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줄리언 반스의 책이었는지, 폴 오스터의 책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책이었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데,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요즘엔 뭐 읽어?”

“응, 지금은 츠바이크 읽고 있어.”

“세계 문학 알파벳 순으로 읽는 거야? 츠바이크(Zweig)면 거의 다 끝나가네.”

이런 식이다. 나는 Stefan Zweig면 S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이 이야기라도 안 한다면, 이 슬픈 이야기를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아, 하릴없이 적어 보았다.

짧은 소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편지를 읽기 직전에 여유로운 남자의 모습과 알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온 의문의 편지, 그리고 편지를 다 읽은 후에 충격을 받은 남자의 모습. 물론 소설의 대부분은 편지 내용 속에 들어 있다.

여기 한 남자를 사랑하는, 한 여자가 있다.

당신이 지금도 여전히 저를 사로잡는 특유의 성마르면서도 경쾌한 동작으로 차 발판에서 뛰어내려 집으로 들어가려 했지요. 무의식적으로 당신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오는 쪽으로 다가서다 하마터면 당신과 부딪칠 뻔 했습니다. 당신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감싸는 듯한 눈빛으로, 그래요, 다정한 듯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았고 제게 미소 지었습니다. 네, 다정했다는 것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네요. 그때 당신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허물없는 사이처럼 말했지요. “정말 고마워요, 아가씨.”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하지만 전 바로 그 순간 당신의 부드럽고 다정한 눈빛을 느낀 그 순간부터 당신에게 빠져버렸습니다. (99쪽)

<별그대>에서 만화방을 운영하던 홍진경은 또래 여자아이를 좋아하는 남자애에게 말한다.

“그래, 그렇다니까. 예고 같은 건 없어. 그렇게 훅 들어오는 거야. 사랑이란 게 그래.”

드라마를 보여 제일 집중했던 건, 그리고 오롯이 집중하고 싶었던 건 단연 독보적 남주 김씨의 말과 행동이었지만,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건 홍진경의 대사였다. 사랑은 그렇게, 훅 들어오는 거라는 것.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짐작도 못하는 사람, 자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그녀는 말한다. 당신의 부드럽고 다정한 눈빛을 느낀 그 순간부터 당신에게 빠져버렸습니다. 그녀를 행복하게 했는지, 아니면 그녀를 불행에 빠뜨렸는지, 사랑에 빠지지 않은 모든 제3자들의 판단을 거부하는 이 아름다운 사랑은 이렇게, 이렇게 쉽게, 이렇게 짧은 순간에 시작되었다.

당신은 놀란 듯이 바라보았지요. 전 당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나를 알아봐, 제발 나를 알아보라고. 저의 눈빛은 절규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친절하게 미소 지었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다시 한 번 키스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저를 알아보지 못했지요. 전 황급히 문 쪽으로 갔습니다. (144쪽)

이 소설 전체를 다섯 음절로 줄이면 이렇게 된다. 나를 알아봐.

이 소설 전체를 아홉 음절로 줄이면 이렇게 된다. 제발 나를 알아보라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난 잘 모르겠다. 자신이 귀여워한 예쁜 아이를, 자신이 유혹한 순결한 처녀를, 갖고 싶어 안달 났던 화려한 창부를, 어쩌면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있나.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열 셋, 어린 소녀가 열 여덟의 어여쁜 숙녀가 되어 나타났을 때,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 어린 소녀가 희망 없고 헌신적이며, 너무나 굴종적이고 애타게 기다리는 열정적 사랑(101쪽)으로 그를 사랑했다 할찌라도 한창의 나이, 청년의 그는 소녀의 순수한 사랑을 알아채지 못 했을 수도 있다. 열 세 살의 여자아이가 열 여덟살의 아가씨가 되어 나타났을 때, 그래, 못 알아볼 수도 있다. 그런 그를 이해한다.

하지만, 긴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그녀를 잊어버린다. 그녀를 잊어버리고 그녀를 찾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로부터 버림받은 그녀가 말한다.

전 당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전 당신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합니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동시에 금방 망각하고, 열중하는 동시에 이내 불성실한 모습 그대로 전 당신을 사랑합니다. 늘 그래왔고 지금도 그런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합니다. (123쪽)

열 여덟 어여쁜 숙녀에게서 열 세 살 소녀의 모습을 찾아내지 못한 그를 이해한다. 하지만, 열 여덟의 숙녀가 스물 아홉의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나타났을 때,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도대체,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뜨겁게 사랑하지만 금방 망각하고, 열중하는 동시에 이내 불성실한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당신은 바깥 출입문에 못 미쳐, 외투 보관소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나오자 당신의 눈이 밝게 빛났습니다. 미소 지으며 서둘러 저를 맞아주셨지요. 그때 전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당신이 저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예전의 그 아이, 그 소녀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지요. 당신은 저를 낯모르는, 처음 보는 여인으로 다시금 붙잡은 셈이지요. (138쪽)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처음 보는 여인으로서 자신을 붙잡는 걸 알았을 때, 그녀의 절망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이미 그의 노예 다름 아닌 그녀는, 그녀를 청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럼 언제 만날 수 있을까요?”

“당신이 원할 때 언제든지요.”

“혹시 지금도 가능할까요?”

“네, 가시지요.” (139쪽)

끝까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남자, 자신의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 자신을 거리의 여자로 대하는 남자, 지난 밤 사랑을 고액지폐로 계산하려는 남자. 평생을 바쳐 사랑한 남자가 자신을 그렇게 대한다는 걸 알았을 때, 참담한 그녀는 서둘러 방을 나선다. 나는, 어떻게, 그녀가 눈물을 머금은 채로 그대로 그의 방에서 나올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에게 소리치지 않고, 그의 뺨을 때리지 않고, 어떻게 그 방을 나올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남아 있는 그 방을 나선다.

