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신임 편집장이 편집위원 특집란을 기획하며 대표작과 작가노트를 청탁했다. <즉경>은 오래전에 쓴 글인데 아래 창작노트란에 썼듯이 '시간'을 생각하며 자연스레 첫 번째로 떠오른 글이다. 4월에 퇴원 후 열흘 정도 지나 편집장에게 송고하고 그저께 여름호에 실려서 도착했다. '즉경'도 그렇지만 작가노트 혹은 창작노트에 지금의 내가 있어 여기에 옮겨 둔다. 모든 게 흔적이다.
즉경卽景
붉은 등대 하나 솟는다. 뜨겁고도 서늘한 시간이다. 시간을 분절할 수 있다면 나는 이 시간을 잘라서 주머니에 넣고 살고 싶다. 붙잡아두고 싶은 시간의 길 위로 속도를 낮춘다.
무작정 안겨드는 길을 맞바람 삼아 달리고 있다. 오후 늦게 출발했더니 여섯 시를 훌쩍 넘어서야 도시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고속도로로 올라 한동안 달리자, 하루치 시간을 불사르는 해가 저 멀리 지평선에 등대로 솟아 앞길을 밝혀 준다. 이즈음이면 이런저런 상념에 취하지만, 최고의 즐거움은 어스름 한가운데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소박한 의식이 놀 속에서 펼쳐지면 일상생활마저 숭고한 제의로 격상된다.
언젠가 지는 해의 발뒤꿈치를 눈으로 한 발 한 발 따라간 적이 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재빨리 변신하는 문화마을 경관을 내려다보며 시선이 허둥댔다. 어둑발이 조금씩 짙어질수록 장난감처럼 엎드려 있는 파란 지붕 집들의 이쪽저쪽에서 노란불이 하나둘 들고 일어났다. 극진한 점등식이었다. 노란 등불을 점화하는 일상의 의식이 날마다 피고 지는 누추한 삶을 명랑하게 밝혀 주었다. 지상의 별빛이 천상의 별빛보다 밝았다. 하루치 삶의 전쟁터에서 승전보를 안고 식구들도 하나둘 귀환하고 있었다. 낡은 옷자락에 먼지바람을 묻히고.
꽃이 지듯 매미소리가 지듯 시간도 진다. 매달려도 부질없는 일이다. 지는 꽃송이에서는 가없는 사랑의 송가가, 지는 매미소리에서는 생명의 찬가가 들린다.
시간은 어떤가. 지나가 버리는 것들, 스쳐 가서 돌아오지 않을 것들 옆에서 우리는 어줍은 내용이나마 이야기를 재생하고 어렵사리 편집하고 추억의 그릇을 빚어 간직하고자 한다. 즉시卽時를 사는 우리는 등짝을 보이는 시간을 잡아두려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사소한 것 하나도 붙들어두고 싶어 순간을 영원으로 묶으려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쇠를 녹슬게 하는 시간의 괴력에 무엇으로 맞붙어보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을까. 지는 것들에 경배를!
겨울 마이산에서 돌아오던 길의 즉경卽景이 기억의 길 위에 가로수처럼 펼쳐진다. 탈속한 나뭇가지들에 잔설이 내려앉아 있었다. 장식을 다 털어낸 담대한 성장盛裝이 또 다시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며 갈팡질팡하던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어둠이 서서히 내리던 차창 밖으로 정경情景이 스치듯 달아나고, 내 눈에는 순한 눈물이 차올랐다. 꼬리를 감추고 있는 시간이 애상스레 여겨졌다. 모든 걸 거둬들이는 시간, 모든 게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모든 곳에 평화가 내려앉는 시간, 그 수굿한 시간의 손을 잡고 싶었다.
그 길에서는 저 멀리 주홍빛 해가 시간을 거슬러 천천히 뒤로 달리고 있었다. 내가 앞질러 가고 있던 건지도 모른다. 한동안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는데 어느 순간이었던가, 마지막 기염을 토하더니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눈 깜빡할 새였다. 즉물卽物이었다. 잘 붙잡고 있었다 싶었는데 야멸차게 내 눈을 떨치고 떠나 버렸다. 떠나보낼 것은 그렇게, 떠나야 할 때도 그렇게 하라고 말하는 것이었을까.
사위四圍가 시나브로 회색의 품에 안기기 시작했다. 물상들이 한층 선명해졌다. 수확을 끝내고 돌아온 늙은 어머니 손등 같은 겨울 밭, 헤진 모자 눌러쓴 허수아비 두 팔에도 손에 잡힐 듯 올망졸망한 산등성이가 고양이 등처럼 완만한 곡선을 드러냈다. 낮게 또 깊게, 평등하게 평화롭게 세상의 사물들이 손에 손잡고 고립의 평원에서 마음을 잇고 있었다. 허공에는 전신주들이 버스와 나란히 달리며 기나긴 또 하나의 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길 위에 회색이 양팔을 크게 벌릴수록 하늘도 풍만하게 안겨 누웠다. 세상에 돋아난 목숨 있는 것들의 윤곽이 점점 살아나고 있었다. 하늘과 길이 접신을 한 듯 끝도 없이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경계도 없이, 한순간도 머무르지 않되 한순간도 벗어나지 않는 배경이 되고 있었다.
