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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2

 

 

 

1

 

점심에는 국수를 삶았다. 육수 우리는 과정을 MSG로 홀라당 대체해 보려고 간을 거의 스무 번쯤 봐 가며 아등바등했지만 결과물은 여지없이 근본 없는 맛. 썰어 넣은 김치가 착실하게 익어준 덕분에 그래도 겨우 먹을 만했다. 달걀은 세 개 익힐걸. 양파는 반 개만 넣을걸. 은 허겁지겁 국수를 마시고서 확정일자를 받고 전세대출을 연장하러 나섰다. 이 집에서 두 해 더 지낼 듯하다. 며칠 전에 계약서를 갱신했다. 느지막이 일어났고, 일어나 보니 성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2

 

가채점한 것보다 영어는 하나 더 틀린 모양이고, 물리는 메가스터디에서 예측한 것보다 등급이 낮게 나오긴 했지만 마킹을 잘못하거나 그러진 않은 것 같다. 최종 11242. 써놓으니 11132보다 압도적으로 후져 보이는 것은 4때문이겠지. 4가 뭐냐 싶다가도 국어와 수학에서 틀린 개수의 합만큼 물리에서 틀렸으니 4 뜨면 근본이지 싶고 그렇다. 3이었으면 질척거렸을 수도. 그러나 4라니 물리여 사요나라. 나는 내년쯤 생명과 함께 대학을 갈 테니 우리는 이제 필수과목 따위의 고지식한 얼굴을 하고서 캠퍼스에서나 다시 만나자.

 

국어 수학은 초음파 사진에서 보던 예쁜 모습 그대로 건강하게 출생해줬다.

 

 

 

3

 

정부는 오늘부터 킬러 문제이토 히로부미입니다 하며 척살령을 내렸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애초에 알고 있던 인강 강사들은 그냥 킬러 문제볼드모트쯤으로 취급하는 식의 대응 전략을 취했다. 이름은 부를 수 없지만 있기는 분명히 있는. 결과적으로 누가 옳았는가


어쨌든 나는 수능을 다 보고 성적표까지 받아먹은 이 시점에도 아직 정부가 말하는 킬러가 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킬러를 지목하고 사냥한 이유가 그냥 기분 나쁘고 싫어서인 게 아니라면, 그들의 목적이 대입 판에서 사교육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공교육의 효용을 높이는 것이었다면, 킬러의 정의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와 무관하게 그들은 100% 실패했기 때문이다. syo는 결국 내년에 또 수능을 볼 텐데, 앞으로 구할 수 있는 모든 사교육 자료를 전부 구해서 한없이 무한에 가깝게 풀고 시험장에 들어갈 생각이다. 아마 모든 수험생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을 사교육 시장은 당연히 캐치하고 있고, 목동과 대치동의 학원가는 유례없이 이른 시기에 개강을 했다고 한다. 성적표는 오늘 나왔지만, 2025학년도 수능 레이스는 지난주나 지지난 주쯤 시작된 모양이다.

 

 

 

4

 

성적이 발표되기 얼마 전 어떤 입시전문가의 글을 우연히 읽었다. 이런저런 표본을 통해 그가 내린 입결의 앞꼭지는 순서대로 <1.2.3.4.5.6.서울대>였다. 너무 새삼스러워서 아무런 놀라움도 주지 않는 결과였다. 세상은 그렇게 생겼다.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만 저명한 어느 지방 대학교의 약대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서울대를 가는 것보다 더 높은 점수가 필요하다. 메디컬 혹은 의치한약수라고 불리는 저 부동의 탑티어 학과의 TO는 현재 3,000여 석의 의대 정원을 포함 약 6,000자리 정도에 불과한데 올 수능에 505천 명이 접수하여 445천 명의 수험생이 수능에 응시했으니, 상위 1.3%만이 저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셈. 심지어 6,000자리 중 과반은 수시 모집으로 채워지니, syo처럼 오직 수능만으로 대학을 가려는 이에게 펼쳐진 길이란, , 이걸 길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실이라고 부르는 게 맞잖냐 싶을 정도로 가늘고 미세할 따름이다.

 

 

 

5

 

국어 수학은 역대급으로 어려웠다는 평이다. 특히 킬러 논란이 있는 수학 22번 문제는 정답률이 1.4%라고 하는데, 응시자 대비 메디컬 TO가 거진 그 정도라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결국, 시험이 어려워도 푸는 놈들은 푼다. 100점이 다 100점이 아니다. 100점 만점짜리 시험이라 어쩔 수 없이 100점이지, 어떤 애들이 100점짜리 100점인 와중에도 또 어떤 애들은 120점짜리 100점이다. 이 시험이 그런 것 같다. 시험장에 100을 가지고 들어가기 위해 120을 만드는데, 만들어야 할 점수가 100을 넘기는 시점부터 시간과 자본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그런 시험. 시험장에서 92를 받았다는 것은 그래도 100을 넘게 만들어서 들어갔다는 뜻이다. syo는 이미, 이 찐득찐득한 진창에 깊이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6

 

국어 수학이 어렵고 과학이 쉬운 시험에서 국어 수학을 잘 보고 과학을 못 보는 사람이라서 내가 좋다고 말해주는 여자친구가 좋다. 30대 중반까지 백수로 지내다가 덜컥 공무원이 되더니, 그것도 채 1년을 못 채우고 뛰쳐나와서는, 탱자탱자 놀기나 할 것이지 나이 마흔 다 돼서 수능 보고 대학생 되겠다고 설치는 이 별종을, 별종이라좋은 게 아니라 별종이라좋다고 말해주는 사람이어서 사랑할 만하고도 남음이 있다. syo는 앞으로도 계속 별종일 셈이어서 그렇다


나는 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는 데 망설임이 없는 만큼이나 하기 싫은 일을 그만두는 데에도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그러니까 지 멋대로 지 ㅈ대로 사는 개차반이기 때문에-, 내가 평범함과 무난함에 맞추는 게 아니라 평범함과 무난함이 우연히 내게 맞췄을 때에나 순간적으로 평범하고 무난해질 수 있었고, 대체로 그 만남은 스쳐감으로 끝났으므로 정신을 차려보면 언제나 나는 별종의 위치에 돌아와 있곤 했다. 자발적으로 궤도를 이탈한 어느 시점부터 나는 딱히 별나게 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별난 사람이었고, 어느 정도 별나게 굴어도 쟨 원래 저렇잖아- 하며 오히려 따뜻하게 보듬어 주는 별난 사람의 별나지 않은 친구들이 주변에 잔뜩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드디어 별나도 사랑해주는 사람들 가운데 별나서 사랑해주는 별난 사람이 나타나고 만 것이다.

