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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줄리언 반스의 책이었는지, 폴 오스터의 책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책이었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데,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요즘엔 뭐 읽어?”
“응, 지금은 츠바이크 읽고 있어.”
“세계 문학 알파벳 순으로 읽는 거야? 츠바이크(Zweig)면 거의 다 끝나가네.”
이런 식이다. 나는 Stefan Zweig면 S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이 이야기라도 안 한다면, 이 슬픈 이야기를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아, 하릴없이 적어 보았다.
짧은 소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편지를 읽기 직전에 여유로운 남자의 모습과 알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온 의문의 편지, 그리고 편지를 다 읽은 후에 충격을 받은 남자의 모습. 물론 소설의 대부분은 편지 내용 속에 들어 있다.
여기 한 남자를 사랑하는, 한 여자가 있다.
당신이 지금도 여전히 저를 사로잡는 특유의 성마르면서도 경쾌한 동작으로 차 발판에서 뛰어내려 집으로 들어가려 했지요. 무의식적으로 당신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오는 쪽으로 다가서다 하마터면 당신과 부딪칠 뻔 했습니다. 당신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감싸는 듯한 눈빛으로, 그래요, 다정한 듯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았고 제게 미소 지었습니다. 네, 다정했다는 것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네요. 그때 당신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허물없는 사이처럼 말했지요. “정말 고마워요, 아가씨.”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하지만 전 바로 그 순간 당신의 부드럽고 다정한 눈빛을 느낀 그 순간부터 당신에게 빠져버렸습니다. (99쪽)
<별그대>에서 만화방을 운영하던 홍진경은 또래 여자아이를 좋아하는 남자애에게 말한다.
“그래, 그렇다니까. 예고 같은 건 없어. 그렇게 훅 들어오는 거야. 사랑이란 게 그래.”
드라마를 보여 제일 집중했던 건, 그리고 오롯이 집중하고 싶었던 건 단연 독보적 남주 김씨의 말과 행동이었지만,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건 홍진경의 대사였다. 사랑은 그렇게, 훅 들어오는 거라는 것.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짐작도 못하는 사람, 자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그녀는 말한다. 당신의 부드럽고 다정한 눈빛을 느낀 그 순간부터 당신에게 빠져버렸습니다. 그녀를 행복하게 했는지, 아니면 그녀를 불행에 빠뜨렸는지, 사랑에 빠지지 않은 모든 제3자들의 판단을 거부하는 이 아름다운 사랑은 이렇게, 이렇게 쉽게, 이렇게 짧은 순간에 시작되었다.
당신은 놀란 듯이 바라보았지요. 전 당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나를 알아봐, 제발 나를 알아보라고. 저의 눈빛은 절규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친절하게 미소 지었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다시 한 번 키스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저를 알아보지 못했지요. 전 황급히 문 쪽으로 갔습니다. (144쪽)
이 소설 전체를 다섯 음절로 줄이면 이렇게 된다. 나를 알아봐.
이 소설 전체를 아홉 음절로 줄이면 이렇게 된다. 제발 나를 알아보라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난 잘 모르겠다. 자신이 귀여워한 예쁜 아이를, 자신이 유혹한 순결한 처녀를, 갖고 싶어 안달 났던 화려한 창부를, 어쩌면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있나.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열 셋, 어린 소녀가 열 여덟의 어여쁜 숙녀가 되어 나타났을 때,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 어린 소녀가 희망 없고 헌신적이며, 너무나 굴종적이고 애타게 기다리는 열정적 사랑(101쪽)으로 그를 사랑했다 할찌라도 한창의 나이, 청년의 그는 소녀의 순수한 사랑을 알아채지 못 했을 수도 있다. 열 세 살의 여자아이가 열 여덟살의 아가씨가 되어 나타났을 때, 그래, 못 알아볼 수도 있다. 그런 그를 이해한다.
하지만, 긴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그녀를 잊어버린다. 그녀를 잊어버리고 그녀를 찾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로부터 버림받은 그녀가 말한다.
