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의 열린 혈맥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조구호 옮김 / 알렙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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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자본론』 제1권에 다음과 같이 썼다. "아메리카 금광상과 은광상의 발견, 원주민의 광산에서 원주민을 박멸.노예화·매장하는 십자군 운동, 동인도 제도의 정복과 약탈의 시작, 아프리카 대륙의 흑인 노예 사냥터로의 전환은 모두 자본주의적 생산 시대의 새벽을 나타내는 사건들이다. 이 같은 목가적인 과정들은 본원적 축적 활동에서 또 다른 여러 핵심 요인들이다."(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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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의 혈맥』은 남아메리카 대륙의 자연과 그 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유럽인의 찬탈을 규명하고, 침략의 결과로 현재까지 유럽과 미국 경제에 종속당하고 있는 남미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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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정복자들이 남미에 도착했을 때, 아메리카 인디오의 수는 7,000만 혹은 그 이상으로 추정되었는데, 그후 1세기 반 뒤에는 겨우 350만 명으로 감소해 버렸다. 아메리카의 광맥에서 금속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올 때, 에스파냐 왕국은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잉카의 공공 부역제도 '미타'를 개조해 원주민들에게 강제했다. 농업 공동체에서 내쫓겨 처자식과 함께 거대한 은이 매장된 포토시로 끌려온 인디오들은 10명 가운데 7명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많은 수의 인디오들이 포토시에 도착하기도 전에 길에서 죽었다. 광산의 조건은 가혹했다. 노천의 얼어붙을 듯한 한기와 땅속의 더위가 번갈아 나타났고, 은을 추출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은은 갱도 속에 유독 가스를 발생시켰다. 머리카락과 이가 빠지고 몸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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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 정치체인 잉카 제국, 멕시코 분지의 아스테카 연합, 유카탄과 중앙아메리카의 마야 문명은 종교적 기념물, 가뭄에 대처하기 위한 기술, 천부적 재능의 예술품을 가진 위대한 문명의 근거지였다. 유럽의 남미 정복은 이런 문명의 기반을 파괴했는데, 광업 경제의 도입으로 대규모 인구 이동이 이루어졌고, 농업 공동체가 해체되어 버렸다. 강제 노동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죽었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집단 경작 시스템이 붕괴했다. 인디오들은 이러한 폭압과 폭정에 어떻게 저항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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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1년, 투팍 아마루는 쿠스코를 포위했다. 잉카 황제의 직계인 그는 모든 조세, 모든 형태의 원주민 노동력 '레파르티미엔토'(에스파냐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사용한 강제 노동 제도 중 하나. 원주민에게 일정 기간 강제로 노동을 부과하던 방식으로 식민지의 경제적 수탈 시스템 중 하나였다)를 폐지했다. 수하 대장들 가운데 한 사람의 배신으로 체포된 그는 자신의 아내, 자식, 그리고 신봉자들과 함께 처벌을 받았는데, 그의 자손은 4대까지 말살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200여년이 지난 후에, 시골 사제였던 미겔 이달고는 조세 폐지와 노예해방을 기치로 걸고 혁명을 일으켰으나, 군사적인 패배 끝에 처형되었다.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의 운동은 원주민의 봉기이자 사회적 혁명이었으며, 패배해 총살당하기 전까지 멕시코의 영토를 광범위하게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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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오들은 백인들이 전파한 병원균 때문에 죽었고, 광산에 끌려가는 도중에 죽었고, 수은에 중독되어 죽었고, 먹을 것이 없어서 죽었다. 폭압적인 지배에 반항할 수 없었다. 반항할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럽인 소수의 대농장주에 의한 지배는 강고했고, 인디오들의 삶은 비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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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의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가사노동에 종사하는 인디오인 퐁고(pongo)들은 개가 먹다 남긴 것을 먹고, 개 곁에서 자고, 피부가 흰 사람은 누구에게든 무릎을 꿇고 말을 했다. 원주민은 정복자의 짐을 등에 지고 운반하는 하역용 가축이었다. 승용 동물이 적었기 때문이다. (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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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아틀어(아스테카의 주요 부족인 나우아틀족의 언어) 텍스트에는 유럽인들이 '굶주린 돼지처럼 금을 탐했다'(47쪽)고 쓰여있다. 백인들의 욕망은 인디오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땅마저 삼켜버렸다. 넓은 토지의 라티푼디움에서는 사탕수수가 대규모로 경작되었지만, 오히려 사람들은 기아에 시달렸다. 면화와 담배, 오렌지, 소와 돼지를 생산했던 땅은 사탕수수만을 위한 땅이 되었다.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서는 더 많은 인디오, 더 많은 흑인 노예들이 필요했는데,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삼각 무역에서 설탕 플랜테이션으로 향하는 노예의 무역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사탕수수, 커피, 바나나 대농장은 유럽과 미국의 소비자를 만족시키는데 그치지 않았다. 이를 통해 유럽과 미국은 해당 국가의 경제, 정치, 사회를 경제적으로 종속시키고, 상호간의 불평등한 관계를 지속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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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대대로 살고 있던 땅에서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던 인디오들.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침략자들 때문에 그들의 조상과 자녀들은 죽임을 당했고, 현재와 미래가 파괴당했다. 여전히 남미의 경제는 유럽, 그리고 미국의 지배하에 있다. 공정무역으로 생산된 상품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했던 나는, 설탕, 커피, 바나나 때문에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이 겪었던 고통에 대해 새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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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임이 아니고, 어쩌면 나와 상관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적은 가격으로 내가 누리는 이 편리함과 즐거움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마추픽추로 가는 고급 열차에서 스테이크를 즐기며 진기한 풍경을 보러 간다고 기쁜 내색을 감추지 못하는 백인 부부와 내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나도 아주 오래 전부터, 마추픽추에 가고 싶었다. 잃어버린 도시, 사라진 사람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서술에 따르면, 그 곳은 잃어버린 도시가 아니라 파괴된 도시이고, 사람들은 사라진게 아니라, 죽임을 당했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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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혈맥을 통해 은과 금, 설탕과 커피 그리고 바나나가 흘러 들어갔다.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백인들에게로, 독점하는 소수에게로, 탐욕스러운 그 누군가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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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6-11-01 2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국과 캐나다를 제외한 아메리카 지역들은 다 라틴 아메리카가 아닐까 싶어요. 남미든 북미든 스페인,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으니까요ㅠㅠ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이로군요. 인간의 탐욕이란 잔혹합니다.

