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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시인선 135
이원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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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사랑하는 내가, 내가 가 본 바다에 대해 수없이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지만, 그날 그 바다에 대해서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 오늘에야 그 바다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그날 우리는 바다에 가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날의 바다는 우리의 바다 중 하나는 아닐 테지만 나는 흐린 차창 밖 온몸으로 비를 맞고 있는 다시 못 올 그 바다를 몰래 내 바다의 목록 안에 집어넣었던 거야.

 

그즈음 나는 다시 못 올 줄도 모르고 다시 못 올 것들을 스쳐 보내는 일에 대해 생각하고 또 겁을 내던 중이었잖아. 아무 생각 없이 딛고 살아왔던 세상의 밑바닥이 실은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졌다는 진실을 세상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 같은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지. 혼자 끙끙대며 참다 어느 밤 결국 머뭇머뭇 네게 이 걱정을 털어놓았을 때, 너는 웃지도 울지도 않고 말했어. 세상이 원래 그런 거잖아? 그 밤 너는 나를 품에 넣고 토닥여 주다가 금세 잠이 들어버렸고 나는 네 고른 숨소리 속에서 길게 외로웠어. 세상이 원래 그런 곳이어서, 그런 세상에 너와 내가 살고 있어서.

 

출장이 잦아진 너와 부쩍 외로움을 타기 시작한 내가 좁은 공간에서 얼굴을 맞대고 살았으니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겠지. 많은 생각은 곧 위기니까, 그걸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한 너와 나는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날 나는 네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네 출장지라는 강릉을 향해 함께 가고 있었어. 오직 외롭지 않으려고. 네가 없는 좁은 집이 얼마나 넓은지 없는 너는 알 수 없겠지, 전에 살던 누군가가 천장에 붙여놓은 야광별 모퉁이가 떨어져 말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숨소리가 고른 너는 끝내 모르겠지, 뭐 그런 원망을 했던 것도 같아.

 

바다는 주로 우리의 오른쪽에서 모습을 드러냈으니 앞만 보고 운전하던 너보다는 보조석에 앉은 내가 바다와 접촉하기 더 쉬웠을 거야. 바다가 보여. 내가 말했지. 너는 흔들리는 와이퍼 너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어. 우리 조만간 바다 보러 갈까? 형 바다 좋아하잖아.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곳에 유명한 바닷가가 있는데 왜 우리는 다른 조만간에 다른 바다를 보러 가야 하는 걸까, 그저 잠시만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도 저기 회색 비를 받아내고 있는 회색 바다가 보이는데, 왜 보이지 않는 바다를 위해 보이는 바다를 무시해야 하는 걸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느라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 그러자 너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이제부터 차에서 내릴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나는 알았고, 실제로도 우린 그랬고,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바다를 바라봤던 거야. 저 바다의 색조를, 윤곽을, 조용함을,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음을 기억하려고. 우리의 지금 이 아무 말 없음을 기억하지 않으려고.

 

그런데 그 시도는 실패했지. 그건 우리가 함께 만들어 온 수많은 실패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으니 어쩌면 금방 잊힐 만도 했지만, 그날 그 바다를 오래 바라본 바람에, 그 바다의 세밀한 특징들을 집요하게 기억에 새겨넣은 바람에, 오히려 다른 크고 날카로운 실패들보다 오래 기억에 남는 작은 실패가 되어버린 것 같아. , 생각처럼 되지 않아, 그렇지? 세상이 원래 그런 거라고, 아마도 너는 말하지 않을까.

 

바다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했던 건데, 자꾸 네 이야기만 하게 되네.

 

이제는 너의 집이 된 우리의 집을 나오고 나서 나는 내가 살 수 있는 가장 작은 방 속에 틀어박혔어. 내가 없는 우리의 옛 좁은 집이 얼마나 넓은지 네가 알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모르고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 사이에서 참 오래도 흔들렸지. 내 좁은 방 안에 더 좁은 침묵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 영영 틀어박혀 버리려고, 원래 그런 세상 따위 원래 없었던 것처럼 버리고 살아가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생각만큼 오래 버티지 못하고 방 밖으로 나와야만 했어. 내가 만든 침묵이 침묵하지 않더라고. 좁은 방의 여섯 면이 자꾸 내게 말을 거는데 그게 다 네 목소리더라고. 방은 네 목소리로 가득 메아리치고, 침묵이라는 게 견딜 수 없이 시끄럽더라고. 귀를 막았는데도 들리는 네 목소리에 입을 닫았는데도 내가 대답을 하고 있더라고.

 

그 방에서 나오고 내가 제일 처음 생각한 게 그 바다였어. 그 바다로 가자. 네가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그 바다로. 내 침묵을 다 깨 먹은 네 목소리가 그 바다까지는 도착하지 않을 테니까. 거기에 가서 다시 한번 작은 방을 만들자, 인터넷도 전화선도 없는, 우체통도 없는 견고한 침묵을 만들고 그 속에서 변하지 말자, 비 내리는 바닷가에서 비 내리는 바다처럼 살자, 그런 다짐이었어. 그리고 작은 차에 작은 짐을 싣고 나는 출발했지.

 

그런데 있잖아, 그 바다가 없더라. 아무 데도 없었어. 나는 지금도 그날 그 바다를 사진처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데, 심지어 그 바다를 떠올리면 그날따라 깔끔하게 면도되지 않아 거뭇했던 네 오른쪽 턱이라든가, 두 번째 단추를 풀지도 않고 억지로 두 번 접는 바람에 터져나갈 것 같던 네 셔츠 소매라든가, 벨트 위로 살짝 넘친 네 배와 그 배를 만들던 당시 네 식습관과 그 식습관을 만들던 상사 새끼의 은근한 악행이라든가, 그 모든 것을 바라보고 생각하며 느꼈던 그 순간의 내 복잡한 감정 같은 것들이 아직도 그날 속에 있는 것처럼 묵직하게 떠오르는데, 그런데 그 바다는 이 세상에 없더라. 원래 그런 세상만 있고, 그 세상 속엔 내가 알던 바다와 비슷한 바다들 몇 개가 있고, 세상에 더는 있지도 않은 바다를 찾겠다고 부산에서 강릉까지 두 번을 왕복한 나는 있는데, 그 바다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더라고.

 

그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때서야 눈물이 나기 시작하는 거야. 너 없는 데서 나는 한 번도 울지 않았거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건조하게 슬퍼하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지더라고. 그날부터 며칠을 울고 울었어. 이 많은 물들은 다 어디서 왔나, 이제 세상에 없는 어떤 회색 바다로부터 왔나, 그 바다가 원래 그런 세상이 지겨워 도망치려고 내 눈과 불안과 내 침묵을 찢어버린 네 목소리 같은 것들을 이용했나, 내가 언제까지 울어주면 세상에 없는 그 바다가 다 마를까. 그러다 갑자기 눈물이 뚝 멎더라. 특별히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도, 무슨 그럴듯한 생각을 해낸 것도 아니었는데, 정말 갑작스레, 밥상에 앉아 숟가락을 들 때만 해도 울고 있었던 것 같은데 설거지를 할 때쯤에는 볼이 다 말라 있더라고. 참 이상하지? 그리고 그때부터 긴 시간 오직 한 가지 궁금증만을 뒤적거리면서 오늘에 도착한 거야.

 

우리에게 우리는 어디였을까.

 

 

참다못한 편지가

소리치기로 작정한 순간,

 

확인했습니다

 

두 줄짜리 글에는

몇 달치의 말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당분간은 여전히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그렇고 그런 말들

내가 입기엔 너무 큰 말들

비가 그쳤는데 급하게 우산을 펼치는 말들

 

힘을 잃은 나를 창밖의 바다가 채갑니다

그러고는 볶습니다

이미 열여섯 번 볶아진 적 있습니다

 

바다가 뱉어낸 몸은 매일매일 아픕니다

아무도 안쓰러워 안 합니다

 

아파도 도달해야만 하는 지점을 기억하는데

나는 자꾸만 때를 미루고 있습니다

치과나 병원이면 이렇게 미루지 않았을 겁니다

 

차오르다 차오르다 뚜껑만 닫으면 되는데

그게 안 됩니다

 

손수건 한 장이 나를 안쓰러워합니다

 

손수건 한 장은

아슬아슬하고 별것 아닙니다

 

이러다가는 내일도

바다가 나를 채갈 겁니다

자꾸 울면

내 눈에만 보이던 게

내 눈에만 안 보일 겁니다

_나는 바다가 채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 같다」 전문

 

 

저기, 이제 바다에 같이 가 보지 않을래? 내가 찾던 바다가 더는 없는 것처럼, 네가 보러 가자고 했던 바다도 아마 없을 거고, 조만간도 더는 조만간이 아닐 테지만. 어느 바다든 한 번 다녀오자. 그곳에도 여느 바다처럼 밀물과 썰물이 있고, 밤에 젖은 모래나 돌멩이가 뒹굴 거잖아. 사람들은 영원히 그 바다를 찾겠지만 누군가 다녀간 흔적들은 영원히 씻겨나가고, 우리가 다녀간 자국도 시간 앞에 그렇게 되겠지. 어쩌면 영원한 건 영원이란 단어뿐이겠지만, 그래도 그 모든 일이 일어났다가 씻겨나가는 공간이 우리에게도 있어서, 어쩌면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살아간다는 것이, ,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뭐랄까, 어렴풋이는 알 것 같은데 말로 하기가 참 어렵네. 그냥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나는 우리가 우리에게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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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8-14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쇼님이 왔네.
쇼님이 돌아왔다.

잠자냥 2020-08-14 12:20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이 댓글 저는 왜케 웃긴지 ㅋㅋㅋㅋㅋㅋ
쇼님이 이제 업무가 좀 손에 익었나 봅니다.

다락방 2020-08-14 13:42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쇼님의 시 리뷰를 보니 반가워서요. 흣.
뭔가 쇼님의 촉촉한 감성이 잠시 외출했다 돌아온 것 같달까요.
감성 촉촉한 시 리뷰를 보니 제 감성도 촉촉해지는군요...

syo 2020-08-15 07:49   좋아요 0 | URL
비가 주룩주룩 내립니다...... 갬성.. 축축갬성...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0-08-14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 웰컴!!

syo 2020-08-15 07:49   좋아요 0 | URL
멀리 갔다 돌아온 사람처럼? ㅎㅎ

수연 2020-08-14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팔 벌려 웰컴 쇼님

syo 2020-08-15 07:50   좋아요 0 | URL
웰컴이 폭발하는 거 보니 여기가 내 자리였나 보구만요ㅎㅎ

페크(pek0501) 2020-08-14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 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syo 2020-08-15 07:50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어쩐 일일까요.

2020-08-14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15 0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0-08-14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마지막 문장이 참...!!!!!
바다를 가 본지는 언젠지...ㅠㅠ

시집 리뷰는 이렇게 쓰는 거구만요.^^

syo 2020-08-15 07:52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시집 리뷰는 물론이거니와 리뷰를 이렇게 쓰면 안 되는 겁니다ㅋㅋㅋ
에비~

반유행열반인 2020-08-14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글도 시도 바다 사진도 좋네요. 오랜만이네요.

syo 2020-08-15 07:52   좋아요 1 | URL
바다 한 번 다녀오심이 어떨까요. 묵묵히 바라만 보고 와도 언제나 좋은 곳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8-14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괴로움인 현실이 정상은 아니라고 몸과 마음은 말하는데, 남들은 그게 정상이라고 하네요.
부처는 진정 답을 알았을까요?
이글 보고 느낀 개인 소고입니다. ^^

syo 2020-08-15 07:53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뭔가 심오한 선문답같은 느낌입니다.
어쩐지 화이팅 1개 드려야 될 것 같기도 하고.....

두 개 드려야겠다. 북다님, 화이팅 화이팅

북다이제스터 2020-08-16 20:03   좋아요 0 | URL
syo 님은 화이팅 한 두개로 현실 하루하루가 살아가지세요?ㅎㅎ

syo 2020-08-17 11:18   좋아요 1 | URL
북다님께서 어떤 현실을 무엇으로 버텨 살아가시는지 제가 알 길이 없겠으나,
그걸 아나 모르나 어차피 제가 드릴 수 있는 게 기껏 요 화이팅 한두 개밖에 없어서 슬프네요 ㅠㅠ

이거 참, 힘내시라는 말조차 드리기 힘들어졌네요 허허허.

공쟝쟝 2020-08-22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아오면 이정도의 화력이구나 (새삼)

syo 2020-08-22 21:57   좋아요 1 | URL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자꾸 들으니 마치 여기서 태어난 것 같군요 ㅎㅎ

rachel_youn 2020-08-23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글이 참 좋아서 로그인까지 했네요

syo 2020-09-14 18:10   좋아요 0 | URL
어이쿠..... 댓글을 거의 한달을 지나서 봤네요 ㅠㅠ
과분한 칭찬말씀 해주셨는데, 너무 죄송합니다 ㅠ

Chelsea08 2020-09-20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쇼님의 글을 읽어 보는데 이 글만 읽고도 글에서 쇼님만의 향이 나는 느낌이네요. 혹시 출처를 표기하고 블로그에 퍼가도 될까요? 사람 들락거리는 블로그는 아니지만 몇 없는 이웃들과 같이 보고 싶어서요. 불편하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syo 2020-09-21 18:16   좋아요 0 | URL
처음 뵙겠습니다, Chelsea08님. 칭찬 말씀 감사합니다.
출처표기하고 가져가신다는데, 불편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뜻대로 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래도 퍼가시는 글에다가 댓글로 퍼가신다는 말씀은 남겨주실 수 있으실까요?
못생긴 자식놈들이라, 어느 놈이 어디로 나가는지 정도는 제가 알면 좋겠어서요.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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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칠을 찾아서

 


나는 부족한 서술자로서 황영칠의 이야기보다 황영칠의 이야기가 단절된 것에서 오는 아쉬움을 더 잘 전하고 싶다.

