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 특강 요약

_ 나를 살리는 글쓰기 (2018. 7. 4. 부산예술회관)

 

 

<개인역사>

 

- 대학 진학 대신 도서관 자료실에서 살며 수많은 독서를 통해 책의 세계로 진입.

- 시와 문학평론으로 데뷔, 출판사 편집자로 입문 후 놀라운 성과를 거두고 독립, 청하 출판사를 오래 꾸리며 <홀로서기> 등 많은 베스트셀러를 탄생시키고 경제적으로도 성공.

- 1992. 10.29 - 12.30.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 출판으로 구속, 2개월간 구치소 수감 후 나와 출판사 일을 그만두고 그동안 일에 매달려 읽지 못한 것들을 돌아보고 가치 있게 살기 위한 다른 방향을 궁리.

- 본격적으로 독서하며 읽고 쓰는 일에 매달림. 특히 이 시절에 읽은 책, 고전 중, 노자의 <노덕경>이 정신적 힘이 됨. 당시에 매일 거듭하여 읽었다고.

- 다시 2005<느림과 비유> 발간.

 

 

<쓸모없는 것들을 향한 열정, 몰입, 질주>

 

기원전 5세기 장자는 무용지대용을 말했다. 쓸모없는 것들의 큰 쓸모.

천년 묵은 거목의 예를 들며, 곧은 나무는 일찌감치 베어져 어떠한 용도로 쓰였으나 굽은 나무는 오래 묵어 나중에 거목이 됨.

- 독서가 힘이다. 책 읽는 뇌가 책 쓰는 뇌가 됨.

- 시는 미래를 투시(예지, 예언)한다. 시의 직관력.

) 고정희 독신자’, 기형도 빈집

실제 시인의 삶이 시와 같이 되다. 시인은 자신의 삶을 시를 통해 예언하는지...

- T.S. Eliot 은 이미 시의 예언성을 언급했다.

시는 몸으로 쓰는 것, 겉뇌가 아닌 속뇌로 쓰는 것.

겉뇌는 실제 경험으로 얻는 피상적인 내용

속뇌는 선험적이고 잠재성이 있는 경험. DNA적이랄까.

- 시는 인간의 위대성(존엄성)을 발현하는 통로다.

가난은 물리적이라기보다 정신과 영혼의 문제다. 자기존엄성을 아는 자는 가난하지 않다. 거리의 인문학은 그래서 필요하다. 슬럼가의 인문학이 실제로 사람들의 영혼을 살찌운 예는 많다. 미국 슬럼가에서 실제로 범죄율도 낮아짐.

- 4차산업이 융성할 미래시대에는 대체되지 않는 재능이 유효하다. 글쓰기, 시 쓰기는 대체되지 않을 재능이다. 고전 읽기, 즐거운 책 읽기로 뇌 근육을 키우자. 말 랑말랑한 시보다 은유가 많은, 모호성을 많이 담은 고급시를 읽어야 뇌 근육이 탄탄해짐.

- 시의 Ambiguity

에즈라 파운드 왈 시의 1/3은 해석되지 않는 부분으로 남아야 한다.”

시의 모호성, 다의성, 애매성. 다시 말해 해석불가한 시가 고급한 시다.

장석주 <은유의 힘> 참고.

- “시인은 잠수함에 탄 토끼다.” - 게오르규 <25>

시인은 시대, 사회의 위기상황을 알리는 지표가 되어야 한다.

 

 

<질의응답>

 

1. 그렇게 많은 책을 읽고 쓰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실제로 장 시인은 일 년에 평균 7권의 책을 쓴다)

---> 뇌를 자극하는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통해 뇌 근육을 발달시킨다. 읽는 뇌 로 단련. 읽는 뇌가 쓰는 뇌가 되고, 쓰는 뇌가 또 읽는 뇌가 된다.

2. 주어진 시간은 같은데 그렇게 많이 읽고 많이 쓰는 생활 속 구체적 비결?

(실제로 일 년에 천 권의 책을 구매하고 천 권의 책을 여기저기서 받는다고 함. 장서가로 유명함)

---> 낯선 환경 찾기(여행)로 뇌를 긴장시킨다. 규칙적이고 절제된 생활로 건강 유지 (하루 사과 1, 하루 만보 걷기, 저녁모임 자제, 10시 취침 4시 기상 규칙적 수면, 균형 잡힌 식사 등 건강한 생활을 잘 쓸 수도 있다)

3. 좋은 글을 계속 쓸 수 있는 동력이 혹시 사랑에서 오는가?

(실제로 그는 시인 박연준과 10년의 사랑 후 결실을 맺어 작년에 책결혼식을 올렸다. 공저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며 걸었다>는 그들의 책결혼식이다. 결혼식 대신 책으로 세상에 공표. 시드니에서 한달살기를 한 이야기)

---> 여행 후의 글쓰기!!
--> 그렇다. 박연준 시인과는 25세 차이.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인정하고 이해하 고 배려하며 함께한다. 박연준은 나보다 늦게 2시에 잠이 든다. 자작시 <사랑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 더!

퇴고가 중요하다. 많이 고치고 다듬을수록 좋은 문장이 나온다. 소설가 김연수는 퇴고를 토고라 부른다. 토할 때까지 퇴고한다고.

---> 자작시 <대추 한 알>은 지금도 계속 저작권료를 거둬들이는 효자시.

최근 재미있게 읽은 책으로, 강헌 <명리, 운명을 읽다>(2015)

 

결론 : 쓸모없는 것들을 향한 열정은 쓸모없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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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7-07 1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 년에 천 권의 책을 구매하는 분이라... 대단하네요. 집 보관도 쉽지 않겠어요.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렇고 새벽에 일어나는 작가들이 많네요. 저는 아침엔 일어나기 싫던데 아직 젊다는 증거일까요?
노인이 되면 잠이 없어진다는데 아직까진 아침잠이 달아요. 밤에 잠자기 싫고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용...