우리의 길도 서로 그런 배경이 된다면 괜찮게 살았다 할 수 있겠지. 내 의식의 배경엔 어떤 채색이 되어 있나 생각해 본다. 파스텔톤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계절이 수없이 지고 한 해도 수많이 지고, 이제는 회색이어도 좋겠다.
이런저런 상념의 골목을 거닐다 하마터면 차를 세우라고 소리 지를 뻔했다. 저 멀리 지평선 위로 몸피를 키운 해가 제 목구멍을 힘겹게 넘어가고 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뜨거운 불덩이 하나 꿀꺽 삼키는 일이다. 무채색 그 무한한 배경이 존재를 일으켜 세워 주는 시간 위를 나는 지금 느리게 달리고 있다.
하룻밤 머무를 곳을 예약도 하지 않고 길을 나섰다. 인생은 계획대로 다 되는 게 아니다. 저 높은 곳에 있는 누군가의 계획이 있을 뿐, 우리의 계획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지 모른다. 지금 내 눈앞의 얼굴들을 쳐다본다. 나를 닮거나 내가 닮은 또 다른 즉경卽景이다. 차를 달려오며 바라본 늘어진 여름 저녁놀과 아침 햇살 같은 아이들 얼굴이 겹쳐 온다. 지는 것들과 피는 것들은 이미 둘이 아니다. 일상에서 나를 둘러싼 얼굴들이 살갑다. 한순간 피었다 지는 풍경들이 먼 곳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의 마음도 한순간의 풍경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즉심卽心이다. 애초에 정처 없는 것들, 바람 끝자락에 매달려 나붓대는 것들에 마음이 흔들리는 건 어리석은 일일지 모른다. 즉경도 즉시도 즉심도 내가 진중히 사랑해야 할 풍경들이다.
숙소 창밖으로 밤하늘과 하나 된 검은 강물이 낮게 엎드려 뒤챈다. 풀벌레도 덩달아 잠 못 드는 밤에. #
- 첫 수필집 《앵두를 찾아라》(2015 발행) 수록글
창작노트
대표작을 고르자니 잠시 망설였다.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줄곧 내 마음을 붙들어 온 ‘시간’이 떠올랐다. 2007년 가족과 한여름 휴가를 다녀와 쓴 <즉경>은 지금으로부터 시차가 큰 글이다.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시간’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그때와 비슷하기도 다르기도 하다. 겉보기엔 매끄러우나 울퉁불퉁한 시간의 길 위에서 어쭙잖게 여기까지 왔다. 자주 고민하며 종종 벅차올랐고 대체로 행복했다. 나에게도 시간은 단련과 성장의 의미로 다가왔다.
시간풍경을 돌아보면 단전에 뜨거움이 고인다. 소설가 김승옥이 <서울 1964년 겨울>에서 추억이란 그것이 슬픈 것이든지 기쁜 것이든지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을 의기양양하게 한다고 쓴 문장은 이런 내 심경을 재치있게 대변한다. 쓸 수 있는 추억만이 자산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쓰지 않고 말 되지 않은 추억이 우리 운명에 더 결정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나에게 시간은 공간과 다르지 않기에 내가 어디에 있었던가, 어디를 걸었던가를 회상하게 한다. 내가 지나갔지만 동시에 나를 지나간 수많은 길, 파노라마로 스쳐 지나가버린 그 길에서 매번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반성문이 내 글의 진심이다. 미숙한 인간에게 사랑과 은혜를 나누고 잘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읽어준 사람들을 떠올리며 낯선 길 위에서 그런대로 좋은 햇살과 바람의 수혜자라 여긴다. 복도 많지.
누구든 시간의 위력을 거스를 수는 없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는 거꾸로 가는 시곗바늘이 달린 커다란 시계가 등장한다. 1918년에 기차역에 걸린 이 시계는 전사한 아들을 기리며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시계공의 염원으로 시작해 누구든 받아들여야 하는 종착역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떤 삶을 살든 마지막으로 우리가 맞이해야 하는 자명한 순간은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은 시간에 저항하는 삶이어야 하지 않을까. 순순한 것들은 매력이 덜하다. 내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남도의 얼음 맺힌 잔설을 뚫고 피어난 수선화처럼 철없는 꽃들이다. 육체적 시간을 거슬러 사는 벤자민의 특별함을 알아본 눈 맑은 사람들 속에 내가 있기를, 당신이 있기를... 그리고 마음 한가운데 평화의 성지를 지킬 수 있기를...
어디에 있느냐, 무엇을 하느냐, 무엇이 되었느냐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보느냐일 것이다. ‘즉경’은 ‘즉시’와 ‘즉심’을 그러안는다. ‘본다’는 실로 경이로운 일이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수두룩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 알 수 없는 시간의 길섶에서 호명되지 않은 꽃 한 송이를 만나려고 언제든 길 위에 오를 준비를 한다. 왜 쓰는가 자문한다면 거창한 대답은 어울리지 않는다. 다시 물어봐도 살기 위해, 좀 낫게 살기 위해 보고 느끼고 쓴다고 대답할 수밖에! 그럴 수 있음에 감사하다.
- <부산수필문예> 2022여름호(47호) 편집위원 특집란
2016 양평 두물머리 여명 (아이폰 촬영)
'즉경'은 2007년 경기도 가평을 다녀온 후 쓴 글인데 사진창고를 뒤지기가 어렵다.
대신 경기도 양평으로 휴가 다녀왔던 2016년 여름의 사진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