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새하얀 나라의 나는 부디



 

눈에 관해서라면 작년은 좀 유별났다. 첫눈이 11월 첫날이었다. 크리스마스에는 크리스마스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눈이 왔다. 첫눈과 크리스마스 사이에도 눈은 이 별이 기어이 망했구나 싶을 정도로 쉼 없이 내렸고, 그래서 우리는 자주 다퉜다. 그러다 마침내 헤어졌다. 우리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크리스마스와 새해 첫날 사이의 어느 날이었다. 부주의했다. 이 별 걱정이나 하다가 이별이나 하다니. 제 사랑이나 돌볼 것이지, 별보다 천천히 멸망하는 사랑이 어디 있다고. 우리 사랑의 안위가 어찌 되었건 눈은 그냥 계속 내렸다. 헤어지기 전에도 내렸고 헤어지는 중에도 내렸고 헤어지고 나서도 내렸다. 크리스마스 날이 우리가 헤어지기 전인지 헤어지는 중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날은 기록적인 폭설이었다. 그날을 반지하에서 기념한 연인들은(우리는 아니다) 아마 아주 긴 밤을 보냈을 것이다. 눈이 사람들 가슴 높이까지 쌓였으니까. 오늘 밤은 왜 이리 긴 걸까, 창문을 두드리는 저 어둠은 왜 물러가지 않는 걸까. 알람은 울리는데 왜 해는 뜨지 않는 걸까……. 정말이지 기록적인 블랙 크리스마스였다. 이 세상에도, 내게도.

 

다 눈 덕분이었다. 눈이 쉼 없이 내려서 우리는 아주 원 없이 다툴 수가 있었다. 겉으로 보면 우리는 서로의 미운 모습을 미워하고 고운 모습을 고와하는 보통의 연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미움과 고움을 테트리스 조각들처럼 요리조리 잘 맞춰 한두 줄씩 상쇄시켜가며 또 다음 조각의 낙하를 준비하는 필수적 연애 기술이 결핍된 사람들끼리 만난 운 나쁜 케이스이기도 했다. 그렇게 각자의 마음속 지하실에 미움은 미움대로 고움은 고움대로 쌓아 올리기를 몇 년, 언제부턴가 우리는 그야말로 애증의 관계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라고 해도 될 법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애가 범람할 때는 증오하던 자신을, 증이 끓어 넘칠 때는 애정하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하며, 낙원으로 출근하고 전쟁터에서 퇴근하는 심상찮은 연애를 꾸역꾸역 이어나갔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자각이라는 게 있어서 이러다 조만간 큰일 날 공산이 크다는 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알아챘고, 이내 둘만 있을 때는 싸우기보다 침묵으로 시공간을 낭비해버리자는 암묵적 합의에 도달했다. 그러나 또 아예 안 싸울 수는 없었던 우리는 밖에서, 그러니까 공공장소에서, 이를테면 보행자 통행량이 많은 지역의 사거리 스타벅스 통유리 안쪽에서 아메리카노를 시켜 놓고, 혹은 퇴근 시간 선릉역 분당선 고색 방면 3-3번 대기열 왼쪽과 오른쪽에 나란히 선 채로 우리 운명에 할당된 다툼의 총량을 의연하게 채워나가기로 한 것이다. 스타벅스에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놓고 마주 앉으면 아무리 세게 다퉈도 서로의 얼굴에 그걸 끼얹어 후에 벌어질 끔찍한 일들을 감수할 정도까지 분노가 축적되는 일은 없었고, 집으로 돌아가는 직장인들이 꽉 들어찬 열차 안에는 팔을 들어 휘두를 만한 여유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싸대기를 날릴 만큼의 증오가 폭발하는 일도 없었던 것. 주머니 사정이 좀 괜찮을 때는 스타벅스로, 그렇지 못할 때는 선릉역으로, 우리는 가서 다퉜다. 두 곳을 방문하는 빈도가 처음엔 비슷하다가 이내 스타벅스 쪽으로 치우치게 된 것 이유도 다 눈이었다. 언쟁의 텐션을 올려 가다가도, 문득 창밖에 내려 쌓이는 검은 눈에 눈길이 가면 끓던 분노가 시원하게 식어가는 느낌을 받곤 했던 것이다. 어느 날, 그날도 그다지 중요치 않은 무언가를 놓고 이게 다 니 탓이네, 그게 다 천만의 말씀이네, 싸우는 중이었는데, 이유는 아무래도 기억이 나질 않지만 하여간 내가 언성을 높일 차례에서 나는 분노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화에 취해서, 내 터져나가는 울화통의 안쪽 면을 까뒤집어 낱낱이 보여주겠다는 욕심에 취해서 인사불성으로 막 뭐라고 쏘아대다가 정신줄을 잡아보니 내 앞에 앉은 그 사람은 내 거친 말이나 불안한 눈빛 같은 건 이 세상에 없는 것이라는 평온한 표정을 하고 통유리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지금 이게 무슨 경우 없는 경우-를 외치며 나는 벌떡 일어섰는데, , 바깥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검고 굵은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검지를 허공에 쑤시는 자세 그대로 굳어 서서 잠깐 밖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그대로 둔 채로 엉덩이만 다시 의자에 붙였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도 말없이 내리는 눈을 한참 바라보았다. 바쁜 걸음으로 길을 재촉하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어깨 위에, 바짓단에, 발끝에, 굵고 검은 눈이 묻어 있었다. 저녁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세상이 온통 눈으로 검었다. 우리가 겨울을 여기서 보내겠구나, 내리는 눈을 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겨울의 꼭대기가 도착하기 전에 우리는 헤어졌다.

 

다른 날이었다. 왜, 약국에서 안약 줄 때, 그 사람이 말했다. 약사가 그러잖아, 안약은 개봉 후 1개월 지나면 버려야 되는 거 아시죠? 뭐 이렇게. 나는 대답 없이 그저 눈에 안약을 넣는 일에 집중했다. 그 사람도 내 대답을 기다릴 작정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늘 그렇듯 우리가 하고 있던 것은 대화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지 대화는 아니었으니까. 한 달 지난 안약을 사람들이 꼬박꼬박 폐기하는 게 보통이라면 약사들도 그렇게 그걸 강조하지는 않을 거잖아. 사람들이 참 그래. 반대쪽 눈까지 투약을 마친 나는 눈을 깜빡여보고는 눈물처럼 흐르는 안약을 스타벅스 로고가 찍힌 티슈로 닦아내며 대답했다. 난 안 그래. 그럴 일이 없지. 난 안약 한 통 다 쓰는 데 한 달도 안 걸리거든. 그러자 그 사람이 말했다. 그래. 넌 그래. 넌 그런 사람이야. 그래서 우리는 헤어지자.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즈음에는 이제 다툼의 한 챕터를 닫고 조만간 또 새로운(완전히 새롭지는 않은) 챕터가 열릴 때까지 잠깐 쉬어가자는 제안의 줄임말로 이럴 거면 우리 헤어지자는 구절을 사용하곤 했으니까. 누구 한 사람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면 상대방은 그냥 침묵한다. 그리고 넌지시 창밖을 보면 언제나처럼 눈이 내리고 있고, 온통 검게 덮인 세상이 우리의 마음에 암막을 쳐 주는 것. 그 암막 안에서 각자의 생각을 다스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허기가 질 때쯤 손을 잡고 일어나 가까운 식당에 가서 쌀국수와 분짜를 시켜 나눠먹는 것. 그것이 우리가 조리하는 다툼의 코스요리였다. 그렇지만 그날은 거의 모든 게 달랐다. 두 사람이 바깥을 바라보는 것까지는 같았지만, 끝나지 않는 그 사람의 말이 계속 침묵을 적셨고, 침묵은 물에 빠진 휴지 쪼가리처럼 산산이 흩어지는 중이었다. 너는 그런 사람이지. 남들은 보통 한 달이 지나도 버리지 않는 안약을 한 달이 채 되기도 전에 다 써 버리는 사람이지. 왜냐하면 쉬지 않고 안약을 넣으니까. 적당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이제 들지도 않고, 너가 왜 그러는지가 이제 중요하지도 않아. 그냥 나는 지금 그런 너가 싫어. 이제 와 싫어진 건지 애초부터 싫었던 걸 더는 못 참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지금 확실히 너는 그런 사람이고 나는 이런 사람이야. 이번에는 뭔가 좀 다르다고 느낀 나는 당황에 차서 그 사람을 바라보았지만 그 사람은 여전히 내 쪽으로는 시선도 두지 않고 그저 내리고 쌓이는 눈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차피 이쪽을 바라보지도 않을 걸 직감했으면서도 나는 마치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얼른 고개를 돌려 다시 바깥으로 시선을 던졌다


너는 우리가 잘 될 것 같아? 나는 안 될 것 같아. 이제 이러는 것도 지쳤어. 지치지 않아? 싸우고, 화해하고, 싸우고, 밥 먹고, 싸우고 섹스하고, 다시 싸우고, 또 싸움이 아닌 뭔가를 하고…… 싸움과 싸움 사이에 뭔가를 끼워 넣으려고 만나는 건 진짜 아니잖아. 더는 못 하겠어. 이런 게 일상이 되는 건 어떻게든 참을 수 있었는데, 일상이 이렇게 되는 것까지는 아무래도 못 하겠어. 내가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동안 내 눈동자는 통유리 바깥 세상 여기저기를 찌르며 돌아다녔다. 바깥은 너무 어두웠다. 검은 눈송이는 옅은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처럼 허공에 암막을 쳤고 어떤 빛도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올 만한 용기가 없는 듯했다. 눈이 내리고 있는지 공중에 멈춰 있는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저렇게 검은 눈들도 녹으면 투명한 물이 되는데, 세상은 이번 겨울에 저 쌓인 눈들을 물로 바꿔 치워낼 생각이 없는 것만 같았다. 끝인가, 다 끝났나, 그런 말을 나도 모르게 툭 내뱉었던 것도 같다. 그 사람이 다시 입을 열었다. 통유리에 어렴풋이 비친 그 사람은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고개를 돌리면 눈을 마주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순간 그만한 용기를 내는 일이 너무도 어려워 나는 그저 밖을 바라보는 척 통유리에 비친 그 사람을 바라보며 묵묵히 그 사람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었다. 최근에는 저 눈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이렇더라도 세상이 지금과 조금 달랐다면 또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자주 했어. 그러니까 어딘가에 평행 세계 같은 게 있어서, 거기도 너가 살고 내가 살고 우리가 만나서 사랑하는데, 근데 그 세상에 내리는 눈은 흰색인 거야. 여기와는 다르게 눈이 새하얘서 눈이 내리면 세상이 막 밝아지는 거야. 블랙 크리스마스라는 말 대신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말이 있고, 캐럴 노래의 가사도 온통 하얗고 하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그런 세상에 또 다른 우리가 있다면, 거기 사는 우리가 여기의 우리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사랑하면서 산다는 게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닐 것 같다는, 뭐 그런 생각. 그치만 여기서는 이제 안 돼. 이 세상에서 우리는 끝났어. 지금 돌아보면 시작부터 이미 틀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 틀렸어. 너도, 나도, 세상도. 우리가 계속 만나려면 저 세 가지 중에 뭔가 하나라도 부여잡고 갈 만한 게 있어야 했는데. 여기서 우리는 더 할 수 있는 게 없어.

 

눈이 그쳤다. 바깥 세상이 밝아지자 더는 통유리에 실내가 선명하게 되비치지 않았다. 나는 그 사람이 앉았다 간 자리를 바라보며 흰 눈의 세상에 대해 생각했다. 눈 내리는 날 환해지는 세상. 눈사람이 하얀데 우리는 견딜 만큼만 다투고, 눈이 내려앉은 나뭇가지가 목화처럼 보이는데 헤어지지 않는 우리가 있는 세상. 아주 작은 것이 다른데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달라지는 세상. 그 세상에도 그 사람이 좋아하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있고, 우리가 몇 번씩이나 읽고 이야기 나누던 설국이 있다면, 아마 그 책의 첫머리는 여기와는 다르게, 그러니까 이렇게 시작했겠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그러니까 그쪽의 내게 말해주고 싶다. 그쪽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답다. 조금 더 아름다운 그쪽 세상의 문장처럼. 더 아름다운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에 실수하지 않기를 바란다. 여기는 다시 눈이 내리고 있다. 밤의 밑바닥은 자꾸만 검어진다. 눈의 나라라도 될 모양이다.




댓글(19) 먼댓글(0) 좋아요(5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Vita 2021-06-30 11: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6월의 리뷰 선정! 설국 아직 안 읽은 저는 도서관으로 푱.

syo 2021-06-30 11:43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ㅋㅋ 설국을 읽어요! 여기에도 어떤 유형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독서괭 2021-06-30 11: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앗 블랙크리스마스가 은유인 줄 알았는데!! 전 <설국>보다 이 글에 좋아요를 보내겠습니다. <설국>은 영 공감도 이입도 안 되었는데 이글은 너무 좋아요. 신박한 리뷰쟁이 syo님 최고다~

syo 2021-06-30 11:44   좋아요 4 | URL
저도 <설국>에 크게 공감하지 못했어요. 그냥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름다우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럼 이 책은 아름다움 말고는 남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럼 리뷰에는 ‘아름다움‘이라는 네 글자만 적어야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그 네 글자를 길게 써 보았습니다....

그레이스 2021-06-30 11: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 안에 소설이 있네요^^

syo 2021-06-30 11:45   좋아요 2 | URL
원체 리뷰에 소질이 없어서 늘 이런 식으로 장난질을 한답니다....
뭔가 리뷰다운 리뷰 좀 쓸 수 있고 싶다....