 

황영칠은 특출났다. 아주 어려서부터 그랬다. 세 살 때 벌써 온몸이 근육으로 땅땅했다. 그 와중에 또 컸다. 사람들은 지치지도 않고 놀랐다. 아니, 야가 송아지가 사람 새끼가? 과장도 아니었다. 생일날 아침상에 올라와 있는 미역국을 원샷드링킹한 후, 황영칠은 팔굽혀펴기 다섯 개를 가볍게 시전했다. 다섯 살 된 기념으로. 집안의 장남 황영일 군은 후에 이렇게 진술했다. 영칠이 가가 맘만 묵었으마, 거서 다섯 개는 더 하고 막바로 열 살도 묵겠드라카이? 와 마, 내 동생이지만 행님아 소리가 절로 나올라카드라…….

 

물론 타고 난 데가 있었다. 박미향 여사의 해산 날, 그녀가 아들 하나를 낳았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지자 사람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우야노, 하나만 나왔다 카더나? 하나는 우얘 됐다 카데? 아이라, 원래 하나삐 없었다 카든데? 뭐라꼬? 미햐이 가 그 뒷산만 한 배 그기 애 하나 드간 배였다꼬? 치아라 인마, 내가 본 기 있는데 그 말을 우얘 믿노, 차라리 미햐이가 송아지를 낳았다 캐라……. 경운기를 몰고 논두렁을 달려 돌아온 황영칠의 조부 황득국 옹이 강보에 쌓인 황영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무거운 거 쫌 보라. 두 놈아 몫은 안 하겠나. 야는 영삼이로는 택도 없는 기라. 영삼이캉 영사캉 한목에 나온 것 맹키로 크다 아이가. 오야, 야는 영칠이다. 보통 이런 탄생 설화는 이름을 지어준 이가 아이를 두 팔로 공중에 들어 올리는 장면으로 마무리되지만 황득국 옹은 그러지 않았다. 불행히도 오십견 시즌이었고, 다시는 양팔을 들어 올릴 수 없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 같다. 어쨌든 그렇게 황영일이 동생 황영이 동생은 황영삼이가 아니라 황영칠이가 되었다. 영삼이도 영칠이도 아닌 은영이를 낳고 싶었던 박미향 여사는 서글프긴 했으나, 이제는 저 큰 아이를 먹이고 건사해야 했기에 그런 감정은 잠시였다. 다음 날 읍내에는 박미향 여사가 육군참모총장감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읍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황영칠은 크게 자랐다. 다른 아이들이 손가락을 접어가며 셈을 익힐 때, 영칠은 자기가 옮겨놓은 쌀가마니를 세 가며 수를 배웠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말문이 빨리 트인 편이었지만 말수가 적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읍 어린이들의 총대장으로 추대된 후 황영칠의 유년기에는 별다른 말이 필요가 없었다. 이런 식이었다.

 

영칠아, 아랫마을 훈식이가 영칠이 니 등치만 크지 한 주먹이라 카고 댕긴다든데, 오늘 학교 마치면 금마 조패러 안 갈래? 안 간다. ? 어디 가나? . 집에? , 집에 뭔 일 있나? 구몬. ……? 오늘 구몬 쌤 오신다. ……맞나. . , 훈식이 새끼 재수 좋네. 디질 뻔 했는데 구몬이 오늘 훈식이 살맀네.

 

이런 대접이 영칠에게 달갑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기 모습이 싫었다. 덩치가 큰 만큼 그 큰 덩치에 대한 콤플렉스도 컸다. 거울을 보다 속절 없이 복받치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눈물을 뿌리며 외양간으로 달려가 황소의 크고 검은 눈망울을 들여다보았다. 누렁아, 누렁아, 내는왜 영일이 영이 행님들보다 니캉 더 닮았겠노……. 영칠아, 힘을 내렴, 그건 그저 너의 껍질일 뿐이란다, 하지만 너는 누구보다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니? 진짜 중요한 것은 네 안에 있는 거야, 그리고 그건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란다, 어쩌면 영칠이 너는 지금보다 더 커질지도 몰라, 하지만 네 안에 있는 영칠이는 언제나 영칠이 너로서 존재하는 거야, 너도 이미 그걸 알고 있잖니? , 이제 눈물을 닦고 저 하늘 위에 반짝이는 별을 올려다보자꾸나, , 이 세상은 정말로 아름답구나, 살아있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니? 라고 누렁이가 말했을 리는 없다. 당연히도. 그런데 황영칠은 그런 이야기를 수신할 수 있었다. 황영칠이 손에 든 지푸라기에 관심이 있지 황영칠이란 인간은 안중에도 없는 황소로부터. 알고 보면 별이 아니라 인공위성인 밤하늘의 작고 하얀 점으로부터도. 상심 속에서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찾을 줄 알고 끝없이 끝없이 다정해지는, 황영칠은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제가 저 나무들의 꼭대기 바람이라고 상상하겠어요. 나무들이 지겨워지면, 여기 고사리들 틈에서 부드럽게 물결치는 걸 상상할래요그런 다음에는 린드 아주머니네 정원으로 날아가서 꽃들을 춤추게 하겠어요그다음에는 클로버 들판으로 날아갈래요그리고 영롱한 물빛 호후로 가서 아른거리는 물결을 일으키는 거예요바람은 상상할 게 너무 많아요!“


황영칠이 그런 사람이었기에, 그의 덩치를 놀림감으로 삼는 아이가 아주 가끔 있었지만 유혈 사태가 일어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상황은 간명하다. 그저 쿵쿵거리는 걸음으로 그 아이에게 다가가 황영칠은 말한다. 다시 한번 말해 볼래. 그리고 다음 말을 준비한다. 친구 사이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니. 부디 사과해 주지 않겠어? 그런데 그 말이 나올 겨를도 없이 상대는 고개를 숙이고 깊이 반성하기 마련이었고, 대부분 알아서 사과를 했다. 덜덜 떠는 목소리에서 진심을 느낀 황영칠은 다시 쿵쿵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저 친구는 내 마음을 다 알아주고 사과해 주잖아. 모든 마음은 이렇게 다 연결되어 있는 거야. 아 세상은 정말 아름다워. 그렇게 생각하며 영칠은 해맑게 웃었다. 그 웃음 때문에 십 대가 된 이후로는 처음으로 오줌을 지렸다고 증언한 아이가 몇 있긴 했지만.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황영칠이 성큼성큼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있는데 친구 하나가 달려오며 그를 외쳐 부른다. 영칠이, 니도 거 가나? 어데? 회관 뒤에 건초 창고. 거 가는 거 아이가? 아인데. 집에 가는데. , 오늘 거서 개싸움 씨게 한다 카든데. 맞나. , 군에서 챔피언 묵은 겁나 큰 개 온다 카더라. 같이 안 갈래? , 안 갈란다. , 왜, 가자. 안 된다. 집에 가서 볼 끼 있다. 뭔데. 빨강머리 앤. ……? 빨강머리 앤 봐야 된다꼬. 빨강……그기 뭔데? 있다. 내한테는 중요한 기다. 맞나. 그래. 지금 빨강머리 앤하고 길버트하고 대판 붙기 직전이다. , 맞나. 둘이 붙으마 누가 이기는데? 당연히 우리 빨강머리 앤이 이기지. 아 맞나, 느그 빨강머리 앤이 그래 쎄나. 당연하지 임마. 앤은 지는 법이 없는기라. , 맞나. 그라마 군에서 챔피언 먹은 개랑 그 빨강머리랑 싸우마 누가 이기겠노. , 치아라. 우리 빨강머리 앤이 그깟 개나부랭이하고 우얘 싸우갰노. 하여튼 내는 가야된다. 앤이 기다린다. 내일 보자이. 그렇게 황영칠은 총총 사라졌다. 그리고 마을 회관 뒤 건초 창고를 중심으로 소문이 돌았다. 황영칠이 무시무시한 덩치에 온몸이 피로 물든 것 같은 빨간 털의 투견을 기르고 있는데, 지는 법을 모르는 그 개는 사실 늑대의 피를 절반쯤 물려받았으며 그 앤이라는 거대한 개와 그보다 더 거대한 황영칠 둘이서 한 끼에 송아지 한 마리를 나눠 먹는다고. 그들이 조만간 군내 투견계를 평정할 예정이라고. 군 챔피언 먹은 겁나 큰 개와 그의 주인이 그 후로는 건초 창고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 소문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쉽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그랬다. 황영칠이 가장 좋아하는 책은 빨강머리 앤이었다. 영칠은 그 작고 가냘픈 아이에게서 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언뜻 그것은 놀라운 오해처럼 보였다. 앤은 작고 영칠은 거대했다. 앤은 쉼 없이 떠들어댔고 영칠은 떠들어댐 없이 쉬었다. 그러나 확실히 둘은 닮았다. 둘은 자기가 가진 가장 소중한 보물이자 강력한 무기가 상상력이라고 믿었다. 그 상상력이 빨강 머리와 거대한 덩치로부터 오는 열등감과 자기 미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었다. 두 사람 다 주변에 좋은 이들이 많았고, 그들로부터 사랑받을 만했으며, 사랑받았다. 단점들을 고쳐나가는 과정에서도 끝내 자기를 잃지 않았으므로 날이 갈수록 그들은 선명해졌다. 그리고 어느 날, 그들은 읽을 만해졌다.’ 그렇게 그들은 닮아 있었는데, 서술자로서 첨언하자면, 이 닮음이 오직 앤과 황영칠 사이에만 존재할까?

  

  "우리는 부자야.“ 앤이 힘주어 말했다. ”우리는 16년동안 쌓은 멋진 추억이 있고여왕처럼 행복하고크건 작건 모두 상상력이 있어은색으로 빛나는 저 얕은 바다를 봐얘들아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환상까지도우리가 백만 달러를 가지고 수많은 다이아몬드를 소유했다 해도 저 아름다움을 더 누릴 수는 없어가능하다면 거기서 본 여자들처럼 되지는 마너는 그 하얀 드레스의 여자처럼이 세상을 경멸하려고 태어난 듯 평생 얼굴을 찌푸리고 살고 싶니아니면 그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부인처럼물론 친절하고 좋은 분이지만뚱뚱하고 키도 작아서 몸매랄 게 없는 사람이 되고 싶어아니면 에번스 부인처럼 눈빛이 슬픈 사람이그런 표정을 보면 그분은 인생에서 큰 불행을 겪은 게 분명해그런 사람들이 되고 싶지는 않겠지제인 앤드루스?“

  ”잘 모르겠어.“ 제인이 확신 없이 말했다. ”다이아몬드는 사람에게 많은 즐거움을 줄 거야.“

  ”나는 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구도 되고 싶지 않아.“ 앤이 말했다. ”평생 다이아몬드를 못 가져도진주 목걸이를 건 그린게이블스의 앤에 완전히 만족해매슈 아저씨가 이 목걸이에 담아준 사랑은 분홍드레스를 입은 부인의 보석 못지 않으니까.“


황영칠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읍내를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의 마음속에 어떤 꿈이 싹텄음이 분명한데, 그것을 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황영칠의 이야기가 흐릿해지는 지점은 여기서부터이다. 우리는 그가 무엇이 되고 싶었는지, 그래서 결국 그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좋은 사람은 만났는지, 사랑은 하였는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쓰기는 어렵다. 어쩌면 황영칠이 자기 못지 않은 거대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 머리색이 빨강색이었다는 이야기를 지어내 볼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는 좋은 이야기를 만들 수가 없다. 좋은 이야기들은 반드시 스스로 이야기되어야 하는 어떤 지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상상은 그런 지점과 지점을 연결하고 경로를 에두르거나 접붙이는 데 그칠 뿐이다. 자신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전하기를 그치면 이야기는 멈춘다. 이야기는 용으로 태어나서 뱀으로 사라진다. 아쉽게도, 황영칠이 읍내를 나와 어떻게 살았는지 추적할 길은 전혀 없고, 그리하여 비록 황영칠의 삶은 끝나지 않았겠지만 황영칠의 이야기만큼은 여기서, 이렇게 끝이다.

 

서두를 다시 반복하자면, 나는 부족한 서술자로서 황영칠의 이야기보다 황영칠의 이야기가 단절된 것에서 오는 아쉬움이 더 선명하게 전달되었으면 싶다. 그리고 좋은 서술자를 만나지 못하여 뱀으로 사라진 좋은 이야기들과, 자신의 삶을 뱀의 삶으로 오해하고 차마 그려내지 않은 좋은 서술자들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표하고 싶다.

 

그린게이블스의 앤에게 루시 모드 몽고메리라는 걸출한 서술자가 있어서 앤의 인생을 그림처럼 그려냈듯이, 황영칠에게도 그런 이야기꾼이 있었다면 우리는 그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알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랬다면 앤의 이야기처럼 황영칠의 이야기 역시 틀림없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주었을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흔들려 울림소리를 내기만을 기다리는 종처럼 거대한 이야기의 그물망에 매달려 있다. 이야기는 읽어도 읽어도 늘 고프고, 세상에 이야기는 넘치지만 지금보다 조금 더 넘쳐도 좋다.

