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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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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 던져져 있는 책을 아이와 함께 정말 우연히 같이 바라봤을 때, "제발 `존재`가 무엇인지 물어보지 말아다오"라고 중얼거리게 되는 그 `존재` 때문에 `참을 수 없는` (어떻게 보면 참 생리적인 표현) 과 `가벼움` (말 그대로 가벼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말로 둔갑해버린 책 제목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밀란 쿤데라의 결코 가볍지 않은 두께 (507 페이지)의 그 책을 읽었다.


이 책 첫 페이지의 시작인 "영원한 회귀란~"의 여섯 글자는 서점에서 이 책을 가볍게 들어 펼쳐 본 최소 만명 이상의 손님은 순식간에 이 책을 다시 내려놓게 했을 것이고, 다시 여덟 글자 후에 나타나는 "니체" 두 글자는 훨씬 더 많은 손님을 다음 책으로 급히 안내했을 것이다.


St Charles Bridge, Prague


그 유명한 축구 선수 파블 네드베드가 있는,

저 아름다운 St Charles Bridge가 있는 - 그래서 언젠가는 꼭 저기서 꼭 저 구도로 사진을 찍어 보고 싶은 -

체코가 소련의 침공을 받았을 때를 배경으로 한,

네 남녀의 참을 수 없는 번잡한 사랑 이야기다.


2015년도 아침 드라마의 소재로 쓰여도 손색없을 이 네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_-; 야한 장면도 많아 어른들을 위한 영화 감독마저 탄복할 만한)


기원전 6세기 파르메니데스,

50프랑을 빌려주고 그 돈을 갚으라고 하니, 빌린 사람이 "그래야만 하는가?"라고하자 "그래야만 한다!" 라고 했고,

이것을 자신의 작품번호 135 마지막 4중주 4악장의 핵심으로 만든 베토벤 -_-;

이름만으로도 심연에 빠뜨려주시는 니체,

또봇의 근원이신 `변신`의 카프카,

남녀의 참 기괴한 주제에서 단골로 나오시는 오이디푸스,

6세 이하의 (특히) 남자아이들이 듣기만 해도 까르르 넘어가는 "똥" 문제로 죽은 스탈린의 아들까지

정말 어마어마한 인물들의 사상과 일화로 버무려지고


베르나르의 "나무"에 나오는 생각만 하고 싶어 자신의 모든 신체 기관을 없애고 유리병에 뇌만 남아 생각에 생각을 수십만 층의 깊이만큼 하는 사람과 같은 밀란 쿤데라가 1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위에 거론된 철학가, 사상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자신의 생각을 또 버무린다.


게다가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쉽게 만들어져 문자가 없는 아프리카 몇몇 국가에서 사용되고 출장 온 인도인은 일주일 만에 배운다는 한글을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언어 중의 하나인 아이슬란드 어로 둔갑시켜 번역한 것도 이 책의 무거움에 제대로 한몫을 한다.

(이 책의 이런 못마땅해 보일 어려운 번역이 나쁘지만은 않다. 처절한 상황에서 더 처절한 상황이 계속되면 희열을 느끼듯이)


이런 참을 수 없는 무.거.움. 으로 쿤데라는 - 그리고 역자도 동조해서 - 우리 인생의 덧없는 가벼움을 이야기한다.


무엇인가 정의하는 가장 쉬운 방법 중의 하나가 그 반대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는 아래와 같은 대목으로 인생의 가벼움을 정의해주었다.


"진정 심각한 질문들이란 어린아이까지도 제기할 수 있는 것들뿐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가장 유치한 질문만이 진정 심각한 질문이다"


Milan Kundera


1929년 생인 이 거장의 다음 문장은


"프란츠의 아버지가 느닷없이 어머니를 버리고 떠나 어느날 문든 어머니 혼자 남게 되었던 것은 그의 나이가 열두 살쯤 되었을 때였다.

프란츠는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고 의심했지만, 어머니는 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평범하고 차분한 말투로 비극을 감추었다.

시내를 한 바퀴 돌자고 아파트를 나오는 순간, 프란츠는 어머니가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

그가 고통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흰 종이에서 활자들이 살아 튀어나와 그 `고통`을 나에게 내 피부밑 가슴에 내던져주는 것만 같았다.


나를 한밤의 거리로 내몰아 무수한 사색에 잠기게 한,

밑줄을 많이 그어 아끼는 연필이 몽땅 연필이 될 운명에 처하게된 만든,

책 귀퉁이를 너무 많이 접어 나팔바지가 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을 다시 또 읽어봐야겠다.

"진정 심각한 질문들이란 어린아이까지도 제기할 수 있는 것들뿐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가장 유치한 질문만이 진정 심각한 질문이다"

"프란츠의 아버지가 느닷없이 어머니를 버리고 떠나 어느날 문든 어머니 혼자 남게 되었던 것은 그의 나이가 열두 살쯤 되었을 때였다.
프란츠는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고 의심했지만, 어머니는 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평범하고 차분한 말투로 비극을 감추었다.
시내를 한 바퀴 돌자고 아파트를 나오는 순간, 프란츠는 어머니가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
그가 고통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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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7-03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봐야 하는 책들을 모두 미뤄두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집어들어서 첫 문장을 확인했습니다:-)
음.... 그러게요. 책을 내려놓게 만들 첫문장이로군요. ^^;;(새삼스러운 사실을 확인하고!ㅋㅋ)

저도 밑줄을 정말 열심히 그어놓았네요. (비록 모두 까마득 하지만. ㅜㅜ) 제에게(그 당시) 최고의 페이지는 477P, 이후 인 것 같은데 따로 댓글에 옮기고 싶은 구절이 있어서 남길래요. ^-^

˝전체주의적인 키치 왕국에서 대답은 미리 주어져 있으며 모든 새로운 질문은 배제된다. 따라서 전체주의 키치의 진정한 적대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인 셈이다. 질문이란 이면에 숨은 것을 볼 수 있도록 무대장치의 화폭을 찢는 칼과 같은 것이다.˝(364P)

수많은 사유들이, 독자의 상황에 따라서 진하게 자극을 주네요. 이래서 쿤데라,쿤데라 하나봐요. (저는 책의 연보를 확인하기 전만해도......쿤데라씨가 살아있는 작가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ㅜㅜ 왠지 너무 고전같은.....무거운 존재감...^^ )

프레이야 2015-07-02 0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먼저 책 나중, 으로 접한 이 작품. 단연 최고의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저 인용구는 기억에서 지워졌지만 들춰보면 저도 밑줄들이 대열을 이루고 있을 겁니다. 페이퍼 재미나게 읽었어요. 카렐교의 저 풍경은 미명이나 해 질 녘이라야 할까요? 아로님 페이퍼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 크리톤 파이돈 향연, 문예교양선서 30
플라톤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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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


소크라테스 (Socrates, BC 470/469 - 399)는 "너 자신을 알라"로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해서 좋다" 것과 같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철학자이다.