그레이스 2021-06-30 11:46   좋아요 2 | URL
제가 아는 syo님의 리뷰 실력은 다른데요?!
훌륭하십니다.!

syo 2021-07-03 14:0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ㅎㅎㅎ
서재 친구님들 다정하셔.....🥰

미미 2021-06-30 12: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별 그리고 이별&테트리스만 봐도 등단각이고 올해의 주목 작가 각인데요!!!(나름 이상해진 ‘이상문학상 수상작‘과 ‘젊은작가상수상작‘ 쫌 읽었으니 믿어달라는 거시기🙄)
그러니까 나는 사탕을 녹여 먹는데 너는 깨물어 먹으니 우리 헤어져 인가요. 저도 대박 싸울때 잠시 멘탈이 돌아와 뭘로 싸웠더라 그 시초를 떠올리곤 경악을 할 때가 있었죠. 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저 문장이 다했다고 봅니다.

syo 2021-07-03 14:04   좋아요 0 | URL
나는 녹여 먹는데 너는 깨물어 먹으니 우리 헤어져 라고 말하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것들이 축적되잖아요. 결국 사탕 때문이면서 동시에 사탕 때문은 아닌, 뭐 그런 보통의 이야기지요.....

ㅎㅎㅎ 설국은 막상 읽어보면, 뒤쪽에도 아름다운 글들이 꽤 많습니다.
물론 첫 구절이 임팩트가 크긴 한데.

반유행열반인 2021-06-30 16: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이참 하얀 눈 나라에 살아서 다행이다…

syo 2021-07-03 14:05   좋아요 1 | URL
검은 눈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평행소년소녀들을 응원합시다.

2021-07-03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03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03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딩 2021-07-07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관왕 축하드립니다 :-)

syo 2021-07-08 01:10   좋아요 0 | URL
반사합니다 ㅎㅎㅎㅎㅎㅎ

이하라 2021-07-08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서니데이 2021-07-08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피에 젖은 땅 -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걸작 논픽션 22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신

 

인편으로 보내주신 차는 잘 받았습니다. 서찰에 말씀하신 것보다는 조금 늦게 도착하여 답신이 이리 늦었습니다. 염려해주시는 덕분에 아내의 건강에도 조금씩 차도가 있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보고서 건과 관련해서 위원장님 면담을 수차례 신청했지만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편집 회의를 한번 더 열 수 있을까 해서 찾아뵌 것입니다만, 위원장님이 제 면담 신청을 거절하는 제가 모르는 이유가 혹시 있겠습니까? 제가 듣기로, 최종 편집 회의에서 결정된 편집 방침은 전임 편집장 토마슈 씨가 극렬히 반대하였음에도 관철되었고, 그 이유로 토마슈 씨가 사퇴한 자리에 후임으로 제가 추천된 것이라던데요. 물론 저도 정해진 편집 방침이 있음을 알고서 수락한 것이긴 하지만, 편집장인 제가 단 한 번의 편집 회의에도 참여하지 못한 상태에서 보고서 작성을 지휘하는 것이 과연 온당하겠습니까. 근거 자료 확정 시한은 점점 다가오는데, 이대로라면 그냥 묻혀버리고 말 아까운 자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개별 증언의 비중을 높이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하겠습니까? 대중에게 일부라도 공개하는 방향은요? 토마슈 씨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지금의 편집 방향 아래에서는 보고서 작성 취지를 제대로 살리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모든 게 불가능하다면, 지금까지 모아놓은 자료들만이라도 공개하여 다른 형식의 책이 출간될 수 있게끔 해야 합니다. 그거라도 해야지요. 반드시 말해져야만 하는 것들이 형식과 입장에 재갈 물려 침묵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우리가 두고만 봐야 한다면, 결론적으로 우리가 저들과 다를 게 무엇이겠습니까.

 

편집 회의 개최가 어렵다면 선생님께서 고문 자격으로 저 대신 위원장님께 의견을 전달해주셨으면 합니다. 시일이 촉박합니다. 급한 대로 몇 개의 녹취록을 첨부합니다. 손에 닿는 대로 골라낸 것입니다. 요청하시면 자료는 더 보내드리겠습니다. 많습니다. 그리고 면담 결과가 나오면 최대한 빨리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아내의 요양 겸 같이 떠나기로 한 휴가처는 위원회 본부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정했습니다. 사실 휴가라는 것 자체를 즐길 수가 없는 마음입니다. 선생님의 답신에 따라 가닥이 잡히겠지요. 봉투에 적힌 주소가 저희 부부의 휴가처입니다. 모쪼록 선생님께서도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녹취록 1

 

내 아버지는 소위 말하는 부농이었어. 부농. 나는 아직도 그게 정확히 뭐였는지를 모르겠단 말이야. 분명 우리 가족에겐 땅이 있었고 가축도 몇 마리쯤 있었지. 곳간에는 우리가 먹을 곡식 말고도 다음 농사를 위한 종곡種穀도 있었고. 그렇지만 그게 다였어. 끼니는 놓치지 않았지만 끼니와 끼니 사이에 늘 배고플 정도로만 먹을 수 있었거든. 난 그게 늘 불만이었어. 그땐 알 수가 없었거든. 배고픔과 배고픔 사이에서 아주 잠깐이라도 배고프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냐고. 끝나지 않은 배고픔 같은 게 있을 수 있고, 그 끔찍한 게 곧 찾아올 거라는 것을 말이야.

 

부농이라고 낙인찍힌 내 아버지는 강제이주 명령에 저항하다가 재빠르게 처형당했지. 그때 마을엔 우리 집 것보다 곱절은 넓은 외양간에 가축을 가득 채우고서도 부농이 아닌 사람도 있었지만, 부농이라는 죄로 추방을 당했던 찢어지게 가난한 가장도 많았어. 부농인지 아닌지를 정하는 건 땅이나 가축이 아니라 사람이었거든. ‘트로이카라 불리는 놈들이었는데, 그놈들에게는 사형이나 추방형을 마음대로 내릴 힘이 있었고, 우리에게 항소권 같은 건 없었지(64). 많이 죽었어. 많이들 쫓겨났고. 내겐 형이 하나 있었는데, 아버지를 죽인 놈들이 그 자리에서 형을 강제노동수용소로 추방해버렸지. 무슨 짐짝처럼 기차에 실려 간 형은 벨로모르 쪽으로 운반됐고 거기서 운하를 파는 작업에 동원되었다나 봐(66). 나중에 편지를 하나 받았는데, 거기엔 무슨 일이 있든, 여기 오지 마. 우린 여기서 죽어가고 있어. 숨거나 차라리 거기서 죽어.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긴 오지 마.”라고 쓰여 있었지(75). 형과는 그게 끝이었어. 아마 죽었을 거야. 선생도 알잖아, 수용소라는 데가 어떤 데인지.

 

? 나는 끌려가지 않았어. 보시다시피 나는 다리가 불편하지. 이건 그때도 그랬거든. 그래서 위대한 트로이카 나리들이 보시기에 나는 신성한 노동수용소에 발탁될 만한 인재가 못 됐던 거야. 대신에 가축과 농기구를 싹 다 빼앗기고 집단 농장에 합류해야 했지. 우리 땅도 더는 내 것이 아니었어. 농장에는 당 관계자와 경찰 놈들이 득시글거렸고, 거지 같은 음식이나 주면서 그것조차 농장의 두목한테 받아먹으라더군(68). 그 악마 같은 공산당 놈들은 이 세상에도 저세상에도 신 같은 건 없다는 천벌 받을 소리를 퍼트리고 다녔어. 그러니까 뭐 하나 우리 마음에 드는 게 없었던 거야. 그래서 우리는 싸우거나 도망쳤어. 싸우는 사람들은 총도 없이 용감했고, 폴란드로 도망친 사람들은 제발 폴란드가 우리나라를 침공해서 우리를 구해달라고 탄원할 정도로 용감했지(71). 잠깐이지만 그게 먹히기도 했어. 모스크바의 스탈린이라는 작자가 집단 농장은 자기 실수였다고 말했다더군. 그놈은 무슨 하느님 비슷한 거였나 봐. 그의 말 한마디에 집단 농장은 생겨날 때처럼 빠르게 사라졌지. 우리는 가을밀을 수확했고, 다시 돌아온 우리 땅에 작물도 심었지(74). 다 끝났다고, 짧은 지옥을 지나왔다고 생각했어. 진짜 지옥이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말이야. 겨울이 오자 죽은 줄만 알았던 집단 농장도 함께 돌아왔지. 놈들은 훨씬 교묘해졌어. 자영농들은 집단 농장에 합류할 때까지 무시로 세금을 두드려맞았고(74), 강제추방으로 사람들이 사라지는 속도가 그전보다 훨씬 빨랐어(75). 마침내 집단 농장 놈들이 종곡을 마음대로 쓸어갈 수 있게 되면서 우리 싸움도 끝났지. 생각해 봐. 땅을 지키고 가축을 지키고 농기구를 지켜서 뭣하겠어. 그 땅에 뿌리고 경작할 것들을 이미 다 뺏겼는데.

 

이런저런 일은 있었지만 30년 그해는 농사가 꽤 잘 됐거든. 여름 날씨도 유난히 좋았고. 대풍작에 가까웠지. 게다가 추방당한 사람들이 연초에 뿌려놓았던 밀을 남은 사람들이 거둘 수도 있었어. 문제는 공산당 놈들이 30년 생산량을 보고 31년의 징발량을 정했다는 거지(76). 그건 정말 터무니없었어. 처음부터 우리는 모두 그게 안 될 일인 걸 알았어. 공산당 놈들조차 알았지. 하지만 우리가 나쁜 날씨와 해충, 추방의 위협과 싸워가며 일하는 동안 스탈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징발량을 맞추기 위해 종곡까지 거두어들이라는 거였어. 정말 미친놈만이 할 수 있는 소리였지. 그런데 그게 그렇게 되었어. 우리는 31년 말부터 제대로 굶주리기 시작했고, 32년이 되자 심을 곡식도 없었어. 32년 흉작이 31년 흉작보다 더 심해질 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했지(77). 카자흐스탄에서 100만이 죽었다는 소문이 들리더구먼. 하지만 스탈린은 굶주림 같은 건 없다고 계속 말하면 진짜 굶주림이 없어진다고 믿는 머저리처럼 굴었어. 지역 공산당원들은 그래도 우리가 굶고 죽어 나가는 걸 눈으로 봤으니, 위에다가 계속 그 상황을 보고했거든. 소용없었어. 스탈린은 그들에게 식량 대신 총살을 선물했지. 그때 그놈은 흑해 쪽에 있는 소치라든가 하는 곳에서 휴양을 즐기는 중이었다는데, 그 휴양지까지 스탈린이 타고 간 기차에는 온갖 산해진미가 그득했다고 하더라고(82). 그런데 그놈의 열정적인 입은 휴가지에서도 쉬지를 않았나 봐. 또 스탈린이 뭔가 말했고, 그건 즉시 법이 되었어. 그 법이 말하기를, 우리가 수확한 모든 곡식은 나라 것이므로 우리는 식량을 소지하기만 해도 범죄자가 될 수 있었지. 그러니까 너무 배가 고파서 얼마 전까지 내 땅이었던 곳의 밭고랑에서 감자 껍질을 주우면 총살을 당할 수도 있었던 거야(84). 밭에는 감시탑이 세워졌고 수색단원들이 식량 숨긴 게 있나 집집마다 샅샅이 뒤지고 다녔지. 그놈들은 데우고 있던 저녁 식사를 포함해서, 음식처럼 보이는 건 모조리 쓸어갔어(85). 혼자 사는 여자들은 곡물 압수를 핑계로 밤마다 강간을 당하는 게 일상이었고, 일이 끝나면 식량까지 빼앗겼지(86). 위대하신 스탈린 나리의 법과 나라가 거둔 승리란 그런 거였어. 하지만 그런 짓을 저지른다고 없는 곡식이 솟아나지는 않거든. 그 미친놈들이 그걸 몰랐을까?

 

스탈린의 입만이 모든 걸 죽이고 살리는 진짜 입이었지. 아니지, 살리지는 않았군. 우리가 굶어 죽고 있다는 말은 지어낸 이야기라는 소문이 실제로 굶어 죽어가는 우리 귀에까지 들어왔어. 우리 죽음이 사회주의의 적들이 펼치는 공작이라더군(88). 글쎄, 그놈이 우리가 죽는 걸 직접 본 적이 없는 건 사실이지. 그러면 직접 본 놈들은 어땠을까? 공산주의자 놈들은 스탈린의 말과 자기가 눈으로 본 풍경을 어떻게든 일치시켜야 했지.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자신과 가족들을 굶기는 것으로 목숨 바쳐 사회주의를 해치려 든다는 결론을 내렸어(89). 벌거벗은 임금님이 입지도 않은 옷을 입었다고 했고, 아랫것들은 그 옷이 너무나 화려해서 보이지 않을 정도라며 자신들의 아부로 그 옷의 존재를 증명한 거지. 그런 걸, , 제기랄, 이념이라고 부른다더구먼. 이념. 그걸로 배를 불릴 수 있었으니 그놈들은 그걸 한 거고, 우린 아니었던 거지.

 

그리고 미친 11월이 왔지. 193211. 잊을 수도 없어. 소련은 모든 잉여 농작물을 거둬가고, 곡물 할당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가축을 거둬가고, 그래도 목표량을 달성 못 하는 집단 농장은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한 달 할당량의 열다섯 배를 빼앗아갔어. 당원 놈들, 경찰 놈들이 떼로 몰려와서 가져갔지. 할당량을 달성하는 농장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결국 전부 다 가져간 거야. 한 번 블랙리스트에 오르면 식량 공급도 중단, 보급도 중단, 다른 지역과의 거래도 중단, 모든 게 다 중단이었지(91-92). 그러니까 사는 걸 통째로 중단시킨 거야. 살려면 도망쳐야 했지만 그러기도 쉽지 않았어. 33년이 되자 국경은 봉쇄됐고, 농사꾼들이 도시로 가서 구걸한다고 도시도 폐쇄됐지. 우리에겐 장거리 기차표도 팔지 않았고. 도망치다 체포되면 고향마을로 이송되어 다시 굶어야 했어(94). , 그리고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났겠어? 선생도 여기 그 이야기를 들으러 온 거잖아. 아니야?

