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발, 헤발놈

 

 

1

 

이제 더는 헤겔로부터 도망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이게 처음 하는 생각이 아니라는 점이다. 벌써 세 번째다. 그것도 올해에만!

 

어찌된 일인지 앞으로 가도 헤겔, 뒤로 가도 헤겔이다. 물론 다들 저마다 필요한 만큼의 헤겔을 설명하고는 있다. 최소한 내가 읽는 책들 중에는, 더 상세한 설명은 헤겔의 역사철학강의를 참조하라거나, 헤겔의 정신현상학쯤 안 읽어본 태만한 독자는 이 세상에 없을 테니 긴 설명은 지면낭비라는 식으로 말하는 못된 새끼는 없다. 그러나 무언의 압박은 있다. 내 이름이 귀에 꽂히는 횟수보다 헤겔 이름이 눈에 꽂히는 경우가 더 잦다보니, 이제 나도 사람의 도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 식욕 수면욕 못지않은 이 치명적인 헤겔욕.

 

헤겔욕구가 사무치는 게 처음이 아니라서, 이미 내 책장엔 1,000페이지에 육박하는 헤겔에 대한 책이 두 권씩이나 꽂혀 있다. 지지난번 헤겔발정에 못 이겨 무려 십만 원 돈을 주고 사들인 것이다.


 

당시 이 두 놈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누굴먼저읽을까요알아맞춰보세요딩동댕동쎄쎄쎄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간택된 놈은 첫 페이지부터 네까짓 녀석이 나님을 읽겠다고? 어디 한번 해보시지, 하는 태도로 나왔다. 겨우 다음 쪽으로 넘어갔더니, 어쭈? 이래도? 이래도? 했고, 기진맥진 세 번째 쪽으로 넘어갔더니, 생각보다 끈기가 있는 녀석이군. 인정하지. 그러나 그거 아나? 나는 우리 1,000명 형제 중 셋째 막내일 뿐이라는 사실을, 내 뒤로 997명의 형님들이 기다리고 있다구, 으하하하! 라고 했다. 분명 그렇게 말했어. 내가 들었다니까. 들은 것 같애.

 

결국 그놈을 덮고 다른 아이를 골라 읽었다. 얘는 그나마 헤겔의 사상과 개인사를 버무려 놓아서 읽어지긴 했다. 그렇게 하루에 얼마씩 꾸준하게 읽어나갔다. 그런데 200쪽 근처에 도착할 즈음에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을 때마다 헤겔과 함께 나도 늙어가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 이렇게 800쪽을 더 읽으면 분명 헤겔은 죽겠지. 그리고 나도 죽겠지. 죽을 것 같애.

 

결국 그놈도 덮고 헤겔도 덮었다. 그렇게 그 시기의 헤겔발정은 생명의 위협 앞에 깨끗이 해소되었다. 사람이 먼저지, 헤겔이 먼저냐.

 

 

 

2

 

그러다 오늘날 뜻밖에 역병처럼 다시 찾아온 헤겔발정에, 얇디얇은 책 세 권을 빌려왔다. 그 가운데 하나는 아무래도 청소년용으로 쓰인 듯 보이는 헤겔 입문서다. 그런데 읽다보니, 이런 대목이 나왔다.



하지만 노트북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고 하자치료를 해야 하는데 나는 컴퓨터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하지만 내 친구 병창이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대해 잘 알고 있다병창이가 내 노트북을……

이광모세계 정신의 오디세이, 52

 

? 내 친구 병창이라고? 근데 왜 나도 병창이가 내 친구인 것만 같지? 금방 그 이유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컴퓨터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따라서 치료를 해야 하는데나는 컴퓨터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하지만 내 친구 병창이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대하여 잘 안다그래서 나는 병창이에게 ……

이광모다시헤겔을 읽다

 

syo는 이 지점에서 다섯 가지의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첫째, 이광모 선생님과 이병창 선생님은 최소한 12(2019 2007)지기 친구다.

둘째, 12년이 지나도록 두 분의 우정은 탈 없이 이어져왔다.

셋째, 이병창 선생님이 컴퓨터 프로그램에 대해 잘 아시기는 오지게 잘 아시나보다. 12년이 지나도 이광모 선생님께 컴퓨터 프로그램 하면 이병창 선생님인 것이다.

넷째, 2019년 작을 읽었으니 2007년 작은 이만 읽어도 될 듯하다.

다섯째, 사실은 이 책이 다시, 헤겔을 읽다바로 옆에 꽂혀 있었을 때 짐작했었어야 했다. syo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듯하다. 몇 주 전만 해도 신간 코너에 꽂혀있더니 너도 이렇게 아무도 찾지 않는 철학 서가 구석탱이에 꽂히는 운명이 되고 말았구나. , 화무십일홍이오 권불십년이누나, 이러면서 멍청하게 이 책을 뽑아들었네. 저자 이름도 확인 한번 안 해보고.

 

 

 

3

 

그리고 그 근처에서 뽑아온 얇은 헤겔 전기 한 권.


하지만 그가 제일 좋아한 책은 사실 철학이나 전위적인 교양서가 아니었다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나 같은 해에 출간된 실천이성비판도 아니었고 레싱의 에밀라 갈로티도 현자 나탄도 아니었다괴테의 괴츠 폰 베를리힝엔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혹은 실러의 군도』 역시 그의 관심 밖이었다그가 즐겨 읽은 작품은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요한 티모테우스 헤르메스의 소핀의 메멜에서 작센까지의 여행으로 영국 가정소설을 모범으로 7년전쟁 이후 동프로이센 시민들이 겪은 현실을 묘사한 작품이었다청년 헤겔은 이해력이 매우 뛰어났음에 틀림없다그리고 성실하기도 했다-적어도 쿠노 피셔의 진술에 따르면 헤겔은 대때로 지나치게 꼼꼼하다는 평을 받았다고 한다하지만 그토록 한심하고 지겹기 짝이 없는 소설에 몰두할 수 있는 그 보잘것없는 청년이 미래의 어느 날 의미심장한 사상가로 변모할 것이며그것도 가장 선두의 대열에서 세기를 대표하는 최초의 철학자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_ 우도 티이츠, 『헤겔』, 13-14쪽

 

이후에도 친구들의 헤겔 걔가 저렇게 뽱 뜰 줄은 정말로 몰랐다니까요?식의 진술 몇 개와, 학기가 거듭할수록 미세하지만 뚜렷하게 망해가는 성적표 같은 것들을 언급하면서 이 전기는 헤겔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도입부에서 이렇게 독자의 흥미주머니를 잡아채는 책이라면 믿을만하거나 사기거나 둘 중 하나다. 얘는 뭘까? 아직은 모르겠다. 실은 이 책 두 번째 읽는데도. 뜬금없이 리셋증후군에 걸렸던 재작년 5월초,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는 없어서 대신 읽은 책 목록을 싹 비우고 대리만족한 일이 있었는데, 읽었어요 스탬프는 아무래도 그때 날아간 듯하다.

 

 

 

4

 

철없는 인간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syo라고 해서 이렇게 입문서만 읽다가 흥미를 잃고 다시 흥미가 생기면 입문서를 읽다가 또다시 흥미를 읽는 쳇바퀴 같은 독서경로가 썩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다. 단지 능력과 의지와 의욕과 비전과 뚝심과 기억력과 용기와 절제력 등등이 각각 조금씩 부족할 뿐이다

형편없는 인간인데 이거?

 

그래서 이런 대목을 만나면 목뼈 부러진 사람처럼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한국 출판시장은 그 어느 때보다 페미니즘 서적의 홍수다하지만 풍요 속에는 짙은 언어의 빈곤이 동시에 자리하고 있다모두가 페미니즘을 외치는 시대에도 한국 독자들은 페미니즘의 문턱에 들어서는 순간 황량함을 감내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는지도 모른다풍요 그 자체는 반가운 일이지만문제는 그로 인해 입문으로 시작해 입문으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처음은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되풀이되는 시작만 있게 된다.

말과활 아카데미12개의 테마로 읽는 페미니즘 도서목록

 

되풀이되는 시작만 있다니, 정말로 절묘하게 syo의 뼈를 정밀타격하시네요…….