 

진부한 비유지만 우리 모두는 별에서 왔고, 별똥별의 모양으로 떨어지는 모든 원석은 저마다의 서술자를 찾아 지구에 도착한다. 이야기될 가치가 있는 삶을 사는 것만큼이나 삶을 가치 있게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의 이야기로 세상에 남고 싶다면, 앤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만큼 몽고메리가 되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는 황영칠이 황영칠의, 아니, 황영칠들이 황영칠들의 훌륭한 서술자가 되기를 기다리며 오늘도 조용히 나의 서술자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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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6-20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간머리앤을 궁금해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황영칠에 대해 궁금해지면서 리뷰가 마무리되네요.
너무 좋게 잘 읽었어요, syo님.
기다린 보람이 있었어요^^

syo 2020-06-21 09:29   좋아요 0 | URL
앤에 대해서 쓰려고 했는데 뭘 써야 될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래서 부득이 황영칠씨 소환....

오전 나절 쓰고 나니까 대체 내가 뭐 한 건지 모르겠더라구요 ㅋㅋㅋ

다락방 2020-06-20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이승우와 보부아르가 느껴지는 글이네요. 앤과 황영칠과 보부아르와 이승우...

syo 2020-06-21 09:29   좋아요 0 | URL
다들 뭘 이렇게 느끼세요 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0-06-20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기호! 떠올랏어요

syo 2020-06-21 09:2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뭐야 난 모르겠는데?

stella.K 2020-06-20 19: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리뷰를 소설 같이 쓰는 스요님!
이건 스요님만 쓸 수 있는 리뷰입니다.
전 성석제 삘도 느껴지는데 말이죠.ㅋ
다음 달 이달의 리뷰에 모처럼 스요님이 등극될지 지켜보겠습니다.^^

syo 2020-06-21 09:30   좋아요 0 | URL
이달의 리뷰 이달의 페이퍼 그거 올해 들어서는 한 번도 못해본 것 같은데
고작 황영칠이로 되겠어요? ㅎㅎㅎ
스텔라님이 한 번 더 하세요 ㅎ

비연 2020-06-20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군요.

syo 2020-06-21 09:31   좋아요 0 | URL
오전 내내 아무 생각 없이 썼는데, 쓰고 나서 다시 읽어 보니까,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네요;;

북깨비 2020-06-22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하시네요. ㅠㅠ

syo 2020-06-23 00:01   좋아요 1 | URL
그런 거청한 의도까지는 아니었는데요.
그냥 서재이웃님들도 자기 이야기 많이 하셨으면 좋겠다 뭐 그런 생각에 ㅎㅎㅎ.

페크(pek0501) 2020-06-22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강머리 앤, 애들이 읽었던 게 집에 있을 줄 알았는데 없는 거예요. 그래서 두 권이나 샀어요.
읽다가 발견되는 톡톡 튀는 멘트가 좋더군요.

syo 2020-06-23 00:01   좋아요 1 | URL
그렇죠? 앤 참 사랑스럽게 되바라진 아이예요 ㅎ

Mauerblume 2020-06-29 1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감은빛 2020-06-29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사투리. 너무 정겹네요.
황영칠의 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하지만, 안 써주실거죠?

syo 2020-06-29 22:45   좋아요 0 | URL
처음부터 저걸로 끝이었던 것을요 ㅎㅎㅎㅎ

noomy 2020-06-30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넷플릭스에서 앤 드라마를 봤는데 그 서술자는 앤과 주변 인물들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 주더군요~^^ 책과는 조금 다른 삶의 이야기들도 충분히 재미있었구요. 다양한 이야기꾼들이 좀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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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한 글씨는 책 속에 등장하는 글귀이거나 그 변형입니다.

 

 

*

 

레코드.

시공간좌표 eXRW178736C14-67363.

동기화된 현재 시간 1836.

 

우선 오늘 획득한 음성자료를 첨부한다.

 

(번역 불가) 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구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라는 짧은 명칭 말고는 남아 있는 개인정보가 전혀 없는 이 불가사의한 문학가, , 킴이라고 부를까요. 킴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테크놀로지가 오늘날 대부분 구현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는 어쩌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상상력이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대충 비슷한 법이니까요. 그러나 그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실제로 존재했고 서술된 사건들이 현실에서 벌어졌다면 어떨까요. (청중의 탄성) , 화면을 보시죠. 지금 여러분들이 보시는 자료 중 왼쪽은 인류 구술사 아카이브 속에서 저희 연구팀이 서치한 사례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은 대변동 이전의 전자정보공간지층에 화석으로 남아 있던 데이터 조각들을 복원하여 재구성한 작가 킴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등장하는 서사구조입니다. 마더컴퓨터 내러티브 분석 시스템은 왼쪽 화면의 실존 인물 사례와 오른쪽 화면의 작품 속 서사가 98% 이상 일치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청중의 탄성, 짧은 박수, 잠깐의 정적) , 맞습니다. 인류 구술사 아카이브에는 수십억 인간의 생애에 해당하는 자료가 보관되어 있으니 특정 소설의 서사와 거의 일치하는 인생사가 기록되어 있을 확률이 있지요. 사람들의 삶이라는 게 꽤나 많이 닮았고, 대변동 이전에는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는 말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청중의 웃음) 실제로 구술사 아카이브 자료들 간에도 90% 이상 일치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그리고 사건 단위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 무궁한 우주의 역사에서 특정 사건을 단 한 사람만이 겪는다는 것이 오히려 참 희귀한 일이겠지요. 그렇지요? (청중의 대답) 그렇습니다. (정적) 그렇다고요. (청중의 웃음) , 제 설명이 부족했나 보군요. 그러니까, 킴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등장하고 구술사 데이터와 98% 이상 일치한 그 서사들은, 지금껏 우주에서 단 한 번, 오직 단 한 명에게만 실현된 희귀한 사건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청중의 탄성) 그렇습니다. 정체불명의 소설가 킴은,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오직 한 번만 벌어질 서사를 겪어내는 딱 한 명의 사람들에 관해 미리 썼습니다. 마치 그 일이 그렇게 될 것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청중의 탄성, 장내의 혼란, 변역 불가) 하다는 점에서 우리 연구팀은 오랜 시간 이런 신비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을 탐색하는데 주력했습니다. 현 시점에서 킴의 기적을 해명할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개념은 바로 아카식 레코드입니다. 아시는 분도 계시는 것 같군요. 아카식 레코드란 간단히 말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커다란 책입니다. 그러니까 신비의 킴은 이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마치 우리가 정보망을 유영하듯 그 커다란 책을 탐색하다 발견한 특별한 사건들을 소설의 외피를 입혀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이죠. 비과학적으로 들린다구요? , 그렇습니다. 비과학적이지요. 현상 자체가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에 올라서 있어서 그렇습니다. 과학은 늘 수많은 비과학들을 품어가며 몸집을 키워왔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당연한 수많은 것들이 한때는 기적 또는 마법이라고 불렸지요. 일상의 균열을 맞닥뜨린 사람들만이 세계의 진실을 뒤쫓게 되는 법이지요. 어쩌면 이제, 우리의 과학은 아카식 레코드를 접시 위에 올려 놓은 게 아닐까요? 킴의 기적이라는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말이지요. 우리가 더 탐구해 보아야 할 것은……

 

이 자료가 책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강연자는 작가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하긴, 대변동 이전 자료의 오염 정도를 생각하면 저만큼 접근한 것도 대단한 성취 같다. 이미 죽었겠지만 칭찬해주고 싶다. 작가의 이름이 김초엽이라는 것도 알려주고 싶다.

 

자료의 열람 기록 속에서 X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 지역 시간대로 30년 전, X는 이 자료를 열람하고 복사를 신청한 듯하다. 지난 세 번의 탐사에서 그의 자취를 찾지 못했으니 꽤 오랜만에 만난 셈이다. 마지막 발견에서 그와 나의 시간축 변위가 70년이었으니, 우리는 아마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듯하다.

 

X, 당신은 누구입니까.

 

 


*

 

레코드.

 

할머니.

 

저는 지금 슬렌포니아 행성계 제3행성에 와 있어요. 맞아요. 그 책의 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의 주인공 안나가 찾아가려던 바로 그 행성이요. 이 행성은 아직도 이용할 만한 웜홀이 발견되지 않아서, 블루 다이브가 아니었다면 아마 방문하기는 어려웠을 거예요. 희소광물 리커다트의 인기가 식고 동시에 매장량도 줄어들면서 이 행성은 이제 한산한 휴양행성이 되었어요. 사람들은 마음씨가 좋고 지구에서 온 사람을 경계하는 분위기도 없어요. 편안하게 며칠 묵었다가 가려구요.

 

여기도 책은 없는 것 같아요. 표제작의 행성이라 큰 기대를 하고 왔는데 말이에요. 도서관에서 기록물을 뒤져보니 과거에 이곳에 책이, 최소한 책의 흔적이 있었던 건 확실한 것 같아요. 제가 만나본 사람 가운데 몇몇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의 서사와 유사한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런 서사가 기록된 책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요.

 

할머니, 우리는 자주 이야기했잖아요. 안나가 어떻게 되었을지. 안나는 결국 우주를 멀고 먼 우주를 건너 이곳 슬렌포니아에 도착할 수 있었을까요? 워프 항법도 불가능하고 웜홀도 열려있지 않은 이곳을, 블루 다이브도 발견되지 않았던 그 시기에? 어릴 적 저는 늘 안나가 어떻게든 이곳에 도착해 남편과 아들을 만났을 거라고 우겼지만 할머니는 한 번도 제게 져주시지 않았던 거, 기억하세요? 고집스럽게 그 대목,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하는 대목을 짚으며 고개를 저으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이 행성은 공전 궤도와 주기, 자전 속도나 자전축의 각도 같은 것들이 지구와 너무 흡사해서, 저녁이면 지구의 것처럼 아름다운 노을이 져요. 언덕에 올라 해 지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알 수 없게 돼 버려요. 이 노을의 끝자락에 할머니의 도서관이 붉게 서 있을 것만 같고, 사서실에서는 여전히 할머니가, 시력개조를 고집스럽게 거부하시던 할머니가 안경테를 추켜 올리며 창 너머로 타는 붉은 하늘을 바라보고 계실 것만 같아서, 그냥 뛰어 들어가 안기면 꼭 할머니와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기쁘면서 슬퍼요. 이제 도서관에 할머니는 없고 할머니의 마인드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슬프면서 기뻐요. 얼른 책을 찾아야 할머니의 인덱스를 다시 알아낼 텐데. 언제나 도서관 안에 있는 할머니. 하지만 검색할 수 없는 할머니. 분실된 할머니. 세계 속에서 세계와 분리된 할머니, 우리 할머니…….

 

그냥 내일 다시 노을이 지기 전에 다이브를 할까 봐요.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언제가 되어도 떠날 기약이 없다는 말이니까요.

 

, . 할머니, 이 행성에서 케빈의 흔적을 발견했어요. 그것도 최초의 기록을요. 이 행성 시간대로 150년 전쯤에 케빈이 다이브를 시도한 기록이 남아 있었어요. 150년이면, 그간 찾아낸 흔적 가운데 시간축 변위가 가장 큰 기록이잖아요. 어쩌면 케빈은 이 행성에서 여행을 시작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 넓은 우주에 같은 책을 찾고 있는 다른 사람이 있고, 그 사람과 시간축 레이스를 하며 우주 곳곳에서 스치고 지나간다는 거 말이에요, 할머니. 이상하게 설레는 감정이에요. 나중에 꼭 할머니를 찾아서 이야기해 드리고 싶어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줄이는 기분이거든요.

 

, 정말, 케빈은 누구일까요, 할머니.

 

 

 

*

 

레코드.

 

시공간좌표 hXRW6511592C14-67782.

동기화된 현재 시간 0320.

 

감정의 물성은 최초엔 그야말로 형편없는 상품이었다. 마약성 물질을 방출하여 중추신경계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원시적인 작품으로, 신기술이라고 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저 어떤 감정에 물성을 부여했다는 개념 자체로 소비자들에 호소하는 일종의 유행상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냥 실재하는 물건 자체가 중요했던 것이다. 시선을 돌려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있는 물성을 감각할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인 셀링 포인트이므로.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이 다양한 색깔의 차돌들은 일종의 감정 냉장고로서 기능하고 있다. ‘즐거움이라는 상품을 예로 들면, 사용자가 부정적인 감정을 품었을 때 발산하는 특유의 뇌파를 수신한 다음, 저장된 사용자 정보를 검색하여 사용자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오감 자극을 제공한다. 사용자의 파장 지문에 일치하는 시그널을 발산하여 신체의 호르몬 기제가 활발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기능도 지니고 있다. 특히 시공간연속체를 서핑하는 블루 다이버들에게는 필수적인 물건이라 할 수 있다. 정교하지 않은 몇 번의 다이브만으로도 내가 알던 사람이 모두 사라진 시간대에 불시착할 수 있는 위험을 항시 감지하고 사는 여행자들의 감정은 정상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상품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김초엽의 작품을 기억하는 이들은 이미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마더 컴퓨터 내러티브 분석 시스템이 실제 인물과의 일치점을 찾아내지 못한 작품도 감정의 물성이 유일하다. 현재 감정의 물성을 제조하는 기업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모셔널 솔리드라는 회사가 아니다. 이모셔널 솔리드의 흔적을 찾아 이 행성으로 다이브했지만 기록할 만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 X 역시 여기에서 허탕을 치고 돌아간 듯하다. 이 지역 시간대로 20년 전.

 

X., 우리가 같은 책을 찾아 우주를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어쩌면 당신도 알겠습니다. 내가 다녀간 곳에 당신의 흔적이 없다면 그 말은 곧 그 행성에서는 당신의 시간축이 나를 뒤따라오고 있다는 이야기겠지요. 블루 다이브라는 위험한 기술에 몸을 싣고 우주의 파도를 올라타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당신과 나만큼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미끄러져 스쳐 가는 이들이 또 있겠습니까. 오늘은 어쩐지 당신에게 말을 걸고 싶었습니다. 이 레코드가 당신에게 전달되는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아카식 레코드가 있다면 그곳에는 기록이 될 테니까요. 어쩌면 김초엽과 같은 사람이 다시 있어, 당신에게 보내는 내 말을 발견해 이야기로 묶어줄지도 모르니까요. 묻습니다. X, 당신은 누구십니까. 무슨 이유로 사라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찾아 이 광막한 우주를 떠돌고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가 만날 수도 있겠습니까.