 

1933년에, 우리는 다 죽었어. 반란, 도덕, 인간에 대한 관심 같은 건 모조리 사라지고 그 자리를 범죄, 광기, 무기력 같은 것들이 대신 채웠지. 그건 다 결국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어. 어떤 일이 있었냐고. 시체 위에 시체가 쌓이는 일이 있었지. 살아있는 사람들도 시체나 다름없었어. 걸어다니느냐 누워 있느냐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야. 봄에는 하루에 만 명씩 죽어 나갔어. 애어른 가릴 것도 없었지. 어떤 소녀에게 음식을 조금 나눠준 적이 있었는데, 이러더군. “이렇게 좋은 걸 먹었으니, 이제 행복하게 죽을 수 있겠어요.”(98) 연못에서 낚시를 하다가 반 친구의 잘린 머리를 낚아 올린 남자애들도 있었어. 온 가족이 다 죽은 아이였지. 우린 궁금했어. 몸통은 어디로 갔을까? 정확히 말해서, 그걸 누가 먹었을까? 모르지. 하지만 그때는 그런 의문이 흔해 빠진 거였어(101). 자기 자식을 죽이고 먹은 부모가 셀 수 없이 많았거든. 애들이 그 가족의 가장 약한 식구였으니까. 자신과 딸의 식사를 위해서 아들을 잡아서 요리하는 어머니라든가, 며느리를 죽이고 머리통은 돼지밥으로 준 다음 몸뚱이는 구워서 잔치를 벌이는 가족 같은 게 잔뜩 생겨났지(102-103).

 

글쎄, 선생이 지금 한 말은 결국 나도 살아남으려고 사람을 먹었느냐는 질문을 점잖게 바꾼 거잖아? 이 집 문을 나서면 선생은 다시 나 같은 노인들을 들쑤시고 다니겠지. 그 자료인지 뭔지를 만들겠다고 말이야. 그렇다면 그 질문은 입밖에도 꺼내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군. 선생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수천 권의 책을 뒤져 꺼낸 가장 점잖고 멋진 말로 금칠할 수 있다고 해도, 그 질문만큼은 하지 마. 알겠어?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이런 거야. 그런 시절에 살아남는 건, 배고픔을 견디는 게 육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뼈에 새기는 일이지. 선생, 인간이 어떤 동물인지 알아? 나는 지금도 그걸 잘 모르겠어. 아직 식인종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기도를 시작하지만, 기도가 끝날 때쯤에도 그럴 수 있을지 몰라서 기도하는 내내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있었지. 밀가루를 위해 몸을 팔지 않는 사람은 굶어 죽어야 했어. 훔치지 않는 사람도 그랬고. 시체를 뜯어먹지 않는 사람들은 시체를 뜯어먹는 사람들의 입으로 들어갈 다음 시체가 될 운명이었어. 인육을 사고파는 시장이 생기는가 하면(104), 자기 자식들을 먹기를 거부하고 죽어 자식을 고아로 만드는 부모나, 자기가 죽으면 자기 몸을 먹으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는 부모들도 있었어(105). 혼란스럽지 않아? 뭐가 뭔지 선생은 이해할 수 있겠어?

 

우리가 괴물인 거야? 나는 1933년과 그 이후에 찾아왔던 크고 작은 지옥을 거치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평생을 묻고 또 물었어. 어제도 물었지. 지금도 묻고 있어. 그리고 내가 선생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래. 우리가 괴물이라면 우린 각자가 다른 괴물이었을 거야. 우리가 희생자에 불과했다면, 역시 마찬가지로 우린 각자 다른 희생자였어. 우리는 모두 지옥 같은 굶주림을 겪어냈지만, 그건 저마다의 지옥이었어. 백만 개의 죽은 지옥과 천만 개의 살아남은 지옥이 있겠지. 거대한 지옥을 처음 만들어낸 건 스탈린이라는 큰 악마일지 몰라. 하지만 그것을 겪어내고 엮어낸 것은 우리 각자란 말이야. 그런 건 스탈린이 죽고 소련이 무너졌다고 끝나는 게 아니야. 한번 열린 지옥문은 수십 년이 지나도 말끔하게 닫히지 않는 거거든. 선생은 그때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 거야. 살아남으려면 다른 사람을 먹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수백만이 굶주려 죽어 나가는. 선생이 볼 때 그 시절이야말로 지옥에 가장 가까운 순간일 테니까. 그런데 과연 내게도 최악의 지옥이 그때 그 순간일까? 배고픔이 가장 심했던 때가 가장 괴로운 순간이었을까? 우리 옆집에 사는 노인에게는 어떨까. 그리고 또 그 옆집은? 선생, 선생이 만든다는 보고서인지 뭔지가 뭐 하는 물건인지 나는 잘 모르겠어. 좋은 일을 하겠다는 것 같긴 해. 그냥 이 말을 해주고 싶어. 나는 아무것도 대표하지 않아. 내가 겪었고 또 겪고 있는 지옥이 모든 지옥을 대표하지 않는단 말이야. 선생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다룰 건가. 쪼개고, 비슷한 것끼리, 시간 순서에 따라 묶은 다음 표지에 금박을 두른 두꺼운 책을 만들 건가? 지옥을 소화하기 쉽게 전시할 건가 이 말이야. 아니, 이건 그냥 묻는 거야. 나는 그런 건 그것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대표하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러니까 내 이야기를 기록하려거든 내 이름도 적어가. 지금 선생이 들은 이 길고 지루한 지옥의 이름을 적어가란 말이야. 받아적게, 내 이름은…….

 

 

 

녹취록 2

 

술은 줄이는 중입니다. 완전히 끊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쉽지는 않네요. 나이도 있고, 이제 와 사는 모양을 바꾼다는 게. , 오늘은 한 잔만 마셨습니다. 믿어주십쇼. 혀도 잘 돌아가고 이야기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겁니다. , 그런데이야기를 해 드리면 돈을 조금 받을 수 있다고 들었는데요. 사실입니까? , ,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럼 시작하면 되나요?

 

그러니까 저는 1937년에 지역 내부인민위원회에서 활동했습니다. 맞습니다, 비밀경찰이지요. 알고 있습니다. 올바른 일은 아니었지요. 그땐 젊었고, 젊을 때는 쉽게 어리석잖아요. 그랬던 거죠. 생계가 달려 있기도 했고,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습니다. 양심에 걸리는 일도 많아서. 33년 그 대기근 때, 인민위원회 대표였던 발리츠키가 이 대규모 기아는 폴란드 군사 조직이라는 간첩 도당의 도발이라고 설명했어요. 그놈들이 우크라이나에 침투해 수확을 훼방 놓고 기근을 일으킨 다음 굶어 죽은 이들의 시체를 선전용으로 사용했다고요(166). 그때부터 소련에서는 폴란드인 솎아내기가 시작되었죠. 35, 36년만 해도 10만이 넘는 폴란드계 농민들이 추방당했어요. ‘폴란드 군사 조직이라는 명분은 공산당 내부 권력 다툼에도 이용되었죠. 심지어 그 말을 만든 발리츠키조차 거기에 얽혀 축출되고, 예조프라는 사람이 권력을 잡았지요. 그리고 바로 그 사람의 손에서 37년의 명령 00485가 태어난 겁니다(171). “폴란드 군사조직의 간첩 연결망 완전 청산이 그 명령의 목표였는데, ‘폴란드 군사 조직의 실체가 어떻게 생겼는지 예조프 말고는 누구도 모른다는 점에서 보면, 그건 일종의 박해 면허나 마찬가지였죠. 그래서 우리 같은 말단 장교들은 폴란드 계나 폴란드와 관련된 다른 소련인들, 폴란드 문화나 로마 가톨릭교처럼 폴란드라는 민족적 특성을 지닌 것들을 모조리 박해해야 했어요(173). 심지어 시청의 옛 기록을 뒤져서 폴란드식 이름의 흔적을 찾아내면, 그걸 들고 그 사람을 박해하러 가는 장교도 있었죠(174쪽). 그때의 일은 끔찍해서,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지만.

 

, 그런데 저도 인민위원회의 장교였지만 지금부터 말씀드릴 끔찍한 사건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는 걸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물론 저라고 좋은 일만 한 것은 아니고 또 제가 한 일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있지만, 어쨌든 저는 아니었어요. 저는 사람을 고문하지도 죽이지도 않았고, 그냥 죽은 사람을 묻는 일만 했었어요. 정말입니다. 맹세할 수 있어요. , 혹시 한 잔 마시고 이어나가도 될까요? 이야기에는 지장 없도록 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이게 아무래도 맨정신으로 하기 쉬운 이야기가 아니어서.

 

우리에겐 자백 기법이라 불리는 일종의 집단 고문 방법이 있었어요. 공공건물 지하 같은 데 폴란드계 용의자들을 잔뜩 몰아넣고는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한 명을 고문하죠. 고문받은 사람이 자백하면 다른 용의자들도 자백해서 고통을 피하고 싶어질 테니까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연루되어 있음을 밝혀야 고문을 멈췄으니, 결국은 집단 전체가 연루되었다는 증언을 빠르게 얻어낼 수 있는 겁니다(174). 그렇게 받아낸 자백을 토대로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거기에 사형시킬지 수용소로 보낼지 우리 의견을 적어요. 그러면 그 보고서는 인민위원회 대표와 검사에게 올라가고, 그들은 또 그 보고서로 앨범을 만들어 모스크바로 보내는 거지요. 그러면 모스크바에서는 그 앨범들을 대충 훑어본 다음 예조프와 주 검사 비신스키의 이름으로 서명을 하는 겁니다. 승인은 거의 자동이었으니 결국은 용의자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건 최초 수사관이었던 거죠. 그렇게 하루에 2만 명의 사형이 확정된 적도 있었답니다(175). 폴란드 문화나 가톨릭교에 대해 호의를 보이면 그게 곧 첩보 활동에 동참했다는 증거였지요. 경범죄도 경범죄가 아니었어요. 묵주를 가지고 있으면 수용소 10년형, 설탕을 충분히 생산하지 않으면 총살되기도 했죠. 예조프는 이걸 폴란드 박멸 작전이라고 불렀는데 스탈린에게 그 성과를 보고하자 그가 그랬다는군요. “아주 잘했어! 더 캐내게. 이 더러운 폴란드 쓰레기들을 싹쓸이해버리는 거야. 우리 소련을 위해서는 그놈들의 씨를 말려버려야 하거든.”(175-176) 참 재미있는 말이죠. 수령이 신이 났으니 말단 장교들은 더 신이 날 밖에요. ? , 제가 재미있는 말이라고 했나요? 죄송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슬픈 일이었어요. 슬픈 일.

 

? 저요? , 저는 그저 보거나 들었을 뿐입니다. 저는 고문한 적도 총살에 참여한 적도보고서요? , 그게, 그렇지, 저 같은 경우에는 좀 운이 좋았던 게, 제 주변 장교들이 워낙 열정적으로 당의 명령을 수행했던 터라 우리가 담당했던 지역에서는 늘 많은 수의 폴란드 간첩들이 검거되었거든요. 제가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아도 할당량을 다 채울 만큼이었지요. ? , 맞아요. 간첩이 아니라 희생자들이죠. , . 맞습니다. 저기, 한 잔만 더 하겠습니다. 이거 참 목이 타네요. 저는 언제나 저 무서운 일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꼭 기록해주십쇼. 선생께서 어쩐지 저를 좀 의심하고 계신 것 같아서요. 저를 보시는 게. 정말 제가 저지른 일이라면, 뭐가 자랑스럽다고 이 끔찍한 일들을 이리 상세하게 말하고 있겠냐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사례비 더 받자고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니까. 다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해서 내가 이렇게. 죄송합니다. 자꾸 술에 손이 가는군요. 어디까지 했더라? , .

 

작은 마을일수록 상황은 더 심했어요. 그런 곳에는 법적 절차 같은 게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인민위원회 전담반은 갑자기 들이쳐 현장을 포위하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사람들을 고문했죠. 그리고 처형했고. 체포도 처형이나 마찬가지였고요. 체포된 사람들은 물에 던진 돌멩이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까(184). 남편이 총살당하면 아내는 추방되고 자식들은 고아원으로 보내졌죠. 폴란드 아이들로 키우면 안 됐거든(185). 38년쯤 되면, 이제는 그냥 우리 세상이었어. 모스크바에서는 그냥 서명만 하는 건데도 앨범이 처리되는 속도보다 도착하는 속도가 더 빨랐단 말입니다. 앨범 기법도 번거로운 일이 된 거지. 그래서 결국 해당 지역에서 서류를 검토하는 특별 트로이카가 생겨난 겁니다(186). 이제 지역에서 앨범을 검토하고, 판결하고, 총살하고. 하루에 수백 건씩 사건을 검토하고, 모스크바에서도 포기한 밀린 일을 6주 만에 처리했거든. 6주 만에 몇만은 잡아냈을 걸? 그때 우리는 그런 마음이었는데, 뭐였냐 하면, 우리가 하는 일은 폴란드 간첩만 찾아내는 일이지만, 나중에 다른 소수민족 간첩을 색출하는 작전의 모델이 될 거라는 생각? 결국 그게 그렇게 됐지.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핀란드25만 명쯤 죽었다더군요(188). 간첩이 그렇게나 많았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그 쓰레기들은 죽여도 죽여도…….

 

아뇨, 아니라니까! 나는 죽이지 않았다고. 몇 번을 말해. 말실수야. 술 마시면 누구나 흔히 할 수 있는. 뭐야, 당신이 뭔데 자꾸 그런 눈으로 나를 봐. ? 내가 죽였다고 누가 그래? 푸줏간, 푸줏간 그 새끼로군! 거짓말! 그 새끼는 거짓말쟁이에 폴란드 놈이야! 만약 내가 누굴 죽였다면, 그건 그놈들이 진짜 폴란드 간첩이어서 그랬던 거라고. 그래, 그래서 그랬어. 다 인민을 위해 한 일이었어. 나 같은 사람이 대신 피를 묻히지 않았다면 소련은 진작 무너졌을 거야. 나치 놈들이 폴란드 것들한테 업혀 들어와 모스크바까지 집어삼켰을 거라고. 폴란드 놈들이 간첩이 아니었다고? 인민의 적이 아니었어? “폴란드 군사 조직이란 게 없단 말이야? 아니, 그럴 수는 없지. 절대로 그럴 수는 없어.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뭐 하는 거야, 내 이야기 아직 안 끝났어. 가려거든 약속했던 그 푼돈 쪼가리를 내놓고 가라고! 약속을 지켜야지! 약속은 지켜져야 해! 약속을 어기는 놈들은 폴란드 새끼들이랑 마찬가지야. 전부 무릎을 꿇리고 미친개처럼 쏴 죽여야 한다고(165). 돌아와! 돌아오라고!

