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의 귀환
1
그가 돌아왔다. 영영 돌아왔다. 젠장.
2
애초에 서울에서 직장 다니는 三과 서울에서 공무원하는 syo가 함께 살려고 성남에 집을 구했으나, 반년이 조금 더 지난 시점 이 집에는 서울에서 일하는 공무원이 사라졌고(백수됨), 동시에 서울에서 일하는 직장인이 사라졌다(오송 발령). 그래서 이 집은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소기의 목적과 전혀 다른, 백수가 책 읽고 글 쓰고 밥 짓고 연애하는 공간이 되고 말았으니, 이것은 운명의 장난질인가.
백수만 노났다. 둘은 부대껴도, 혼자 살기에는 적당한 집이었기 때문에.
그랬는데,
서울 본사 인사총무팀 직원 두 명이 동시에 이직과 사직을 감행하는 바람에 결원이 생겼고, 급하게 三이 서울로 소환되었다. 엊그제까지 오송의 논밭을 소형차로 달리던 三은 이제 대한민국의 심장, 강남역으로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며칠 전까지 이직을 생각하고 있던 三은 이번 발령이 만족스러운 모양. 여기 빈자리 생기면 메꾸러 투입되고, 또 저기 빈자리 생기면 그쪽으로 튕겨 나가는 입지에다가 심지어 자기 전공도 아니고 입사했던 부서도 아닌 곳을 빙빙 돌리는 회사에서 syo 같았으면 벌써 이직을 알아봤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천하태평이다.
3
1년 남짓 오송에 살았던 三이 용달차에 싣고 올라온 짐은 양이 만만치가 않았다. 이 좁은 집에. 쓸 수 있는 모든 용을 다 보았지만 여전히 내 동선 위에 잡동사니들이 얹혀 발에 차인다. 20,000개쯤 되어 보이는 컵라면을 보면 그의 오송 식생활을 능히 짐작할 수 있고, 지나치게 많다 싶은 휴지와, 휴지보다 부피가 적은 책들을 보면 그의 취미생활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가관인 것은 판촉물인 듯 보이는 곽티슈인데, 커다란 글씨로 ‘여대생 다방’(?), ‘69다방’(!)이라고 쓰여 있다. 이 미친놈아 이런 걸 부끄러워서 어떻게 집에 두고 쓰냐- 따졌는데, 三은 덤덤하게, 대구에서 엄마가 쓰라고 올려 보내주신 거다, 된장, 매실액, 고기 굽는 불판이랑 같이- 한다. 그러고 살펴보니 그 다방이라(고 주장하)는 곳 지역 번호가 053이긴 하다. 탈룰라.
아, 누가 이 집에 들이닥치기 전에 저 민망한 것을 소진해야만 하는데…….
4
그래서 휴방 중이었던 “남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가 다시 재개될 것 같다. 아 귀찮아.
5
참, K씨와의 만남은 그녀의 사정으로 또 미루어졌다고 합니다.
--- 읽은 ---
329. 사랑이 아닌 것은 별
사이하테 타히 지음 / 정수윤 옮김 / 마음산책 / 2020
나의 가치가 너의 욕망으로 규정될 정도라면, 나는 그런 가치 필요 없어. 사랑과 희망이라는 언어의 보호도 필요 없다. 죽은 물고기가, 러브레터로 만든 옷을 입고 있는 교실. 다 함께, 라는 말에 섞여들지 못하면 죽을 거래. 무서워.
외로움이, 나를, 너에게 팔고자 한다.
사랑해달라고 조르는 건 폭력이다. 그러니 꼭 끌어안고 싶다고 말해본다. 차라리 욕정으로 말하는 게 믿음이 간다고 했던 애가, 누구였더라. 아무도 좋아하지 않으면서, 그냥 결혼해 아이를 낳고 죽는 인생은, 평온한 행복감으로 가득했다.
너보다 훨씬 더 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네가 살아 있는 의미 같은 건 지워줄 듯한, 그런 살갗을 걸치고, 너는 살아 있다. 좋아해. 심장을 내민다는 각오로,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오늘도 우리 반 친구 하나가, 자기가 죽으면 여기저기 화제가 될 거라며 기회를 엿보고 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만 있다면, 그다음엔 죽어도 좋은,
폭력적인 감정 밤, 외롭니, 죽어도 외로워서,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그 사람을 버려두고 떠나며,
죽어보고 싶다 밤, 낮, 아침,
_ 사이하테 타히, 「교실」전문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들은 사실 모두 성욕이었다. 그러니 여러분 사랑에 목을 매는 일은 목을 매다는 일입니다. 멈추세요. 믿지 마세요. 그냥 죽자구요. 이 별을 좀 편하게 해주자구요-
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실은 좋은 사랑이라면 하고 싶은데 그 불가능성이 보여서 길고 느슨하게 좌절하고 환멸하다가 그것을 태도로 삼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환멸은 그냥 힙해 보이기도 하지만 제대로 힙하게 환멸하려면 적절한 배치, 배합, 배려, 자신을 향한 끝없는 배신 같은 것들을 달성할 줄 알아야 하겠다는 걸 배웠다. 나는 인간에 대한 환멸을 지니고 있는 편인데, 그동안 참 폼이 안 났겠구나 싶다.
