혹시 질병이 아닌가 싶습니다. 댓글 길게 쓰다 페이퍼 쓰면서 먼댓글로 연결하는 병 말입니다. 사회주의와 유물론, 무신론에 관한 부분을 같은 선상에서 연결해 설명하는 건 어려울 거 같고요. <신을 옹호하다>의 테리 이글턴의 주장을 중심으로 제가 이해한 범위 내에서 이야기해 볼게요. 건수하님의 물음에 대한 간편한 대답이라면, 그렇습니다. 사회주의는 무신론과
 
 
다락방 2023-11-01 13: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스캇펙의 다른 책-아직도 가야할 길-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읽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이 책 너무 읽고 싶네요.

저는 보고 있기 힘들어서 금쪽이 상담소인가? 그 프로 안보는데요, 거기에서도 보면 오은영 박사님이 아이들 관찰하시면서 부모의 과거를 묻거나 하는 일일 종종 있는 것 같더라고요. 아픈 아이에게는 아픈 부모가 있다는 말씀, 고개 끄덕여집니다. 그런 한편,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를 읽다 보면, 총기로 아이들을 무차별 학살한 가해자는 누가 보기에도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거든요. 그리고 부모를 사랑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죽이고 자신까지 죽이는 일을 할 수 있기도 하다는 걸 보면 역시, 부모가 환경 그 자체일 수 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또 아닐테고요. 저는 ‘악‘에 관심이 많은데, 이 책 제가 꼭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아, 저 일전에 읽었던 책 중에 부모가 살해당하는 걸 목격한 형은 연쇄살인범이 되고 동생은 경찰이 되는 그런 책이 있었어요. 한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고 그리고 그 성인이 ‘어떤 ‘성인이 되느냐는 알 수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작가의 말처럼 ‘모르겠다‘ 라고 밖에 답할 수 없을 듯요.

저도 이 책 읽어볼래요!!

단발머리 2023-11-01 17:53   좋아요 0 | URL
저도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기억나요.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다른 사람을 죽이고 자신까지 죽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걸까. 저는 그 엄마의 말을 믿거든요. 그 아이는 죽이러 간 게 아니라, 죽으러 간 거라는 말.... 그게 자기 아이가 그 끔찍한 범죄의 주동자가 아니라 소극적인 가담자라는 변명으로 들리기는 하지만.... 그 책을 읽고 나서, 전 그렇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형은 연쇄살인범이 되고 동생은 경찰이 된다는 거, 똑같은 상황을 겪은 후에 완벽하게 반대의 그런 행동이 나온다는 거... 저도 항상 궁금하기는 합니다. 결국 알 수 없다,라고 말하게 되네요.

<아직도 가야할 길>을 저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 읽지는 않았구요^^


공쟝쟝 2023-11-01 13: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 저는 기억할 것입니다.
단발님 아이를 낳지 않아도 경험하지 않아도 그런 상실을 절대적으로 모른다고 하여도 헤아려 볼 수는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안하는 걸, 기능적 실용적으로만 보려하는 것, 그걸 말이라고 떳떳해 하는 건 악이죠.

저는 친구님 덕분에 ‘사랑’을(내가 폐기하고자 했던 것) 종교적인 맥락까지 포함해서 다시 생각해보고 있어요. 그 역시 제가 완전히 이해하긴 어렵겠으나. 믿는다는 건 이해의 영역이 아니고 사랑의 영역이라는.

“(49)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 말을 인정하기가 어려워 진다. 현실에서는 사랑이 역사의 중심이 아닌 게 명백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가 사랑마저 실질적으로 사유화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독교 신앙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이유의 하나가 여기 있다.
디치킨스가 빚지고 있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liberal humanism)의 유산에서 사랑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사랑은 디치킨스의 정치적 어휘에 포함되지 않으며, 그들이 혹시라도 사랑이라는 단어를 쓴다면 당혹스럽게만 느껴질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인간 실존의 중심에 놓여 있다고 여기고 개인의 삶에서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자유주의 전통의 시각으로는 세상사에서 주변적 위치를 차지할 뿐이다. 예컨대 정치적 사랑이라는 개념은 디치킨스에게 별 의미가 없을 듯하다. 한데 사회주의에선 정치적 사랑이라 할 만한 것이 윤리의 근간이다. 문제는 사랑이 그저 성애와 로맨스, 개인과 가정의 일로 거의 완전히 축소되어 버린 사회에서 정치적 사랑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결국 디치킨스가 지금과 같은 글들을 써내는 이유 중 하나는, 사랑의 문제에 대해 자유주의와 다른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전통이 오늘날 흔적도 없이 가라앉을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 신을 옹호하다

(찡긋-)

단발머리 2023-11-01 17:57   좋아요 2 | URL
일단 이 댓글에서는.... 디치킨스가 누구인지 밝혀줘야 합니다.