단발머리 2026-11-01 22:40   좋아요 1 | URL
네, 꼬마요정님 말씀이 맞는 거 같아요. 결국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 백인의 손이 닿았던 모든 곳들에서, 원래의 주인들이 땅을 빼앗기고 죽을 때까지 노동하고 ㅠㅠㅠ 그런 아픈 역사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구요.
그런 의미에서 룰라의 4선 성공은 정말 특별하고 다행스러운 일인 거 같아요. 조마조마했는데, 이겼더라구요.
그나마 다행이구요.

다락방 2026-11-02 0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추픽추로 가는 고급 열차에서 스테이크를 즐기며 진기한 풍경을 보러 간다고 기쁜 내색을 감추지 못하는 백인 부부와 내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나도 아주 오래 전부터, 마추픽추에 가고 싶었다. 잃어버린 도시, 사라진 사람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서술에 따르면, 그 곳은 잃어버린 도시가 아니라 파괴된 도시이고, 사람들은 사라진게 아니라, 죽임을 당했던 거였다. ‘

저도 여행프로그램에서 보고 와, 사람들이 왜 저기를 그토록 가고싶어하는지 알겠네, 하고 감탄했었는데, 저 역시 인용문의 백인 부부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네요. 그런게 어디 한두게겠냐마는... 세상은 가끔 알면 알수록 징그러워요. 모르고 해맑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때로는 합니다.

단발머리 2026-11-02 21:54   좋아요 0 | URL
저는 여행을 많이 가보지는 않았지만 마추픽추가 항상 마지막까지 남는 ‘가보고 싶은 그 곳‘이었거든요. 최근에는 방송에서도 많이 소개되고 그러더라구요. 근데 이 책 읽어보니 참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읽히고 그러네요.
알아서 더 괴로워지는 순간이 가끔 있잖아요. 제게는 이 책을 읽는 시간이 그랬습니다. 허어...
 