서둘러 나가다가 현관 앞에서 하마터면 당신의 하인 요한과 부딪칠 뻔했습니다. 그는 부끄러운 듯 황급히 옆으로 비켜서더니 제가 나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어요. 그 일 초 동안의 짧은 순간에 - 당신 듣고 계신가요 - 제가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그를, 나이 드신 그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그의 눈길에 움찔하는 광채가 비쳤습니다. 그 짧은 순간 - 당신 듣고 계신가요 - 그 일 초의 순간에 그가 저를 알아보았던 겁니다. 어린 시절 이후로 한 번도 저를 본 적이 없는 그분이 말입니다. 저는 하마터면 그에게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 그의 손에 입을 맞출 뻔했습니다. 전 당신이 저에게 채찍처럼 휘두른 그 지폐를 얼른 머프에서 빼내어 그분께 슬쩍 쥐어주었습니다. 그는 놀라 떨면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저에 대해, 어쩌면 당신이 평생 해온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감지했을 것입니다. 모두가 저를 떠받들고, 모두가 저에게 잘해주었는데 ...... 오로지 당신, 오직 당신만이 저를 잊어버렸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당신만이 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144-5쪽)

나는, 이런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잘 모르겠다. 자신을 잊어버린 그를 원망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사랑을 한결 같이 지켜가는 이런 사랑을 말이다.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이런 사랑은 모른다. 나는 모른다.

내 결혼식에 꼭 와라, 니 결혼식에 꼭 갈게, 그래, 꼭 와, 어차피 넌, 내 결혼식에 오게 될 테니까. 시답잖은 농담. 연애편지를 손에 들고 무조건 찾아갔던 그 애가 다닌다는 교회. 불 꺼진 교회를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천 번도 더 돌려보았을 그 애의 전화번호. 백번은 들었음직한 그 애의 ‘여보세요’. 그 애를 생각하며 지켜본 수많은 저녁 놀. 그 애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항상 설레었던 00서적에서의 몇 시간. 베이지색 바지에 청자켓. 여기저기서 보이는 그 애. 그 애의 모습.

나는 잘 모르겠다. 내게는 사랑이라고, 사랑이었다고, 말할 만한 사건이, 추억이 없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 숨쉬고 있었던 그 모든 시간을 백번, 천 번 다시 되새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고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사랑한 그녀가 이해된다. 그리고, 도저히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을 잊어버린 왜 그를 사랑했는지, 왜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해요. ………… 행복하세요.

끝까지 자신의 사랑을 지킨 그녀의 편지는 이렇게 끝난다. 그녀의 삶과 함께 말이다.

끝까지 그녀의 순수한 사랑을 알아채지 못한 그만 남았다.

낯선 여인으로부터 온 편지와 함께 말이다.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14-12-12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얼마전에 이 작가의 다른 책을 샀는데, 이 책은 잊어버리고 못 찾았어요. 슈테판 츠바이크도 찾아보면 책이 많겠죠.
단발머리님이 쓰신 정성가득한 리뷰를 읽고나면, 저는 그냥 읽는 것만으로 만족하려구요.

단발머리 2014-12-16 08:59   좋아요 0 | URL
슈테판 츠바이크 책도 사실, 다 찾아 읽고 싶은데, 여기 저기 출몰하는 책들이 많네요^^
그래도 이 짧은 단편은 읽으시기를 추천드려요. 제 리뷰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감동을....
예약해드립니다 :)

icaru 2014-12-16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 애를 생각하며 지켜본 수많은 저녁놀까지 와서,, 넙죽 업드려요~ 울대가 멍멍... 어깨가 시큰~
생각해보니,, 저도 있어요... 만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보낸 장소, ㅎ 근데,,누구였을까 그이는요~ 단발머리님의 그... ㅎ

앗 근데,, 체스이야기, 부분에서 시선을 확,, ㅋ 체홉의 단편에도 있다던데,, 츠바이크의 작품에도 있었나봅니다... 체스..
저는 츠바이크 제트로 시작하는 작가 중에 유일하네 싶네요~ ㅎ 또 누가...있더라요?

icaru 2014-12-16 15:11   좋아요 0 | URL
체홉 단편에 있는 게 아니라, 츠바이크만 있네요 ㅎㅎ 또 제가 잘못알고 있던 정보를 확인하게 되는 계기..ㅋㅋ

단발머리 2014-12-17 09:22   좋아요 0 | URL
잘 살고 있는 것 같더라구요. 전해오는 소식에는.... 잘 됐어요. 잘 됐다고 생각해요. 진심으로요.

icaru님은 아는 게 많으셔서 헷갈리시기도 하네요. 저는 체홉 단편은 아직 시작도 안 해봐서요.
츠바이크를 처음 읽고 흥분했던 시간이 떠오르네요.
아직 많이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참, 세상에 좋은 작가가 많아요. 그쵸?

icaru 2014-12-17 09:34   좋아요 0 | URL
아는 게 많긴요,, 단발머리 님이 읽고 풀어놓으신 유려한 글들 중에서 제가 알법한 것들,, 빙산의 일각만 아주 그냥 열정적으로 아는 척 하고 있으니,,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죠~~
저는 이 글, 책은 논외로 하더라도,, 단발머리 님 글쓴 의도와는 무관할지 모르지만, 몹시 짜르르 한게.. 가을도 다 가고,, 겨울의 맹위를 떨치는 이 마당에, 마치 가을을 타는 것처럼 그리운 사람들도 호명하고 싶고,, 마음이 그냥그냥 .. 막 그냥.. 그러하였었네요.. ㅎ;;

단발머리 2014-12-17 09:38   좋아요 0 | URL
아니, 진짜예요.
저는 무식함을 양식으로 유머를 날릴 뿐입니다. ㅎㅎ
체홉의 단편도 읽고는 싶어요.
사실, 저 <체스이야기>도 아직 안 읽었다는... 단편도 일단 하나만 읽고, 리뷰씁니다.^^

가을도 다 가고, 겨울이 매섭네요. 오늘 아롱이 알림장을 다 써서 아침 일찍 문방구 다녀왔는데, 완전 춥더라구요. 아롱이에게 말했죠. 추운데, 고생해라~~
그리운 사람, 여기 알라딘서재에서 호명하시면 안 될까요? icaru님 이야기 듣고 싶어용~~~

2014-12-17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18 0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14-12-17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를 읽더라도요 ^^ 그렇게 하는 게 멋지다는 생각입니다~~ㅎ

단발머리 2014-12-18 09:11   좋아요 0 | URL
헤헤... 너무 안 읽고 살았던 저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예요.