* 무신론 과학자들의 대표자로 <신은 위대하지 않다>의 크리스토퍼 히킨스와 <만들어진 신>의 리차드 도킨스를 합쳐 부르는 말이 디치킨스입니다.

급, 양자역학이 떠오르네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이다.

(찡긋-)

건수하 2023-11-01 20:09   좋아요 3 | URL
디치킨스라는 단어를 처음 보았네요. 그러면… 사회주의 맥락에서는 무신론이 가능하겠군요?

(이 책이 의도하는 바는 아닐 것 같지만…?)

공쟝쟝 2023-11-01 22:12   좋아요 2 | URL
수하님 참 사회주의자는 참 종교인과 같다... 정도로 갈음하는 걸로! ㅋㅋㅋㅋ
저는 너무도 심오해서 점점 독서의 맥락을 잃어버렸고... 신앙이란 역시나 제 이해를 넘어서는 영역이지만...
바로 그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사랑*을.. 배치하고 일단... 신은 사랑이고요......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역시).. 그러니까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인간이 신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그런 원리를 포함하는 것... 사회주의가 무신론이라고 떠들어봐야 신(사랑)은 있음...ㅋㅋㅋㅋ 아직 덜 읽었지만... 신을 옹호하는 부분이아니라... 19세기 자유주의 합리주의 자장안에 있는 잘나가는 영미지식인들(디치킨스)까는 걸로 읽기엔 매우 재밌습니다.
˝(30)스스로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은 부르주아적 환상의 전형이다˝ 신을 폐기한 자들이 만든 신(무신)은 정통 기독교만 못하다(이 부분은 확언)는 게 1/3 읽은 제 생각입니다. (참고로 제 종교는 거의 유교임을 밝히...ㅁ)

건수하 2023-11-02 10:02   좋아요 1 | URL
사회주의도 좋지만
자유주의 합리주의를 버리기가 참 어렵습니다... 몸에 새겨져있달까 ㅠㅠ

단발머리 2023-11-02 11:22   좋아요 1 | URL
댓글로 쓰다 길어져서 글 썼어요. 급하게 쓰느라 허접하지만 두 분은 읽으셔야 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 댓글의 창시자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청아 2023-11-01 14: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이 떠오릅니다. 강압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아버지(로버트 드니로)
아래에서 두 형제의 성격이 극명하게 엇갈리거든요. 국내 한 프로파일러가 범죄심리학 관점에서
영화를 해석하는 프로가 있었는데(제목이 생각안남ㅜ) 같은 폭력에도 다르게 반응하는 심리를
잘 설명해주어서 인상적이었어요. 10.29 참사는 무책임과 혐오 때문에 현재진행형인것 같습니다.
저도 뭔가 쓰고 싶었는데 못했어요. 피해자 유족들은 물론 세월호에 이어 전국민적 트라우마가 더해졌네요.

단발머리 2023-11-01 18:04   좋아요 1 | URL
아롱이 다롱이라는 말이 실감나네요. 똑같은 상황에서 각자 사람들이 다르게 반응한다는 게 말이에요.

저는 10.29 참사의 가족들은 세월호 가족들보다 훨씬 더 힘들지 않을까 싶어요. 세월호 때는 국가 경제 자체가 휘청했잖아요. 사람들이 놀러도 안 가고, 외식도 안 하고요. 전 국민이 같이 아파해준 시간이 있었다고, 전 그렇게 생각해요. 아직 진상조사 제대로 안 되었지만요. 근데 10.29 참사는 사진 위패도 없이 추모하고, 그냥 덮어버린 측면이 많아서 더 마음이 아픕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문제이고요 ㅠㅠ

책읽는나무 2023-11-01 14: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처음 보는데 말입니다.
요즘 저도 부모란 어떤 존재인가?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읽으면서 눈이 확 뜨이네요.^^
저도 지난주 지인과 대화 속에서 금쪽이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다들 아이를 관찰하기보다 부모를 관찰하고 부모가 바뀌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는데 어떤 분이 요즘 젊은 세대는 금쪽이를 보구선 부모를 전국적으로 망신을 주는 프로그램같아 보인다고 얘길 하더라는군요.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인가? 싶었는데 이렇게 세태가 바뀌어가는 것인가? 또 그런 생각도 드는 거에요.
부모가 바라봐도 부모의 잘못이 보이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부모의 아픔이 먼저 보이는 것일까? 혼자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결론은 참부모가 되어야 자식이 올바로 성장하는 것이다.라고 생각되어지는데 말입니다.
사람 마음이 다 제각각이어 어떤 기준점이 흔들린다는 게 무섭기도 했네요.