Becoming (Paperback) - 비커밍 - 미셸 오바마 자서전
Crown Publishing Group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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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아슬아슬, 오디오북에 의지해 읽기를 마쳤다. 어린 아이 둘을 돌보는 엄마이자 퍼스트 레이디로서 미셸은 그 역할을 완벽에 가깝게 해냈다. 우아하면서도 당당하다. 유쾌하고 따뜻하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미셸이 훨씬 더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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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10-30 19: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세만세만만세!! 고생하셨습니다!!

단발머리 2026-10-31 17:05   좋아요 0 | URL
아주아주 신납니다. 이야호~~

독서괭 2026-10-30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축하드립니다!!!🥳🥳🥳

단발머리 2026-10-31 17:05   좋아요 1 | URL
축하감사드립니다. 이 영광을 오더블을 읽어주신 미셸에게 바칩니다 ㅋㅋㅋㅋㅋㅋ

햇살과함께 2026-10-30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단발머리 2026-10-31 17:06   좋아요 1 | URL
햇살과함께님 저 꼴등이지만 ㅋㅋㅋㅋㅋ 그래도 5등입니다 ㅋㅋㅋㅋㅋ 브이!
 
여자에 관하여 ㅣ 수전 손택 더 텍스트
수전 손택 지음, 김하현 옮김 / 윌북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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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묻지 않지만 혼자 고백하는 추석 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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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책탑을 보자면, 누워있는 책들은 구입한 아이들이고, 서 있는 파랑이는 선물 받은 책이다. 구입한 책 중 벌써 2권이나 읽었으니 현재로서는 50%의 높은 완독률을. (자랑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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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번 추석에 읽으려고 찜콩해둔 책은 『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 아니면 『영어는 누구의 언어인가』였다. 연휴 직전에 도착한 『The Love Hypothesis』도 아름다운 외모 덕분에 물망에 오르고 있었는데 실제로 읽은 책은 손택의 책이다. 추석장 보러 나가는 길에 에코백에 넣어가지고 나갔는데, 짬을 내어 읽은 문장이 쉽고 내용은 한없이 무거워서 정성을 다해 읽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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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라는 제3세계>는 1972년 7월에 <파르티잔 리뷰>에 게재하기 위해 작성한 글이다. 정치 문학 계간지 <리브레>의 편집자들이 손택, 시몬 드 보부아르, 로사나 로산다 의원 등 5명의 여성에게 보낸 질문에 대한 답을 정리한 글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혁명적 사회주의의 관점을 진지하게 고려하거나 최소한 토론 거리로 삼을 거라는 가정하에 글을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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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은 여성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의 관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직업 세계를 조직하는 성 고정 관념을 해체하는 것'(78쪽)이라 주장한다. 남성에게만 허락되었던 다양한 직군에 참여하는 여성의 숫자를 증대시킴으로 성차별적인 직업 체계를 해체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의 존재가 더 이상 눈에 띄는 예외가 되지 않도록 말이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다. 최초의 여성 장관 후보자,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한 언론 기사는 사람들의 주위를 끄는 데는 성공했겠지만, 여전히 여성 국회의원 수는 남성 국회의원 수에 비해 현격하게 적은 상태다. 나로서는, 연두색 지선버스가 아닌 파란색 간선버스의 운전자가 여성임을 확인했을 때 놀랐던 것 같다. 운전자 중 여성과 남성의 비율은 비슷해졌지만, 버스를 운전하는, 이렇게 힘든(?) 일은 남성에게만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반갑게 인사를 건네주시는 기사님을 보고, 놀랐던 나를 놀라워하는 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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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슈얼리티에 대한 부분도 인상적이다. 섹스는 여성을 해방하지 않는다.(69쪽) 섹스는, 여성을 해방하지 않는다. 해방시킬 수 없다. 순간으로, 찰나의 순간으로 인간은 살 수 없다. 