 

 

 

--- 읽은 ---

+ 세계정신의 오디세이 / 이광모 : ~ 64

+ 희망 대신 욕망 / 김원영 : 224 ~ 341

+ 감정의 혼란 / 슈테판 츠바이크 : 63 ~ 213

 

 

--- 읽는 ---

= 카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 / 알렉스 캘리니코스 : 108 ~ 214

= 칼과 책 / 둥핑 : 73 ~ 199

= 빨래하는 페미니즘 / 스테파니 슈탈 : ~ 151

= 헤겔 / 우도 티이츠 : ~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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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8-18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도가 나가지 않는 책은 빨리 포기하심이.... 그나저나 저도 헤겔은 읽어 보고 싶습니다. 특히 그놈의 변증법에 대해서요.

syo 2019-08-19 11:10   좋아요 0 | URL
포기는 제 특기지요. 정말 빨리 포기합니다. 벌써 얼마나 많이 포기했게요 ㅎㅎ

수연 2019-08-19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신기. 저녁때 헤겔 관련서 살까 말까 한참 갈등하다가 애인이 안사준다고 해서 또 한참 갈등하다가 그냥 안사고 왔는데 지금 막 컴 켜고 포스팅 쓰고 확인하니 헤겔 이야기. 찌릿. 언젠가 읽게 될 날이 있겠지요 저도...

syo 2019-08-19 11:10   좋아요 0 | URL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야말로 헤겔의 마력을 증명하는 대목일까요......

반유행열반인 2019-08-19 0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울보면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헤겔이는 읽기 어려운 데다가 못생기기까지! 입문입문입문 하다 보면 그래도 코끼리 다리 정도는 확실하게 이건 다리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닐까요.

syo 2019-08-19 11:47   좋아요 1 | URL
저래봬도 여자들에게 인기가 좀 있는 축이었다는 평입니다. 라이벌(이라고 혼자 주장하는) 쇼펜하우어가 워낙 까이고 다녀서 상대적으로 그래 보이는 걸지도 모르지만....

다락방 2019-08-19 0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창이는...어??? 병창이가 왜???? 했는데, 쇼님 페이퍼에서 기존에 읽었던 구절인가 봅니다. ㅎㅎㅎㅎ

병창이 안녕?
잘 지내지?
여름이 가고 있단다.

syo 2019-08-19 11:15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이병창 선생님은 잘 계시는 듯합니다. 최근에 마르크스의 대작 <독일이데올로기>를 완역하셨어요. 두 권 5만원 돈이지요😣

독서괭 2019-08-19 12: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000명 형제... 병창이..ㅋㅋㅋㅋㅋㅋ
헤겔은 읽을만한 놈이 못된다는 걸 확실히 알고 갑니다. 전 변증법 같은 거 몰라도 됩니다ㅋㅋ

다락방 2019-08-19 13:26   좋아요 0 | URL
독서괭 님의 이 댓글을 다락방이 좋아합니다..

syo 2019-08-19 13:54   좋아요 0 | URL
헤겔은 대체 수없이 많은 인간들에게 좌절 혹은 짜증을 안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까요.

쟝쟝 2019-08-19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창이? 어디서 많이 들었는데... 지금 읽는 책 저자 이름이네요.. <현대 철학 아는 척하기:부제- 한권으로 끝내는 현대철학 다이제스트> ㅋㅋㅋㅋㅋ 저는 다음주까지 한권으로 현대 철학 끝내려고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나 저나 헤겔에 대해서라면 제가 할말이 정말 많은 데요.. ......... 음 하지 않겠습니다... ㅋㅋㅋㅋㅋ 요점은 헤겔 이후로 오늘 날까지 철학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는 것. 그랬던 제가 정말 오랜만에 철학 입문서를 집어 들었는데... 그 저자 이름을 여기서 만나다니.. 으아~ 기분 좋다 ㅋㅋ

카알벨루치 2019-08-19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다 죽다 ㅜㅜ ㅎㅎㅎㅎ헤겔겔겔겔
 

 

북마크가 빛나는 밤에

 

 

1

 

책을 쌓아놓고읽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북마크다. 물론 무신경하게 책날개를 열어서 읽던 페이지에 괴어놓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책 복부가 빵빵해지는데다 무엇보다도 경사가 생기는데, 7권 정도를 그렇게 쌓으면 8번째 책은 그 위에서 익스트림 겨울 스포츠를 즐기느라 자꾸 바닥으로 활강한다.

 

처음 사 본 놈은 긴 종이가 반으로 접힌 형태였는데 그 입 부분에 고무자석이 부착되어 읽고 있는 페이지를 꽉 깨무는 형식이었다. 책을 읽다가 문득 그러고 싶은 기분이 들어서 책등을 잡고 한바탕 브레이크 댄스를 추고 나서도 내가 어느 페이지를 읽고 있었는지를 결코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견고함이 그 북마크의 장점이었다. 그러나 치명적인 단점이라 하면 페이지를 입이 무는 형식이다 보니 윗입술과 아랫입술, 즉 종이 두 장 분량의 두께가 책에 부과된다는 것. 심지어 이빨 역할을 하는 자석까지 치면 두께 면에서 결국 종이 북마크 네 장을 이용해 한 페이지를 잡아챈 것과 진배없다. 그러면 다시 책이 미끄럼틀을 타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책을 사랑한다지만, 책을 위해 내 돈까지 써가며 리프트를 태워줄 필요가 있겠냐는 거지.

 

그래서 결국 평범한 종이 북마크를 구매해서 쓰기 시작했다. 평범하다보니 특별히 불만은 없었는데, 평범하다보니 자꾸만 실종 사건이 벌어졌다. 그냥 잊어버리는 일도 있고, 책에 그대로 끼운 채 반납해 도서관에 북마크를 기증하는 일도 잦고. 28개들이 한 팩을 샀는데 이리저리 여행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이 어느덧 두 자릿수를 헤아리는 시점이 왔다. 그러다보니 현재 읽고 있는 것들에만 끼우려 해도 북마크가 모자란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해서 같은 북마크 팩의 신상 디자인을 검색했다가, 이걸 발견해서 0.38901891초 만에 구매를 결정했다.


< NACOO 북마크팩08-반고흐 >

 

문제는 너무 예뻐서 책 읽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 책을 읽으며 한 손으로는 북마크를 빙빙 돌리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구매를 자제하시기를 바랍니다. 자꾸만 그리로 눈이 가요.

 

치명적인 장점도 있다. 너무 아름다운 문단을 읽고 크- 지린다, 하며 고개를 들었는데, 시야에 <별이 빛나는 밤>의 부분이 그려진 북마크가 똭……. 감동 시너지. 그렇지만 책을 좋아하는 동시에 반 고흐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꾸만 결단을 요구하는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말해, 누가 예뻐. 책이야, 나야?

 

그나저나 한때 반 고흐에 환장하던 때가 있었는데, 책 안 읽은 지 너무 오래 된 듯


요놈들을 조준한다 

 

 

2

 

노트북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며칠 전에는 결산 대비 독서 기록 파일이 날아가서 오랜만에 시원하게 눈물 쏟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더니, 오늘은 어제 써 놓은 두 쪽짜리 잡글이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 과학자가 방문 닫고 창문 닫고 선풍기 틀고 자면 죽는다는 이야기가 과학적으로 보면 한낱 괴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증명하자, 너무 억울해서 그 과학자의 꿈에 현몽한 방문 닫고 창문 닫고 선풍기 틀고 자다 죽은 귀신의 한풀이 이야기였다. 되게 재미있겠다 싶어서 썼지만 써보니 되게 재미없었다. , 그리고 의미(조차)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애착도 없었다. 그런 syo의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망한 이야기가 가서 죽는다는 세상 끝 어느 구슬픈 쓰레기장을 향해 눈치껏 제 발로 떠나준 모양이다. 일기에 쓸 만한 일이 매일 매일 생기지는 않는 척박한 인생이라 대타로 써먹어볼까 준비한 이야기였는데, 내가 볼 때 그 이야기 자체보다 이 상황이 더 재미있는 것 같다(그만한 이야기였다는 것). 고마워, 귀신아. 그렇게 비과학적인 방식으로 죽어줘서 고맙고, 멋진 희생플라이와 함께 유유히 사라져줘서 고마워. 안녕~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잘 살자.