- 갈 길이 멀어서 조금 숨찬 단발머리가

2014-12-24 2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26 0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안녕반짝 2015-03-22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와 같네요^^ 저도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다가 그 안에서 츠바이크에 대해 나오기에 이 책을꺼내서 읽었답니다^^

단발머리 2015-03-23 09:3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안녕반짝님~~~
오늘 리뷰책에도 `츠바이크` 이야기가 많아서요, 저도 츠바이크 책 여러 권 찾아 읽고 싶어요*^^*
앞으로 자주 뵈어요~~
 
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1. 영업 비밀과 별천지  

영업 비밀을 이렇게 많이 이야기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동종업계 종사자들이 싫어할 수도 있겠다. 나는, 이런 신세계를 처음 알게 되어 무척 신기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할리우드의 이야기 공식은 (캐릭터 + 욕망) / 방해물 = 이야기 (37쪽)

인데, 이것은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 + 그에게 없는 것)/ 세상의 갖은 방해 = 생고생(하는 이야기)(40쪽)

로 구체화될 수 있다고 한다.

이뿐 아니다. 현대인의 기본적 소양이라 할 수 있는 무기력의 양대 산맥은 현대 연애와 암 선고인데, 내 뜻과 무관하게 느닷없이 찾아오는 질병과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연인을 견디는 것이 현대소설의 본질이라는 것(53쪽), 또한 처음 듣는 이야기다.

이야기 작법에서는 예상치 못한 결론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지점이 있는데, 이것을 플롯 포인트Plot Point라고 부르며, 대개의 이야기에는 두 개의 큰 플롯 포인트가 있다(91쪽),는 것 역시 금시초문이다.

전통적인 이야기 작법에서 플롯은 3막Act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플롯은 ‘막-시퀀스-장면-비트-액션’의 순서로 구성되며, 플롯의 이런 체계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건 액션, 즉 행동이라고 한단다. 역시나 처음 듣는 이야기다. (101쪽)

소설은 물론이요, 영화에서도 해피엔딩이냐, 새드엔딩이냐에만 집중하는 나로서는 이 모든 정보의 세계는 별천지요, 신세계다.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소설을 쓰는, 쓰고 고치고, 또 쓰는 소설가들은, 참 대단한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2. 많이 쓰기만 하면 잘 쓰는 소설가

훌륭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 그저 남들보다 많이 말하면 된다. 십 년 이상 소설을 써보면 알겠지만, 소설을 잘 쓴다고 말할 대의 ‘잘’도 그런 뜻의 부사다. 훌륭하게 쓰지 않아도 잘 쓰는 거다. 많이 쓰기만 하면, 잘 쓰는 소설가가 된다. (187-8쪽)

 

많이 쓰기만 하면, 잘 쓰는 소설가라고 한다면, 무조건 다작의 작가가 최고의 작가이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는 한국 대표는 조정래 선생이고, 미국 대표는 스티븐 킹. 비슷한 이야기의 변주여도 상관없다. 어차피 인간사, 내용이 피차 비슷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질 보다는 양. 양이 최고다. 김연수는 말한다.

난 무라카미 하루키가 『1Q84』를 발표했을 때, 읽어보지도 않고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일단 두꺼우니까. 오랜 팬에게는 질보다는 양이다. 질은 지난 삼십 년 동안 잘 느껴왔으니 이제는 양, 오직 긴 글, 다음 작품이 나올 때까지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긴 글만이 필요하다. (38쪽)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기다리는 모든 독자의 마음이다. 두꺼운 책, 오랫동안 읽을 수 있는 긴 글을 써 주는 작가가, 좋다.

 

3. 새로 쓸 수 있는 건 오직 문장뿐  

마찬가지로 소설가는 내용을 쓰는 사람일까, 문장을 쓰는 사람일까? 물론 정답은 내용과 문장을 동시에 쓰는 사람이다, 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여러 번 소설을 쓴 입장에서 보자면, 소설가는 문장 ‘만’을 쓰는 사람에 가깝다. 소설을 쓰겠다면, 돈을 아껴서라도 세계문학전집을 한 권씩 구입해서 집에 비치하기를. 책꽂이에 일렬로 꽂힌 세계문학전집의 교훈이란 내가 새롭게 쓸 내용은 하나도 없다는 자명한 진실. 지금까지 수많은 작가들이 수없이 많은 책을 썼다. 거기에 무슨 새로운 내용을 더 보탤 수 있을까? 새로 쓸 수 있는 건 오직 문장뿐이다. (191쪽)

 

책꽂이에 일렬로 꽂힌 세계문학전집을 보고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작가 지망생에게 김연수는 말한다. 새로 쓸 수 있는 건 오직 문장뿐이다. 새로운 이야기보다는 새로운 문장이다. 소설가로서 자신의 목표는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소설을 쓰는 것뿐이라고 말했던 김영하도 생각난다.

새로운 건 오직 문장뿐이고, 완전한 새 우주로서의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 역시 문체, 오직 문장뿐이다.

 

4. 일단 한 문장이라도 쓰자.

그러니 생각하지 말자. 구상하지 말자. 플롯을 짜지 말자. 캐릭터를 만들지 말자. 일단 한 문장이라도 쓰자. 컴퓨터가 있다면 거기에 쓰고, 노트라면 노트에 쓰고, 냅킨밖에 없다면 냅킨에다 쓰고, 흙바닥뿐이라면 돌멩이나 나뭇가지를 집어서 흙바닥에 쓰고, 우주공간 속을 유영하고 있다면, 머릿속에다 문장을 쓰자. (199쪽)

내 경험으로 보자면, 하루에 세 시간이면 충분하다 그 세 시간동안 최대한 느리게, 거의 쓰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느리게 쓴다. .... 세상에서 가장 느린 글쓰기지만, 그럼에도 하루 세 시간을 소설에 할애하면 얼마간 글을 쓰게 된다. 5매 정도라면 최고다. 하지만 한 줄도 괜찮고, 아예 쓴 게 하나도 없어도 상관없다. 세 시간이 지나면 읽고 쓰던 걸 중단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 외의 시간에는 소설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는 게 좋겠다. ... 글을 얼마큼 많이 써느냐가 아니라 소설을 생각하며 세 시간을 보냈느냐 아니냐로 글쓰기를 판단하니 결과적으로 나는 매일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됐다. 그렇게 매일 소설을 쓰게 되면 가장 느리게 쓸 때, 가장 많은 글을, 그것도 가장 문학적으로 쓸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232-3쪽)

 

소설가 지망생에게 필요한 정보라면 책 앞부분의 플롯 짜기, 캐릭터 만들기, 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적 조언은 이것이 아닌가 싶다.