인간에게는 무한에 가까운 시간이, 찰나로 이루어진 순간이 존재한다. 섹스가, 섹슈얼리티의 규범이 여성을, 여성의 신체를 억압하는 이때에, 자유와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속이는 이때에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손택이 말하는 진정한 여성 해방, 여성의 성해방은 어떻게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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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해방하는 유일한 성 윤리는 현재 최고 지위를 차지한 생식기 중심적 이성애에 도전하는 성 윤리다. 억압 없는 사회, 여성이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 남성과 진짜 동등한 사회는 양성적인 사회일 수밖에 없다. (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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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강제적 이성애에 대한 도전이 필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과 남성이 진짜 동등한 양성적인 사회로의 추구가 필요하다. 결론이 흥미롭다. 손택은, 그런 사회에서 섹슈얼리티는 지금보다 덜 중요해질 것이라 전망한다. 다른 즐거움 때문에 성적인 관계를 병적으로 갈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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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후반부터 20대 후반까지는 미친 호르몬의 영향이 없다고 볼 수 없을 것이지만,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닐 테고, 전 세계 방송과 연예, 심지어 정치의 영역에서도 '섹슈얼리티'는 가장 중요하고 흥미로운 주제 중 하나이다. 나 역시 이런 현상이 병적이라는데 동의하지만(내가 헤이즐우드 하드커버 산 것도 병증이기는 하다), 상상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생식기 중심적 이성애가 어떻게 대체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뾰족한 대답을 찾을 수 없다. 지금 생각으로는, 고미숙 선생님의 『청년백수를 위한 길 위의 인문학』의 우정 담론이 떠오르기는 하는데, 나 자신을 전부 보여주는 우정이, '운명'이라 여겨지는(강요되는) 사랑을 어떤 방식으로 대체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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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지났다. 잠깐 물건 챙기러 집에 들렀던 때를 제외하고는 9개월 만에 첫째 아이가 집에 왔다. 2박 3일 일정으로 주 1회 방문하는 둘째 아이도 같이 왔다. 시댁과 친정의 할머니, 할아버지 방문 일정을 조정하는 데만도 한참 시간이 걸렸다. 첫째에게는 당근 김밥을, 둘째에게는 동서가 고이 재서 보내준 LA갈비를 먹였다. 이런 순간, 이런 시간이 내게 왔구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면, 이 순간이 순간이 아닌 '한 시대'가 될 수 있음을, 이미 도래했음을 기억하려 했다. 더 이상 징징거리지 말고, 오두방정 떨지 말고, 빈둥지 증후군 유사 증세 '호소'를 멈출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후진 없이, 빽도 없이. 앞으로,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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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을 기다리는 지금의 내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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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09-28 0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월요일이 왔습니다, 단발머리 님.
덕분에 손택의 생각을 알고 가네요. 그리고 말씀하신 것에 동의합니다. 우리는 더 자주, 다양한 직군에서 일하는 여성을 보아야 하고, 그래서 ‘오오, 여자네~‘하는 감탄을 더이상 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남자들이 그걸 필사적으로 막고 있다고 생각해요. 여경무용론 같은거 주장하면서요. 여성이 무언가 잘못했다면, 그것을 대표화 시키는거죠. 물론, 잘못한 것도 아닌데 잘못했다고 말하면서요. 아 너무 소름 끼치는 일이에요. 우리는 더 자주, 여러 직군에서 보여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직군에서 여성은 보여야 해요.

그리고 저 영어.. 책 뭐죠? 하.. 미쳐버려. 영어 책만 보면 일단 사고 보는 저를 어떡하죠? 일단 검색 들어갑니다.
그리고 살구... 책은.. 구판으로, 제가 아주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으며, 그거 아세요? 저 영어로도 갖고 있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제발 저를 혼내주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추석 일상을 좀 써보겠습니다.

단발머리 2026-09-28 19:49   좋아요 0 | URL
저도 글 쓰기 전에는 여경 이야기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근데 버스 기사님에게 홀릭해버려 그 이야기를 빼먹었네요. 다락방님의 댓글까지 더해져서 제 글이 더 명료해졌어요. 세상의 모든 직군에서, 여성이 보여야 합니다. ‘최초‘라거나 ‘특별한‘ 케이스가 아니라, 다수로서요.