전 당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전 당신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합니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동시에 금방 망각하고, 열중하는 동시에 이내 불성실한 모습 그대로 전 당신을 사랑합니다. 늘 그래왔고 지금도 그런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합니다. (123쪽)
열 여덟 어여쁜 숙녀에게서 열 세 살 소녀의 모습을 찾아내지 못한 그를 이해한다. 하지만, 열 여덟의 숙녀가 스물 아홉의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나타났을 때,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도대체,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뜨겁게 사랑하지만 금방 망각하고, 열중하는 동시에 이내 불성실한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당신은 바깥 출입문에 못 미쳐, 외투 보관소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나오자 당신의 눈이 밝게 빛났습니다. 미소 지으며 서둘러 저를 맞아주셨지요. 그때 전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당신이 저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예전의 그 아이, 그 소녀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지요. 당신은 저를 낯모르는, 처음 보는 여인으로 다시금 붙잡은 셈이지요. (138쪽)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처음 보는 여인으로서 자신을 붙잡는 걸 알았을 때, 그녀의 절망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이미 그의 노예 다름 아닌 그녀는, 그녀를 청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럼 언제 만날 수 있을까요?”
“당신이 원할 때 언제든지요.”
“혹시 지금도 가능할까요?”
“네, 가시지요.” (139쪽)
끝까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남자, 자신의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 자신을 거리의 여자로 대하는 남자, 지난 밤 사랑을 고액지폐로 계산하려는 남자. 평생을 바쳐 사랑한 남자가 자신을 그렇게 대한다는 걸 알았을 때, 참담한 그녀는 서둘러 방을 나선다. 나는, 어떻게, 그녀가 눈물을 머금은 채로 그대로 그의 방에서 나올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에게 소리치지 않고, 그의 뺨을 때리지 않고, 어떻게 그 방을 나올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남아 있는 그 방을 나선다.
서둘러 나가다가 현관 앞에서 하마터면 당신의 하인 요한과 부딪칠 뻔했습니다. 그는 부끄러운 듯 황급히 옆으로 비켜서더니 제가 나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어요. 그 일 초 동안의 짧은 순간에 - 당신 듣고 계신가요 - 제가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그를, 나이 드신 그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그의 눈길에 움찔하는 광채가 비쳤습니다. 그 짧은 순간 - 당신 듣고 계신가요 - 그 일 초의 순간에 그가 저를 알아보았던 겁니다. 어린 시절 이후로 한 번도 저를 본 적이 없는 그분이 말입니다. 저는 하마터면 그에게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 그의 손에 입을 맞출 뻔했습니다. 전 당신이 저에게 채찍처럼 휘두른 그 지폐를 얼른 머프에서 빼내어 그분께 슬쩍 쥐어주었습니다. 그는 놀라 떨면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저에 대해, 어쩌면 당신이 평생 해온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감지했을 것입니다. 모두가 저를 떠받들고, 모두가 저에게 잘해주었는데 ...... 오로지 당신, 오직 당신만이 저를 잊어버렸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당신만이 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144-5쪽)
나는, 이런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잘 모르겠다. 자신을 잊어버린 그를 원망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사랑을 한결 같이 지켜가는 이런 사랑을 말이다.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이런 사랑은 모른다. 나는 모른다.
내 결혼식에 꼭 와라, 니 결혼식에 꼭 갈게, 그래, 꼭 와, 어차피 넌, 내 결혼식에 오게 될 테니까. 시답잖은 농담. 연애편지를 손에 들고 무조건 찾아갔던 그 애가 다닌다는 교회. 불 꺼진 교회를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천 번도 더 돌려보았을 그 애의 전화번호. 백번은 들었음직한 그 애의 ‘여보세요’. 그 애를 생각하며 지켜본 수많은 저녁 놀. 그 애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항상 설레었던 00서적에서의 몇 시간. 베이지색 바지에 청자켓. 여기저기서 보이는 그 애. 그 애의 모습.
나는 잘 모르겠다. 내게는 사랑이라고, 사랑이었다고, 말할 만한 사건이, 추억이 없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 숨쉬고 있었던 그 모든 시간을 백번, 천 번 다시 되새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고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사랑한 그녀가 이해된다. 그리고, 도저히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을 잊어버린 왜 그를 사랑했는지, 왜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해요. ………… 행복하세요.
끝까지 자신의 사랑을 지킨 그녀의 편지는 이렇게 끝난다. 그녀의 삶과 함께 말이다.
끝까지 그녀의 순수한 사랑을 알아채지 못한 그만 남았다.
낯선 여인으로부터 온 편지와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