 

별난 사람이 별난 사람의 손을 잡고 걸으면 별 거 아닌 골목길이 특별난 길이 되어 끝없이 이어진다. 끝없이 끝없이 걸어도 걸어낼 것만 같다. 끝없다는 게, 당연하고 별 거 아닌 일 같다.

 




  그 나무

 

  한 해의 꽃잎을 며칠 만에 활짝 피웠다 지운

  벚꽃 가로 따라가다가

  미처 제 꽃 한 송이도 펼쳐 들지 못하고 멈칫거리는

  늦된 그 나무 발견했지요.

  들킨 게 부끄러운지그 나무

  시멘트 개울 한구석으로 비틀린 부리 감춰놓고

  앞줄 아름드리 그늘 속에 반쯤 숨어 있었지요.

  봄은 그 나무에게만 더디고 더뎌서

  꽃철 이미 지난 줄도 모르는지,

  그래도 여느 꽃나무와 다름없이

  가지 가득 매달고 있는 멍울 어딘가 안쓰러웠지요.

  늦된 나무가 비로소 밝혀 드는 꽃불 성화,

  환하게 타오를 것이므로 나도 이미 길이 끝난 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한참이나 거기 멈춰 서 있었지요.

  산에서 내려 두 달거리나 제자릴 찾지 못해

  헤매고 다녔던 저 난만한 봄길 어디,

  늦깎이 깨달음 함께 얻으려고 한나절

  나도 병든 그 나무 곁에서 서성거렸지요.

  이 봄 가기 전 저 나무도 푸릇한 잎새 매달까요?

  무거운 청록으로 여름도 지치고 말면

  불타는 소신공양 틈새 가난한 소지(燒紙),

  저 나무도 가지가지마다 지펴 올릴 수 있을까요?

김명인, <그 나무전문 

 

 

--- 읽는 ---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 이수영

에이스 / 앤절라 첸

가면들의 병기창 / 문광훈

 

 

 

--- 읽은 ---


2. 다정소감

김혼비 지음 / 안온북스 / 2021

 

나는 조금 더 들여다보기로 했다. 다정함이란 들여다보는 눈에서 싹터 마주보는 눈으로 번져가는 꽃불 같은 것이라, 모든 다정은 시간을 들여 그윽하게 들여다보는 일로부터 시작하게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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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12-08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나 며칠 전에 저 시 기출문제 풀었다... 생명체라면 역시 생명과학이죠!!!! 25학번 syo님과 나새끼를 응원합니다. ㅋㅋㅋㅋㅋㅋ이오 그거 목성의 위성 아닌가? 아득하지만 활활 불타고 있다니까! ㅋㅋㅋ

syo 2023-12-10 13:28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25라니! 우와 학번이 스무개나 튀었어요! ㅋㅋㅋㅋㅋ 서글프고 신명난다....

반유행열반인 2023-12-10 14:54   좋아요 0 | URL
저는 스물 두 개…25학번 안 되면 26학년도 수능 감독관 위촉 예정…서럽고 이명난다…

새파랑 2023-12-08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242면 엄청 잘본거 아닌가요? 내년에는 11111 이시길 응원합니다~!!

그런데 저 순서는 국영수사과 인가요? ㅡㅡ

syo 2023-12-10 13:2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ㅎㅎㅎㅎ 11111쩌네요 되면 성적표 인증해서 겁나 잘난척해야지

반유행열반인 2023-12-09 07: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국수영과과(물리지학) 순서예요 ㅋㅋㅋㅋ

2023-12-09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10 1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12 1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23-12-23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토비님!!! 이제 알라딘 떠났나 해서 서운했는데 아니군요!!!! 저도 넘 뜸하게 와서리~~~.^^;;;
어쨌든 토비님의 학업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다정한 분이 옆에 계시다니 넘 좋네요!!!!^^
 


 

매일매일 우리는

 

 

 

매일에 매일을 덧붙여 매일매일을 만드는 마음이 가벼운 장난이나 의미 없는 기교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와의 온전한 하루가 쏜살같이 달려가고, 취한 마음 부여잡고 내리막을 사박사박 걸어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꼭 잡은 손위로 노을이 아른아른 내릴 때, 연인은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하루여서, 이것이야말로 하루여서, 혼자 돌아오는 오르막길 위에 저녁 그림자처럼 녹아 아련하게 아련하게 사라질 이 마음이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하루를 모든 것이 다 들어있는 하루로 만들어주는 마술이어서, 매일을, 오롯한 열망으로 매일을 생각할 것이다. 이 하루가 매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스라치게 기뻐서, 매일에 매일을 덧붙여 매일매일이라는 말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감히 감당키 어려운 욕심을 부린 건 아닌가 철렁한 마음에 괜스레 도둑눈을 하고 저녁의 이곳저곳을 찔러볼 테다. 바닷물처럼 많은 날들 위로 오늘이 한 방울의 빗물로 부딪혀 그 모든 물들을 오늘 이전의 날과 오늘 이후의 날로 가르는 기적이 일어나면, 오늘부터 그의 세상에서 매일과 매일매일 사이의 간격은 가벼운 장난이나 의미 없는 기교가 아니게 된다. 세상의 모든 말들이 그렇게 된다. 순간의 모든 페이지에 주석이 달린다.

 

 

 

 

--- 읽은 ---


1. 우리는 매일매일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

 

예술이란 모순을 대하는 방식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모순을 만나면 어떤 예술은 그것을 부수려고 하고, 어떤 예술은 그것을 에두르며, 어떤 예술은 그것을 섞어 한 덩어리로 만들려고 한다. 어떤 예술은 그것을 체념하고 어떤 예술은 그것을 승인하며, 또 어떤 예술은 그것을 혐오하거나 사랑하거나 혐오하면서 사랑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예술의 앞에 모순과의 마주침이 존재한다. 결코 피할 수 없는 만남이 있다. 이것은 비단 예술의 이야기만은 아니어서, 이 앞 문장들 속의 예술이라는 단어를 전부 인간이라고 바꾸어도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활자는 차원이 없으나 인간은 입체이기에 반드시 맞닥뜨려야 할 모순이 있다. 시가 모순과 어떤 춤을 출 때, 독자는 가만히 그것을 관조하며 자기 자신의 전략을 재점검한다. 나는 내게 육박하는 모순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그리하여 나는 어떤 형태의 인간이며 또 어떤 양식의 예술인가. 이 물음 또한 하나의 모순임에 틀림없어서,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독자는 시집을 덮어도 시를 읽고 있다.