일단 한 문장을 쓴다. 쓰고 또 쓴다. 시간을 정해서 쓴다. 하루에 3시간을 투자한다. 그 시간에는 오직 소설만 생각한다. 5매 정도면 최고다. 최대한 느리게 쓴다.

소설가가 되는 건 의외로 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쉬운 방법대로 하는 사람은, 새로운 문장을 쓰는 사람은, 하루 3시간씩 소설을 생각하는 사람은, 소설을 쓰는 사람, 소설가가 된다.

김연수 자신이 어떻게 그 시간들을 견뎌왔는지에 대해서는 그의 다른 책 [청춘의 문장들+]에서 읽을 수 있다.

소설을 쓴다기보다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돈을 벌었어요. 하루 종일 그렇게 일해도 석 달이면 돈이 다 떨어져요. 글을 써서 먹고산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운이 좋아서 2007년쯤 책을 내면 1만 부가 팔리는 작가가 될 수 있었어요.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따지면 7년만이죠. ... 정말 이젠 괜찮겠구나, 라고 생각한 건 2009년이 되어서였어요. 그러니까 한 10년 걸리더군요. 그 10년 동안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소설이 아닌 다른 글부터 써야만 했던 시절이에요. 진입 장벽이 엄청나게 높은 거죠. 이 나라에서 전업작가가 되는 일은 대통령 되는 일만큼이나 어려워요. 10년 단위로 두 명만 대통령이 되는데, 그런 식인 거죠. (94쪽)

 

소설을 쓰기 위해 다른 일을 해야 하는 것보다, 생활을 위해 원치 않는 일을 하는 것보다 더 힘든 건, 소설 쓰는 바로 일이니, 소설 쓰기는 이렇게 어렵고도, 이렇게나 쉽다.

 

5.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문장

나는 어릴 때부터 ‘제일’이란 단어에 집착했다. 웬만큼 친해진 친구에게, 후배에게는 항상 물어봤다. “너의 제일 친한 친구는 누구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 뭐야?”,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 이 정도는 알아줘야 내가 그 친구/후배를 제대로(?) 알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의 책,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산문집,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문장. 난 이런 거에 집착한다.

이제 나온다. 이 책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문장이다.

혹시나 이뤄질지도 모를 어떤 삶이 내 인생의 목적지가 아니라 어쩌면 내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 이 현실이 내 삶의 궁극적인 목적지일지도 모른다고. (251쪽)

 

내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 현실. 그런 현실이 내 삶의 궁극적인 목적지가 될 것이라고 믿고 싶지는 않다. 나는 아직 불혹에 닿은 나이가 아니다. 나는 아직 젊고, 나는 아직 철들지 않았으며, 나는 아직도 ‘할 수 있다’와 ‘하면 된다’의 주문에 솔깃해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는 것.

내게 남겨진 시간 속에서, 내가 원하는 그것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이 곳이 나의 마지막 자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 모든 문학의 출발점이 그러한 것처럼 여기에서의 삶도 그럴 수 있다는 것, 이제는 그걸 받아들여야 될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좋아서,가 아니고, 어쩔 수 없어서,이다. 선택한 것,이 아니고, 선택당해서,이다.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이다. 그게 바로 핵심이다.(262쪽)

 

그것을 아는 것이 소설가의 일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지금, 바로 나의 일인지도 모르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icaru 2014-12-02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 진짜 빛나는 문장이네요~ 청춘의 문장들, 을 읽지도 않고, 이 문구를 벤치마케팅 해 갑니다... (저의 카톡 상태 메시지로~ ㅎ )

단발머리 2014-12-03 08:42   좋아요 0 | URL
우아.... 제가 icaru님 핸폰 번호를 알아야 카톡상태 메시지에서 확인을 할텐데요.
심히, 매우, 참담히 아쉽습니다.
이 책 좋아요. 산문집인데, 여러번 읽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앞쪽은 재미있고, 뒤쪽은 좀 스산하긴 한데, ㅋㅎㅎ 좋아요.

서니데이 2014-12-02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오래 읽으면서 리뷰 쓸 생각이었는데, 단발머리 님이 미리 쓰셔서 전 포기.^^

단발머리 2014-12-03 08:41   좋아요 0 | URL
우앙~~~ 포기하지 마시고, 예쁜 리뷰 올려주세요, 서니데이님~~
저는 이 책 좋아서 막 줄을 치면서 읽었거든요.
신랑이 너, 공부하냐? 그러더라구요? ㅋㅎㅎ
 
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은 참혹한 짓이다.                                                                                                    - 신형철

그런 사람들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는, 외국에 있는 한국인들을 포함해 우리 모두는, 4월 16일과 17일, 18일과 19일. 꽃다운 아이들이 죽어가는, 그 시간들을 함께 살아냈다. 그 날들이 지나고 나서, 우리는 아직도 살아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웃고 있지만,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온 아이들은 깨어나지 않은 긴 잠을 자고 있다.

그 시간들, 우리 모두가 함께 했던 그 시간들, 그 길고 긴 절망의 시간들, 차마 잠을 이루지 못했던 그 길고 긴 밤의 시간을 다시 보내는 것, 그 시간들을 다시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하지만, 차가운 바다에서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의 가족들과 ‘아이들을 살려내라’는 외침 대신 ‘진상을 밝혀달라’고 단식을 강행했던 유가족들과 청와대 앞 아스팔트 바닥에서 76일을 농성했던 유가족들에게, 그들에게는 4월 16일 뿐이다. 자신의 아이가 침몰하는 배 위에서 사라진 그 날로 그들의 시계는 멈춰버렸다.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말들은 바람처럼 흩어지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 그만 하라,고. 이제 그만했으면 됐다,고 말이다.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일상으로, 일터로. 삶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이다.

마침내 그의 딸이 뭍으로 올라왔을 때 사람들은 다행이라며, 그간에 수고가 많았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 쉬라고 말했다.

돌아가다니 어디로.

일상으로.