좀 더 꼬집어 말하면,

사계절이 뚜렷해서 더 많은 의류와 생필품, 서비스가 필요해 오히려 불편할 수도 있는데, 우리는 법전과 같은 교과서의 말만 그대로 믿고 특별한 비판없이 각인하고 있다.

게다가 불행하게도 부정적인 의미가 조금 더 느껴지는 "네 분수를 알라"라는 말이 "너 자신을 알라"의 확장형처럼 쓰이기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가장 슬픈 것은 "소크라테스"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알고 있기 때문에, 단 한 번도 그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조사해보거나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나"로 국한 시켜 쓰고 싶었는데, 서두의 출발이 "우리나라는 사계절이~"로 시작해서 부득이하게 "우리"를 계속 썼다)

이 것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현명하지 못한 상태인 것 같다.

"다 안다고 생각하는 상태"


신은 소크라테스 보다 현명한 사람은 없다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의아해했다. 자신은 지혜가 없는데, 거짓말을 하지 않는 신이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했는지 오랫동안 고민을 했고, 이 문제를 풀 방법으로 자신 보다 더 현명한 사람을 찾아내기로했다.

즉, 반증을 해보기로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해봤는데, 그는 현명하지 않았다.


"그 사람도 나도 아름다움이나 선을 사실상 모르고 있지만 나는 그보다는 현명하다고,

왜냐하면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알지도 못하고 또 안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알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그보다 약간 우월한 것 같았습니다"

변명, p18


그리고 다른 현인이라는 사람들을 만나봤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그리고 그는 신이 "소크라테스가 가장 현명하다"라고 이야기 한 것은 자신을 한 예로 삼은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신의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오, 인간들이여, 소크라테스처럼 그의 지혜가 사실은 아무 가치도 없음을 알고 있는 자가 가장현명하다"

변명, p20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계속해서 세상 사람들을 만나서 신의 이 가르침을 전했다.

즉,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현명하지 못함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대화를 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많았지만, 정치가와 부자들에게는 미움을 사게 되었다. 이 미움은 소크라테스 전 생애에 걸쳐 계속 쌓이다가 그의 말년 (70세)에 아테네의 정치적 몰락과 함께 최고조에 달해 기소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독배를 마셨다.


소크라테스의 대화편 "변명"은 소크라테스가 재판에서 고발자들에 의해 생긴 자신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배심원들에게 풀어주며 말한 내용이다.

이 오해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의 지혜가 아주 보잘 것 없음을 알아야한다는 신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산파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꿰어져 맞춰지는 그의 논리 전개와 아테네를 사랑하여 아테네를 바로 잡으려는 그의 선한 목적은

배심원들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그의 지혜를 현실의 권력 앞에 머리 숙이게 하지 않았고 근소한 차이로 유죄 판결을 받고 독배를 마시는 사형에 처해졌다.

소크라테스의 철학, 인간애와 함께 "지성인"의 "용기"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크리톤"


테세우스가 승리하고 무사히 크레타 섬으로 돌아온 것을 감사하기 위해 매년 아테네는 델로스에 배를 보내 아폴론 신에게 제물을 바쳤는데, 이 기간 동안에는 사형을 금지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배가 출발하기 전날 열렸고, 그해 배는 유난히 늦게 도착해서 30이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사형은 바로 집행되지 않았고, 그가 감옥에서 기다리는 동안 "크리톤"과 "파이돈" 대화편이 이루어졌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의 친구 크리톤이 소크라테스에게 탈옥을 간곡히 부탁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이를 거절하는 대화 내용이다.

크리톤을 비록해 소크라테스를 따르는 많은 이들이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부조리가 가득한 아테네의 재판 결과를 부정하고, 소크라테스가 감옥을 탈출해 아테네를 떠날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간곡히 청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 것을 단호히 거절한다.

"법을 지키고 따라야한다"라고 평생을 말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그 말에 반한 행동을 어떻게 할수 있느냐라는 논지로 말했다.

지성인의 "지행합일"을 그는 죽음마저 덤덤히 받아들이며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파이돈"


"크리톤"과 함께 소크라테스가 감옥에서 나눈 대화를 기록한 것이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에게 탈출을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이 "우리는 위대한 철학자를 죽음으로 잃고 싶지 않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입니다."식의 논지에 인간의 영혼은 전생과 현세 그리고 내세를 통해 영원히 존재하며 자신은 죽음을 통해 명부 (죽은 사람이 간다는 영혼의 세계) 가서 신과 더 가까이 하게 되니 죽음이 두렵지 않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영혼이 불변한지 아닌지에 대해 논하게 되는데, 어떻게 소크라테스가 나와 같은 무교에 어쭙잖은 지식을 가진 범인들이 생각하기에는 황당한 이 논리를 상대에게 전할지 무척 궁금해서 재미있게 읽었다.

결과는 탄복할 만큼 대단했다. 감옥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영혼 불멸을 믿게된 사람들 사이에 나도 끼어 앉게 되었다.