 

 

 

녹취록 3

 

, 그 자리에 자네가 발탁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네. 수집해 놓은 자료들을 자네한테 바로 보내려다가 마음을 바꿔 위원회로 넘겼지. 지금쯤이면 대강은 다 훑었겠군. 그래 어때, 일은 할 만한가? 나한테까지 증언을 들으러 올 줄은 몰랐지만, 자네라면 충분히 생각할법한 일이지. 내가 이래서 늘 자네를 좋아한다네. 그래서 더 복잡한 기분이야. 내가 아끼는 사람이 내가 박차고 나온 자리에서 내가 겪었던 감정들을 고스란히 겪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타까우면서도, 그래도 자네라면 내가 찾지 못한 해답을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고. 그래, 그런 점에서 보면 이 대화가 자네에게는 자료가 되겠지만 내게도 어떤 열쇠가 될지도 모르겠어. 나는 그때 마주친 문제들과 아직도 씨름하고 있거든.

 

33, 37, 40, 41, 그리고 42. 끔찍한 일들이 있었지. 물론 이 해들 사이에서도 사람들은 계속 죽어 나갔지만. 1400만이라네. 독일과 소련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점점 더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와중에 죽어 나간 사람의 수가(671). 우리가 블러드랜드라고 부르는 곳,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권력 열망이 역사적으로 중첩되면서 일어난 일이지(673). 그들은 최악의 상황을 연출하고, 자신들의 선택을 두고 적들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웠고, 수백만의 목숨을 자신들의 정책이 필요하고 바람직하다는 걸 입증하는 데 사용했어(683). 자네도 알겠지만, 이 길고 거대한 학살은 경제적 이해관계와 이념적 전제들이 서로를 보장해줄 때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었지(693). 어떤가, 자네는 나치와 소련이 저지른 일련의 일들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난 말이 된다고 생각하네. 말이 되더란 말일세. 자료를 모으고, 거기서 도출되는 동기를 따라가다 보니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어. 옳은 선택을 했다는 게 아닐세. 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 길을 잃은 거니까. 옳지 않은 선택을 이해하게 되었단 말일세. 내가 스탈린이고 히틀러였다면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았겠지. 그건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옳지 않은 선택을, 아니지, 절대 해서는 안 될 악의 극치에 가까운 그 선택을 이해하게 된 나는 과연 뭘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걸세. 차라리 그들이 괴물이었고, 그런 이유로 일정 집단의 사람들에게서 사람으로 여겨질 권리를 빼앗는(681), 인간이라면 절대 하지 못할 일들을 그들은 서슴없이 저질렀으며, 그래서 내가 그들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면, 그랬다면 좋았을 걸세. 그랬다면 나는 스스로를 희생자와 동일시하며 범죄자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편리한 주장을 할 수 있었겠지. 우리가 블러드랜드의 범죄자들과 방관자들이 대면해야 했던 역사적 배경과 같은 배경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있었을 거란 말일세(701-702). 바로 그게, 우리가 원하고 또 위원회가 이 조사를 통해 도출하려는 결론이 아니겠는가?

 

이런 고민에 사로잡혀 한동안 조사에 진척이 없자, 위원장이 나를 불러들였어. 그리고 말하더군. 숫자. 숫자 위주의 연구를 하고 숫자가 들어 있는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나의 고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였어.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네. 머리 아픈 생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거든. 몇 주 후, 내 선에서 찾아낼 수 있는 모든 자료를 들여다본 후 나는 위원회에 1400만을 제시했네. 그러자 바로 다음 날 편집 회의가 소집되었지. 위원장은 그 어느 때보다 딱딱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어. 토마슈 편집장, 수고 많았소. 수고 많았는데, 그렇게까지 수고할 건 없었던 것 같소. 위원회는 전체 희생자 수를 900만으로 결정했거든.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 이건 시장바닥에서처럼 흥정할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말일세. 나는 대답했다네. 위원장님, 지금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위원장이 말했지. 편집장이 알고 모르고는 하나도 중요치 않소. 중요한 것은 숫자요. 아시겠소? 편집장이 알아야 할 것은 정확한 숫자가 아니라 숫자가 중요하다는 사실뿐이오. 하지만 위원장님,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오, 당신은 그렇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하게 될 것이오. 숫자가 중요한 이유는 숫자가 숫자인 동시에 정치고 외교이며 국익이기 때문이오. 이 건에 대해 더 길게 말하는 건 온당치 않은 것 같군. 사실 편집장이 찾아낸 그 숫자 역시 말과 글에 의존해 발굴한 것이 아니오? 그 숫자가 정말 실제 숫자보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딱 그 숫자라고, 편집장은 맹세할 수 있소? 그제야 나는 숫자를 말하는 것이 그 자체로 정치적 행위이며, 동시에 더 거대한 정치적 행위에 복무하는 요소 행위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네. 위원장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야. 나는 내가 조사한 자료를 통해 숫자를 말하겠지만, 그 숫자가 진짜 숫자라고 단언할 수는 없어. 나는 신이 아니니까 말일세. 그러나 내가 찾아낸 숫자가 외교적 목적이나 국가 수반의 정치적 견해에 따라 커지거나 작아지는 일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뭐겠는가. 듣지도 않는 사람들을 향해 그 숫자는 내 숫자가 아니라고 계속 말하는 것 말고 내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숫자의 문제는 단지 그뿐만이 아닐세. 설령 내가 구한 숫자가 진리고, 거기에 하나의 정치적 더함도 뺌도 없는 상태로 세상에 드러난다고 해보세. 그렇다면 중요한 일이 다 이루어진 것인가? 물론 숫자는 중요하지. 하지만 숫자는 너무 중요해서, 우리가 숫자의 중요성을 말하면 말할수록 우리는 숫자에서 멈춰서게 될 걸세. 숫자에서 슬퍼하고 숫자에서 분노하면 그 숫자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가야 할 것들은 어디서 다시 가져오겠는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숫자라면, 숫자에게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이냐는 말일세. 알겠는가?

 

그래서 나는 그 일을 관두었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 친구여, 나는, 말도 안 된다고 외치는 일, 외치고 또 외치는 일(681) 말고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네.



댓글(52) 먼댓글(0) 좋아요(6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syo 2021-05-11 18:4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님. 좋네요 ㅎㅎㅎㅎ 허허허

stella.K 2021-05-11 1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제의 그 리뷰군요! ㅎㅎ
근데 제가 좋아요도 하지도 않았군요. 민망해라...ㅠㅠ
축하해요.^^

syo 2021-05-11 19:00   좋아요 2 | URL
ㅎㅎㅎㅎ 고맙습니다.
좋아요 하지 않으신 건 그저 발견하지 못하셔서 그런 거고,
발견하고 읽으셨다면 당연히 좋아요 해주실 거라고 저는 늘 생각합니다.
제가 스텔라 님한테 그렇거든요 ㅎㅎㅎ
그러니 민망은 넣어두시는 걸로.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시인선 135
이원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다를 사랑하는 내가, 내가 가 본 바다에 대해 수없이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지만, 그날 그 바다에 대해서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 오늘에야 그 바다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그날 우리는 바다에 가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날의 바다는 우리의 바다 중 하나는 아닐 테지만 나는 흐린 차창 밖 온몸으로 비를 맞고 있는 다시 못 올 그 바다를 몰래 내 바다의 목록 안에 집어넣었던 거야.

 

그즈음 나는 다시 못 올 줄도 모르고 다시 못 올 것들을 스쳐 보내는 일에 대해 생각하고 또 겁을 내던 중이었잖아. 아무 생각 없이 딛고 살아왔던 세상의 밑바닥이 실은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졌다는 진실을 세상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 같은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지. 혼자 끙끙대며 참다 어느 밤 결국 머뭇머뭇 네게 이 걱정을 털어놓았을 때, 너는 웃지도 울지도 않고 말했어. 세상이 원래 그런 거잖아? 그 밤 너는 나를 품에 넣고 토닥여 주다가 금세 잠이 들어버렸고 나는 네 고른 숨소리 속에서 길게 외로웠어. 세상이 원래 그런 곳이어서, 그런 세상에 너와 내가 살고 있어서.

 

출장이 잦아진 너와 부쩍 외로움을 타기 시작한 내가 좁은 공간에서 얼굴을 맞대고 살았으니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겠지. 많은 생각은 곧 위기니까, 그걸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한 너와 나는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날 나는 네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네 출장지라는 강릉을 향해 함께 가고 있었어. 오직 외롭지 않으려고. 네가 없는 좁은 집이 얼마나 넓은지 없는 너는 알 수 없겠지, 전에 살던 누군가가 천장에 붙여놓은 야광별 모퉁이가 떨어져 말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숨소리가 고른 너는 끝내 모르겠지, 뭐 그런 원망을 했던 것도 같아.

 

바다는 주로 우리의 오른쪽에서 모습을 드러냈으니 앞만 보고 운전하던 너보다는 보조석에 앉은 내가 바다와 접촉하기 더 쉬웠을 거야. 바다가 보여. 내가 말했지. 너는 흔들리는 와이퍼 너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어. 우리 조만간 바다 보러 갈까? 형 바다 좋아하잖아.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곳에 유명한 바닷가가 있는데 왜 우리는 다른 조만간에 다른 바다를 보러 가야 하는 걸까, 그저 잠시만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도 저기 회색 비를 받아내고 있는 회색 바다가 보이는데, 왜 보이지 않는 바다를 위해 보이는 바다를 무시해야 하는 걸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느라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 그러자 너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이제부터 차에서 내릴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나는 알았고, 실제로도 우린 그랬고,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바다를 바라봤던 거야. 저 바다의 색조를, 윤곽을, 조용함을,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음을 기억하려고. 우리의 지금 이 아무 말 없음을 기억하지 않으려고.

 

그런데 그 시도는 실패했지. 그건 우리가 함께 만들어 온 수많은 실패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으니 어쩌면 금방 잊힐 만도 했지만, 그날 그 바다를 오래 바라본 바람에, 그 바다의 세밀한 특징들을 집요하게 기억에 새겨넣은 바람에, 오히려 다른 크고 날카로운 실패들보다 오래 기억에 남는 작은 실패가 되어버린 것 같아. , 생각처럼 되지 않아, 그렇지? 세상이 원래 그런 거라고, 아마도 너는 말하지 않을까.

 

바다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했던 건데, 자꾸 네 이야기만 하게 되네.

 

이제는 너의 집이 된 우리의 집을 나오고 나서 나는 내가 살 수 있는 가장 작은 방 속에 틀어박혔어. 내가 없는 우리의 옛 좁은 집이 얼마나 넓은지 네가 알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모르고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 사이에서 참 오래도 흔들렸지. 내 좁은 방 안에 더 좁은 침묵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 영영 틀어박혀 버리려고, 원래 그런 세상 따위 원래 없었던 것처럼 버리고 살아가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생각만큼 오래 버티지 못하고 방 밖으로 나와야만 했어. 내가 만든 침묵이 침묵하지 않더라고. 좁은 방의 여섯 면이 자꾸 내게 말을 거는데 그게 다 네 목소리더라고. 방은 네 목소리로 가득 메아리치고, 침묵이라는 게 견딜 수 없이 시끄럽더라고. 귀를 막았는데도 들리는 네 목소리에 입을 닫았는데도 내가 대답을 하고 있더라고.

 

그 방에서 나오고 내가 제일 처음 생각한 게 그 바다였어. 그 바다로 가자. 네가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그 바다로. 내 침묵을 다 깨 먹은 네 목소리가 그 바다까지는 도착하지 않을 테니까. 거기에 가서 다시 한번 작은 방을 만들자, 인터넷도 전화선도 없는, 우체통도 없는 견고한 침묵을 만들고 그 속에서 변하지 말자, 비 내리는 바닷가에서 비 내리는 바다처럼 살자, 그런 다짐이었어. 그리고 작은 차에 작은 짐을 싣고 나는 출발했지.

 

그런데 있잖아, 그 바다가 없더라. 아무 데도 없었어. 나는 지금도 그날 그 바다를 사진처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데, 심지어 그 바다를 떠올리면 그날따라 깔끔하게 면도되지 않아 거뭇했던 네 오른쪽 턱이라든가, 두 번째 단추를 풀지도 않고 억지로 두 번 접는 바람에 터져나갈 것 같던 네 셔츠 소매라든가, 벨트 위로 살짝 넘친 네 배와 그 배를 만들던 당시 네 식습관과 그 식습관을 만들던 상사 새끼의 은근한 악행이라든가, 그 모든 것을 바라보고 생각하며 느꼈던 그 순간의 내 복잡한 감정 같은 것들이 아직도 그날 속에 있는 것처럼 묵직하게 떠오르는데, 그런데 그 바다는 이 세상에 없더라. 원래 그런 세상만 있고, 그 세상 속엔 내가 알던 바다와 비슷한 바다들 몇 개가 있고, 세상에 더는 있지도 않은 바다를 찾겠다고 부산에서 강릉까지 두 번을 왕복한 나는 있는데, 그 바다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더라고.

 

그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때서야 눈물이 나기 시작하는 거야. 너 없는 데서 나는 한 번도 울지 않았거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건조하게 슬퍼하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지더라고. 그날부터 며칠을 울고 울었어. 이 많은 물들은 다 어디서 왔나, 이제 세상에 없는 어떤 회색 바다로부터 왔나, 그 바다가 원래 그런 세상이 지겨워 도망치려고 내 눈과 불안과 내 침묵을 찢어버린 네 목소리 같은 것들을 이용했나, 내가 언제까지 울어주면 세상에 없는 그 바다가 다 마를까. 그러다 갑자기 눈물이 뚝 멎더라. 특별히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도, 무슨 그럴듯한 생각을 해낸 것도 아니었는데, 정말 갑작스레, 밥상에 앉아 숟가락을 들 때만 해도 울고 있었던 것 같은데 설거지를 할 때쯤에는 볼이 다 말라 있더라고. 참 이상하지? 그리고 그때부터 긴 시간 오직 한 가지 궁금증만을 뒤적거리면서 오늘에 도착한 거야.