 

 

 

3


 

  나의 몸우리의 몸가난과 질병과 추함에 빠져들까 불안해하는 몸을 우리는 극복할 수 있는가나는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했음에도 여전히 이 질문에 확실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하지만 내가 분명히 알게 된 한 가지는 장애인은 장애를 결코 극복할 수 없으며그것을 극복하는 순간 이미 장애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누군가 나에게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이라고 말한다면 그 순간 나는 모순된 존재가 될 것이다장애를 극복했다면서 왜 나는 여전히 장애인인가장애를 극복하지 않고 장애인인 상태로 존재하면서도 내가 세상의 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서는 왜 안 되는가.

  나는 헬렌 켈러나 스티븐 호킹 같은 사람이 전혀 아니다나뿐만 아니라 우리 대부분이 그렇다우리는 대개 자기 삶에 주어진 어려 조건들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다외모성장 환경부모의 가난질병장애성별 등을 종국적으로 극복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물론 그런 조건들을 극복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으며세상은 그들을 가리키며 왜 너희는 그들처럼 하지 못하느냐고 손가락질한다.

  하지만 극복만이 우리가 그런 조건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인가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오히려 우리의 조건들을 세상의 중심에 오게 하는 도전과 연대상상력에 우리의 미래를 걸어야 한다고 믿는다우리 대다수는 아무런 도움 없이 장애와 가난을 극복하고 철저한 자기 관리와 다이어트로 미인의 대열에 끼어들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며사실 그럴 이유도 없다. (19-20)

_ 김원영, 『희망 대신 욕망』 

 

생각을 만드는 일과 생각을 벼리는 일에 관해서 생각한다.

 

생각은 대체로 획득하는 것이다. 자기 손으로 만드는 일도 살다 보면 생기지만, 획득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 생각이 귀중하다고 판단할수록, 오롯이 그 생각을 자기가 만들었다고 착각할 확률은 높아진다. 페미니즘의 물결이 덮쳐오는 세상이 자못 불편하여 이리저리 부딪히며 고민하고 있는 친구에게, 친구의 친구가 충고해주던 장면이 생각난다. 확실해질 때까지 모든 것을 의심하고 의심한 다음 받아들이라고, 무슨 말이든 곧바로 받아들이지 말고 끝까지 의심하라고. 그러면서 언급했다. 자기가 요즘 철학책을 읽고 있는데, 데카르트가 그렇게 모든 것을 끝까지 의심하기를 주장했다고. 그래서 자기는 모든 걸 의심하고 확실히 증명되었다 싶을 때까지 결코 믿지 않는다고. 옆에서 듣고 있던 나는, 그 친구가 친구의 친구가 아니라 내 친구였다면 했을 말을 많이도 삼켰다.

 

데카르트는 분명 그런 말을 했다. 널리 알려져 있듯, 진리라 알려져 있는 모든 명제를 기각하고 오로지 생각하는 나의 존재하나만을 인정한 다음, 거기서 시작해서 명석 판명한 인식을 도출하고자 시도했다. 그 시도 끝에 데카르트가 증명해 낸 것은, 결국 그래서 신은 존재한다였다. 거기까지 가는 과정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명석 판명과 멀어도 너무 멀다. 결국 데카르트의 진짜 위대함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회의하라라는 격언을 남긴 것이 아니라, “의심, 회의, 객관 등등을 입에 올리며 깝쭉거리는 인간도 결국 제 입맛에 맞는 편향된 명제를 도출한다는 점에서, 자기네들이 비난하는 다른 인간들보다 그다지 나을 것도 없다.” 라는 쓰린 진실을 몸소 증명한 데 있다고 syo는 생각한다.

 

이야기가 샜네? 다시,

 

생각은 대체로 외부에서 획득하는 것이다. 다 조리된 생각이 입 속으로 벌컥벌컥 들어오는 경우도 있고, 몇 가지 싱싱한 재료들을 던져주고는, 니가 만들어 먹어 봐야 제맛이제이~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두루뭉수리하게라도 만들어 가지고 있던 생각이 날카롭게 벼려지는 순간이 온다. 나보다 앞서 그 생각을 하고, 극단까지 사고를 밀고 나가고, 마쳤던 이의 정교한 생각을 마주칠 때. 내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을 이 사람이 대신 해 준 것 같은 그 황홀한 느낌.

 

생각의 획득과 생각의 제련은 동시에 이뤄지는 것 같지만 실은 거의 그렇지 않다. 획득되지 않은 생각은 제련되기 어렵고, 제련된 생각은 통째로 획득되기에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겪고, 생각하고, 듣고, 읽고, 쓰고, 논쟁하고, 반성한다. 그리고 겪고-부터 새롭게 시작한다. 문제는 이 획득과 제련의 요소들이 내가 감당하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난이도 순으로 배열되어 차례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오기도 하고 오지 않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배움이 고르지 못하다. 인생이 다 경험이고, 경험이 다 지혜지- 라는 말은 반만 정답인 것이, 배움이란 기초에서 고급과정까지 알맞게 구조화 된 커리큘럼, 망각 곡선이 바닥을 치기 전에 다시 맞닥뜨릴 수 있는 반복성 같은 것이 받쳐줘야 단단한 성취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바쁘고, 여기저기 발 담근 데도 많고, 그게 뭐든 뭐 하나 집중적으로 깨우칠만한 여유도 잘 없다. syo의 배움이 늘 느린 이유가 그렇다.

 

김원영 선생님의 배움은 아마 다를 것이다. 그가 숨 쉬는 모든 순간이 그대로 이 책을 만들기 위한 배움의 단계였을 것이다. 자기에 대해 생각하고 배우는 이에게 생각의 획득과 제련은 늘 접붙어 있지 않을까. 그래서 저 문단은 syo가 토시 하나, 구두점 하나 다르지 않게 쓴다고 해도 깊이나 아우라가 완전히 다른 문단이 될 것이다. 장애가 없는 사람도 저 문단을 똑같이 써낼 수 있을 만큼의 생각을 갖추고 벼릴 수 있다. 그러나 syo가 모루 위에 달궈진 쇳덩어리를 때리는 간격과 김원영 선생님의 간격이 다르기 때문에, 만들어진 칼의 겉모양은 비슷해도 부딪혀 보면 어느 칼은 다른 칼에 의해 힘없이 부서지고 말 것이다.

 

이것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이유일지도 모른다. 내 생각의 뿌리가 겉보기보다 단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저 동의한다는 것만으로 저 사람의 잘 벼린 생각과 내 무딘 생각이 같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

 

 

 

4


12개의 테마로 읽는 페미니즘 도서목록 / 말과활 아카데미 엮음 / 일곱번째숲 / 2019


요 책을 사 놓은지 좀 됐는데, 꽂아놓기만 했다. 책 정리하다가 한 페이지를 넘겼더니, 서문부터 사람 피 끓게 만드는 데가 있다. 모르긴 몰라도 거의 500권은 될 법한 어마어마한 리스트를 자랑한다. 그런데 어마어마해서 오히려 시작을 못하겠다.

 

 

--- 읽은 ---

+ D에게 보낸 편지 / 앙드레 고르 : 55 ~ 91

+ 낭만주의 / 박형서 : 125 ~ 258

 

 

--- 읽는 ---

= 희망 대신 욕망 / 김원영 : 134 ~ 221

= 레닌 평전 1 / 토니 클리프 : ~ 61

=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김정운 : ~ 131

= 칼과 책 / 둥핑 : ~ 73

= 감정의 혼란 / 슈테판 츠바이크 : ~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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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08-16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산 파일 잃고 정말 우셨어요? 나는 왜 그런게 궁금하지. 에버노트에 바로 박제하시진 않나 봐요. 어딘가 날아간 문서의 나라가 있다면 가서 syo님이 날린 애들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김원영 선생님 인용에 어려-여러 오타보고 아 나처럼 성의 없이 전자책 자동 밑줄 복붙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수제로 옮기시는구나 감탄합니다. (그래서 제 종이책 감상문엔 발췌가 없다지요...) 저는 아이가 수시로 그림 그려서 책갈피를 만들어 줍니다. 자랑이에요. 좋은 밤 좋은 주말 보내시길.

syo 2019-08-17 10:07   좋아요 1 | URL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요. 내적 오열도 오열은 오열입니다...... 제가 쓰는 글들은 한글 파일에 저장해두거든요. 발췌할 것들만 에버노트에 옮겨놓는데, 그 과정에서 오타가 발생합니다. 감탄할 만큼 성실하지도 않은 게, 결국 최종적으로 글을 쓸 때는 에버노트에 옮겨놓은 글을 복붙하다보니 오타를 발견하지 못하는 거거든요.....

