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진한 글씨는 책 속에 등장하는 글귀이거나 그 변형입니다.

 

 

*

 

레코드.

시공간좌표 eXRW178736C14-67363.

동기화된 현재 시간 1836.

 

우선 오늘 획득한 음성자료를 첨부한다.

 

(번역 불가) 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구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라는 짧은 명칭 말고는 남아 있는 개인정보가 전혀 없는 이 불가사의한 문학가, , 킴이라고 부를까요. 킴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테크놀로지가 오늘날 대부분 구현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는 어쩌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상상력이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대충 비슷한 법이니까요. 그러나 그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실제로 존재했고 서술된 사건들이 현실에서 벌어졌다면 어떨까요. (청중의 탄성) , 화면을 보시죠. 지금 여러분들이 보시는 자료 중 왼쪽은 인류 구술사 아카이브 속에서 저희 연구팀이 서치한 사례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은 대변동 이전의 전자정보공간지층에 화석으로 남아 있던 데이터 조각들을 복원하여 재구성한 작가 킴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등장하는 서사구조입니다. 마더컴퓨터 내러티브 분석 시스템은 왼쪽 화면의 실존 인물 사례와 오른쪽 화면의 작품 속 서사가 98% 이상 일치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청중의 탄성, 짧은 박수, 잠깐의 정적) , 맞습니다. 인류 구술사 아카이브에는 수십억 인간의 생애에 해당하는 자료가 보관되어 있으니 특정 소설의 서사와 거의 일치하는 인생사가 기록되어 있을 확률이 있지요. 사람들의 삶이라는 게 꽤나 많이 닮았고, 대변동 이전에는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는 말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청중의 웃음) 실제로 구술사 아카이브 자료들 간에도 90% 이상 일치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그리고 사건 단위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 무궁한 우주의 역사에서 특정 사건을 단 한 사람만이 겪는다는 것이 오히려 참 희귀한 일이겠지요. 그렇지요? (청중의 대답) 그렇습니다. (정적) 그렇다고요. (청중의 웃음) , 제 설명이 부족했나 보군요. 그러니까, 킴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등장하고 구술사 데이터와 98% 이상 일치한 그 서사들은, 지금껏 우주에서 단 한 번, 오직 단 한 명에게만 실현된 희귀한 사건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청중의 탄성) 그렇습니다. 정체불명의 소설가 킴은,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오직 한 번만 벌어질 서사를 겪어내는 딱 한 명의 사람들에 관해 미리 썼습니다. 마치 그 일이 그렇게 될 것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청중의 탄성, 장내의 혼란, 변역 불가) 하다는 점에서 우리 연구팀은 오랜 시간 이런 신비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을 탐색하는데 주력했습니다. 현 시점에서 킴의 기적을 해명할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개념은 바로 아카식 레코드입니다. 아시는 분도 계시는 것 같군요. 아카식 레코드란 간단히 말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커다란 책입니다. 그러니까 신비의 킴은 이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마치 우리가 정보망을 유영하듯 그 커다란 책을 탐색하다 발견한 특별한 사건들을 소설의 외피를 입혀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이죠. 비과학적으로 들린다구요? , 그렇습니다. 비과학적이지요. 현상 자체가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에 올라서 있어서 그렇습니다. 과학은 늘 수많은 비과학들을 품어가며 몸집을 키워왔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당연한 수많은 것들이 한때는 기적 또는 마법이라고 불렸지요. 일상의 균열을 맞닥뜨린 사람들만이 세계의 진실을 뒤쫓게 되는 법이지요. 어쩌면 이제, 우리의 과학은 아카식 레코드를 접시 위에 올려 놓은 게 아닐까요? 킴의 기적이라는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말이지요. 우리가 더 탐구해 보아야 할 것은……

 

이 자료가 책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강연자는 작가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하긴, 대변동 이전 자료의 오염 정도를 생각하면 저만큼 접근한 것도 대단한 성취 같다. 이미 죽었겠지만 칭찬해주고 싶다. 작가의 이름이 김초엽이라는 것도 알려주고 싶다.

 

자료의 열람 기록 속에서 X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 지역 시간대로 30년 전, X는 이 자료를 열람하고 복사를 신청한 듯하다. 지난 세 번의 탐사에서 그의 자취를 찾지 못했으니 꽤 오랜만에 만난 셈이다. 마지막 발견에서 그와 나의 시간축 변위가 70년이었으니, 우리는 아마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듯하다.

 

X, 당신은 누구입니까.

 

 


*

 

레코드.

 

할머니.

 

저는 지금 슬렌포니아 행성계 제3행성에 와 있어요. 맞아요. 그 책의 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의 주인공 안나가 찾아가려던 바로 그 행성이요. 이 행성은 아직도 이용할 만한 웜홀이 발견되지 않아서, 블루 다이브가 아니었다면 아마 방문하기는 어려웠을 거예요. 희소광물 리커다트의 인기가 식고 동시에 매장량도 줄어들면서 이 행성은 이제 한산한 휴양행성이 되었어요. 사람들은 마음씨가 좋고 지구에서 온 사람을 경계하는 분위기도 없어요. 편안하게 며칠 묵었다가 가려구요.

 

여기도 책은 없는 것 같아요. 표제작의 행성이라 큰 기대를 하고 왔는데 말이에요. 도서관에서 기록물을 뒤져보니 과거에 이곳에 책이, 최소한 책의 흔적이 있었던 건 확실한 것 같아요. 제가 만나본 사람 가운데 몇몇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의 서사와 유사한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런 서사가 기록된 책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요.

 

할머니, 우리는 자주 이야기했잖아요. 안나가 어떻게 되었을지. 안나는 결국 우주를 멀고 먼 우주를 건너 이곳 슬렌포니아에 도착할 수 있었을까요? 워프 항법도 불가능하고 웜홀도 열려있지 않은 이곳을, 블루 다이브도 발견되지 않았던 그 시기에? 어릴 적 저는 늘 안나가 어떻게든 이곳에 도착해 남편과 아들을 만났을 거라고 우겼지만 할머니는 한 번도 제게 져주시지 않았던 거, 기억하세요? 고집스럽게 그 대목,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하는 대목을 짚으며 고개를 저으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이 행성은 공전 궤도와 주기, 자전 속도나 자전축의 각도 같은 것들이 지구와 너무 흡사해서, 저녁이면 지구의 것처럼 아름다운 노을이 져요. 언덕에 올라 해 지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알 수 없게 돼 버려요. 이 노을의 끝자락에 할머니의 도서관이 붉게 서 있을 것만 같고, 사서실에서는 여전히 할머니가, 시력개조를 고집스럽게 거부하시던 할머니가 안경테를 추켜 올리며 창 너머로 타는 붉은 하늘을 바라보고 계실 것만 같아서, 그냥 뛰어 들어가 안기면 꼭 할머니와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기쁘면서 슬퍼요. 이제 도서관에 할머니는 없고 할머니의 마인드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슬프면서 기뻐요. 얼른 책을 찾아야 할머니의 인덱스를 다시 알아낼 텐데. 언제나 도서관 안에 있는 할머니. 하지만 검색할 수 없는 할머니. 분실된 할머니. 세계 속에서 세계와 분리된 할머니, 우리 할머니…….

 

그냥 내일 다시 노을이 지기 전에 다이브를 할까 봐요.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언제가 되어도 떠날 기약이 없다는 말이니까요.

 

, . 할머니, 이 행성에서 케빈의 흔적을 발견했어요. 그것도 최초의 기록을요. 이 행성 시간대로 150년 전쯤에 케빈이 다이브를 시도한 기록이 남아 있었어요. 150년이면, 그간 찾아낸 흔적 가운데 시간축 변위가 가장 큰 기록이잖아요. 어쩌면 케빈은 이 행성에서 여행을 시작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 넓은 우주에 같은 책을 찾고 있는 다른 사람이 있고, 그 사람과 시간축 레이스를 하며 우주 곳곳에서 스치고 지나간다는 거 말이에요, 할머니. 이상하게 설레는 감정이에요. 나중에 꼭 할머니를 찾아서 이야기해 드리고 싶어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줄이는 기분이거든요.

 

, 정말, 케빈은 누구일까요, 할머니.

 

 

 

*

 

레코드.

 

시공간좌표 hXRW6511592C14-67782.

동기화된 현재 시간 0320.

 

감정의 물성은 최초엔 그야말로 형편없는 상품이었다. 마약성 물질을 방출하여 중추신경계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원시적인 작품으로, 신기술이라고 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저 어떤 감정에 물성을 부여했다는 개념 자체로 소비자들에 호소하는 일종의 유행상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냥 실재하는 물건 자체가 중요했던 것이다. 시선을 돌려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있는 물성을 감각할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인 셀링 포인트이므로.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이 다양한 색깔의 차돌들은 일종의 감정 냉장고로서 기능하고 있다. ‘즐거움이라는 상품을 예로 들면, 사용자가 부정적인 감정을 품었을 때 발산하는 특유의 뇌파를 수신한 다음, 저장된 사용자 정보를 검색하여 사용자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오감 자극을 제공한다. 사용자의 파장 지문에 일치하는 시그널을 발산하여 신체의 호르몬 기제가 활발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기능도 지니고 있다. 특히 시공간연속체를 서핑하는 블루 다이버들에게는 필수적인 물건이라 할 수 있다. 정교하지 않은 몇 번의 다이브만으로도 내가 알던 사람이 모두 사라진 시간대에 불시착할 수 있는 위험을 항시 감지하고 사는 여행자들의 감정은 정상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상품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김초엽의 작품을 기억하는 이들은 이미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마더 컴퓨터 내러티브 분석 시스템이 실제 인물과의 일치점을 찾아내지 못한 작품도 감정의 물성이 유일하다. 현재 감정의 물성을 제조하는 기업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모셔널 솔리드라는 회사가 아니다. 이모셔널 솔리드의 흔적을 찾아 이 행성으로 다이브했지만 기록할 만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 X 역시 여기에서 허탕을 치고 돌아간 듯하다. 이 지역 시간대로 20년 전.

 

X., 우리가 같은 책을 찾아 우주를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어쩌면 당신도 알겠습니다. 내가 다녀간 곳에 당신의 흔적이 없다면 그 말은 곧 그 행성에서는 당신의 시간축이 나를 뒤따라오고 있다는 이야기겠지요. 블루 다이브라는 위험한 기술에 몸을 싣고 우주의 파도를 올라타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당신과 나만큼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미끄러져 스쳐 가는 이들이 또 있겠습니까. 오늘은 어쩐지 당신에게 말을 걸고 싶었습니다. 이 레코드가 당신에게 전달되는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아카식 레코드가 있다면 그곳에는 기록이 될 테니까요. 어쩌면 김초엽과 같은 사람이 다시 있어, 당신에게 보내는 내 말을 발견해 이야기로 묶어줄지도 모르니까요. 묻습니다. X, 당신은 누구십니까. 무슨 이유로 사라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찾아 이 광막한 우주를 떠돌고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가 만날 수도 있겠습니까.

 

 

 

*

 

레코드.

 

케빈.

 

매일 할머니에게 보내는 기록을 남겼어요. 오늘은 당신에게 말을 걸어봅니다. 케빈, 안녕하세요. 우와, 되게 어색하다. 하하. 하하.

 

얼마 전 케빈의 행성에 다녀온 것 같아요. 슬렌포니아 행성계 제3행성, 맞죠? 제가 거기 들린 시간대에서 150년 전에 케빈이 다이브한 기록을 보았거든요. 케빈이 여행을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다이브할 때에 그곳에는 케빈을 아는 사람은 거의 남아 있지 않겠군요. 딥프리징을 받아 잠들었거나 우주를 다이브하는 사람들을 빼면요. 다이버라면 가장 듣기 싫어하면서도 다른 다이버들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바로 그 질문을 케빈에게도 하려구요. 케빈은 왜, 다이브를 시작했나요? 케빈을 아는 사람들, 케빈을 사랑한 모든 사람들과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를 그 외롭고 아픈 여행의 길을, 케빈은 왜 선택했나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이기에?

 

제 이야기를 먼저 할까요. 우리가 서로 스친 흔적이 케빈에게 알려줬겠지만, 나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찾아서 우주를 떠돌고 있어요. 단순한 수집욕이라면 나도 케빈도 이 미친 짓을 시작하지 않았겠죠. 이러는 게 이 우주에 우리 딱 둘뿐이니까, 나는 케빈 역시 나처럼 이 책 속 일곱 이야기 중 하나와 관련된 사람이라고 추측해 봐요. 딱 맞췄죠? 케빈은 뭔가요. 나는 관내분실이에요.