 

우리에게 우리는 어디였을까.

 

 

참다못한 편지가

소리치기로 작정한 순간,

 

확인했습니다

 

두 줄짜리 글에는

몇 달치의 말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당분간은 여전히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그렇고 그런 말들

내가 입기엔 너무 큰 말들

비가 그쳤는데 급하게 우산을 펼치는 말들

 

힘을 잃은 나를 창밖의 바다가 채갑니다

그러고는 볶습니다

이미 열여섯 번 볶아진 적 있습니다

 

바다가 뱉어낸 몸은 매일매일 아픕니다

아무도 안쓰러워 안 합니다

 

아파도 도달해야만 하는 지점을 기억하는데

나는 자꾸만 때를 미루고 있습니다

치과나 병원이면 이렇게 미루지 않았을 겁니다

 

차오르다 차오르다 뚜껑만 닫으면 되는데

그게 안 됩니다

 

손수건 한 장이 나를 안쓰러워합니다

 

손수건 한 장은

아슬아슬하고 별것 아닙니다

 

이러다가는 내일도

바다가 나를 채갈 겁니다

자꾸 울면

내 눈에만 보이던 게

내 눈에만 안 보일 겁니다

_나는 바다가 채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 같다」 전문

 

 

저기, 이제 바다에 같이 가 보지 않을래? 내가 찾던 바다가 더는 없는 것처럼, 네가 보러 가자고 했던 바다도 아마 없을 거고, 조만간도 더는 조만간이 아닐 테지만. 어느 바다든 한 번 다녀오자. 그곳에도 여느 바다처럼 밀물과 썰물이 있고, 밤에 젖은 모래나 돌멩이가 뒹굴 거잖아. 사람들은 영원히 그 바다를 찾겠지만 누군가 다녀간 흔적들은 영원히 씻겨나가고, 우리가 다녀간 자국도 시간 앞에 그렇게 되겠지. 어쩌면 영원한 건 영원이란 단어뿐이겠지만, 그래도 그 모든 일이 일어났다가 씻겨나가는 공간이 우리에게도 있어서, 어쩌면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살아간다는 것이, ,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뭐랄까, 어렴풋이는 알 것 같은데 말로 하기가 참 어렵네. 그냥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나는 우리가 우리에게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댓글(28) 먼댓글(0) 좋아요(6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0-08-14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쇼님이 왔네.
쇼님이 돌아왔다.

잠자냥 2020-08-14 12:20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이 댓글 저는 왜케 웃긴지 ㅋㅋㅋㅋㅋㅋ
쇼님이 이제 업무가 좀 손에 익었나 봅니다.

다락방 2020-08-14 13:42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쇼님의 시 리뷰를 보니 반가워서요. 흣.
뭔가 쇼님의 촉촉한 감성이 잠시 외출했다 돌아온 것 같달까요.
감성 촉촉한 시 리뷰를 보니 제 감성도 촉촉해지는군요...

syo 2020-08-15 07:49   좋아요 0 | URL
비가 주룩주룩 내립니다...... 갬성.. 축축갬성...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0-08-14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 웰컴!!

syo 2020-08-15 07:49   좋아요 0 | URL
멀리 갔다 돌아온 사람처럼? ㅎㅎ

Vita 2020-08-14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팔 벌려 웰컴 쇼님

syo 2020-08-15 07:50   좋아요 0 | URL
웰컴이 폭발하는 거 보니 여기가 내 자리였나 보구만요ㅎㅎ

페크(pek0501) 2020-08-14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 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syo 2020-08-15 07:50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어쩐 일일까요.

2020-08-14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15 0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0-08-14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마지막 문장이 참...!!!!!
바다를 가 본지는 언젠지...ㅠㅠ

시집 리뷰는 이렇게 쓰는 거구만요.^^

syo 2020-08-15 07:52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시집 리뷰는 물론이거니와 리뷰를 이렇게 쓰면 안 되는 겁니다ㅋㅋㅋ
에비~

반유행열반인 2020-08-14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글도 시도 바다 사진도 좋네요. 오랜만이네요.

syo 2020-08-15 07:52   좋아요 1 | URL
바다 한 번 다녀오심이 어떨까요. 묵묵히 바라만 보고 와도 언제나 좋은 곳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8-14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괴로움인 현실이 정상은 아니라고 몸과 마음은 말하는데, 남들은 그게 정상이라고 하네요.
부처는 진정 답을 알았을까요?
이글 보고 느낀 개인 소고입니다. ^^

syo 2020-08-15 07:53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뭔가 심오한 선문답같은 느낌입니다.
어쩐지 화이팅 1개 드려야 될 것 같기도 하고.....

두 개 드려야겠다. 북다님, 화이팅 화이팅

북다이제스터 2020-08-16 20:03   좋아요 0 | URL
syo 님은 화이팅 한 두개로 현실 하루하루가 살아가지세요?ㅎㅎ

syo 2020-08-17 11:18   좋아요 1 | URL
북다님께서 어떤 현실을 무엇으로 버텨 살아가시는지 제가 알 길이 없겠으나,
그걸 아나 모르나 어차피 제가 드릴 수 있는 게 기껏 요 화이팅 한두 개밖에 없어서 슬프네요 ㅠㅠ

이거 참, 힘내시라는 말조차 드리기 힘들어졌네요 허허허.

공쟝쟝 2020-08-22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아오면 이정도의 화력이구나 (새삼)

syo 2020-08-22 21:57   좋아요 1 | URL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자꾸 들으니 마치 여기서 태어난 것 같군요 ㅎㅎ

rachel_youn 2020-08-23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글이 참 좋아서 로그인까지 했네요

syo 2020-09-14 18:10   좋아요 0 | URL
어이쿠..... 댓글을 거의 한달을 지나서 봤네요 ㅠㅠ
과분한 칭찬말씀 해주셨는데, 너무 죄송합니다 ㅠ

Chelsea08 2020-09-20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쇼님의 글을 읽어 보는데 이 글만 읽고도 글에서 쇼님만의 향이 나는 느낌이네요. 혹시 출처를 표기하고 블로그에 퍼가도 될까요? 사람 들락거리는 블로그는 아니지만 몇 없는 이웃들과 같이 보고 싶어서요. 불편하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syo 2020-09-21 18:16   좋아요 0 | URL
처음 뵙겠습니다, Chelsea08님. 칭찬 말씀 감사합니다.
출처표기하고 가져가신다는데, 불편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뜻대로 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래도 퍼가시는 글에다가 댓글로 퍼가신다는 말씀은 남겨주실 수 있으실까요?
못생긴 자식놈들이라, 어느 놈이 어디로 나가는지 정도는 제가 알면 좋겠어서요.
부탁드립니다^-^

자유주의자 2021-04-13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혹시 직접 쓰신 글이신가요?
알라딘 리뷰에서 보고 정말 너무 좋아서...
용기내어 처음으로 댓글 남겨봅니다.
글이 너무 좋아요,,, 정말 너무좋아요,,,
제 부족한 글솜씨로 표현하기 어려울만큼요
작가님이신가요?

syo 2021-04-13 14:15   좋아요 0 | URL
과찬의 말씀이세요.
좋게 읽어주셨다니 제가 뭐 한 것도 없이 뿌듯하네요 ㅎㅎㅎ

저는 작가도 뭣도 아닌, 그냥 알라딘에서 잡글 쓰는 syo구요,
알라딘에는 이 정도 쓰시는 분들 잔뜩잔뜩 있답니다^-^
 
빨강 머리 앤 걸 클래식 컬렉션 1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고정아 옮김 / 윌북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황영칠을 찾아서

 


나는 부족한 서술자로서 황영칠의 이야기보다 황영칠의 이야기가 단절된 것에서 오는 아쉬움을 더 잘 전하고 싶다.

 

황영칠은 특출났다. 아주 어려서부터 그랬다. 세 살 때 벌써 온몸이 근육으로 땅땅했다. 그 와중에 또 컸다. 사람들은 지치지도 않고 놀랐다. 아니, 야가 송아지가 사람 새끼가? 과장도 아니었다. 생일날 아침상에 올라와 있는 미역국을 원샷드링킹한 후, 황영칠은 팔굽혀펴기 다섯 개를 가볍게 시전했다. 다섯 살 된 기념으로. 집안의 장남 황영일 군은 후에 이렇게 진술했다. 영칠이 가가 맘만 묵었으마, 거서 다섯 개는 더 하고 막바로 열 살도 묵겠드라카이? 와 마, 내 동생이지만 행님아 소리가 절로 나올라카드라…….

 

물론 타고 난 데가 있었다. 박미향 여사의 해산 날, 그녀가 아들 하나를 낳았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지자 사람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우야노, 하나만 나왔다 카더나? 하나는 우얘 됐다 카데? 아이라, 원래 하나삐 없었다 카든데? 뭐라꼬? 미햐이 가 그 뒷산만 한 배 그기 애 하나 드간 배였다꼬? 치아라 인마, 내가 본 기 있는데 그 말을 우얘 믿노, 차라리 미햐이가 송아지를 낳았다 캐라……. 경운기를 몰고 논두렁을 달려 돌아온 황영칠의 조부 황득국 옹이 강보에 쌓인 황영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무거운 거 쫌 보라. 두 놈아 몫은 안 하겠나. 야는 영삼이로는 택도 없는 기라. 영삼이캉 영사캉 한목에 나온 것 맹키로 크다 아이가. 오야, 야는 영칠이다. 보통 이런 탄생 설화는 이름을 지어준 이가 아이를 두 팔로 공중에 들어 올리는 장면으로 마무리되지만 황득국 옹은 그러지 않았다. 불행히도 오십견 시즌이었고, 다시는 양팔을 들어 올릴 수 없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 같다. 어쨌든 그렇게 황영일이 동생 황영이 동생은 황영삼이가 아니라 황영칠이가 되었다. 영삼이도 영칠이도 아닌 은영이를 낳고 싶었던 박미향 여사는 서글프긴 했으나, 이제는 저 큰 아이를 먹이고 건사해야 했기에 그런 감정은 잠시였다. 다음 날 읍내에는 박미향 여사가 육군참모총장감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읍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황영칠은 크게 자랐다. 다른 아이들이 손가락을 접어가며 셈을 익힐 때, 영칠은 자기가 옮겨놓은 쌀가마니를 세 가며 수를 배웠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말문이 빨리 트인 편이었지만 말수가 적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읍 어린이들의 총대장으로 추대된 후 황영칠의 유년기에는 별다른 말이 필요가 없었다. 이런 식이었다.

 

영칠아, 아랫마을 훈식이가 영칠이 니 등치만 크지 한 주먹이라 카고 댕긴다든데, 오늘 학교 마치면 금마 조패러 안 갈래? 안 간다. ? 어디 가나? . 집에? , 집에 뭔 일 있나? 구몬. ……? 오늘 구몬 쌤 오신다. ……맞나. . , 훈식이 새끼 재수 좋네. 디질 뻔 했는데 구몬이 오늘 훈식이 살맀네.

 

이런 대접이 영칠에게 달갑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기 모습이 싫었다. 덩치가 큰 만큼 그 큰 덩치에 대한 콤플렉스도 컸다. 거울을 보다 속절 없이 복받치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눈물을 뿌리며 외양간으로 달려가 황소의 크고 검은 눈망울을 들여다보았다. 누렁아, 누렁아, 내는왜 영일이 영이 행님들보다 니캉 더 닮았겠노……. 영칠아, 힘을 내렴, 그건 그저 너의 껍질일 뿐이란다, 하지만 너는 누구보다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니? 진짜 중요한 것은 네 안에 있는 거야, 그리고 그건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란다, 어쩌면 영칠이 너는 지금보다 더 커질지도 몰라, 하지만 네 안에 있는 영칠이는 언제나 영칠이 너로서 존재하는 거야, 너도 이미 그걸 알고 있잖니? , 이제 눈물을 닦고 저 하늘 위에 반짝이는 별을 올려다보자꾸나, , 이 세상은 정말로 아름답구나, 살아있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니? 라고 누렁이가 말했을 리는 없다. 당연히도. 그런데 황영칠은 그런 이야기를 수신할 수 있었다. 황영칠이 손에 든 지푸라기에 관심이 있지 황영칠이란 인간은 안중에도 없는 황소로부터. 알고 보면 별이 아니라 인공위성인 밤하늘의 작고 하얀 점으로부터도. 상심 속에서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찾을 줄 알고 끝없이 끝없이 다정해지는, 황영칠은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제가 저 나무들의 꼭대기 바람이라고 상상하겠어요. 나무들이 지겨워지면, 여기 고사리들 틈에서 부드럽게 물결치는 걸 상상할래요그런 다음에는 린드 아주머니네 정원으로 날아가서 꽃들을 춤추게 하겠어요그다음에는 클로버 들판으로 날아갈래요그리고 영롱한 물빛 호후로 가서 아른거리는 물결을 일으키는 거예요바람은 상상할 게 너무 많아요!“