저 영어책, 최근에도 기사에 인용되고 그러더라구요. 영어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왜, 우리는 영어를... ‘ 이런 질문이 바탕인거 같고, ‘원어민‘에 대한 허상을 깨드린다고 나와 있더라구요. 영어로 쓰였습니다, 이 책은ㅋㅋㅋㅋㅋ 한국인지만 워낙 세계적인 분이시라 영어로 쓰고, 한국어로 번역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6-09-28 1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궁금합니다....
당근김밥에는 당근만 들어가나요? 당근이 엄청 많이 들어가고 나머지도 다 들어가나요?
자식이 9개월만에 집에 오면.... 섭섭한가요? (울 엄마 마음 좀 헤아려보려고요;;;)

단발머리 2026-09-28 19:54   좋아요 0 | URL
당근김밥은 제가 붙인 이름이니까요. 당근이 주로 들어갑니다. 많이 ㅋㅋㅋㅋㅋㅋ 올리브유로 볶아서 고소하게요.
단무지와 크래미까지 들어가니깐 당근만 들어가는 건 아니지만, 시금치와 우엉은 자꾸 반사하기 때문에 ㅋㅋㅋㅋㅋㅋㅋㅋ

자식이 9개월만에 집에 오면... 섭섭하지요. 맛있는 메론이 선물로 들어와서 이번에 꼭 먹이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먹이지 못했고, 오늘 아침에 냉장고에 남아있는 메론을 보며 다시 한 번 자식 생각... 저는 잘해주지 못한 엄마라 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잠자냥님의 어머님도 비슷한 마음 아니실까 싶어요. 잘 살고 있을 걸 알지만 그래도 궁금하고 걱정되고요.
걱정의 최고봉은 역시나 자식걱정입니다^^
 
연애 시대의 종말
비비언 고닉 지음, 홍한별 옮김 / 엘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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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오전 10시 13분. 약간 늦었다. 원래 남편과 같이 나가는데 1부 예배 기도를 맡은 날이라 그날은 혼자 가게 되었다. 앞집 이웃분이 나오셔서 둘이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교회 가세요? 네~ 어디 나가세요? 볼 일 있으세요? 아니요. ... 좀 만나서 이야기 좀 하려고요. 그래야, 또다시 일주일을 버틸 수 있는 힘을 ... 크크 웃고 내가 묻는다. 여자죠? 그러게, 여자한테는 여자가 필요해요. 그렇죠? 네, 맞아요. 근데 남자한테도 여자가 필요한데 말이에요. 네, 맞아요. 대답하시고 이웃분이 환히 웃으신다. 근데 왜 우리 남자랑 살죠?라고는 물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건 물을 수 없기 때문에. 머릿속에 맴돌지만 물을 수 없는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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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적 이성애에 대한 비판, 그것이 여성을 옥죄고 사회 전체를 경직 상태로 몰아가고 있음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필요한 일이지만, 이 책이 해부하는 문제는 그것만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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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낭만적 사랑은 근대의 발명품 중 하나이다. 인류 문명의 시작과 거의 동시에 시작된 결혼과 달리 격정의 과정과 결과로서의 사랑은 역사가 짧고 여전히 실험적이다. 계급 재생산 수단인 결혼은 지위, 명예, 재산의 승계를 위한 것이다. 유사 이래로, 얼마만큼의 지위와 물적 토대를 가진 남성들은 실제 삶에서 애정을 분리했다. 자식을 낳아준 부인에게는 지위를, 애첩에게는 재산을 나누어 주면 그만이었다. 그랬던 애정이, 두 남녀(혹은 두 여성 혹은 두 남성)간의 정념이, 불타는 열정이 실제 결혼 생활 속으로 들어오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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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결혼이라기보다는 결혼 생활이라 부르는 게 더 정확하다. 핑크빛 사랑이, 콩닥콩닥 연애가 결혼 생활 속으로 들어왔다. 실제는 생각과 다른데, 많이도 다르다. 삶이 절망인 이유는 사랑이 끝나기 때문이다. 그 사랑이 내가 예상했던 사랑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때쯤 다시 한번 등장하는 나의 개똥철학. 참사랑이란 멀리 있는 사랑. 완벽한 사랑이란 머릿속의 사랑. 영원한 사랑이란 결국에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로테에 대한 베르테르의 사랑. 로테에 대한 괴테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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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하게 말해서 페일리 소설의 남녀는 서로와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라 살아 있음을 느끼고자 하는 열망과 사랑에 빠진다. 이들은 서로에게 투사(投射)이자 자극이다. 언젠가는 (대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결합에서 인간적 문제가 불거지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그럴 때가 많다) 사랑이라는 느낌은 증발해버린다. 이 증발에 대한 반응에 페일리는 관심을 갖는다. 사람들은 사랑을 잃고 우울해하거나 혹은 동요한다. 동요하면 떠나버리고, 우울해지면 마비된 듯 보인다. 역사적으로 볼 때 주로 동요하는 쪽은 남자이고 우울해지는 쪽은 여자다. (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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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과 정념으로서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그 사랑은 반드시 '그 사랑'이 아니다. 그 사랑이 사랑이라면, 다른 사랑은 사랑이 아닐 테고, 그 사랑이 사랑이라면 다른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노래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의 노래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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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내 곁에 있어야 해요.

