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에게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물론 아직도 나는 너를 사랑하는 편이지만, 해가 갈수록 조금씩 너를 견뎌내기가 버겁다는 생각은 해. 그건 내 탓일 수도 있고 네 탓일 수도 있으니 차라리 누구의 탓도 아닌 것으로 해두면 우리의 마음은 조금 더 편해지겠지. 하지만 오래 못 보다가 다시 만난 날에도, 저 멀리서 네가 손을 흔들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뒷걸음질을 치더라, 내가. 살짝이지만. 아, 결국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더라, 내가.
생각해보면 늘 그랬지. 네가 내게서 가장 멀리 있을 때 그렇게 사무치게 너를 그리워해 놓고서 막상 네가 곁에 바투 다가앉으면 나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웅크리기도 하고, 잡아달라고 내민 네 손을 못 본 체, 그냥 주머니에 손을 꽂고 종종걸음으로 혼자 앞서 걸어버리기도 했어. 그런 나를 보며 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다시 너를 멀리 보내놓고 밤을 혼자 지낼 때면, 몸도 마음도 덥고 지쳐 서늘한 너의 손길이며 시리게 아름다운 네 미소 같은 것들을 떠올리며 아, 다음 번에 만나면 웃으며 안아줘야지, 너를 붙들어 앉혀놓고 내가 얼마나 너를 그리워했는지 세세하게 말해줘야지, 다시 네가 돌아가는 그날까지 늘 웃으며 곁에 있어 줘야지, 그렇게 다짐을 하는데도, 막상 네가 돌아올 날이 하루하루 가까워지면 나는 또 겁쟁이가 된다. 너는 언제나처럼, 내게 한 번도 야속함을 느낀 적이 없었던 것처럼 새하얀 미소로 웃으며 다가올 것이고, 나는 너를 반기는 만큼 너를 피할 수 없음에 몸서리치며 너의 귀국을 마중하겠지. 네 얼굴을 보자마자 이번에는 얼마나 있다가 돌아갈 것인지를 손꼽아 헤아려 보겠지. 그렇게 혼자 옥상을 빙빙 돌며 네 생각에 짓는 한숨이 어느덧 하얀 입김이 되었는데, 영하야,
너는 오늘 새벽 남몰래 와서 내 옆에 누웠더라. 모든 창과 모든 문을 닫았는데도 언제나처럼 너는 그 모든 닫음을 소리 없이 열어젖히고 내 옆에 와서 조용히 누웠더라. 북쪽 나라의 바람을 헤집고 달려온 네 몸이 너무 시려서 새벽녘 나는 얕은 잠을 깨었고, 잠든 너를 두고 슬그머니 거실로 나와 물 한 잔 마시면서, 네가 내 공간에 아무렇게나 풀어놓은 으스스한 짐이며 옷가지들 때문에 또 한 번 소스라쳤다. 왜 너는 언제나 이토록 갑작스레 내 삶에 침투하는지, 왜 너는 점점 더 날카롭고 난폭해지는지, 왜 이렇게 몰아치고 쏟아붓는지, 네가 그런 존재임을 뻔히 알면서도 너를 사랑했던 나는 왜 갈수록 네가 낯설고 점점 더 참기가 어려운지, 불 꺼진 거실 테이블에 빈 물잔을 내려놓고 앉은 나는 이마를 싸매고 한참 네 이름을 속으로, 속으로만 불렀다, 영하야. 내가 없는 내 침대에서 차가운 몸을 조용히 웅크린 채 돌아올 나를 기다리고 있는 너, 영하야, 나의 영하야. 영하 2도야…….
넌 왜 점점 더 일찍 와서 늦게 가니. 제발 우리 어렸던 그 시절처럼 그냥 12월에 딱 맞춰와서 2월 끝나면 깔끔하게 딱, 응? 그냥 석 달만 딱 있다가 가면 안되겠니? 이러다 조만간 일 년의 절반을 니가 다 해먹겠구나, 영하야, 영하야, 아이고 제발 영하야…….
그러니 독자여, 나 자신이 내 책의 재료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경박하고 헛된 주제에 그대의 한가한 시간을 쓰는 것은 당치 않다.
_ 몽테뉴, 『에세』
--- 읽는 ---
에세 / 몽테뉴
연년세세 / 황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