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독서
흐릿하게 비에 이긴 빛이 유리를 넘지 못하고 다만 두드린다.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아서 비로소 모든 소리가 들리는 시간, 더벅머리 남자가 아직 책 앞에 앉아 있다. 묵독한다. 묵독에 특히 잘 녹는 새벽이 있다. 남자가 새벽을 녹인 활자를 들이켠다. 중력이 없는 활자는 마실수록 가벼워져서, 남자의 질량은 한없이 새벽으로 수렴해간다. 빗줄기가 식히는 것은 이 세상의 밑창. 낙하하는 것들의 착하고 꾸준한 음성이 거들면 읽기는 한결 수월하다. 왜일까.
수십억 년 전, 끓어 요동하는 지구를 식힌 많은 물들도 그랬을 것이다. 누군가 있어 천천히 굳는 지구를 차근차근 읽으며 바다와 대륙을 짚어 최초의 이름을 말해 보았을 것이다. 아직 우주는 새벽, 무한히 펼쳐지는 공간을 달리는 광자들이 빛의 속도로 그 소식을 전한다. 어느 은하 어느 항성의 작은 행성에 최초의 활자가 태어났대, 동시에 최초의 독자가 태어났대, 그래서 최초의 독서가 있었대, 우리는 기록한다, 우리는 전한다, 아직 우주는 새벽, 최초의 독서는 새벽에 있었어, 이제부터 무한대의 새벽이 올 것이고, 더 큰 무한대의 독서가 올 거야, 독서하는 이들이 어느 새벽에 우리의 목소리를 들을 거야,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새벽에 깨어 읽어야 해, 새벽에 읽어야 해, 새벽은 읽기 좋은 시간이야.
새벽은 읽기 위해 태어났어.
책을 읽으면 삶이 나아질까. 여기에는 "꽤 그럴 것이다"라고 답하고 싶다. 삶에 있어서 '농도'나 '밀도'는 중요한데, 내 경우 그 밀도를 책을 읽거나 쓴 사람들과의 만남, 혹은 책을 둘러싼 수많은 내용을 통해 채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잘 모르겠다. 이렇게 책 한 가지만 이야기하며 마치 책 바깥의 삶은 없다는 듯이 말하는 것을 싫어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 안에 완전히 들어오지 못하면 알 수 없는 세계가 있다. 책이 바로 그런 세계다.
_ 이은혜, 『읽는 직업』
책 읽기는 물을 건너는 것과 비슷하다. 강을 건널 때는 온몸이 젖을 수밖에 없지만 작은 개천을 건널 때는 물방을 튀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깊은 강을 건너다가는 몹시 아프거나 죽을 수도 있고, 작은 개울이라도 물이 불었을 때는 사고가 나기도 한다. 비가 온다면 어느 물가를 건너더라도 온몸이 다 젖을 것이다.
_ 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
독서는 인류가 피할 수 없는 것을 지연시키는 방법이다. 독서는 우리가 하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방식이다. 이 장대하고 가능할 성싶지 않은 독서 계획이 우리 앞에 줄지어 있는 한, 우리는 숨을 거둘 수 없다. 나는 아직 『빌레트』를 다 읽지 못했으니 죽음의 천사에게 나중에 다시 오라 전하라. 거기에는 우리 모두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갈 거라는 희망이 있다. 나 믿노니, 이것이 책이 인류에게 주는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 모든 생은, 최고의 생조차도, 끝은 슬프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는다. 우리가 듣고 싶은 목소리는 영원히 멈춰버린다. 책은 끝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드러낸다. 제인은 로체스터와 결혼할 것이다. 엘리자는 사악한 노예주 사이먼을 저지할 것이다. 장발장은 자베르를 이겨낼 것이다. 핍은 에스텔라의 짝이 될 것이다. 악한 이는 나가 떨어지고 정의로운 이는 번창하리라. 우리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책들이 있는 한, 아직은 배를 돌려 안전한 항구를 찾을 기회가 있다. 포크너의 말마따나, 그저 살아남는 정도가 아니라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아직도, 우리 모두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_ 조 퀴넌,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
--- 읽은 ---
238. 사람의 씨앗
전호근 지음 / 메멘토 / 2021
슬픈 것들은 슬퍼서 아름답고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워서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은 것들은 아름답지 않아서 아름답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아름다운 게 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쓸데없이 밝은 아이였다. 세상이 꽤 밝았다. 모든 것이 저마다의 이유로 아름다웠으므로, 모든 것을 가지고 시를 쓸 수 있었다. 시라는 게 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누구나 사랑할 수 있었고 모든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돈을 많이 벌었고 많이 썼다. 사람들을 울렸고 사람 때문에 울었다.