 

케빈도 읽어봤겠지만 관내분실은 망자의 시냅스 데이터를 그대로 보존한 마인드를 보관하는 도서관에 얽힌 이야기예요. 어머니의 마인드에 접속할 수 있는 인덱스를 잃어버린 주인공이 인덱스를 찾는 과정에서 어머니와의 감정적 접속점도 찾는 아름다운 단편이죠. 우리 할머니가 그 도서관의 사서였어요. 물론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서는 아니구요. 도서관은 지금도 있어요. 요즘은 마인드를 클라우드에 올려놓고 접속하는 추세라서 도서관 이용객들이 대폭 줄어들었지만, 납골함을 집에 두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마인드를 가정에 보관하는 일을 꺼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아직도 도서관은 문을 닫지 않았어요. 할머니는 그곳에서 유족이 없어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마인드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계셨지요. 혼자 있는 마인드들이 외롭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할머니는 주기적으로 다양한 마인드에 접속하곤 했어요. 정작 당신은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간다는 말을 제일 좋아하셨으면서. 후후. 그러던 중에, 할머니는 어떤 마인드와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존재를 알게 된 것 같아요. 도서관의 데이터베이스에서 관내분실 사건의 기록을 찾아보고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이 도서관이 생기기도 전에, 마인드 스캐닝이 발전하기도 전에 벌써 관내분실 사건의 전말을 본 듯이 세세하게 서술한 책이 있었다는데. 거기도 도서관은 도서관인지라, 할머니는 사서라는 직업을 최대한 활용해 그 책을 찾기 시작했어요. 30년쯤 책상 앞에 앉아 온 우주를 뒤적이다 마침내 책을 발견했고요. 도서관에 배송된 그 책을 들고 할머니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내가 태어났다고 해요. 신기하죠? 그래서 내 이름이 초엽이 되었어요. , 내 이름은 초엽입니다.

 

어린 초엽이는 그 책을 통해 말과 글을 배웠지요. 할머니는 늘 내 방에 와서 책을 읽어주셨는데, 이야기가 끝나면 꼭 다시 책을 가지고 돌아가셨어요. 한 번도 혼자 그 책을 만지게 해주지 않으시더라구요. 울며 떼를 써봐도, 이유를 물어봐도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저었어요. 나중에 할머니가 죽으면 이 책은 초엽이한테 줄게, 그때까지는 할머니 책이야, 하고 타이르기만 하셨지요. 할머니는 그 약속을 지켰을까요? 그랬다면 내가 이렇게 우주 귀퉁이에서 케빈에게 편지를 남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그 책을 우주 어딘가로 보내버리셨어요. 그리고 당신은 인덱스 없는 마인드가 되어 도서관 안으로 사라져 버렸구요. 왜 그러셨을까요? 알 수 없죠. 듣지 못했으니까. 알고 싶죠. 이유가 너무나 알고 싶어요. 그거예요. 내가 우주를 떠도는 이유. 할머니가 우주로 쏘아 올린 그 책을 찾아서, 할머니의 인덱스를 찾아낼 거예요. 할머니의 마인드를 만나서, 모든 걸 물어볼 거예요. 왜 그랬는지. 강아지가 다시 물어올 것을 알고 던지는 원반처럼, 왜 우주로 책을 던지고 나도 던져버렸는지. 나는, 아직도 할머니에 대해서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케빈의 이유는 무엇인가요. 무엇 때문에 이 차갑고 쓸쓸한 우주를, 영원한 밤바다를 헤엄치고 있는 건가요. 내가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언젠가 어디선가 우리가 만날 수 있을까요.

 

 

 

*

 

레코드

 

시공간좌표 tXRW7761444C14-67993.

동기화된 현재 시간 1700.

 

류드밀라에게.

 

안녕하세요. 케빈입니다. 안녕하시냐는 인사는 늘 어색하군요.

 

X라는 이름은 당연히 당신의 이름이 아니겠다 싶기도 하고, 어쩐지 그렇게 부르면 영영 당신을 만날 날이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멋대로 당신에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류드밀라는 공생 가설의 주인공이죠. 우리 안에 있었던 관대한 공생자의 존재를 잊지 않은 유일한 사람. 그들의 소멸된 행성을 그려내고 그들의 소멸을 슬퍼할 줄 안 유일한 사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어떻습니까, 당신에게 어울리는 이름인가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우리를 이 거친 우주로 내몰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우주 만한 이유가 있어야겠지요. 내 이유는 이렇습니다. 저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주인공인 안나의 손자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손자의 손자의 손자쯤 되겠습니다. 류드밀라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읽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안나가 슬렌포니아에 도착하기를 바랐나요? 아니면 한 줌의 외로움이 되어 우주를 영영 떠돌 거라고 예상했을까요? , 어쨌든 결말을 전해드리게 되어서 기쁩니다. 안나는 결국 슬렌포니아에, 우리의 곁에 도착했습니다. 여러 개의 우연이 겹쳤지요. 일인용 셔틀을 타고 우주로 향한 안나는 그때까지 미발견이던 웜홀을 통과해 완전히 다른 행성계에 도착했습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동면을 선택했고, 블루 다이브 기술이 발견된 이후 깨어나 슬렌포니아로 다이브한 것이지요. 그녀가 도착했을 때 슬렌포니아에는 그녀의 손자의 손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때 그는 이미 그녀보다 나이가 많았어요. DNA 매칭이 있었으니 혈연관계를 증명하는 것은 쉬웠지요. 안나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손자의 손자의 집에서 살면서 손자의 손자의 아들이 아들을 낳는 것을 봤습니다. 그게 바로 접니다. 저는 안나를 할머니이면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머니로 알고 자랐습니다.

 

저는 안나에게 그 책의 존재에 대해 들었습니다. 직접 본 적은 없었고, 안나가 그 책을 가지고 있다가 그 책을 간절히 찾는 지구의 어느 도서관으로 보냈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가봤을 때는 그곳에도 이미 그 책은 없었습니다만. 안나의 머릿속에는 그 책의 내용이 정확히 들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저는 김초엽 책 속의 일곱 작품을 안나의 구술로 들었습니다. 특히 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들었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죠. 지금 내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그 이야기 속에서 튀어나온 사람이었으니까요.

 

류드밀라가 알게 되면 정말 놀랄만한 것은 말이지요, 아무도 없는 우주 정거장에서 오지 않는 우주선을 기다리는 동안, 안나가 가장 많이 읽은 이야기가 바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사실입니다. , 맞습니다. 안나는 그 우주정거장에서 그 우주정거장에 머무는 자신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읽고 있었습니다. 슬렌포니아로 가는 우주선이 끝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결국 자기는 일인용 셔틀을 타고 가능성이 없는 우주로 내쫓기듯 걸어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안나는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주로 나가면 슬렌포니아에 갈 수 있는지, 남편과 아들을 만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겠지요. 김초엽이 거기까지는 쓰지 않았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가야만 했답니다. 그녀는 그녀가 가야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그녀는 우주로 무모한 발걸음을 내디뎠고, 이야기가 끝난 곳에서 다시 이야기를 만들어 우리의 곁으로 찾아왔습니다. 내게로 와서 자신의 이야기를 읽어주었지요. 안나는 행복하게 살다 가족의 품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제야 안나의 이야기가 끝이 났던 거지요.

 

제가 그 책을 찾아 온 우주를 뒤지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책 속에서 안나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안나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었어요.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생겨나는 남겨지는 사람들에 대해 한탄했지요. 제로의 가능성을 알면서도 우주를 향해 온몸을 내던지는 안나의 모습은 위대하지만, 그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서는 안 됐어요. 작품으로서는 몰라도, 안나의 이야기가 거기서 멈추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남은 안나의 삶을 그 작품 뒤에 덧붙이려 합니다. 그 이야기는 완결이 나지 않았어요. 안나는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사랑하며 떠났고, 우리 인류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는 사람들은 모두 그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게 내 생각이에요.

 

나는 지금 지구 근처의 마을이라 불리는 곳에 와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류드밀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이곳 시간으로 10년 전에 당신이 다녀갔습니다. 조금씩 우리의 시간축이 가까워지고 있군요. 아카식 레코드가 아니라, 실제 내 목소리로 내 이야기를 당신에게 들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요즘은 잠이 줄었습니다. 생각이 많아졌거든요. 당신에 대해서, 많이 생각합니다.

 

 

 

*

 

레코드.

 

케빈. ‘마을에 다녀갔군요. 두고 온 것이 있어서 다시 이곳으로 다이브 했거든요. 내 시간축에서는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았는데, 포뮬러 캘리브레이터에 문제가 생겼는지 이곳 사람들은 13년 만에 나를 다시 본다고 하네요. 꼬맹이들이 어른이 다 되었어요. 이곳 시간으로 3년 전에 당신이 다녀갔다고 하는 말을 들었어요. 당신은 검은 머리칼에 양쪽 눈의 색깔이 다른 사람이고, 웃을 때 덧니가 보인다고 하는군요. 자기 덧니는 마음에 드나요? ‘마을사람들은 어떤 특징도 그저 하나의 특성으로 볼 뿐이지요. 그들은 서로의 결점을 신경쓰지 않고, 때로 어떤 결점들은 결점으로도 여겨지지 않기도 하구요.

 

당신의 다이브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혹은 내 다이브가 조금만 일렀더라면 이번에 우리는 마주칠 수 있었을까요. 이 우주는 도대체 어떤 공간일까요. 아니, 대체 공간이긴 한 걸까요? 내가 이곳에서 당신에 대해 듣는 동안, 당신은 어느 곳 어느 때를 거닐고 있을까요. 닿을 듯 끝내 닿을 수 없는 것이 우리가 맞닥뜨린 우주의 구조라면, 한 뼘이 우주보다 멀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요. 찰나가 138억년보다 길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요.

 

케빈, 우주 방향으로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날이 늘어갑니다. 그곳에 있나요.

 

 

 

*

 

레코드.

시공간좌표 aXRW042젠장.

 

류드밀라. 아니, 초엽. 당신이 지금 내가 있는 이 고서점에 당신의 사진을 남기고 간 것이 1년 전의 일이랍니다. 포뮬러의 계산 밀도를 고려해보면 이건 시간 단위, 아니 어쩌면 분 단위의 어긋남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다이브 전에 했던 식사를 딱 한 번 거르기만 했어도…….

 

요즘은 내가 이 우주를 떠도는 게 책을 찾기 위해서인지 책을 찾는 당신을 찾기 위해서인지 헷갈립니다. 다이브를 할 때마다 망설입니다. 어쩌면 이곳에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건 아닐까 하고요. 안나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멈추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허접한 셔틀을 타고 우주 끝까지라도 가는 법이라고 나는 배웠습니다. , 그러니까, 이게 당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한 것은 아닌데, 아니, 또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고 그……. 그러니까, 나는, 나는 이제 지구로 향합니다. 내 단말기가 예측한 초엽의 다음 동선 가운데 제일 확률이 높은 곳이 거기군요. 내가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내 말이 들리지는 않겠지만, 부디 당신이 그곳에 있어주기를.

 

, …….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어색하기도 하고, 타이밍도 아닌 것 같긴 합니다만, ……아름답습니다. 사진 말이에요. 당신…….

 

 

 

*

 

레코드.

 

케빈. 초엽이에요. 저는 지구에 와 있습니다. 약간 지쳤달까요. 익숙한 곳에서 익숙한 풍경을 보며 조금쯤 쉬고 싶어졌어요. 책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일에는 기약도 없고, 우리는 끝없이 엇갈리기만 하는데 이놈의 우주는 생각 없이 자꾸 넓어지기만 하고……. 어쩌면 케빈이 우리 도서관에 들를지도 모르니까, 잠깐만, 아주 잠깐만 집에 머물려고 해요. 사실은 내 단말기가 케빈의 동선을 분석했는데 다음 다이브 장소로 지구가 유력하다고 해서…….

 

이곳에 오면 꼭 노을을 보여주고 싶어요. 케빈이 살던 행성에서 보던 것과 많이 닮았을 거예요. 내가 봤거든요. 어쩌면 그때 노을을 보던 장소가 케빈이 살던 곳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어떤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와 관련된 장소가 특별해지는 경험을 해본 적 있나요? 나는요, 그날의 노을이 떠오를 때마다 이곳의 노을이 좋아져요. 지구 밖을 떠돌면서 고향의 노을을 생각하면 다시 보고 싶은 마음과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이 다투곤 했어요. 우주는 사람을 변화시키니까요. 나는 우주 안에서 나를 잃어가는 나를 발견했어요. 공간이 구부러지고, 시간이 흩어지는 거대한 수렁 속을 헤매다니는 사람의 마음이잖아요. 마음이란 우주에 비하면 얼마나 작고 약한가요. 위아래도 없는 우주에 매여 둥둥 떠다니는 마음은 작은 슬픔에도 산란하고 흩어져나가요.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자리에서 분실된 여행자들이 아닐까요?