아이가 책갈피를 만들어주다니, 너무 귀엽겠다.... 아이가 아빠 내가 그렸어, 하면서 책갈피를 만들어줬는데 <별이 빛나는 밤>이 똭! 그럼 세상 귀엽겠다..... 귀 조심만 시키면.

cyrus 2019-08-17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흐 북마크는 한 개라도 잃어버리면 너무 아까울 것 같아요. 저는 잘 쓰던 북마크 잃어버리면 책이 눈에 안 들어와요. 초조해져요.. ㅎㅎㅎ

syo 2019-08-17 10:08   좋아요 0 | URL
이번만큼은 정신 단디 차리고 지켜나가려는 마음입니다. 도서관에 책 반납할 때도 더블체크가 기본이구요.

레삭매냐 2019-08-17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스24 중고서점에서 한 상자 샀어요.

syo 2019-08-17 10:08   좋아요 0 | URL
겸사겸사 알아보니, 책갈피도 재미있고 예쁜 것들이 참 많더라구요. 잘못하면 버릇들겠어요, 모으는 버릇.

레삭매냐 2019-08-17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개 샀는데 못 다 읽은 책들이 죄다 삼켜 버렸네요 ㅋㅋ

syo 2019-08-17 19:47   좋아요 0 | URL
모든 독서인들의 공통된 고민거리 중 하나네요.
자꾸만 북뮤다 삼각지대에서 사라지는 책과 책갈피들....

psyche 2019-08-17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에 선물받은 거 . 내가 산 거, 공짜로 얻어온 거 등등 북마크가 산더미같이 많아 여기저기 굴러다니는데요. 막상 책 읽다 쓰려고 하면 없는 거에요. 그래서 맨날 영수증, 클리넥스, 광고지, 등등을 북마크로 쓴다는....

syo 2019-08-17 19:48   좋아요 0 | URL
그렇죠? 왜 이런 작고 사소한 물건들은 하나같이 그런 운명일까요?
저는 지우개를 한 번도 끝까지 써본 일이 없어요. 다들 어디로 갔니.....

stella.K 2019-08-17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마크 탐나네요. 예스24에 이런 게 있었다닛!
글치 않아도 책주문한 거 오늘 도착했는데 알았더라면 같이 주문했을텐데...
하긴 저도 잃어버린 경험이 많아 좋은 건 못 쓰고 오히려 어디 선전용이나
잃어버려도 크게 아깝지 않을 굴러다니는 거 쓰고 있습니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더불어 수집 목록이 될 수 있죠.ㅎㅎ

syo 2019-08-17 19:50   좋아요 0 | URL
예스에서 파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는 레삭매냐님의 말씀을 꼭 이 북마크를 지칭한 거로 읽지 않았거든요.
진짜 팔지도? ㅎㅎ
저는 네이버 검색해서 인터넷 주문으로 샀어요.
여기저기 파는 데가 많더라구요.
증정받은 것들 써도 좋지만, 그래도 막상 구매해서 쓰다보면 애착도 생기고 그렇더라구요^-^

AgalmA 2019-08-18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별이 빛나는 밤 새 굿즈를 마련한 터라 이 글에 엮인 글 좀 써야겠는데요ㅎㄱㅎn별이 빛나는 밤 자석 북마크도 무척 아끼는 아이템이에요^--^ 예스24가 고흐 굿즈 많이 내줘서 그 굿즈 나오면 자주 사게 됩니다ㅎㅎ;

syo 2019-08-18 15:13   좋아요 0 | URL
실제로 예스가 그러고 있었군요!! 그쪽에는 발을 안 붙이고 지내다보니 전혀 몰랐어요. 아갈마님 글 보러 가야겠다 ㅎㅎ
 


30대 아저씬데, 내 동년배들 다 인스타로 그림 보더라ㅠㅠ?

 

 

1

 

그날, 그만치 다양한 분야에 대해 그만한 함량의 글을 쓰려면 대체 당신의 머릿속엔 뭐가 얼마나 들어 있어야 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cyrus님은 꼭 알고 쓰는 건 아니라는 식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글로 써내기까지 하려면 알긴 알아야 되는 거 아니냐는 추가질문에는 또 그건 그렇다고 대충 얼버무렸다. 이건 뭐, 안다는 거야, 모른다는 거야. syo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cyrus님이 대각선 맞은편에 앉아 있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cyrus님은 늘 그렇다. 본인 칭찬을 하면 두루뭉수리권법으로 상황을 타개하는 편이다. 구름 같은 사람.

 

이 글을 발견하면 그는, 저도 다 알지는 못합니다, 쓰면서 많이 배웁니다, 저는 쓰려고 읽고 읽으려고 쓰는 과정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같은 교과서적인 댓글을 달겠지. 성격 같아선, 언젠간 한번 흥청망청 취하게 만들어서 그 속에 든 말들을 다 꺼내보리라는 식의 흉계를 꾸며볼 법도 하지만, 막상 syo는 소주 2잔이면 만취인 반면 cyrus님은 뜻밖에 말술이라 하니 이건 애당초 텄다. 우리 할아버지는 대포 주전자로 나발 불던데. , 내 간만 피해간 유서 깊은 상놈집안 친막걸리 유전자여…….

 

그나저나 우리 계획적으로 두 번, 우연히 두 번 만난 기묘한 인연에다 동년배’(가벼운 양심마비)기까지 하니, 이 마당에 말까고 지내자……?

 

대차게 까일 것 같다구름같이 교과서적으로 까일 것 같다.

 

 

 

2

 

저 님은 그런 반면 나는 왜 쓰는지가 늘상 고민이다. 왜 쓰는지를 모르니 어떻게 써야할지는 더욱 헷갈린다. 그러다보니 지나치게 더디다. 읽는 데 3분 내지 5분이면 너끈할 글을 한 시간 동안 쓰는 일이 드물지 않다. 심지어 퇴고도 안 하는데!

 

비결은 간단하다. 바로 한없이 무한에 가까운 백스페이스. 어떤 문장을 쓰건 가장 많이 두드리는 키는 백스페이스다. 그것은 내가 좀처럼 내 문장의 방향을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안에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을 쓰고 싶은 욕심과 누구나 이해할 순 없는 문장을 쓰고 싶은 욕심이 나란히 있다. 백스페이스가 깔린 질척질척한 길을 지렁이처럼 기어가는 문장 안에서 그 두개의 욕심은 치열하게 길항한다. 지금 이 문장만 해도 그렇다. 나는 길항하다라는 폼 나는 단어를 쿨한 일상어인 척 쓰고 싶은 허영과, 저런 단어를 아무런 고민 없이 남용하는 감각 둔한 인간만큼은 되고 싶지 않은 저항감 사이에 서서 한참동안 망설인다. 가끔 들어와 내 글을 읽지만 절반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친구들에게 볼멘소리를 하는 여친 옆에 앉아서 나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하나 한참을 고민했고, 결국 한참을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직도 문장의 내장보다 골격과 피부를 걱정한다. 내용 없는 글은 내용 없는 인간에겐 타고난 신분 같은 것이라, 한 세월 그것과 더불어 살다 보면 슬그머니 체념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형식은 다른 이야기라서, 돈 많이 번 상놈이 양반 상투 잡는 말세를 기약하며 계속 문장에 대한 고민을 저축하는 것이다. 나는 죽었다 깨나도 못 지어 먹을 것 같은 신들린 문장을 만날 때마다 지독하게 상처받으면서.

 

요 며칠 상처 주는 놈들이 있었다.