그리고 이제 슬픈 것들은 슬프고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은 것들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다움이 뭔지 내게 알려준 것들을 적잖이 만났다. 더이상 시를 쓰지 않고, 못 읽는 책이 늘었다. 돈은 벌지 않는다. 그래서 적게 쓴다. 울리지 않고 울지 않는다.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렇지만 가끔은 모든 것이 아름답던 시절의 내 잔해가 고개를 든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 잊을 수 없는 것, 버릴 수 없는 것으로 내 안에 심어놓은 씨앗 같다. 사람의 씨앗을 심는 시기가 있다. 그 시기에 만난 슬픔들,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은 것들, 시들, 사람들, 울린 사람과 울리는 사람들. 그런 것들이 씨앗이 되는 시기. 그리고 책. 가장 값싸고, 그런데도 가치가 크고, 그런데도 사랑받지 못하는 우리의 씨앗.
읽어야 할 책은 언제 읽어도 좋지만 어떤 시기에 읽으면 더욱 좋다. 인간의 인생 모든 국면에서 동등한 크기의 가치를 가지지는 않지만, 특정 시기에 읽기에는 좋은, 가치의 그래프가 어느 지점에서 송곳처럼 솟아오르는 책들이 있다.
사람의 씨앗을 심으면 사람이 난다. 사람이 뭘까. 세상에 여러 씨앗이 있을 건데, 그중 어떤 것이 사람을 사람으로 싹틔우는 씨앗일까. 전호근 선생님은 동양철학자다.
리뷰를 쓸까 하다가 그만한 분량이 안 나올 것 같아서 토막글을 써갈겼더니 아, 엉망진창이다.
“내가 몇 달 동안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주자의 글을 한 번씩 보았는데 마치 바늘이 내 몸을 찌르는 것 같았고 잠이 확 꺠는 것 같았다.”
정자중에게 보낸 편지글의 한 구절인데, 그가 선현의 글을 어떻게 대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퇴계가 활동했던 때는 결코 태평성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화와 당쟁이 격화되어 탁류가 도도히 흐르는 암흑의 시대였다. 하지만 밤이 깊을수록 별이 더욱 빛나는 것처럼 그는 그토록 어두운 시대에 자신을 수양함으로써 오히려 세상에 드러났다.
책을 읽다가 바늘에 찔리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그런 적이 없다면 아직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것이다.
_ 전호근, 『사람의 씨앗』
239. 오후의 글쓰기
이은경 지음 / 큐리어스(Qrious) / 2021
놀리는 거 아니에요. 저 진지합니다. 글솜씨를 타고나지 않은 우리는 매우 여유롭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부터 조금씩 점점 더 잘 쓰는 사람이 되는 거니까요.
이를 악물고 쓰거나 잘 써야겠다고 불타오르는 만큼 잘 쓸 수 있다면 주먹을 힘껏 쥐어야 마땅하겠지만 글은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에요. 최대한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할 수 있는 한 정성을 쏟아 성실하게 뚜벅뚜벅 다가가야 해요.
잘 쓰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잘 쓰고 못 쓰고에 신경 쓰지 마세요. 잘 쓰려고 노력하는 순간 힘이 들어가고, 며칠 못 가 그만두게 됩니다. 무언가를 글이라는 형태로 만들어낸다는 것 자체에 뿌듯함을 느끼세요. 완성한 글을 꼼꼼히 다시 읽으며 마음에 들지 않아 하거나 가까운 누군가에게 보여줘 괜한 핀잔과 지적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오늘도 다짐대로 쓰긴 썼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스스로 칭찬하세요. 그래야 잘 쓸 수 있어요. 잘 쓰려고 애쓰는 것보다 매일 쓰기 위해 노력하는 게 훨씬 빠른 길이에요.