 

 

 

*

 

레코드.

 

케빈.

 

매일 할머니에게 보내는 기록을 남겼어요. 오늘은 당신에게 말을 걸어봅니다. 케빈, 안녕하세요. 우와, 되게 어색하다. 하하. 하하.

 

얼마 전 케빈의 행성에 다녀온 것 같아요. 슬렌포니아 행성계 제3행성, 맞죠? 제가 거기 들린 시간대에서 150년 전에 케빈이 다이브한 기록을 보았거든요. 케빈이 여행을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다이브할 때에 그곳에는 케빈을 아는 사람은 거의 남아 있지 않겠군요. 딥프리징을 받아 잠들었거나 우주를 다이브하는 사람들을 빼면요. 다이버라면 가장 듣기 싫어하면서도 다른 다이버들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바로 그 질문을 케빈에게도 하려구요. 케빈은 왜, 다이브를 시작했나요? 케빈을 아는 사람들, 케빈을 사랑한 모든 사람들과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를 그 외롭고 아픈 여행의 길을, 케빈은 왜 선택했나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이기에?

 

제 이야기를 먼저 할까요. 우리가 서로 스친 흔적이 케빈에게 알려줬겠지만, 나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찾아서 우주를 떠돌고 있어요. 단순한 수집욕이라면 나도 케빈도 이 미친 짓을 시작하지 않았겠죠. 이러는 게 이 우주에 우리 딱 둘뿐이니까, 나는 케빈 역시 나처럼 이 책 속 일곱 이야기 중 하나와 관련된 사람이라고 추측해 봐요. 딱 맞췄죠? 케빈은 뭔가요. 나는 관내분실이에요.

 

케빈도 읽어봤겠지만 관내분실은 망자의 시냅스 데이터를 그대로 보존한 마인드를 보관하는 도서관에 얽힌 이야기예요. 어머니의 마인드에 접속할 수 있는 인덱스를 잃어버린 주인공이 인덱스를 찾는 과정에서 어머니와의 감정적 접속점도 찾는 아름다운 단편이죠. 우리 할머니가 그 도서관의 사서였어요. 물론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서는 아니구요. 도서관은 지금도 있어요. 요즘은 마인드를 클라우드에 올려놓고 접속하는 추세라서 도서관 이용객들이 대폭 줄어들었지만, 납골함을 집에 두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마인드를 가정에 보관하는 일을 꺼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아직도 도서관은 문을 닫지 않았어요. 할머니는 그곳에서 유족이 없어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마인드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계셨지요. 혼자 있는 마인드들이 외롭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할머니는 주기적으로 다양한 마인드에 접속하곤 했어요. 정작 당신은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간다는 말을 제일 좋아하셨으면서. 후후. 그러던 중에, 할머니는 어떤 마인드와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존재를 알게 된 것 같아요. 도서관의 데이터베이스에서 관내분실 사건의 기록을 찾아보고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이 도서관이 생기기도 전에, 마인드 스캐닝이 발전하기도 전에 벌써 관내분실 사건의 전말을 본 듯이 세세하게 서술한 책이 있었다는데. 거기도 도서관은 도서관인지라, 할머니는 사서라는 직업을 최대한 활용해 그 책을 찾기 시작했어요. 30년쯤 책상 앞에 앉아 온 우주를 뒤적이다 마침내 책을 발견했고요. 도서관에 배송된 그 책을 들고 할머니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내가 태어났다고 해요. 신기하죠? 그래서 내 이름이 초엽이 되었어요. , 내 이름은 초엽입니다.

 

어린 초엽이는 그 책을 통해 말과 글을 배웠지요. 할머니는 늘 내 방에 와서 책을 읽어주셨는데, 이야기가 끝나면 꼭 다시 책을 가지고 돌아가셨어요. 한 번도 혼자 그 책을 만지게 해주지 않으시더라구요. 울며 떼를 써봐도, 이유를 물어봐도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저었어요. 나중에 할머니가 죽으면 이 책은 초엽이한테 줄게, 그때까지는 할머니 책이야, 하고 타이르기만 하셨지요. 할머니는 그 약속을 지켰을까요? 그랬다면 내가 이렇게 우주 귀퉁이에서 케빈에게 편지를 남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그 책을 우주 어딘가로 보내버리셨어요. 그리고 당신은 인덱스 없는 마인드가 되어 도서관 안으로 사라져 버렸구요. 왜 그러셨을까요? 알 수 없죠. 듣지 못했으니까. 알고 싶죠. 이유가 너무나 알고 싶어요. 그거예요. 내가 우주를 떠도는 이유. 할머니가 우주로 쏘아 올린 그 책을 찾아서, 할머니의 인덱스를 찾아낼 거예요. 할머니의 마인드를 만나서, 모든 걸 물어볼 거예요. 왜 그랬는지. 강아지가 다시 물어올 것을 알고 던지는 원반처럼, 왜 우주로 책을 던지고 나도 던져버렸는지. 나는, 아직도 할머니에 대해서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케빈의 이유는 무엇인가요. 무엇 때문에 이 차갑고 쓸쓸한 우주를, 영원한 밤바다를 헤엄치고 있는 건가요. 내가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언젠가 어디선가 우리가 만날 수 있을까요.

 

 

 

*

 

레코드

 

시공간좌표 tXRW7761444C14-67993.

동기화된 현재 시간 1700.

 

류드밀라에게.

 

안녕하세요. 케빈입니다. 안녕하시냐는 인사는 늘 어색하군요.

 

X라는 이름은 당연히 당신의 이름이 아니겠다 싶기도 하고, 어쩐지 그렇게 부르면 영영 당신을 만날 날이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멋대로 당신에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류드밀라는 공생 가설의 주인공이죠. 우리 안에 있었던 관대한 공생자의 존재를 잊지 않은 유일한 사람. 그들의 소멸된 행성을 그려내고 그들의 소멸을 슬퍼할 줄 안 유일한 사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어떻습니까, 당신에게 어울리는 이름인가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우리를 이 거친 우주로 내몰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우주 만한 이유가 있어야겠지요. 내 이유는 이렇습니다. 저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주인공인 안나의 손자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손자의 손자의 손자쯤 되겠습니다. 류드밀라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읽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안나가 슬렌포니아에 도착하기를 바랐나요? 아니면 한 줌의 외로움이 되어 우주를 영영 떠돌 거라고 예상했을까요? , 어쨌든 결말을 전해드리게 되어서 기쁩니다. 안나는 결국 슬렌포니아에, 우리의 곁에 도착했습니다. 여러 개의 우연이 겹쳤지요. 일인용 셔틀을 타고 우주로 향한 안나는 그때까지 미발견이던 웜홀을 통과해 완전히 다른 행성계에 도착했습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동면을 선택했고, 블루 다이브 기술이 발견된 이후 깨어나 슬렌포니아로 다이브한 것이지요. 그녀가 도착했을 때 슬렌포니아에는 그녀의 손자의 손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때 그는 이미 그녀보다 나이가 많았어요. DNA 매칭이 있었으니 혈연관계를 증명하는 것은 쉬웠지요. 안나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손자의 손자의 집에서 살면서 손자의 손자의 아들이 아들을 낳는 것을 봤습니다. 그게 바로 접니다. 저는 안나를 할머니이면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머니로 알고 자랐습니다.

 

저는 안나에게 그 책의 존재에 대해 들었습니다. 직접 본 적은 없었고, 안나가 그 책을 가지고 있다가 그 책을 간절히 찾는 지구의 어느 도서관으로 보냈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가봤을 때는 그곳에도 이미 그 책은 없었습니다만. 안나의 머릿속에는 그 책의 내용이 정확히 들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저는 김초엽 책 속의 일곱 작품을 안나의 구술로 들었습니다. 특히 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들었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죠. 지금 내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그 이야기 속에서 튀어나온 사람이었으니까요.

 

류드밀라가 알게 되면 정말 놀랄만한 것은 말이지요, 아무도 없는 우주 정거장에서 오지 않는 우주선을 기다리는 동안, 안나가 가장 많이 읽은 이야기가 바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사실입니다. , 맞습니다. 안나는 그 우주정거장에서 그 우주정거장에 머무는 자신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읽고 있었습니다. 슬렌포니아로 가는 우주선이 끝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결국 자기는 일인용 셔틀을 타고 가능성이 없는 우주로 내쫓기듯 걸어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안나는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주로 나가면 슬렌포니아에 갈 수 있는지, 남편과 아들을 만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겠지요. 김초엽이 거기까지는 쓰지 않았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가야만 했답니다. 그녀는 그녀가 가야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그녀는 우주로 무모한 발걸음을 내디뎠고, 이야기가 끝난 곳에서 다시 이야기를 만들어 우리의 곁으로 찾아왔습니다. 내게로 와서 자신의 이야기를 읽어주었지요. 안나는 행복하게 살다 가족의 품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제야 안나의 이야기가 끝이 났던 거지요.

 

제가 그 책을 찾아 온 우주를 뒤지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책 속에서 안나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안나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었어요.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생겨나는 남겨지는 사람들에 대해 한탄했지요. 제로의 가능성을 알면서도 우주를 향해 온몸을 내던지는 안나의 모습은 위대하지만, 그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서는 안 됐어요. 작품으로서는 몰라도, 안나의 이야기가 거기서 멈추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남은 안나의 삶을 그 작품 뒤에 덧붙이려 합니다. 그 이야기는 완결이 나지 않았어요. 안나는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사랑하며 떠났고, 우리 인류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는 사람들은 모두 그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게 내 생각이에요.

 

나는 지금 지구 근처의 마을이라 불리는 곳에 와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류드밀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이곳 시간으로 10년 전에 당신이 다녀갔습니다. 조금씩 우리의 시간축이 가까워지고 있군요. 아카식 레코드가 아니라, 실제 내 목소리로 내 이야기를 당신에게 들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요즘은 잠이 줄었습니다. 생각이 많아졌거든요. 당신에 대해서, 많이 생각합니다.

 

 

 

*

 

레코드.

 

케빈. ‘마을에 다녀갔군요. 두고 온 것이 있어서 다시 이곳으로 다이브 했거든요. 내 시간축에서는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았는데, 포뮬러 캘리브레이터에 문제가 생겼는지 이곳 사람들은 13년 만에 나를 다시 본다고 하네요. 꼬맹이들이 어른이 다 되었어요. 이곳 시간으로 3년 전에 당신이 다녀갔다고 하는 말을 들었어요. 당신은 검은 머리칼에 양쪽 눈의 색깔이 다른 사람이고, 웃을 때 덧니가 보인다고 하는군요. 자기 덧니는 마음에 드나요? ‘마을사람들은 어떤 특징도 그저 하나의 특성으로 볼 뿐이지요. 그들은 서로의 결점을 신경쓰지 않고, 때로 어떤 결점들은 결점으로도 여겨지지 않기도 하구요.

 

당신의 다이브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혹은 내 다이브가 조금만 일렀더라면 이번에 우리는 마주칠 수 있었을까요. 이 우주는 도대체 어떤 공간일까요. 아니, 대체 공간이긴 한 걸까요? 내가 이곳에서 당신에 대해 듣는 동안, 당신은 어느 곳 어느 때를 거닐고 있을까요. 닿을 듯 끝내 닿을 수 없는 것이 우리가 맞닥뜨린 우주의 구조라면, 한 뼘이 우주보다 멀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요. 찰나가 138억년보다 길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요.

 

케빈, 우주 방향으로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날이 늘어갑니다. 그곳에 있나요.

 

 

 

*

 

레코드.

시공간좌표 aXRW042젠장.

 

류드밀라. 아니, 초엽. 당신이 지금 내가 있는 이 고서점에 당신의 사진을 남기고 간 것이 1년 전의 일이랍니다. 포뮬러의 계산 밀도를 고려해보면 이건 시간 단위, 아니 어쩌면 분 단위의 어긋남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다이브 전에 했던 식사를 딱 한 번 거르기만 했어도…….

 

요즘은 내가 이 우주를 떠도는 게 책을 찾기 위해서인지 책을 찾는 당신을 찾기 위해서인지 헷갈립니다. 다이브를 할 때마다 망설입니다. 어쩌면 이곳에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건 아닐까 하고요. 안나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멈추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허접한 셔틀을 타고 우주 끝까지라도 가는 법이라고 나는 배웠습니다. , 그러니까, 이게 당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한 것은 아닌데, 아니, 또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고 그……. 그러니까, 나는, 나는 이제 지구로 향합니다. 내 단말기가 예측한 초엽의 다음 동선 가운데 제일 확률이 높은 곳이 거기군요. 내가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내 말이 들리지는 않겠지만, 부디 당신이 그곳에 있어주기를.

 

, …….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어색하기도 하고, 타이밍도 아닌 것 같긴 합니다만, ……아름답습니다. 사진 말이에요. 당신…….

 

 

 

*

 

레코드.

 

케빈. 초엽이에요. 저는 지구에 와 있습니다. 약간 지쳤달까요. 익숙한 곳에서 익숙한 풍경을 보며 조금쯤 쉬고 싶어졌어요. 책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일에는 기약도 없고, 우리는 끝없이 엇갈리기만 하는데 이놈의 우주는 생각 없이 자꾸 넓어지기만 하고……. 어쩌면 케빈이 우리 도서관에 들를지도 모르니까, 잠깐만, 아주 잠깐만 집에 머물려고 해요. 사실은 내 단말기가 케빈의 동선을 분석했는데 다음 다이브 장소로 지구가 유력하다고 해서…….