프레이야 2022-07-07 18:31   좋아요 1 | URL
장서가들의 서재는 특별한 분류가 필요하겠어요.
야행성 페크님 저랑 같아요 ㅎㅎ
아침엔 일어나기 싫고요. 그레이엄 그린의 사랑의 종말, 에 주인공 모리스도 작가인데 오전에 규칙적으로 딱 500단어만 쓰는 걸로 나와요. 더도 덜도 말고 딱. 하루키 생각이 났어요. 규칙적인 걸 스스로 강요하지 않는 저는 게으름 탓이겠죠 ㅎㅎ 대가는 뭔가 달라요.
수학자 허준이 교수도 하루 네 시간 연구하고 나머지 시간엔 육아와 청소 등 가사일을 한다죠. 시간을 정해두고 뭔가 한다는 장점이 확실히 있겠다 싶어요.
 
내 방 여행하는 법 - 세상에서 가장 값싸고 알찬 여행을 위하여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지음, 장석훈 옮김 / 유유 / 2016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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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인 너무나 물질적인 삶에 거부감이 부쩍 든다.
오래 봐온 친구들 대화도 온통 물질적.
이 허전함을 어디서 채우나…
주변에 이런 소리 하면 또 특이하다는 말이나 듣는다.
완미가 필요하다.
완미라는 한자어는 탕웨이가 박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의 촬영현장을 두고 표현한 말.
https://n.news.naver.com/article/028/0002596746

마침내, 붕괴, 미결… 완미. 뭔가 귀결되는 느낌.
완전함이란 있기 어렵고
아름답기까지 하기란 어려운 일이겠지만…
아름다운 사람은 특별함이 있구나 느껴지는
인터뷰를 좀전에 읽었다. 역시라는 생각에 기쁨에
조금은 채워지며
그냥저냥 이런 생각이 부쩍 들 때 펼치는 이 책
내 방 여행하는 법,의 저자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는
1763년 샹베리에서 태어났다.
직업군인이었던 그는 1790년 어느 장교와 토리노에서
결투를 벌여 42일간의 가택연금형을 받았다.
그동안에 쓴 글이 이 책.
그림에도 조예가 깊고 러시아에서 화가로도 활동했는데
이 책을 쓰며 작가가 되었다.
이 책 속 삽화는 직접 그린 것인지 잘 모르겠다.
42개 챕터마다 소제목을 달고 길지 않은 글에
여러 갈래 생각의 여행으로 이끈다.
위트와 재치, 비유가 번뜩이며…
동물성에 대한 문장들, 좋아한다.

8. 동물성

물질에서 벗어나 영혼이 언제든 홀로 여행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람직하고도 유용한 일이다. 하지만 거기엔 안 좋은 점도 있다. 앞서 언급했던 손가락 화상이 그 예다.
평소처럼 난 나의 동물성에게 아침 준비를 맡겼다. 빵을구워서 자르는 건 그의 몫이다. 그는 커피도 훌륭히 끓여 내는데 이 모든 일을 대부분 혼자서 한다. 영혼으로서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볼밖에 달리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냥 바라보기만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장치를 다룰 때 보면, 우리는 쉽게 딴생각에 빠져 정작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는 주의를 잘 기울이지 - P37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나의 형이상학적 체계에 의거하여 좀 더 부연하자면, 나의 영혼에게 나의 동물성이 하는 일을 주시하면서 그가 하는 일에 끼어들지는 말고 그냥 바라보게만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수행하기엔 경악하리만치 어려운 형이상학적 과제다.
나는 빵을 굽기 위해 화덕 위에 부집게를 올려놓았었다.
잠시 뒤, 나의 영혼은 홀로 여행을 떠났고, 그 틈에 나의 동물성은 달구어진 장작을 화덕 안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우둔하기 짝이 없는 나의 동물성은 손을 뻗어 뜨거운 부집게를 그냥 잡아 버렸고 결국 나는 손가락을 데었다. - P39

내 영혼이 입을 열었다.
"뭐라고요? 내가 없는 동안, 내가 시키는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단잠으로 기력을 보충하지 않고 감히 건방지게(다소과격한 표현이다) 내가 허락하지도 않은 향락에 빠져 있었단 말인가요?"
이렇게 고압적인 언사를 들어 본 적이 없는 타자 역시 화가 나서 대꾸했다.
"말씀 한번 잘하시네요, 부인(정색하고 말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이런 식의 표현을 쓰는 것이다). 덕성과 품위가 뚝뚝 흐를 만큼 말씀 한번 잘하시네요. 당신이 나를 못마땅해하는 건 내게는 없는 당신의 몽상과 망상 때문 아닌가요?
당신은 왜 그 자리에 없었나요? 혼자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나를 빼놓고 즐길 권리는 도대체 어디서 난 겁니까? 당신이 천국이나 엘리시온의 뜰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머리에 든 거 많은 사람들과 얘기하고, 홀로 심오한 사색(알다시피 이건 비아냥이다)에 빠진 것을 두고 제가 뭐라 한 적이 있나요? 공중누각과 같은 당신의 고상한 사고 체계를 가지고 뭐라 한 적이 있느냔 말입니다. 당신이 나를 그렇게 내팽개친 동안 자연이 허락한 호의와 즐거움을 누릴 권리가 내게 없다는 말인가요?"
-39.영혼과 동물성의 대화, 중

*영혼을 의미하는 프랑스어는 여성형 명사이므로 ‘부인‘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이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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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2-06-30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재미있네요 ㅋ 영혼 부인 매너 있는 저자입니다~ㅎ

프레이야 2022-06-30 20:47   좋아요 1 | URL
넵. 이 책 재미있어요. 읽으시면 챕터마다 이어지는 생각들이 많을거에요. 특이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

잉크냄새 2022-06-30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국에서는 완전이나 완벽이란 말은 잘 안쓰고 완미(완메이)나 완선(완산)을 주로 사용하더군요.