사람은 언제까지고 슬퍼할 수는 없다. 언제까지고 끔찍한 것을 껴안고 살 수는 없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는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내가 안심할 수 있지. 잊을 수 있지. 그런 이유로 자 일상이야, 어떤 일상인가, 일상이던 것이 영영 사라져버린 일상, 사라진 것이 있는데도 내내 이어지고 이어지는, 참으로 이상한 일상, 도와달라고 무릎을 꿇고 우는 정치인들이 있는 일상, 그들이 뻔뻔한 의도로 세월을 은폐하고 모욕하는 것을 보고 들어야 하는 일상, 진상을 규명하는 데 당연히 필요한 것들이 마련되지 않는 일상, 거리로 나와야 하는 일상, 거리에서 굶는 아내를 지켜봐야 하는 일상,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과 같은 마음으로 초코바, 초코바, 같은 것을 자신들에게 내던지는 사람들이 있는 일상. (92-3쪽)                                                           <가까스로, 인간> 황정은  

희망이 없다고, 4월 16일 이후로 세계가 존나 망했다고 말하고 다니던(96쪽) 황정은은 7월 24일 서울광장에서 유가족을 대표해 한 어머니가 자식에게 보내는 편지를 듣고서 자신의 절망을 돌아본다. 다 같이 망하고 있다고, 질문해도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그 세상에 대고, 유가족들은 있는 힘을 다해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97쪽) 안산에서 출발해 하루를 걸어 서울광장에 당도하는 유가족들과 그들에게 진심어린 박수를 치는 사람들. 압도적인 검은 것 위에 세월이 마냥 막막하게 떠 있지 않도록 하는, 그 팔꿈치들의 간격을 말이다.

 

언론은 종일 가능성과 희망을 떠들었다. 에어포켓이며 골든타임, 정부가 구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속보들이 매체를 장악했다. 전부 거짓말이었다. 구조대원 726명과 함정 261척, 항공기 35대가 집중 투입된 사상 최대 규모의 수색작전을 벌인다는 기사도 있었다. 사상 최대 규모의 거짓말이었다. 구조는 없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장을 통제한 해경은 적극적으로 골든타임의 구조를 가로막았다. 해군과 119구조단, 각지에서 모여든 민간잠수사들 ..... 어느 누구도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 수 없었다. 심지어 해군참모총장이 두 번이나 명령을 내린 통영함도 현장에 투입되지 못했다. 이는 감히 해경이 저지할 사안이 아니었다. (49쪽)

                                                                                              <눈먼 자들의 국가> - 박민규     

 

세월호에 대한 의문은 파도 파도 끝이 없다. 일본에서 18년이나 운항된 낡은 배가 무리한 개조와 증축으로 배의 무게 중심이 높아졌고, 더 많은 화물을 싣기 위해 평형수가 상당량 빠진 상태였고, 선장은 비정규직이었고, 일등 항해사와 조기장은 출항 전날 채용된 직원이었다. 세월호는 국내 이천 톤급 이상 여객선을 통틀어 유일하게 유사시 국정원에 우선 보고해야 하는 배였고, 안개가 짙은 밤, 다른 여객선의 출항이 모두 취소된 상황에서 세월호만 유일하게 출항했다.(47-8쪽) 학생의 신고로 해경이 출두했지만, 선장을 포함한 선원들만 구조한 해경은 끝내 선내에 진입하지 않았다. 배는 물속으로 가라앉았고, 아무도 구조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로 국민을 속였던 언론은 이 모든 비극의 원흉으로 유병언만을 고집했고, 백골 상태로 돌아온 유병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당은 지방선거에서 ‘살려달라’, ‘한 번만 도와달라’고 했고, 여당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여당의 자세는 달라졌다. 피해자에게 칼자루를 쥐어줄 수 없다는 여당은 진상규명에 미온적이었다. 7시간의 미스터리를 밝히지 못하는 청와대도 마찬가지였다. 야당은 이리저리 갈팡질팡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이제 그만하자,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이렇다.

진심으로 대통령께 고하건대 아직 당신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 당신도 분명 그 꽃다운 아이들을 구하고 싶었을 것이다. 선실 구석구석을 수색해 단 한 사람도 빠뜨리지 말고 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기회가 당신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비서실장의 말 그대로, 누가 보기에도 생각보다 배는 너무 일찍 넘어갔다. 그러나 아직 기회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바라건대 각하, 지금 당신에겐

 

저 불쌍한 유가족들을

구조할 기회가

아직은

 

아직은 남아 있다는 말을 진심으로 하고 싶다. 그리고 이것은 마지막 기회이다. 역사가 당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단 한 번도 진실이 밝혀진 적 없는 나라에서 이 글을 쓴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 때문이고 이곳에 발붙인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모두 한 배를 탔기 때문이다.

내릴 수 없는 배다. (62-3쪽)

                                                                                                   <눈먼 자들의 국가> - 박민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령 퇴장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 가지이다.

제일 먼저, 이 책은 사람들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며 숲 속에서 혼자 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일주일에 두어 차례 산을 내려가 집에서 8마일 떨어진 아테나에 간다. 식료품을 사거나 옷을 세탁하거나 이따금 외식을 하거나 양말 한두 켤레를 사거나 와인 한 병을 고르거나 아테나 대학 도서관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탱글우드가 그리 멀지 않아, 여름이면 십여 차례 정도 그곳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운전해 다녀오기도 한다. (15쪽)

 

이 책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주일 내내 글을 쓰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대학에서 낭송회나 강연회도 하지 않고 강의도 나가지 않으며 텔레비전에도 출연하지 않는다. 내 작품이 출간되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다. 나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주일 내내 글을 쓴다. 그 외에는 침묵한다. 아예 작품을 발표하는 것마저 그만둘까 하는 유혹도 느낀다. 내게 필요한 것은 그저 일과 그 일을 하는 것 아닌가? 요실금에 발기부전까지 된 마당에 그런 게 더 이상 무슨 대수란 말인가? (15쪽)

 

또한 이 책은 스스로 외롭게 살려고 하는 노작가가 자신을 과하게 챙기는 친구에게 어떤 유머를 사용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필요한 건 이게 다야.” 그가 말했다. “정말 예쁘지 않나. 한번 보게. 얘들(강아지들)이랑 같이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를 거야.”

그가 이 모든 것에 대해 대단히 단호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말하는 게 고작이었다. “정말 사려 깊군, 래리.”

“이름은 뭐라고 지을 건가?”