 

언제부터였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울적할 때마다 역시 우주를 방랑하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했어요. 당신의 눈은 선명하고, 턱은 단단해 보였어요. 저 무서운 우주가 덮쳐오는데도 망설임 없이 당신은 앞으로 나아갔지요. 가야 할 곳이 어딘지 다 아는 사람처럼. 당신을 생각하면 든든했어요. 나도 용기를 내서 한 번 더 다이브할 수 있었어요. 당신과 가까워지기를 바라면서. 그러면서 점점, 당신이 찾는 책이 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네요. 우습죠. 이 넓은 우주에서 단 한 번 마주친 적 없는 사람의 유일한 책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라는 게. 나도 알아요. 그렇지만 우주를 돌고 돌아 조금씩 자신을 마모시켜가는 가운데에도 단 한 번도 마모되지 않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그대로 담은 눈을 하고, 내가 여기 지구에서 당신을 기다려요. 노을이 내리는 저녁이면 언덕에 있겠습니다. 케빈, 노을을 따라, 여기로 와요.

 

 

 

*

 

레코드.

레코드.

 

시공간좌표 eXRW11……지구. 초엽, 나 지금 지구입니다.

케빈.

 

이 작은 행성에 당신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우리가 같은 대기 아래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오래 살았던 것처럼 익숙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고향인 이곳이 어쩐지 새로워요.

 

당신은 어긋남과 스침으로 이루어진 소행성처럼 언제나 멀게만 보입니다.

알아요. 우리의 그 많은 스침과 어긋남들을 모아 하나의 마주침으로 바꿀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까 나는 아직 당신을 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 우리는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람들일 거예요.

하지만 아카식 레코드가 우리를 놓치지 않았다면

하지만 아카식 레코드에 우리의 만남이 이미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첫 만남은 이미 두 번째 만남일 것이고,

오늘 우리는 처음인 동시에 두 번째 만나게 되는 셈이잖아요.

동시에 이 우주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마지막 사건이라고 나는 믿어요.

그리고 어쩌면 이 우주에서 우리와 닮은 만남은 다시 벌어지지 않을지도 몰라요.

김초엽의 소설처럼요.

우리가 찾고 있는 소설 속 이야기들처럼 말이에요.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뒤잇는 여백 속에서도 사람들의 이야기는 차마 끝나지 않고

하지만 마지막 마침표가 찍혀도 이야기가 마쳐지지 않듯

우리가 다시 책을 찾아 온 우주를 떠돌게 될 거라면,

우리가 다시 우주를 떠돌며 책을 찾아다닐 거라면,

내가 당신의 우주가 되어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내가 당신의 책이 되어 드리면 안 될까요.

빛의 속도로 건너갈 수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찬 이 우주지만,

자신의 인덱스조차 찾지 못하고 분실된 사람들의 우주에서,

다시 한번,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

 

(청중의 박수, 정적) 이제 우리 연구의 초점은 아카식 레코드가 도대체 어디 존재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지요. 그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아카식 레코드란 어디에도 없는 동시에 모든 곳에 있다는 주장이지요. 언뜻 들으면 재미있는 헛소리 같지요? (청중의 웃음) 그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시공간의 최소 단위를 하나의 알갱이라고 생각해보죠. 그렇다면 각각의 알갱이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를 것이고, 그 알갱이들의 배치들 또한 하나의 유일한 배열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배열 하나가 하나의 데이터를 의미한다고 하면, 시공간은 무한히 작은 단위로 미분할 수 있으므로 이론적으로는 우리 손아귀에 들어올 한 줌 크기의 시공간 연속체에도 무한에 가까운 양의 자료가 저장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이해가 되시나요? (정적) 하하하,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이 우주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대본이고, 우리는 그 펼쳐진 대본을 무대로 삼아 그 위에서 대본에 적힌 대로 연기하는 등장인물이라는 뜻입니다. (질문) 맞습니다. 말씀하신 바로 그 문제가 사람들이 이 학설을 받아들이는 데 가장 높은 허들로 작용하지요. 얼핏 들으면 이 학설은 그야말로 결정론의 결정판처럼 들립니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하기도 전에 어딘가에는 이미 당신이 그 일을 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면, 이 세상에 진정한 자유나 의지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일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청중의 답변, 웃음) 대단하시네요. 맞습니다.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알고 모르고가 중요하지도 않지요.

 

하지만 사고의 틀을 조금만 전환하면, 이런 이야기도 가능해집니다. , 여기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AB라고 하죠. 그런데 불의의 사고로 인해 두 사람은 각각 우주의 끝과 끝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빛의 속도로 140억 년을 달려야 겨우 만날 수 있는 광대한 우주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잖아요. A가 전하는 사랑의 말 역시 어떤 매질에 실어 보내도 빛의 속도로는 B에게 갈 수 없습니다. 그럼 그들은 이제 어떡해야 할까요? (청중의 답변, 웃음) 하하하, ,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면 되지요. 슬프지만 그게 제일 현명한 해결책일지도 모릅니다. 아카식 레코드가 없는 우주라면요. A가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B의 사진을 어루만진다면 그 사건은 아카식 레코드에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B가 술에 취해 엉엉 울면서 A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다면 그 사건 역시 아카식 레코드에 이미 기록된 사건입니다. AB를 향해 남긴 모든 사랑의 말을 아카식 레코드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습니다. B가 그 말을 직접 들었건 말건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의 미스테리한 킴처럼, 외로운 B가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할 수 있다면 그는 저 우주의 끝에서 역시 외로운 A가 던진 모든 말을 들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꽤 멋있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순 없어도, 우리의 마음은 빛보다 빠르게 우주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생각하세요. 기록하세요. 닿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우주에 여러분의 이야기를 쏘아 올리세요. 저 우주의 무한한 공백을, 이미 기록된 여러분의 이야기로 기록하세요. 인류가 이 우주에서 맡은 가장 크고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세요. 바로 지금, 이곳에서부터.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유행열반인 2020-01-28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눈물 좀 닦고...일어나서 박수 막 치다가...ㅋㅋㅋ 같은 책 읽고도 산출물 수준차가 은하와 은하만큼 머네요. 저 이 글은 앞으로 한 열 번쯤 더 읽고 싶습니다. ㅋㅋㅋ이 책이 사라지지 않아 찾으러 헤매지 않아도 되고 같은 책 읽을 수 있어 천만 다행인 우주에 살고 있구나 안도 하는 중입니다.ㅎㅎㅎ

syo 2020-01-28 22:34   좋아요 1 | URL
열몇 시간을 이 책 다시 읽고 이 글 쓰는데만 퍼부었어요.
오늘 퇴근하고 회식 있었는데 거기도 안 가고...... 애들이 형은/오빠는 대체 왜 이렇게 비싸요? 막 그러는데, 제가 정말 비싼 사람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책갈피는 손에 쥘 수 있기를 조심스레 기대해봅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1-28 2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등상금 30만 원 노리시고 올린 리뷰시죠? ㅎㅎ

글 넘 좋아서요. 1등을 응원합니다. ^^

syo 2020-01-28 22:35   좋아요 0 | URL
30만원 언감생심입니다.

.....5만원은 혹시나 하고 ㅋㅋㅋㅋㅋㅋ

무식쟁이 2020-01-28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우.야.(반말아님,혼잣말)
쇼님의 이 리뷰를 읽기 위해서 책을 읽고 올게요.
 
우리는 책 앞에서 가장 솔직해진다 - 제인 오스틴부터 프로이트까지 책으로 위로받는 사람들
안드레아 게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세종서적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 읽는 사람 syo의 솔직한 탄생 설화

 

syo는 연애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수능 본 지 한 달이 더 지났지만 syo가 갈 곳은 학교가 아니라 학원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만사가 죄 의미 없었다. 수능 다음 날부터 수능 공부를 시작했더니 어느덧 <수학의 정석 실력편> 안에 못 푸는 문제가 없어진 시점이기도 했다. 뭔가 사건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일탈! 일탈이다! 하지만 일탈이란? 그건 뭐지? 그러니까 내가 지금껏 살면서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것, 다시 말해, 내가 이제부터 그걸 할 거라고 공지하면 온누리가 , 네가 그걸 한다고? syo 네가 그것을?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다른 무엇도 아닌 그것을?” 이라며 화들짝 놀랄 만한 뭔가가 필요했다. 정석을 탁 덮고 syo는 곰곰 생각했다. 기왕이면 공부에 엄청 방해되는 걸 하는 게 좋겠어. 뭐가 있을까. 게임? 질렸어. 만화? 질렸어. ? 맛없어. 담배? 맛없어. 운동? , 생각만 해도 입에서 쇠맛 난다. 연애? 맛없……?

 

연애는 도대체 무슨 맛일까?

 

호밀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나는 연애는 잘 모르겠고, 섹스는 해봤거든? 좌중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 syo : 뭐 이 새끼야? 니가 뭘 해봤다고?

- : 지금 니 입에서 나온 그 ㅅ…… ㅅ 그거 우리가 아는 그 ㅅ…… ㅅ 그거 맞냐?

- 박곰돌 : 취소해. 취소하라고! 내 나이 스물하나, 나도 아직 못 해봤는데…… 지금이라도 아니라고 해 임마, 제발…….

- 호밀 : , 왜 재작년까지 우리 윗집에 XX여고 다니는 누나 혼자 살았잖아. 가족들 다 이사 가고.

- 좌중 : 그래, 그 누나! 돈가스 잘 튀겨주는 그 누나!

- 호밀 : 그 누나가 충남댄가 충북댄가 거기 갔댔잖아.

- 좌중 : 그래, 그 누나! 충남댄가 충북댄가 거기 간 그 누나!

- 호밀 : 그때, 대학 붙어서 충청도로 간다면서 그 누나가, 우리 집에 와서 마지막 돈가스 튀겨줬거든? 근데, 그때…….

- 좌중 : 근데! 근데, 그때! 근데, 그때?

- 호밀 : (말없이 얼굴을 붉히더니 엄지 손가락을 세운다.)

- 좌중 : (말없이 얼굴을 붉히더니 일어나서 호밀을 밟는다.)

- 호밀 : (실컷 밟혔으나 하나도 아파 보이지 않는다. 계속 웃는다.) 하여튼, 나는 그래서 연애는 잘 모르겠다 무슨 맛인지. 내가 아는 맛은 ㅅ……

- 좌중 : (지극히 분개하며 다시 일어나서 호밀을 밟는다.) , 터뜨려! 터뜨려 버려! 어차피 이 새끼는 맛을 봤다니까 미련이 없겠지. 이 배신자 놈아, 플리즈 고 투 헬…….

 

syo에게는 돈가스 잘 튀겨주는 윗집 누나 같은 게 없었고, 호밀의 말에 따르면 그런 누나가 있어도 연애의 맛을 알 수 있는 건 또 아닌 듯했다. 그러나 때마침 박곰돌 또한 연애중이었다.

 

- 호밀 : 아 근데, 형은 랭이누나도 있으면서 왜 아직 못해봤냐 ㅅ…….

- 三 : , 둘이 있겠다고 날 그렇게 집에서 내쫓드만. 내실 없다 내실 없어 우리 형.

- 박곰돌 : 야 씨, 아픈 데 찌르지 마라…….

- syo : 그러니까, 연애의 맛이 어떤 맛이냐고. 그건 말해줄 수 있을 거 아니냐.

- 박곰돌 : 그건 말해줄 수 없다.

- syo : 밟아라. (좌중 일어선다. 호밀의 눈에는 복수의 핏발이 섰다.)

- 박곰돌 : (손사래를 치며) 아니아니. 말을 안 해주겠다는 게 아니라, 말로 못 하는 거라니까? 해 봐야 알지 그게 말로 되는 게 아니라고.

- syo : 형은 랭이누나 어떻게 만난 건데?

- 박곰돌 : 나야 대학 가서 만난 거지. 그러니까……(사랑에 빠진 과정과 서투른 고백과 얼떨결에 사귀게 된 정황들을 신나서 이야기해주었는데 재미가 없었고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습니다……).

 

어쨌든 연애의 맛이란 대학생이 되어 줘야 알 수 있는 듯한데, syo는 대학생이 아니었고 비참하게도 다음 해 역시 대학생이 아닐 예정이었다. 방법이 없는 것일까? 연애, 너란 대체 무엇이건대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하느뇨…… 하던 찰나 이 입을 열었다.

 

- 三 : 내가 형한테 쫓겨나서 갈 데가 없어 가지고 도서관 가잖아. 거기 가면, 책 많다? 연애 책.

- syo : 진짜?

- 三 : , 특히 일본 소설들. 걔넨 겁나 연애만 해!

- syo : 혼또니?

- 三 : , 스고이데스…….

 

우리는 크게 혹은 작게 망할 때면 종종 이런 말을 한다. 연애를 글로 배워서……. 그건 망할지언정 연애를 글로 배울 수는 있다는 말이렸다. 그래서 윗집 누나도 없고 대학생도 아닌 syo는 정석을 책상 서랍 속 깊은 곳에 봉인하고 과 함께 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한다. 특히 일본 소설 서가를 닳도록 드나드는데……. 오늘날 알라딘에서 철학 개론서에 미친 자로 활동하는 syo의 본령은 바로 일본 연애소설이었다는 사실.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 츠지 히토나리, 요시다 슈이치,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독서의 기원이 불온합니까? 사실, 하기 전이건 하는 중이건 혹은 하고 난 후이건, 연애는 독서의 시발점으로 너무도 절실하고 효과적입니다.