330. 요리코를 위해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 이기웅 옮김 / 모모 / 2020
앞으로 험난하겠구나, 혹은, 이거 모터 달린 돛단배에 노 저은 듯 치고 나가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기까지 몇 페이지만 읽어봐도 충분한 것은 뭐 모든 책이 비슷하겠지만, 추리 소설은 유독 그렇다. 내게(내가 추리 소설을 읽는 데에) 잘 맞는 문체와 아닌 문체가 있고, 잘 맞는 경우 트릭 이해, 심리 이해, 동기 이해, 줄거리 이해, 심지어 작품 의도 이해까지 도합 십해가 일사천리로 획득되는 반면, 아닌 경우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의욕도 없고 하여간 없는 것 투성이인 독서로 끝나는 것. 처음 읽은 노리즈키 린타로는 앗, 이거다! 할 정도로 syo같은 추리 소설 삐약이에게 걸맞았다. 줄줄이 읽어나갈 생각입니다.
“그런 기대를 한다고 해도, 제가 그 사람들 구미에 맞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애당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잖아.” 경시가 쌀쌀맞게 툭 내뱉었다. “필요한 건 네가 등장함으로써 사건에 뭔가 곡절이 있다고 세상 사람들이 믿게 만드는 거지. 넌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을 정도야.”
“그렇게 뜻대로 될까요?”
“돼. 세상 사람들은 노리즈키 린타로라는 이름에 일종의 선입견을 갖고 있으니까,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멋대로 사식을 곡해할 거야.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다고 생각하고는 새 불씨를 찾아 나서겠지. 그러는 사이 누군가 ‘익명의 관계자’라고 자칭하며 시답잖은 소문을 흘릴 테고. 사이메이 여학원을 망가뜨리려는 음모가 있다느니 뭐니 하는, 멍청한 놈들이 환호할 유언비어를 말이야. 네 이름이 등장하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겠지. 진짜 불씨는 따로 있구나, 사이메이 여학원은 함정에 빠졌구나, 하면서. 스캔들이 무마되면서 학교 이미지도 지켜지는 거지. 그리고 네 사건 파일에는 미해결이라는 세 글자가 찍힐 테고. 이게 실제 시나리오야, 알겠어?”
“한심하군요.”
“그래, 한심하기 짝이 없는 시나리오야. 하지만 두고 봐, 분명 내 말대로 될 테니까.”
“그럼 제 입장은 뭐가 되죠?”
“그렇긴 하지.” 진절머리 난다는 목소리로 경시가 말했다. “아무리 그럴싸하게 꾸며도, 너 같은 건 높으신 분들의 편리한 선전도구에 불과해.”
_ 노리즈키 린타로, 『요리코를 위해』
331. 천국보다 성스러운
김보영 지음 / 변영근 그래픽 / 알마 / 2019
영희의 아버지는 깊은 슬픔에 빠져 있다.
그는 오십 세에 은퇴했고 일을 하지 않은 지 올해로 십 년이 되었다. 그는 소박한 사람이라 삶에 그다지 바라는 것이 없다. 부귀영화도 좋은 집도 세계 일주도 원치 않는다. 단지 삼시 세끼 따뜻한 밥과 된장국이 그의 방 앞에 놓이기를 바란다.
그는 이처럼 소시민적이 꿈을 이루기가 왜 이토록 고단한지 매일 의문한다. 어쩌면 강성주의자들이 젊은이들을 홀렸을지도 모른다. 공산주의자들이 뭔가 했거나 정부 차원에서 모종의 음모가 작동하는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야 나처럼 선량하고 무해한 사람이 이토록 구차하게 살 리가 있는가.
그의 아내는 그 대단찮은 노동을 참 힘들어했다. 참 게을러빠진 사람이었지. 남들 다 하는 일인데 뭐 그리 힘들다고. 평생 내가 벌어다 준 돈으로 먹고살았으면서 말이지.
나이가 들면서는 점점 밥하는 게 시원찮아졌다. 언제부터인가는 시들시들하며 병원에 입원했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더니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이제 누가 내 밥을 해주느냐고 육성으로 말하며 울었다. 딸애는 새벽녘에 나갔따가 저녁에야 돌아온다. 한동안은 여동생이 와서 밥을 해주었고 또 한동안은 조카애들이 왔다. 하지만 다들 슬슬 발이 뜸해지더니 이제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
무정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그는 신세 한탄을 한다. 요새 세상이 어떻게 되어먹었기에 아내까지 잃은 불쌍한 늙은이 하나 돌볼 사람이 없단 말인가.
그는 채널을 돌리며 구차함을 잊고자 한다. 그는 선한 사람이고 사는 게 별 볼 일 없다는 것도 이해한다. 그러다가도 고작 삼시 세끼 먹기가 왜 이리 서러운가 싶어 울화통이 터지곤 한다.
그는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