황영칠이 그런 사람이었기에, 그의 덩치를 놀림감으로 삼는 아이가 아주 가끔 있었지만 유혈 사태가 일어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상황은 간명하다. 그저 쿵쿵거리는 걸음으로 그 아이에게 다가가 황영칠은 말한다. 다시 한번 말해 볼래. 그리고 다음 말을 준비한다. 친구 사이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니. 부디 사과해 주지 않겠어? 그런데 그 말이 나올 겨를도 없이 상대는 고개를 숙이고 깊이 반성하기 마련이었고, 대부분 알아서 사과를 했다. 덜덜 떠는 목소리에서 진심을 느낀 황영칠은 다시 쿵쿵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저 친구는 내 마음을 다 알아주고 사과해 주잖아. 모든 마음은 이렇게 다 연결되어 있는 거야. 아 세상은 정말 아름다워. 그렇게 생각하며 영칠은 해맑게 웃었다. 그 웃음 때문에 십 대가 된 이후로는 처음으로 오줌을 지렸다고 증언한 아이가 몇 있긴 했지만.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황영칠이 성큼성큼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있는데 친구 하나가 달려오며 그를 외쳐 부른다. 영칠이, 니도 거 가나? 어데? 회관 뒤에 건초 창고. 거 가는 거 아이가? 아인데. 집에 가는데. , 오늘 거서 개싸움 씨게 한다 카든데. 맞나. , 군에서 챔피언 묵은 겁나 큰 개 온다 카더라. 같이 안 갈래? , 안 갈란다. , 왜, 가자. 안 된다. 집에 가서 볼 끼 있다. 뭔데. 빨강머리 앤. ……? 빨강머리 앤 봐야 된다꼬. 빨강……그기 뭔데? 있다. 내한테는 중요한 기다. 맞나. 그래. 지금 빨강머리 앤하고 길버트하고 대판 붙기 직전이다. , 맞나. 둘이 붙으마 누가 이기는데? 당연히 우리 빨강머리 앤이 이기지. 아 맞나, 느그 빨강머리 앤이 그래 쎄나. 당연하지 임마. 앤은 지는 법이 없는기라. , 맞나. 그라마 군에서 챔피언 먹은 개랑 그 빨강머리랑 싸우마 누가 이기겠노. , 치아라. 우리 빨강머리 앤이 그깟 개나부랭이하고 우얘 싸우갰노. 하여튼 내는 가야된다. 앤이 기다린다. 내일 보자이. 그렇게 황영칠은 총총 사라졌다. 그리고 마을 회관 뒤 건초 창고를 중심으로 소문이 돌았다. 황영칠이 무시무시한 덩치에 온몸이 피로 물든 것 같은 빨간 털의 투견을 기르고 있는데, 지는 법을 모르는 그 개는 사실 늑대의 피를 절반쯤 물려받았으며 그 앤이라는 거대한 개와 그보다 더 거대한 황영칠 둘이서 한 끼에 송아지 한 마리를 나눠 먹는다고. 그들이 조만간 군내 투견계를 평정할 예정이라고. 군 챔피언 먹은 겁나 큰 개와 그의 주인이 그 후로는 건초 창고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 소문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쉽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그랬다. 황영칠이 가장 좋아하는 책은 빨강머리 앤이었다. 영칠은 그 작고 가냘픈 아이에게서 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언뜻 그것은 놀라운 오해처럼 보였다. 앤은 작고 영칠은 거대했다. 앤은 쉼 없이 떠들어댔고 영칠은 떠들어댐 없이 쉬었다. 그러나 확실히 둘은 닮았다. 둘은 자기가 가진 가장 소중한 보물이자 강력한 무기가 상상력이라고 믿었다. 그 상상력이 빨강 머리와 거대한 덩치로부터 오는 열등감과 자기 미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었다. 두 사람 다 주변에 좋은 이들이 많았고, 그들로부터 사랑받을 만했으며, 사랑받았다. 단점들을 고쳐나가는 과정에서도 끝내 자기를 잃지 않았으므로 날이 갈수록 그들은 선명해졌다. 그리고 어느 날, 그들은 읽을 만해졌다.’ 그렇게 그들은 닮아 있었는데, 서술자로서 첨언하자면, 이 닮음이 오직 앤과 황영칠 사이에만 존재할까?

  

  "우리는 부자야.“ 앤이 힘주어 말했다. ”우리는 16년동안 쌓은 멋진 추억이 있고여왕처럼 행복하고크건 작건 모두 상상력이 있어은색으로 빛나는 저 얕은 바다를 봐얘들아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환상까지도우리가 백만 달러를 가지고 수많은 다이아몬드를 소유했다 해도 저 아름다움을 더 누릴 수는 없어가능하다면 거기서 본 여자들처럼 되지는 마너는 그 하얀 드레스의 여자처럼이 세상을 경멸하려고 태어난 듯 평생 얼굴을 찌푸리고 살고 싶니아니면 그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부인처럼물론 친절하고 좋은 분이지만뚱뚱하고 키도 작아서 몸매랄 게 없는 사람이 되고 싶어아니면 에번스 부인처럼 눈빛이 슬픈 사람이그런 표정을 보면 그분은 인생에서 큰 불행을 겪은 게 분명해그런 사람들이 되고 싶지는 않겠지제인 앤드루스?“

  ”잘 모르겠어.“ 제인이 확신 없이 말했다. ”다이아몬드는 사람에게 많은 즐거움을 줄 거야.“

  ”나는 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구도 되고 싶지 않아.“ 앤이 말했다. ”평생 다이아몬드를 못 가져도진주 목걸이를 건 그린게이블스의 앤에 완전히 만족해매슈 아저씨가 이 목걸이에 담아준 사랑은 분홍드레스를 입은 부인의 보석 못지 않으니까.“


황영칠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읍내를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의 마음속에 어떤 꿈이 싹텄음이 분명한데, 그것을 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황영칠의 이야기가 흐릿해지는 지점은 여기서부터이다. 우리는 그가 무엇이 되고 싶었는지, 그래서 결국 그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좋은 사람은 만났는지, 사랑은 하였는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쓰기는 어렵다. 어쩌면 황영칠이 자기 못지 않은 거대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 머리색이 빨강색이었다는 이야기를 지어내 볼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는 좋은 이야기를 만들 수가 없다. 좋은 이야기들은 반드시 스스로 이야기되어야 하는 어떤 지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상상은 그런 지점과 지점을 연결하고 경로를 에두르거나 접붙이는 데 그칠 뿐이다. 자신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전하기를 그치면 이야기는 멈춘다. 이야기는 용으로 태어나서 뱀으로 사라진다. 아쉽게도, 황영칠이 읍내를 나와 어떻게 살았는지 추적할 길은 전혀 없고, 그리하여 비록 황영칠의 삶은 끝나지 않았겠지만 황영칠의 이야기만큼은 여기서, 이렇게 끝이다.

 

서두를 다시 반복하자면, 나는 부족한 서술자로서 황영칠의 이야기보다 황영칠의 이야기가 단절된 것에서 오는 아쉬움이 더 선명하게 전달되었으면 싶다. 그리고 좋은 서술자를 만나지 못하여 뱀으로 사라진 좋은 이야기들과, 자신의 삶을 뱀의 삶으로 오해하고 차마 그려내지 않은 좋은 서술자들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표하고 싶다.

 

그린게이블스의 앤에게 루시 모드 몽고메리라는 걸출한 서술자가 있어서 앤의 인생을 그림처럼 그려냈듯이, 황영칠에게도 그런 이야기꾼이 있었다면 우리는 그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알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랬다면 앤의 이야기처럼 황영칠의 이야기 역시 틀림없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주었을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흔들려 울림소리를 내기만을 기다리는 종처럼 거대한 이야기의 그물망에 매달려 있다. 이야기는 읽어도 읽어도 늘 고프고, 세상에 이야기는 넘치지만 지금보다 조금 더 넘쳐도 좋다.

 

진부한 비유지만 우리 모두는 별에서 왔고, 별똥별의 모양으로 떨어지는 모든 원석은 저마다의 서술자를 찾아 지구에 도착한다. 이야기될 가치가 있는 삶을 사는 것만큼이나 삶을 가치 있게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의 이야기로 세상에 남고 싶다면, 앤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만큼 몽고메리가 되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는 황영칠이 황영칠의, 아니, 황영칠들이 황영칠들의 훌륭한 서술자가 되기를 기다리며 오늘도 조용히 나의 서술자가 되고 있다.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6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20-06-20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간머리앤을 궁금해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황영칠에 대해 궁금해지면서 리뷰가 마무리되네요.
너무 좋게 잘 읽었어요, syo님.
기다린 보람이 있었어요^^

syo 2020-06-21 09:29   좋아요 0 | URL
앤에 대해서 쓰려고 했는데 뭘 써야 될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래서 부득이 황영칠씨 소환....

오전 나절 쓰고 나니까 대체 내가 뭐 한 건지 모르겠더라구요 ㅋㅋㅋ

다락방 2020-06-20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이승우와 보부아르가 느껴지는 글이네요. 앤과 황영칠과 보부아르와 이승우...

syo 2020-06-21 09:29   좋아요 0 | URL
다들 뭘 이렇게 느끼세요 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0-06-20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기호! 떠올랏어요

syo 2020-06-21 09:2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뭐야 난 모르겠는데?

stella.K 2020-06-20 19: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리뷰를 소설 같이 쓰는 스요님!
이건 스요님만 쓸 수 있는 리뷰입니다.
전 성석제 삘도 느껴지는데 말이죠.ㅋ
다음 달 이달의 리뷰에 모처럼 스요님이 등극될지 지켜보겠습니다.^^

syo 2020-06-21 09:30   좋아요 0 | URL
이달의 리뷰 이달의 페이퍼 그거 올해 들어서는 한 번도 못해본 것 같은데
고작 황영칠이로 되겠어요? ㅎㅎㅎ
스텔라님이 한 번 더 하세요 ㅎ

비연 2020-06-20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군요.

syo 2020-06-21 09:31   좋아요 0 | URL
오전 내내 아무 생각 없이 썼는데, 쓰고 나서 다시 읽어 보니까,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네요;;

북깨비 2020-06-22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하시네요. ㅠㅠ

syo 2020-06-23 00:01   좋아요 1 | URL
그런 거청한 의도까지는 아니었는데요.
그냥 서재이웃님들도 자기 이야기 많이 하셨으면 좋겠다 뭐 그런 생각에 ㅎㅎㅎ.

페크(pek0501) 2020-06-22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강머리 앤, 애들이 읽었던 게 집에 있을 줄 알았는데 없는 거예요. 그래서 두 권이나 샀어요.
읽다가 발견되는 톡톡 튀는 멘트가 좋더군요.

syo 2020-06-23 00:01   좋아요 1 | URL
그렇죠? 앤 참 사랑스럽게 되바라진 아이예요 ㅎ

Mauerblume 2020-06-29 1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감은빛 2020-06-29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사투리. 너무 정겹네요.
황영칠의 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하지만, 안 써주실거죠?

syo 2020-06-29 22:45   좋아요 0 | URL
처음부터 저걸로 끝이었던 것을요 ㅎㅎㅎㅎ

noomy 2020-06-30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넷플릭스에서 앤 드라마를 봤는데 그 서술자는 앤과 주변 인물들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 주더군요~^^ 책과는 조금 다른 삶의 이야기들도 충분히 재미있었구요. 다양한 이야기꾼들이 좀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진한 글씨는 책 속에 등장하는 글귀이거나 그 변형입니다.

 

 

*

 

레코드.

시공간좌표 eXRW178736C14-67363.

동기화된 현재 시간 1836.

 

우선 오늘 획득한 음성자료를 첨부한다.

 

(번역 불가) 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구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라는 짧은 명칭 말고는 남아 있는 개인정보가 전혀 없는 이 불가사의한 문학가, , 킴이라고 부를까요. 킴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테크놀로지가 오늘날 대부분 구현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는 어쩌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상상력이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대충 비슷한 법이니까요. 그러나 그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실제로 존재했고 서술된 사건들이 현실에서 벌어졌다면 어떨까요. (청중의 탄성) , 화면을 보시죠. 지금 여러분들이 보시는 자료 중 왼쪽은 인류 구술사 아카이브 속에서 저희 연구팀이 서치한 사례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은 대변동 이전의 전자정보공간지층에 화석으로 남아 있던 데이터 조각들을 복원하여 재구성한 작가 킴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등장하는 서사구조입니다. 마더컴퓨터 내러티브 분석 시스템은 왼쪽 화면의 실존 인물 사례와 오른쪽 화면의 작품 속 서사가 98% 이상 일치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청중의 탄성, 짧은 박수, 잠깐의 정적) , 맞습니다. 인류 구술사 아카이브에는 수십억 인간의 생애에 해당하는 자료가 보관되어 있으니 특정 소설의 서사와 거의 일치하는 인생사가 기록되어 있을 확률이 있지요. 사람들의 삶이라는 게 꽤나 많이 닮았고, 대변동 이전에는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는 말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청중의 웃음) 실제로 구술사 아카이브 자료들 간에도 90% 이상 일치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그리고 사건 단위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 무궁한 우주의 역사에서 특정 사건을 단 한 사람만이 겪는다는 것이 오히려 참 희귀한 일이겠지요. 그렇지요? (청중의 대답) 그렇습니다. (정적) 그렇다고요. (청중의 웃음) , 제 설명이 부족했나 보군요. 그러니까, 킴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등장하고 구술사 데이터와 98% 이상 일치한 그 서사들은, 지금껏 우주에서 단 한 번, 오직 단 한 명에게만 실현된 희귀한 사건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청중의 탄성) 그렇습니다. 정체불명의 소설가 킴은,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오직 한 번만 벌어질 서사를 겪어내는 딱 한 명의 사람들에 관해 미리 썼습니다. 마치 그 일이 그렇게 될 것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청중의 탄성, 장내의 혼란, 변역 불가) 하다는 점에서 우리 연구팀은 오랜 시간 이런 신비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을 탐색하는데 주력했습니다. 현 시점에서 킴의 기적을 해명할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개념은 바로 아카식 레코드입니다. 아시는 분도 계시는 것 같군요. 아카식 레코드란 간단히 말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커다란 책입니다. 그러니까 신비의 킴은 이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마치 우리가 정보망을 유영하듯 그 커다란 책을 탐색하다 발견한 특별한 사건들을 소설의 외피를 입혀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이죠. 비과학적으로 들린다구요? , 그렇습니다. 비과학적이지요. 현상 자체가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에 올라서 있어서 그렇습니다. 과학은 늘 수많은 비과학들을 품어가며 몸집을 키워왔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당연한 수많은 것들이 한때는 기적 또는 마법이라고 불렸지요. 일상의 균열을 맞닥뜨린 사람들만이 세계의 진실을 뒤쫓게 되는 법이지요. 어쩌면 이제, 우리의 과학은 아카식 레코드를 접시 위에 올려 놓은 게 아닐까요? 킴의 기적이라는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말이지요. 우리가 더 탐구해 보아야 할 것은……

 

이 자료가 책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강연자는 작가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하긴, 대변동 이전 자료의 오염 정도를 생각하면 저만큼 접근한 것도 대단한 성취 같다. 이미 죽었겠지만 칭찬해주고 싶다. 작가의 이름이 김초엽이라는 것도 알려주고 싶다.