 

그렇다면 독서의 쾌락적 요소가 독서의 진짜 핵심이자 원동력이 아닐까신경생물학자 게랄트 휘터는 기쁘게 배운 것(읽은 것)만이 정말로 주입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휘터는 베를린에서 열린 한 학회에서 중국 여자를 사랑하게 된 80세의 남자는 비교적 쉽게 중국어 기본 단어들을 배운다고 발표했다. "감탄은 쉽게 말해서 뇌에 거름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므로 무언가를 기억하려면 언제나 감탄이 필요하다.“ (155) 

 

 


책 읽는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는 이유

 

진정 연애를 글로 배울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소설로 배우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특히 무라카미 류가 그랬다. 이젠 이 바닥을 떠나야 할 땐가 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미 대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독서의 물길이 나쓰메 소세키에 1차 종착점을 찍고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가는 중이었으므로, 책은 연애의 지침으로써 효능을 잃었다.

 

그럼에도 책이 연애에 하등 쓸모가 없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책을 읽는공대남이라는 특성(‘많이 읽는아니고 그냥 읽는입니다)은 적용 범위가 마이너하긴 하지만 일단 먹히는 사람에겐 치명적인 매력 포인트였음이 밝혀졌고, 대충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쯤은 그런 남자에 취향이 있는 듯했다. 5:5 미팅을 나갔고, 당연하게도 다섯 명 중 한 명이 걸려들었다. , 이건 싸이언스야. syo는 생각했다. 그때는 브라이언 그린과 리처드 파인만을 읽는 시기였다.

 

책을 읽는 사람은 저는 책을 읽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보다는 높은 기본점수를 깔고 시작한다. 그 이유가 오래 궁금했다. 책 읽는 사람들은 책 읽는 사람을 아낀다. 같은 책을 읽은 사람은 자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같은 책을 읽고 다른 생각을 말해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같은 책을 읽고 같은 대목에 밑줄을 그은 사람은 사랑할 수조차 있다. 그것은 일종의 동류의식일까?

 

책을 많이 읽지 못한다는 말을 부끄러이 하는 사람들 역시 책 읽는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호감을 장착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읽지 않은 책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이 감명 깊게 읽은 책에 대해 책 많이 읽는 이가 좋은 평을 하면 신나 한다. 다음에 읽을 좋은 책을 소개받으면 저 말씀하신 책 지금 바로 사려구요,’ 하면서 즉시 주문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사람의 감정이나 지갑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어지간한 일이 아니다. 그들에게, 책 많이 읽는 이들이 지닌 아우라가 일종의 수동적 호감으로 작용하는 걸까?

 

반면에 이런 사건도 있다. 우리는 책을 많이 읽은 이에게 어느 정도의 도덕성, 편협하지 않은 마음,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줄 아는 능력을 기대한다. 책이 그저 지식의 뭉텅이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의지를 가지고 읽든 그렇지 않든, 읽다 보면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책의 효용을 어느 정도씩은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여주면 훨씬 더 큰 폭으로 실망하게 되기도 한다. 헤어져 돌아오는 발걸음에, 역시 책 많이 읽는다고 다 괜찮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구나, 하는 씁쓸한 마음이 묻어나기도 한다. 그런 판단 자체가 나의 오만이거나 내 좁은 소견으로 인한 오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별개로, 마음이 낙차를 실감하는 것이다.

 

책 읽는 사람에 대한 이런저런 호감과 기대감은 대체 어떤 이유에서 발생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솔직함일지도

 

무슈크의 친구가 홍콩에서 중국 의사에게 진료를 받았는데이상하게도 의사는 친구의 병에 관해 묻지 않고 대신 직업이루지 못한 옛사랑습관 등을 물었다그리고 끝으로 친구에게 차를 한 잔 주고 조용히 창밖을 내다봤다친구가 진료는 언제 할 거냐고 묻자 의사는 찻잔을 넌지시 가리키며 아까부터 진료 중이었다고 대답했다.

  "의사는 겸허히 환자의 말을 경청하고 걸음걸이를 살피고 앉은 자세동작손톱을 관찰했노라 말했습니다그런 다음 정중히 양해를 구하고 친구의 등 두 곳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물었습니다여기와 여기가 아프지 않나요?" (30)

 

이 책의 원제는 독일어 ”Lesen als Medizin“. 모르긴 몰라도 치유로서의 읽기’, ‘나으려면 읽어요뭐 이런 느낌인 듯하다. 한국어 제목인 우리는 책 앞에서 가장 솔직해진다는 원제로부터 멀진 않지만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정도의 거리감이 있음에도 확실히 매혹적이다. 책을 읽는 내내 솔직함에 대해 생각하게 할 만큼 막강하다.

 

위에 늘어놓은 다양하고도 비슷한 질문들을 관통하는 원리가 어쩌면 이 한국어 제목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맞다. 나는 책 앞에서 늘 솔직해진다. 솔직한 나는 아무런 가식도 없이 오직 나로서 책과 마주앉아 대화를 나눈다.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책을 읽는다는 말이 아니라,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내 안에 들어 있는 선입견, 온갖 잡스러운 감정, 이상적 자아상, 가끔은 나조차 이해할 수가 없는 주관적인 호오의 기준 같은 것들을 오롯이 품고 책과 맞부딪힌다는 뜻 이다. 그렇게 어떤 책은 삼키고 어떤 책은 뱉는다. 그렇게 독서를 마치면 다시 또 어떤 내가 되어 있다. 이것은 내가 책을 솔직하게 대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가면을 쓰고 망토를 두르고 읽은 책은 피부가 아니라 그런 외피들에 붙는다. 그리하여 그것들을 벗어던지고 거울을 보면, 그 안에는 아직 책을 읽지 않은 얼굴의 내가 들어있다. 그렇게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책으로 자기를 빚어 여기에 왔다면 그는 최소한 책 앞에서만큼은 충분히 솔직한 사람인 셈이다. 책 앞에서 나를 나로서 있게 하는 사람들. 우리는 책을 많이 읽는 이들이 그런 이들이기를 알게 모르게 기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앞에 앉은 독서가들이 사랑스러우면 사랑스러운 대로, 실망스러우면 실망스러운 대로, 그것이 그들이 가진 그들로서의 모습임을 더 선명하게 직감하게 된다.

 

솔직함, 그리고 솔직함을 향한 기대. 읽는 사람이 겪고 겪어내야 할 이런 감정들은 어쩌면 치유로서의 읽기에도 전제조건은 아닐까. 중국 의사가 등을 눌러 아픈 곳을 짚어낼 수 있도록, 우리는 더함도 뺌도 없는 우리로서 책 앞에(그리고 가끔은 사람 앞에도) 나서야 한다.

 



하여 결국 우리는

  

어떤 책은 사람을 다정하게 만든다. 또 어떤 책은 사람을 선명하게 만든다. 또 어떤 책은…… 이 모든 게 책이 혼자 하는 일이라면 책만큼 위대한 것이 없었을 텐데. 그러나 책은 사실 우리 앞에서 우리를 솔직하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솔직하게 다정해지고 선명해지고 그런다. 같이 하는 일이다. 그래서 책도 우리도 완벽하게 위대하지 않다.

 

뻔하지만, 책을 읽는 사람에겐 항상 울림을 주는 두 개의 구절로 마무리하자.

 


제인 데이비스가 내게 설명한 것처럼 문학에는 실질적인 효용이 있다모든 사람이 책을 읽는다면 세계가 더 나은 곳이 되리라고그녀는 확고하게 믿는다책을 읽는 사람은 상호 간에 그리고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법을 배우고 더 공감하는 삶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92)

 

그러나 문학의 세계는 작가의 창의성과 상상력만으로 만들어지지 않고다음 단계로서 독자의 내면에서 재생될 때 마침내 완성된다. "잘 읽으려면 잘 지어낼 줄 알아야 한다."라고 미국 철학자 랄프 월도 에머슨이 말한다그러므로 작가와 독자 모두 창의적이어야 한다작가는 허구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독자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그러니까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재구성하거나 더 생생하게 재생하기 위해. (147)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5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쟝쟝 2019-12-29 19: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와........ 글도 책도 찐이다... ㄷ ㄷ .....

syo 2019-12-31 08:46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언제나 먹히는 친구팔이

반유행열반인 2019-12-29 19: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거 이달의 우수 리뷰 당선입니다. 내 마음대로ㅎㅎㅎ. 책 읽는 사람도 그 사람의 솔직함도 이 책도 참 좋은 것 같아요.

syo 2019-12-31 08:47   좋아요 1 | URL
반님 시상 이달의 우수리뷰, 배부릅니다 제맘대로요 ㅎㅎㅎ

stella.K 2019-12-29 19: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갠적으로 책 제목이 좋긴한데 딱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아요.
책을 너무 믿도록 만드는 것 같아 오히려 거부감이 든다고나 할까?
독서 에세이는 이제 너무 많이 나왔고.
물론 또 이렇게 말은 하지만 누가 이 책을 선물해 주거나 중고샵에서 싸게 살 수 있다면 분명 혹하간 하겠죠.
책 읽는 사람이 호감이 가는 것도 사실이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그런가 보다해요.
말처럼 책 많이 읽는다고 인격이 좋은 건 아니니까.

앜, 뭐야? 내가 왜 이러지...? 막 삐대고 있잖아요.ㅋㅋㅋㅋㅋㅋ
아무래도 스요님 리뷰를 넘 잘 써서 질투하고 있나 봐요. 내가.ㅎㅎㅎㅎ

syo 2019-12-31 08:52   좋아요 0 | URL
세상엔 읽을 책이 잔뜩잔뜩 있으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책만 읽어도 어쩜 충분할지도 모르겠어요.
스텔라님은 늘 스텔라님께 맞는 책을 잘 찾고 잘 읽으시니까 ㅎㅎㅎㅎ
칭찬 말씀만 접수하는 것으로. 으하하하

붕붕툐툐 2019-12-30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첨 보는 책인데 리뷰를 읽고 책이 읽어지고 싶다니..글의 힘은 정말 대단한 거 같아요~ syo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새해에도 리뷰 많이 많이 써주세요!!:)

syo 2019-12-31 08:52   좋아요 0 | URL
붕붕툐툐님 올해도 이래저래 감사했습니다. 남은 연말 잘 보내시고,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비종 2019-12-31 0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력적인 리뷰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편안한 몰입감으로 정독했습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사설같은 느낌도 들구요. syo님의 글은 읽는 이를 기분좋게 하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주 찾고 댓글을 남기게 되나 봅니다. 울적했는데 한결 나아졌습니다. 솔직한 글 앞이라 솔직해지나 봅니다. .

syo 2019-12-31 08:54   좋아요 0 | URL
나비종님이 달아주시는 찌이인한 댓글을 앞에 두면 몸둘 바를 모르겠고 그렇습니다 ㅎㅎㅎㅎ 올 한해 고생많으셨습니다. 모쪼록 내년에도 좋은 시 많이 많이 올려주세요^-^

나무처럼 2019-12-31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쇼님 때문에(덕분에) 산 책이 몇 권이더라?
쇼님 정말 나빠요.ㅋ

syo 2019-12-31 12:03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아유 참, 장바구니에 담으시는 분들께 죄송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제가 이러이러하게 읽었단 말씀까지만 드리고 싶습니다. 책 자체가 엄청 훌륭하다, 후회 없으실 거다, 이런 말씀을 드릴 만한 정도는 또 아니지 않을까 해요 ㅎㅎㅎ

monicalim75 2020-01-06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력적인 후기네요. 책도 궁금하지만 후기를 쓰신 분이 더 궁금해지는 솔직하고 멋진 후기에요. ^^

syo 2020-01-06 22:57   좋아요 0 | URL
과찬이세요. 책에 대한 정보보다 개인정보를 더 많이 실어야 겨우 한 바닥의 글을 쓰는 정도입니다. 읽는 분들이 좋게 봐 주시는 거지요^-^ 감사합니다, monicalim75님.