나를 떠나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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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내 곁을 지켜주세요.

나를 떠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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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너무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널 사랑하지 않아서' 생긴다. 모든 걸 주고팠던 마음이 사라져 버려 생긴다. 함께해서가 아니라, 떠나지 않아서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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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결국 무언가를 찾는다. 내 시간을 소비할 무언가를 찾고, 내 마음을 쏟을 무언가를 찾고, 내 인생을 완성할 무언가를 찾는다. 그것은 명예일 수 있고, 행복일 수 있고, 재산일 수도 있다. 삶을 추동하는 그 에너지가 오직 성적 반응과 행위의 원동력으로만 작동할 때, 다르게 말해, 오직 사랑에'만' 집중되었을 때의 위험을 비비언 고닉은 설파한다.

​

사랑의 종말. 예상된 결말이고, 예정된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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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6-09-21 0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저는 읽지 못한 소설들의 리뷰를 읽으며 공감못해 마음이 온전히 가닿지 않아 잠깐 책을 덮었었거든요. 근데 단발 님 리뷰 읽으면서 이렇게 책을 읽어야 하는구나! 느낌을 받게 되어 참 좋네요.^^ 어쩜 사랑에 대한 종말 그리고 비극! 이 슬픈 단어들을 너무 낭만적으로 풀어내시네요. 사랑의 비극은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떠나지 않아서란 통찰! 고개가 절로 끄덕여집니다. 잠깐 조현아 이름 본 김에 ‘널 사랑하지 않아‘ 노래 검색해서 들어봤거든요. 가사를 다시 음미해보니 쏘쿨한 노래로 들리기도 하군요. 조현아 목소리가 넘 좋아서 그렇게 들리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이제부터는 단발 님의 사랑의 비극 정의에 의해 모든 게 그렇게 들리게 될 것 같네요.ㅋㅋㅋ 책 다시 펼쳐들고 조만간 다시 읽어야겠어요.^^

단발머리 2026-09-22 08:48   좋아요 1 | URL
저의 개똥철학을 책나무님이 그렇다고 동의해주시니 완전 기분 업업업 ㅋㅋㅋㅋㅋㅋㅋ 오늘을 <업>의 날로 정하겠습니다!! 계절은 바뀌고, 아이는 자라고, 저는 늙고요. 사랑은 변하고 몸은 예전같지 않고 마음도 그럴 때가 많구요.

그렇다는 걸... 아는게 저는 좋더라구요. 이 슬픔이, 이 절망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아는 거요. 그래서 친구가 소중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대부분 우리 친구들은 동년배잖아요. 비슷한 삶의 주기 속에서 서로가 겪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있으니까요.

사랑은 사실 비극만인것만은 아니고요. 저의 깨발랄 사랑 버전도 곧 돌아옵니다^^ 기대해주세요~~ 개봉박두!

다락방 2026-09-21 0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극은 너무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널 사랑하지 않아서‘ 생긴다. ‘

크- 사실 대부분 모든 발라드는, 바로 그 지점을 노래하고 있죠. 그래서 날 떠나지 말라고 말하고, 나는 너의 뒷모습만 바라본다고 말하고 말이지요. 왜, 아예 노골적인 가사도 있잖아요.