 

자료의 열람 기록 속에서 X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 지역 시간대로 30년 전, X는 이 자료를 열람하고 복사를 신청한 듯하다. 지난 세 번의 탐사에서 그의 자취를 찾지 못했으니 꽤 오랜만에 만난 셈이다. 마지막 발견에서 그와 나의 시간축 변위가 70년이었으니, 우리는 아마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듯하다.

 

X, 당신은 누구입니까.

 

 


*

 

레코드.

 

할머니.

 

저는 지금 슬렌포니아 행성계 제3행성에 와 있어요. 맞아요. 그 책의 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의 주인공 안나가 찾아가려던 바로 그 행성이요. 이 행성은 아직도 이용할 만한 웜홀이 발견되지 않아서, 블루 다이브가 아니었다면 아마 방문하기는 어려웠을 거예요. 희소광물 리커다트의 인기가 식고 동시에 매장량도 줄어들면서 이 행성은 이제 한산한 휴양행성이 되었어요. 사람들은 마음씨가 좋고 지구에서 온 사람을 경계하는 분위기도 없어요. 편안하게 며칠 묵었다가 가려구요.

 

여기도 책은 없는 것 같아요. 표제작의 행성이라 큰 기대를 하고 왔는데 말이에요. 도서관에서 기록물을 뒤져보니 과거에 이곳에 책이, 최소한 책의 흔적이 있었던 건 확실한 것 같아요. 제가 만나본 사람 가운데 몇몇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의 서사와 유사한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런 서사가 기록된 책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요.

 

할머니, 우리는 자주 이야기했잖아요. 안나가 어떻게 되었을지. 안나는 결국 우주를 멀고 먼 우주를 건너 이곳 슬렌포니아에 도착할 수 있었을까요? 워프 항법도 불가능하고 웜홀도 열려있지 않은 이곳을, 블루 다이브도 발견되지 않았던 그 시기에? 어릴 적 저는 늘 안나가 어떻게든 이곳에 도착해 남편과 아들을 만났을 거라고 우겼지만 할머니는 한 번도 제게 져주시지 않았던 거, 기억하세요? 고집스럽게 그 대목,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하는 대목을 짚으며 고개를 저으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이 행성은 공전 궤도와 주기, 자전 속도나 자전축의 각도 같은 것들이 지구와 너무 흡사해서, 저녁이면 지구의 것처럼 아름다운 노을이 져요. 언덕에 올라 해 지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알 수 없게 돼 버려요. 이 노을의 끝자락에 할머니의 도서관이 붉게 서 있을 것만 같고, 사서실에서는 여전히 할머니가, 시력개조를 고집스럽게 거부하시던 할머니가 안경테를 추켜 올리며 창 너머로 타는 붉은 하늘을 바라보고 계실 것만 같아서, 그냥 뛰어 들어가 안기면 꼭 할머니와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기쁘면서 슬퍼요. 이제 도서관에 할머니는 없고 할머니의 마인드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슬프면서 기뻐요. 얼른 책을 찾아야 할머니의 인덱스를 다시 알아낼 텐데. 언제나 도서관 안에 있는 할머니. 하지만 검색할 수 없는 할머니. 분실된 할머니. 세계 속에서 세계와 분리된 할머니, 우리 할머니…….

 

그냥 내일 다시 노을이 지기 전에 다이브를 할까 봐요.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언제가 되어도 떠날 기약이 없다는 말이니까요.

 

, . 할머니, 이 행성에서 케빈의 흔적을 발견했어요. 그것도 최초의 기록을요. 이 행성 시간대로 150년 전쯤에 케빈이 다이브를 시도한 기록이 남아 있었어요. 150년이면, 그간 찾아낸 흔적 가운데 시간축 변위가 가장 큰 기록이잖아요. 어쩌면 케빈은 이 행성에서 여행을 시작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 넓은 우주에 같은 책을 찾고 있는 다른 사람이 있고, 그 사람과 시간축 레이스를 하며 우주 곳곳에서 스치고 지나간다는 거 말이에요, 할머니. 이상하게 설레는 감정이에요. 나중에 꼭 할머니를 찾아서 이야기해 드리고 싶어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줄이는 기분이거든요.

 

, 정말, 케빈은 누구일까요, 할머니.

 

 

 

*

 

레코드.

 

시공간좌표 hXRW6511592C14-67782.

동기화된 현재 시간 0320.

 

감정의 물성은 최초엔 그야말로 형편없는 상품이었다. 마약성 물질을 방출하여 중추신경계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원시적인 작품으로, 신기술이라고 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저 어떤 감정에 물성을 부여했다는 개념 자체로 소비자들에 호소하는 일종의 유행상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냥 실재하는 물건 자체가 중요했던 것이다. 시선을 돌려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있는 물성을 감각할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인 셀링 포인트이므로.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이 다양한 색깔의 차돌들은 일종의 감정 냉장고로서 기능하고 있다. ‘즐거움이라는 상품을 예로 들면, 사용자가 부정적인 감정을 품었을 때 발산하는 특유의 뇌파를 수신한 다음, 저장된 사용자 정보를 검색하여 사용자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오감 자극을 제공한다. 사용자의 파장 지문에 일치하는 시그널을 발산하여 신체의 호르몬 기제가 활발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기능도 지니고 있다. 특히 시공간연속체를 서핑하는 블루 다이버들에게는 필수적인 물건이라 할 수 있다. 정교하지 않은 몇 번의 다이브만으로도 내가 알던 사람이 모두 사라진 시간대에 불시착할 수 있는 위험을 항시 감지하고 사는 여행자들의 감정은 정상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상품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김초엽의 작품을 기억하는 이들은 이미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마더 컴퓨터 내러티브 분석 시스템이 실제 인물과의 일치점을 찾아내지 못한 작품도 감정의 물성이 유일하다. 현재 감정의 물성을 제조하는 기업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모셔널 솔리드라는 회사가 아니다. 이모셔널 솔리드의 흔적을 찾아 이 행성으로 다이브했지만 기록할 만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 X 역시 여기에서 허탕을 치고 돌아간 듯하다. 이 지역 시간대로 20년 전.

 

X., 우리가 같은 책을 찾아 우주를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어쩌면 당신도 알겠습니다. 내가 다녀간 곳에 당신의 흔적이 없다면 그 말은 곧 그 행성에서는 당신의 시간축이 나를 뒤따라오고 있다는 이야기겠지요. 블루 다이브라는 위험한 기술에 몸을 싣고 우주의 파도를 올라타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당신과 나만큼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미끄러져 스쳐 가는 이들이 또 있겠습니까. 오늘은 어쩐지 당신에게 말을 걸고 싶었습니다. 이 레코드가 당신에게 전달되는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아카식 레코드가 있다면 그곳에는 기록이 될 테니까요. 어쩌면 김초엽과 같은 사람이 다시 있어, 당신에게 보내는 내 말을 발견해 이야기로 묶어줄지도 모르니까요. 묻습니다. X, 당신은 누구십니까. 무슨 이유로 사라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찾아 이 광막한 우주를 떠돌고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가 만날 수도 있겠습니까.

 

 

 

*

 

레코드.

 

케빈.

 

매일 할머니에게 보내는 기록을 남겼어요. 오늘은 당신에게 말을 걸어봅니다. 케빈, 안녕하세요. 우와, 되게 어색하다. 하하. 하하.

 

얼마 전 케빈의 행성에 다녀온 것 같아요. 슬렌포니아 행성계 제3행성, 맞죠? 제가 거기 들린 시간대에서 150년 전에 케빈이 다이브한 기록을 보았거든요. 케빈이 여행을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다이브할 때에 그곳에는 케빈을 아는 사람은 거의 남아 있지 않겠군요. 딥프리징을 받아 잠들었거나 우주를 다이브하는 사람들을 빼면요. 다이버라면 가장 듣기 싫어하면서도 다른 다이버들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바로 그 질문을 케빈에게도 하려구요. 케빈은 왜, 다이브를 시작했나요? 케빈을 아는 사람들, 케빈을 사랑한 모든 사람들과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를 그 외롭고 아픈 여행의 길을, 케빈은 왜 선택했나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이기에?

 

제 이야기를 먼저 할까요. 우리가 서로 스친 흔적이 케빈에게 알려줬겠지만, 나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찾아서 우주를 떠돌고 있어요. 단순한 수집욕이라면 나도 케빈도 이 미친 짓을 시작하지 않았겠죠. 이러는 게 이 우주에 우리 딱 둘뿐이니까, 나는 케빈 역시 나처럼 이 책 속 일곱 이야기 중 하나와 관련된 사람이라고 추측해 봐요. 딱 맞췄죠? 케빈은 뭔가요. 나는 관내분실이에요.

 

케빈도 읽어봤겠지만 관내분실은 망자의 시냅스 데이터를 그대로 보존한 마인드를 보관하는 도서관에 얽힌 이야기예요. 어머니의 마인드에 접속할 수 있는 인덱스를 잃어버린 주인공이 인덱스를 찾는 과정에서 어머니와의 감정적 접속점도 찾는 아름다운 단편이죠. 우리 할머니가 그 도서관의 사서였어요. 물론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서는 아니구요. 도서관은 지금도 있어요. 요즘은 마인드를 클라우드에 올려놓고 접속하는 추세라서 도서관 이용객들이 대폭 줄어들었지만, 납골함을 집에 두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마인드를 가정에 보관하는 일을 꺼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아직도 도서관은 문을 닫지 않았어요. 할머니는 그곳에서 유족이 없어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마인드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계셨지요. 혼자 있는 마인드들이 외롭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할머니는 주기적으로 다양한 마인드에 접속하곤 했어요. 정작 당신은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간다는 말을 제일 좋아하셨으면서. 후후. 그러던 중에, 할머니는 어떤 마인드와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존재를 알게 된 것 같아요. 도서관의 데이터베이스에서 관내분실 사건의 기록을 찾아보고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이 도서관이 생기기도 전에, 마인드 스캐닝이 발전하기도 전에 벌써 관내분실 사건의 전말을 본 듯이 세세하게 서술한 책이 있었다는데. 거기도 도서관은 도서관인지라, 할머니는 사서라는 직업을 최대한 활용해 그 책을 찾기 시작했어요. 30년쯤 책상 앞에 앉아 온 우주를 뒤적이다 마침내 책을 발견했고요. 도서관에 배송된 그 책을 들고 할머니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내가 태어났다고 해요. 신기하죠? 그래서 내 이름이 초엽이 되었어요. , 내 이름은 초엽입니다.

 

어린 초엽이는 그 책을 통해 말과 글을 배웠지요. 할머니는 늘 내 방에 와서 책을 읽어주셨는데, 이야기가 끝나면 꼭 다시 책을 가지고 돌아가셨어요. 한 번도 혼자 그 책을 만지게 해주지 않으시더라구요. 울며 떼를 써봐도, 이유를 물어봐도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저었어요. 나중에 할머니가 죽으면 이 책은 초엽이한테 줄게, 그때까지는 할머니 책이야, 하고 타이르기만 하셨지요. 할머니는 그 약속을 지켰을까요? 그랬다면 내가 이렇게 우주 귀퉁이에서 케빈에게 편지를 남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그 책을 우주 어딘가로 보내버리셨어요. 그리고 당신은 인덱스 없는 마인드가 되어 도서관 안으로 사라져 버렸구요. 왜 그러셨을까요? 알 수 없죠. 듣지 못했으니까. 알고 싶죠. 이유가 너무나 알고 싶어요. 그거예요. 내가 우주를 떠도는 이유. 할머니가 우주로 쏘아 올린 그 책을 찾아서, 할머니의 인덱스를 찾아낼 거예요. 할머니의 마인드를 만나서, 모든 걸 물어볼 거예요. 왜 그랬는지. 강아지가 다시 물어올 것을 알고 던지는 원반처럼, 왜 우주로 책을 던지고 나도 던져버렸는지. 나는, 아직도 할머니에 대해서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케빈의 이유는 무엇인가요. 무엇 때문에 이 차갑고 쓸쓸한 우주를, 영원한 밤바다를 헤엄치고 있는 건가요. 내가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언젠가 어디선가 우리가 만날 수 있을까요.

 

 

 

*

 

레코드

 

시공간좌표 tXRW7761444C14-67993.

동기화된 현재 시간 1700.

 

류드밀라에게.

 

안녕하세요. 케빈입니다. 안녕하시냐는 인사는 늘 어색하군요.

 

X라는 이름은 당연히 당신의 이름이 아니겠다 싶기도 하고, 어쩐지 그렇게 부르면 영영 당신을 만날 날이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멋대로 당신에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류드밀라는 공생 가설의 주인공이죠. 우리 안에 있었던 관대한 공생자의 존재를 잊지 않은 유일한 사람. 그들의 소멸된 행성을 그려내고 그들의 소멸을 슬퍼할 줄 안 유일한 사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어떻습니까, 당신에게 어울리는 이름인가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우리를 이 거친 우주로 내몰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우주 만한 이유가 있어야겠지요. 내 이유는 이렇습니다. 저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주인공인 안나의 손자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손자의 손자의 손자쯤 되겠습니다. 류드밀라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읽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안나가 슬렌포니아에 도착하기를 바랐나요? 아니면 한 줌의 외로움이 되어 우주를 영영 떠돌 거라고 예상했을까요? , 어쨌든 결말을 전해드리게 되어서 기쁩니다. 안나는 결국 슬렌포니아에, 우리의 곁에 도착했습니다. 여러 개의 우연이 겹쳤지요. 일인용 셔틀을 타고 우주로 향한 안나는 그때까지 미발견이던 웜홀을 통과해 완전히 다른 행성계에 도착했습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동면을 선택했고, 블루 다이브 기술이 발견된 이후 깨어나 슬렌포니아로 다이브한 것이지요. 그녀가 도착했을 때 슬렌포니아에는 그녀의 손자의 손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때 그는 이미 그녀보다 나이가 많았어요. DNA 매칭이 있었으니 혈연관계를 증명하는 것은 쉬웠지요. 안나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손자의 손자의 집에서 살면서 손자의 손자의 아들이 아들을 낳는 것을 봤습니다. 그게 바로 접니다. 저는 안나를 할머니이면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머니로 알고 자랐습니다.