2020-01-08 1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12 1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tintin2506 2020-01-08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공대생 출신이셨어요? 인문대생 출신은 막연히 부럽네요 가보지 못한 길 ㅋㅋ

syo 2020-01-12 17:30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가봤으나 이미 다 잊어버린 길이랍니다. 뭐 하나 기억이 안 나네요.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한때 이런저런 명화들을 갖다가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박아놓던 때가 있었다. 어찌나 부지런을 떨었던지 매일매일 새 그림을 찾아내어 성실하게 프사를 바꿔댔다. 처음에는 알려진 화가의 알려진 그림을 택했지만 그런 그림은 얼마 못가 고갈되었다. 그래서 알려진 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그림이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알려진 그림, 심지어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그림까지 꽤 의욕적으로 찾아다녔던 기억이다. 카톡 세상에서는 syo가 프사를 뭘로 바꾸건 얼마마다 바꾸건 그딴 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막상 오프라인에서 만나면 전혀 뜻밖의 인물이 관심을 표하는 경우가 많아서 놀랐다. 형 때문에 새로운 그림을 알게 된다니까? 그래? 난 지금 새로운 널 알게 되는 것 같아……. 무엇보다도 잘난 척하기에 아주 그만이었다. , 그 눈깔 한개 달린 그 그림 그거 뭐냐? 은근 좋던데? , 또 우리 고객님 또 그런 그림 좋아하시는구나? 아유 안목 좋으시다, 그 그림 그게 또 인상파 애들 한참 인상 쓰고 어깨에 힘 빡 주고 다니던 시기에도 또 꿋꿋이 독고다이 상징주의 외길 걸으신 선생님의 작품으로써 말입니다잉?

 

 

 

2

 

그런 정황 속에서도 프사로 삼지 못한 그림이 하나 있었다. 받아는 놓았으나 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돌아서야 했던, 관심받기는 물론 잘난 척 하고 싶은 불같은 욕망조차 그 앞에만 서면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드는 어마무시한 녀석이. 분명히 유명 작가의 유명 그림인데도, 이 그림을 카톡 프사에 올림으로써 내가 하고 있다고 오해받을지도 모를 어떤 주장의 무게와 쓸데없이 감당해야 할 통념의 공격력을 예상해보니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 그림. 이런 그림을 병인양요 시절에 머스킷으로 시민들 탕탕 쏘아대는 나라에서 그릴 수 있었다니, 정말 전 당신께 존경밖에 드릴 게 없잖아요, 쿠르베 선생님…….


그랬는데 syo가 한때 그렇게 사랑했던 쿠선생님은 알고 보니 이런 분이셨다고.

 

 쿠르베는 취미로 주식거래에 손을 대던 사회주의자(대개 마르크스주의로 나아가는 특징을 지닌 이들로 여겨지는)였으며 땅에 대한 욕심이 남달랐다마찬가지로 이상향을 향한 신념이 있었는데도그가 여성을 대하는 태도는 사창가와 정부분별없는 청년들의 향락으로 특징지어지는 그 시대와 계층의 냄새를 물씬 풍겼다그런 까닭에 그는 "여자는 딴생각 말고 양배춧국이나 끓이고 살림살이나 신경 써야 한다"고 보았다그런가 하면그 같은 감상을 조금 더 드높여 기개 있는 금언을 만들었다. "숙녀의 임무는 남자의 사색적 합리성을 감정으로 교정하는 것이다." 그는 이따금씩 예술을 하느라 결혼할 시간이 없다고 공공연히 말하면서도 또한 이따금씩 결혼하려고 애를 썼다. 1872그는 같은 프랑슈콩테 지역 출신의 젊은 여자를 배우자로 점찍은 뒤 중매쟁이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나 자기 집안은 여자 쪽과 사회적 배경의 차이가 있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며 거만하게 말하고는 분별없게도 다음과 같이 늘어놓았다.

 

 촌사람들이 어리석은 조언을 할지도 모르지만그렇다고 해서 레옹턴 양이 내가 주려는 화려한 지위를 거절하리란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레옹턴 양은 의심할 여지없이 모든 프랑스 여자들의 부러움을 살 것이며열 번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자리를 얻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내가 마음만 먹으면 어떤 프랑스 여자라도 아내로 맞을 수 있으니까요. 

 

 자만의 응보를 믿는 사람이나잘 만든 일일 연속극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똑같이레옹턴 양이 프랑스 여자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신부가 되기를 거절했다는 사실을 알면 만족스러워 할 것이다쿠르베는 자기를 밀어낸 시골의 어느 경쟁자와 "지능은 그들이 키우는 소 정도 되지만 돈으로 치면 소만큼의 가치도 안 되는 뻔뻔한 촌뜨기들"에 대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97-98)

 

 

 

3

 

동네 인근에 쫄쫄쫄 흐르는 도랑을 산책할 때도 쿠션 살아있는 운동화를 골라 신는 법인데, 하물며 미술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산책할 때 아무런 준비 없이 덤벼서는 될 일이 없다. 아무리 그 산책이 사적인 미술 산책이라 하더라도. 그런데 우리는 미술을 너무 모른다. 학교를 졸업하면 미적을 까먹듯이 미술을 까먹는다. 미술가는 잘 몰라도 무식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들 잘 모르니까.


대화 1

Q. 고흐?

A. 알지.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Q. 고갱?

A. …… 고흐 동생인가 그렇지? , 아니다, 형이다 형.

 

대화 2

Q. 레오나르도 다 빈치?

A. 모나리자.

Q. 미켈란젤로?

A. 천지창조.

Q. 라파엘로

A. , 알았는데, 걔 유명한데…….

Q. 도나텔로

A. …… 닌자 거북이?

 

대화 3

Q. 풀밭 위의 점심식사?

A. ……마네?

Q. 올랭피아?

A. ……모네?

Q. 수련?

A. ……마네?

Q. 피리부는 소년?

A. ……모네?

Q. 건초더미?

A. ……마네?

Q. 너 지금 순서대로 대답하냐?

A. ……모네?

 

이것들 중 딱 하나는 정말 실제로 벌어진 대화를 소름 끼치도록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온데…….

 

 


4

 

이토록 평범한 인간 syo에게 미술 근처를 사적으로 산책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일은, 요원하지만 포기하기도 어려운 멋진 꿈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미술에 대해 알려준다기보다는 미술을 산책하는 신뢰할만한 방법에 대해 알려주는 쪽에 가깝다. 그러니까 나라별 시대별 미술 사조를 좌르르 꿴다거나, 알려진 화가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나 알려지지 않은 화가의 알려진 작품에 숨겨져 있는 스토리들을 파헤친다거나(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까지 신나게 통달했다면 셋 중 하나일 공산이 크다. 업자, 수집가, 아니면 그림변태), 지식 프레젠테이션 용으로 몇 개의 그럴싸한 그림 해석을 암기해놓는 그런 방식 말고, 하나의 작품과 그 작품을 만든 미술가의 삶에서 오늘 이곳에서의 내 관심사와 맞물리는 소소하고 개인적인 접점들을 찾아내는 방식을 잘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까. 그러니까 이렇게 써도 결국 이렇게 쓰지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쓰긴 해야겠다는 느낌. 저곳에 도착하지는 못하더라도 저곳을 향해 가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 북극성을 따라간다고 북극성까지는 못가겠지만 그래도 북극까지는 가서 북극곰하고 콜라 한잔 하고 올 수는 있겠다는 마음.

 

 

 

5

 

미술가의 삶은 미술가의 작품만큼이나 놀랍거나 아름답거나 기이하거나 경탄을 자아내거나 한다. 미술가의 작품이 예술이듯이 미술가의 삶 또한 하나의 예술로 독자에게 다가오는 법이다. 비약해서 다시 말하면, 작품을 우리에게 선사하는 이가 예술가이듯이 그들의 삶을 우리에게 선사하는 사람 또한 예술가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 작업을 맡길 사람으로 줄리언 반스 정도의 거장을 데려오셨다면, 아 이놈의 무지렁이는 그냥 믿고 앞으로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요.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7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9-12-03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도 읽어야겠다. 너무 좋다. 나도 읽을래요. 다른 것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그림에 있어서도 무식한 저는 이 책을 읽으면 너무 좋을것 같아요. 그리고 줄리언 반스 잖아요? 리뷰도 재미있고 책도 막 관심 생긴다. 훈늉한 리뷰입니당!!

땡투땡투~

syo 2019-12-03 15:51   좋아요 0 | URL
어쨌든 줄리언 반스니까요.
그거 하나면 뭐 일단 손해 날 일은 없다.

재미 없으면 내가 무식해서 재미 없는 거다. 근데 재미가.... 하하하. 재미있다 재미있다. 하하하. 하하. 하... 이런 식으로라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재미 있어요. 재미 있단 말이에요. 하하하. 하하. 하.

잠자냥 2019-12-03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줄리언 반스를 좋아하면서도 이 책은 패스하려고 했었는데, 이 글 때문에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syo 2019-12-03 21:46   좋아요 0 | URL
정말요?? 가뜩이나 읽을 책 많은 세상에 제가 괜히 안 읽으셔도 될 책 읽으시도록 뽐뿌넣은 건 아닐까 우려도 되지만, 뭐 잠자냥님도 잘 아시다시피 줄리언 반스니까요 ㅎㅎㅎ 즐거운 독서 되시기를 바랍니다^-^

blanca 2019-12-03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는 정말 훌륭합니다. 짝짝짝.

syo 2019-12-03 21:4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ㅎㅎ 헤헤 칭찬 받았다.

반유행열반인 2019-12-04 0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술은 하나도 모르는데요. 며칠 전 그냥 딱 생각나서 폰 잠금화면을 저장되어 있던 고흐 그림으로 착 바꿨어요. 별이 막 떠 있고 그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그나저나 못 걸어둔 쿠르베 그림 궁금하다...이참에 프사도 바꾸시고 여기도 하나 척 첨부해주시(거나 저한테 따로 아 왜 궁금하)죠? 야, 그 눈깔 한개 달린 그 그림 그거 뭐냐

syo 2019-12-04 07:58   좋아요 2 | URL
쿠 선생님의 그 그림은 알라딘이나 북플처럼 프사가 작게 보이는 공간에 올리면 더 사진처럼 보이는 바람에 아주 심각한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답니다..... 미친 놈 아니면 뭔가 주장하는 놈이 되는 건데, 전 아직 충분히 미치지도 못했고 딱히 주장하고 싶은 것도 없어서요 ㅎㅎㅎㅎ 한 번 검색해 보시고 나면 아차 하실 거예요. 병인양요는 1866년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12-04 11:11   좋아요 1 | URL
아아...무식한 제가 검색이라도 부지런할 것을...저도 아는 그 그림이군요ㅋㅋㅋsyo님 예술 감각과 유머에 부합하지 못한 채 본의 아니게 결례가 많았습니다. 프사는 역시 분노의 포도알갱이죠....(숨는다...딴청...)

Comandante 2019-12-04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쿠르베 그림은 혹시 라캉 집에 있는 그림인가요 ㅎㅎ
syo님 덕분에 좋은 책 하나 더 알고 갑니다.

syo 2019-12-04 11:00   좋아요 1 | URL
바로 그렇습니다 ㅎㅎㅎ 역시 Comandante님의 식견은!!
저는 그 사실을 이 책에서 읽고 알게 되었답니다.
 
의식의 85가지 얼굴 - 후설 현상학의 주요 개념들
조광제 지음 / 글항아리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안녕, 친구들? 철학 꼬꼬마들을 위한 숨은 명저 소개 시간이야. 나는 알라딘에서 분노의 포도알갱이를 맡고 있는 syo라고 해. 사람들은 나를 미친 개론서 덕후, 줄여서 미개덕이라 부르나 봐. 미개하고 좋은 별명이야. 신난다.

 

오늘 syo가 여러분에게 팔아먹을, 아차차, 소개할 책은 바로 조광제 선생님의 2008년 작, 의식의 85가지 얼굴이란다! 어때? 제목부터 섹시하지? 해리 포터 쌈 싸먹을 아광속으로 전 세계를 돌며 실컷 팔아먹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떠오르지 않아? 하지만 슬프게도 그 책과는 달라. 달라도 너무 다르단다. 조금이라도 비슷했다면, 그레이처럼 5페이지마다는 아니더라도 한 50페이지 정도에서 한 번이라도 해줬(?)으면, 그랬다면 친구들아, 친구들도 알았겠지, 이 책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말이야. 근데, 친구들, 어때? 몰랐지? 처음 보지, 이 책? 각설하고,

 

제목을 보면 무슨 심리학책이거나 정신분석학을 다룬 책인 것 같지만 사실 이 책은 현상학이라는 철학 분야의 창시자인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에 대한 개론서야. 현상학이란 말, 다들 한 번씩 들어봤지? 이런, syo가 우리 친구들을 너무 무시했구나. 이런 쪼다같은 질문이나 던지고. 당연히 다 알겠지, 현상학. 상식이잖아? 초등학교에서 구구단 9단까지 다 배우고 나면 선생님이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9단까지 외웠으니 이제 현상학을 배워볼까? 하면서 다 가르쳐주시잖아. 구구단 배우고 현상학 배우고 나눗셈 배우잖아. 그 다음에 분수 배우고…… 표정들이 왜 그래? 내가 무슨 천하의 개소리라도 하는 것처럼…… , 안 돼. 농담이었어. 돌아와 친구들아! 각설할게…….