여기에서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 아니던가"라는 말이 나온다 :)


"변명"은 소크라테스가 다수의 배심원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고 "크리톤"은 논지가 비교적 간단하고 길이도 짧다. "파이돈"은 반대되는 두 논지의 논쟁을 아주 길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산파법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

여기서 산파, 산파법은 소크라테스가 문답으로 지식을 전하는 대화법을 말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지식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준다는 뜻으로 "산파법"이라고 한다. 내 생각인데 이 명칭은 소크라테스의 어머니가 산파여서 더 그렇게 지어졌는지도 모른다 ㅎㅎ




"향연"


아가톤이라는 비극시인이 큰 상을 받고 잔치를 열었다. 이 잔치에서 "에로스"에 대해 손님들과 소크라테스가 찬양을 하며 "에로스"와 "사랑"에 대해서 논하고 대화하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에로스와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소크라테스는 논의의 중요한 논점인 "사랑의 대상"이 "생식"이라고 말한다. 동물들이 우성인 자손을 만들기 위해 우성인 상대를 찾듯이, 우리 인간도 그런 사랑의 대상을 찾는다고 한다. 이 것은 인간 개인에 국한 시켜서 이야기하는 내용은 아니고, 인간, 아테네, 더 나아가서는 인류 전체의 보존에 대한 이야기다. :)


제목 "닭 한 마리를 빚졌으니 자기 대신 갚아달라"라고 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죽으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여러가지 해석이 있고, 그중 의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헌납해달라는 해석이 가장 맞다고한다. 아테네에서는 병이 회복되면 의신에게 닭 한 마리를 바치는 관습이 있고, 이것은 소크라테스 자신이 이 땅에 온 것은 인간의 마음속 병을 고치기 위한 것이고, 인류가 참된 영혼을 가질 때 자신을 대신해서 의신에게 닭 한마리를 바쳐달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무지한 나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기 전까지는 그를 웅변과 논쟁에 최고로 뛰어난 철학자 (소피스트에 가깝게)로 생각했는데,

그의 모든 철학의 근간이 "인류애"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되니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마지막으로 너무나 인상적으로 보았던 "파이돈" 속 그의 말들을 옮겨보며 포스팅을 마친다.

"그 사람도 나도 아름다움이나 선을 사실상 모르고 있지만 나는 그보다는 현명하다고,
왜냐하면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알지도 못하고 또 안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알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그보다 약간 우월한 것 같았습니다"
변명, p18

"오, 인간들이여, 소크라테스처럼 그의 지혜가 사실은 아무 가치도 없음을 알고 있는 자가 가장현명하다"
변명, p20

"쾌락과 고통은 동시에 같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일은 없으면서도 그 중 하나를 추구해서 얻은 사람은 대체로 다른 하나도 어쩔 수 없이 얻게 마련이기 때문이야."
파이돈, p88

"여기에 한결같이 탐구하고, 들은 것을 대뜸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있군."
파이돈, p93

"다시 말하면 두려워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용감한 거야."
...
"그들에게는 잃어버리기 싫은 쾌락이 있고, 이 쾌락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몇 가지 쾌락을 삼가는데 이는 다른 쾌락에 압도당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쾌락에 정복당하는 것을 사람들은 방종이라고 부르지만, 그들에게는 쾌락의 정복은 쾌락에 의해 정복당함으로써 가능한거야.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그들은 방종하기 때문에 절제하게 된다는 말을 한 거야."
파이돈, p103-104

"모든 사물의 이와 같이 보편적인 반대 관계에는 또한 항상 진행되고 있는 두 가지 생성 과정, 곧 갑에서 을로, 그리고 을에서 갑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 있지 않을까?"
파이돈, p106

"그러나 자기 사진으로 돌아와서 반성할 때, 영혼은 다른 세계, 곧 순수하고 영원하며, 불멸하고 불변하는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네.
...
이러한 영혼의 상태를 지혜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파이돈, p125

"철학은 바로 죽음의 연습이 아니던가?"
파이돈, p127

"곧 그는 청중이 그의 말을 옳게 여기도록 애를 쓰는 데 반해 나는 오히려 나 자신을 확신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네. 나에게 있어서는 청중을 설득한다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아"
파이돈, p145

"영혼이 정말로 죽지 않는다면 생애라고 부르는 시기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영원을 위해서 영혼을 알뜰하게 돌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파이돈, p176

"마치 해저에 사는 생물이 자기는 물의 표면에 살고 있고 바다는 그것을 통해 해와 기타의 별들을 보는 하늘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으며,"
파이돈,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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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6-22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로님으로 하여금 영혼을 믿게 만든 대목이 참으로 궁금해집니다. :-)
짜라투스트라를 읽다가 포기한 이례로 철학서를 집어들기가 두려웠는데.. 또다시 도전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치네요...^^

저는 `앎`이라는 것이 `삶`과 `별개`로 작용한다면 불필요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지나치게 정의롭고 올바른 책들이 두렵습니다. ㅜㅜ
`나는 이렇게 살 수 없다.` ,`나는 이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사실만 확인한 경우가 있기에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사유들은 부담스럽더라고요. 이것도 연습이 필요한가 봄니다. 내가 꼭 이렇게 살아야 할 것 같은 기분에서 벗어나는 연습을요...ㅜㅜ;;

무튼 이런 사고를 하는 동력이 `인류애`라는 사실은 그저 경이롭습니다..^^
이 책을 소화하시다니! 무척 부럽습니다! +_+

초딩 2015-06-22 16:03   좋아요 0 | URL
무척 어떤 일을 고민하고 있다가 하얀이님의 댓글을 보고, 환기를 위한 즐거운 마음으로 (벗을 만난듯) 키보드에 손을 올려봅니다.

제가 소크라테스의 논지와 산파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통한 깨우침의 과정을 산파법이라고 해서 저도 즐겨 써보기로했습니다) 과정을 여기에 다시 옮겨 오는 것은 저에게 무척 힘들고 또 제대로 전달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략적으로 써보면, 제가 소크라테스를 따르는 사람들 곁에 끼어 앉게 된 큰 줄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저는 공대 출신이고 막연한 유신론자이지만 종교가 절대 없습니다. 수학을 과외활동으로 가르쳤고 프로그래머로도 오랫동안 일을해서, 더욱더 ˝사실˝이라는 기준이 저또한 팍팍하고 차갑게 현실적입니다.