‘널 사랑하지 않아, 다른 이유는 없어‘ ..


그러나 저는 한가지 덧붙이고 싶습니다. 어쩌면 좀 더 본질적인 문제라고 볼 수도 잇을 것 같은데요. ‘비극은 너무 사랑해서가 아니라, ‘날 너무 사랑해서‘ 생긴다. ‘ 고 말이지요.

저는 모든 괴로운 사랑은, 상대가 아닌 나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내가 바라는대로 해주길 바라고, 내 말을 들어주길 바라고, 그러나 상대가 하는 말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래서 비극은 시작되는 것 같아요. 저는 상대가 하는 말만 잘 들어도 대부분의 비극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우리가 ‘헤어지자‘고 말할 때, ‘너를 좋아하지 않아‘ 라고 말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듣지 않는가요.

비비언 고닉의 책을 읽을 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잃시찾에 발목 잡혔지만 말이지요.

단발머리 2026-09-22 08:53   좋아요 0 | URL
너무 사랑해서가 아니라, 날 너무 사랑해서... 라는 다락방님 말씀에 무릎을 탁! 하고 칩니다. 맞아요. 그게 맞는 거 같아요. 근데 전 그런 생각을 하기는 해요. 그게... 사실, 나보다 너를 더 위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잖아요. 엄마가 괴로운 이유가 바로 그거든요.
인간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안녕과 생존이 우선인데, 엄마일 때는 그거를 아기한테 양보(?)해야 하는거요.

내가 바라는대로 해주길 바라는 마음, 내 마음을 들어주길 원하는 마음이 너무나 당연하잖아요. 모두가 그걸 원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제게 그렇게 해줄수 없잖아요. 우리, 그걸 알잖아요. 그래서 비극인 거구요. 그래서 어쩌면 사랑은 환상이 맞는거 같구요. 그가 바라는대로 내가 해주고, 내가 원하는 그것을 그/그녀가 해주고요. 사랑이 희귀한 세상입니다. 하지만....
곧, 깨발랄 사랑으로 돌아올게요. 사랑은 옵니다, 반드시!
 