 

그럼 우리, 현상학이 무엇인지부터 이야기해 볼까? 현상학이란 말이야, 현상에 관한 학문이야. , 친구야, 지금 노려봤어? 더 말해 줄게. 현상한다는 것은 어떤 사물이나 사태가 우리 의식에 뿅! 하고 등장한다는 뜻이야. 아야, 던지지 마. 더 말해 줄까? 그렇다면 Insert Coin…… 역시 농담이었어. 이제 안 가는구나? 그럼 우리 의식에 뿅! 하고 등장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뭘 배워야 하는 걸까? 그게 현상학의 핵심 질문이지. 예를 들어, syo가 코를 잘 파서 둥글고 노릇노릇한 코딱지 하나를 꺼냈다고 생각해 봐. 물론 실제로 파지 않았어. 믿어 줘. 못 믿겠다고? 맞아. 못 믿을 노릇이야. 내 앞에 파놓은 저 코딱지가 진짜 코딱지야? 코딱지라 부르기 위해 응당 갖춰야 할 것들은 무엇이지? 이 코딱지의 윗면, 아랫면, 좌우 측면을 확인할 수는 있는데, 코딱지의 전체적인 실체는 한 번에 지각할 수 없잖아. 그렇다면 내가 의식하는 코딱지와 지금 눈앞의 코딱지가 일치할까? 코딱지를 판다는 행위의 의미는 무엇이지? 내 의식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었기에, 방금 코딱지를 판 놈이 지금 나하고 같은 인간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지? 뭐 이런 것들이 현상학에서 생각할 수 있는 질문 가운데 극히 일부분이라고 할까. 재미없었지? 재미없으면 각설하자.

 

후설 선생님 같이 배운 분이 저런 고민들을 해결하는 데 한평생을 바치는 걸 보면, 뭐랄까, 식자우환이랄까, 무서워서 코도 함부로 못 파겠어. 손가락에 묻은 코딱지를 보며 세 시간씩 사색에 잠기는 모습을 상상해 봐. 차라리 못 배우고 고민 없이 살다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싶기까지 해. 그렇지만 뜻밖에도 그들만의 리그에서 저런 질문들은 수천 년을 이어온 핵심질문들이었나 봐. 그 질문들에 대해 독창적인 해석을 만든 철학자들이 모여 하나의 분야를 이루거든. 구조주의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분석철학이니 하는 무시무시한 것들 있잖아. 그 가운데 하나인 현상학이 후설 쌤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하니, 엄청 위대한 사람 아니겠어? 데리다라는 사람 알아? 그거 아주 무서운 인간이야. 읽다 보면 책을 완전 해체해버리고 싶게 만들거든. 그 사람이 학위논문 겸 최초 저작으로 낸 책이 후설 철학에서 발생의 문제라는 제목이야. 레비나스라고 들어봤어? 데리다보다 한 세대 정도 위의 철학자인데, 이 사람은 실제로 후설쌤 밑에서 배웠나봐. 이 사람은 후설 현상학에서의 직관 이론이라는 책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해. 사르트르라는 또 다른 유명한 사람이 있지. 어느 날 친구 레몽 아롱이랑 여친 보부아르랑 카페에서 수다를 떠는 중이었는데, 이노무 레몽 아롱새끼아차, 미안 미안, 이 친구 레몽 아롱이가 자기보다 먼저 현상학이라는 것에 대해 배우고 거들먹거리더래. 자존심이 상해가지고 아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서점에 달려갔다지. 현상학에 관한 책을 싹 다 내놓으시오! 그랬더니 점원이 뭐지 이 찐따는, 하는 표정으로 서점을 뒤지고 뒤지더니 꼴랑 레비나스의 저 책 하나 주더래. 사르트르는 그 후 1년을 꼬박 현상학에 목을 맸대나 봐. 어지간히 지기 싫었나 봐. 헤겔, 후설과 함께 3H(반드시 3 Hell의 약자일 거야)이라 불린 하이데거가 후설의 조교 출신이라는 사실은 유명하지. 후설 쌤의 위상이 뭐 이 정도야. 근데 우리 친구들은 후설 쌤을 잘 모르잖아. 그치? 헤겔이나 하이데거는 다들 한 번씩 들어봤을 거야, 그치? 그런데 3H로 함께 묶인다는 후설 쌤은 왜 이렇게 인지도가 떨어지는 걸까? syo도 그것이 알고 싶어. 각설하기 전에,


이런저런 책을 읽다보면 말야, , 이제 내가 철학에 관한 책도 좀 읽어야 되지 않을까 싶은 때가 오잖아. 그런 기분, 한두 번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있지만, 마주칠 때마다 점점 더 큰 부담으로 다가 오고 그러지 않아? 그러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울며 겨자 먹기로 철학책 서가를 기웃기웃 거리게 되는데 말야, 책 고르기가 너무 어렵잖아! 철학자 고르기도 너무 어렵고! 누구를 읽으려면 누구를 읽어야 한다는데, 그 계본지 족본지 그것도 잘 모르겠고! 그럴 때 친구들아, 너희들의 곁에는 알라딘의 미개덕, 누가 미더덕이래? 알라딘의 미개덕, syo가 있잖아. 알려 줄게. 내가 철학에 관심은 있는데 큰 관심은 없다, ! 내가 철학에 관심은 있는데 시간은 없다, ! 내가 철학에 관심은 있는데 의지는 없다, !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철학에 관심은 있는데 기본 소양이 없다, ! 손든 친구들아, 개론서의 세계로 온 것을 환영해. 한국에서 개론서로 공부하기 좋은 철학자 세 명을 알려줄게. 바로 마니프야.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순서대로, 마르크스-니체-프로이트지. 마니프에서 시작하렴. 얘들 관련해서는 정말 배운 거 하나 없이 밑바닥에서 시작해도 꽤나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을 만큼 많은 책들이 나와 있거든. 수준별 단계별 학습도 가능한 실정이야. 물론 이 세 명을 권하는 것이 단지 개론서가 많다는 이유 때문은 아냐. 자체로 중요한 사람들이거든. 철학사가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시점에 위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세 명이지. 그래서 개론서도 많은 거고. 알겠지? 이 세 명에서 한 명을 더 덧붙인다면 우선 푸코를, 그리고 한 명 더 권할 기회를 준다면 후설 쌤을 추천할게. 푸코는 뜻밖에 푸코만 가지고도 웬만큼 읽어지고, 후설은 앞이 없거든. 후설이 시작이야. 현상학의 시작. 선행학습이 없어도 되는 철학자라는 게, 야매로 철학공부 하는 사람들한테는 굉장히 메리트 있는 특징이거든.

 

물론 눈을 가늘게 뜨고 찾아보면 후설 앞도 있어. 현상학을 똑바로 이야기하려면 후설에 앞서 브렌타노라는 사람을 이야기해야 한다더라. 브렌타노라니, 들어는 봤어? syo는 미취학 아동일 때 그런 이름의 상표가 붙은 티셔츠를 입었던 기억이야. 노랑색 갈색 줄무늬였는데, 참 아끼던 티셔츠였지……. 브렌타노 검색하면 책 한 권 나와. 의미 없다는 이야기야. 그게 의미 있는 사람들한테는 의미가 있겠지만, 우리한테는 그 사람들조차도 의미가 없는 게 현실이야. 대체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겠어? 또 플라톤이야? , 생각해 봐. 내가 내 여친 하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단군할아버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싸그리 사랑하는 게, 과연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일이겠냐고. 각설하고,

 

사실 후설에 대해 땅바닥부터 공부하기에 좋은 책이 거의 없다시피 한 실정이야. 후설 냄새 좀 맡아본 사람들이 읽을 만한 책은 생각보다 탄탄하게 구비되어 있어. 심지어 후설의 자신의 저작은, 헤겔이나 하이데거보다 훨씬 더 많이 번역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 주저라 할 만한 것들은 거의 다 번역이 되어 있지.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알려줄까? 그 많은 후설의 저서들을 이종훈 선생님이 거의 도맡아 번역하고 있다는 거야. 검색해서 이걸 찍어도 이종훈, 저걸 찍어도 이종훈, 이종훈, 이종훈, 이종훈이야. 사물과 공간이라는 책만 빼면 전부 이종훈 선생님의 이름을 달고 있지. 이종훈 선생님께 보약이라도 한 첩 지어 올리고 싶은 심정이야. 왜냐고? 그 이유는 더 놀라워. 바로 후설이 범인이지. 후설은 생전에 4절지 크기 4만장의 원고를 남겼대. ~ 4만 장. 하루에 한 장 쓰기도 빡센데. 229일은 쉬어주고 하루에 한 장씩 쓰면 4만 장 쓰는데 109.589년이 걸리지. 심지어 4절지는 한 장 넓이가 A43장도 넘어. 심지어 잡소리 없이 철학적 내용을 담은 원고로만 그랬대잖아. 지금 이 A4 3장정도 되는 뻘소리를 쓰기 위해서 syo가 얼마나 낑낑대고 있는지, 친구들아 아니? 지금도 세계 모처의 어둠 속에서 후설 전집이 30권인지 40권인지를 돌파하고 계속 간행되고 있대. 하늘이시여, 제발 이종훈 선생님의 120살 생신잔치에 축하 떡을 보낼 수 있게 허락해 주소서……. 각설하고 다시,

 

사실 후설에 대해 쌩판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하기에 좋은 책들이 그다지 없는 실정이야. 이 책 역시 그런 면이 있어. syo에게는 말야, 국내 출간된 이런저런 개론서들을 뒤지고, 그러다 개론서한테 뒤지고, 이해가 안 되는 개론서들을 내동댕이치고, 그러다 이해가 안 되는 자신을 내동댕이치고, 정신이 들면 다시 또 읽고, 그러다 정신이 나가면 다시 또 울고, 이런 애달픈 반복을 통해 근본은 없지만 알게 모르게 확보해 놓은 후설에 대한 선이해가 있었어. 그 덕에 이 책 의식의 85가지 얼굴이 얼마나 좋은 책인지를 느낄 수 있었지. 이 책은 후설의 개념들을 따박따박 개념 단위로 설명을 해 주거든. 뭐랄까, 정리가 잘 되어 있는 참고서 같달까? 철학 분야에는 뜻밖에 그런 식으로 다소 유치할 정도로 조목조목 알려주는 개론서가 드물어. 일본에서 건너온 애들이 그런 건 잘하지. 이것이 핵심이다! 이것만 알면 5분 안에 철학사를 정리해서 발표할 수 있다! 이걸로 당신은 승진과 사랑을 모두 쟁취할 수 있다! 뭐 그런 멘트들이 표지나 띠지에 떡 박혀있는 책들 말이야. 낯부끄러운 줄도 모르나, 어디서 약을 팔어 팔긴- 싶으면서도 사실 도움이 될 때가 있긴 하거든. 잘 모를 때는 더욱 그렇지. 이 책은 당연히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서, 후설이 사람 이름인줄도 몰랐던 친구들에게는 이 책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일거야. 그런 친구들은 준비운동이 조금은 필요해. 도서관에 가면 한 권에 여러 명의 철학자들을 짧고 간단하게 다루는 종류의 철학책들이 많아. 그런 책들에서 후설이나 현상학에 관련된 꼭지들을 발췌해서 읽으면 조금은 친해질 수 있을 거야. 도서관에 들를 때마다, 잠깐씩 시간을 내서 한 꼭지 읽고 돌아오는 여유를 부리면 어떨까? 지금 이 글이 페이퍼였으면 그런 책들을 주욱 나열해 줄 텐데, 이 모양 이 꼴이라도 이게 지금 리뷰란다. ~~ ~~

 

이 글에서 후설의 이론에 대해 조금이라도 개론해주기를 바랐던 친구들이 있다면, 반성의 댓글을 달도록 해. 그러지 않을 거야. 개론서를 개론하는 건 슬픈 일이거든. 그게 가능하다면 개론의 개론의 개론도 가능하겠지. 개론의 개론의 개론의 개론도 가능할거야. 그러다 결국 딱 한 줄로 줄어들어 버리면 좋을까? 아마 싫을 걸? 봐봐. 현상학이란 말이야, 현상에 대한 학문이야. 어때? syo가 아까 이렇게 말했을 때 친구들, 날 죽일 듯이 노려봤잖아? 이 말을 사전이 그러는 것처럼, 현상학은 세계와 그 내부의 다양한 실재적 또는 상상적인 대상의 존재를 세계가 그러한 것으로서 우리들에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과 그 구조를 통해서 연구해가는 학문이다- 라고 길게 말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친구들아. 나아지려면, 우리가 읽어야 해.

 

오늘은 이쯤에서 각설할까? 하도 여기저기 각설했더니 각설이라도 된 기분이야. 앞으로는 미개덕보다 각설이라고 불러줘도 좋겠다. 별명이 많이 생기는 건 좋은 일이잖아? 야구판에는 별명이 하도 많아서 별명이 김별명인 선수가 있는데 말이야, 각설할까?