2. 그러다 저는 최근 탈무드를 읽으며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똑똑하다는 유대인들은 왜 하느님을 철썩같이 믿고 그것을 바탕으로 지혜와 함께 선을 베풀며 내세를 준비할까?
어렴풋한 결론은, (종교의 그 큰 역할 중의 하나겠지만) 우왕좌왕하지 않고 올바른 하나의 길로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공동체가 나아간다면, 그 공동체는 번영할 것이다.
현재 유대인들은 지성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모두 성공한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이런 상태에서 몇몇 고대 사상가들을 비록해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게 되었습니다.
영혼의 전생, 현세와 내세를 통한 불멸을 소크라테스가 ˝중력은 모든 물체를 지구의 중심으로 잡아당긴다.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이 그 증거이다˝와 같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으로 증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나를 믿어라 내가 메시아다 식의 광신교적으로도 논하지 않았습니다.
˝변명˝이나 ˝파이돈˝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그의 말을 눈으로 따라가기 시작하면 그의 말에 ˝아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기가 아주 힘들어집니다. :)
그의 주된 논지는 (제가 짚어내기로는) ˝반대되는 상호작용˝ 이 었습니다. 긴 것은 짧은 것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고, 악한 것은 선한 것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듯이, 모든 자연에는 반대되는 상호 작용과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삶이라는 죽음이라는 육체와 정신 (영혼)에도 그 반대되는 것들은 필요충분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의 이야기를 다 읽고 있으면 그렇지 않습니다라는 말이 나오지 못하더군요)

여기까지 였다면 저는 감히 독후감에 영혼을 믿는 사람의 대열에 제가 같이 앉을 수 있다고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말을 쓸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다음 두 가지 입니다.
3-1. ˝변명˝에서 신이 소크라테스가 가장 현명하다고 한 것은 그가 그의 지혜가 보잘 것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저의 지식과 지혜는 정말 더 보잘 것 없을 것이고 그런 제가 영혼, 전생, 현세, 내세가 있다 없다라고 거론한 것 조차 현명하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의 귀는 너무 보잘 것 없어 아주 작은 소리도 못 듣지만 지구가 자전하고 있는 거대한 소리도 못 듣는다지요.
3-2. 그리고 ˝향연˝과 이 책의 ˝해설˝ 등에서 소크라테스의 인류애를 보았습니다. 가장 아테네 시민적이었기 때문에 가장 세계 시민적이었다고 말 하듯이, 그가 추구했던 것은
탈.무.드
에서처럼 모든 아테네 시민 (인류로 확대해도 좋겠습니다)을 깨우치고 올바르게 나아가게 하려고 한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길에는 탈무드처럼, 영원할 영혼을 위해 현세에서 ˝덕˝을 쌓기위한 올바른 행동과 사고를 하라였습니다.

이런 생각의 과정을 거치고나니,
설령 저의 눈 앞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고, 또 그 사과를 만지지 못하더도,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을 이유가 ([1] 공대 출신으로서도 더욱) 없었습니다. :)


초딩 2015-06-22 16:15   좋아요 0 | URL
앗 영혼에 대해 쓴다고 정신 팔려 더 하고 싶은 말을 못 썻습니다.
하얀님의 댓글로 어렵게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은 시간과 머리를 쥐어짜며 쓴 독후감의 시간 모두를 값지게 보상 받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비로그인 2015-06-22 17:40   좋아요 0 | URL
아로님의 댓글을 읽고 연필을 집어들어서 여러번 떨어뜨려 보았습니다. 중력이라는 작용이 이토록 생소하고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순간도 오는 군요.. ;_ ;

사실이라는 기준으로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을 저는 좋아합니다. :-) 어느 철학자의 논리에 빌어서 이야기해도 된다면, 제눈에 연필이 떨어지는 것은 말해질 수 있는 사실이지만, 그것의 작용이 중력때문이라는 것은 말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중력을 안 이후에 처음입니다!) 해봤습니다.

저는 기독교의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종교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로님께서 신의 존재는 믿지만 종교는 없다고 말씀하신 것에 저도 같은 상태라고 동질감을 표현했었죠.^^ 종교가 없게 된 과정은 다르겠지만 종교라는 개념을 대하는 태도는 같을 것이라고 추측했었습니다. (물론 그냥 혼자 편의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제가 종교적인 환경에서 있을때는 신앙이라는 것을 의심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종교를 잃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앙심의 경우를 어디에 놓을 것인가, 가 저는 종교의 핵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종교는 선택에 의해서 `존재`와 `무`가 개인의 영역으로 개입된다는 것이었죠. (말이 어려워서 죄송합니다.ㅜㅜ;;)

이렇게 저의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에는 저는 아로님의 (책을 읽고 나서 영혼에 대한 개념이 어떻게 달라지셨는지) 생각을 구체적으로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로님은 탈무드의 사상을 신앙하시는 것으로 제가 이해해도 되는 것입니까? (순수하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


저도 3인칭의 복수형을 사랑하고 싶지만 아직 저의 애정은 2인칭의 단수형에 그쳐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을 이해하지 위해서 질문하는 것에 다시 애정을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알아야겠다는 동기를 얻었습니다. 저는 책을 아직 읽지 못했기에 이야기의 핵심에 닿지 못하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ㅜㅜ 그래서 무리한 질문들을 늘어 놓았습니다. (__ )

저의 헛소리에도 실망하지 않으시기를 바라며. 저야말로 동기의 부여와 상념을 확장시켜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

초딩 2015-06-22 22:23   좋아요 0 | URL
:) 아주 긴 글을 썼다가 모두 지워버렸습니다. 그냥 이렇게 말하는게 좋을 것 같아서요.