 

 

  

--- 읽는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 안드레 애치먼

세계사라는 참을 수 없는 농담 /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세금의 모든 것 / 김낙회

친절한 강의 대학 / 우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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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11-21 0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올해 읽은 첫 책이 시집인 문학(쪼끔 밖에 안 틀린) 쇼년(욕 아님) syo님 ㅎㅎㅎ 원조 시 독자 없어서 제가 시 많이 읽는 어린이 취급 받는 요지경이 그간 펼쳐졌더랍니다…

syo 2023-11-25 11:59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반님 정도면 시 많이 읽는 거 맞죠!
한국 독서판에서 시라는 것은 읽는 순간 바로 많이 읽는 게 되는 미친 장르입니다!
 

  

성묘 가다 30분만에 락킹 고수 된 썰 푼다

 

야트막한 산도 산은 산일진대 반바지를 입고서 그 산을 오르겠다고 깝치는 멍청한 오라비를 위해 내 동생이 다이소에서 구매한 모기 기피제를 고소할 수 있을까. 겉면에 이 제품으로 기피되는 벌레는 모기진드기라고 명백하고 한정적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실제로 모기와 진드기로 인한 피해가 거의 없었으니 제품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영문 모를 달콤한 향을 첨가하여 그 향기에 대취한 모기진드기이외의 칠만 육천 가지 날벌레들이 syo와 동생의 주변에서 광란의 연회를 벌였다는 것이 문제다. 여름날 밤 가로등 아래 서서 고개를 쳐들면 수백 마리 날벌레들이 전구 주변을 배회하는 것을 목도할 수 있는데, 그 전구 대신 소켓에 내 머리를 끼워 놓고 산에 올라가는 기분이라고 하면 적당하겠다. 산어귀부터 묘소까지 가는 20분 거리는 체감상 20년쯤 되는 대방랑의 여정이었다. 가만히 서 있으면 무슨 꿀벌 아저씨처럼 벌레로 만든 옷을 입고 엄마 안녕 나 왔어 내 새 옷 좀 볼래/벌레? 하게 생겼으므로 급한대로 언 발에 오줌 눠야 할 판이었던거라, syo는 손수건을 꺼내 휘두르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벌레에 시달리느라 비명을 지르며 뒤따라오던 동생이 syo의 현란한 동작에 감탄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으아아아바아아벌레새끼들아아으아으아아근데오빠야락킹잘추네으아아아벌레우으이우와우!

 

락킹이 뭐 이런 것인 모양

 

 

다소 침체된 성묫길에 분위기를 화려한 롹킹 퍼포먼스로 불지르고 싶은 분들께, 다이소 모기 기피제, 아 강력 추천합니다!

 

 

 

--- 읽은 ---

 


4.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지음 /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

 

 

표지에 떡하니 박혀 있듯, 원제는 “Why Fish Don’t Exist”이다. 거칠게 풀면 왜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가식의 의문형으로 풀 수 있는데, 번역본 제목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이다. 큰 차이가 있을까? 내가 읽기에 작지 않은 차이가 있다.

 

진짜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아직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명제처럼 공지의 사실이 되지 못했다. 과학적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사람들의 인식에 어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 꼬리, 저 지느러미, 저 비늘, 저게 물고기인데, 내 눈에 그렇게 보이는데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니? 그러나 하늘을 올려다보면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실 도는 것은 지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즉각적 인식과 다른 과학적 사실에 대한 사람들의 확고한 믿음. 지동설에는 그런 것이 있고 물고기 부존재설에는 아직 그런 것이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가 지동설만큼의 과학적 위상을 가질 수 있도록 사람들의 인식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보다, 오직 지금에만, 물고기 부존재설이 아직 지동설만큼의 위치를 획득하지 않은 지금에서만 우리가 물을 수 있는 질문이 있다는 사실이 훨씬 중요하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혹은,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같은 질문들. 더 나중에는 이런 질문이 의미가 없어진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시대에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 세상에 산다는 것이 내게 어떤 의미인가 하는 질문은 개인의 삶과 세계의 질서를 흔들 만큼 거대했지만 오늘의 우리에게는 큰 의미가 없듯이. 따라서 바로 지금, 우리는 이 질문에 천착해야만 한다. 때를 놓친 질문은 질문의 모습으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들은 언젠가 윤리나 정치로 모습을 바꾸고 돌아와 우리의 지난 무책임과 무관심을 비난한다.

 

질문에 대한 저마다의 대답이 저마다의 인생을 반영한다. 그래서 질문의 형식이 조금 더 걸맞다. 왜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나요? 하는 질문의 과학적 답변은 과학자들이 만들 일이고, 우리의 답변은 우리가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죄다 뭔 놈의 물고기 폐병 걸려 기침하는 소리인가 싶으시겠지만, 읽어보시면 뭔 소리인지 알 수 있으십니다…….

 

  

 

--- 읽는 ---

교양 노트 / 요네하라 마리

미식가를 위한 식물 사전 / 스쥔

필로소피 랩 / 조니 톰슨

저도 의학은 어렵습니다만 / 예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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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7-25 11: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빈대 잡는다고 초가삼간 태워 먹는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모기 진드기 기피하느라 온갖 잡다한 벌레들은 다 불러들이고. 그 회사 참 어쩌라는 건지. 애처롭네요. ㅋㅋ 제목이 참!

근데 동영상 나름 환호하는 것 같은데 운동화를 던져 식겁했습니다.
너무 격한데요?ㅋ

반유행열반인 2022-07-24 21: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속도라면…저의 올해 독서 7권은 금세 따라 잡으시겠네요…뒤쳐지는 자의 슬픔…
즈이 집에는 뽀로로가 그려진 스프레이랑 롤링? 물파스 같은 모기 기피제가 두 종이나 있는데 몇 년 전 동남아 방문 이후에는 사용하지 않아서 그걸 빌려드릴 걸 그랬죠…냄새는 그냥 상큼한 모기약(읭) 수준이고 벌레가 꾀는 건 못봤는데…이래서 저는 다이소 싫어해요.(집의 어른들은 죄다 다이소 매니아라 맨날 뭘 번갈아 사오셔서 늘 난감합니다…저거 딱 가격만큼인 것을 하고…) syo님의 락킹ㅋㅋㅋㅋ 왜 어떤 광경인지 알 것 같지ㅋㅋㅋㅋㅋ

얄라알라 2022-07-24 21: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syo님

지난번 페이퍼에서,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를 못 드렸는데(실은 어떻게 잘 인사드릴 수 있는지 어색하고 뻘쭘해서 안 드렸는데)
다녀오셨군요.
그런데, 세상에나 날벌레의 광란의 춤, syo님과 동생분 역시 비자발적 락킹을 피하실 수 없었군요.

그나저나 올려주신 동영상 넋 놓고 보았습니다. 스우파에서 립제이가 잘 추는 장르가 랑킹이라 해서 한 때 열심히 유투브 찾아다녔는데 syo님 올려주신 영상 딱 제 취향입니다!