“A와 B."   (21쪽)

 

또한 이 책은 작가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기준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고, 작가 사후에 그의 개인적 일들이 어느 선까지 알려져야 하는가에 대해 묻는 책이다.

명문가에서 자라 하버드에서 공부한 여자가 열두세 살부터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녀            그렇게 들킨 게 열세 살 때였는데, <세븐틴> 안에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숨겨 읽고 있었죠. 

                  애들은 절 놀려댔지만, 그 책을 읽었다면 <세븐틴>보다 훨씬 외설스럽다는 걸 깨달았을

                  거에요.

그녀            『폭풍의 언덕』, 『폭풍의 언덕』을 좋아했어요. 좀더 어렸을 때, 아마 열두세 살 때쯤이었던 것

                  같아요. 『제인 에어』를 먼저 읽고 그 책으로 넘어갔죠. (302쪽)

 

완벽한 여자가 자신을 숭배하는 남자를 남편으로 선택한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웨이에서 유대인들이 죽음과 삶의 이편과 저편을 어떻게 헤쳐왔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고, 늙어감에 대한 이야기이며, 요실금에 대한 이야기이다. 뉴욕에 대한 이야기이고, 아무데서나 터지는 핸드폰에 대한 이야기이고, 일말의 부끄러움 없이 핸드폰에 대고 자신의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저마다 흥미롭고, 놀라우며, 아주 재미있다.

하지만, 가장 끌렸던 이야기는 이것이다.

실성하는 게 어떤 것인지 일흔 한 살에도 배울 수 있는가. 자신보다 40살이 어린 여자를 앞에 두고, 이제는 과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생식 능력이 없다고 진단 받은 한 남자가, 자신을 사로잡은 이 젊은 여인을 유혹하려 애쓰는 것이 가능한가. 이 절절한 시도들이 가능한가.

나는 내 속내를 들킬까 두려워 더 나아가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빌리는 내 나이의 누군가가 자신의 젊은 아내에 대해 묻는 이유가, 그의 젊은 아내가 내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기 때문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게 분명했다. 내 나이가 그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못하게 했고, 나의 명성 또한 영향을 주었다. 고교 시절부터 읽어온 작가에 대해 어떻게 그런 몹씁 생각을 품을 수 있겠는가. (99쪽)

 

이게 가능한가. 정말 가능한가. 이런 이야기가.

여기, 더 이상은 자신의 DNA를 전달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또한 그에 대한 어떠한 노력도 사회적으로는 매우 부적절해 보인다. 노인의 ‘성’에 대에 사회는 청소년의 ‘성’ 문제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냉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는 그녀에게 매혹되었다. 그는 그녀에게 사로잡혔다.

그                자넨 겨우 서른 살이야. 남자를 많이 수집했나?

그녀             몇 명이면 많은 건지 모르겠는데요. (다시 웃는다)

그                대학을 떠난 이후로. 그러니까 졸업식 이후부터, 자네의 남자를 유혹하는 힘으로 날 수집한

                   오늘 오후까지 말일세…… 그런데 지금 자네는 그런 능력이 전혀 없는 것처럼, 어린애처럼

                   행동하는군. 자네의 그런 힘에 대해 언급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나?

그녀             그런 얘길 듣긴 했어요. 제가 웃은 건, 선생님이 선생님 당신을 수집된 남자에 포함시키신다면,

                   제가 수집한 남자를 어떤 식으로 계산해야 할지 몰라서였어요.

그                자넨 날 수집했네. (190-191쪽)

 

주커먼이 상상한 그녀와의 대화이다. 이에 대한 바른 독법은 나 역시 ‘상상’하며 이 지문을 읽는 것이다. ‘그녀’에 ‘나’를 대입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30대 초반이 아니고, 매혹적인 외모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래, 잘했어. 솔직했어.)

30대 초반의 여자를 상상한다. 예뻐야겠다. 상상을 시작한다. 예쁜 30대 초반의 여자가 있다.

남자를 상상한다. 71세이고, 작가로서 큰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지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이다. 지금은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해 혼자 살고 있다. 그런 남자를,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책표지 안쪽, 작가의 사진을 본다.

이런 사람이 이야기한다.

자넨 날 수집했네. 오호라.

일흔 하나라면, 우리나라 나이로 72세. 시아버지가 올해로 74세시다. 그러니까, 시아버지의 친구분(시아버지로 상상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시어머니는 아주 건강하시다^^)이 30대 초반, 마흔살 아래, 딸보다 어린 여자에게 말한다.

자넨 날 수집했네. 윽, 이건 아닌데.

한국 버전으로는 “자넨 날 수집했네.”가 불가능한가.

아니다. jtbc 손석희 앵커를 떠올려보자. 인터뷰차 손석희와 만난 염정아가 “손석희 앵커를 만난다고 하니, 너무 떨렸어요.”고 말했다. 화면을 보니, 염정아는 손석희 앵커와 눈도 마주치지 못 한다. 손석희 앵커가 올해로 59세. 음, 59 빼기 40은 19. 2014학번, 신입생이다.

손석희가 말한다.

자넨 날 수집했네. 흐흐.

손석희 앵커가 국보급 동안임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실력, 지성, 언변, 그리고 약간의 고집이 이런 식으로, 이런 배합으로 결합되어 있다면, 이런 멘트는 충분히 보상 가능하다고 짐작된다.

자넨 날 수집했네. 흐흐.

자중하고, 책으로 돌아가자. 이것만은 확실하다.

주커먼이 30대의 매혹적인 기혼 여성 제이미를 유혹하는데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유혹 자체는 매우 강력하게 작동했다.

아무도 못 말리는 다혈질 로체스터의 간절한 애원도, ‘나쁜 남자’의 전형 히스클리프의 죽음을 넘나드는 절절한 외침도, 사랑 때문에 차도남에서 젠틀맨으로 변신한 다아시의 따뜻한 구애의 말도 이렇게까지 감동적이지는 않다.

주커먼의 담담한 이 발언은 그 모든 말들 위에 있다. 주커먼은, 그 모든 남자주인공들 중에 최고다. 갑 중의 갑이다.