프레이야 2022-06-30 21:15   좋아요 0 | URL
완미라는 단어가 그렇게 쓰이군요.
참 좋은 의미로 느껴집니다. 미와 선. 그 영화 자체를 그리 말했다기보다 현장을 그리 표현했어요. 기사 링크 추가했어요. 언어를 곱씹으며 보게 되어요 이 영화는 특히. 주인공 배우 먼저 설정하고 시나리오를 완료해갔다니.
 





세상의 모든 아버지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

 

다큐 <송해 1927>의 마지막에 뜨는 문장이다. 책 <송해 1927>에는 다큐 속 장면이 들어가 있다. 


주위에 노문우들이 많다보니 부모님처럼 느껴져 애잔하다. 새삼 그들의 생을 다시 보게 된다. 얼마 전 팔순생신 식사자리에 초대받아 가서 그분의 면모를 본 적이 있다. 열여덟 해를 글로도 봐왔지만 가족 친지에 둘러싸인 그분을 보는 건 또다른 느낌이었다. 예순이 채 못 돼 부군을 먼저 떠나보내고 고난의 세월을 견디며 주변에 참 잘하며 살아오셨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칠순 때 모인 멤버들이 여기 많이 계시고 이 멤버 그대로 88세 때 또 뵙겠다고 장남이 진심 담긴 인사말을 농담처럼 해서 모두 박수를 보냈다정 많고 애살도 많은 분이라 건강하게 미수까지 또 잘살아가시길 빈다. 


최근 86세 문우의 글을 편집하여 첫 수필집 발간을 도와드렸다. 퇴원 후 휠체어에 앉아 작업하고 출판사와 조율하며 결과물이 나왔다. 나는 어차피 겪어야 할 그 시간을 견딜 수 있게 일거리를 주신 게 고마웠다. 마흔 편의 글을 읽고 다듬으며 꼰대다운 시선과 건강하게 삶을 즐기며 마지막 가는 길을 준비하는 자세에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도 걷고 춤추고 노래하는 즐거운 인생은 그분의 글을 모두 읽고 내가 뽑은 카피다. 일찍이 고등학교 교감 명예퇴직을 하고 매일 아침 왕복 3.6킬로 정도 해변길을 걷고 동래학춤을 추고 시니어합창단에서 노래하며 손수 재봉틀로 손주들 옷을 수선하고 야생초목에 해박하여 숲해설가로도 활동했던 분이다. 프로필 사진은 일전에 찍어둔 영정사진을 쓰셨다. 나는 그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머물렀던 자리도 깨끗해야 되지만 가야할 자리도 미리 준비하는 마음이 다시 보인다. 송해 선생은 2018년에 갑자기 먼저 떠난 아내를 아내의 고향 대구 달성군에 묻으며 자신이 누울 자리도 미리 준비해 두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현대사를 관통해 한 사람이 아흔다섯 해를 살다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본다. 술자리에서 취해 북에서 내려와 이 고생이라고 신세한탄을 한 게 고발이 되어 검은 짚차를 타고 끌려갔던 경험도 있었던 건 몰랐던 에피소드다. 오래 산 사람의 깊이 팬 주름과 늘 눈물 젖은 것처럼 보이는 불룩한 눈두덩이를 마주하면 삶의 굴곡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스물두 살 아들을 뺑소니 교통사고로 먼저 보내고 묻어놓은 아픔을 이야기할 때, 아들이 자작해놓은 마흔 곡의 노래를 들으며 회한에 젖을 때, 선생은 못내  참지 못하고 울었다. 늙은 남자가 눈물을 보이고 우는 장면은 몹시 마음 아프다.

 

지난해 구순의 내 아버지는 갑자기 쓰러져 병원생활을 했다. 온몸의 염증수치가 높았고 우선 수치를 최대한 조절하는 데에 꽤 시간이 걸렸다. 3주일이 지나 퇴원 후 집에서 몇 달간 누워계셨다. 어머니의 고된 시간이 아버지 못지않았다. 여덟 살 연하의 어머니도 돌봄을 받아야할 형편인데 노구의 남편을 돌보면서 어머니는 한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당신한테 미안하고 고마워.” 이 한마디에 기약없는 간호를 기꺼이 하셨다. 지금은 다시 일어나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아버지는 그보다 열 달 전에 먼저 쓰러져 입원했었다일주일 후 퇴원해 , 안 죽었다.”며 농담을 던지던 아버지는 그 옛날의 이야기를 하던 중 갑자기 눈물을 떠뜨렸다. 갑작스런 일이었고 가슴이 몹시도 쓰라렸다. 사무친 회한을 못 이겨 어깨를 들썩이며 얼굴이 일그러져 아이처럼 울음 우는 늙고 병든 아버지의 얼굴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세상에 이름을 날리지도 못했고 가진 것도 남은 것도 그다지 없는 아버지는 송해 선생과 같은 해주 출신이다. 송해 1927, 배영옥 1932. 해주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한 송해 선생과 달리 아버지는 해주사범학교 졸업을 앞두고 전쟁을 맞이했다. 그때부터 운명에 떠밀려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온 이야기는 다 할 수가 없다. 피란 시절의 이야기는 이미 전설이 되어버릴 지경이다. 4,5공화국 시절에는 장사가 잘되었지만 동네 사람들과 사담을 나눌 때도 이북에 대한 발언을 몹시 조심하고 입에 담지 않아야 된다고 말씀하셨던 걸 기억한다. 아버지는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늘 깔끔하게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물건을 제자리에 반듯하게 두는 습관은 같다

 

