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제가 아파서요. 아파서 그래요."

어제 퇴근길.
좌석버스에 50대 후반~60대 초반의 삐쩍 마른 아저씨가 타면서 말했다. 그것도 2번이나.

그 아저씨가 뭘 잘못했느냐?
잘못한 거 없다. "천천히" 탔다는 거 밖에는.
"빨리 빨리 좀 타요! 거 참....차 출발도 못하게..."
평소 버스기사들한테 이런 멸시를 얼마나 많이 들었으면...
그 아저씨는 잔뜩 주눅이 들어 버스기사의 눈치를 보며
"죄송합니다. 아파서 그래요."하고 고개까지 조아리며 말했다. 그것도 2번이나.

화가 났다.
그 아저씨가 뭘 잘못한 게 있다고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까?
버스 좀 늦게 출발하면 안되나?

문제는 늦게 출발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데 있다.
뭐든 "빨리 빨리!".
지독하고도 잔인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거 참....몸이 성하지 않으면 나 댕기지를 말든지..."

말할 수 없이 폭력적인 사람들이 있다. 은근히 많다.
멀쩡한 게 몸뚱이 하나 밖에 없는 사람들일 수록 더하다.

한국에 온지 이제 막 한 달이 된 친구 James에게
그의 눈에 비친 한국 얘기를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난다.
다 맞는 얘긴데도, 평소에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얘기들인데도,
James가 말하면 짜증이 난다.

알고 있지만 남한테 듣기는 싫은 건지,
그렇게 생각하지만 인정하기는 싫은 건지,
평소에 느끼던 환멸이 나의 감상이 아닌 사실이 되는 게 두려운 건지,
나는 James가 하는 얘기들을 참고 들을 수가 없다.

참을 수 없어서 James에게 디따 빈정거리며 말했다.
"Nobody invited you to Korea! Nobody is asking you to stay here!"

그 때 James는 무슨 말을 하고 있었냐?
생각해 보면 별 말도 아니었다.
"횡단보도"에 대한 얘기였다.

한국은 왜 이렇게 파란 불이 빨리 꺼지느냐?
켜지자 마자 바로 깜박거린다. 도대체 노인들은 어떻게 횡단보도를 건너냐?

그러면서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흉내를 냈다.
왼쪽 오른쪽을 두리번 거리면서 엉거주춤하게 달리는 자세를.

처음엔 웃겨서 좀 웃었더니 오버를 하며 액션이 커졌다.
여자들은 힐까지 신어서 더 뒤뚱거린다며
배삼룡인지, 미스터 빈인지, 오린지, 거윈지 알 수 없는
해괴하고 이상한 걸음걸이를 흉내냈다.

그 순간 훅~ 불쾌함과 모욕감이 기어 올랐다.
아침마다 몇칸 안 남은, 깜박이는 파란 신호등을 보며
힐을 신고 어떻게든 건너 보겠다고 숨을 헐떡이며 뛰는 내 모습은
배삼룡 또는 미스터 빈 또는 오리 또는 거위처럼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 순간 빨리빨리! 어서어서!
조금만 쳐지면 큰~일 난다.
낙오하면 안돼!
앞장서서 가자!
니가 평균을 깎아 먹잖아! 80점 밑은 다 일어나!

한국에서 살려면 뭐든 빨리빨리 해야 한다.
오래 걸리면, 다른 사람들의 아까운 시간을 뺏으며 큰~일 난다.

그 아저씨는 내릴 때 또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것도 2번이나.
"죄송하지만 앞으로 내리겠습니다. 제가 아파서 그래요. 죄송합니다. "

버스기사는 무슨 대단한 선심이라도 쓰듯 앞문을 열고 기다려 줬다.
몸이 불편한 아저씨는 내리면서도 말했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그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니 울컥했다. 마음이 헛헛했다.
그래서...집에 와서 캔맥주를 하나 마셨다.
캔맥주를 홀짝이는데 이상할 만큼 서럽고 슬펐다.
마음은 밤처럼 가라 앉으며 더욱 더 헛헛했다.