어느날 홈플러스 옆 벤치에 큰애와 (이제 유치원생입니다) 잠시 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무척 좋았습니다.
정확한 대화는 기억나지 않지만, 자기가 나중에 나이를 먹으면 저는 어떻게 되는지 물어봤었습니다.
몇십년 후의 이야기겠지만 정말 너무너무 슬프고 그 후 몇달 동안 그 생각이 한 번씩 저를 괴롭혔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저는 유신론자이지만 내세나 영혼 환생 등을 과학적으로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영혼 불멸과 탈무드를 보고는, 이 책들과같이 생각하는 것이 생을 좀 더 긍정적이고 효율적으로 보낼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망각”이 인간의 슬픔을 꾸준히 잊게 만들지 않는다면 모든 괴로움에 인간이 살아 갈 수 없듯이,
어떤 것들은 그냥 믿지 않으면 (최소한 고대의 훌륭한 사람들이 생각한 것이니) 삶이 너무 어둑어둑 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

하얀이님의 질문에 동문서답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비로그인 2015-06-23 05:04   좋아요 0 | URL
댓글을 쓰고 지우고를 오랜 시간 반복했습니다. 여러가지 생각이 들고 반성도 하게 됩니다.
(좋은 벗이 되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__ )


다만 책을 읽지 않는 저이기에, 이 책의 논지와 아로님과의 대화의 맥락을 흐리지 않았는지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입니다.
그럼 거두절미 하고 제가 내린 결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번 댓글을 지우며 내린 결론입니다!^^)

개인인 저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공동체의 유대감과 사랑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직은 그저 `나`로서의 삶을 인정받고 싶은가 봄니다. 제 삶 이상의 살아감에는 관심이 없는 스스로를 반성했습니다. 물론 마음처럼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이 일 역시 노력이 필요한 것이겠지요.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택한 아로님과 같이 저도 저의 가족이 생기면 삶이 좀 달라질까요? 세상을 보는 시선이 좀 달라지나요? +_+ (하하하;;;)


많은 상념들을 생략하고 대답만 써서 답글이 불친절 합니다. ㅜㅜ
맑은 정신에 다시 내용을 보수 하겠습니다.

초딩 2015-06-23 06:14   좋아요 0 | URL
누군가의 생각을 배려하며, 저 자신의 생각에 자문하면서 연예편지를 쓰는 영화의 장면처럼 그 생각을 썻다지웠다를 반복해보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오랫동안 하지 못했고 잊고있던 것을 “상기” 시켜주셔서 감사하고 기쁠따름입니다.

하얀이님이 비록 이 책을 읽지는 않으셨다고해도, 저보다는 몇배의 책을 더 깊이 있게 사유하고 즐기며 읽으셨기 때문에 제가 참 많이 배웁니다 :)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으시게되면 제가 더 많이 부끄러울 것 같습니다.

개인과 공동체에 대해서 말씀하셔서, 잠시, 소크라테스의 “향연”의 내용을 상기하며 생각해보았습니다.
고결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소크라테스가 “에로스”의 사랑에 대한 대상과 행위의 목적을 “생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이 것을 우아하게 확장하면 “인류 보존”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우아함”을 빼면 동물의 “종족 번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의 보존을 위해 동물이 본능에 좀 더 따른다면, 우리 인간은 “지성”에 더 많이 따를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위해 헐리우드 영화처럼 인류를 구하는 영웅을 내세우기 보다는 자기 자리에서 자신에 맞게 잘 행동하는 “덕”을 강조한 것 같습니다.
저는 이 것이 각 개인이 자신의 자리에서 지혜롭게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해나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
아이가 열감기라 간호를 하며 잠을 설치다 5시경에 하얀이님의 글을 보고, 이렇게 또 잠시 남겨봅니다. :)
정신이 좀 혼미해져서 송구한 댓글을 남기는 저를 ^^ 익스큐즈 해주세요~



비로그인 2015-06-23 16:04   좋아요 0 | URL
송구한 댓글이라니요! 피곤하고 정신없는 중에서 제가 오히려 방해가 된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입니다. (아이의 열은.. 좀 내려갔나요??? 요즘 병원도 위험하잖아요...ㅠㅠ)

저의 오랜 친구는 지금 아이가 둘입니다. 큰아이가 4살, 작은 아이는 첫 돌을 기다리는 중이지요. 타지역으로 시집을 간 탓에 오랜만에 서울에 놀러와서 한 일주일 한 집에 머물렀습니다. (오늘 가는 날이에요.ㅜㅜ)
덕분에 저는 일주일간 라이브하게 아이둘을 키우는 친구의 삶을 공유했습니다. 정말 보통일이 아니더라고요. 훈육과 양육의 정도를,그리고 자신보다 더 아까운 존재를 지켜내고자 하는 친구의 모습에 순간순간 애잔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를 지켜보시며 마음을 졸이셨을 아로님의 모습이 살짝 상상이 되었습니다. ㅜㅜ

허영만 작가님이 식객에서 그랬다지요. ˝세상에 맛있는 음식의 수는 이세상의 어머니의 수와 동일하다˝고요. 음식은 식자재에 대한 이해와 먹는 사람을 향한 애정이 맛을 좌우하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저 문장을 곱씹어 보면 어머니라는 존재의 위대함을 상기하게 됩니다.
(저는 부모다 되는 일에는 자격이 필요한 것 같다고 자주 되뇌이며 뒷걸음질만 치고 있는 중입니다. ^^;; )


`지성`보다 `덕`이 중요하다는 소크라테스의 결론이, 지성은 개인을 위한 것이고, 덕은 타인을 위한 것이라고 연결을 지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은데.. 책을 읽으신 아로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기억을 더듬어서 이 이야기를 과학적으로(응??;;) 접근해보자면 `지성`은 `스칼라`이고 `덕`은 `백터`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결국 내가 아닌 타인을 사랑하는 그 방향성으로 인간이 가지는 `덕`의 정도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그 사랑의 성질이 아로님께서 말씀하신 `에로스`적인 사랑에서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변질된다면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꿈꾸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가져도 되겠지요?!^^

책의 논점에서 어느정도 멀리왔는지 저는 감히 추측도 되지 않습니다. (이미 멀어진 듯한? ^^;;)
그럼에도 이렇게 많은 상념들을 주고 받을 수 있어서 저는 그저 기쁘고 즐겁습니다.
정답을 맞추고 틀리고 보다는 그 답을 알아가는 과정이 왜 중요한 지를 다시한번 확인하는 시간이네요. ^^
이런 기분에 저의 도덕적인 개념을 대입해서 걱정하는 부분을 살짝 비춘다면.....음.. 저는 그저 아로님이 아이의 아버지는 아니기를 바라요.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영향을 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랑과 전쟁 무서워요;_;)

저의 실없는 소리에 잠시나마 웃음을 머금으셨기를 바라고, 아이의 빠른 쾌유를 기도합니다. (__ )