 

이곳에 오면 꼭 노을을 보여주고 싶어요. 케빈이 살던 행성에서 보던 것과 많이 닮았을 거예요. 내가 봤거든요. 어쩌면 그때 노을을 보던 장소가 케빈이 살던 곳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어떤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와 관련된 장소가 특별해지는 경험을 해본 적 있나요? 나는요, 그날의 노을이 떠오를 때마다 이곳의 노을이 좋아져요. 지구 밖을 떠돌면서 고향의 노을을 생각하면 다시 보고 싶은 마음과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이 다투곤 했어요. 우주는 사람을 변화시키니까요. 나는 우주 안에서 나를 잃어가는 나를 발견했어요. 공간이 구부러지고, 시간이 흩어지는 거대한 수렁 속을 헤매다니는 사람의 마음이잖아요. 마음이란 우주에 비하면 얼마나 작고 약한가요. 위아래도 없는 우주에 매여 둥둥 떠다니는 마음은 작은 슬픔에도 산란하고 흩어져나가요.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자리에서 분실된 여행자들이 아닐까요?

 

언제부터였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울적할 때마다 역시 우주를 방랑하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했어요. 당신의 눈은 선명하고, 턱은 단단해 보였어요. 저 무서운 우주가 덮쳐오는데도 망설임 없이 당신은 앞으로 나아갔지요. 가야 할 곳이 어딘지 다 아는 사람처럼. 당신을 생각하면 든든했어요. 나도 용기를 내서 한 번 더 다이브할 수 있었어요. 당신과 가까워지기를 바라면서. 그러면서 점점, 당신이 찾는 책이 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네요. 우습죠. 이 넓은 우주에서 단 한 번 마주친 적 없는 사람의 유일한 책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라는 게. 나도 알아요. 그렇지만 우주를 돌고 돌아 조금씩 자신을 마모시켜가는 가운데에도 단 한 번도 마모되지 않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그대로 담은 눈을 하고, 내가 여기 지구에서 당신을 기다려요. 노을이 내리는 저녁이면 언덕에 있겠습니다. 케빈, 노을을 따라, 여기로 와요.

 

 

 

*

 

레코드.

레코드.

 

시공간좌표 eXRW11……지구. 초엽, 나 지금 지구입니다.

케빈.

 

이 작은 행성에 당신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우리가 같은 대기 아래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오래 살았던 것처럼 익숙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고향인 이곳이 어쩐지 새로워요.

 

당신은 어긋남과 스침으로 이루어진 소행성처럼 언제나 멀게만 보입니다.

알아요. 우리의 그 많은 스침과 어긋남들을 모아 하나의 마주침으로 바꿀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까 나는 아직 당신을 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 우리는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람들일 거예요.

하지만 아카식 레코드가 우리를 놓치지 않았다면

하지만 아카식 레코드에 우리의 만남이 이미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첫 만남은 이미 두 번째 만남일 것이고,

오늘 우리는 처음인 동시에 두 번째 만나게 되는 셈이잖아요.

동시에 이 우주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마지막 사건이라고 나는 믿어요.

그리고 어쩌면 이 우주에서 우리와 닮은 만남은 다시 벌어지지 않을지도 몰라요.

김초엽의 소설처럼요.

우리가 찾고 있는 소설 속 이야기들처럼 말이에요.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뒤잇는 여백 속에서도 사람들의 이야기는 차마 끝나지 않고

하지만 마지막 마침표가 찍혀도 이야기가 마쳐지지 않듯

우리가 다시 책을 찾아 온 우주를 떠돌게 될 거라면,

우리가 다시 우주를 떠돌며 책을 찾아다닐 거라면,

내가 당신의 우주가 되어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내가 당신의 책이 되어 드리면 안 될까요.

빛의 속도로 건너갈 수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찬 이 우주지만,

자신의 인덱스조차 찾지 못하고 분실된 사람들의 우주에서,

다시 한번,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

 

(청중의 박수, 정적) 이제 우리 연구의 초점은 아카식 레코드가 도대체 어디 존재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지요. 그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아카식 레코드란 어디에도 없는 동시에 모든 곳에 있다는 주장이지요. 언뜻 들으면 재미있는 헛소리 같지요? (청중의 웃음) 그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시공간의 최소 단위를 하나의 알갱이라고 생각해보죠. 그렇다면 각각의 알갱이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를 것이고, 그 알갱이들의 배치들 또한 하나의 유일한 배열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배열 하나가 하나의 데이터를 의미한다고 하면, 시공간은 무한히 작은 단위로 미분할 수 있으므로 이론적으로는 우리 손아귀에 들어올 한 줌 크기의 시공간 연속체에도 무한에 가까운 양의 자료가 저장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이해가 되시나요? (정적) 하하하,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이 우주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대본이고, 우리는 그 펼쳐진 대본을 무대로 삼아 그 위에서 대본에 적힌 대로 연기하는 등장인물이라는 뜻입니다. (질문) 맞습니다. 말씀하신 바로 그 문제가 사람들이 이 학설을 받아들이는 데 가장 높은 허들로 작용하지요. 얼핏 들으면 이 학설은 그야말로 결정론의 결정판처럼 들립니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하기도 전에 어딘가에는 이미 당신이 그 일을 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면, 이 세상에 진정한 자유나 의지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일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청중의 답변, 웃음) 대단하시네요. 맞습니다.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알고 모르고가 중요하지도 않지요.

 

하지만 사고의 틀을 조금만 전환하면, 이런 이야기도 가능해집니다. , 여기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AB라고 하죠. 그런데 불의의 사고로 인해 두 사람은 각각 우주의 끝과 끝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빛의 속도로 140억 년을 달려야 겨우 만날 수 있는 광대한 우주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잖아요. A가 전하는 사랑의 말 역시 어떤 매질에 실어 보내도 빛의 속도로는 B에게 갈 수 없습니다. 그럼 그들은 이제 어떡해야 할까요? (청중의 답변, 웃음) 하하하, ,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면 되지요. 슬프지만 그게 제일 현명한 해결책일지도 모릅니다. 아카식 레코드가 없는 우주라면요. A가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B의 사진을 어루만진다면 그 사건은 아카식 레코드에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B가 술에 취해 엉엉 울면서 A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다면 그 사건 역시 아카식 레코드에 이미 기록된 사건입니다. AB를 향해 남긴 모든 사랑의 말을 아카식 레코드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습니다. B가 그 말을 직접 들었건 말건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의 미스테리한 킴처럼, 외로운 B가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할 수 있다면 그는 저 우주의 끝에서 역시 외로운 A가 던진 모든 말을 들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꽤 멋있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순 없어도, 우리의 마음은 빛보다 빠르게 우주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생각하세요. 기록하세요. 닿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우주에 여러분의 이야기를 쏘아 올리세요. 저 우주의 무한한 공백을, 이미 기록된 여러분의 이야기로 기록하세요. 인류가 이 우주에서 맡은 가장 크고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세요. 바로 지금, 이곳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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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1-28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눈물 좀 닦고...일어나서 박수 막 치다가...ㅋㅋㅋ 같은 책 읽고도 산출물 수준차가 은하와 은하만큼 머네요. 저 이 글은 앞으로 한 열 번쯤 더 읽고 싶습니다. ㅋㅋㅋ이 책이 사라지지 않아 찾으러 헤매지 않아도 되고 같은 책 읽을 수 있어 천만 다행인 우주에 살고 있구나 안도 하는 중입니다.ㅎㅎㅎ

syo 2020-01-28 22:34   좋아요 1 | URL
열몇 시간을 이 책 다시 읽고 이 글 쓰는데만 퍼부었어요.
오늘 퇴근하고 회식 있었는데 거기도 안 가고...... 애들이 형은/오빠는 대체 왜 이렇게 비싸요? 막 그러는데, 제가 정말 비싼 사람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책갈피는 손에 쥘 수 있기를 조심스레 기대해봅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1-28 2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등상금 30만 원 노리시고 올린 리뷰시죠? ㅎㅎ

글 넘 좋아서요. 1등을 응원합니다. ^^

syo 2020-01-28 22:35   좋아요 0 | URL
30만원 언감생심입니다.

.....5만원은 혹시나 하고 ㅋㅋㅋㅋㅋㅋ

무식쟁이 2020-01-28 2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우.야.(반말아님,혼잣말)
쇼님의 이 리뷰를 읽기 위해서 책을 읽고 올게요.

반유행열반인 2020-01-29 07:44   좋아요 0 | URL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원작보다 이게 더 좋...(김초엽님이 때리러 올 거 같네요...)

반유행열반인 2020-01-29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한밤 자고 일어나서 읽으니 더 좋아...걸작이야...김초엽 책 찾다 시공 뛰어넘어 만나는 두 사람...둘이 같은 말 조금 다르게 교차하다 딱 만나는데가 킬킬킬링포인트네요.
김초엽은 좋겠다 이런 팬아트 아니 팬걸작이라니...최고의 헌사 아닐지...예쁜 표현이 정말정말 많아요. 내일 또 읽어야지 ㅋㅋㅋ

syo 2020-01-29 21:15   좋아요 1 | URL
귀여운 캐릭터로 프사를 바꾸셨군요. ㅎㅎㅎㅎ 잘 어울리십니다.
제가 또 귀여운 것에 환장을 하는 족속이온데.....

반유행열반인 2020-01-29 21:24   좋아요 0 | URL
누가 닮았다고 해서 해 보았사온데...얘 따가운 고슴도치..호구력 상승하는 안경 쓴 주제에 이름도 호기...헷지호구?헷지호기?네요.

다락방 2020-01-29 07: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제 잠이 안와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였거든요. 그러다 문득, ‘이렇게나 소설을 많이 읽었으면 이제 소설 한 권쯤은 써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야기를 생각하자, 이야기를, 하고 나 자신을 다그쳐봤는데 아무것도 생각이 안나는거예요. 역시 나는 독자여야만 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리뷰를 소설처럼 써내는 쇼님이 있네요. 어쩌면 소설을 쓰는 건 단순히 많이 읽는 걸로 되는게 아니겠구나, 라는 생각도 들고, 그렇지만 어쨌든 쇼님이 엄청나게 많이 읽은 건 사실이다, 라는 생각도 들어요.

이 리뷰는 김초엽 작가님이 자신의 책을 제대로 읽었다며 기꺼이 일등을 주실 것 같은데요? ㅎㅎ

syo 2020-01-29 21:20   좋아요 1 | URL
A4 10장이라는 분량은 누가봐도 욕심낸 걸로 보이겠지요? ㅋㅋㅋㅋ 근데 저 진짜 1등은 생각도 안하고 있거든요.
일단 이건 정통 리뷰가 아니니까.....

그래도 노고를 생각하셔서, 책갈피 하나 먹여주시기를 앙망하옵는데, 헤헤.

소설을 쓰는 일은 또 완전 다른 일이지요.
읽는 것만으로 되는 사람이 있고 읽으면서 써야 마침내 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니까, 다락방님이 한번 써 보세요. 쓰다보면 생각이 줄줄 이어지지 않을까요?

aqua27338 2020-02-03 1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숙련자를위한고전노트 리뷰보다가 여기까지 왔어요.
왜 댓글이 많이 달리고
왜 사람들이 쇼님의 글을 기다리는지 알것같습니다.
와...
구독 알람설정은 없나요 ㅋ

syo 2020-02-03 23:15   좋아요 0 | URL
정말로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ㅎㅎㅎㅎ
<숙련자를 위한 고전노트>에다가 뭐라고 써놨는지 보러갔다가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2020-08-26 2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설처럼 문지 스펙트럼 개정판
다니엘 페낙 지음, 이정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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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변경에서부터 천천히 걸어와 지금 이곳 어딘가를 지나고 있다는 남자의 손에 지팡이도 물통도 아닌 책 한 권이 들려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철물점 집 사내놈이 봤다는구먼.” 사람들은 마을에 하나뿐인 술집에 모여들었다. “그런데 다들 알다시피, 그 멍청한 놈이 아직 글을 못 깨쳤잖아. 그래서 그 나그네가 들고 있는 책이 뭔지, 그 중요한 걸 알아내지 못하고 그냥 발길을 돌렸다는 거야.” “세상에!” 몇몇 사람들이 동요하며 발을 굴렀는지, 바닥에 짜넣은 널빤지가 끽- 불길한 소리를 내질렀다. “도대체 무슨 책일까?” “얼마나 중요한 책이면 이 넓은 나라의 끝에서 끝을 가로지르는 내내 손에서 내려놓질 못하는 걸까?” 사람들은 궁금증에 너무도 깊이 매몰되어 제일 중요한 사실, 아직 맥주를 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술집 주인마저 그랬다. 때때로 궁금함은 어떤 독주도 흉내 내지 못할 만큼 확실히 사람을 취하게 한다.

