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의 모든 아버지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
다큐 <송해 1927>의 마지막에 뜨는 문장이다. 책 <송해 1927>에는 다큐 속 장면이 들어가 있다.
주위에 노문우들이 많다보니 부모님처럼 느껴져 애잔하다. 새삼 그들의 생을 다시 보게 된다. 얼마 전 팔순생신 식사자리에 초대받아 가서 그분의 면모를 본 적이 있다. 열여덟 해를 글로도 봐왔지만 가족 친지에 둘러싸인 그분을 보는 건 또다른 느낌이었다. 예순이 채 못 돼 부군을 먼저 떠나보내고 고난의 세월을 견디며 주변에 참 잘하며 살아오셨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칠순 때 모인 멤버들이 여기 많이 계시고 이 멤버 그대로 88세 때 또 뵙겠다고 장남이 진심 담긴 인사말을 농담처럼 해서 모두 박수를 보냈다. 정 많고 애살도 많은 분이라 건강하게 미수까지 또 잘살아가시길 빈다.
최근 86세 문우의 글을 편집하여 첫 수필집 발간을 도와드렸다. 퇴원 후 휠체어에 앉아 작업하고 출판사와 조율하며 결과물이 나왔다. 나는 어차피 겪어야 할 그 시간을 견딜 수 있게 일거리를 주신 게 고마웠다. 마흔 편의 글을 읽고 다듬으며 꼰대다운 시선과 건강하게 삶을 즐기며 마지막 가는 길을 준비하는 자세에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도 걷고 춤추고 노래하는 즐거운 인생’은 그분의 글을 모두 읽고 내가 뽑은 카피다. 일찍이 고등학교 교감 명예퇴직을 하고 매일 아침 왕복 3.6킬로 정도 해변길을 걷고 동래학춤을 추고 시니어합창단에서 노래하며 손수 재봉틀로 손주들 옷을 수선하고 야생초목에 해박하여 숲해설가로도 활동했던 분이다. 프로필 사진은 일전에 찍어둔 영정사진을 쓰셨다. 나는 그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머물렀던 자리도 깨끗해야 되지만 가야할 자리도 미리 준비하는 마음이 다시 보인다. 송해 선생은 2018년에 갑자기 먼저 떠난 아내를 아내의 고향 대구 달성군에 묻으며 자신이 누울 자리도 미리 준비해 두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현대사를 관통해 한 사람이 아흔다섯 해를 살다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본다. 술자리에서 취해 북에서 내려와 이 고생이라고 신세한탄을 한 게 고발이 되어 검은 짚차를 타고 끌려갔던 경험도 있었던 건 몰랐던 에피소드다. 오래 산 사람의 깊이 팬 주름과 늘 눈물 젖은 것처럼 보이는 불룩한 눈두덩이를 마주하면 삶의 굴곡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스물두 살 아들을 뺑소니 교통사고로 먼저 보내고 묻어놓은 아픔을 이야기할 때, 아들이 자작해놓은 마흔 곡의 노래를 들으며 회한에 젖을 때, 선생은 못내 참지 못하고 울었다. 늙은 남자가 눈물을 보이고 우는 장면은 몹시 마음 아프다.
지난해 구순의 내 아버지는 갑자기 쓰러져 병원생활을 했다. 온몸의 염증수치가 높았고 우선 수치를 최대한 조절하는 데에 꽤 시간이 걸렸다. 3주일이 지나 퇴원 후 집에서 몇 달간 누워계셨다. 어머니의 고된 시간이 아버지 못지않았다. 여덟 살 연하의 어머니도 돌봄을 받아야할 형편인데 노구의 남편을 돌보면서 어머니는 한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당신한테 미안하고 고마워.” 이 한마디에 기약없는 간호를 기꺼이 하셨다. 지금은 다시 일어나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아버지는 그보다 열 달 전에 먼저 쓰러져 입원했었다. 일주일 후 퇴원해 “나, 안 죽었다.”며 농담을 던지던 아버지는 그 옛날의 이야기를 하던 중 갑자기 눈물을 떠뜨렸다. 갑작스런 일이었고 가슴이 몹시도 쓰라렸다. 사무친 회한을 못 이겨 어깨를 들썩이며 얼굴이 일그러져 아이처럼 울음 우는 늙고 병든 아버지의 얼굴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세상에 이름을 날리지도 못했고 가진 것도 남은 것도 그다지 없는 아버지는 송해 선생과 같은 해주 출신이다. 송해 1927, 배영옥 1932. 해주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한 송해 선생과 달리 아버지는 해주사범학교 졸업을 앞두고 전쟁을 맞이했다. 그때부터 운명에 떠밀려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온 이야기는 다 할 수가 없다. 피란 시절의 이야기는 이미 전설이 되어버릴 지경이다. 4,5공화국 시절에는 장사가 잘되었지만 동네 사람들과 사담을 나눌 때도 이북에 대한 발언을 몹시 조심하고 입에 담지 않아야 된다고 말씀하셨던 걸 기억한다. 아버지는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늘 깔끔하게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물건을 제자리에 반듯하게 두는 습관은 같다.
지난해 겨울에 나온 다큐 <송해 1927>은 젊은 감독의 첫 작품이다. 과거 흑백 필름 시절의 영상도 재미있지만 병원에서 또 분장실에서의 장면과 매일 아침 누룽지밥을 먹으러 가는 맞은편 아파트동 둘째 딸 집과 아내의 사진을 걸어두고 혼자 사는 집을 비추고 인터뷰를 통해 인물을 조명한다. 느슨한 느낌이 좀 있긴 하지만 진정한 딴따라로서의 송해와 아버지로서의 송해를 중점 배치했다. 남편으로서의 송해는 모를 일이지만 잔소리와 간섭이 많았던 어머니로 회고한 둘째딸의 증언과 배우자를 먼저 보내고 나직이 토해내는 외로움과 그리움의 말로 보아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다. 둘째 딸이 자분자분 들려주는 오빠(죽은 아들 송창진 씨)와의 이야기가 따뜻하다. 오빠가 직접 자작곡을 불러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해 선물한 걸 갖고 있었다. 그걸 복각해 영화에서 들려준다. 김현식 풍이다. 송해 선생의 아버지는 음악학교에 가겠다는 아들에게 내 아들이 아니라고 했을 정도로 반대했다고 한다. 노래하겠다는 아들을 인정하지 않고 한번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은 송해 선생은 후회의 눈물을 뜨겁게 흘렸다.
2020년 11월에 작은딸이랑 대구에 갈 일이 있어 볼일을 보고 달성군의 옥연지에 들렀다. 모르고 갔었는데 송해공원이 가까이 있었다. 지금은 송해기념관도 세워졌다고 한다. 아내 석옥이 여사의 고향이 그곳이라 송해 선생은 대구 명예시민이라고 한다. 아버지! 아빠!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이름이 아닐까. 고단한 세월을 천성대로 낙천적으로 긍정적으로 살아내고 영원한 휴식에 든 몸과 영혼, 평안하시길...
그때 찍은 옥연지 사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