 

그럼 철학 꼬꼬마 친구들, syo는 다음 시간에 다른 책을 팔러, 아니아니, 소개하러 다시 돌아올게. 죽지도 않고 또 오는 각설이처럼. , 인사할까? 친구들, 안녕~~~~~


 

나라고 해서 이렇게 살고 싶겠니? 

 


댓글(26) 먼댓글(0) 좋아요(6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의과도기 2019-10-23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설의 이름은 철학 입문서에서 두어번 접한 적이 있습니다만, 후설의 철학적 위상을 이토록 간명하게 이해시켜 주시다니... 정말 탁월한 글이어서 다른 읽을 책을 제쳐두고 도서관에서 언급하신 책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문체와 글의 흐름이 너무 맛깔나고 자연스러웠서 좋았습니다. 유튜브 클립을 보는 듯한!

(쓰고 보니 낄끼빠빠 못하는 비평가처럼 적었습니다만... 그만큼 좋은 syo님의 글 중 유독 좋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syo 2019-10-23 08:50   좋아요 0 | URL
과도기님 과찬이십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겉핥기 정보를 잔재주로 부풀려서 쓴 리뷰예요. syo의 글이 언제나 그렇듯이요 ㅎㅎㅎㅎㅎ

좋은 책인데, 폐가 아닐지ㅎ

반유행열반인 2019-10-23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기립 박수 치고 눈물 닦고...) 출판사님, 무덤에 계신 후설 선생님, syo에게 입금하세요. 계좌는 이 아래에 달릴 겁니다.
(지금 수많은 알라디너가 주문하기를 누르고 절판 서적을 찾아 도서관으로 달려가 후후후후후설이요! 를 외치고 있습니다. 판매 인센티브 좀 떼 줘야죠)

syo 2019-10-23 08:51   좋아요 1 | URL
후설 쌤이 보면 입금은 커녕 현상학적으로 혀를 찰 겁니다ㅋㅋㅋ
우리 철학 꼬꼬마 친구들이 꼬꼬마라서 넘 다행이야 ㅎㅎ

수연 2019-10-23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_ 짱이야. 철학 꼬꼬마 아줌마는 막 물개 박수 쳤잖아요, 아침부터.

syo 2019-10-23 08:52   좋아요 0 | URL
아침 나절에 작은 미소 한 방 실어 나를 수 있었으면 된 거죠 ㅎㅎㅎ

페넬로페 2019-10-23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샘!
철학 꼬꼬꼬마 학생인 저!
강의 잘 들었어요^^
다시오는 각설이~~
기다릴께요**

syo 2019-10-23 08:53   좋아요 0 | URL
사실 아무도 안 만들어주는 별명 지가 스스로 만들어서 퍼뜨리네요ㅎㅎㅎㅎ
각설이는 돌아옵니다!! 감사합니다^-^

다락방 2019-10-23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다..

그리고 나 미더덕하고 각설하고 가지고 댓글 쓸랬더니 쇼님이 다 선수쳤네요? ㅎㅎ

syo 2019-10-23 08:55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예상 범위 안에 포획되셨어요? 사실 미더덕은 놓칠 뻔 했습니다.....

bookholic 2019-10-23 0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소개하지 마시고
책을 쓰시라니까요^^

syo 2019-10-23 08:56   좋아요 1 | URL
북홀릭님 오랜만입니다 ㅎㅎㅎ
아차, 생각해보니 이건 북홀릭님 리뷰스타일을 훔쳐낸 셈이군요.....

다락방 2019-10-23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저거 공부한 종이... 너무 좋다. 나는 저런 사진에 페티쉬 있어요, 진짜. 너무 좋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syo 2019-10-23 08:59   좋아요 0 | URL
공부한 종이라기보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종이에 가까워요. 정신차려보니 똥그란 얼굴 막 그리고 있더라니까.....

다락방 2019-10-23 09:02   좋아요 0 | URL
저거 사진이 옆으로 누워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저거 사진 클릭해서 막 고개를 구십도로 꺽고 읽으려고 시도했다. 몇 번이나..
수학 문제였으면 저는 벌써 기절했을거에요.. 너무 멋져서.........

syo 2019-10-23 09:05   좋아요 0 | URL
알라딘이 사진을 자꾸 제 맘대로 돌려요. 무조건 옆으로 긴 사진만 올라가나봐.... 다음 번에는 수학 푼 거 올려 볼까? 구몬 수학이지만.....

단발머리 2019-10-23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 너무 쉬운 여자인가. 첫 줄부터 웃음보 터져 버렸어요. 끝까지 읽으면서 줄어드는 문단들이 넘넘 아쉽네요.
얼른 다시 돌아와요, 각설씨!!!

syo 2019-10-23 22:09   좋아요 0 | URL
각설이 never die.....

stella.K 2019-10-23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리뷰를 이렇게도 쓸 수 있군요.
철학 특히 현상학 공부 안 해도 밥 먹고 사는데 지장 없다고 생각하는데
스요님이야 말로 알라딘을 넘어 진정한 독서계의 미개덕이로군요.
그런데 이 책이 품절이라니.
이달의 리뷰로 점 찍고 싶은데 과연 알라딘이 품절된 책에 그런 영광을 주기도 할런지
그걸 잘 모르겠네요. 암튼 훌륭합니다!!

syo 2019-10-23 22:11   좋아요 0 | URL
안 하면 밥 먹고 사는데 지장 있는 게 세상에 뭐가 있을까요 ㅎㅎㅎ
요즘은 어떻게든 밥은 먹고 살아지는 세상이잖아요.

이 책이 품절이었다니, 몰랐네요.
사 놓길 잘했지......

스텔라님이 재밌게 읽으셨으면 그걸로 됐습니다. 이달의 리뷰 그런 거, 각설할게요.

2019-10-29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01 14: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짜라투스트라 2019-11-01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아니 철학관련 글이 이렇게 재밌을 수 있다니

syo 2019-11-01 22:5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재미를 위하여 내실을 포기했으니까요!!

Comandante 2019-12-06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서평 읽고 책 사려고 보니 품절이길래 인터넷 검색해보니 한권 남은데 있어 구입했어요. 당장 읽는책이 있어 나중에 읽어야겠지만 기대됩니다^^

syo 2019-12-08 17:13   좋아요 0 | URL
하필 제가 품절된 책에 뽐뿌를 넣었군요..... Comandante님께서 책을 입수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소양이 깊으시니, 후딱 읽고 넘기실 수 있을 것 같아요.
 
미루기의 천재들 -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찰스 다윈에서 당신과 나에게로 이어지는 미루기의 역사
앤드루 산텔라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유치원 다닐 즈음해서부터 초등학교 저학년까지의 남자아이들은 대개가 공룡 덕후지만, 유독 공룡에 대해 더 잘 아는 친구가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같은 반으로 한 번 스치고 중학교 때 다시 한 반에서 만났는데 여전히 두꺼운 하드커버 공룡 도감을 지참하고 다녔으며, 쉬는 시간이면 짤짤이나 판치기를 하는 아이들의 열기로 교실이 라스베이거스가 되건 말건 책상 위에 도감을 펼쳐 놓고는 애틋한 눈빛으로 각종 사우루스들을 어루만지곤 하는 조용한 친구였다. 아이들은 그를 사우루스 지니어스라는 4·4조 민요 율격의 라임 쩌는 별명으로 불렀는데. 한 번은 그에게 나이 열다섯에 그따위로 불리는 기분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싫거나 짜증나지 않느냐고. 그는 이파리 뜯어먹는 아파토사우루스라도 되는 양 특유의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만 아쉬울 뿐이라고 했다. 공룡에는 꼭 사우루스만 있는 것은 아니라며......

 

우리 시절 남자 중고등학교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유형의 천재로는 삼국지 천재를 들 수 있겠다. 세상에는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과는 상대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대체로 삼국지 회독수를 쌓은 사람들은 언변과 지략이 축적되어 있으므로 덤벼봤자 물리치기 어렵다는 식으로 해석되는 듯한데, 실제로 겪어보면 삼국지 빠들은 삼국지에 관한 견해충돌 앞에서는 마더빠더도 없는 독종들이라고 해석하는 쪽이 적확한 듯하다. ‘삼국지연의만 읽고 정사 삼국지를 읽지 않은 인간을 아예 삼국지를 모르는 사람보다 더 하자로 취급하는 이 성골 삼국지 천재들은, 전투 한 번 없이 일주일이 지나면 그게 더 이상한 난세 속 그 모든 크고 작은 싸움의 시간 순서, 지휘관, 참여 병력, 승패를 가른 전술 패턴을 개략적으로나마 숙지하고 있었다. 삼국지가 농구나 축구보다 더 재미있고, 인간은 자신에게 더 큰 효용을 주는 재화를 선택하는 것이 이성적이라는 이유로 그들은 체육시간에도 벤치에 앉아 적벽대전을 논했다. 특히 우리가 와룡봉추라고 불렀던 두 삼국지 천재들은 체육복으로 갈아입으면서 황건적의 난을, 준비운동을 하면서 군웅할거를, 벤치에서 삼국정립을, 마침내 교실로 돌아와 다시 교복으로 갈아입으면서 진나라의 통일을 복기하며 한 시대를 마무리 짓는 그야말로 삼국지 비르투오소들이었는데, 어느 날인가는 뜻밖에 와룡은 농구를 봉추는 축구를 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3점 슛을 당연하고도 장쾌하게 실패하며 실점의 빌미를 제공한 와룡을 붙들고 도대체 오늘은 왜 늘 하던 대로 봉추와 함께 난세를 종횡무진하지 않고 코트에 들어와서 민폐질이냐고 따졌더니 분한 얼굴로 대답해왔다. 아니, 봉추 저 새끼가, 장료가 장합보다 훌륭한 장수라고 하더라고. , 정말 상종 못할 새끼 아니냐. , 너야말로 정말 그런 새끼 아니냐. 와룡은 당당하게 두 손으로 드리블을 치면서 또 다른 실점을 이끌어냈지만 막상 본인은 도대체 무얼 그리 잘못했는지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장룐지 장합인지 하여튼 그 양반이 무덤을 박차고 나와 서슬 퍼런 청룡언월도로 뎅겅 네놈의 목을 쳐주면 내가 그걸 주워서 덩크를 넣겠는데 싶었다. 그날 이후로 그들은 다시는 함께 삼국지를 논하지 않았다. 이후, 와룡인지 봉추인지 둘 중 한 천재가 이제 삼국지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며 하산을 선언한 뒤 일본 전국 시대에 대해 깊은 연구에 돌입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걸 끝으로 그들과는 더 이상 인연이 이어지지 않았다.

 


 

2

 

어른이 되기 전까지 syo가 만난 천재란 대체로 저런 귀엽고 무해한 녀석들이었다. 지방 도시의 교육열이 맹렬하지 않은 학군에 모인 꼬꼬마들은 고만고만해서 다정했다. 먹고 먹히는 독한 등수 싸움 없이 학교생활이라는 게 끝났고, 기어이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학기 시작 전에 미리 상경해 하숙집을 계약하고는, 땅 위로 달리는 지하철(!!)을 타고, 강인지 바다인지 한참 아리까리한 거대한 한강(!!)을 건너면서 촌놈은 생각했다. 이 넓고 높고 빠른 곳에는 또 어떤 소소하고 다감한 천재들이 있을까?

 

그런 천재들은 없었다. 혹은 숨었거나. 그 대신, 진짜 천재들이 있었다. 재수 없지만 감탄스럽고, 꼴 보기 싫지만 존경스럽고, 친하게 지내고 싶지는 않지만 조별 과제는 함께 하고 싶은, 사전적 정의 그대로의 천재들이 서울엔 잔뜩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천재라는 사실을 딱히 숨기려 하지 않았고, 줄줄 흘리고 다녔다.

 

누가 봐도 파마머린데 그게 제가 타고난 머리라 주장했던 김천재는 분신술이라도 배웠는지, 150명 정원인 동기들이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벌이는 모든 술자리에 빠짐없이 등장했다. 그는 숙취 상태에서 한 과목 중간고사를 뚝딱 해치우고, 비어 있는 한 시간 반 동안 해장국 집에 들러 해장국 한 그릇에 소주 한 병 반을 마시고 돌아와 다음 과목 시험을 치렀다. 그러고도 꽤 잘 본 눈치였다. 다른 아이들은 말아먹은 중간고사를 벌충하려고 기를 쓰는 기말고사 기간에, 김천재는 같이 술 마실 사람이 없어서 대신 PC방에서 시간을 보내다 새벽이슬을 맞고 교실에 기어들어와 엎어져 자곤 했다. 넌 공부 안하냐? syo가 물었다. 김천재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런 거 안 해. 그랬는데 2학기 개강하고 확인해보니 김천재의 1학기 성적표에는 16학점 A+, 2학점 A0가 찍혀 있었다. 넌 그렇게 술 마시고 PC방 다니면서 무슨 수로 이 학점을 받았냐. syo 카트라이더가 바나나를 슬쩍 흘리면서 물었다. 책 잠깐 봤지. 김천재 카트라이더가 바나나를 회피하며 시크하게 대답했다. 게임속의 syo가 드리프트를 시도하는 동안, 내면의 syo는 주머니 속에서 쟤를 찌를 칼을 꺼낸다. , 너 공부 그런 거 안 한다며. 김천재는 지금 너의 말을 나는 이해할 수 없노라- 하는 말투로 반문한다. , 물리, 화학, 미적, 논리회로설계, C언어 기초, 그런 과목을 공부라고 할 수가 있어? 걔들은 그냥 소양아니냐? , 제발 장료든 장합이든 누구든 뭐든 좋으니 무덤에서 튀어나와 이놈의 목을 뎅겅 쳐 줘요. 뚜껑 열고 뇌 꺼내서 내거랑 바꾸게...... 그러나 syo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느새 나를 추월해 앞서가는 저 천재의 뒤통수에 물폭탄을 던지는 것 말고는 딱히 없었다.