저 지금 탑승합니다
정보라 지음 / 위고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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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로 따지자면 '한국에세이', 혹은 '명사에세이 > 문인에세이'라고 하는데, 시간의 순서대로 배열되고 있고, 여행에세이답게 장소의 변화가 계속되다 보니, 일기처럼 읽힌다. 일기처럼 읽는다고 누가 뭐라 할 것도 아니어서, 나 혼자 좋아하는 정보라 작가의 글을 일기처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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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일기를 들여다보는 일은 얼마나 신나는 일이던가. 그제 밤에 도착한 『울프 일기』는 두께도 두께거니와 행간이 상당히 빡빡해서 마음의 준비를 요구하지만, 다른 일기도 있다. 오르한 파묵의 그림 일기, 『먼 산의 기억』도 있고, 황정은 작가의 『작은 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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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에게는 소설 쓰는 일이 제일 중요하니, 새로운 소설, 창의적인 소설, 아름다운 소설, 환상적인 소설로 독자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 제일 우선일 것이나, 그렇게 쓰여진 소설의 배경, 그 소설의 집필을 시작하게 된 동기, 한국 사회에서 그런 소재가 등장할 수 밖에 없는 이유등을 세계 시장에 설명하는 일도 소설가의 일 중 하나이다. 정보라는 2022년 『저주토끼』가 부커상 국제 부문 최종후보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전 세계 여러 나라의 문학 행사와 현장에 초청된다. 2024년 한강 작가님의 노벨 문학상 수상까지 이어져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황이어서, 정보라 작가는 런던에서 시작해 바르샤바, 베를린, 카피툴로, 보고타 등 4년 동안 15개국 32개 도시를 누비는 해외 출장을 이어간다. 이 책은 출장이라 불리는 초청 행사와 여행, 그리고 행사에서의 일들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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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시작하자마자 뿜어버렸던 지점은 '여행이 싫다'는 대목. 정확히는 '출장'이 싫은것일테고, 출장 자주 가는 사람들에게서 들어본 말이기는 한데, 평생 일로 떠나는 여행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나로서는 그런 출장마저 한없이 부럽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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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커상 행사부터 시작해, 조지타운 문학 축제, 카피툴로 우노 문학 축제, 케 뒤 폴라르 장르문학축제, 브리즈번 작가 축제등 정보라 작가가 참여했던 문학 축제들은 전 세계 여러 곳에서,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진행되었을텐데, 그 모든 도시를 연결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 그건 바로 데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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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페인어를 모르지만 데모를 무척 좋아하니까 무슨 시위인지 궁금해서 피켓과 현수막을 유심히 보았다. ... 남편도 나도 전직 대학 강사이고 비정규교수노조 조합원이므로 공교육 관련 시위라고 하니 갑자기 흥분해서 시위대를 따라갔다. (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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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나. 이 책은 『아무튼, 데모』가 아닌데... 계속해서 이어지는 건 데모 이야기다. 많은 경우 이스라엘과 미국의 '팔레스타인' 공습을 비판하고 인도적 지원을 요청하는 시위이다. 문학 행사에 참석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 문장을 소리내어 읽고, 이 작품에서 이 무언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앞으로 구상하고 있는 소설은 무엇일지에 대해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여유 시간에는 박물관을 관람하거나 관광을 하지 않고. '갑자기 흥분해서 시위대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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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 없기도 하지만, 나는 모든 소설가가 정보라 작가처럼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싫고, 작업실 안의 고요함 속에서 단어와 문장을 찾아가는 삶이 자기에게 맞다고 생각하는 창작자들도 많을 것이다. 근데, 나는 이런 작가가 있다는 게 너무나 신기하다. 이렇게나 데모를 좋아하고(그것도 남편과 한 마음으로), 폴란드어, 프랑스어, 영어에 능통하고, 좋은 책을 발굴해 번역하고, 그리고 자신만의 색깔과 목소리로 소설을 써내는 이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게 참 좋다. 나이로 따지자면, 정보라 작가는 내 또래이고, 그리고 유학했던 시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한국에서 시간을 보냈을텐데, 어쩜 <정보라>라는, 이렇게 용감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탄생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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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에 대해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은 마음이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나는 십년 전은 물론이고, 일주일 전만 돌아봐도 부끄러운 일들이 태반이고, 말할 수 없는 일이 산떠미 같으며, 자랑할 만한 일은 한 손으로도. ...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은 이 마음을, 정보라 작가는 바로 오늘, 자신의 현실과 현재에 아로새긴다.


그런 그녀에게 2022년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해이고, 서울에서 이태원 참사로 158명이 사망한 해이다. 2023년은 윤석열 정부가 고등교육 연구개발 예산을 16퍼센트 삭감하고, 오송역 침수 참사로 열네 명이 사망한 해이며,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에 무차별 폭격을 가한 해이다. 2024년은 12월 3일 윤석열이 내란을 일으킨 해이며, 제주항공 2216편 참사로 179명이 사망한 해이다. 2025년은 경북 의성에서 시작된 산불로 스물일곱 명이 사망하고, 8월 29일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공농성을 했던 박정혜 수석부지회장이 땅으로 내려온 해이다. 그녀의 하루, 그녀의 1년은 우리 나라의 현실, 우리의 현재와 끊임없이 공명한다. 그런 사람이기에 그렇다. 문학 행사에 한국 작품을 소개하고, 사인을 하기 위해 그 자리에 참석했던 작가는 쉬는 시간에 만나는 시위대와 조우하고, 이스라엘과 미국의 팔레스타인 공격을 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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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대표작 『저주토끼』가 무서워(무서울 것이 예상되어 아직도 읽지 못하고 있지만) 아주 무섭게 쓰지만 않는다면 그녀가 내주는 모든 소설들을 다 읽고 싶은 마음 뿐이다. 아니, 그녀의 소설 이외의 문장들도. 박상영 작가의 추천사를 빌려 표현하자면, 정보라와 동시대에 살고 있어서 행복하다. 난 정말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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