자넨 날 수집했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4-11-17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책이 이런 내용이었어요? 필립 로스는 좋았다가 [포트노이의 불평]이 너무 어려워서 주춤하게 됐거든요. 그런데 올리신 글의 인용문을 보니 아, 읽어야겠구나 싶어져요. 저는 제가 젊은 여자가 되어 어떤 칠십세 노인의 `자넨 날 수집했네`에 크게 반응이 되진 않을 것 같은데(상황은 근사하지만!), 반대로 젊은 남자를 유혹하고 싶은 칠십세 할머니가 되어볼 순 있을 것 같아요. 지금 그렇게 해본 다음에, 혼자 막 짜릿했어요.아, 사랑을 해야 사람이 사는 것 같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고요. 아마 칠십세 할머니가 되어서 젊은 남자에게 `자넨 날 수집했다우` 라고 말하는 건, 음, 좀 어색하고 상대가 껄끄러워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를 유혹하고 싶은 마음이 꿈틀댄다면, 그건 참 좋을 것 같아요.

올리브 키터리지도 칠십이세에 남자친구를 사귀었어요. 물론, 남자친구도 비슷한 연배였지만. 히히.
좋으네요, 이 책. 저도 보관함에 슬쩍 밀어 넣습니다!

단발머리 2014-11-17 09:03   좋아요 0 | URL
전, 올해의 발견으로 <필립 로스>을 꼽고 싶어요. 푸하핫~~
너무 근사하구요. 빠르게 치고 빠지는데, 완전 반해버렸어요. [미국의 목가] 읽고, 많이 어려웠거든요. 물론, 이 책도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책은 [미국의 목가]만큼은 아니네요. 다락방님은 [포트노이의 불평]을 읽으셨군요.

저는, 들이대는 어떤 칠십세 노인이 필립 로스 외모라면, 생각해 볼 용의가 있습니다. 이런 외모로, `자넨 날 수집했네` 멘트를 날려준다면요. 저는 칠십세 할머니가 되어 젊은 남자에게 ˝자넨 날 수집했네˝는 조금 어려울 듯 해요.
왜냐고 묻지 마세요. 생각만 해도 부끄럽습니다. --;;;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팻 캐바나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그녀가 이해된다고, 그녀의 말이 이해된다고, 말할 때, 나를 비난하지 말기를. 나는 그녀가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그녀의 생각이 바르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녀가 이해된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녀가 이해된다.

몇 년 동안, 나는 가끔씩 늙은 남편의 죽음에 대해 한 여성 작가가 쓴 글을 떠올릴 때가 있었다. 비탄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녀는 자기 내면에서 ‘난 자유야’라고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진실의 목소리를 들었음을 시인했다. (113쪽)

 

죽어가는 남편, 비탄에 빠져 있으면서도 내면에서 들리는 작은 목소리.

이제, 난 자유야.

그 여성 작가를 이해하는 나. 그녀의 마음이 이해되는 나. 여기의 ‘나’는 ‘내’가 아니다. 지금 내가 뭐라고 말했던가. 아니다. 위의 문장은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내가 쓴 게 아니다.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은 무엇이냐? 리뷰냐? 페이퍼냐? 에세이냐? 아니다.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은 소설이다. 소설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소설이다.

소설 속의 ‘내’가 말한다.

나는 그녀가 이해된다. 죽어가는 남편을 보고 있는, 비판에 빠져 있는 한 여성, 그 여성의 내면에서 들리는 작은 목소리.

난, 자유다.

 

결혼했다고 해서, 다 사랑을 아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랑의 시간이 생활이 되었을 때, 더 큰 신뢰와 더 깊은 실망의 롤러코스터와 같은 시간이 있다. 갈등의 시간을 보내고 난 뒤, 내 옆에 있는 사랑을, 사랑의 눈길을 보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우리는 30년을 함께했다.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서른두살이었고, 그녀가 죽었을 때는 쉰여섯 살이었다. 그녀는 내 삶의 심장이었다. 내 심장의 생명이었다. (111쪽)

 

눈으로 문장을 읽어가다가 여기에서 멈추고 말았다.

그녀는 내 삶의 심장이었다. 내 심장의 생명이었다.

30년을 함께 산 아내를 회상하는 한 남자의 고백이다. 그녀는 내 삶의 심장이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있구나. 사랑에 빠진 또 한 명의 남자가 떠오른다.

 

 

[김대중 자서전]을 읽은 적이 있다. 누구였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한국사에 정통한 학자가 말하기를, 한국사에 대해 알고 싶으면 이 책을 읽으면 된다고 했다. 한국 현대사의 모든 주요한 사건은 ‘김대중’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나는야, 김대중 대통령님을 매우 사모하고 사랑하기에 읽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그 분을 많이 애정하지 않는다면, 책 곳곳에 그 분의 사심 없는 자랑에 맘 상할 수도 있겠다. 예를 들면 이렇다. “(그 어려운 문제를) 내가 가서 바로 해결했다.” “(미국의 주요한 책임자를) 내가 직접 만나 오해를 풀 수 있었다.”

 

[김대중 자서전]의 발행 즈음에 김대중 대통령님의 마지막 일기가 샘플북 형태로 유통된 적이 있었다. 나도 한 권 갖고 있었는데, 사진 한 장 올려보려 찾아보았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얇은 샘플북은 잃어버렸는데, 읽었던 글 한 대목은 잊히지 않는다.

 

0월 0일 0요일

오늘은 하루종일 아내와 함께 있었다. 책을 읽고 정원을 둘러보았다. ... 둘만 있으니 정말 좋았다. 아내와 같이 있는게 즐겁다.

 

 

정확한 내용은 아니겠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이 일기를 쓰실 무렵에 김대중 대통령의 나이가 83세이시다. 결혼 생활 50년 이상이다. 이휘호 여사는 아내이자 정치적 동지로서 각별한 사람이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아내와의 하루, 아내와의 시간을 이렇게도 행복해 하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아내를 이리도 사랑하는 사람을, 아내를 이리도 애정하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여기, 이 사람을 빼고 말이다.

나는 단순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랬던 건 내게 행운이자 악운이었다. 일찍이 내 머릿 속에 떠오른 말들이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하건, 무엇을 하지 않건 모든 면에서 아내가 그립다.’ 이 말은 내가 어디에 있고, 내가 누구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나 스스로에게 반복했던 말 중 하나였다. (134쪽)

 

자신보다 그 사람을 더 사랑하는, 자신보다 그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이런 사랑이 있다.