_ 이은경, 『오후의 글쓰기』
컴퓨터라면 286이라는 물건부터 쓰기 시작헀으니 키보드를 두드리며 지낸 세월이 30년을 거진 다 채웠다. 그렇게 오래 치면 따로 연습하지 않아도 분당 800타는 두드리게 된다. 1초에 키 13개 이상을 누른다는 뜻이니까, 초당 4글자 정도를 만드는 속도다. 그렇다면 1분에 240자, 10분이면 2,400자, 한 시간이면 14,400자를 찍어낼 수 있다. 에누리해서 14,000자를 생산한다 쳐도, 200자 원고지 70장이다. 오타 고치고 뭐 어쩌고 해서 대략 20% 날린다고 봐도 55장이다. 하지만 시간당 55장 속도로 글자를 찍는 syo가, 실제로 한 시간 동안 만들어내는 글은 15장이 채 되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효율.
문장마다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
‘문장마다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라는 한 문장이 나오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 처음에 ‘그건 한 문장에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건/그건’에서 ‘그건’을 골랐고, ‘그것은/그건’에서 다시 ‘그건’을 골랐고, ‘그건’ 뒤에 쉼표를 찍을까 말까를 고민하다 찍지 않았다, ‘한 문장에/문장에서’에서 ‘한 문장에’를 골랐다가 이내 ‘문장마다’로 아예 고쳤다. ‘문장마다’ 앞에 ‘내가’를 넣어서 ‘그건 내가 문장마다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라고 쓰고 보니 ‘그건’을 빼고 싶어졌다. 그리고 나니 ‘내가’도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치웠다. 여기까지 하고 나니 뒤에 있는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를 고쳐 생각해 볼 힘이 고갈되었다. 따라서 저 한 문장은 최종적으로 ‘문장마다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로 결정되었다. 만약 앞 문단과 저 문장 사이에 한 줄의 공백을 넣지 않았다면, ‘문장마다’ 앞에 접속사 하나를 넣기로 결정했을 거고, 그걸 위해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접속사들을 뒤져 하나씩 넣어보고 입말로 발음도 해봤을 것이다.
모든 문장이 이런 과정을 거치지는 않는다. 나도 사람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문장이 저렇게 만들어진다. 그래서 글이 느리다.
syo는 천재가 아니다. 오히려 둔재에 가깝다. 다 만들어진 문장의 나열을 관람하는 분들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안다. 우선 나는 한 문장을 써내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갈아 넣어야 하기 때문에 천재가 아니다. 그리고 ‘문장마다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기껏 애를 써서 만들어 낸 문장들도 대체로 평범함의 범주에 갇힌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 없는 둔재다. 그리하여 매일 쓰는 일이 가장 어렵다.
그럼에도 이은경 선생님의 말씀은 따를 수가 없겠다. 그럴 마음도 없다. 나는 저렇게는 글솜씨를 키울 수가 없는 인간이 되었고, 이제 글쓰기 ‘태도’에 대한 책은 읽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배울 게 없어서가 아니라 배울 수 있는 게 없어서.
240. 모두의 데이터분석 with 파이썬
송석리, 이현아 지음 / 길벗 / 2019
소멸한 지 벌써 10년도 더 된 공대생 야성을 회복하고자 최근 코딩 책을 좀 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런 책이 뭐 어떻다 평할 수 있는 실력이 될 때까지는 책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이 대사를 복붙할 예정입니다.
라고 세 번째 쓰고 있는데, 이제 조금씩 뭔가 이야기를 해도 되지 않나 싶은 마음이 꿈틀거린다.
241. 마르크스의 『자본론』읽기
최형익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9
상품, 화폐, 시초축적, 임금노동, 잉여가치, 자본의 유기적 구성, 이윤율 저하의 경향적 법칙. 최형익 선생님은 여러 개념들 중 이 일곱 가지를 자본론을 관통하는 동시에 초심자가 알아둘 만한 것들로 생각하시는 듯하다. 보시다시피 세창출판사의 이 ‘읽기’ 시리즈는 작은 판형의 소책자라서, 소책자의 기능만 한다. 지나가야 한다. 지나가려고 읽는 책이다.
--- 읽는 ---
응답하는 사회학 / 정수복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 김이듬
여성, 타자의 은유 / 김애령
Do it! 파이썬 생활 프로그래밍 / 김창현
젠더 트러블 / 주디스 버틀러
마르크스 캐피탈 리딩 인트로 / 에르네스트 만델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 김영민
데이터 분석을 떠받치는 수학 / 손민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