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에 대한 다채로운 연구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고, 『미쳐야 미친다』, 『오직 독서 뿐』, 『삶을 바꾼 만남』등의 책으로 익숙한 이 책의 저자는 한양대 국문과 정민 교수다. 이 책은 ‘책벌레’와 ‘메모광’이라는 접근이 쉬운 편안한 주제로 책을 좋아하고 사랑했던 선인들의 삶을 운치 있는 한시와 함께 보여준다.
먼저, 책벌레. 책벌레라 함은 두 가지를 떠올리게 하는데, 하나는 책을 갉아먹고 사는 책 속 벌레를 말하고, 또 하나는 생업을 위한 다른 일을 제쳐두고 오직 책읽기만을 그 업으로 하는 ‘책바보’를 말한다.
먼저 진짜 책벌레 이야기. 책벌레 중에 특별한 것으로 맥망이라는 벌레가 있다고 한다. 당나라 고사에 따르면, 두어 즉 책벌레가 책 속에 있는 신선이란 글자를 세 차례 이상 갉아먹으면 변화해서 맥망이란 벌레가 되는데, 변화한 책벌레 맥망은 하늘 별에 쬐어 비추면 환골탈태하여 하늘로 날아오른다는 것이다. 조금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이 이야기를 사람 ‘책벌레’에 적용하면 일면 이해가 된다.
책만 읽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밖에 나가 돈벌이를 하기에 어려운 형편이거나, 아니면 책을 너무 좋아해서 다른 일을 하기 싫어하는 경우도 있겠다. 책만 읽는 이 ‘책벌레’는 ‘신선’이란 글자, 즉 자신에게 깨달음을 주고, 배고픔을 잊게 하고, 인간으로서의 도리에 대해 알려주는 진리를 찾아 책 속을 헤매이고 헤매다가 결국에는 자신이 원하는 궁극에 다다른다. 진리를 찾은 후에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그는 단순한 책벌레 두어가 아니다. 별빛을 받아 환골탈태하여 하늘로 오를 수 있는 맥망이 된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세상의 인정과 박수가 없다 해도, 이제 그는 책만 보는 ‘책바보’가 아니다. 하늘로 오를 만한 ‘책신선’으로 환골탈태한 것이다.
책벌레 이외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다. 조선, 중국, 일본의 장서인 처리법 비교와 책벌레로부터 책을 수호하기 위한 은행잎과 운초이야기, 책갈피에 압사당해 연구자들에 의해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청나라 모기 이야기, 칼라인쇄 투인본 이야기, 작가만 볼 수 있는 빨간 책 이야기와 요술처럼 사라지는 오징어먹물 이야기 등 책을 사랑하며 살았던 선인들의 지혜와 생활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이 보기 좋은 사진과 함께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메모 관리법에 대한 것이다. 메모의 중요성을 강조한 책이라면, 『메모의 기술』, 『메모 습관의 힘』, 『뇌를 움직이는 메모』등 여러 권의 책이 이미 출간되어 있다. 연말이라 그렇겠지만, 인터넷서점, 커피숍, 의류점을 넘어 이제는 치킨집에서도 선물로 다이어리를 제공한다. 산뜻한 색상과 다양한 디자인의 수첩이 차고 넘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수첩은 고흐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수첩계의 명품, ‘몰스킨. 이 뿐이랴. 핸드폰에는 메모 기능이 기본으로 설치되어 있고, 메모앱 또한 다양하다. 떠오르는 생각, 지나가는 생각, 단상, 느낌을 메모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 메모했다고 치자. 하지만, 그 다음은?
다이어리나 수첩을 잘 정리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한 축에 든다. 메모를 했다. 하지만,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하자는 거야? 작은 수첩에 적은 메모는 그냥 그대로 가볍게 흩어지기 쉽다. 애지중지 예쁜 다이어리도 몇 년 지나고 나면 먼지와 함께 퇴색한다. 메모를 어떻게 적고, 어떻게 관리해야 하나? 나도 책을 읽고 리뷰를 쓰기 전, 메모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주로 책 속의 키워드를 간단히 적는 정도다.