지난해 겨울에 나온 다큐 <송해 1927>은 젊은 감독의 첫 작품이다. 과거 흑백 필름 시절의 영상도 재미있지만 병원에서 또 분장실에서의 장면과 매일 아침 누룽지밥을 먹으러 가는 맞은편 아파트동 둘째 딸 집과 아내의 사진을 걸어두고 혼자 사는 집을 비추고 인터뷰를 통해 인물을 조명한다. 느슨한 느낌이 좀 있긴 하지만 진정한 딴따라로서의 송해와 아버지로서의 송해를 중점 배치했다. 남편으로서의 송해는 모를 일이지만 잔소리와 간섭이 많았던 어머니로 회고한 둘째딸의 증언과 배우자를 먼저 보내고 나직이 토해내는 외로움과 그리움의 말로 보아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다. 둘째 딸이 자분자분 들려주는 오빠(죽은 아들 송창진 씨)와의 이야기가 따뜻하다. 오빠가 직접 자작곡을 불러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해 선물한 걸 갖고 있었다. 그걸 복각해 영화에서 들려준다. 김현식 풍이다. 송해 선생의 아버지는 음악학교에 가겠다는 아들에게 내 아들이 아니라고 했을 정도로 반대했다고 한다. 노래하겠다는 아들을 인정하지 않고 한번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은 송해 선생은 후회의 눈물을 뜨겁게 흘렸다.

 

202011월에 작은딸이랑 대구에 갈 일이 있어 볼일을 보고 달성군의 옥연지에 들렀다. 모르고 갔었는데 송해공원이 가까이 있었다. 지금은 송해기념관도 세워졌다고 한다. 아내 석옥이 여사의 고향이 그곳이라 송해 선생은 대구 명예시민이라고 한다. 아버지! 아빠!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이름이 아닐까. 고단한 세월을 천성대로 낙천적으로 긍정적으로 살아내고 영원한 휴식에 든 몸과 영혼, 평안하시길... 


그때 찍은 옥연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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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6-12 19: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 교회 갈 준비 하면서 예전에 m본부에서 했던 “사람이 좋다” 송해 편을 보았습니다.
참 후회없는 삶을 살다 가신 분은 아닐까 싶어요.
이로써 우리가 아는 1세대 희극인은 거의 다 세상을 세상을 떠나지 않았나 싶기도 하네요.
지금쯤 저 세상에서 그리운 아내와 아드님을 만나셨겠죠?

요즘 아버님은 잘 지내시고 계신가요?

프레이야 2022-06-12 19:19   좋아요 5 | URL
네. 아빠는 이제 지팡이 하나 의지해 걸어다니는데 그래도 오래는 힘들어 하세요. 제가 봄 되면 나들이하게 기운내시라고 했는데 정작 제가 여의치 않네요. 아무거도 안 넘어간다고 통 못 드시다가 영양제 맞고 입맛이 돌아오면서 일어나시더군요. 송복희 선생은 말씀대로 참 잘사신 분 같아요. 인정 많고 재치있고 소박하고 자기관리 철저하고요. 한 가지, 아들이 하려는 음악을 인정하지 않은 걸 후회하더군요. 다 운명이라고 말하면서도 못다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을지요. 고향이 비슷한 곳이라 아빠 생각이 났네요. 1세대 희극인들, 다큐에 나와요. 전쟁 1세대도 얼마 남지 않았을걸요. 고맙습니다 스텔라 님. ^^

서니데이 2022-06-12 19: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지난해 아버님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걱정하셨던 것 생각나네요. 어머님도 옆에서 많이 힘드셨을거예요.
지금은 많이 좋아지셨는지요.
프레이야님도 더운 날씨 건강 조심하시고,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프레이야 2022-06-12 19:41   좋아요 4 | URL
네. 서니데이 님 고맙습니다
아빤 부활하셔서 감사하지요. 몇 년이라도 더 그런대로 무탈하게 지내시다 좋은 곳 맛난 것 더 보고 드시고 그러면 좋겠어요. 한 사람의 생은 모두 짠합니다. ^^. 편안한 저녁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22-06-12 2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송해 공원에 한번 가야겠군요. 많은 이야기를 들려 줄 것만 같네요.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은 없으나 송해 님의 부고 소식을 듣고 더 많이 사시다가 가시지, 하는 아쉬움이 들었네요.
많은 이들의 애정을 받고 사신 것만 봐도 좋은 생을 사시다 간 거지만 삶의 끝은 슬픔을 부르네요.
인간의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삶은 누구에게나 한정돼 있다는 것을 되새기게 됩니다. 잘 살아야겠습니다.

프레이야 2022-06-13 10:43   좋아요 3 | URL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을 보다가 눈시울을 슬쩍 훔치던 아빠가 생각납니다. 지금보다 아주 젊을 때였지요. 송해 선생도 고향에 돌아가보지 못하고 가셔서 안타까운 일이고 아빠도 그렇구요. 늘 그리움 한 자락 품고 사셔서 불쌍해요. 잠시 몸을 피한 게 영이별이 되었다는 회고가 아빠 말씀과 비슷해서요. 유월이면 그날이 더 생각나는…
옥연지는 보기만 해도 물이 참 시원했어요. 잘 꾸며 놓았더군요.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대구수목원이 있는데 두 곳 다 늦가을 풍경이 좋았어요 페크 님.

mini74 2022-06-13 1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 묘하게 한번도 뵌적 없는데 마치 아주 잘 알고 지내던 분이 돌아가신듯 슬프더라고요. 너무 오래 익숙하게 봐 와서겠지요. 엄마가 많이 슬퍼하시더라고요. 노인정에서도 송해 이야기뿐이라며. 비슷한 연배에 같은 굴곡진 삶을 살아서 더 가깝게 느껴지시나봐요 ㅠㅠ

프레이야 2022-06-13 13:52   좋아요 2 | URL
그러셨군요 어머니도. 노래자랑 사회자로 전국에 다니며 그곳에 도착하면 대중목욕탕부터 갔다죠. 예심부터 참석해서 참가자들이 편하게 대하게 해주고 대본도 꼼꼼히 체크하고요. 장수비결이 딴 데 있는 게 아닌듯합니다. 전쟁1세대를 대표하는 어른이 가신 것처럼 다들 비슷한 느낌이 드나봅니다. 전 아빠와 겹쳐서 더욱 그랬네요. 황해고 말씨가 똑같아요.