 

 

요놈들


 

 

3

 

아무리 봐도 너무 예뻤다. 에드워드 호퍼에 환장하는 syo에게 청소부 매뉴얼의 표지는 그야말로 구매절벽으로 사람을 떠미는 치명타였다. 물론 호퍼가 그린 것은 아닐 것이다. 첨 봐. 웬만한 호퍼는 내가 다 봤는데. 그리고 저 하얀 그림은, 뭐랄까, 반전된 호퍼 같달지, 호퍼의 어둠이 저 그림의 빛 같달지, 그런 느낌이었다. 어둠이 빛이어도 외롭고 적막하다니, 호퍼 당신은 도대체

 

호퍼가 그린 것도 아닌데 왜 호퍼를 칭송하고 있는가, 싶어 책날개를 열어보니 안소현 작가님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작가님의 작품이 책 표지로 쓰인 건 처음도 아니었고, 심지어 요놈들 내 책장에도 몇 권이 꽂혀 있다.

  

요놈들

 

안소현 작가님 인스타에서 한참을 구경하다 나왔다. 인스타 안하면 이런 것도 모르고 산다. 버티고 버텼는데, 결국 인스타든 뭐든 해야 할까봐. 이거 뭐, 내일부터는 신석기시대라는데 아직 변변한 돌도끼 하나 못 구한 빠삐꼬가 된 기분이다.

 

빠삐꼬 : 난 돌도끼 있거든? 머리카락이 없어서 그렇지 바꿀래?



안소현 작가님 홈페이지 인스타   

 



4


결산 페이퍼에 올리려고 읽을 때마다 기록해 놨던 파일이 사라졌다. 뒤지게 뒤졌는데 없다. 뒤지겠다. 다시 쓰려고 백지장을 모니터에 띄워 놓았지만 의욕도 기억도 뭣도 없다. 뒤지겠다. 살짝 눈물 그렁그렁 했던 건 비밀이다. 콧물도 비밀이다. 비밀이다….


약속해요, 비밀이라고.

 

 

--- 읽은 ---

+ 여보, 나 좀 도와줘 / 노무현 : 50 ~ 238

+ 철학의 이단자들 / 스티븐 내들러, 밴 내들러 : ~ 191

 

 

--- 읽는 ---

= 낭만주의 / 박형서 : ~ 125

= D에게 보낸 편지 / 앙드레 고르 : ~ 54

= 희망 대신 욕망 / 김원영 : ~ 134

= 카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 / 알렉스 캘리니코스 : ~ 108

= 현대미술의 여정 / 김현화 : ~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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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8-13 20: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백스페이스 엄청 많은 글일 것으로 항상 짐작했습니다. 훌륭한 글은 절대 쉽게 쓰이지 않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

syo 2019-08-13 22:57   좋아요 0 | URL
언제나 둥기둥기 말씀 해주시는 북다님 ㅎㅎㅎㅎ 감사합니다^-^

수연 2019-08-13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드레 고르 짱이지 않아요, 쇼님, 앙드레 고르 넘 좋아요.

syo 2019-08-13 22:58   좋아요 0 | URL
전 이 책이 첫 앙드레 고르예요.
그렇게나 좋은가요? ㅎㅎㅎㅎ 다른 책도 좀 더 읽어 봐야겠네요.

stella.K 2019-08-13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퍼의 그림도 그렇지만 저 <희망 대신 욕망>은 모르고 보면 무슨 소설이나 에세인 줄 알겠어요.
그런데 구판 제목이 더 괜찮은 것 같은데<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 청년 김원영의 과감한 사랑과 합당한 분노에 관하여> 좀 길긴 하지만 이게 뭔가 있어 보이는데.
암튼 스요님을 상처주고 있다니 어떤 책인지 되게 궁금하군요.
저도 그래요. 매일 정말 나 아니면 안 되는 뜨거운 글을 쓸 것만 같지만
매일 별 볼 일없이 하루를 마감하는 것 같습니다.ㅠㅠ

syo 2019-08-13 23:00   좋아요 0 | URL
에세이라고 보는 게 맞는 것 같은데요.
근데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는 살짝 옛날 느낌이 나긴 해요.
이 책의 초판이 나왔을 2010년쯤에도 어쩐지 살짝 끝물일 것 같은 감각.....
작가님도 그런 이유에서 바꿨다고 하네요.

글 너무 잘 씁니다. 초판 당시 저보다 어렸을 텐데, 훨씬 훨씬 훠어어일씬 잘 쓰네요.
역시 쓰는 사람은 정해져 있나봐요.

레삭매냐 2019-08-13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소부 매뉴얼은 빌리긴 했는데
선뜻 손이 가지 않네요.

단편에 질린 모양입니다.
그냥 재밌는 책이 보고 싶어서...
리훙장 평전을 집어 들었네요
하 하 하

syo 2019-08-13 23:02   좋아요 0 | URL
음, 가끔 정말 평전이 소설보다 더 재미있다 싶을 때가 있더라구요.
레삭매냐님의 폭넓은 독서와, 역시 폭넓은 재미감수성에 감탄합합니다.

2019-08-13 2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3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9-08-13 2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가 읽은 게 여보 나 좀 도와줘 였는데 표지가 바뀌었군요...

그나저나, ‘나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하나 한참을 고민했고, 결국 한참을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문장 재밌어요.

syo 2019-08-13 23:03   좋아요 1 | URL
이번에 <노무현 전집>이 나오면서, 재단장했지요.

그 문장에서도 백스페이스를 얼마나 눌렀게요.
한참을 고민‘하다가‘와 고민‘했고,‘ 사이에서 망설였다가, 저게 좀 더 재미있겠다 싶어서 골랐는데, 잘했나 봐요.

독서괭 2019-08-14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 시간을 들여 썼지만 읽을 때는 쉽고 경쾌하게 읽히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요. 때로는 멈춤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요. 저에게는 syo 님 글이 바로 그렇답니다.
빠삐코 비유 같은 건 대체 어떻게 생각해내시는 건지 ㅋㅋㅋ

syo 2019-08-14 18:09   좋아요 0 | URL
빠삐꼬 비유 역시 백스페이스의 결과물입니다.
말이 아니라 시간을 오래 투자할 수 있는 글이다보니 뭔가 그런 거 잘 떠올리는 놈 같아 보일 뿐,
실제로는 굉장히 식상한 비유나 할 줄 아는 평범한 놈이었던 것입니다....ㅋㅋㅋ큐ㅠ

설해목 2019-08-14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소현 화가의 그림 좋죠? 따뜻한 호퍼 같은 느낌이랄까.... 아니현 한국판 데이비드 호크니 같다고나 할까..
저는 황정은 작가의 <백의 그림자> 리커버 책으로 안소현 화가를 처음 알게 되었고 그 이후로 인스타 팔로우하여 열심히 좋아요를 누르고 있네요. ㅎㅎㅎ
나중에 여윳돈 생기면 화가님 작품 꼭 소장하고 싶어요!! ^^
syo님 인스타 시작하면 여기다가 인스타주고 꼭 알려주셔요. 당장 달려가서 팔로우할거에요. ㅎㅎㅎ

syo 2019-08-14 18:12   좋아요 2 | URL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백의 그림자> 리커버 책이 더 이상 검색이 안 되서 페이퍼에 실을 수가 없었어요.
너무 슬프다.

그나저나 인스타는 사실상 불가능입니다 ㅎㅎㅎ
전 그게 뭔지도 잘 모르지만, 남들에게 떡 하니 그림이나 사진으로 보여줄 수 있을 만한 뭔가는 없는 활자활자한 인생이라, 그 플랫폼은 제게 그림의 떡.....

쟝쟝 2019-08-14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소현작가님을 팔로우 하러 가야겠다 (인스타로 넘어가기)

syo 2019-08-15 10:39   좋아요 0 | URL
팔로우 그런 거 나도 하는 사람 되어야 하나 봐요....

유부만두 2019-08-15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 빠삐코 쵸코 맛있다, 고 댓글 다는 사람 ...
있어야 할 듯 해서 답니다.
맛있지요, 네.

syo 2019-08-15 10:41   좋아요 0 | URL
근데 저 원시인은 빠삐‘꼬‘인데, 맛있는 쪼꼬 걔는 왜 빠삐‘코‘일까요. 초코라서???

유부만두 2019-08-15 1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예리하시다!!!!!

