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활용품을 종류 별로 담은 4~5개의 비닐 백을 왼손만 들었고, 오른손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일을 신성하고 고결한 의식의 한 단계처럼 간주해 자신을 따뜻하게 보온하고 절대 부딪힐 일 없는 엘리베이터 문으로부터 조심하며 가만히 공중에 정지해있는 것도 시시포스의 돌 굴리는 일 만큼 어려운척하며 곤욕스러운 왼손은 태어날 때부터 외면당해야 하는 것처럼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일층으로 내려갔다.
재활용품을 바닥에 탁하고 내려놓은 순간. 비닐 백을 들어야 하는 운명에서는 벗어나지 못했지만, 다행히 왼손은 이번에는 하나의 비닐 백만 가볍게 들면 되었고, 그 고귀했던 오른손은 다행히 마른 폐지들을 들어내기도 하고 바나나 우유 통의 바닥에 원래의 양이었으면 두렵지도 않았겠지만 이미 대부분은 몸속으로 가버리고 얼마 남지 않아 공기의 건조함에 액체에서 고체로 상 전이를 시작하는 바나나 우유가 통이 뒤집어져 있어서 손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위협을 느끼며 그 통을 지구를 보호하기 위해 규정된 하지만 얼마나 실제적인 의미를 가지는지 불투명한 룰을 어기고 비닐에 쌓여있는 잘못된 그 통을 집어내기도 하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일수록 더욱 덕을 행하라는 한 번 들으면 각인되어 사로잡히는 그 가르침 때문에 이미 쌓여있는 비닐에 드리 부운 나의 비닐 저 바닥에 하필이면 들어가 있는 바나나 우유 통 보다 작지만 더 많은 상전이 중이고 피부에 묻으면 발효되는 듯한 냄새를 나게 하는 요구르트 병을 발견하고 부르르 떨며 꺼내기도 하고 이 모든 것이 자신이 조금 전까지도 엘리베이터에서 누렸던 호사와 아무도 없는 공기에게서 받은 존경을 눈물 흘리고 땀 흘리며 그리워하고 억울해하다 결국에는 또 그 비닐에 싸여 비닐 재활용품 비닐 백의 무게를 가늠할 수 없게 무겁게 한 와인병의 코르크 마개를 조금 전 왼손을 외면하듯이 또 그렇게 외면하고 말았다.
경쾌한 왼손과 억울하고 처량한 오른손이 일을 다 마치고, 이제 서로 세면대에서 지난날의 오해와 비방과 무시를 씻어내기 위해 다시 엘리베이터로 발을 돌렸을 때, 동화책 전집 옆에서 까만 박스가 눈에 띄웠다. 이제 화해하기 시작한 왼손과 오른손도 긴장했다. 발은. 발은 예측하지 못하는 것에 가장 취약한 발은 그대로 멈추었다. 어두웠지만 미간을 찌푸릴 필요도 없었다. 달빛에 그리고 재활용품을 담고 있는 거대한 가마니 산의 틈 사이로 비치는 여러 집들의 어렴풋한 불빛에 좀 전에 버린 와인병에 담겨있었던 그 와인색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펭귄 클래식이다. 그리고 어림짐작으로 5권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면. 그러면. 그렇다 그것은 레 미제라블이다. 빵 훔치고 억울하게 옥살이 하다 신부님께 감격하고 시장도 되었고 그를 쫓던 형사를 개화시킨 그 레 미제라블이다. 레아 레아라고 슬프게 울부짖던 웃는 남자의 빅토르 위고가 쓴 레 미제라블이다. 사태를 파악한 발은 걸었고 무릎까지 가세해서 몸을 굽혀 이제는 완전히 연결되어 하나가 된 양손이 그 세트를 들어 올린다. 집의 공간을 점점 차지하는 책들을 사무실로 이동하기로 약조를 해두었기 때문에, 정말 아무런 걱정 없이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 계획도 모두 잊은 채 비닐 백이 아닌 5권을 감싸고 있는 세트 박스를 이미 데워진 왼손이 다정하게 잡고,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처럼 노동의 즐거움에 자신의 존재를 재 발견한 오른손이 축축한 물티슈도 기꺼이 잡아 그 박스를 정성스럽게 닦기 시작했다.
그렇게 분리수거하는 날, 레 미제라블 5권 세트를 얻게 되었다. 이 얻음이 그동안 사람들이 잘 가져가라고 비 오는 날 피하고 아침 일찍 한곳에 쌓아 두었던 전집 책들의 보상이라고 두 손도 무릎도 항상 좀 느리지만 발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