 


러시아 작가의 소설이 아닐까? , 전당포 할멈을 도끼로 잔인하게 내리친 어느 가난하고 비열한 겁쟁이가 죄책감과 자기기만 속에서 벌벌 떠는 이야기로 천 페이지를 꽉 채운 그 유명한 책 말야.” 먼저 입을 연 것은 목수였다. “책 속의 그놈은 결국 도망치지 못하고 치안의 그물망에 걸려들고 말지. 망설였거든. 멍청하게도. 저 나그네인지 뭔지 하는 작자도 어쩌면 국경에서 사람을 도끼로 쳐 죽이고 끈질기게 도망치는 중인지도 몰라. 그건 정말 좆같이 힘든 일이지. 마음에 구멍이 숭숭 나거든. 거기 서 있는 예쁜 언니가 신은 싸구려 검정 스타킹처럼 말이지. 그래 언니, 거기, 거기 말야. , 하여튼 도망치다보면 말이지, 지쳐서 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온다구. 신체의 자유를 팔고 그걸로 마음의 자유를 사고 싶은 약한 마음이 드는 거지. 그럴 때 다시 한 번 그 책을 읽고는 구두끈을 고쳐 매는 거야. 마음의 자유라는 게 생각보다 꽤 비싸거든. 제 몸을 꽁꽁 묶고, 심지어 전당포 할망구처럼 머리통을 쪼개 도끼를 처박은 채로 경찰서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대도, 그 망할 마음의 자유라는 놈을 살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재수 없으면 몸은 교도소에 처박혔는데 마음도 계속 지옥 불에 튀겨지는 꼴이 나는 거거든. 결국 몽창 꼬라박고 쪽박만 찰까봐 불안한 거지.” 목수가 아이 머리통만한 손을 탁자에 쾅쾅 내리쳐대며 말을 이었다. 마을에 흘러 들어온 게 두 해도 채 되지 않는 그가 그 전에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마을 사람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가 그 크고 투박한 손에 든 연장을 오로지 목재를 다루는 데만 썼다고 보증해줄 이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것이 목수의 가장 친한 이웃조차 그의 과거를 단 한 번도 물어보지 않은 이유였다. “어쩐지 난 알 것 같단 말이지.” 목수는 두꺼운 목을 세차게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에, 그렇게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 책은 아마도 성경이 아닐까 싶은데요.” 다음으로 입을 연 이는 며칠 전에 목사관에 새로 짐을 풀었다는 신출내기 목사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가늘지만 깊은 그의 눈, 마찬가지로 가늘지만 단단해 보이는 그의 목 같은 곳을 훑는 동안 목사는 깍지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작은 소리로 목을 가다듬었다. “창조주 하느님 아버지가 흙으로 빚어 입김을 불어넣으시고 직접 그 이름을 지으셨으며 다른 모든 것들의 이름을 지을 위대한 권한을 내려주신 아담이 하느님 말씀을 어기고 금단의 과실을 탐하여 낙원에서 쫓겨나는 장면을 떠올려 봅시다. 바로 인간이 정처 없이 걸어야만 하는 운명을 받게 된 그 순간을요. 에덴의 출구에 찍혔을 인간의 첫 발자국부터, 하느님이 지으신 모든 땅을 뒤덮고도 모자라 이제 저 하늘 위에 떠 있는 달에까지 찍어놓은 인간의 수많은 발자국들, 그 모든 발자국은 추방의 순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로 가려 했던 걸까요?” 목사가 말을 멈추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글쎄, 누더기 하나 걸치고 쫓겨났으니 배가 고팠을 테고, 스컹크 한 마리라도 잡아먹으려고 근처 풀숲을 뒤지지 않았을까?” “두고 온 사과 생각이 절실했겠는데?” 사람들이 왁자지껄 웃으며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 아버지, 구하소서. 신앙이 약한 마을이로다. 목사는 고개를 내저으며 이번에는 들으라는 듯이 티 나게 목을 가다듬더니, 외치다시피 했다. “그들은!” 일순 조용해졌다. “죄 사함을 받으러 길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 바로 그렇습니다. 그 모든 여행이 죄의 길이면서 사죄의 길이었고, 반란의 길인 동시에 반성의 길이었으며, 역경의 길이지만 곧 희열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배하신 그 길 위에 어리석은 우리가 범한 죄업들이 뜨거운 아스팔트 위의 버터처럼 녹아내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럴 때마다 점점 가벼워지는 우리의 발걸음, 점점 천사와 닮아가는 우리의 웃음을 상상해 보는 겁니다!” 목사는 자기도 모르게 두 팔을 치켜들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누구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래도 목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행이 그런 것이라면, 그 여행의 길이 길고 길수록 가장 잘 어울리는 동반자는 바로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은 지팡이를 들고 있지 않다고 했지요? 그럴 수밖에요. 그는 그 어떤 지팡이보다 훌륭한 지팡이, 바로 거룩한 성경을 들고 다니고 있으니까요! 한 걸음에 한 구절, 말씀을 짚고 발걸음을 옮기는 그 거룩한 여행자가 목사관 앞을 지나만 간다면, , 내가 바로 뛰어나가 꿀처럼 달콤한 물과 그보다 몇 배는 단 기도와 축복을 그에게 부어줄 텐데!” 스스로의 말에 도취되기라도 한 듯, 목사는 두 손을 모으더니 이내 작은 목소리로 기도를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도 이런 유형의 인물은 건드리지 않는 쪽이 낫다는 것을 알만큼은 똑똑했다. 그러는 자기는 빈손이구만. 몇 백 킬로미터를 걷는 사람도 들고 다닐 만큼 훌륭한 책이라지만, 목사관에서 이 술집까지 오는 짧은 거리를 걷는 데는 성경이 별 필요가 없었나 보군. 목수는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이어가는 목사의 가는 목덜미에 송송 돋아있는 솜털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빈정거렸다.


 

우리 젊은 목사님, 기도하는 목소리는 듣기 좋은데 세상 사는 게 어떤 건지 알려면 앞으로 한참 더 마셔야 되겠어요.” 한 사람이 들고 왔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많은 맥주잔을 테이블에 소리도 없이 내려놓으며, 여인이 말했다. 여인은 왼손으로 허벅지 근처를 문지르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맥주를 옮기다 묻은 거품을 닦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스타킹에 나 있는 작은 구멍을 가리는 중이었다. 숭숭 까지는 아니라고, 숭숭 까지는. 여인은 조용히 목수를 흘겨보았다.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목수는 누구보다 먼저 맥주잔을 낚아채 단숨에 들이켜는 중이었다. “길에 얹혀 사는 인생이라는 게 있는 거라, 길 위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역시 길 위에서 하루를 끝내는 사람들이 제일 욕심내는 게 뭔지 알아요? 그건 바로, 고향이에요, 고향. 그리고 추억이지. 걷고 또 걷는 동안 닳아 없어지는 게 신발 밑창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라구요.” 여인은 허벅지에서 뗀 왼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면서 테이블에 앉은 이들을 낮은 눈빛으로 훑었다. “신발 안에 자꾸 모래나 돌멩이가 들어온다거나, 재수 없을 땐 피를 보고 나서야 신발 바닥에 구멍이 났다는 걸 알게 되는 거잖아, 인간이란 게. 마찬가지예요. 어느 날 문득,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는 거지. 태어나 처음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이 곰 인형이었는지 토끼 인형이었는지, 글도 다 못 뗀 코흘리개 시절 혼자 좋아하느라 밤잠을 설쳤던 그 철자법 선생님의 이름이 뭐였는지. 어느 여름날이었어요. 개울에서 헤엄치고 놀다가 바닥에서 뭘 주워들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살아있는 메기 새끼였어요. 난 그때 내 손에 들어있는 길고 미끈한 그 물건이 너무 징그러워서 얼른 내던져버리고는 엉엉 울었거든요. 그때 사촌 오빠가 제일 먼저 다가와서 세상 모르고 우는 나를 물 밖으로 끌어내 주고 있었는데, 멀리서 뒤늦게 그 모습을 본 우리 아버지가 달려오더니 다짜고짜 오빠의 뺨을 후려치는 거야. 그게 무슨 상황인지 알 턱이 없는 나는 계속 울기만 했고, 아빠는 나를 번쩍 들쳐 매고는 성큼성큼 물 밖으로 걸어 나가는데, 오빠는 너무 놀란 얼굴로 울지도 못한 채 개울 속에 멍하니 서서 뺨을 만지고 있더라구요. 이 모든 그림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도, 그때 그 여름날 내가 몇 살이었는지는 아무리 생각을 해도 모르겠단 말이죠.” 맥주잔 세 개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여인은 물어보지도 않고 손가락을 튕겨 주인의 시선을 끌더니 손가락 세 개를 세웠다. 바 너머에서 주인이 새 맥주잔을 꺼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실내는 조용한 가운데 사람들은 여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잃어버린 기억이 얼마나 많을 거야. 그걸 서서히 잃어버리는 건, 그러니까 우물에 빠뜨린 설탕 주머니를 내려다보는 기분이랑 비슷한 거죠. 돌이킬 수도 없는 거고. , 내가 없어지고 있어, 아아 내가 사르르 녹아 사라지고 있어.” 여인은 연극 대사라도 읊듯 텅 빈 눈동자로 공중을 응시하며 말했다. 주인이 새로 채운 맥주 세 잔을 내려놓고 빈 잔을 거둬갔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술집에서 맥주를 나르는 여자도 심심할 때는 책을 읽기도 하죠. 그게 성경도 아니고, 우리 산도적 같이 생긴 목수 씨가 읽었다는 천 페이지짜리 그런 두꺼운 책도 아니고, 그냥 한낱 이야기책에 불과하지만요. 그 이야기책에는요, 오직 사랑하는 남자의 옆에 가고 싶어서 세상에서 가장 고운 목소리를 포기하는 공주가 하나 나와요. 상상할 수 있겠어요? 세상에서 가장 고운 목소리라구요. 그녀가 노래를 부르면 세상 어느 남자든지 그녀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는 그런 고운 목소리요. 그런데 그녀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있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그 목소리를 포기하는 거예요. 놀랍죠? 그런데 더 놀라운 게 뭔지 아세요? 바로 내가, 이 작고 초라한 마을에서, 밑바닥 판자가 다 꺼져가는 낡은 술집에서 술이나 나르는 하찮은 여자인 내가, 그 공주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는 거예요. 글쎄, 내가 눈물이 다 나더라니까요? 여기 누구, 내가 우는 걸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 있다면, 당신들이 오늘 마신 맥주는 내가 다 사죠.” 그러나 그럴 일은 결코 없었다. “난 공주도 아니고, 이제껏 몇 놈을 만나왔지만 나한테 들러붙은 것들은 죄다 쓰레기였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가 다 뭐야, 지금 나를 계속 짜증나게 하는 이 구멍 난 스타킹하고도 바꿀 가치가 없는 그저 그런 놈들뿐이었다구요. 그런 내가, 어떻게 겪기는커녕 냄새도 못 맡아본 그 공주의 경험에 공감을 할 수 있었을까?” 여인이 다시 손가락 네 개를 들어올렸다. 목수는 이번에도 새 잔을 받을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게 내가 잃어버린 추억과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 난 그렇게 생각했어요. 내가 공주가 아니었던 건 확실하지만, 나라고 사랑을 하거나 사랑을 받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건 아닐 거잖아요. 단지 내가 잊은 거야, 기억이 안 나는 거야, 크리스마스 선물이나 선생님의 이름 같은 거야, 울지 않는 오빠를 울면서 바라보던 꼬맹이의 나이 같은 거야, 그렇게 생각했죠. 그러고 나니까 말이에요, 이 개떡 같은 인생도 조금은 봐줄만해지는 것 같았어요. 언제까지 이 허름한 술집에서 찌든내 나는 맥주나 나를지도 알 수 없고, 당장 이번 주말에 새 스타킹을 살 급료를 받을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지만요,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공주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음 주까지 꾹 참고 살아도 되지 않겠냐구요.” 여인은 누구라도 대답해 보라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다들 어쩐지 먹먹한 표정으로 먼 데를 응시하거나 자기 발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아무도 눈치 채진 못했지만 목수는 입술을 닦는 척 슬쩍 눈가를 닦아내고 있었다. “저 불쌍한 나그네가 들고 다니는 것도, 분명히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가득 찬 책일 거예요. 확실해요. 이야기에 기대지 않고 대체 어떻게 자기를 지키며 끝없이 걸을 수가 있겠냐는 거예요.”