페크pek0501 2022-07-24 23: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우!!! 춤 홀딱 반하게 되네요. 올려 주신 영상 잘 봤어요. 마치 필름을 빨리 돌리는 듯한 동작들. 얼마나 연습을 열심히 했으면 저런 경지에 가게 되는 걸까요? 존경스럽네요.

언젠가 티브이에서 본 것, 바다 속에 쓰레기들이 많아 그 쓰레기에 걸려 물고기들이 죽어가는 장면이었어요.
그 피해가 결국 인간에게 돌아올 터인데 생태계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자연을 아름답게 지키는 게
인간에게 이롭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겠어요. 그런데 <물고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은 제가 말한 것과 관련성이
있는지요?
<교양 노트>는 제가 완독한 책이어요.^^

mini74 2022-07-25 10: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왜 자꾸 웃음이 나지요. ㅎㅎ 저도 얼마전에 아버지 뵙고 왔는데 청바지를 뚫더군요. 온통 다리가 울퉁불퉁합니다. 무서운 존재들. 저는 락킹은 못하고 고스란히 내어주고 왔습니다 ~ 물고기 폐병 걸려 기침하는 소리 ㅎㅎㅎ 역시 넘 재미있으세요 👍

2022-10-06 14: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2-25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입이 있어도 입이 없는 동거남

 

 

 

1

 

은 더위를 잘 참고 syo는 추위를 잘 참는다. 이렇게 말하니 긍정적인 인간 같아 보이는군. 고쳐 말하면, 은 추위를 잘 못 참고 syo는 더위를 잘 못 참는다. 이렇게 말하니 또 이번에는 글쓴이의 심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군. 문장을 조금 더 진실 방향으로 끌고 오면, 은 여름만 되면 syo를 냉면집 육수 주전자 취급하고 syo는 겨울만 되면 을 매미 유충만도 못한 놈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다시 여름이 왔고, 이제는 내가 수비할 시간.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서, 덥긴 하지만 그 정도라고? 난 잘 모르겠는데- 이지랄 하면서 이죽거리는 꼴을 버텨낼 시간. 이틀 전에 그가 처마신 맥주캔은 아직 모니터 옆에 있다. 언제 치우나 본다, 내가.

 

 

 

2

 

열대야하고 모기는 대체 왜 존재해야 하는지, 누가 날 좀 설득해주기라도 하면 좋겠다. 납득이라도 하면 덜 빡칠 듯.

 

 

 

3

 

모든 연애가 다 이렇게 흘러간 것은 아니지만, 요즘 생각으로 연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감각기관은 입인 것 같고, 이번에는 나름 입이 충만한 연애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말을 하는 기관 말고, 감각기로면 따지면 입은(주로 혀는) 미각을 담당한다고 보는데, 사랑할 때 입은 촉각 기관의 역할도 한다. 오직 사랑할 때만 그렇다. 입으로 촉각할 수 있는 사이는 어떤 종류든, 어떤 형식이든, 사랑의 일종이다. 혀와, 입술, 그리고 이로 매만질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다(물론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3.5

 

그러니까 양치를 잘하자고.

 

 


3.55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3.8


그러니까 아 너는 대충 해도 되겠다.

 

 

 

3.85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4

 

읽고 있는 책 두 권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알고 고른 것은 아니었는데. 병렬 독서의 맛은 이럴 때 증폭된다.


  

말에는 본래 국가도 없고 국경도 없다. 국경을 그어 놓은들 말들은 수시로 국경을 넘는다. 한국이라는 국가 내부의 말들도 마찬가지다. 지역이나 사회적 조건에 따라 다양한 변이들이 존재하며 이들 변이들의 경계 또한 모호하다. 심지어 어떤 변이들은 수시로 끊임없이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넘나든다. 말들은 결코 균질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어'라는 가공품의 '발명'은 이러한 차이를 일거에 제거해 버린다. 한국어라는 말 속에는 '언어=영토=국민'이라는 성스러운 삼위일체의 구도가 숨어 있다. 그리고 이 구도를 통해 한국 영토 안에 거주하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동일하고 균질한 하나의 한국어를 사용한다는 환상이 만들어진다. 이 환상을 만들어 내는 장치는 다름 아닌 표준어 제정이다.

  표준어 제정 과정에는 우생학과 위생학이 개입한다. 우생학적 처리 과정은 서울 말을 우등한 것으로, 지역어를 열등한 것으로 만들어 표준어에서 지역어를 제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다음은 위생학적 처리 과정. 이 처리 과정을통해 토착어가 아닌 외래어들은 '오염된 말'이 된다. 순수한 언어란 있을 수 없지만 만들자면 쉽게 만들 수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어떤 것을 오염된 것으로 지목해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는 순수한 것이 된다. 이런 가공 과정을 거쳐 한반도라는 명확한 영토와 경계를 가진 '한국어'가 발명된다. 이 한국어는 그냥 한국어가 아니다. 우생학과 위생학으로 담금질된 '우수하고', '순수한' 한국어다.

_ 백승주, 미끄러지는 말들

 

어떤 것이 잠재적으로 순수한 것(가령, 자연, 문화적 정체성, 기원, )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데리다처럼 읽기 시작한다. 아마도 우리가 어떤 것을 순수하다고 간주하게 되는 것은, 어떤 발화자 또는 작가가 순수성이라는 이상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거나, 또는 우리가 어떤 용어들이나 개인들을 아주 빠르게 비자연적이거나 위협적으로 간주함으로써, 오로지 그렇게 간접적인 방식으로, 그 어떤 것의 순수성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위협에 '타자(other)'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떤 이상에 대해, 타자가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말과 위협이 된다는 말을 동시에 듣게 된다. 때때로 약물은 자연적인 신체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런 진술은, 자신의 이름으로 [스스로 척도가 되어] 약물을 폄하시키고 있는 그 '자연적 신체'의 일관성에 의문을 붙이게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적 신체라는 이상이 유동적인 것이라면, 자연적 신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_ 페넬로페 도이치, HOW TO READ 데리다

 

자체로 완전 신박한 내용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번에 눈여겨 읽는 포인트는, 애초에 순수한 것이 있어서 오염된 것들을 제거해서 거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염을 정의하고 제거하여 남은 것을 순수라 상정한다는 것. 그러니까 순수는 목적지가 아니라 오염이라 정의한 것들을 제거하기 위한 명분이고 수단으로만 동작한다. 나쁜 놈들이 순수를 악용해서 타자를 오염이라 정의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악용할 순수가 없고 그저 이용되기 위해 추후에 탄생한 순수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후려치면, 권력이나 권력을 지망하는 이가 오염을 만들고, ‘오염순수를 만드는 셈이다.