2022-06-13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13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13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13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22-06-13 16: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최근에 왓챠에서 드라마 ‘프로듀사‘를 재시청했는데 거기에 송해선생님이 나오더라고요.
반가웠어요.
담에 기회되면 옥연지에 한 번 가보고 싶어요^^

프레이야 2022-06-13 17:11   좋아요 3 | URL
안녕하세요 페넬로페 님 ^^
이 다큐도 왓챠에 있어요. 옥연지는 한 바퀴 걷기에 좋았습니다. 뜻밖에 송해 선생이 삿갓을 쓰고 똭 서 계셔서 놀랐어요.

레삭매냐 2022-06-13 19: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길을 함께 하던
후배 연예인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봤는데 참...

코로나가 터지기 전 저희
동네 전국 노래자랑하시러
왔을 적에 갔어야 했나 봅
니다.

프레이야 2022-06-13 19:40   좋아요 1 | URL
그 동네도 갔었군요. 우리동네도 왔었는데 가보진 않았어요. 잘사신 분 같습니다. 이제 천국노래자랑 하실거라던 코미디언 뽀식이 말이 생각납니다.

yamoo 2022-06-14 07: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좋은 글입니다!
근데, 송해 공원도 있네요!! 신기합니다~~
전국노래자랑 후속 엠씨는 누가 될까요?? 젤 궁금한 사항이기도 합니다.

옥연지...저도 한 번 꼭 가봐야 겠습니다!

프레이야 2022-06-14 09:23   좋아요 1 | URL
그분만큼 구수하게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죠^^. 대구 가시면 한번 들러봐도 좋을 것 같아요. 기념관도 생겼다고 하네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22-06-14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흔다섯 해라..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었을까요? 좋은 곳으로 가셨기를~

프레이야 2022-06-14 15:01   좋아요 0 | URL
혈혈단신 타향에 내려와 자수성가하기까지 선택과 결단의 순간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고단하셨을 것 같아요. 세상 모든 아버지 중에서도. 그래도 천성이 낙천적이고 긍정적이라 장수하신 것 같아요. 원래 체력도 좋으셨다죠. ^^

희선 2022-06-16 0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좀 더 오래 사셨을지도 모를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오랫동안 전국 노래 자랑 진행하셨잖아요 그 방송 본 적 별로 없지만... 그 방송 하면 송해 님이니... 프레이야 님 아버님 건강 좋아지셔서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2-06-16 07:37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희선 님. 염려해 주신 덕분인 것 같아요. 저는 일요일 정오면 점심 먹으며 그 방송 보곤 했어요. 재미있어서 한바탕 웃고요. ^^
 

올해 신임 편집장이 편집위원 특집란을 기획하며 대표작과 작가노트를 청탁했다. <즉경>은 오래전에 쓴 글인데 아래 창작노트란에 썼듯이 '시간'을 생각하며 자연스레 첫 번째로 떠오른 글이다. 4월에 퇴원 후 열흘 정도 지나 편집장에게 송고하고 그저께 여름호에 실려서 도착했다. '즉경'도 그렇지만 작가노트 혹은 창작노트에 지금의 내가 있어 여기에 옮겨 둔다. 모든 게 흔적이다.



즉경卽景

 


붉은 등대 하나 솟는다. 뜨겁고도 서늘한 시간이다. 시간을 분절할 수 있다면 나는 이 시간을 잘라서 주머니에 넣고 살고 싶다. 붙잡아두고 싶은 시간의 길 위로 속도를 낮춘다.


무작정 안겨드는 길을 맞바람 삼아 달리고 있다. 오후 늦게 출발했더니 여섯 시를 훌쩍 넘어서야 도시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고속도로로 올라 한동안 달리자, 하루치 시간을 불사르는 해가 저 멀리 지평선에 등대로 솟아 앞길을 밝혀 준다. 이즈음이면 이런저런 상념에 취하지만, 최고의 즐거움은 어스름 한가운데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소박한 의식이 놀 속에서 펼쳐지면 일상생활마저 숭고한 제의로 격상된다.


언젠가 지는 해의 발뒤꿈치를 눈으로 한 발 한 발 따라간 적이 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재빨리 변신하는 문화마을 경관을 내려다보며 시선이 허둥댔다. 어둑발이 조금씩 짙어질수록 장난감처럼 엎드려 있는 파란 지붕 집들의 이쪽저쪽에서 노란불이 하나둘 들고 일어났다. 극진한 점등식이었다. 노란 등불을 점화하는 일상의 의식이 날마다 피고 지는 누추한 삶을 명랑하게 밝혀 주었다. 지상의 별빛이 천상의 별빛보다 밝았다. 하루치 삶의 전쟁터에서 승전보를 안고 식구들도 하나둘 귀환하고 있었다. 낡은 옷자락에 먼지바람을 묻히고.


꽃이 지듯 매미소리가 지듯 시간도 진다. 매달려도 부질없는 일이다. 지는 꽃송이에서는 가없는 사랑의 송가가, 지는 매미소리에서는 생명의 찬가가 들린다.