초딩 2015-06-24 11:04   좋아요 1 | URL
아이는 열이 내리고 이제 목의 붓기가 낳아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이가 세상에 나온지 1년이 조금 넘었는데 이런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미안함 마음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제가 아이를 얼마나 더 사랑하는지 가슴아픔을 통해서 더 알게 되었답니다

냅킨노트와 유대인 가족대화에 공통으로 나오듯이, 아이가 태어나는 그 순간 우리는 그전까지 보지못했던 또 다른 세상과 자신의 존재의미를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전과는 다르게 더 노력하고 실패하고 깨달으며 아이와 함께 커가는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덕”은 모든 사물이 제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사물은 인간도 포함할 것이고 그 인간의 덕에는 타인을 위한 것도 포함되는 것 같습니다. 지성은 그 덕을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게하는 컨트롤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너무나 멋지게 비유해주신 스칼라와 벡터는 지성을 통해서 우리 인간이 덕을 올바른 방향으로 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고의 비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에로스적인 사랑과 아가페적인 사랑에서는 먼저 에로스적인 사랑에 대해서 정의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향연”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에로스는 니체가 말한 “그리스도가 에로스라는 개념에 독을 탔다”라고 말한 이전 시점의 인류의 탄생에 관한 에로스라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소크라테스가 에로스신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는 “에로스적 사랑”과 “아가페적 사랑” 모두를 포함했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는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고 또 그것을 위해 올바르게 행동 (고결한 희생도 포함)하는 것을 소크라테스는 인류에게 가르치려한 것 같습니다.

유대인 가족대화 “여성성” 편과 이전 댓글에서 언급한 “포르토벨로의 마녀”에서는 남성성 위주의 세계가 되어 “결과”만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과정을 중시하는” 여성성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말하지 않아도 “결과 지상주의”를 통해 삐뚤어진 모습들은 지나칠 만큼 우리 주위에 팽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살아가는 저 또한 그것에서 자유롭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과정”이라는 것을 더 중요시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스티브 잡스도 “여정도 아주 좋은 보상이다”라고 말했지요^^
그래서 이렇게 하얀이님과의 대화 과정이 저는 지금 너무 즐겁고, 제 사상과 지식을 다시 돌아보고 필요한 부분은 더 채워나갈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 저는 하얀이님이 “청년” (제가 찾을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남자를 위한 단어 중의 하나로 생각해주세요)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네요 ^^ (성을 잘 못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 )
^^; 그리고 저는 아빠임에 틀임 없습니다.
제 서재에도 써뒀지만 “꽃은 아름답다”라는 감상을 표출하듯이, 책을 통해서 깨닫고 느낀 것들을 글로 쓰기 위해서 알라딘 블로그를 시작했습니다.
꽃이 아름답다라고 느끼고 탄성을 자아내는 것은 혼자 길을 걷다가 문득 할 수도 있고, 여러 벗들과 함께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알라딘 블로그에 독백이나 방백의 형태로 혼자 써나가도 좋고, 이렇게 많은 것을 교류하고 느낄 수 있는 벗들과 함께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비로그인 2015-06-25 16:33   좋아요 0 | URL
논점들을 너무나도 말끔하게 정리하셔서 치고 들어 갈 틈이 없습니다. (틈 좀 흘려주세요.^^ㅋㅋ)
이 댓글에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혹은 어떤 반문을 제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지만,(물론 하루 종일은 아니었지만!) 역시 수긍이 최선이네요. ^^

아직 미성숙한 저는 사랑이라는 개념을 `에로스`,`플라토닉`,`아가페`정도로 인지하고 있습니다. 특정 감정의 경지를 경험하지 못하여서 감정의 세분화가 가능한 것이 아닐까 스스로 의심한 적도 많습니다. 아로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고대의 에로스신의 사랑은 결코 `에로스에 한한` 사랑이 아니라고 이해하니 이제서야 `인류 보존`(우아하게 받아서:-))에 에로스적인 사랑이 불가피한 필요충분조건이라는 논리가 이해가 됩니다.

저는 대인관계가 완만한 편입니다.(네엡, 자랑이 맞습니다:-)ㅋㅋ) 당연하게도 주변에 동성이 많고요. 그들과 심정적으로 아주 가깝게 지내는 편입니다. 저는 이성애자가 분명하지만 특정 관계를 돌이켜 봤을때 동성에게서 연애(혹은 열애)의 감정을 느끼곤 합니다. 그것은 성적인 부분을 배제하고 느껴지는 감정입니다. 그리하여 저만의 사랑을 구별하여 정의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우정 역시 사랑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종류나 성질이 약간은 다른 것이겠지만요.
객관적으로 사랑을 구분하는 저는 그래서 아가페적인 사랑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대상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저의 친구요^^) 제가 사랑하는 그 대상이 자신의 아이를 바라보며 느끼는 사랑의 감정에 저는 범접할 수가 없습니다. 아로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것은 전혀 다른 세계이자 다른 의미의 존재이니까요.
그렇다면 저는 소크라테스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인류애`를 온전히 알아가기는 어려울 수 있겠어요. (ㅜㅜ)


마음이 무거운 일들이 있어서 기분을 환기하려고 서재에 들어왔는데..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 현실도피하는 스스로를 아릅답게 생각하지 않지만, 다시 기운을 내고 미뤄둔 일들을 시작해야겠지요..;;

무겁지 않게, 기분과 생각이 환기되는 정도로, 좀 더 좋은 벗이 되어가기를 바랍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름사람의 서재에도 관심이 많으니 서재도 공유하며 건강하게 책을 읽어가는 과정을 함께해도 좋겠습니다. ^^

남은 시간도 기분 좋은 시간이 되시기를 바라요. ^^ (물론 아이의 건강도 빠르게 회복하기를 기도합니다.ㅜㅜ)