책 속의 구절을 그대로 옮기는 경우도 있다. 이런 식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메모 관리법은 ‘책상 옆의 상자들’이라는 글에 나온다.
나무 궤짝에는 경전에 관한 메모를 담고, 옹기에는 역사에 관한 메모를 담았다. 메모가 쌓이면 편차를 정한다. 같은 크기의 낱장에 한 장 한 장 써서 던져놓았으므로, 엮을 때 순서만 정해 묶으면 거의 가제본 형태의 책이 된다. (145쪽)
맞다. 바로 이거다. 같은 크기의 종이, 한 장씩 나뉘어지는 종이로 된 수첩을 준비하는 거다. 메모를 적은 후에 주제별로 정해진 곳(나무궤짝 혹은 옹기가 없으신 분은 플라스틱 통)에 넣어두었다가 많이 모였을 경우, 꺼내서 분리한다. 자주 언급되는 내용이 있는지, 중요한 생각은 없는지, 살펴보고 또 분류해본다. 이 방법은 저자가 지하철 자리에 앉아, 소파에서 TV를 보며, 화장실에서 앉아 번역하고 메모한 것을 모아 책으로 엮은 방법 그대로이다. 아주 효율적인 메모법이라 나도 실천해보리라 생각하며, 바로 검색. 알록달록 인덱스 수첩을 이용하면 되겠다. 몰스킨에게 한없이 뒤지는 외모의 부족함을 효율성으로 이겨내리라.
리뷰를 작성할 때, 나의 염려 아닌 염려는 ‘인용’이 너무 많다는 거다. 지나칠 수 없는 좋은 구절이라 아쉬운 마음에 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리뷰에 인용하는데, 가끔은 인용구의 수가 너무 많고 인용할 내용 또한 하염없이 길어져, 나의 작업이란 건 ‘베끼기’로 시작해 ‘베끼기’로 끝나는 건가, 허무해질 때가 많다. 그런 내게 눈이 번쩍 뜨이는 구절이 있다. 인용해본다.
무엇보다 다산이 강조한 공부법은 초서다. 초서란 책을 베껴 쓰는 것을 말한다. 한 권을 통째로 베끼기도 하고,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 옮겨 적기도 했다. 그렇게 베껴 쓴 책은 수초 또는 총서란 이름으로 묶어 정리시켰다. (105쪽) ... 총서란 초서집의 다른 이름이다. 자기 말은 하나도 없고 자기가 읽은 책을 베껴 쓴 것들이다. 여기에 자신의 호를 붙이고 총서라는 이름을 붙였다. 책 묶음 정도의 의미다. ... 주견이 없는 아이들에게 이런 방식은 인내심도 길러주고 베껴 쓰는 과정에서 공부의 안목이 열리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109쪽)
다산이 자신의 아들들과 제자들에게 강력 추천한 공부법은 ‘초서법’인데, 초서란 책을 베껴 쓰는 것을 말한다. 자기 말은 하나도 없고 자기가 읽은 책을 베끼기만 한 것이다. 그런데도 거기에 자신의 호를 붙여, 『치원총서』, 『양포총서』, 『유암총서』, 『순암총서』, 『춘각총서』라고 이름을 정해 책으로 만들고 이것이 어엿이 후대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여러 가지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고, 전에는 하지 못했던 새로운 생각에 빠져들 때도 있다. 하지만, 내 느낌과 생각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훌륭한 텍스트’를 만났기에 얻어지는 것이지, 나에게서 스스로 ‘만들어진 것’, 내가 중심이 되어 ‘창조한 것’은 아니다. 책을 읽고 리뷰를 쓰는 일이 즐겁기 때문에 아무도 강제하지 않음에도 스스로 책을 찾아 읽고 또 쓰는 것이다. 늘어가는 인용구에, 아무것도 스스로는 창조하지 못한다는 누추함에 울적해지려는 찰나, 읽고 베낀 책에 자신의 이름을 달아 후대에까지 전하는 다산의 제자들을 만나게 됐다. 그래, 베낀 책에도 이름을 다는데, 인용구 많다고 낙심할 필요 없다.
나의 인용은 계속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