 


 

3

 

무슨 일인지, 어느 순간 김천재는 학교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이천재는 수능을 다시 봐 의대생이 되고, 노천재는 스위스에 있는 어머어마한 대학교로 교환학생을 가고, 쟤는 천재라고 부르기는 좀 빠지지 않나 싶었던 홍수재는 카이스트로 적을 옮기고, 하여간 이 좁은 물에서 더는 놀 수 없다며 세상 여기저기로 흩어지는 무수한 천재들이 있었다. 천재들이 나타났다 사라진 자리에서 syo는 왜 나는 천재로 태어나지 못한 걸까를 고민하면서 그저 syo로 늙어만 갔다. 그러다 인생이 삐끗, 군대가 늙은 syo를 냉큼 삼키고 말았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국방부 시계는 잘도 돌고 돌아갔고, 때가 되자 군대가 이제 더 늙은 syo 너는 필요 없다 퉤, 하고 뱉어냈는데, 그렇게 사회로 돌아온 syo는 자신에게 어떤 종류의 천재성도 없다는 슬픈 결론을 등에 얹고 씹어놓은 껌 같은 인생을 살기 시작한다.

 

그러다 이 책을 만났고, 나는 드디어 내 천재성을 찾아냈다.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이 천재성.

 

그렇다. syo는 천재였다.

 

미루기의 천재.

 

 

 

4

 

마감이 눈앞에 닥쳐 있을 때 내 아파트는 언제나 최고로 깨끗하고, 내 파일은 가장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고, 냉장고는 썩어가는 음식 없이 말끔히 치워져 있다. 반드시 해야 할 무언가가 있을 때, 나는 바로 그 일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용감무쌍하게 해내겠다고 결심한다. (21-22)

  

? ?


  내 패턴은 보통 이렇다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았다가 내게 정말 간절히 필요한 건 방금 내린 커피 한 주전자라는 결론을 내린다커피를 내리려면 부엌으로 가야 한다일단 부엌에 가면 싱크대 위의 전구가 나갔다는 걸 알아채지 않을 수 없다전구를 갈려면 모퉁이에 있는 가게에 가야 한다그러나 새 전구를 사러 모퉁이까지 걸어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글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구를 파는 가게는 정말 훌륭한 베이글을 파는 가게 바로 옆에 있고커피를 내리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베이글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반박이 어렵다또한 전구 가게와 베이글 가게가 있는 바로 그 블록에는 선집을 훑어보며 약간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서점이 있다그래서점이 글쓰기에 영감을 불어넣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스스로를 막다른 골목으로 끌고 가는 바로 그 순간에도 나는 내가 행하고 있는 자기기만을 인식하고 있다하지만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물론 일은 나를 바른 길로 이끌어줄 유일한 방법이다하지만 때때로 일은 내가 무슨 일을 해서든 피하고 싶은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59-60) 

  

진짜 난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책을 썼나?

 

  내 낙관주의는 아침에 일어난 직후 거의 정점을 찍는다나는 늘 아침을 사랑해왔다아침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자기 연민과 심술이 덜하다아침에는 모든 게 가능해 보인다아이디어로 넘쳐흐른다가능성타인을 향한 사랑아무도 나를 멈출 수 없다하지만 오후 4시쯤 되면 나 자신과 인류에 대한 기대를 깨끗이 단념한다그렇게 미루기는 늦은 오후에 정점을 찍는다자포자기한 상태로 하루를 내려놓고 모든 걸 내일로 미루는 시간그때쯤 되면 예외 없이 현재에서 빠져나와 내일 아침을 위해 산다.

  내일을 향한 믿음은 일종의 신앙이다내일까지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새로 태어나고 희망이 부활할 것이다일을 미루는 사람에게 있어 희망은 언제나 경험을 이긴다내 생각엔 이것이야말로 꽤 적절한 신앙의 의미다. (91-92) 


이제 그만해..... 이렇게까지 속속들이 알려줄 필요까지는 없잖아.

 

  그러는 사이 마감은 다가왔고나는 점점 더 깊은 구덩이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텅 빈 구덩이로 떨어지며 당장 해야 하는 일에서 필사적으로 멀어져갔다갑자기 트위터 프로필 업데이트야말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업무처럼 보였다그동안 수집한 디지털 음원들을 정리하며 하루를 다 보내기도 했다요즘은 그런 일을 '큐레이팅'이라고 하던데.

  일을 꼭 끝마치겠다고 다짐하면 할수록 나는 점점 더 집중력을 잃어갔다일을 못 하니까 우울해졌고(여러분이 아는 그 악순환의 고리가 맞다우울하니까 더욱더 일을 할 수가 없었다업무를 회피하고 다른 자잘한 일들로 시간을 보내느라 몇 주의 노동시간이 통째로 사라졌다나는 이 책에 넣을 인용문을 찾느라 책장을 뒤지다가 그동안 읽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음악 평론집을 발견했다찾던 책은 전혀 아니었지만 선반에서 그 책을 꺼내 들었고얼마 지나지 않아 1980년대 뉴질랜드의 개러지팝garage-pop을 재검토하는 일에 푹 빠져들었다.

애초에 내가 뭘 찾고 있었는지는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

  더 이상 미루는 짓은 그만두고 일에 착수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이 지점에서 또다시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이름하여 메타-미루기라고 부를 법한 행동인데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은 증발해버리고 아무것도 안 하는 스스로의 태도에 다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이다. (100-101) 


내 이야기를 이만큼 잔뜩 하려면 뭐 허락이라도 미리 받아야 되는 거 아닙니까.....

 

 

 

5

 

저자는 달인을 넘어, 이미 미루기의 천재다. 심지어 이 책에 실을 인터뷰를 위해 뉴올리언스까지 날아갔지만, 막상 거기에 도착하자 인터뷰를 미루고 관광을 하다 그냥 돌아오기까지 한다.

 

그런데 미루기라면 syo도 어디서 꿀리지 않는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리뷰를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여러 명에게 알렸다. 그와 동시에 그 리뷰에 대한 생각을 미뤘다. 설국5월에 읽었다. 5151944분에 생성한 설국.hwp 파일을 지금 열어봤는데, “국경의 긴 터널을 빠라고 쓰여 있다. 이게 syo가 두 달에 걸쳐 써 놓은설국리뷰의 전문입니다. 일주일에 한 글자 기세로 썼네요. 인정? 미루기 천재 인정? 이걸로 부족한가요?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월요일에 도서관에서 10권의 책을 빌려온다. 수요일 쯤 되면, 읽은 4권을 다른 도서관에다 반납하고 거기서 다시 10권을 빌려 온다. 그 즉시 월요일에 빌려온 남은 6권 읽기를 미룬다. 새로 빌려온 책부터. 그렇게 금요일 쯤 되면, 월요일 책 1, 수요일 책 4권 정도를 읽게 되는데, 그걸 다시 다른 도서관에 들고 가 반납한 다음 거기도 또 9권을 빌려온다. 그 즉시 남아 있는 월요일 책 5권과 수요일 책 6권 읽기를 미룬다. 역시 새 책 first. 그렇게 두 주가 지나면, 결국 월요일에 빌린 책의 반절은 읽지도 못하고 바로 반납이다. 그럼 수요일 책은 다 읽는가 하면, 금요일 책 때문에 걔들도 대충 그냥 반납이다. 그럼 금요일 책은 읽는가 하면, 천만에요, 그 다음 주 월요일 새로 들고 온 책들 때문에 걔들도 대체로 그냥 반납이죠. 그럼 새 월요일 책들의 운명은 뭐가 다를까요..... 인정? 미루기 천재, 이번에는 인정?

 

 

 

6

 

좁은 의미의 천재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유해할 때가 있다. 그들이 특별히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다. 가끔 그들은 그냥 숨만 쉬는데도 저도 모르게 주변 범재들의 가슴을 할퀸다. 내 무딘 손이 아무리 애를 써도 가 닿지 못하는 것들을 숨 쉬듯 당연하게 움켜쥐는 이들을 볼 때 마음은 비가역적으로 멍든다. 오랜 열등감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저 인간이 내뿜는 이산화탄소조차 부러워진다.

 

최초로 만난 천재들이 공룡이나 삼국지 천재였다는 것은 사실 내가 제대로 찾아먹지 못한 엄청난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촘촘한 시선으로 돌아보았으면 뜻밖의 천재들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 그랬다면 날카로운 천재들을 만났을 때도 찔리거나 베이지 않았을 텐데. 지금 돌아보면 그냥 숨만 쉬어도 아름다웠던 그 좋은 시절을 열등감과 자괴감으로 오염시키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지금도 풀꽃 천재라든지, 정량 배식 천재라든지, 제설 작업과 눈사람 만들기의 천재, 알람 없이 제 시간에 일어나기의 천재, 이에 팥 끼지 않고 팥빙수 빨리 먹기의 천재 같은, 무해하고 크게 부럽지 않은 수많은 천재들이 발견되지 않은 채 조용히 빛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세상을 해독하는 사람들이다.

 

미루기의 천재란 어쩌면 한낱 말장난에 그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무해한 천재라는 사실이 기껍다. 장난의 경계선에 아슬아슬 서서, 소소하다 못해 하찮아 보이는 특징에다가도 천재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증거가 되서 뿌듯하다. 뭔가 더 좋은 사람, 한줌이나마 세상을 맑게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아니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서 기쁘다. 진부하고 뻔한 결론이겠지만, 나는 내가 좀 좋다.

 

 

 

7

 

이런 이유로, 앞으로도 꾸준히 미루겠습니다. 서른 해 넘게 살며 하나밖에 못 찾아낸 천재성인데, 꽉 잡아야죠.


다른 사람의 미루는 습관을 얼마나 나쁘게 보느냐와는 상관없이 내가 일을 미뤄야 하는 그럴듯한 이유는 언제나 찾아낼 수 있다. (67)



댓글(21) 먼댓글(0) 좋아요(6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19-07-05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을 만나기 전까지는 저도 몰랐습니다. 제 안에 천재성(?)이 있을거라고는.;;
근데 그거 진짜 천재성 맞을까요. 너무 많은 것 같은데요?

syo 2019-07-05 23:46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뭐 어때요. 여기서 우리가 이게 천재성이 아니라고 한들, 앞으로 안 미룰 것도 아닌데요 ㅎㅎ

서니데이 2019-07-05 23:47   좋아요 1 | URL
맞아요. 그거 하나는 너무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2019-07-06 0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06 0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9-07-06 0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진정한 미루기의 천재는 바로 저라고 우겨보고 싶습니다.
아마 syo 님은 제게 상대도 안될거라 자부합니다. ㅎㅎ

저는 본문에 나오는 김천재 같은 인물은 절대 아니었지만,
늘 시험기간만 되면 술을 마시러 다녔고(세상에 시험 기간만큼 술 마시기 좋은 때는 없죠!),
술을 먹다가 시험을 후다닥 치루고 다시 술 마시러 가기도 했지요.
물론 성적은 학사경고를 받기도 하고, 선동렬 방어율이 얼마인지 궁금한 이들이 찾아볼만한 수준이었지만요.

그랬어도 항상 저만 보면 ˝공명아, 너는 어찌 세상을 잘 못 만나 이러고 사느냐?˝라고 안타까워 해주신 선배도 있었답니다.

덕분에 한참 옛날 생각에 빠져봅니다. 고맙습니다!

syo 2019-07-06 07:52   좋아요 0 | URL
미루기에 대해서라면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을 거라고 짐작해보았습니다.
감은빛님의 과거사 말씀을 듣고 생각해보면 감은빛님은 음주천재이시기도 한 듯.....ㅎㅎㅎ
감은빛님의 페이퍼를 읽어보면, 마시고 계시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술에 대해 깊은 애정이 느껴지는 언급이 등장하잖아요^-^

별 거 아닌 글인데 슥 지나치지 않으시고, 늘 댓글까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2019-07-06 0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