초딩 2015-06-26 01:13   좋아요 1 | URL
어제 아침부터 술잔에 술을 흘리며 마시고 싶었답니다. “틈” 대신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가 없고 단지 제 신체의 일부가 싹둑 잘려 나가듯이 제가하는 일에 큰 사태가 생겼었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시의 어머니가 이혼을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토마시를 데리고 외출을 나갔지만 어머니는 신발을 짝짝이로 신은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그 날 아침 아이와 잠시 놀아주었답니다.
아침 햇살에 현기증을 느끼며. 그래도 토마시를 그 때 생각했던 것을 보면 지구종말적 사태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틈”이라는 말에 제가 별 소리를 다 하는군요 ^^ 세븐 베일즈라는 아주 예전의 책처럼 대인관계에 대해 말씀해주셔서 저도 서슴 없이 그날의 아침을 이야기하나 봅니다. :)
별도의 공간을 서재로 만들기 어려워 사무실을 온통 그렇게 만들고 있는데 아직 부족한 것이 많네요 ^^ 하지만 과정자체가 중요하고 만들어가는 것이 재미있으니 즐겁습니다.
“환기”는 참 좋아하는 말입니다. 머리가 먹먹해질 때 그렇게 환기할 수 있게 좋은 이야기 많이 나눠요~
아이는 많이 좋아졌답니다. :)

 
백년 동안의 고독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문학사상 세계문학 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김욱동 해설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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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을 받은 마르케스의 이 책에서 그의 ˝마술적 리얼리즘˝에 흠뻑 빠져 하늘을 나는 양탄자가 새 자동차 모델같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진다. 그리고 오래된 부엌 한구석에서 답답하리만큼 반복적으로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 왜 저렇게 살고 있지라고 자문하게되는 - 우리들 인생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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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6-20 0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저도 읽으려고 준비중인 책인데... 아로님의 서재에서 만나니 반갑습니다:-)

올해는 작정하고 고전을 읽겠다고 다짐을 했는데요, 고전이 가진 아우라에 뒷걸음질만 치고 있는 기분입니다.

허나, 역시 읽어야겠어요~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가 저는 늘 궁금하니깐요~^^

초딩 2015-06-20 10:1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하얀이님~ 제 작은 글을 반겨주시니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후 읽었는데 백년 동안의 고독의 향과 여운이 좀 더 강한 것 같습니다. 전개 방식과 마르케스의 글이 독특해서 더 그런것 같기도 하구요 :)
번역도 저는 좋았습니다~
 
이방인 알베르 카뮈 전집 2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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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15년에는 제아무리 카뮈라고해도 저렇게 멋있게 담배를 꼬나물고 책 표지에 나타나진 못했을 것 같다. :) -_-; 뒤쪽 표지는 세피아톤으로 더 크게 담배를 물고 계신다.


아침에 내린 커피가 다 떨어졌고, 아직 퇴근할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해서 (사실은 아닐지라도) 다시 커피를 내리듯이, 책장에 왜소하게 꽂혀 있는 이방인을 집어 들었다.

2008년에 인쇄된 이방인을.

해가 너무 강해서 해변에서 사람을 죽였다는 것만 기억나는 책.

사실, 중반 아랍인들이 나타나는 대목에서야 "아 내가 이 책을 최소한 세번째 읽고 있구나 -_-;;" 를 알게 되었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 (LE MYTHE DE SISYPHE)

평생 돌을 언덕위에 올리는 (다 올리면 다시 굴러 내려오는) 형벌을 받는 시지프


부.조.리 철학의 카뮈 책 답게 담배를 입에 무신 카뮈로 장식된 표지, 전체 책의 반이 해설인 -_-; 구성 각 해설들의 너무나 정직해서 화가나는 번역 그리고 "이방인" 자체가 온통 부조리로 가득했다.


1차 세계대전이라는 무시무시한 아마겟돈의 영향으로 모든 인간이 죽음을 향해있다는 숙명으로 출발해, 모든 것이 부질없고 의미없다는  인생무상에 가까운 부조리 철학. 읽으면서 화가 좀 치밀어 올랐다 :)


"어머니의 죽음을 영하25도의 얼음처럼 받아들이고 행동해도 되나?"

"물에 술 탄듯 매사에 저렇게 임해도 되나?"

"그리고 왜 사람을 죽여?"

"같은 이유면, 푹푹찌는 더위에 짜증나는 일이 가득한 광안리 해수욕장은 시체로 가득하겠네 -_-"

"그리고 정작 본인이 죽음을 마주하게되니 감정적으로 변하고, 죄없는 신부에게 핏대를 세우는구나"


카뮈가 30살에 이방인이 출판되었으니, 만약 이 책을 막 출판한 카뮈가 내 옆에 있었다면, 나이도 어린 녀석이라며 위와 같은 질문을 쏟아 붓고 훈계라도 할 참이었다.


.

.

.

.


이방인을 읽은 후, 이 삐딱한 청년의 서사와 문체만 아름다워보이는 - 하지만 내용은 잔인한 -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나 고민을 했었다.



죽음 앞에 평등하게 부조리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

(머릿속이 하얗게되는 부조리는 "잘못된", "옳지 못한", 정도로 ... -_-;)

우리가 만든 사회 자체가 "부조리함"으로 가득한 것이다. 하지만, 그 것을 비관해서 염세주의자가 되기 보다는, 그 자체의 부조리함을 인정하고 동행하면서 맞서야한다.


나는 이 것이 1차세계대전의 영향을 받은 카뮈의 부조리 철학으로 단정지어 생각을 했다.

하지만 작금의 우리 사회가 전쟁으로 얼룩진 1차 세계대전 때의 사회와 과연 무엇이 얼마나 다를까 생각 해보았다.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거다"

를 염세주의자의 건조하고 차가운 (듣는 이로 하여금 화가나게하는) 내뱉음으로 해석하지 말고,


"부조리한 사회에서 만든 관습이나 현상에 연연하는 것 보다는,

(연연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 또 그 것에 연연할 필요도 없으니)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신의 (올바른) 생각대로 살아가야 한다" 를 생각해본다.