AgalmA 2019-08-18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몇 년 전 일인데, 한번은 프란츠 클라인이 (다른 친구로부터 적의는 없었고 그저 강렬하게) 질문 세례를 받다가 마침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 자, 내가 만일 자네가 아는 것을 그린다면 자네는 마냥 지루할 걸세. 내가 자네에게 한 말을 또 할 때처럼 말이지. 내가 만일 ‘내‘가 아는 것을 그린다면, 지루함은 내 몫일테고. 그러니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을 그린다네.˝ 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모르는 것을 씁니다. ‘소통‘은 시간을 많이 들여 정의해야 하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 과연 저는 맹인이 앞을 보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게 제 머릿속에 늘 있었던 질문입니다. 경험하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없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독서는 다른 사람과 ‘함께‘ 읽는 행위입니다. 사람들이 제 시를 절절히 공감하며 읽을 때, 그들은 저와 ‘함께‘ 읽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소통‘이란 정보를 가르치듯이 전달하는 과정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서로 주고받는 느낌입니다.˝
ㅡ 로버트 크릴리, 파리 리뷰 <작가라서>

^^

syo 2019-08-18 15:18   좋아요 0 | URL
중간부터는 아갈마님 말씀이라 생각했는데 전체 인용이었군요. 저 책 저도 되게 눈독들이고 찝적대는 중이었는데요. 아갈마님 페이퍼 읽고 겨우 버텼는데 댓글로 저를 무너뜨리시네요. 가자, 장바구니로....
 

 

어린 이들은 결국 으-른이 된다, 으흐흐른

 

 

1

 

션 멘데스Shawn Mendes<There’s Nothing Holdin’ Me Back>은 툭뚜룽뚱 툭뚜룽뚱 들을 때도 신나지만 어쩐지 부를 때야말로 쫙쫙 씹히는 맛이 있을 것 같은 구성이다. 발음만 까리하게 할 수 있다면.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래이지만, 무슨 말인지 모를 음악은 듣지 않는다는 흥선대원군 스타일 문화예술정책을 굳건히 견지해 온 syo는 이런 곡이 나왔는지도 모른 채 부끄럽게 2년하고도 4개월을 살았다. JTBC<비긴 어게인>을 보다가 그 존재를 포착했는데 입에 자꾸 맴돌아 뜻 모를 노래를 예외적으로 연습하고 있다. 얼추 널 향한 내 사랑은 낙장불입, 이젠 날 막을 순 없지하는 이야긴 것 같은데 이쪽에서는 저런 낯 뜨거운 말을 할 나이가 한참 지나서 검색해보니 저 친구는 98년생이라고. 그럼 저 노래는 우리 나이로 스무 살에 불렀다는 말이 되는데, 과연 그럴싸하다. 스무 살의 syo 역시 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으로 하루하루 살았다. 딱 하나, 사랑하는 사람 빼고는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완벽한 사랑이었다. , 아련한데…….

 

아련한 기분으로 멘데스 젊은이가 최근엔 뭘 불렀나 찾아보다 <Señorita>라는 노래를 발견했다. 쩌는 라틴 음률로 한국을 들썩이게 만든 <Havana>라는 곡의 주인장 카밀라 카베요Camila Cabello와 함께 부른 노래인데, 뭐랄까, 역시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도 굉장히 야하다. 섹시의 수목한계선을 넘었다 말았다 한다. 섹시가 열대과일이라 치면 syo의 섹시는 바나나에서 끽해야 망고쯤인데, 얜 자꾸만 두리안을 멕이려고 한다. “Ooh, I should be runnin' Ooh, you keep me coming for ya” 하는 가사는 표면적 의미가 명확한데, coming이 자꾸만 다른 뜻으로 들려. 얘네 둘이 노래를 그렇게 부른다. syo의 머릿속에서, 쟤네는 노래 부르면서 무슨 짓을 하고 있을 것만 같은데, 끝나면 깨끗이 안 치우고 그냥 갈 것 같아서 좌불안석이 된다. 검색을 때려보니, , 아니나 다를까 저 젊은이 둘은 목하 뜨거운 열애 중으로, 아무데서나 신나게 안고 물고 빨고 부럽다.

 

<Havana> 때는 카베요 양의 목소리가 이렇게 섹시한 줄 미처 알지 못했다. 그 노래는 오히려 헛, 허잇, 하며 이상한 추임새를 넣는 피쳐링 남자 랩퍼 목소리가 더 섹시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나저나 자기 사랑을 막고 있는 모든 방해물들을 걷어내 버릴 것처럼 덤벼들던 열정의 스무 살짜리는 올해, 자기 사랑이 입고 있는 모든 방해물들을 걷어내 버릴 것처럼 달겨드는 정열의 스물두 살짜리가 되었구나. 과연 그럴싸하다. 스물두 살의 syo 역시…… 히히히.

 

에헴.


 

  사랑의 열정이 무방비한 상태에 빠져 있는 나를 격정적 행위로 나아가게 만든다면그것은 과도함 때문이다사랑이 욕망 자체는 아니지만 본질적으로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낳으며이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사랑하는 사람의 기쁨은 고통으로 변한다.

  사랑의 모순은 희망에 부푼 기대와 좌절에 대한 불안감 사이에서 발생한다나는 이미 정복당하고 싶은 복종눈뜨고 있는 맹목기꺼이 받아들이는 달콤한 순교의 상태에 와 있지만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이것이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한계를 넘어서는 열정의 과도함은 사랑의 시련을 낳는다.

주창윤사랑의 인문학, 86


내가 막 하는 말이 아니라 배우신 분이 하시는 말씀이니까, 얘들아 새겨들어라. 엄한 30대 아저씨 부럽게 만들지 말고…….

 

 


2

 

금요일에는 저녁 730분쯤, 독서실을 빡차고(오타 아님) 나왔다. 대한민국 공부 다 죽가라 그래- 하는 심정으로 버스를 타고 흐느적흐느적 중앙도서관으로 향했다. 신나게 서가를 뒤지고 있는데, 저쪽에서 누가 걸어온다. 뭐야, 저 되게 cyrus 닮은cyrus? , 뭐야, cyrus잖아. 난 또 cyrus인줄 알았네. 결국 우리가 이렇게 약속 없이 도서관에서 마주치는군요. 언젠가 한번은 이럴 줄 알았어요. 그렇지만 하필 바깥세상이 가장 흥청망청한다는 불금 저녁 8시에 그지 같은 꼬락서니로 중앙도서관 종합자료실에서 만나다니, 대체 우린 뭐고 지금 이 기분은 뭐죠? 눈가에 맺힌 그 물은 다 뭐죠? 땀인가요? 그러지 말고 이렇게 만났으니 냉라면이나 먹으러 갑시다. 제가 살게요. 제게 지금 이 꼴을 하고 시내 한복판을 가로지르라는 건가요? 한껏 부리고 온 중생들이 오뇌의 무도를 추고 있을 저 밤의 동성로를요? 딱 도서관 다니기 적합한 복장인데 뭘 그래요. 제가 인적이 가장 드문 경로로 안내할 테니, 자 어서 가시죠. 정 그러시다면, 가시죠. 냉라면에 맥주 한 잔 하시죠. 가시죠. 가시죠.

 

그렇게 가셨다. 냉라면도 맛있고, 백만 년 만에 마신 맥주 한잔도 맛있고, 와사비맛 프레첼도 참 맛있었다. 다 좋았다. 막상 가게에 도착하자, cyrus님이 유리문 손잡이 쪽이 아니라 경첩 쪽을 밀면서, ? 닫혔나? 하긴 했지만 그것도 좋았다. 여러분, 저 리뷰 기계는 사실 허당입니다. 허당이에요. 책 이야기 할 때만 머신 같지, 주말이면 시골 산에 나물 캐러 다니는 건실한 청년입니다. 부디 어려워 마소서.



사람들도 저마다 다른 온도와 습도의 기후대와 문화를 품은 다른 나라 같아서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외국을 여행하는 것처럼 흥미로운 경험을 준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유행어에도 진실이 아주 없지 않지만내 생각에 타인만 한 토털 엔터테인먼트도 없다자기만의 세계관음악 취향관심사와 말솜씨표정과 몸짓신념과 상상력농담의 방식… 이런 요소들은 그 사람 고유의 분위기와 매력을 형성한다물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여행자의 예의를 품을 때내가 갖지 못한 아름다움을 목격할 수 있을 거다.

