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에 있어 불친절한 분. 하지만, 초딩이 너무 어리석어 초딩에게만은 특별히 친절하게 가르쳐주시는 분. 그분이 캐릭터는 '햄릿'과 '돈키호테'가 있다 하셨다. 초딩의 어쭙잖은 기억이 맞으면... 최소한 '돈키호테'는 확실하다. 그런데 책이 참 두껍다.
끝도 없이 사유하고 고민하는 인간 '햄릿'과 좌우지간 무모한 '돈키호테' 이렇게 초딩은 해석했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의 전반부를 신나게 읽다가 '부조리한 인간' 장 어디서부터 갈피를 못 잡았다. 그는 철학자로서 이 책을 쓰지 않았다고 후반부에 나오지만 그것을 부정하기 싫었나보다. '부조리한 인간'에서 '돈 후안주의'에 나오는 '돈 후안'은 카뮈의 자화상이라고 한다. 돈 후안처럼 많은 아주 많은 여자를 끊임없이 만나는.
"어째서 드물게 사랑해야 많이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p109, 시지프 신화
저 말이 곱게만은 들리지 않는다. 불편한, 여자가 남자를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것에서 범위를 넓혀 '살아가는 것', '경험하는 것'으로 소재를 넓혀보았다 - 나는 지금 '사랑'을 주제하기보다는 '사랑'을 포함한 '삶'에 대해 사유해보려 한다.
카뮈가 '돈 후안'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양의 윤리학'이다.
"사물들의 심오한 의미를 믿지 않는 점이야말로 부조리의 인간의 특성이다" p113, 시지프 신화
이를 통해 그는 앞 장에서 거론한 가장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가장 많이 사는 것'을 복습하고자 한 것 같다.
"그리고 만약 나의 자유가 한정된 운명과 관련해서만 의미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때 나는 중요한 것은 가장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가장 많이 사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p92 시지프 신화
사유해본다. 카뮈는 '인간은 구원을 호소하지 않고 사는' 부조리의 인간을 추구한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의 모든 '한정됨'을 인정하고 받아드려 우리의 생이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느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를 추론하고 있다. p92의 말을 곱씹어 보면,
인간은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한정되어있다. 그래서 질보다는 양으로 살아가야 한다.
인 것 같다. 초딩이 놀이동산을 놀러 가 관람차를 타고 회전목마를 탈 시간이 3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면 '질'적으로 신나고 효율적으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 가장 재미있는 놀이기구를 타고 가장 맛있는 스낵을 먹으로 쫓아 다녀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카뮈는 재미가 없어 보여도 줄이 짧은 놀이기구를 많이 타고, 주문하면 금방 나오고 가진 돈으로 많이 사 먹을 수 있는 스낵을 먹으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혼란스러워하는 초딩에게 카뮈는 질문을 던진다. 초딩의 사유를 무기력하게,
"첫째, 사람들은 양의 개념을 충분할 만큼 심사숙고하지 않았던 것 같다" p93, 시지프 신화
획일화된 사회에서 보통의 개인이 - 우리는 역시 다 비슷비슷한 보통의 나와 당신이다 -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비슷하다고 내던진다. 카뮈는
"현대 생활의 제반 조건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동일한 양의 경험을, 따라서 동일한 깊이의 경험을 부과한다" p93, 시지프 신화
그리고 그는 슬쩍 가장 잘 사는 것보다 가장 많이 사는 것이
"현대 사회에세 어차피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비슷하니, 최대한 많이 경험하며 살고 거기에서 의식을 가지고 질 높게 살아라'
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초딩이 '가장 많이 사는 것'을 오해하며 읽었다고 말하듯이.
"부조리가 한편으로는 모든 경험에 차별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많은 양의 경험 쪽으로 밀어붙이고 있으니 말이다."
...
같은 횃수를 사는 두 사람에게 세계는 항상 같은 양의 경험을 제공한다. 이를 의식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p 95, 시지프 신화
"인생이 살아갈 가치가 있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먼저 들었다.
해설을 읽고 있지만, 인생이 살아갈 가치가 있느냐?라는 답은 명징하게 이 책에서 찾지는 못한 상태다. 아무튼.
'시지프 신화'는 이 대목에서 '바른 생활' 책이 되었다. '슬기로운 생활'이 되기에는 아직 초딩이 찾아 할 답이 많은 것 같다.
잠시 다른 주제를 꺼내 본다.
돈 후안이 마지막에 수도원에서 암살당한 것에 대해 카뮈는 이렇게 말했다.
"쾌락은 여기서 금욕으로 끝난다. 우리는 이 쾌락과 금욕이 동일한 헐벗음의 두 가지 모습일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p118 시지프 신화.
마찬가지로 나는 이번에도 주제를 확장한다. '쾌락'을 인생의 '기쁨, 행복, 희열' 등으로 '금욕'을 그 인생의 밝음을 위해 백조의 발이 되는 "인내, 노력, 노고, 고통" 등으로 확장해본다. 단순하게는 인생에서 즐거운 것과 힘든 것이다. 카뮈는 이 둘 다 헐벗은 모습이라고 한다. 원문이 어떤지 궁금한 대목이다. 어쨌든 '헐벗다'는
1. 가난하여 옷이 헐어 벗다시피 하다.
2. (비유적으로) 나무가 없어 산의 맨바닥이 드러나다.
이라고 한다.
인생에서 걸치고 있던 어떤 옷이 너덜너덜해져 벗겨지다시피 한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둘 다 정상적인 상태는 아님을 뜻하기도 한 것 같다. 희열을 느낄 때와 극도의 고통을 느낄 때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 유사하다고 하니 말이 되는 소리 같다. 둘 다 '시간'을 인지했을 때는 무상하리만큼 짧게 쏜살같이 지나 가버린 '과거'임에도 유사성을 가진다. 그래서 말하자고 하는 것이 둘 다 유사한 헐벗은 상태이니 헐벗지 않은 '인생이 무언가 제대로 걸치고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추구하라는 것인지, 둘은 비슷하니, 고통은 잠시이다 곧 쾌락이 올 것이다. 쾌락은 잠시이니 그것에 빠지지 말라. 식의 바르고 슬기로운 생활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무엇인지 모르겠다.
좀처럼 좁힐 수 없는 확장되기만 한 주제이다.
최소한 '고통은 잠시지만 즐거움은 영원하다'는 정도의 말은 내칠 수 있겠지만, 그래서 이 둘을 어떻게 의식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일 시험이 있는데, 오늘 너무 재미있는 일이 있다. 공부해야 할까? 그것을 가지고 놀아야 할까?" 정도의 선택은 일소할 수 있겠지만, 인생의 문제가 어찌 그렇게 간단할까?
초딩자체가 망상이 많으니, 이제 '돈키호테'를 읽어봐야겠다.
- 생각이 많아져 쏟아 내버리고 싶은 날에 초딩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