 

언젠가부터 모든 정의로움은 그 정의로움을 모두의 정의로움으로 만들 생각으로 권력을 추구하는 이들의 깃발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라, 힘이 미치고 미치지 않음이 중요하다. 모든 역사가 그저 승자의 역사라면, 모든 정의는 고작 수긍하는 자의 정의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마다 정의로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 세상인데도, 여기가 정의의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한참 드문 것이다.

 

 

 

--- 읽은 ---



1. 쓸모없는 수학

김동진 지음 / 좋은땅 / 2022

 

우리는 일상에서 이러한 노력을 의식하지 않고 삽니다. 분명히 활용하고 있으면서도요. 1년의 주기 속에서 계절마다 오는 변화에 미리 대비하고, 1주일의 주기 속에서 요일마다 여전히 일어날 일들을 대비하며 살아갑니다. 반복되는 사랑과 이별에 익숙해지면서도 새로운 사랑을 찾고, 잦은 실패의 경험에서도 배울 것을 찾습니다.

  하지만 변화하는 세상은 우리의 감각을 통해 너무 강렬히, 그리고 직접 다가옵니다. 보이지 않는 정신 활동으로 일궈낸 우리 삶의 관성과 항상성은 뒷전으로, 또는 당연한 것으로 밀려납니다. 물에 사는 물고기가 물을 알지 못하듯이 우리는 변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채 삽니다. 변화에 대비하기 급급하죠. 수학은 변하는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보려는 노력입니다.

_ 김동진, 쓸모없는 수학

 

무려 올해의 첫 책이니까 이건 리뷰를 써야 한다. 그것은 사람의 도리.

 

 

 


2. 어느 보통 독자의 책 읽기

버지니아 울프 지음 /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22

 

가능한 한 온갖 기분을 다 맛보고, 온기를 찾아 이쪽으로 또 저쪽으로 몸을 돌리자. 그리고 해가 지기 전에 젊음의 키스를 마음껏 즐기고 카툴루스를 노래하는 아름다운 음성의 메아리를 즐기자. 모든 계절이, 궂은 날이나 화창한 날, 적포도주와 백포도주,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나 혼자 있는 것, 모든 것이 좋아할 만하다. 삶의 기쁨에 제동을 거는 잠조차도 꿈으로 가득 차 있다. 걷기, 말하기, 자기만의 뜨락에서 홀로 있기처럼 극히 평범한 행동도 정신이 뻗어 나갈 때면 고양되고 조명된다. 아름다움은 어디에나 있으며, 아름다움은 선함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니 건강과 맑은 정신의 이름으로, 여행의 끝에 대해서는 길게 생각하지 말자. 죽음일랑 우리가 배추를 심는 동안이나 말을 타고 가는 동안 찾아오게 하자. 아니면 어느 시골집으로 달아나 낱선 이들이 우리 눈을 감겨 주게 하자. 누가 흐느껴 울거나 손길 닿는 것이 우리를 못 견디게 할 테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바라기는, 죽음이 우리가 평상시처럼 하던 일을 하는 중에, 아무런 항의도 애곡도 하지 않는 소녀들이나 선량한 벗들 가운데로 찾아오게 하자. 그가 우리를 <노름, 잔치, 농담, 범상하고 속된 이야기와 음악과 사랑 노래 가운데> 찾아오게 하자.

_ 버지니아 울프, 어느 보통 독자의 책 읽기

 

나는 만연체를 사랑하고, 깐깐한 이들이 볼 때 번역투가 다 빠져나가지 않아서 고칠 데가 많아 보이는 그런 문장을 사랑하고, 어려운 말과 아름다운 말에 조금쯤 욕심을 부려 만들어 놓은 문장을 너무너무 사랑한다. 그렇지만 사실 울프의 문장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짧은 식견이지만, 내가 읽은 에세이 속 울프의 문장은 예를 들면 소로의 문장보다 지혜롭지 않고, 리베카 솔닛의 문장보다 아름답지 않다. 그렇지만 울프의 문장에는 어떤 치열함이 있다. 특히 책을 다루는 글에서 울프는 치열한 글쓰기가 뭔지 보여준다. 이미 책과 한바탕 싸우고 난 후의 경과를 보고하는 글임에도, 가끔은 지금 이 순간도 책과 싸워내는 중이구나- 싶을 정도의 현장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말로 설명하기가 참 어려운데, 서평이나 독후감을 오래 써 본 사람은 아는, “책 읽은 글만이 가지는 독특한 장벽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을 넘기 위해 내 독서는 책을 어르고 달래는 독서가 되어야 할지, 책을 던지고 찢으며 이겨 먹는 독서가 되어야 할지, 아니면 그저 관조하고 바람 같은 웃음을 남기며 지나치는 독서가 되어야 할지, 그런 질문과 마주하면서 우리는 책 읽은 글을 쓴다. 우리에게 울프가 가르쳐 줄 수 있는 부분이 그 중에 있다.

 

그러나 당연히 보통 독자라는 것은 기망. 친절하지도 쉽지도 않다. 어지간한 사람들을 몽땅 보통 이하로 만들어버리는 일종의 저주 같은 제목이다.

 

 

 


3. 질문하는 삶

류대성 지음 / 현암사 / 2019

 

개인의 삶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한 사회는 개인과 개인의 결속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공동체다. 나와 타인의 관계를 돌아보고 내 생각은 어떻게 결정되었는지, 나는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그 결과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만큼 타인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우리 사회가 지향하느 목표와 가치를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면, 오늘도 내일도 같은 날의 반복이다.

  얄팍한 지식과 허세, 수많은 성공 비법과 처세술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고 두벅뚜벅 자기 길을 걷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속적인 사유와 고민이다. 주체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사람에게 행복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향기 나는 삶을 원한다면 향수 대신 서가에 꽂힌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내야 한다. 생각의 무능함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인류 사회를 불행하게 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 자기 이익을 위한 침묵과 외면은 결국 더 큰 절망으로 돌아온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면 나와 세상 사이에 놓인 외나무다리를 홀로 건널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_ 류대성, 질문하는 삶

 

우리는 지금 답이 부족한 시대가 아니라 질문이 부족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것 같다. 정말이다. 세상에 답은 너무도 많이 널려 있어서 키보드 몇 타만 두드려도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정작 질문이 부족하다.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그렇다. 무얼 물어야 하는지 몰라서 묻지 않다 보니 어떻게 물어야 할지도 모르게 된다. 어떻게 물어야 할지 모르니 물을 게 생겨도 제대로 묻지 못한다. 악순환이다.