세월호 참사나 10.29참사등 내가 해당되지 않으니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 자식 세대들이 보고 배울까봐 두렵네요.ㅜㅜ

단발머리 2023-11-01 18:08   좋아요 1 | URL
이 책에 ‘문제적인‘ 부모의 임상 경험을 읽다보면, 특히 그 대화를 읽다보면, 아... 사람들이 자신의 악행, 잘못에 대해 이렇게까지 무감각할 수 있겠구나, 싶어요. 좋은 사람인척 하지만, 실제로는 ‘정상적인‘ 범주를 넘어선 사람들인데... 사회에서는 정상처럼 보이구요. 그 피해는 오롯이 그 집 아이들 몫이더라구요.

저는 <페이드포>의 인용문이 눈에 들어와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잡자마자 후르륵 읽었네요.
근데도 잘 모르겠어요. 좋은 부모란 어떤 부모일까요? @@

꼬마요정 2023-11-01 1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말씀하신 그 어머니의 마음을 완전히 알 수 없겠지만, 소중한 사람을, 소중한 존재를 잃는 슬픔은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까요... 가슴이 아픕니다. 책임지는 일이 무엇보다 어려운 나라에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어느 순간부터 사과하고 책임을 지는 일이 호구가 된 것처럼 느끼나봐요. 아마 부와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다 빠져나가고, 어느 잘못은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해서 결국 해결되는 것 없이 사회에 화와 억울함이 쌓여가나 봅니다. 같은 부모 밑에서도 자녀들이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이런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네요. 추모하는 사람들과 조롱하는 사람들로 나뉘는 걸 보면요. 그래도 생명에 대해서는 좀 진지하고 너그러워지면 좋겠는데... 오늘 마세라티 운전자가 차를 치고 도망치다가 가드레일을 부수고 추락해서 사망했다는 기사를 봤어요. 댓글이 너무 무섭더라구요. 셀프 정의 실현이라고... 음주 운전 여부도 아직 모르는데, 피해자가 심하게 다치거나 죽은 것도 아닌데 너무 무서웠어요.
자꾸 과하게 잘못에 대해 비난을 하니 또 다들 책임을 회피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이런 현상은 부모들이 중심을 잡고 바로잡아 줄 수 있다면 좋겠어요.

단발머리 2023-11-01 18:26   좋아요 1 | URL
책임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거 같아요. 세월호로 처벌받은 사람이 딱 한 명이라고 하더라구요. 이번 10.29 참사에서도 행정안전부 장관이 사퇴도 안 하고 처벌도 안 받는 거 보면서..... 참, 뭐라 더 할 말이 없어지더라구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사건의 진실이 규명되기를 바랄 뿐이에요.

꼬마요정님 글 보고 그 사고 찾아봤는데 그러게요. 사람들 말이 다 독하네요. 그 사람이 잘못했다면 딱 그만큼의 처벌만 받으면 될 것을 말입니다. 삶과 죽음이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닌데... 혐오가 대세가 되어버린 이 세대... 어쩌면 좋을까요 ㅠㅠㅠ

2023-11-02 0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02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3-11-02 1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휴... 이 글 읽고 무거운 마음에 댓글을 못 달고 있었습니다. 아직 모든 책을 육아서로 읽는 시기를 지나고 있는 저는 이 책도 육아서로 보여 솔깃하군요. 최근 김애란 작가의 ‘입동‘이라는 단편(<바깥은 여름>에 실림)을 다시 읽었는데 너무 슬퍼서 제대로 이입하기가 무섭더라고요. 세월호, 이태원.. 사고의 이름이 어떻든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은 오죽할까요..
부모의 역할, 악한 부모 밑에 선한 아이, 선한 부모 밑에 악한 아이.. 참 어려운 문제 같습니다. 저는 이런 주제 나오면 항상 떠오르는 드라마가 있는데, <너를 기억해>예요. 서인국이 자기가 괴물이 아닐까 걱정하며 자라는데, 어느날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이 ˝살인마 아버지를 둔 자신의 안에도 살인마가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하며 상담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아, <굿 걸 배드 걸>이라는 소설도 떠오르네요. 악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소녀의 성장기, 극복기 같은 책인데..
이제 먼댓글 읽으러 갑니다 ㅋ

단발머리 2023-11-07 18:07   좋아요 0 | URL
아.... 김애란 작가가 그런 글을 썼군요. 너무 오랜만입니다, 김애란...

<너를 기억해>가 그런 내용이군요. 전 처음 들었구요. 이게 엄청 무겁고 답을 찾기 어려운 주제인데 드라마나 소설을 읽으면 좀 다를까 싶습니다. 전 어디서인지 기억 안 나는데, 정신과 의사이던가 정신분석학자가 ‘사이코패스‘ 연구하는데... 자기 뇌가 딱 사이코패스 뇌여서... 깜놀하면서 그런데 자기는 왜 사이코패스 범죄자가 안 되었나, 그걸 추적하는 책이 있더라구요.

육아가 쉽지 않지요ㅠㅠㅠ 24시간 부족하구요. 애쓰십니다, 독서괭님! (토닥토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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