아내가 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는 한, 그녀는 내 기억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물론 아내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생생히 살아 있다. 그러나 나는 아내를 기억하는 가장 주된 사람이다. 만약 그녀가 어디엔가 존재한다면, 그녀는 내 안에 내면화되어 존재한다.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자살을 할 수 없는 이유 또한 그러했고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자살하면 나 자신만이 아니라 아내까지 죽이는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148쪽)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는 주로 아내와 함게하는 것을 의미했다. 나 혼자서 하길 좋아했던 것에 대해 말하자면, 나중에 아내에게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는 즐거움이 얼마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것 말고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일까? (133쪽)

 

30년을 함께 하고도, 더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함께 하고 싶은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맞다. 슬픈 진실은, 모든 사랑 이야기는 잠재적으로 비탄의 이야기(60쪽)라는 것이다. 우주가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더 슬픈 건, 그렇게도 어렵고 힘든 일을 그 사람 없이 해내야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을, 혼자 헤쳐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 가장 외롭고, 슬픈 일을 말이다.

더 힘든 건, 긴 시간을 함께 해왔던 친구들마저, 오랜 우정을 나눈 친구들마저, 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친구들은 어서 아픔을 털고 일어서라고 한다.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그를 외면한다. 힘들어하는 그를 채근한다. 일부 친구들과는 절교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이제 그만 울음을 그치라는, 이제 그만 일상으로 돌아오라는 이 쉬운 말들은, 심장을 잃은 그에게 너무나도 가혹하고 잔인하다.

아내를 땅에 묻고 돌아온 지 한 주가 지났을 때 받은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내게 묻는다.

“그래, 어떻게 지내? 주말 도보여행 떠나나?”

나는 1~2초 정도 수화기에 대고 고함을 지른 후 전화를 끊는다. 그건 안 된다. 주말 도보여행은 내 삶이 평탄했던 시절, 아내와 함께 했던 일이다. (123-4쪽)

 

연애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연애는 많이 못 해봤는데, 그에 비해 연애 편지는 많이 받았다. 사과 한 박스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된다고 수줍게 밝혀본다. 15장짜리 연애편지를 받았는데, 읽는데도 한참이 걸렸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기에, 남의 연애 편지 대하듯, 그래에?? 하면서 성의 없이 읽어내려가고 있었다. 아, 나는 그 때 얼마나 철없었는지. 나는 다른 사람의 마음도 내 마음처럼 소중하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을 목적으로 한 내 감정만 중요한 줄 알았지, 나를 목적으로 한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했다. 나는 그런 철없는 10대였다.

아무튼 14장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이었다. 15장째 장에는 다른 이야기 없이, 편지지 가운데에 이문열의 문장만이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정확히는 아니지만, 대략 이런 뜻의 문장이었던 것 같다.

“이 세상에는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심장을 가진 사람도 있다. - 이문열

내가 그런 사람이야.“

나는 허걱, 하고 놀랐고, 어머, 하고 무서웠다. 책에서나 보던 그런 사랑이었다. 이미, 나는 그런 사랑을 하고 있었음에도, 나역시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심장 때문에 몸져 누워 신음했음에도, 또 다른 사랑, 한 사람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심장의 사랑이 나를 향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 나는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무서웠다.

그저께 청소기를 돌리는데 그 편지가 생각났다. 한 사람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심장으로 나를 사랑한다던 그 사람은 지금도 나를 사랑하고 있을까? 만약, 내가 그 사람과 결혼했었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서 ‘줄리언 반스가 아내에게 바치는 것과 같은 순정의 사랑’을 받고 있을까? .....

그 사람을 무시해서도, 그 사랑을 가벼히 보아서도 아니지만, 난,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은 지금의 나를, 내 남편처럼 사랑해주지 못할 것이다. 그 사람이 하나의 심장으로 사랑한다던, 10대의 나는, 피아노 치는 ‘나’이고, 노래 부르는 ‘나’이고, 웃고 있는 ‘나’일 테다. 건강한 ‘나’이고, 정도된 ‘나’일 테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국적불명, 정체불명의 이상한 김치찌개를 내놓는 ‘나’이고, 와이셔츠를 다려놓지 않아 영상 9도에 “반팔입고 가세요~” 하는 ‘나’이고, “자기야, 내 생일에 뭐 사줄거야?”라며 아이처럼 채근하는 ‘나’이다. 본능과 욕망이 가감없이 보여지는 ‘나’이다.

2001년에 결혼했으니, 올해로 결혼생활 14년째다. 다시 한 번 굳히 밝히자면, 저기 위의 모든 문장들은 소설 속의 문장이고, 그 문장 속의 ‘나’는 현재의 ‘나’, 지금의 ‘나’가 아니다.

나는, 사랑을 믿는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4-10-25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편지를 받아 보셨다니... 놀랍군요.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심장을 가진 사람으로 사는 게 행복할까요, 불행할까요?

저는 말이죠, 결국 부부애밖에 안 남을 거라고 봐요. (나중에 자식들은 다 분가하게 되어 있고요)
제 선배가 남편과 이혼하려 했는데 남편이 이상 증세가 보여 병원에 입원하게 되니 이혼을 접더라고요.
큰 병 걸린 남편을 버릴 수 없대요. 어떻게 자기 혼자 잘 살 수 있느냐는 거죠.
그러고 잘 살다가 남편이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몰라요.
그게 부부라고 봐요.
버리고 싶을 만큼 열정 없고 버리고 싶을 만큼 밉다가도 병에 걸려 누워 있다고 하면 달려가게 만드는 것, 그게 부부라고 봐요. 그 끈끈한 정을 부부애라고 봐요. 연애 시작할 때 느끼는 뜨거운 사랑보다 더 신뢰할 만한 사랑이죠.

단발머리 2014-10-27 08:31   좋아요 0 | URL
네... 전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심장을 가진다는게 행복한 일일거라고 생각했었어요. 10대에는요.
그런데, 지금은 그게 가능한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좀 무섭기도... 하구요.

결국 부부애라는 말씀에 많이 공감합니다. 12살, 9살도 벌써 독립을 준비하더라구요.
저는 신랑이 많이 밉지는 않으니까, 미운정 빼고 고운정으로만 해야 되나요? ㅋㅎ
그런 사랑이 더 신뢰할 만한 사랑이라는것에 동의합니다.

2014-10-25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0-27 0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0-26 1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0-27 0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