질문하는 삶이란 결국 사유하고 고민하는 삶을 말한다. 이렇게 요약하는 순간, 이 책은 범상한 책이 되어 버린다. 사유하고 고민 좀 해라 제발 좀- 하는 책들은 무수히 많고, 최소한 그런 책을 읽는 사람들은 자신만큼은 그래도 사유하고 고민하는 사람 중 한 명일 거라고 생각한다(착각일 확률도 꽤 크다). 결국 역시 이 책도, “이 책을 읽어야 할 이들은 이 책을 읽지 않고, 이 책을 읽지 않아도 되는 이들만 이 책을 읽는 그런 이 책중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범상함과 무가치는 전혀 다른 평면의 이야기다. 인용구의 마지막 부분 향기 나는 삶을 원한다면 향수 대신 서가에 꽂힌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내야 한다. 생각의 무능함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인류 사회를 불행하게 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 자기 이익을 위한 침묵과 외면은 결국 더 큰 절망으로 돌아온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면 나와 세상 사이에 놓인 외나무다리를 홀로 건널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하는 이 대목은 범상하지만 정론이고, 범상하여 정론이며, 정론이어서 범상하다. 정론이지만 범상하다-는 평은 범상한 평에 불과하다. 정론은 범상함과 상관없이, 그저 곧게, 꿋꿋이 쫓아갈만 한 가치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정론이라 부른다.

 

 

 

 

--- 읽는 ---

그러나 아름다운 / 제프 다이어

미끄러지는 말들 / 백승주

HOW TO READ 데리다 / 페넬로페 도이치

타인에 대한 연민 / 마사 누스바움

화해의 몸짓 / 장성욱

에세 / 미셸 드 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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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1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7-07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2-07-07 18: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Syo는 지금 키스가 충만한 연애를 하고 있다는 거죠? 삼님은 여전히 못하고?? ㅋㅋㅋㅋ

syo 2022-07-07 18:14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북다이제스터 2022-07-07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독서의 세계로 다시 오심을 환영합니다. ^^
한번 맛보면 좀체 벗어나기 어려운 세계로… ^^

syo 2022-07-21 22:28   좋아요 1 | URL
댓글이 늦었습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치만 다시 완전히 발을 담근 것은 아니고 또 그렇다고 발을 끊은 것도 아니고, 이게 당최 뭔지 저도 잘....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2-07-07 2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양치를 잘하자 필기…(왜? 이 썩지 말라고…) 저 올해 독후감 다섯 개 썼는데 syo님은 이제 3번임? (아직은 내가 이겼다…) 3이 친구라서 올해는 3권만? 30권만 읽나요?ㅋㅋㅋㅋ 얼른 300권 읽는 나날 탈환 기원합니다.

syo 2022-07-21 22:30   좋아요 2 | URL
댓글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ㅎㅎ
아마 올해는 50권 언저리에서 마무리되지 않을까 하는 짐작입니다.
탈환 기원 말씀은 힘이 되긴 하는데, 아무래도 300권 읽는 나날은 이제 오지 않을 것 같고, 이젠 그렇게 많이 읽기를 바라지도 않는달까요...

새파랑 2022-07-07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입이 충만한 연애를 하고 계시는군요 ^^ 이 기세로 여름이 가기 전에 100권 읽으실거 같아요~~!

syo 2022-07-21 22:31   좋아요 2 | URL
입충연ㅎㅎㅎㅎㅎㅎ 댓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기세 같은 거 없어서 여름은 물론이거니와 올 한해 다 해도 100권은 못 읽을 것 같아요 ㅎㅎ

mini74 2022-07-08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제시대 없애버린 우리 글이 제주방언엔 여전히 살아있다고 , 이 발음들이 남아있었음 영어발음하기도 좋았을거람 다큐 본적이 있어요. 대구사투리에도 옛말이 남아있답니다. 글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는데 왜 삼님 이 안 닦아도 되겠다는 문장만 각인된건지 ㅎㅎㅎ

syo 2022-07-21 22:32   좋아요 1 | URL
댓글 늦어서 죄송합니다.
중요한 내용은 전부 숙지하셨네요. 각인하신 문장 딱 그거 하나 쓰려고 다소 장황한 글을 쓴 거라고 보셔도 됩니닼ㅋㅋ

stella.K 2022-07-08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키스만큼 내로남불도 없죠. 남이하면 드러분 것 같고 내가하면 탐욕적이 되고.ㅋㅋ
최근에 알았는데 모기도 아주 무익한 건 아니라더군요. 근데 그 이유가 있다는데 그걸 못 들었슴다. 아놔...
지난 달 모기한테 왕창 뜯겼는데 소리없이 뜯기니 대책이 없더군요. 무더우면 오히려 안 뜯기는데 입추 모기는 대단하죠.

syo 2022-07-21 22:34   좋아요 2 | URL
주거지가 산간지방(?)이어서 모기가 반쯤 산모기거든요.
이놈들은 발견이 잘 돼서 뜯길 확률은 적은데, 대신 한 번 뜯기면 노멀모기한테 세 번 뜯긴 기분이어서 영 언짢습니다.
모기도 유익한 데가 있다니, 놀랍긴 한데 그냥 모르고 살면서 평생 저 쓸모없는 벌레새끼들- 하면서 욕치고 살고 싶습니다....

답이 늦었습니다.

바람돌이 2022-07-09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syo님의 시원한 글을 읽는 재미를 느낍니다. 어서오세요. 다시 오셔서 반가워요. ^^
미끄러지는 말들 재밋을 것 같아서 담아가고, 버지니아 울프가 자신을 보통독자로 지칭한다는데 분노하고 갑니다. ^^

syo 2022-07-21 22:35   좋아요 1 | URL
댓글이 늦었습니다.

보시다시피 한 달에 두어번 들르는 수준이네요. 민폐다.....

미끄러지는 말들 나쁘지 않습니다. 울프는 나빴구요......
 

 

에세(KT&G)말고 에세(몽테뉴)를 사야 합니다

 

 

 

1

 

내 안의 나를 얼마나 온전히 꺼내어 세상에 내보일 수 있고 또 얼마나 설득력 있게 이것이 진정한 나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는 그저 표현의 문제일 뿐, 그와 별개로 내 안의 나, 그러니까 진짜 나라는 건 나 혼자, 그리고 오직 나만이 빚어나갈 수 있는 그릇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는 나라는 것이 내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을 잘 만드는 것과 자기 자신을 잘 표현하는 것, 그 두 가지겠다고 판단했다. 읽는 것과 쓰는 것. 그저 자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었고, 그것 이상으로 더 나아갈 수는 없겠다고 진작부터 생각했기 때문에, 결국 syo는 반드시 몽테뉴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



우리 모두는 생각하기라는 이상하고도 재미난 과정에 즐겨 빠져들지만무슨 생각을 하는지 맞은편 사람에게 말해 보라고 하면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적은가! [펜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적으며또 펜에는 그 나름의 습관과 격식이 있다펜은 독재자처럼 군림하여 보통 사람들을 예언자로 만드는가 하면통상 머뭇거리게 마련인 인간의 언어를 엄숙하고 당당한 행진으로 바꿔 놓는다몽테뉴가 뭇 망자들의 무리 가운데서 단연 생생하게 두드러지는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그의 책이 그 사람 자신이라는 것을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의심할 수 없다그는 가르치기를 거부했고 설교하기를 거부했다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고 거듭 말한다그의 모든 노력은 자기 자신을 글로 쓰고 전달하고 진실을 말하려는 것이었으며바로 그것이 <보기보다 거친 길>이다.