네번째 읽게된다면 다른 -_-; 출판사 책을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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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6-15 2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직접 내린 커피를 음미하면서, 카뮈의 <이방인>을 읽는 아로님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

초딩 2015-06-15 20:24   좋아요 0 | URL
쉽지 않은 책이라 그냥 마음 다 비우구 달팽이 처럼 세월아네월아 읽었네요 :) 감사합니다~ 좋은 저녁 시간 되세요~

비로그인 2015-06-16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방인은 아직 읽지 못했어요~ 페스트 이후에 이방인을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강렬했는데...ㅜㅜ 늘 읽어야 할 책들에 마음만 조급하네요... 아로님의 글을 보니 재동기와 함께 4번은 읽으셨다는 말씀에서 한 번 읽은 책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스스로를 살짝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ㅜㅜ

초딩 2015-06-18 11:35   좋아요 1 | URL
:) 저는 역으로 이방인을 읽고 나니 카뮈의 시크한 부조리 철학에 관심이 더 가서 페스트 등을 꼭 읽어 보고 싶더라구요 ^^
저도 책에 욕심이 많은데, 한정된 시간에서 마냥 투정만 할 수 없어서 그것을 인정하고 여유있게 읽을려구해요 ^^
좋은 하루 되세요~
 
백년 동안의 고독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문학사상 세계문학 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김욱동 해설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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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이렇게 오랫동안 읽을 줄은 몰랐다.
100년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며 내 자신에게 참을 수 없었던 것처럼,
100년하고도 100일 동안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었다.


"콜롬비아의 세르반테스 (그 돈키호테의 작가)", "20세기 최고의 이야기꾼"
으로 불리우는 마르케스는 이 책으로 198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책이라는 노란글씨가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작가를 20세기 최고의 만담꾼으로 칭송하고 있어 살짝 기대를 하며 책장을 넘겨갔다.


그런데,
올 겨울에 유행 지난 군고구마와 밤을 집앞 대로변에서 팔아도 손색 없을 것 같은 할아버지의 미소를 가진 마르케스의 흑백사진 몇장 뒤에 갑자기 나타난
조금 촌스럽고 또 조금 구수해보이는 "부엔디아 집안의 가계도"

사소한 감정들을 느끼고 넘겨버린 이 페이지를 책의 중반이 지나기도 전부터
이름 모를 종교단체에 빠져 곧 다가올 세상의 종말에 구원받기 위해 전 재산을 털어서 얻은 티켓을 온몸으로 기도하며 들여다 보듯이,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 "호세 아르카디오", "아우렐리아노", "아우렐리아노 호세",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 "호세 아르카디오", ... 의 수 없이 조상의 이름을 반복하며 잘 죽지 않는 부엔디아 집안의 이야기를 읽으며 몇번을 들춰 봤는지 모른다.


기이하고 또 익살스러운 1928년 생 콜롬비아 작가님께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 엄마대신 "연구"라고 말했을 것 같은 문학 비평가들과 학자들이
건기에 아주 오랜만에 (100년이라고도 해보자) 맹수들이 먹고 남긴 사냥감을 본 하이에나나 독수리처럼 달려들어
파헤치고 분석하고 해석하려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요소들과 실험의 장을 담아 두셨다.


식민지로 지배와 억압을 받은 콜롬비아 역사를 조명했다거나
역사는 진실과 멀고 권력을 장악한 지배 계급이 조작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포스터모던 역사이론과 밀접하고
이야기 (소설)가 만들어가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메타픽션에 해당하고, 그래서 문학의 자의식 문제를 다뤄서 포스터모더니즘 문학과도 밀접하고
뱀의 혀는 울고 갈만큼 현란한 사실성에 푹 빠져서 집시들이 가져온 하늘을 나는 양탄자의 등장은 새로나온 자동차 모델같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끼게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표라는
이 모든 똑똑한 하이에나들의
배불리 하지만 조금 급하게 먹고나면 반듯이 트림을 한다는 원리와 형식과 같은 해설을 몇 번을 읽어도
무엇인가 허전한 구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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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한 이름들이 너무 많이 나와 치매 예방에 정말 좋을 것 같은 이 책은
홍수가 나면 4년 11개월 정도는 나줘야 직성이 풀리는 거침 없는 확장의 이 책은
20년 동안 수 없이 내란을 일으키고 그 동안 17명의 아들 정도는 낳아도 평범한 이 책은

도대체 무엇을 우리에게 말해주려고 노벨문학상까지 탔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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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그 것을 말해주려고 했던 모양이다.

더듬이만 닿아도 전뇌가 공유되어 하나의 큰 덩어리가 될 수 있다는 개미가 아닌,
우리 인간의 그 깊고 짙고
때로는 시지프 신화처럼 끝 없는 반복이 어리석어 보일만큼 묻어 있어 한심해보이기까지 한
고독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것 같다.

향기로운 꽃 향기를 도취되어 맡듯이
마술적 리얼리즘에 잔뜩 취해
너무 깊어 빠진 것인지 헤어나온 것인지 도대체 분간할 수 없는 심연의
너무 슬퍼서 이제는 짜고 뜨거운 눈물은 다 말라서, 절대 멈출 수 없는 마른 눈물만 흘러나오는

그 고독을 맛보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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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케스 찾기 2016-08-29 0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백년동안의 고독,,,,, 그 긴긴여정의 이야기를 인내와 첫페이지의 가계도만 의지하며 읽어나가다가,,, 최후의 마지막 한 장에서 무릎치게하는 그 반전같은 마법ㅋㅋ
긴 여름끝의 강렬한 소나기같이 시원해졌다고 해야하나,,, 봄볕에 나른하게 졸다가 얼음 바켓을 뒤집어 쓴 상쾌함,,, 그 마지막 한 장이 그랬어요ㅋㅋ ˝콜레라시대의 사랑˝도 마지막 대사에서 무릎치게하는 마술과 리얼의 살벌한 줄다리기가 좋았어요ㅋ 전혀 어울리지 않은 상극인 두 단어,,, 마술과 리얼이란 말을 이렇게 잘 버물려 놓는 작가라니ㅋ 쓰신 글이 재밌고, 공감되고,,, 잘 읽고 갑니다 좋은 책이 많아 덕분에 또 책 구입비가 초과하겠네요ㅋ

초딩 2016-08-30 12:13   좋아요 0 | URL
폭풍 라이크와 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마르케스 찾기 2016-08-30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분들의, 어느 글이건,,, 와닿는 부분만 좋아요를 누르려했건만ㅋ 다,,, 어디 뺄 것 없이 다들 공감되고 좋은 책들 뿐이라,,
읽고 싶은 책만 늘어 갑니다,,,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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