 

이거 뜻밖에 꽤 좋은 이야기를 들었구만.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지.” 백발의 깡마른 노인이 역시 백발인 턱수염에 묻은 거품을 소매로 훔치며 말했다. “하지만 다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 아닌가. 아마도 그건, 그냥 지도책이거나 도감 같은 걸걸?”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날 이때껏 살아보니 말인데, 후회되는 게 참 많아. 아직 젊은 우리 마누라 손 놓고 그냥 그렇게 보낸 거, 그러다보니 하나뿐인 자식 놈을 응석받이로 키우게 된 거, 그 응석받이 응석에 못 이겨 결국 새 마누라를 맞이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를 놓쳐 버린 거...... 심지어 냉장고에 하나 남은 달걀을 어제 부쳐 먹지 않은 것도! 오늘 아침에 깨 봤더니 아슬아슬하게 상했더라고.”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인간이 만드는 안타까운 표정은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큼 진지하기 일쑤라, 마을 사람들은-특히 목사는-노인이 타조알이나 심지어 공룡 알을 먹지도 못하고 내버렸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동정어린 표정들일랑 넣어 두게. 아직 가장 후회되는 것은 꺼내지도 않았으니.” 노인은 잠깐 혀를 찼고, 말을 이었다. “내 이날 이때껏 살아보니 말인데, 무엇보다 후회되는 건 말일세, 바로 일찌감치 책을 읽지 않은 것일세.” 노인은 지금이야말로 심각한 표정을 지을 때라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할 뿐이었다. 노인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사람과 그 옆에 서 있는 두 번째로 한심한 사람을 쳐다보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크게 젓더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 이날 이때껏 살아보니 말인데, 세상의 모든 문제는 언제나 그에 걸맞은 해답을 준비해놓고 있더란 말이지. 단지 그 해답이라는 놈을, 문제를 맞닥뜨린 바로 그 순간에 우리가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야. 내 이날 이때껏 살아보니 말인데, 제아무리 운이 좋은 인간이라도 태어날 때부터 모든 답을 입에 물고 날 수는 없더라 이거지. 그 답들은 우리가 얼른 발견해주기를 바라면서 세상 이곳저곳에 숨어 있는데 말이야, 내 이날 이때껏...... 근데 내가 이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있나? 아니지?” 두어 명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아직 이 마을에는 희망이 있군. 목사가 생각했다. “하여튼, 지나고 보니 내가 틀렸던 모든 문제의 답들이 책에 다 들어있더라고. 내 이날 이때껏 살아보니 가장 비참한 순간이 언제인 줄 알아? 그건 바로 아, 내가 이 책을 이십 년 전에만 읽었더라면 오늘 이 모양 이 꼴이 되진 않았을 것을, 하고 후회하며 읽던 책을 바닥에 내던지는 순간이야! 그것보다 더 비참한 순간이 딱 하나 있다면, 그건 똑같은 꼴의 후회를 하되 이십 년 전이 아니라 두 시간 전에 읽지 않은 스스로를 원망하게 되는 순간이지.” 흥분하여 밭은기침을 내뱉느라 이야기가 자꾸 지연되었으나, 사람들은 아무 내색도 없이 끈기 있게 기다려주었다. 목사는 점점 희망이 커져가는 것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인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들고 있는 건 그냥 장거리 여행에 필요한 각종 정보들이 들어있는 책일 확률이 높아. 그랬으니 그 사람이 이렇게 먼 길을 아무 탈 없이 계속 걸어올 수 있는 거라니까. 알겠으면 다들 책 좀 읽으란 말이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내가 이때껏 살아보니 말인데, 책과 노인은 그야말로 지혜의 보고라고.” 노인은 주의를 집중시키려는 듯 손을 들어 테이블을 두드렸지만 그 손이 너무도 가냘파서 테이블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왜 우리 집 영감이 책을 못 읽는지 알겠구만. 일단 책을 손에 들 수가 없겠는걸. 청년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노인의 수많은 후회 가운데 하나인 응석받이 아들의 되바라진 아들이었다. “어떤 지혜의 보고에는 내가 이때껏 살아보니 말인데라는 말이 끝도 없이 적혀있나 보네요. 할아버지, 여기까지 어떻게 걸어오셨는지 모르겠지만, 또 술집에 오신 걸 아버지가 알면 잔소리를 세 시간은 쉬지 않고 들으셔야 할 거예요.” “차라리 네 어미한테 말하려무나. 그래도 똑같이 잔소리 세 시간이겠지만 최소한 네 어미는 나를 훌쩍 들쳐 업고 집까지 갈 만한 힘과 배짱은 갖췄잖니? 징징거리기만 하는 네 애비랑은 다르게.” 주점에 웃음소리가 가득 들어찼다. “엄마가 됐든 아버지가 됐든, 아마도 두 사람 중 누군가는 할아버지를 잡으러 여기로 오고 있을 거니까, 기다리는 동안 우린 그 책 이야기나 더 하는 게 좋겠군요.” 청년이 말을 이어갔다.


 

여러분들의 의견이 다 그럴듯하고 또 좋은 말씀들이었어요. 그렇지만 다들 책을 크게 과소평가하고 계신 것 같아요. 책은 그러니까 그야말로 불꽃같은 것이라구요.” 급하게 달아오르는 것은 어느 시대나 청년의 미덕이자 단점이었다. “꼬마야, 네 말대로라면 책 한 권이 다른 책들을 홀랑 다 태워 먹겠구만? 그럼 누가 책 한권만 가지고 와 봐, 나 담뱃불 좀 붙여야겠어.” 목수가 빈정거렸다. 그러나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럼요! 태우고 말구요. 책뿐만 아니라 사람도, 집단도, 한 나라나 심지어 온 세계도 다 태워버릴 수 있는 게 책인데요. 봐요. 어떤 인간을 다른 인간보다 못한 인간으로 취급하던 관습들이 있었어요. 그 관습들을 싹 불태우는 데 책이 몇 만 권이나 필요했을까요? 아니에요. 몇 권이면 충분했어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걸 할 수 있었던 기생충 같은 무리들을 모조리 화형시키는 불쏘시개로 쓰려고 몇 백 권의 책을 찍어내야 했을까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꿈꾸는 좋은 세상, 모두가 배부르고 행복한 세상으로 가는 열차를 움직이기 위해 몇 권의 책을 태워야 하냐구요? 딱 한 권! 딱 한 권이에요.” 청년은 목이 말랐지만, 어쩐지 아무도 그에게 맥주를 가져다주지 않았다. “책에는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어요. 사람들은 그래서 책을 읽는다구요. 저는 어쩐지 그 사람이 여행하는 혁명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런 의지도 없이 그 먼 길을 그저 걷는다구요? 그게 더 말이 되지 않죠. 그 사람은 지금 어딘가로 가서 그곳의 뭔가를 바꾸려고 걷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그런 사람의 손에 들린 책이 뭐겠어요. 그게 뭐가 되었든, 얼마나 크고 위험한 책이겠어요. 나는 우리도 그 책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 마을 사람들도 다 그 책을 읽어야 한다구요.” 말을 마친 청년이 주인 없는 맥주잔에 손을 뻗는데 목수가 테이블을 쾅 치더니 맥주잔을 가로채며 말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맹이가 어디서 헛바람만 잔뜩 들었군.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개소리야. 떠들 힘이 있으면 손에 연장이나 쥘 일이지.” 목수의 말을 시작으로 사람들의 분분한 의견이 주점을 온통 뒤흔들었다. 주인은 조용히 빈 술잔을 세어 보았다. 이야기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고, 술은 더 많이 필요할 것이었다. 책이야 어찌 되었건, 주인에게 오늘은 좋은 날이었다.


 

"다들 그렇게 궁금하면 그 여행자인지 뭔지 하는 사람을 붙잡고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출입구에 작업복 차림의 여인이 팔짱을 낀 자세로 서 있었다. "엄마가 오셨네요. 할아버지, 이제 들쳐 업힐 차례예요." 청년이 노인을 보며 말했다. 노인이 채 뭐라고 대꾸도 하기 전에, 작업복 여인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팔에 낀 검정색 토시를 걷어붙였다. "입 닫고 너도 얼른 따라 나오는 게 좋을 거다. 내가 몇 번을 말해. 이런 데 들락거리려면 넌 아직 한참 더 자라야 된다고, 이 천하에 불효자식놈아." 여인이 옆에 다가서자 청년은 유독 작아보였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 노인은 아예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어이, 얼른 데리고 나가서 젖이나 더 먹이라고. 그리고 여긴 어른들 말씀 나누시는 곳이니까 앞으론 얼씬도 하지 말라고 그래." 이미 다섯 잔이나 비운 목수의 말이 조금씩 꼬이고 있었다. "지랄하네.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있군. 내일도 무사히 대패질 하고 싶으면 입은 맥주 마시는 데나 쓰는 게 좋을걸. 이놈이나 저놈이나 팔뚝이나 가슴팍에 그 징그러운 털만 달면 제가 뭐라도 되는 줄 안다니까." 목수는 딸국질을 시작했다. "여기 있는 당신들, 죄다 똑같아. 술집에 모여 앉아 맥주잔만 비우면 나라에서 남자 자격증이라도 주는 줄 아나 본데, 천만에. 당신들이 진짜배기라면 여기 모여 주접떨 시간에 그 사람 발걸음을 붙잡고 직접 물어봤겠지. 대체 뭐가 겁이 나서 이 음침한 소굴에 모여서 쑥덕공론이야? , 내 말이 틀려? 여기 오는 길에 보니까 지금 그 그넨지 나그넨지가 광장 벤치에 앉아서 신발을 말리고 있더군. 오늘은 이 마을에서 묵으려는 모양이지. , 당신네들이 진짜 남자임을 증명할 시간이 앞으로 반나절 정도 남았다는 거야. 내 말 알아듣겠어? 특히 당신, 그 솥뚜껑 같은 손을 달고 다니는 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지금 당장 박차고 일어나서 어디로 가야 되는지 생각해 보란 말이다, 이 양반아." 여인이 한 손에는 청년의 손목을 쥐고, 다른 한 팔로는 노인을 옆구리에 끼우듯이 들고 술집 밖으로 나갔다. 솥뚜껑 손을 한 목수가 비틀거리며 뒤를 따랐고, 그 뒤로 모든 사람들이 따라 나오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술값을 받지 못한 주인이 바 너머에서 자신도 광장으로 가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고민은 잠시였다.


 

아직 해가 다 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둑어둑한 광장 한 귀퉁이에서, 여행자는 벤치에 등을 대고 길게 누운 채 책을 잘도 읽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책을 읽는 일에 꽤나 익숙한 모양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그네는 상체를 일으켜 책을 내려놓고는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앉았다. 그리곤 고개를 숙여 벤치 아래에 벗어둔 신발을 들고 모래를 털어냈다. 양쪽 신발의 뒤축이 부딪히는 소리 사이를 광장의 바닥돌을 지치는 발소리가 난폭하게 밀고 들어왔다. 나그네는 신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눈앞에 있었다. "우리는 당신에게 특별한 것을 원하지 않소." 사람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말하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당신이 들고 왔다는 책 말이오, 그게 뭔지 알고 싶을 뿐이오. , 그리고 우리 마을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다른 목소리였다. 역시 말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기는 어려웠다. "당신이 읽는 그 책의 제목을 우리에게 알려준다면, 오늘 밤 우리 중 하나가 당신에게 지붕과 바람 막을 벽, 따뜻한 찌개가 있는 저녁을 제공할 의사가 있어요." 비교적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나그네에게 그건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나그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에 서 있는 거대한 한 덩어리 목소리들의 윤곽을 짚어보려 했으나 그사이 하늘은 많이 어두워져 있었다. 광장의 가로등을 켜는 이가 자기 일을 잊은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도 나그네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나그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세 권의 책을 가지고 다닙니다. 당신들은 어떤 책을 말하는 건가요?" "오늘 우리 마을에 들어설 때 당신이 들고 있었던 그 책의 이름을 원하오." "다른 두 권의 책은 관심이 없으신가요?" "그건 알려주어도 나쁠 건 없지만 우리가 알고 싶은 바로 그 책만큼은 반드시 알아야겠소."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나그네는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보았다. 비로소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구분할 수 있었지만, 나그네에게 그들의 얼굴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나그네는 다시 고개를 숙여 광장의 바닥돌을 적시고 있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것은 하나의 검은 덩어리였다.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검은 덩어리였다. "당신들도 책을 읽으시나요?" "그렇소. 즐기진 않소만." 나그네가 벤치 위에 내려놓았던 책을 손에 들었다. "댁에도 책을 가지고들 계신가요?" ". 아쉽게도 큰 책장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가진 사람은 없지만요." 나그네가 다른 손으로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꺼냈다. "오늘도 책을 읽으셨나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어제는 어땠나요?" 그저 웅성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이번 주 중에 책을 한 권이라도 읽은 분이 계신가요?" 질문하는 나그네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그런 게 무슨 상관이에요. 우리가 원하는 건 그저 당신이 들고 다니는 그 책의 이름이라구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달칵, 라이터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났을 때, 나그네의 손에 든 책에 불이 붙었다. 가로등 불빛은 비교도 안될 만큼 밝은 빛이 불타는 책에서 뿜어져 나왔다. 광장이 순간 환해졌다. 나그네는 어어, 하는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는 손을 뻗는 듯도 했지만 꼭 닿으라고 뻗은 것 같지는 않았다. 책은 금세 재가 되었고, 재는 나그네가 벗어놓은 신발 위로 한들거리며 떨어졌다. 나그네는 신발에 발을 집어넣고 일어섰다. "제겐 지붕도 바람 막을 벽도, 따뜻한 저녁 식사도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방금 제가 불태운 책의 이름이 당신들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처럼요." 나그네는 사람들을 헤집으며 걸어 나갔다. "그 책은, 애초에 별다를 것 없는 책이었어요. 흔한 책이었지요. 어쩌면 당신들 중 몇몇의 책장에도 그 책은 이미 꽂혀 있을지도 모르죠." 나그네는 변경으로부터 여기까지 걸어온 바로 그 속도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광장을 가로질러 마을 밖으로 길을 잡았다. 나그네의 그림자가 광장 끄트머리를 스치고 사라졌을 무렵, 사람들은 하나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이 별다른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도 오랫동안, 사람들은 나그네가 불태운 그 책이 무엇인지를 궁금해 했다. 단지 그 궁금함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이 없었을 뿐. 약속이라도 한 듯 그들은 다시는 나그네도, 그 책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혼자 있는 시간이면 자신의 책장에 꽂힌 책을 하나씩 꺼내어 먼지를 털고, 책등을 어루만져 보기도 하고, 그러다 때로는 그 자리에서 몇 페이지씩 읽기도 했다. 처음에는 마치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침묵하는 상황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몇 있었으나, 차츰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저, 다른 사람들이 나그네가 불태운 그 책과 같은 책을 자기들 책장에서 찾아냈기 때문에 입을 다무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가끔 주점에서 마주치면, 답을 알아낸 사람들의 얼굴에는 뭔가 다른 빛이 도는 듯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자, 그 빛은 모든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드리우는 모두의 빛이 되었다. 각자의 것이 다 다른 듯 또한 닮아있는 그 빛이, 이제는 그들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몇몇 사람들을 추궁해 마침내 답을 얻어낸 사람이 있다. 바로 나다. 그리고 그 답이 무엇인지, 나그네가 불태운 책의 제목이 무엇인지를 당신들에게 알려주려는 의도로 나는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쓰고 보니, 이제 그 답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는 언제나 정답보다 의미 있는 오답들이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굳이 정답을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도 같다. 사람이란 원래 그런 동물이니까. 그래서 이제 당신에게 말하겠다.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 등 뒤에 있는(혹은 옆이나, 다른 방일수도 있겠다) 당신의 책장에 서서 눈을 감아 보라. 그리고 손가락으로 책을 짚어 보라. 첫 번째 짚은 책은 그냥 넘길 것이다. 두 번째 짚은 책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세 번째로 짚은 바로 그 책을 그대로 뽑아 들라. 그리고 다시 책상에 앉아 그 책을 펼치라. 지금 당신의 눈앞에 첫 번째 문장을 열어놓는 그 책이, 나그네가 광장에서 불태운 바로 그 책이다.


