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에든 도움이 안 된다는 게, ‘읽는다’는 것의 의미 아닌 의미다. 소설 집필 같은 창작이 아닌 경우, 편집 같은 가공이 아닌 경우, ‘읽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무슨 이득이 있는가.
내가 『신곡』을 읽는다는 게, 『프랑스 르네상스 단장』을 읽는다는 게,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을 읽는다는 게, 『시몬느 베이유 불꽃의 여자』를 읽는다는 게,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를 읽는다는 게,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이상은 오에의 강력 추천 도서). 나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 이외에 무슨 소득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우리는 일로만 평가받기를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유, 즉 성찰, 계몽, 이해가 똑같이 가치 있다고 고집해야 합니다. 고전을 스스로의 힘으로 읽어 나가는 프로젝트, 즉 하루에 일정 시간 동안 앉아서 책 한 권을 읽는 행위는 생산물과 축적물로만 우리의 가치를 재는 세상에 맞서는 저항의 행위입니다. 뭔가 ‘생산적’인 다른 일 대신에 아침에 혼자서 책을 읽는 행위는, 가치 있는 존재가 되려면 구체적인 뭔가를 생산해야 한다는 명령을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자, 저항하십시오. 앉아서 성찰하는 기쁨을 느끼십시오. 인간이란 생산력만이 아니라 이해력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고집하십시오. 아침에 눈을 떠서 부엌을 청소하고 서류를 정돈하기 전에, 무엇보다 고전을 한 권 집어 들고 읽는 시간을 가지기 바랍니다. (『독서의 즐거움』, 5-6쪽)
이러한 문구가 있어, 이러한 격려가 있어, 나는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에까지 올 수 있었다. 오에가 좋아하는 작가, 사이드의 말을 옮겨본다.
예를 들어 제가 어느 수필가의 책을 거론한다고 해봅시다. 제가 그 책에서 자극을 받고, 감명을 받고, 힘을 얻어, 지적 흥분을 느끼는 것은 (받아들일 모드가 되어 있을 경우겠으나), 단순한 정보 때문이 아닙니다. 책 속의 글을 통해 느껴지는 일종의 정신 - 발견이라는 감각, 어느 소재의 독창성이나 중요성을 자연스레 깨닫고, 이를 통해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자 하는 감각. (47쪽)
오에가 하도 원문을 봐야한다 강조하기에 원문도 살펴보면, 독서는 ‘inspires me or moves me, animates me, gets me excited, intellectually'란다. 나를 뭉클하게 하고move 하고, 활력을 느끼게animate 하고, 흥분시키는get me excited 것이니(48쪽), 인생의 국면이 바뀔 만큼 둘도 없이 소중한 정보를 전해준다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즉, ’글을 쓰고 있는 인간의 정신이 살아 움직이며 읽는 이에게 전해지는‘것이라고, 정리하는 것이다.(49쪽)
위대한 정신, 만나기 어렵고, 만나는 것이 불가능한 위대한 정신과의 조우, 이게 바로 ‘읽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혜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정신과의 만남을 통해 결국에는 진정한 나 자신과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노작가의 인생, 문학,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을 수 있는 이 책에서 의외의 팁이 있는데, 그건 외국어 학습에 관한 것이다.
오에는 영어와 프랑스어로 읽고, 이탈리아어는 대학 초급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신곡』을 ‘이탈리아어’로 읽는 일본 작가를 상상해보라.
우선 처음에는 번역서에 선을 그어가며 빈틈없이 읽습니다. 두 번째는 선을 그은 부분을 원문과 하나하나 대조하며 읽어갑니다. 그리고 세 번재로, 그게 정말 좋은 책이고 한 달 정도 공을 들여 읽을 짬이 있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쭉 원서로 읽어봅니다. 그것이 재독의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저희 같은 외국어 비전문가들은 말이죠, 전문가가 번역한 책을 옆에 두고 읽으려는 원서도 함께 둡니다. 그리고 사전을 앞에 둡니다. 이런 식으로 원서를 읽는 것이 좋아요. 번역본을 참고하면 원서를 읽는 속도가 훨씬 빨라집니다. (41쪽)
나는 의지할 만한 영어실력도 없으면서, 왜 번역서와 나란히 원서두기를 무시해 왔는가. 왜 번역서 vs 원서의 구도만을 고집해 왔는가. 줌파 라히리로 시작되어 오에로 열매맺은 나의 ‘원서 옆 번역서 프로젝트’가 드디어 가동되었다. 일단 집에 있는 책 중에서 ‘원서 옆 번역서 프로젝트’에 적당한 책들을 몇 개 골라본다.
애정하는 책 순서대로 고른다면, 1순위는 물론 『유령퇴장』이겠으나, 두께의 유혹 때문에 『에브리맨』이 낙점되었다. 오에가 가르쳐준 대로 빨간색(감탄한 부분, 흥미로운 부분)과 파란색(잘 모르겠는 부분, 부정적으로 신경이 쓰이는 부분) 볼펜을 굴려가며 읽어간다. 난 반대로 했다. 감탄스런 문장에는 파란색을, 부정적으로 신경이 쓰이는 문장에는 빨간색을.
드디어, 마침내, 바야흐로.
나는,
읽는 인간이 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