 

저는 안나에게 그 책의 존재에 대해 들었습니다. 직접 본 적은 없었고, 안나가 그 책을 가지고 있다가 그 책을 간절히 찾는 지구의 어느 도서관으로 보냈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가봤을 때는 그곳에도 이미 그 책은 없었습니다만. 안나의 머릿속에는 그 책의 내용이 정확히 들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저는 김초엽 책 속의 일곱 작품을 안나의 구술로 들었습니다. 특히 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들었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죠. 지금 내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그 이야기 속에서 튀어나온 사람이었으니까요.

 

류드밀라가 알게 되면 정말 놀랄만한 것은 말이지요, 아무도 없는 우주 정거장에서 오지 않는 우주선을 기다리는 동안, 안나가 가장 많이 읽은 이야기가 바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사실입니다. , 맞습니다. 안나는 그 우주정거장에서 그 우주정거장에 머무는 자신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읽고 있었습니다. 슬렌포니아로 가는 우주선이 끝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결국 자기는 일인용 셔틀을 타고 가능성이 없는 우주로 내쫓기듯 걸어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안나는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주로 나가면 슬렌포니아에 갈 수 있는지, 남편과 아들을 만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겠지요. 김초엽이 거기까지는 쓰지 않았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가야만 했답니다. 그녀는 그녀가 가야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그녀는 우주로 무모한 발걸음을 내디뎠고, 이야기가 끝난 곳에서 다시 이야기를 만들어 우리의 곁으로 찾아왔습니다. 내게로 와서 자신의 이야기를 읽어주었지요. 안나는 행복하게 살다 가족의 품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제야 안나의 이야기가 끝이 났던 거지요.

 

제가 그 책을 찾아 온 우주를 뒤지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책 속에서 안나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안나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었어요.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생겨나는 남겨지는 사람들에 대해 한탄했지요. 제로의 가능성을 알면서도 우주를 향해 온몸을 내던지는 안나의 모습은 위대하지만, 그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서는 안 됐어요. 작품으로서는 몰라도, 안나의 이야기가 거기서 멈추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남은 안나의 삶을 그 작품 뒤에 덧붙이려 합니다. 그 이야기는 완결이 나지 않았어요. 안나는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사랑하며 떠났고, 우리 인류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는 사람들은 모두 그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게 내 생각이에요.

 

나는 지금 지구 근처의 마을이라 불리는 곳에 와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류드밀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이곳 시간으로 10년 전에 당신이 다녀갔습니다. 조금씩 우리의 시간축이 가까워지고 있군요. 아카식 레코드가 아니라, 실제 내 목소리로 내 이야기를 당신에게 들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요즘은 잠이 줄었습니다. 생각이 많아졌거든요. 당신에 대해서, 많이 생각합니다.

 

 

 

*

 

레코드.

 

케빈. ‘마을에 다녀갔군요. 두고 온 것이 있어서 다시 이곳으로 다이브 했거든요. 내 시간축에서는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았는데, 포뮬러 캘리브레이터에 문제가 생겼는지 이곳 사람들은 13년 만에 나를 다시 본다고 하네요. 꼬맹이들이 어른이 다 되었어요. 이곳 시간으로 3년 전에 당신이 다녀갔다고 하는 말을 들었어요. 당신은 검은 머리칼에 양쪽 눈의 색깔이 다른 사람이고, 웃을 때 덧니가 보인다고 하는군요. 자기 덧니는 마음에 드나요? ‘마을사람들은 어떤 특징도 그저 하나의 특성으로 볼 뿐이지요. 그들은 서로의 결점을 신경쓰지 않고, 때로 어떤 결점들은 결점으로도 여겨지지 않기도 하구요.

 

당신의 다이브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혹은 내 다이브가 조금만 일렀더라면 이번에 우리는 마주칠 수 있었을까요. 이 우주는 도대체 어떤 공간일까요. 아니, 대체 공간이긴 한 걸까요? 내가 이곳에서 당신에 대해 듣는 동안, 당신은 어느 곳 어느 때를 거닐고 있을까요. 닿을 듯 끝내 닿을 수 없는 것이 우리가 맞닥뜨린 우주의 구조라면, 한 뼘이 우주보다 멀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요. 찰나가 138억년보다 길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요.

 

케빈, 우주 방향으로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날이 늘어갑니다. 그곳에 있나요.

 

 

 

*

 

레코드.

시공간좌표 aXRW042젠장.

 

류드밀라. 아니, 초엽. 당신이 지금 내가 있는 이 고서점에 당신의 사진을 남기고 간 것이 1년 전의 일이랍니다. 포뮬러의 계산 밀도를 고려해보면 이건 시간 단위, 아니 어쩌면 분 단위의 어긋남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다이브 전에 했던 식사를 딱 한 번 거르기만 했어도…….

 

요즘은 내가 이 우주를 떠도는 게 책을 찾기 위해서인지 책을 찾는 당신을 찾기 위해서인지 헷갈립니다. 다이브를 할 때마다 망설입니다. 어쩌면 이곳에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건 아닐까 하고요. 안나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멈추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허접한 셔틀을 타고 우주 끝까지라도 가는 법이라고 나는 배웠습니다. , 그러니까, 이게 당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한 것은 아닌데, 아니, 또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고 그……. 그러니까, 나는, 나는 이제 지구로 향합니다. 내 단말기가 예측한 초엽의 다음 동선 가운데 제일 확률이 높은 곳이 거기군요. 내가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내 말이 들리지는 않겠지만, 부디 당신이 그곳에 있어주기를.

 

, …….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어색하기도 하고, 타이밍도 아닌 것 같긴 합니다만, ……아름답습니다. 사진 말이에요. 당신…….

 

 

 

*

 

레코드.

 

케빈. 초엽이에요. 저는 지구에 와 있습니다. 약간 지쳤달까요. 익숙한 곳에서 익숙한 풍경을 보며 조금쯤 쉬고 싶어졌어요. 책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일에는 기약도 없고, 우리는 끝없이 엇갈리기만 하는데 이놈의 우주는 생각 없이 자꾸 넓어지기만 하고……. 어쩌면 케빈이 우리 도서관에 들를지도 모르니까, 잠깐만, 아주 잠깐만 집에 머물려고 해요. 사실은 내 단말기가 케빈의 동선을 분석했는데 다음 다이브 장소로 지구가 유력하다고 해서…….

 

이곳에 오면 꼭 노을을 보여주고 싶어요. 케빈이 살던 행성에서 보던 것과 많이 닮았을 거예요. 내가 봤거든요. 어쩌면 그때 노을을 보던 장소가 케빈이 살던 곳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어떤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와 관련된 장소가 특별해지는 경험을 해본 적 있나요? 나는요, 그날의 노을이 떠오를 때마다 이곳의 노을이 좋아져요. 지구 밖을 떠돌면서 고향의 노을을 생각하면 다시 보고 싶은 마음과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이 다투곤 했어요. 우주는 사람을 변화시키니까요. 나는 우주 안에서 나를 잃어가는 나를 발견했어요. 공간이 구부러지고, 시간이 흩어지는 거대한 수렁 속을 헤매다니는 사람의 마음이잖아요. 마음이란 우주에 비하면 얼마나 작고 약한가요. 위아래도 없는 우주에 매여 둥둥 떠다니는 마음은 작은 슬픔에도 산란하고 흩어져나가요.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자리에서 분실된 여행자들이 아닐까요?

 

언제부터였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울적할 때마다 역시 우주를 방랑하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했어요. 당신의 눈은 선명하고, 턱은 단단해 보였어요. 저 무서운 우주가 덮쳐오는데도 망설임 없이 당신은 앞으로 나아갔지요. 가야 할 곳이 어딘지 다 아는 사람처럼. 당신을 생각하면 든든했어요. 나도 용기를 내서 한 번 더 다이브할 수 있었어요. 당신과 가까워지기를 바라면서. 그러면서 점점, 당신이 찾는 책이 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네요. 우습죠. 이 넓은 우주에서 단 한 번 마주친 적 없는 사람의 유일한 책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라는 게. 나도 알아요. 그렇지만 우주를 돌고 돌아 조금씩 자신을 마모시켜가는 가운데에도 단 한 번도 마모되지 않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그대로 담은 눈을 하고, 내가 여기 지구에서 당신을 기다려요. 노을이 내리는 저녁이면 언덕에 있겠습니다. 케빈, 노을을 따라, 여기로 와요.

 

 

 

*

 

레코드.

레코드.

 

시공간좌표 eXRW11……지구. 초엽, 나 지금 지구입니다.

케빈.

 

이 작은 행성에 당신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우리가 같은 대기 아래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오래 살았던 것처럼 익숙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고향인 이곳이 어쩐지 새로워요.

 

당신은 어긋남과 스침으로 이루어진 소행성처럼 언제나 멀게만 보입니다.

알아요. 우리의 그 많은 스침과 어긋남들을 모아 하나의 마주침으로 바꿀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까 나는 아직 당신을 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 우리는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람들일 거예요.

하지만 아카식 레코드가 우리를 놓치지 않았다면

하지만 아카식 레코드에 우리의 만남이 이미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첫 만남은 이미 두 번째 만남일 것이고,

오늘 우리는 처음인 동시에 두 번째 만나게 되는 셈이잖아요.

동시에 이 우주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마지막 사건이라고 나는 믿어요.

그리고 어쩌면 이 우주에서 우리와 닮은 만남은 다시 벌어지지 않을지도 몰라요.

김초엽의 소설처럼요.

우리가 찾고 있는 소설 속 이야기들처럼 말이에요.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뒤잇는 여백 속에서도 사람들의 이야기는 차마 끝나지 않고

하지만 마지막 마침표가 찍혀도 이야기가 마쳐지지 않듯

우리가 다시 책을 찾아 온 우주를 떠돌게 될 거라면,

우리가 다시 우주를 떠돌며 책을 찾아다닐 거라면,

내가 당신의 우주가 되어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내가 당신의 책이 되어 드리면 안 될까요.

빛의 속도로 건너갈 수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찬 이 우주지만,

자신의 인덱스조차 찾지 못하고 분실된 사람들의 우주에서,

다시 한번,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

 

(청중의 박수, 정적) 이제 우리 연구의 초점은 아카식 레코드가 도대체 어디 존재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지요. 그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아카식 레코드란 어디에도 없는 동시에 모든 곳에 있다는 주장이지요. 언뜻 들으면 재미있는 헛소리 같지요? (청중의 웃음) 그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시공간의 최소 단위를 하나의 알갱이라고 생각해보죠. 그렇다면 각각의 알갱이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를 것이고, 그 알갱이들의 배치들 또한 하나의 유일한 배열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배열 하나가 하나의 데이터를 의미한다고 하면, 시공간은 무한히 작은 단위로 미분할 수 있으므로 이론적으로는 우리 손아귀에 들어올 한 줌 크기의 시공간 연속체에도 무한에 가까운 양의 자료가 저장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이해가 되시나요? (정적) 하하하,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이 우주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대본이고, 우리는 그 펼쳐진 대본을 무대로 삼아 그 위에서 대본에 적힌 대로 연기하는 등장인물이라는 뜻입니다. (질문) 맞습니다. 말씀하신 바로 그 문제가 사람들이 이 학설을 받아들이는 데 가장 높은 허들로 작용하지요. 얼핏 들으면 이 학설은 그야말로 결정론의 결정판처럼 들립니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하기도 전에 어딘가에는 이미 당신이 그 일을 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면, 이 세상에 진정한 자유나 의지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일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청중의 답변, 웃음) 대단하시네요. 맞습니다.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알고 모르고가 중요하지도 않지요.

 

하지만 사고의 틀을 조금만 전환하면, 이런 이야기도 가능해집니다. , 여기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AB라고 하죠. 그런데 불의의 사고로 인해 두 사람은 각각 우주의 끝과 끝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빛의 속도로 140억 년을 달려야 겨우 만날 수 있는 광대한 우주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잖아요. A가 전하는 사랑의 말 역시 어떤 매질에 실어 보내도 빛의 속도로는 B에게 갈 수 없습니다. 그럼 그들은 이제 어떡해야 할까요? (청중의 답변, 웃음) 하하하, ,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면 되지요. 슬프지만 그게 제일 현명한 해결책일지도 모릅니다. 아카식 레코드가 없는 우주라면요. A가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B의 사진을 어루만진다면 그 사건은 아카식 레코드에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B가 술에 취해 엉엉 울면서 A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다면 그 사건 역시 아카식 레코드에 이미 기록된 사건입니다. AB를 향해 남긴 모든 사랑의 말을 아카식 레코드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습니다. B가 그 말을 직접 들었건 말건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의 미스테리한 킴처럼, 외로운 B가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할 수 있다면 그는 저 우주의 끝에서 역시 외로운 A가 던진 모든 말을 들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꽤 멋있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순 없어도, 우리의 마음은 빛보다 빠르게 우주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생각하세요. 기록하세요. 닿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우주에 여러분의 이야기를 쏘아 올리세요. 저 우주의 무한한 공백을, 이미 기록된 여러분의 이야기로 기록하세요. 인류가 이 우주에서 맡은 가장 크고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세요. 바로 지금, 이곳에서부터.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6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유행열반인 2020-01-28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눈물 좀 닦고...일어나서 박수 막 치다가...ㅋㅋㅋ 같은 책 읽고도 산출물 수준차가 은하와 은하만큼 머네요. 저 이 글은 앞으로 한 열 번쯤 더 읽고 싶습니다. ㅋㅋㅋ이 책이 사라지지 않아 찾으러 헤매지 않아도 되고 같은 책 읽을 수 있어 천만 다행인 우주에 살고 있구나 안도 하는 중입니다.ㅎㅎㅎ

syo 2020-01-28 22:34   좋아요 1 | U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