김하나황선우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23-24

 

 

 

3



내 친구들은 나더러 연민과 후회의 진창 속에서 뒹군다고 한다더 이상 교제도 하지 않는다면서나는 웃을 때 나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린다.

루시아 벌린청소부 매뉴얼

 

표제작까지 읽고 나니, 사람들의 어쩐지 떨떠름한 반응을 이해할 것도 같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들이 파편적인 것 같고, 서술이 산만한 것 같고, 전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선명하지 않다면 그것은 구성의 문제도 있지만 아마 저런 문장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1. 친구들이 비난한다. 2. 나는 웃을 뿐이다. 3. 나는 웃을 때 나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린다. 사이에서 2를 과감히 잘라내 버린다. 2를 잘라버림으로써 1이 선명해지고, 3이 농후해진다. 그런데 1-2-3에서 2를 잘라내는 정도는 어떻게든 알아채지만, 1-2-3-4-5에서 2-3-4를 들어내면 독자는 혼란스럽다. 뭐지, 내가 뭘 놓친 거지?

 

맞다. 나는 뭔가를 놓쳤다. 그런데 그것은 어차피 나더러 채우라고 작가가 비워둔 공간인 듯하다. 번거로운 숙제를 내는 작가로군.

 

 

 

 

 

--- 읽은 ---

+ 까대기 / 이종철 : ~ 283

+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 위근우 : 84 ~ 288

+ 은는이가 / 정끝별 : 53 ~ 123

 

 

--- 읽는 ---

= 청소부 매뉴얼 / 루시아 벌린 : 45 ~ 89

= 여보, 나 좀 도와줘 / 노무현 : ~ 50

= 이것이 실전 회계다 / 김수헌, 이재홍 : ~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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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8-11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사이러스님 또 만났어요? ㅎㅎㅎㅎㅎ
냉라면에 맥주라니. 좋네요!

syo 2019-08-11 22:01   좋아요 0 | URL
냉라면이라는 것을 처음 먹어봤는데, 편견을 깨박살내는 맛이었어요. 좋더라. ㅎㅎ

especially_you 2019-08-12 0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은 글을 재밌게 잘 쓰는 능력자시네요. 글로 사람 웃기기 정말 어려운 건데!

syo 2019-08-12 09:15   좋아요 0 | URL
타고난 센스가 0이라, 쥐어짜내는 스타일입지요..... 그렇지만 어쩐지 보람있네요. 감사합니다^-^

가넷 2019-08-12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라면이란 것도 있군요. 처음알았어요 어떤 맛일까요.궁금하네요

syo 2019-08-12 09:16   좋아요 0 | URL
희한한 느낌이긴 했는데, 뜻밖에 꽤 맛있었어요. 전 메밀소바보다 훨 맛있더라구요 ㅎㅎ

반유행열반인 2019-08-12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재밌다

syo 2019-08-12 09:16   좋아요 1 | URL
아아 영혼이 잔뜩 느껴진다

반유행열반인 2019-08-12 11:18   좋아요 0 | URL
아 진심 재밌는데...어디가 재밌냐고 되물으면 노래로 두리안 던지는 섹시한 젊은 뮤지션들도 재밌고 나물 캐는 서평 기계님이랑 또다른 인공 지능이 조우해서 냉라면이랑 맥주랑 와사비 프레첼 먹는 부분이랑 생략되었지만 언젠가는 풀어줄 스물두 살 syo도 미리 재밌고....이렇게 답할려고 한 건데...이 모든 걸 2345까지 생략한 걸 알고 영혼이 잔뜩 느껴진다고 하신 거죠? 저의 압축미와 생략 기술이 향상된 것이죠?(쳇쳇쳇....)

syo 2019-08-12 16:15   좋아요 1 | URL
그럼요. 말씀하신 모든 걸 다 캐치했고 염두에 두고 남긴 댓글입니다. 진심 영혼이 잔뜩 느껴졌습니다. ㅎㅎㅎㅎ

설해목 2019-08-12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나 맥주한잔 하는 기분은 어떨까요?
한번도 그런 근사하고 멋진 우연을 경험한 적이 없는 지라 진짜진짜 디게 부럽습니다. syo님~ ^^

syo 2019-08-12 16:16   좋아요 1 | URL
웃음만 나더라구요. 동선이 이다지도 겹치는 두 30대 남자라니, 반가우면서도 어쩐지 설웁다......

stella.K 2019-08-12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왜 시루스에 대한 이미지가 저한텐 똑같이 느껴지는 걸까요?

난 왜 우연히 만나지는 사람도 읎는 것이냐?
나도 우연히 사람 만나고 싶다!!ㅠㅠ

syo 2019-08-12 16:16   좋아요 0 | URL
대구로 오시면 도서관이나 알라딘 같은 데서 사이러스님을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 ㅎㅎㅎ

cyrus 2019-08-12 1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 만난 날 집에 돌아오면서 알았는데요, 냉라면 사진을 못 찍었어요.. ㅋㅋㅋㅋㅋ 제가 음식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거 생각 못했네요...ㅋㅋㅋ


여기는 알라디너들이 모이는 핫 플레이스이니까, 라면 먹은 가게 홍보나 해야겠다.

여러분, 대구역에 내리시거나 동성로(대구 번화가)에 가면 ‘투찬스’를 방문해주세요. 직접 일본에 가서 라면을 만드는 법을 배운 동생과 전 세계 맥주를 거의 다 마셔본 맥주의 달인 형이 세운 음식점입니다. 투찬스가 만든 여름 별미 냉라면 드시러오이소~

투찬스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two_chance_official/

설해목 2019-08-13 15:05   좋아요 1 | URL
오홀~~ 접수했습니다!!! 이런 고급 정보 아주 좋아요 ^^

syo 2019-08-13 20:0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홍보 잘한다 ㅋㅋㅋㅋㅋㅋ
분명히 영업에 소질이 없지 않아요. 뜻밖에.

2019-08-14 0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4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형용사 형용사람 형용사랑

 

 

1



겐지는 소녀와 소녀 주변의 완고한 수행원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비록 이른 나이에 혼인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이 열 살짜리 소녀는 그 나이치고 아직 미성숙하다고 그녀의 수행원들은 주장했다그들은 그가 요구한 대로 시를 그녀에게 전해주기는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녀가 아직 시를 짓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이 점은 나이에 비해 그녀가 정말로 아직 미성숙하다는 표식임을 겐지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시를 지을 줄 모르는 소녀는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145)

_ 마틴 푸크너, 『글이 만든 세계』

 

지루함과 고루함을 참아가며 겐지 이야기를 한 권씩 읽어가던 시절이 떠오른다. 내가 이걸 왜 읽고 앉았느냐는 회의감과 끝없이 싸워나가야 했던 긴 시간이었다. 마침내 10권을 끝냈을 때, 너무나도 기뻤다. 11권이 없다는 사실이. 그게 다, syo가 어리고 철이 없어서였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시를 지을 줄 모르는 소녀는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라는 문장이 그리는 세상은 좀 아름다운 것 같다. 진짜로 지루한 작품이건 아니건 간에, 어쨌든 그 10권의 책 속에는 무시하기 쉽지 않은 양의 아름다움이 (syo에게 무시된 채로) 있었을 것이라고, 주인공과 작가의 이름 말고는 기억나는 게 1도 없는 오늘날은 생각해본다.

 

 직후 오랫동안 딸을 방치해온 소녀의 아버지가 소녀를 겐지가 손을 뻗을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가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겐지는 지금은 발 빠르게 대처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어떤 구실을 들어서 그는 소녀의 거처로 달려갔다이번에는 모든 관습과 예법을 팽개쳐버리고경악한 소녀의 수행원들의 비명 따위는 무시한 채로 발과 장막병풍을 밀어제치고 규방으로 쳐들어갔다소녀는 잠을 자고 있었지만 겐지는 소녀를 품에 안은 다음 소녀가 잠에서 깨는 기척을 보이자 가만히 어르고는 자신의 마차에 태워 가버렸다그가 보기에는 이 모든 일은 그녀가 잘 되라고 하는 것이었다그는 자신의 집에서 소녀를 보살피고 그녀에게 걸맞은 수행원들과 앞날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또 명백히 방치되어온 그녀의 교육을 겐지가 직접 책임질 수도 있을 턴이니 교육을 통해서 소녀는 제대로 된 숙녀가 될 수 있으리라.