자신을 전달한다는 어려움 너머에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더 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몽테뉴버지니아 울프어느 보통 독자의 책 읽기

 

1,0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몽테뉴의 두꺼운 중역본을 껴안고 뒹굴기에 반지하 하숙방만큼 적절한 곳은 없었다. 어차피 하루에 한 꼭지 이상을 읽지 않았으니 차라리 도서관 서가에 꽂아놓고 읽으러 다닐 수도 있었지만, 굳이 빌려와 읽고 반납하고 다시 빌려오기를 반복하며 한 계절 긁었던 이유는 그 책이 그런 책이기 때문이다. 나를 제외한 것들을 다 제외한 공간에서 길고 느른하게, 한 문장 한 문장을 곱씹기보다 그 문장을 곱씹고 있는 자신을 곱씹으며 읽어야 좋을 그런 책. 몽테뉴의 에세는 그렇게 읽을 글이고, 동시에 그렇게 읽을 글들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주는 글이어서, syo는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syo가 원하던 syo가 되고 있었다. 내 안의 나를 만들고, 드러내고.

 

 

 

1.3

 

그 시점을 반환점으로 찍고 삶을 반으로 접어서 끝과 끝을 맞대면, 지금 syo의 나이는 아마 처음 글자를 읽기 시작하던 즈음의 나이와 맞닿겠다. 오늘의 syo가 생각건대, 온전한 나라는 것은 내 안에 없다. 내 안에는 물론 다량의 내가 있지만, 나를 아는 사람들, 내가 한 일들, 쓴 글들, 뱉은 말들 속에 소량의 내가 흩어져 있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는 좌표로 찍히는 게 아니라 이 세상 전체에 장으로 펼쳐져 있다는 것이 최근 몇 년 syo가 딛고 있는 존재론이다. 자기장自己場.

 

그러니까 나는 나만 뒤져서는 죽는 날까지 나를 다 알 수가 없다. 내 밖에도 나에 대한 진실은 산재해 있다. 그것이 나의 파편임을 인정하는 것이 불편하거나 불가능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나만이 나를 독점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는 생각은 분명한 오만이다. 세상이 나를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한 세상의 오해와 나에 대한 나의 오해 사이의 어느 지점에 섬처럼 내가 있고, 아직 그 섬에 누구도 가보지 못한 것에 불과하다. 나에 대한 타인의 관념이 나에 대한 나의 관념과 다르더라도 그 양쪽이 모두 부분적인 나며, 그 불일치를 일치시키기 위해 내가 애를 쓴다면, 그건 나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 일이 아니라 나를 고쳐 만드는 일이다. 그렇게 보면 모든 자기변호는 사실상의 자기계발이고, 자기에 대한 글쓰기는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한 만들기인 셈이다.

 

 

 

1.8

 


오랜만에 알라딘에 들어왔더니 신간이 산간처럼 쌓였는데, 그 중 에세가 제일 눈에 띈다. 그렇지 않아도 다시 읽을 때가 왔다. 2,000페이지짜리 책에서 몽테뉴는 자신의 이야기만큼이나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이번에는 그런 대목들을 읽을 때 눈에 힘을 좀 주고 읽어야겠군.

 

 

 

1.9

 

사려고 봤더니 적립금이 좀 부족하다. , 이대로 7월까지 글을 써서 8월에 적립금을 탄 다음 이 책을 살 것인가, 아니면 이 책을 지금 사서 읽고 그 글로 8월에 적립금을 탈 것인가, 지금 김칫국을 사발에 받쳐 들고 되게 진지하게 고민 중이오니, 떡 줄 사람이시여…….

 

 

 

2

 

세상은 단순하지 않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결국 복잡한 과정을 통해 단순한 명제를 전달할 뿐인 책들- 철학책들이 있다. 반면 일어난 일들은 또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은 일들 역시 언젠가 일어나는 것이 세상이며, 따라서 세상은 클리셰를 답습하는 클리셰와 클리셰로부터 도망치려고 애를 쓰는 클리셰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책들- 소설이 있다. 내 마음이 지금 어떤 꼴인지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타인의 마음이 지금 왜 저런 모양인지 바깥에서 이해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우리는 보통 클리셰에 의존한다. 쉽고 편하기 때문이다. 저게 다 열등감 때문이다. 저게 다 어릴 적 부모에게 입은 마음의 상처 때문이다. 저게 다……. 편한 말이 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편한 말은 다 후려친 말이다. 모든 쉬운 말은 쉬운 진실의 부분만을 겨우 포착하고, 심지어 어려운 진실 앞에서는 종종 틀린 명제가 되기도 한다. 어렵고 세밀한 진실에는 어렵고 세밀한 말이 필요하다. 쉬운 말로 캐치한 진실의 부분을 전체로 착각하는 일이 잦아지면, 자기가 캐치하지 못한 진실은 진실이 아니라고 믿는 습관이 생긴다. 그런 습관은 언어 사용자를 어려운 말로부터 멀리 달아나게 만들고, 진실을 획득할 수 있는 길을 점점 더 요원하게 만든다.

 

소설이 그런 편한 말 중독증을 치료한다.


 


레스터 영은 지금 이런 상황이다.

 

 - 점검!

 라이언 중위가 레스터의 사물함을 획 열어젖히고는 그 안을 들여다봤다. 거드름 피우는 중위의 지휘봉-레스터는 늘 그것을 지팡이라고 불렀다-은 사물함 문 안쪽에 붙여진 사진 한 장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한 여성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 자네 사물함인가? .

 - , 그렇습니다. 중위님.

 - 그럼 자네가 이 사진을 붙였나?

 - 그렇습니다. 중위님.

 - 이 여자에 대해 무엇을 알게 되었나, .

 - ?

 - 이 여자를 보면서 무엇을 느끼게 되었는가?

 - , 머리에 꽃을 꽂고 있습니다. 중위님.

 - 그 밖에는?

 - ?

 - 내가 보기엔 이 여자는 백인이다. 젊은 백인 여성이란 말이다. . 자네 눈엔 어떻게 보이나?

 - , 제 눈에도 그렇습니다. 중위님.