시간은 어떤가. 지나가 버리는 것들, 스쳐 가서 돌아오지 않을 것들 옆에서 우리는 어줍은 내용이나마 이야기를 재생하고 어렵사리 편집하고 추억의 그릇을 빚어 간직하고자 한다. 즉시卽時를 사는 우리는 등짝을 보이는 시간을 잡아두려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사소한 것 하나도 붙들어두고 싶어 순간을 영원으로 묶으려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쇠를 녹슬게 하는 시간의 괴력에 무엇으로 맞붙어보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을까. 지는 것들에 경배를!


겨울 마이산에서 돌아오던 길의 즉경卽景이 기억의 길 위에 가로수처럼 펼쳐진다. 탈속한 나뭇가지들에 잔설이 내려앉아 있었다. 장식을 다 털어낸 담대한 성장盛裝이 또 다시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며 갈팡질팡하던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어둠이 서서히 내리던 차창 밖으로 정경情景이 스치듯 달아나고, 내 눈에는 순한 눈물이 차올랐다. 꼬리를 감추고 있는 시간이 애상스레 여겨졌다. 모든 걸 거둬들이는 시간, 모든 게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모든 곳에 평화가 내려앉는 시간, 그 수굿한 시간의 손을 잡고 싶었다.


그 길에서는 저 멀리 주홍빛 해가 시간을 거슬러 천천히 뒤로 달리고 있었다. 내가 앞질러 가고 있던 건지도 모른다. 한동안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는데 어느 순간이었던가, 마지막 기염을 토하더니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눈 깜빡할 새였다. 즉물卽物이었다. 잘 붙잡고 있었다 싶었는데 야멸차게 내 눈을 떨치고 떠나 버렸다. 떠나보낼 것은 그렇게, 떠나야 할 때도 그렇게 하라고 말하는 것이었을까 


사위四圍가 시나브로 회색의 품에 안기기 시작했다. 물상들이 한층 선명해졌다. 수확을 끝내고 돌아온 늙은 어머니 손등 같은 겨울 밭, 헤진 모자 눌러쓴 허수아비 두 팔에도 손에 잡힐 듯 올망졸망한 산등성이가 고양이 등처럼 완만한 곡선을 드러냈다. 낮게 또 깊게, 평등하게 평화롭게 세상의 사물들이 손에 손잡고 고립의 평원에서 마음을 잇고 있었다. 허공에는 전신주들이 버스와 나란히 달리며 기나긴 또 하나의 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길 위에 회색이 양팔을 크게 벌릴수록 하늘도 풍만하게 안겨 누웠다. 세상에 돋아난 목숨 있는 것들의 윤곽이 점점 살아나고 있었다하늘과 길이 접신을 한 듯 끝도 없이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경계도 없이, 한순간도 머무르지 않되 한순간도 벗어나지 않는 배경이 되고 있었다.


우리의 길도 서로 그런 배경이 된다면 괜찮게 살았다 할 수 있겠지. 내 의식의 배경엔 어떤 채색이 되어 있나 생각해 본다. 파스텔톤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계절이 수없이 지고 한 해도 수많이 지고, 이제는 회색이어도 좋겠다.


이런저런 상념의 골목을 거닐다 하마터면 차를 세우라고 소리 지를 뻔했다. 저 멀리 지평선 위로 몸피를 키운 해가 제 목구멍을 힘겹게 넘어가고 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뜨거운 불덩이 하나 꿀꺽 삼키는 일이다. 무채색 그 무한한 배경이 존재를 일으켜 세워 주는 시간 위를 나는 지금 느리게 달리고 있다.


하룻밤 머무를 곳을 예약도 하지 않고 길을 나섰다. 인생은 계획대로 다 되는 게 아니다. 저 높은 곳에 있는 누군가의 계획이 있을 뿐, 우리의 계획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지 모른다. 지금 내 눈앞의 얼굴들을 쳐다본다. 나를 닮거나 내가 닮은 또 다른 즉경卽景이다. 차를 달려오며 바라본 늘어진 여름 저녁놀과 아침 햇살 같은 아이들 얼굴이 겹쳐 온다. 지는 것들과 피는 것들은 이미 둘이 아니다. 일상에서 나를 둘러싼 얼굴들이 살갑다. 한순간 피었다 지는 풍경들이 먼 곳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의 마음도 한순간의 풍경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즉심卽心이다. 애초에 정처 없는 것들, 바람 끝자락에 매달려 나붓대는 것들에 마음이 흔들리는 건 어리석은 일일지 모른다. 즉경도 즉시도 즉심도 내가 진중히 사랑해야 할 풍경들이다.


숙소 창밖으로 밤하늘과 하나 된 검은 강물이 낮게 엎드려 뒤챈다. 풀벌레도 덩달아 잠 못 드는 밤에. #

 

 

 - 첫 수필집 앵두를 찾아라(2015 발행) 수록글




창작노트


 

대표작을 고르자니 잠시 망설였다.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줄곧 내 마음을 붙들어 온 시간이 떠올랐다. 2007년 가족과 한여름 휴가를 다녀와 쓴 <즉경>은 지금으로부터 시차가 큰 글이다.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시간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그때와 비슷하기도 다르기도 하다. 겉보기엔 매끄러우나 울퉁불퉁한 시간의 길 위에서 어쭙잖게 여기까지 왔다. 자주 고민하며 종종 벅차올랐고 대체로 행복했다. 나에게도 시간은 단련과 성장의 의미로 다가왔다.


시간풍경을 돌아보면 단전에 뜨거움이 고인다. 소설가 김승옥이 <서울 1964년 겨울>에서 추억이란 그것이 슬픈 것이든지 기쁜 것이든지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을 의기양양하게 한다고 쓴 문장은 이런 내 심경을 재치있게 대변한다. 쓸 수 있는 추억만이 자산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쓰지 않고 말 되지 않은 추억이 우리 운명에 더 결정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나에게 시간은 공간과 다르지 않기에 내가 어디에 있었던가, 어디를 걸었던가를 회상하게 한다. 내가 지나갔지만 동시에 나를 지나간 수많은 길, 파노라마로 스쳐 지나가버린 그 길에서 매번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반성문이 내 글의 진심이다. 미숙한 인간에게 사랑과 은혜를 나누고 잘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읽어준 사람들을 떠올리며 낯선 길 위에서 그런대로 좋은 햇살과 바람의 수혜자라 여긴다. 복도 많지.