 

그리고 당신이 내가 말해준 정답을 믿건 말건, 그건 내겐 별다른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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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01-28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좋은 글 공짜로 읽어도 되나 모르겠네요. 숨도 못 쉬고 읽었다구요. 기왕이면 종이에 인쇄해서 예쁜 책 표지까지 달아서 두고두고 책장에 꽂았다 뽑았다 하며 읽고 싶네요. (거기에 자괴감까지 드네요...내 글은 미세먼지 수준이야 공해야....이 글은 청정 고원의 태초의 공기야...너무 좋아서 고산병 걸리겠어 엉엉)

syo 2019-01-28 10:42   좋아요 1 | URL
아니, 이거 왜 이러세요.

열반인님이 이러시면 제가 좋아할 줄 아셨어요? 아셨군요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19-01-28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죠?? 이거 책에서 발췌하신 거 아니죠? 단편소설 하나 읽은 것 같네요. 오~~ 넘 좋아요!!

syo 2019-01-28 10:43   좋아요 0 | URL
리뷰라고 올려 놨는데 정작 책에서 한 줄도 발췌하지 않았네요.
저도 가끔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요.....

다락방 2019-01-28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리뷰 쓰지 말아야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것보다 더 재미있게 쓸 자신이 없다고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아직 안읽었지만.

syo 2019-01-28 11:51   좋아요 0 | URL
아무튼 일단 읽어봐요. 그럼 생각이 또 바뀔 수도 있거든요!! ㅎㅎㅎㅎ

나무처럼 2019-01-28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정말 좋았어요.

syo 2019-01-28 15:22   좋아요 0 | URL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칭찬 말씀두요^-^

무식쟁이 2019-01-28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잊고 있던 내 안의 파란 돌, 개미 눈꼽 만 한 파란 돌을 찾은 느낌이었어요. 그랬어요.

syo 2019-01-28 15:23   좋아요 0 | URL
궁금하다 그 파란 돌.....
어떤 돌인지 페이퍼로 한 번 써주세요 ㅎ

책읽는나무 2019-01-28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극 한 편 본 듯한~~^^
고도를 기다리는 듯한 기분으로 책 제목을 알고 싶어하는 인물들???
재치있는 재능을 겸비한 자!!
역시 놓치기 아까운 사람이어라~~^^

syo 2019-01-28 18:09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별말씀을요. 엉망진창이에요. 다시 볼 때마다 손댈 데가 자꾸 튀어나와서 곤란한 상황입니다^-^

카알벨루치 2019-01-28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길어 나중에 다시 읽어야겠다 발췌를 안했다고 오오~축구하고와서 넘 피곤해서 나중에 다시 읽고 댓글 달아야겠소

syo 2019-01-28 18:0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그냥 스킵하세요. 피로에 양보하세요ㅎㅎ

cyrus 2019-01-28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이나 에세이를 써볼 생각은 없어요? ^^

syo 2019-01-28 18:10   좋아요 0 | URL
없어요.
겨우 이런 거 쓰는 것도 벅찹니다 ㅎ

stella.K 2019-01-28 18:15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내 말이. 그런데 이 양반은 너무 욕심이 없어.
그나저나 너는 출판사 낼 생각없니?
좀 어떻게 해 봐야되지 않을까?ㅎ

syo 2019-01-28 18:22   좋아요 1 | URL
사이러스님이 출판사를 열어서 스텔라님 책을 내시는 구도로군요.
윈윈이로다.....

stella.K 2019-01-28 18:2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말이나 못하면...흥!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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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 몇 마디만 나누고 돌아올 거니까, 이미 정해진 결론만 통보하면 그걸로 끝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며 현승이 등을 토닥여 주었지만 미래의 큰 눈동자는 금방 정돈되지 않았다. 미래가 물었다. “얼마나 걸릴까?” “왕복 세 시간 잡고, 세 시간 반 정도면 되지 않을까?” 미래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지금부터의 세 시간 반은 삼 년 육 개월 같은 긴 기다림이 되겠지. 난 그 속에서 끝없이 조바심내고, 불안해하고, 의심할 거고, 시계에서 눈을 떼지 못할 테고, 분침이 예정된 시각을 한 칸만 앞질러도 바닥없이 허물어지고 말겠지. “왜 이렇게 불안해 해.” 현승은 품에 안긴 미래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이런 문제에서, 정해진 결론 같은 건 없어. 몇 마디뿐일 거라고 네가 자신했던 말은 곧 수십, 수백 마디의 길고 뜨거운 말로 끝없이 이어질 거고, 그 말들이 곧 너희의 추억을 헤집어 놓을 거고, 이루지 못한 많은 약속들을 떠올리게 할 거고, 아마 그 사람은 울겠지. 그렇게 되면 정해 놓은 결론 같은 거, 그거 그 눈물에 녹아 정말 먼지처럼 사라질 거잖아. 나한테 오지 않을 거잖아. 미래의 눈이 그렇게 많은 말을 내비치는 동안, 미래의 입은 딱 한 마디만을 보탰다. “, , 여기로 다시 올 거지?” 현승은 고개만 끄덕였다. 미래는 현승의 턱이 자신의 정수리 근처를 두 번 스치는 것을 느꼈다. 한숨 같아 못내 불안하지만 그래도 따뜻해서 끝까지 믿고 싶은, 현승의 날숨이 느껴졌다. 그리고 세 시간 반이 시작되었다.

 

 


2

 

에어컨에서 뿜어져 나온 냉기가 서려 서늘해진 차창에 머리를 대고, 현승은 유진에게 할 말을 이리저리 배치하고 있었다.

 

네가 시간을 좀 갖자고 말했을 때, 난 분명히 이야기 했어. 네가 원한다면 그러겠지만, 돌아오면 내 옆에 네 자리, 없을 수 있다고.’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었다. 이건 꼭 이야기하고 시작해야겠어.

 

어차피 어떻게든 한 번 어긋난 인연이면, 다시 이어 붙이는 건 어렵다고 생각해. 억지로 봉합하려 해 봤자 금 간 자리는 사라지지 않는 거잖아.’ 이 말은 저쪽에서 먼저 헤어지자고 할 때도 쓸 수 있겠다. 빠뜨리지 말아야지.

 

난 별로 좋은 사람 아니었나 봐. 이제 겨우 한 달 지났는데, 네가 정말 많이 희미해졌어. 그러니까 우리 이렇게 헤어지는 게, 너한테도 잘 된 일이라는 거지, 내 말은.’ , 사실은 사실이니까.

 

이미 난 다른 사람이 생겼어. 지금도 그 사람하고 있다가 여기 온 거고, 너랑 이야기 끝나면 바로 그 사람한테 갈 거야. 그러니까 이제, 우리한테는 어떤 가능성도 없는 거야.’ 이 말은 하지 말까? 너무 나쁜 놈 같아 보이는데. , 모르지. 저쪽에서도 비슷한 말을 할지도 모르는 건데. 일단 넣어 둬.

 

말은 풍성했지만 대체로 식상했다. 현승은 말의 앞으로 말을, 말의 뒤로 말을 옮겨 붙여가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참 식상한 사랑이었던 거지. 별 거 없는 16개월이었던 거지. 이렇게 끝내는 게, 맞는 거지. 차체가 흔들릴 때마다 창에 기댄 머리도 함께 떨렸다. 그 진동에 기대어, 현승은 쉼 없이 무언가를 털어내고 있었다. 애정의 잔해, 미련, 좋았던 추억, 좋았을지도 모를 두 사람의 미래, 그리고 죄책감. 죄책감.

 


 

3

 

죄책감은 지금 어딘가에서 조용히 현승을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여자의 이름에 들러붙은 감정이었다. 유진으로부터 한 달만 시간을 가져보자고 통보받은 바로 그날, 바로 그 순간까지도 현승은 아무런 낌새도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시끄럽게 분노했다. 분노로 부끄러움을 덮어 보려 큰 소리를 쳤다. 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가 헤어졌다고 생각할 거라고 윽박질렀다. 유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 전철에 올라탔다. 전철의 뒤꽁무니가 희미해져 가는 플랫폼에서 현승은 주먹을 쥔 채 오래 서 있었다.

 

그날 밤 현승은 미래를 불러냈다. 미래를 알게 된 지는 채 1년도 지나지 않았고, 같은 인터넷 동호회 회원이었던 그들은 그날 전까지는 실제로 만난 적이 단 한번밖에 없는 희미한 관계일 뿐이었다. 그런 미래를 불러 술을 마신 것에 의도가 있었음을 현승은 인정했다. 일주일에 열 번쯤 술을 마시는 사내놈들이 현승의 주변에 득시글거렸으므로 그저 술을 같이 마실 사람이 필요한 것뿐이었다면 현승은 그 조용하고 아늑한 술집으로 굳이 미래를 부르진 않았을 것이다. 테이블 위에 향초가 있고,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에 알록달록한 비즈 커튼이 둘러져 있는 술집이었다. 아른거리는 촛불이 두 사람의 몸과 마음에 분위기 있는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그림자를 표정에 두르고 현승은 실연당한 슬픈 남자 연기를 시도했다. 일부러 슬프게 웃었고, 가끔 먼 곳을 응시하는 것처럼 초점 없는 시선을 촛불에 던져 넣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진짜 눈물이 났을 때, 미래는 놀랐고 현승은 더 크게 놀랐다. 아니, 슬픈 척 하는 건데 왜 진짜 슬프고 지랄이지, 우는 척만 하면 되는데 왜 진짜 울고 지랄이지. 울음은 참으려 애를 쓸수록 자꾸만 덩치가 커졌다. 훌쩍거리다 이내 꺽꺽 큰 울음이 몰아쳤고 현승은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펑펑 울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다 망하는 건데. 에이 씨. 현승은 울다 마셨고, 마시다 울었다. 미래는 그 모습을 담담히 지켜보며 조용히 제 술잔만 비웠다.

 

그리고 현승의 잠을 깨운 것은 미래의 입술이었다. 현승의 눈에 들어온 것은 미래의 방 천장이었다. 좁은 미래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은 현승이었고, 미래는 침대 아래에 앉아 상체만 현승의 상체 위로 포개고 있었다. 현승은 생각했다. 미래에게 기대다시피 하여 걸어 온 골목길의 풍경이 단편적으로 떠올랐다. 미래가 라면을 끓여줬던 것 같다. “아니, ......그게.” 침대에 누운 채 현승이 머리를 긁적였다. “잘 잤어요?” 미래가 현승의 눈앞에 가까이 와 있었다. “, , 잘 자긴 했는데, 이게......” 미래가 웃었다. “라면 먹은 거 기억나요?” “.” “내가 현승 씨한테 라면 먹고 가라고 했었어요. 그게 필요한 것 같아서. 그래서 나 부른 것 같아서. 근데, 현승 씨 정말 우리 집에 오자마자 식탁 앞에 앉더라고요.” “.....” “거기 앉아서, 라면 해준다더니 뭐하고 있냐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라구요.” “, ......” “그래서 라면을 끓였어요. 라면 먹고 가랬더니, 정말 라면을 먹더라구요.” “?” “현승 씨, 그 영화 안 봤어요?” “? 무슨 영화요?” “......아뇨. 현승 씨가 라면을 되게 맛있게 먹었어요.” “, . 맛있었던 것 같아요. 솔직히 기억은 잘 안 나지만.” “, 맛있었나 봐요. 정말 맛있게 먹었어요. 내가 끓인 라면 제일 맛있게 먹은 사람이에요, 현승 씨가.” “......” “그래서 좋았어요. 라면을 맛있게 먹어서요.” “......” “현승 씨도, 내가 좋았으면 좋겠어요.”

 

 

 

4

 

그리고 며칠이었다. 미래의 바람대로 현승 역시 미래를 좋아하게 된 것은. 유진이 던져놓고 간 짧은 시간 안에, 현승은 미래에게 사랑을 말했다. 미래는 울었다. “, 한 달 안에 현승 씨가 그 말을 해 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너무 무서웠어.” 현승이 말했다. “솔직히, 지금 이 순간 유진이보다 널 더 사랑한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어. 오래 만난 사람이고,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정말 조금만 더 있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 하나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넌 그만큼 좋은 사람이고, 이미 결정된 일은 결정된 일이니까.” 믿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기에 미래는 믿었다. 그렇지만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제보다 오늘 더 행복한 만큼 오늘보다 내일 더 불안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불안이 함께 눈을 뜬다. 그리고 현승이 와서 그 하루를 행복으로 바꾸어 놓고 간다. 오늘도 무사하고 행복했어. 하루를 마무리하는 주문처럼 되뇌며 잠을 청한다. 잠들기 전이 가장 행복했다. 행복과 불안 사이의 시공간에 쏘아 놓은 살처럼 빠르게 달력은 넘어갔다. 그리고 지금, 드디어 현승이 유진을 만나러 갔다. 한 달을 채울 땐 그렇게 미친 듯 달리던 시간이 멈춰선 것처럼 느리게 가는 좁은 방 안에서, 미래는 주문을 외고 있었다. 오늘도 무사하고 행복했어. 오늘도 무사하고 행복했어.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