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31번의 입맞춤
1
말년에 다다른 거장의 마지막 작품을 읽는 일은 종종 씁쓸한 뒷맛으로 끝나곤 한다. 독자가 그 거장의 가장 빛나던 시절 작품들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욱 그렇다. 세월이 인간을 첨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산은 높이 올라갈수록 좁아지다 결국 정상에서는 한 뼘에 수렴하고, 해구는 깊어질수록 좁아지다 결국은 바늘구멍으로 마무리된다. 우리가 잘 쓰면 잘 쓸수록, 잘 읽으면 잘 읽을수록, 그러니까 잘 살면 잘 살수록, 우리는 선명하고 뾰족해진다.
2
플레이리스트에 올려놓은 노래들 가운데 한 곡의 어느 구절에 대해 말하고 싶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아름다운 가사를 뿌리는 노래임에도 어쩐지 몽롱하게 들리다가, 딱 이 구절만큼은 이유 없이 선명하게 꽂혔다.
“내가 원하는 건 천 번의 입맞춤이 아니라 나로서 나인 것뿐이외다. 누구의 무엇이 아니라.”
3
『올 댓 이즈』에 쏟아진 찬사에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찬사를 던진 이들의 마음이 진심임을 의심할 일은 아니다. 그들의 눈에는 거장이 첨예한 탐침으로 찾아낸 세계가 쨍한 동시에 선명했을 것이다. 같은 세계를 살아가는 그들 역시 높은 꼭대기를 향해 좁아져 가는 행로 위에서 세월을 축적했을 것이니까. 저기 저 끝에 아른아른 보이는 정상. 아, 아직은 못 미쳤으나 어쩌면 내가 도달할 수 있을 저 아름다움. 내 시야에 닿는 아름다움은 몇 배나 아름답다. 왜냐하면 그 아름다움은 내가 아름다움을 포착할 수 있는 좁고 위대한 범위 안에 들어와 있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장의 작품을 찬양하는 일은 대체로 수지맞는 장사가 된다.
4
나는 나로서 나인 것뿐인 삶이 지겹다. 그것보다 천 번의 입맞춤을 원한다.
5
그러나 설터의 이 책은, 그때가 아닌 지금, 거기가 아닌 이곳에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의 첨예하지만 뾰족한 탐침이 찌른 그 좁은 한 지점에, 지금 여기 사는 이들의 절대다수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선명한 서사는 시공의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작품이 갖출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기다. 그래서 이 작품은 어쩌면 불꽃에 비유해야겠다.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게 순간을 살다가 잔상으로 흩어지는 불꽃.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못내 미워하지만, 역시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차마 미워할 수가 없는 애매한 책을 덮고 나면, 쓴다는 게, 읽는다는 게, 그리고 살아낸다는 게, 그러니까 시간에 입김에 조금씩 흩어지는 모든 일들이, 때론 달거나 짜거나 맵거나 시거나 하지만 평균적으로는 쓴맛으로 요약되고야 마는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6
syo는 이 나라 이 땅에서는 보기 드물게 정말로 ‘누구의 무엇이 아니라 나로서 나인 것뿐’인 삶을 살아온 편이다. 내림차순으로 정렬하면 적어도 상위 1퍼센트 위치에는 이름이 적히겠지. 나는 엄마 아빠의 아들이 아닌 나로 살다가 결국 엄마와 아빠를 모두 아들이 있지만 아들이 없는 사람으로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동생의 오빠가 아닌 나로만 살았기 때문에 내 동생은 지금 고아나 다를 바가 없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의 든든한 반려가 아닌 나로만 살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참고 참으며 기다리고 기다리다 더는 기다리지 못해서 미안하다(왜 네가?)는 사과를 남기고 울며 떠나갔고, 어르신복지과의 나이는 많지만 꽤 똘똘한 주임이 아닌 나로 살겠다며 구청을 박차고 나왔으므로 내 마흔 인생 취업기간이란 걸 죄 합쳐 봐야 채 1년이 안 된다. 그렇게 나는 syo를 만들고 syo로만 살았다.
누구의 무엇으로만 살아왔던 사람에게 나로서 나일 뿐인 삶이란 타는 목마름으로 추구하는 그 무엇이겠거니- 하고 짐작은 하지만 그뿐, 나로서 나일 뿐인 삶만 살아왔더니 결국 이따위 내가 되어버린 나는 이제 누구의 무엇으로 살아가는 삶이 달고 촉촉하다. 인정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고,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다. 나를 올려다보는 네 눈동자에 내가 네게 어떤 사람인지 이미 다 쓰여 있어서 읽어내려면 0.1초 만에 다 읽을 수 있는데도 굳이 그 말을 네 입술로 확인하고 싶어서 유치하게 묻는다. 내가 너에게 쓰임이 있어? 내가 너에게 행복을 줘? 내가 없으면 네 세상이 깜깜해져?
7
작년 성적표를 받고 쓴 글이 마지막이었고 1년 만인데, 올해도 역시 애매하다. 작년 11242에서 11231이 되었으니 성적이 오른 건 맞지만, 국어 수학이 쉬워진 바람에 전체 표준점수는 비슷하지 않을까. 올해는 메디컬을 노리고 진입한 극상위권들이 많아서 이거 가지고는 입시에서 작년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기는 어렵지 않나 싶다. 뭐, 어떻게든 되겠고, 어떻게 되어도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어려워도 어지럽지는 않다. 이 글 이후로 수능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수능 뭐 그런 일은 없었던 것처럼 대해주세요. 물어보셔도 안 보이는 척할 겁니다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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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더디고 문장이 무디다. 어김없이 재활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