누구든 시간의 위력을 거스를 수는 없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는 거꾸로 가는 시곗바늘이 달린 커다란 시계가 등장한다. 1918년에 기차역에 걸린 이 시계는 전사한 아들을 기리며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시계공의 염원으로 시작해 누구든 받아들여야 하는 종착역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떤 삶을 살든 마지막으로 우리가 맞이해야 하는 자명한 순간은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은 시간에 저항하는 삶이어야 하지 않을까. 순순한 것들은 매력이 덜하다. 내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남도의 얼음 맺힌 잔설을 뚫고 피어난 수선화처럼 철없는 꽃들이다. 육체적 시간을 거슬러 사는 벤자민의 특별함을 알아본 눈 맑은 사람들 속에 내가 있기를, 당신이 있기를... 그리고 마음 한가운데 평화의 성지를 지킬 수 있기를...


어디에 있느냐, 무엇을 하느냐, 무엇이 되었느냐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보느냐일 것이다. ‘즉경즉시즉심을 그러안는다. ‘본다는 실로 경이로운 일이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수두룩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 알 수 없는 시간의 길섶에서 호명되지 않은 꽃 한 송이를 만나려고 언제든 길 위에 오를 준비를 한다. 왜 쓰는가 자문한다면 거창한 대답은 어울리지 않는다. 다시 물어봐도 살기 위해, 좀 낫게 살기 위해 보고 느끼고 쓴다고 대답할 수밖에! 그럴 수 있음에 감사하다.


- <부산수필문예> 2022여름호(47호) 편집위원 특집란 





2016 양평 두물머리 여명 (아이폰 촬영)

'즉경'은 2007년 경기도 가평을 다녀온 후 쓴 글인데 사진창고를 뒤지기가 어렵다.

대신 경기도 양평으로 휴가 다녀왔던 2016년 여름의 사진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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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6-11 14: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두물머리 여명, 좋네요

프레이야 2022-06-11 14:42   좋아요 2 | URL
네, 참 좋았습니다. 서서히 밝아오는 물빛과 그라데이션이 멋진 하늘도요^^
양평계곡물이 참 맑고 시원했는데 다시 가보려면 몇 년은 지나야겠어요.

미미 2022-06-11 1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룻배인가요? 프레이야님 글도 훌륭하고 이 사진도 예술입니다
글과 사진의 분위기가 참 닮았습니다^^*

프레이야 2022-06-11 17:30   좋아요 2 | URL
황포돛배가 분위기 있게 저렇게요^^
미미 님 주말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고맙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2-06-11 18: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즉경 이란 말씀에 경은 알고 이해 하고 있습니다만 즉을 덧붙인 즉경의 뜻이 궁금하여 여쭙고 싶습니다.^^

프레이야 2022-06-11 18:49   좋아요 3 | URL
반갑습니다. 지금 그자리 눈앞의 풍경이라는 뜻입니다. 곧 즉^^ 다 지나가는 풍경이겠지요 머물러 있을 순 없으니. 그래서 더 소중한 것들.

북다이제스터 2022-06-11 20:2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mini74 2022-06-11 20: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눈앞에 저무는 해가 살금살금 해 뒤를 쫓는 프레이야님이 그려집니다. 우와. 어쩜 이리 글을 잘 쓰세요. 그러니 작가님이겠지요 ㅎ낫게 살기 위하 보고 느끼고 쓴다는 말씀도 참 좋습니다 *^^*

프레이야 2022-06-11 21:43   좋아요 2 | URL
미니 님 또 하루가 완전히 저물고 캄캄한데 맞은편 아파트 불빛만 휘황합니다. 별빛대신. 날마다 반복되는 의식이 어쩜 감사하게도^^

희선 2022-06-12 02: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나가서 아쉽지만 지나가서 다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마주하는 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할 텐데, 그런 건 늘 그냥 보내네요 마음도 한순간의 풍경이라는 말 멋지네요

사진 멋지네요 배가 있어서 더 좋은 풍경이 됐네요


희선

프레이야 2022-06-12 08:58   좋아요 2 | URL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처럼요. ^^
희선 님 모든 건 그래서 소중하고 다행이고 그런 것 같아요. 유월도 좋은 생각 좋은 풍경으로 잘 지내기에요.

페크pek0501 2022-06-12 23: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고 프레이야 님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 느꼈어요. 비생활적인 감성 수필!!! 이에요. 갬성 수필.
˝수확을 끝내고 돌아온 늙은 어머니 손등 같은 겨울 밭˝ - 이 표현에 꽂혔어요.