 - 자네는 깜둥이가 사물함 안에 백인 여자 사진을 몰래 붙이고 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나?

 레스터의 눈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라이언의 군화가 자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와서 발가락에 닿고 있음을 보았다. 중위의 콧김이 다시 느껴졌다.

 - 내 말 들리나? .

 - 예 들립니다. 중위님.

 - 결혼했나?

 - 예 했습니다. 중위님.

 - 그런데 아내 사진 대신에 백인 여자 사진을 붙이고 밤에 이 사진을 상상하면서 자위라도 하나?

 - 저 사진 속 여인이 제 아내입니다.

 레스터는 가능한 한 공격적인 말투로 들리지 않게 하려고 그 사실을 조용하게 말했다. 하지만 사실의 무게는 경멸에 대한 반항을 전하고 있었다.

 - 중위님이라고 안 붙이나?

 - 그녀는 제 아내입니다. 중위님.

 - 사진 뜯어내게. .

 - 예 알겠습니다. 중위님.

 - 지금 당장.

 라이언 중위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사물함으로 가기 위해 레스터는 기둥처럼 서 있는 중위를 돌아서 다가가 아내 사진의 모서리를 잡고 회색 금속 테이프를 뜯어냈고 사진은 찢어졌다. 찢어진 사진은 손가락과 사물함 문 사이에서 매달려 있다가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 구겨져 버렸다.

 - 구겨서 버리게……. 지금 쓰레기통에 버려.

_ 제프 다이어, 그러나 아름다운

 

라이언 저 새끼는 지금 왜 저러는 걸까요? 이런 질문에 ‘xx같은 쉽고 뭉툭한 명사 하나가 떠오르고 말아 버리는 바쁜 현대인들을 위해, 소설은 다음과 같이 어렵고 세밀한 일을 한다.

 

신병에게 모욕감을 줄 때 아드레날린이 강하게 몸을 휘감는 정상적인 경험 대신에 라이언은 그 반대의 기분을 느꼈다. 그는 전체 중대 앞에서 스스로를 창피하게 만든 것이었다. 레스터의 얼굴은 자존심, 자긍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공허한 표정이었고 상처 외에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자 라이언은 심지어 영의 노예와 같은 비참한 굴종마저도 반항이나 저항의 한 형태가 아닐까 갑자기 의심이 들었다. 그는 그 모습이 추하다고 느꼈고 그래서 영을 그 어느 때보다도 증오했다. 그는 여성을 대할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여자들이 울면 때리고 싶은 충동이 최고조에 올랐다. 전에는 영에게 모욕을 주는 것이 자신에게 만족감을 주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영을 파괴하고 싶어졌다. 라이언은 이처럼 무력한 남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는 힘이라는 개념을 전제로 행동하고 있었지만 힘과 관련된 모든 것이 부적절하고 무의미해 보였다. 반역자, 주모자, 폭도들…… 그들은 모두 상대할 수 있다. 그들은 군대를 정면으로 대하며 자신의 방식으로 해 보고자 행동한다. 하지만 강력한 당신, 바로 군대는 그들을 꺾어 버린다. 그러나 약함, 그것은 군대가 마주할 때 무력해지는 존재다. 왜냐면 그것은 힘에 의존한 대립의 개념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_ 같은 책

 

왜냐면 그것은 힘에 의존한 대립의 개념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장이 단지 이 한 장면만을 위해 마련된 일회용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작가 슨생님도 공을 들인 바가 있겠지만, 그런 걸 차치하고서라도, , 저 라이언 새끼가 왜 저러는 줄 알아? 라는 질문에 빡치고 쪽팔려서라고 쉽게 대답하지 않는 것, 그리고 중간 과정 다 잘라먹고 영의 약함이 힘에 의존한 대립의 개념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랬다라고 대뜸 대답하지 않는 것. 이런 지점들에 소설이라는 장르의 역할이 있는 것 같다.

 

  

 

--- 읽는 ---

 

어느 보통 독자의 책 읽기 / 버지니아 울프

그러나 아름다운 / 제프 다이어

행동경제학 / 리처드 탈러

쓸모 있는 음악책 / 마르쿠스 헨리크

이렇게 인간이 되었습니다 / 박재용

올 댓 이즈 / 제임스 설터

쓸모없는 수학 / 김동진

시소 첫번째 / 김리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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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2-06-29 1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ㅋㅋㅋㅋ 나 지금 딱 에쎄 앞에 두고 소요님 같은 생각중이었어요 ㅋㅋㅋ 공공장소에서 혼자 미친듯이 웃고 있음요 ㅋㅋㅋ

syo 2022-06-30 15:22   좋아요 1 | URL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가 에쎄를 그렇게 좋아하셨어요.
물론 몽테뉴 말고 KT&G를 ㅎㅎㅎㅎㅎ

KT&G쪽이 더 지명도가 높겠죠??

반유행열반인 2022-06-29 19: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전 수능 철학지문 싫어요 병이랑 쉬운 말 병 걸려서 진지한 글 못 읽는다구요…예쁘고 재미있고 하여간에 syo님 잘하는 감각적인 글을 내놔라! 는 농담이고 할 일 힘내서 하시면서 더운 여름 건강히 무사히 잘 보내세요 ㅎㅎㅎ

syo 2022-06-30 15:21   좋아요 3 | URL
아니 반님 같은 오구오구 전문가가 이렇게 말씀하실 정도면, 이번 글은 확실히 망했나보네요. 으아아아아....
비 엄청 내리는데 건강이며 안전이며 이래저래 조심하시옵소서.

그레이스 2022-06-30 0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
사세요!
ㅎㅎ
syo님 반갑습니다~^^

syo 2022-06-30 15:19   좋아요 2 | URL
샀습니닼ㅋㅋㅋㅋㅋㅋㅋ
적립금 있는 거랑 뭐랑 뭐랑 털어서 사버렸어요 ㅎㅎ.

그레이스님 반갑습니다!

공쟝쟝 2022-07-01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가 아는 에쎄는 담배… 아 그런 에쎄가 있었단 말인가 ㅋㅋㅋㅋ 쇼님 컴백?

얄라알라 2022-07-21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잘 쓰시지 않으십니까?

˝그 책이 그런책˝ ㅋㅋㅋ ˝떡 줄 사람이시여!˝ ㅋㅋㅋ 간만에 읽어도 역시 syo님 스퇄은 유쾌크리에이티비티!!

에세3권 표지가 syo님 포스팅에서 더 새로와보입니다. 플친님들 요새 에세가 대세인가봐요^^

syo 2022-07-21 22:28   좋아요 1 | URL
얄라님 감사합니다ㅎ

그동안에 뭐랄까, 믿고 읽을 만한 에세가 없었다고 할까요.
드디어 갖춰놓고 볼 만한 책이 등장한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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