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미치게 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1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말했다
내가 필요하다고.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돌보고
걸을 때 발밑을 조심하고
한낱 떨어지는 빗방울에도
맞아 죽지 않을까 염려한다.
_베르톨트 브레히트, 「아침저녁으로 읽을 것」
너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결국은 너를 사랑하는 나를 더 사랑하게 되고야 마는 사랑이 있다. 연애의 본질이 너를 사랑함과 나를 사랑함 사이의 균형잡기라는 것을 생각하면, 나를 지나치게 사랑하게 되는 사랑은 나를 지나치게 혐오하거나 부끄러워하게 되는 사랑보다 겨우 한뼘 더 나은, 차악의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한 연애가 끝나도 또 다른 연애를 이어가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나를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연애는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어쨌든 모든 연애는-다만 시작지점의 한 순간에 그칠지라도-나보다 더 사랑하는 너를 만나야만 시작된다. 내가 나를 사랑함으로써 이미 더없이 충분한 이에게 연애란 그저 거추장스러운 일에 불과하고, 자기애가 높을수록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 넘어야 할 허들도 높을 수밖에 없다.
이 시소 놀이는 비단 연애의 시작 지점에서만 벌어지는 사건은 아니다. 미세한 등락이야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지나치게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 균형은 반드시 상처를 남긴다. 이 시는 얼핏 너무도 바람직한 사랑, 너를 사랑함으로써 나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어떤 사랑의 삽화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좀 더 들여다보면 이미 노력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경사각의 한계지점에 가까스로 서 있는 이의 처절한 발악인 것도 같다. 아침 저녁으로 읽을 문구가 한낱 떨어지는 빗방울에도 맞아 죽지 않을까 염려“하자”가 아니라 염려“한다”인 것을 보면, 그는 지금 몸조심을 다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금 경사면의 어떤 지점에 매달려 있는지를 쉼 없이 인식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한낱 빗방울만 한 타격에도 모든 것이 무너지고 쓸려 내려갈 수 있다고 스스로 경고하는 것은 아닐까.
2
몽테뉴는 에세의 제1장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비슷한 결말에 이른다”에서, 패배자가 승리자의 마음을 눅일 수 있는 제일 흔한 방법은 고분고분한 태도로 자비와 연민을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짧게 서술한 다음, 그와는 정반대로 당당하고 꿋꿋하게 대응하여 승리자의 존경심을 끌어냄으로써 같은 결과를 달성한 사례를 여럿 제시한다. 그러다가 이내 패배자가 대담하게 나오자 다른 이들이 그를 추종하는 것을 경계하여 남몰래 패배자를 수장시켜 버린 어떤 승리자나, 자신만의 미덕인 대담함을 감히 흉내 냈다고 여겨 패배자를 더욱 잔인하고 처절하게 응징한 승리자의 이야기를 기록하며 제1장을 마무리한다. 그러니까 이 장은 어쩌면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비슷한 결말에 이르지만, 비슷한 방법으로 다양한 결말에 이르기도 한다”라는 제목이 붙는 게 더 적절할지도. 그러나 이렇게 보자면 이건 결국 “인생사 알 수 없지” 같은, 그야말로 품이 너무 넓어서 사실상 아무 진리도 품지 못하는 것과 진배없는 그저 <요지경 세상 이야기 대잔치>에 그치고 만다. 그렇다면 이 장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사실 이 장의 핵심은 나열된 사례의 중간쯤, 마치 부끄러워서 길게 이야기하긴 그래서 잠깐 말하고 만다는 듯한 태도로 몽테뉴가 남긴 이 단락이다.
나라면 이 두 가지 방식 모두에 마음이 쉽게 움직였을 것이다. 사실 동정을 느낄 때나 고결한 모습 앞에 설 때나 내 마음은 놀랄 만큼 약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 생각에 나는 존경심보다는 동정심에 더 쉬이 손들 것 같다.
이 TMI가 의미 있는 이유는, 몽테뉴가 말랑말랑한 가슴을 지닌 남자였다는 쓰잘데기없는 지식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너는 그러냐? 그렇다면 나는 어떻지? 하고 생각의 문을 열어 한소끔 쉬어갈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에세』를 읽는 일에는, 아니 어쩌면 모든 ‘에세이’를 읽는 일에는 결국 그런 시공간이 필요하다. 이런 태도를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은 『에세』가 “읽는 이”에게 주는 선물이다. 이것 말고도 “쓰는 이”에게 주는 선물도 있는데, 그것은 바로,
--- 읽은 ---
003. 연년세세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
망가지지 않은 사람 같은 건 없다. 조용하게 망가진 이들이 있을 뿐. 망가진 크기만큼 시끄러운 소리가 반드시 난다면 세계는 지금보다 훨씬 더 엉망진창이겠지만, 조용하게 망가진 이들의 망가짐은 잘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불안하게나마 세상을 지탱한다. 그런 중에도 그 조용한 비명을 예민하게 알아채는 이들이 가끔 있어서, 쓰는 사람이 그렇게 쓰고 읽는 사람이 또 그렇게 읽는다면 그 만남은 바깥에는 조용하고 안에서 시끄럽다. 망가짐 감수성은 망가짐의 크기가 아니라 무늬의 닮은 정도와 비례하기 때문에, 세상에 너무도 조용하게 내려진 어떤 책은, 어떤 독자에게는 마음속의 굉음으로 달려들기도 한다. 그러면 독자는 도리없이 작가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 사랑의 이유를 똑부러지게 짚어내지는 못하고 웅얼거리기만 하는 것이다. 많은 오래된 사랑이 결국엔 웅얼거리듯이.
--- 읽는 ---
가장 아름다운 괴물이 저 자신을 괴롭힌다 / 폴 발레리 외
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세계사 / 우야마 다쿠에이
사상 최강의 철학 입문 / 야무차
에세 / 몽테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