즉경을 오늘 배우네요. 즉시, 즉심도.
창작노트도 한 편의 멋진 글이네요. 저는 이런 글 잘 쓰는 작가들이 존경스럽더라고요. 이 부분에 제가 약한 지라...ㅋㅋ
남의 글을 읽는 맛 중 하나는 배울 수 있다는 점이에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앞으로도 이런 글 올려 주세요.^^

프레이야 2022-06-13 08:35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페크 님. 손도 눈도 감성도 둔해지기 쉬운데 오감을 발휘해 부단히 써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에고 체중이 늘어 진짜 둔해지네요. ^^

얄라알라 2022-06-15 01:20   좋아요 1 | URL
두 작가님께서 주거니 받거니 좋은 말씀
눈에 담아 갑니다요~~^^ 행복한 밤 되시길

프레이야 2022-06-15 09:16   좋아요 1 | URL
얄라 님 들으셨어요 ㅎㅎ
고맙습니다. 페크 님 얄라 님 굿모닝~^^

얄라알라 2022-06-15 0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두물머리를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 올라오는 시간대에 두 번 다녀왔는데, 프레이야 님 사진으로 보니 같은 여름이었어도 느낌 완전 다르네요
여유롭고 우아한 느낌^^

프레이야 2022-06-15 09:16   좋아요 2 | URL
시간대에 따라 풍경이 달라지니 신기하지요. 한여름이라도 저땐 시원하더군요. 물이 참 좋았어요. 제가 물 가까이 가야 좋은 오행이랍니다. ^^
 

산유화 / 김소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


김훈의 두 번째 소설집. 반가운 소식에 책받침대와 같이 얼른 영접했다. 여러 개 있지만 군데군데에 비치해 두면 편리하다.
제목은 김소월의 시 “산유화”에서 한 구절 가져왔다. 일곱 개의 작품 중 마지막에 있는 표제작부터 읽어보았다. 생과 멸, 성과 속, 자연과 인간, 죄와 구원 그리고 동서고금 시공을 초월해 신을 향한 영혼의 지향성과 영속성이 감정은 절제하고 아니 배제하고 아주 담담한 문체로 씌어있다. “흑산”에서도 다룬 천주교 소재.
늙고 병든 두 수녀가 등장하고 한 사람은 가고 또 한 사람은 남는다 아직은. 백도라지를 닮았을 잠옷을 입은 채 도라지동산 흙으로 돌아간 루시아 수녀의 봉분이 저만치 있다. 같이 있다 해도 혼자서 ‘있다.’ “칼의 노래”에서 묘사하였듯 적은 전체로 덮쳐오는 것과 달리 삶도 죽음도 개별적이라 존재는 끝내 고독하다. 그리고 이어져 있고 얽혀 있다. 너의 얼굴을 거울 보듯 마주하고 서로 매무새를 만져주는 것, 가엾고도 반듯한 일이다. 저만치 혼자서 피었다가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저만치의 시공 너머 또다시 피어나리.

“나는 한 사람의 이웃으로 이 글을 썼다.” - 김훈

도라지수녀원의 정식 명칭은 ‘성녀 마가레트 수녀원‘이다. 교구청의 김요한 주교가 이름을 지었다. 마가레트 수녀는 12세기 라인강 언덕의 자연동굴 안에 들어 있던 피에타 수녀원 소속이었다. 아들의 사체를 무릎에 얹고 죄 없는 세상을 간구하던 마리아의 기도를 이어가는 것이 그 수녀원의 서원이자 일과였다. 피에타 수녀원은 라인강의 시퍼런 강물이 산악 구간을 굽이쳐 나가는 협곡에 자리잡아서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수녀원의 계율은 은둔과 침묵이었는데, 계율을 따로 정하지 않아도 은둔과 침묵은 그 동굴 속에서 이미 실현되어 있었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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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6-10 06: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김훈 작가님의 작품이 나왔네요~! 저 제목이 산유화란 시의 구절이라니 몰랐습니다. 시 너무 좋네요~!! 검색해보니 독서대도 좋아보입니다 ^^

프레이야 2022-06-10 10:21   좋아요 3 | URL
김춘수의 꽃처럼 존재론에 기인하니 김훈 작가에게도 늘 화두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저만치 혼자서! 그간의 제목과 달리 서정적이다 싶었는데 산유화였어요. 독서대를 전 책받침대라고 했네요 ㅎㅎ 흰색 원고지 무늬로 괜찮네요. 득템했어요. 접어서 도서관 같은 데 들고나가기도 쉽겠어요.

바람돌이 2022-06-10 09: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지난번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이 별로였어요. 그래서ㅜ이번 책은 읽을까 말까 고민중이었는데 프레이야님이 불을 지르시네요. ㅎㅎ 그나 저너 김휸작가의 산유화 사랑은 여전하네요. 오래전 강연에서 이 시 얘기하면서 끝없이 얼마나 좋은지 열변하던 김훈작가 모습이 떠올라서요. ㅎㅎ

프레이야 2022-06-10 09:55   좋아요 3 | URL
오호 바람돌이님 전 그 장편소설은 패스했더랬어요. 왠지 한번 볼까 싶네요 오히려. 김훈이니까 ㅎㅎ 이번 건 강산무진 이후 16년만의 소설집이랍니다. 강연을 들으셨군요 전 기회가 없었는데 부러워요. 역시 산유화를 마음에 오래 품고 있었군요. 산유화 못지않게 말을 좋아하시는 듯요.

mini74 2022-06-10 13: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두 수녀이야기 관심이 갑니다. ~~ 시가 글에 스며드네요 ~

프레이야 2022-06-10 13:39   좋아요 3 | URL
작가도 늙고 병드니 더 단단해지고 숙연해진 느낌이 들었어요^^

독서괭 2022-06-10 16: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원고지에 연필로 쓴다는 얘길 들었었는데 이번책 표지가 원고지네요^^ 느낌이 좋습니다.

프레이야 2022-06-10 17:07   좋아요 2 | URL
네. 육필원고 느낌 좋아요. 몽당연필 좋아하시고 직접 연필로 써야 쓰는 것 같다죠. ^^

samadhi(眞我) 2022-06-11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 글을 읽으면 담배를 물고 연기를 내뿜는 장면이 떠올라요. 제가 못 해봐서 그저 상상할 뿐이지만. 말없이 느끼는 것들. 쓸쓸해서 좋은 느낌.

프레이야 2022-06-11 17:24   좋아요 1 | URL
네. 동감이에요 ^^ 말없이 느껴지는 것들이 있지요. 그래서 좋아합니다 김훈의 문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