그 때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두두두두.... 샤워처럼 내리 부었다.
빗소리를 들으며 그 아저씨가 비오기 전에 버스에서 내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아저씨한테 온갖 눈총과 모욕을 주는 버스기사들.
그 사람들도 언젠가 똑 같은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파서요. 아파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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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9-06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해심' 자체가 없고, 종종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곤 해요. 이상한 나라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2006-09-06 1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6-09-06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수선님...!
버스기사 아저씨도 진심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프고 퍽퍽한 이 세상을 살다보니 그리되신 거겠죠. 간혹 넉넉한 마음을 가진 버스기사 분을 뵈면 나 또한 마음이 넉넉해질려고 해요. 아픈 사람은 아픈 것만으로도 오히려 당당해져야 하는데, 알아서 고개를 수그리니 오히려 민망하군요.

BRINY 2006-09-06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대도시가 더 싫어요. 그래도 여기는 그렇게까지 심하지 않은데.

2006-09-06 1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6-09-06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쁜놈.

urblue 2006-09-06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버스 기사 개인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버스 회사가, 사회가 그렇게 만드는 거겠지요. 마음이 안 좋긴 마찬가지입니다만.

moonnight 2006-09-06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이 아프신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아니시니 일단 안심;; 그치만 참 슬프네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여유가 없는 우리. 저부터도 먼저 반성해야겠어요.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조급해지는 스스로를 가끔 발견한답니다. 얼마나 싫은지 몰라요. -_ㅠ;

조선인 2006-09-06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는 버스 배차간격을 회사에서 자동으로 감지하잖아요.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회사에서 전화가 오더군요. 아니면 자동시스템으로 경고가 나오든지. 참 무시무시한 세상이에요.

플로라 2006-09-06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픈건 죄송한게 아닌데... 수선님 글을 읽다보니 왠지 너무 서글퍼지네요...

혜덕화 2006-09-06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픈 것도 마음 아픈데, 미안해하기까지 하며 살아야 하다니.
돌아보면, 장애인 시설 설치를 반대하거나, 노인 요양 시설을 못짓게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겠지요. 누구나 늙고 병드는 과정을 피해갈 수 없는데, 한 치 앞을 못내다 보는 무명이 안타까울 뿐입니다._()_

깐따삐야 2006-09-06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사람 신경질나게 만들고 서글프게 만드는 세상입니다. 두 주먹 불끈 쥐면 배어오르는 건 땀이 아니라 눈물인지도 몰라요.

LAYLA 2006-09-06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로서로 친절하게 대해주면 될 걸 , 치이고 치이면서 사람들이 더 팍팍해진단걸 느껴요...

마태우스 2006-09-06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을 살기 어렵게 만드는 건 바로 우리들이죠...ㅠㅠ

끼사스 2006-09-07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신문칼럼 보니까 버스 정차하고 난 뒤에야 승객들이 일어나 하차하자는 제안을 하더군요. 상당히 인상 깊었습니다.

2006-09-07 1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6-09-07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선함이 나약함으로 배려가 비굴함으로 비춰지는 등굽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아직 그런 모습에 맘 아파하고 부끄러워할줄 아는 사람들이 남아 부대끼며 살고 있다는 것이 다소나마 위안입니다.

프레이야 2006-12-20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우선 깜짝 놀랐어요. 님이 어디 아프신가 해서요. 그건 아니라 안심이지만 글을 읽고 있자니 마음이 몹시 쓰라립니다. 사람들의 폭력이란게 이런 것이네요.
그리고 우리네 그 빨리빨리 성질은 정말 좀 고쳐야할 것 같아요. 엘리베이터 빨리 안 내려온다고 성질 부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구요. 뭐가 우리를 이리 빨리 가라고 몰아대는 걸까요...

딸기 2006-12-21 0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마음이 아픈 글이네요. 아픈게 잘못이 아닌데...
저는 아이 데리고 자전거 타다보면 화날 때 많아요. 자전거 도로에서 아이가
보조바퀴 달린 것으로 타는데, 느리거든요. 그러면 뒤에 사이클 타는
아저씨 아줌마들이 째려볼 때가 있어요.
"죄송해요, 제가 어린이라서요, 어려서 그래요. 죄송해요."
아이가 이렇게라도 말해야 하는 것인지... 아마도 그 사람들은
'엄마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겠지요. "죄송해요, 제가 어린애를 데리고 나와서 그래요"
실제로 "왜 애는 데리고 나와서 어쩌구 저쩌구" 하는 소리 들은 적 있거든요.
자기도 어린 시절 있었을텐데... 마찬가지로, 자기도 나중에 아플 수 있는데...
이렇게 말하는 저도, 빨리빨리 해야 한다며 남들에게 나쁘게 한 적 있겠지요
반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