 (나를 포함한많은 독자들에게 이 도입부는 굉장히 불편하다그녀의 아버지의 뜻에 반하여 열 살짜리 소녀를 납치하는 설정은 건전한 관계를 위한 훌륭한 처방으로 보이지 않는다그러나 무라사키 시키부의 초기 독자들은 다르게 반응했다그들은 남자 연인이 열 살짜리 소녀를 납치한 데에 살짝 충격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러한 행위를 가능하게 했던 더 넓은 차원의 혼인제도에 관해서는 비난하지 않았다그리고 그들은 여러 가지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히카루 겐지에게 감탄하며 그가 성숙해가는 과정을 칭찬했다. (145-146)

_ 같은 책

 

그리고 그 아름다운 세상은 저런 세상이기도 했다. 이런 시빌세기(11C).

 

 

 

2



  신부님은 나에게 어떤 기도문을 외라고 했다내가 그 기도문을 모르므로 신부님은 그것을 내게 불러주었고나는 신부님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에 대해 통탄할 만큼 미안해하며 그것을 따라 했다그런 다음 신부님은 내 죄가 무엇인지 물었다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나는 정말로 진실로 고백할 죄가 없었다하나도 없었다나는 고백할 죄가 없어서 너무 부끄러웠다물론 뭐라도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이다얘야네 마음속을 깊이 살펴보거라……아무것도 안 보였다신부님을 기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나는 필사적으로 하나를 지어냈다내 여동생을 헤어브러시로 때렸다고 했다네 동생을 질투하느냐그럼요신부님질투는 죄란다얘야그 죄를 없애기 위해 기도해성모송 세 번 외거라나는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고해성사가 짧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음번에는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다음번은 없었다그날 방과 후 세실리아 수녀님이 나를 붙들어놓았다그 상황이 더 유감스러웠던 건 수녀님이 매우 친절하다는 점이었다수녀님은 내가 얼마나 가톨릭의 성사聖事와 성체聖體를 체험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다성체맞아요하지만 나는 개신교인 데다 세례도 견진성사도 받지 않았다그렇지만 착하고 온순한 학생이기 때문에 이 학교에 다니도록 허락을 받았으며그래서 수녀님은기쁘지만 내가 교회 의식에 참여할 수 없다고 했다다른 아이들과 운동장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두려운 생각이 들어 성인聖人 카드 네 장을 꺼냈다학생들은 읽기나 산수에서 만점을 받을 때마다 별 한 개를 받았다그리고 금요일마다 그 주에 가장 많은 별을 받은 학생은 성인 카드를 받았다야구 카드와 비슷하지만 성인의 후광에는 야구 카드에는 없는 반짝이가 붙어 있었다성인 카드는 가지고 있어도 돼요나는 괴로운 심정으로 물었다.

루시아 벌린별과 성인

 

읽기도 전부터 이 책이 어떨 것이라 예상케 만드는 요인들이 꽤 있었다. 에드워드 호퍼 풍의 적막한 표지나 작가가 사후에야 재발견되어 인정받고 있다는 쓸쓸한 사연 같은 것들. 누구의 인생이라고 막 순탄하겠느냐마는, 책날개에 언급된 작가의 생을 보면, ‘세 번의 실패한 결혼’, ‘알코올 중독’, ‘싱글맘으로 네 아들을 부양’, ‘평생 시달리던 척추옆굽음증으로 허파에 천공이 생겨 산소호흡기를 달고’, ‘암으로 투병하다 사망’, 이런 독하고 쓰린 이력이 잔뜩이다. 그런 벌린이 자기 삶을 기반으로 하여 써 낸 짧은 이야기들의 모음이라 하니, 이 책의 첫 페이지에 손가락을 올린 syo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침 한번 꼴깍 삼키고, 최대한 진지하고 웅숭깊은 눈알을 장착한 채 페이지를 열었는데,

 

뜻밖에 웃기고 너무나 귀여운 구석이 있어서 좋다. “성인 카드는 가지고 있어도 돼요?”라는 대사는 요즘 자주 사용하는 그렁그렁 그렁이이모지를 떠오르게 한다.

 

그렁이

 

 

그렁이 구글버전

 

 

 

3



사랑에는 형용사가 필요하지 않다. (361)

_ 주창윤, 사랑의 인문학

 

요즘 가장 사랑스러운 품사는 형용사다. 정확히 말하면 형용하는 문장이겠다. 정확히 말하고 보니 형용사랑은 좀 다르네. 그렇지만 저 문장이 건네고 싶어 하는 사랑의 규범은 품사로서의 형용사를 말하기보다는 형용하는 행위 자체를 일컫는 것 같다. 그렇다면 형용사라는 호명에 형용하는 문장이 대답하는 것도 크게 잘못된 일이 아닐지도.

 

무언가를 형용하는 일에는 품이 많이 들어간다. 오래 보아야 하고, 오래 궁굴려야 한다. 오래 보아야 아름답다는 말을 들을 때면 늘 생각한다. 오래 보고 나서도 아름답다는 추상적이고 몰개성적인 말밖에 하지 못하는 오래봄이 진짜 오래봄일까를. 아름다워 보일 때까지 오래 보는 것과 형용하려는 마음으로 오래 보는 것은 조금도 같지 않다. 세상에 없는, 최소한 이미 내가 만들어 놓은 문장 사전 안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은 새롭고 더 적확한 문장을 찾아내 당신을 형용하고야 말겠다는 욕심이 더 깊게, 더 두루두루 당신을 보게 한다. 그런 오래봄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므로 사랑의 자식이지만, 동시에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사랑을 가능케 하므로 사랑의 부모다.

 

사랑에는 형용사가 필요하다.

 

어떤 사랑에는 11형용사가 필요하다.

 

 

 

 

--- 읽은 ---

+ 사랑의 인문학 / 주창윤 : ~ 379

+ 우리말 강화 / 최경봉 : 177 ~ 335

 

 

--- 읽는 ---

= 글이 만든 세계 / 마틴 푸크너 : 148 ~ 224

=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 위근우 : ~ 84

= 은는이가 / 정끝별 : ~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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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08-09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문장에 반박하기 위한 마지막 글보니...창윤(님이, 이가,) 잘못했네. ㅋㅋㅋ 아름답다 좋다 보다 더 나은 말을 저도 찾아 보아야 겠습니다.

syo 2019-08-09 11:08   좋아요 1 | URL
아름답다 좋다가 제일 편하긴 한데 말이죠ㅎㅎㅎㅎ 쉬운 거 없다....

단발머리 2019-08-09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소부 매뉴얼, 표지만 봐서 정체를 예상치 못했는데 단편집이었군요. 작가 이력이 너무 다채로와서 슬프네요.

오늘의 명단어 : 시빌세기
나는 왜 이런데 이렇게 끌릴까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

syo 2019-08-09 11:10   좋아요 0 | URL
그런 건 유전자의 농간입니다. 태어날 때 결정돼서 벗어날 수가 없다ㅎㅎㅎ

청소부 매뉴얼 이제 겨우 세 편 읽어서 단언하긴 그렇지만 좋아요. 이제 표제작 <청소부 매뉴얼>을 읽어야 하는데 사흘째 미루고 있다.....

레삭매냐 2019-08-09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시아 벌린의 책은 저도 도서관에
상호대차 신청했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인 왜 그 시절에는 사람
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작가 사후에
재평가를 받게 되는지.

그 땐 틀리고 지금은 맞다? 궁금할 따름
입니다.

syo 2019-08-11 11:14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사후에 작품이나 작가에 아우라가 더해지는 일들을 많이 목격하면서도 항상 그러려니 넘어갔네요. 죽음이 남은 자들의 세상에 주는 씁쓸한 선물 같은 것일까요.

2019-08-10 05: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1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식쟁이 2019-08-11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글바글 이모티콘 세상에서 고유성을 부여받아 존재감을 득하였어요. 감사해요 쇼님.
-그렁이 올림-

syo 2019-08-11 21:41   좋아요 0 | URL
그렁아..... 고마워 할때조차 여지없이 그렁그렁한 우리 그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