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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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도 기독교도는 아니지만, 신앙과 관계없이 성경을 읽는 걸 좋아합니다. 젊은 시절부터 시간이 나면 펼쳐들고 띄엄띄엄 읽었는데, 그러다가 습관으로 굳어졌답니다. 암시가 풍부한 읽을거리고, 배우고 느끼는 게 많았습니다. 그중 시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네 이해하시겠습니까? 인간이란 숨결처럼 덧없는 존재고, 살면서 영위하는 나날도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 P358



고야스 씨는 날로 커져가는 아내의 배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손바닥으로 가만히 어루만지면서, 자신들 사이에 태어날 아이를 상상했다. 과연 어떤 아이가 이 세상에 와줄까? 그리고 그 아이는 어떤 사람으로 자랄까? 어떤 자아를 지니고, 어떤 꿈을 품을까?

고야스 씨는 한때 자신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해 고뇌했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려나 상관없었다. 부모에게서 한 덩어리의 정보를 물려받아, 자기 나름대로 약간의 수정과 가필을 하여 다시 자기 아이에게 물려준다. 결국 자신은 단순한 일개 통과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긴 쇠사슬의 고리 하나일 뿐이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설령 인생에서 의미 있는 일, 널리 회자될 만한 일을 이뤄내지 못한다 한들 뭐 어떻단 말인가? 자신은 이렇게 어떤 가능성을-그저 가능성일 뿐이라 해도-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지금껏 살아온 의미가 있지 않은가.

- P380

그건 그에게 싹튼 완전히 새로운 시각이자, 지금껏 해보지 못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보니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망설임과 울분이 사라지고 거의 난생처음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그때까지 남몰래 가슴에 품었던 모든 야심을, 혹은 몽상과도 닮은 희망을 접고, 지방 소도시의 중견 양조회사 4대 경영자로서 안정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 P380

세 사람의 이름 밑에는 각자의 생몰년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내와 아이의 몰년은 같다. 소에다 씨 말대로 그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시기에 세상을 떴다. 한 사람은 길에서 트럭에 치여, 한 사람은 불어난 강물에 스스로 몸을 던져서. 그리고 홀로 남겨진 고야스 씨의 몰년은 그후 오랜 세월이 지난 작년이다. 나는 묘비 앞에 서서 오랫동안 그 숫자를 바라보았다. 그 숫자 자체가 소리 높여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때로는 말보다 숫자가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 P429

"제가 하고 싶은 건 이런 얘깁니다. 티없이 순수한 사랑을 한번 맛본 사람은, 말하자면 마음의 일부가 뜨거운 빛에 노출된 셈입니다. 타버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더욱이 그 사랑이 어떤 이유로 도중에 뚝 끊겨버린 경우라면요. 그런 사랑은 본인에게 둘도 없는 행복인 동시에, 어찌 보면 성가신 저주이기도 합니다. 제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하시겠습니까?" - P449

"옛날부터 고독을 좋아했나?"
"고독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죠. 아마 어디에도." 나는 말했다. "다들 무언가를, 누군가를 원해요. 원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 P568

나는 눈을 감고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예전에는-이를테면 내가 열일곱 살일 때는-시간 같은 건 말 그대로 무한에 가까웠다. 물이 가득찬 거대한 저수지처럼. 그러니 시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 시간은 유한하다. 그리고 나이들수록 시간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점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어쨌거나 시간은 쉬지 않고 나아가니까. - P636

짐작컨대 현실은 하나만이 아니다. 현실이란 몇 개의 선택지 가운데 내가 스스로 골라잡아야 하는 것이다. - P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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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4 21: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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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류이치 사카모토 (Ryuichi Sakamoto) 지음, 황국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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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는 간결하고 담백하고 그의 음악이 좋다는 것도 인정하지만 음악이 좋다고 해서 사유조차 깊이가 있을 수는 없다고 느꼈다. 어쩌면 그건 사회적으로 부와 명예를 누리는 사람이 치뤄야 하는 비용인지도 모른다. 늘 세계적인 유명인들과 교류하고 좋은 제안을 받고 전세계에 부동산을 소유하고 비워둔 부동산엔 주5일 하우스키퍼를 두는 사람이라면. 나 역시 그런 환경에 놓인다면 굳이 사유가 치열할 필요가 있을까? 운동선수는 운동을 하고 음악가는 음악을 만들고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나면 그만일 뿐. 혹은 그가 보여주고 싶은것만 보여주기로 택했기 때문에 그리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스스로 젊은 시절 술과 여자에 미쳐 살았다고 하면서도 그 한 문장 외의 이야기는 더 하지 않겠다고 잘라 말한다. 그가 가장 솔직하게 말한 부분은 젊은 시절 동거하다 다른 여자 때문에 떠나버린 여자와 나이가 들어 친척같은 관계가 되었다는 부분. 가장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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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5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젊은 남자
아니 에르노 지음, 윤석헌 옮김 / 레모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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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살 먹은 남자가 분명 자기 딸이 아닌 여자와 아무런 지탄도 받지 않으면서 공공연하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마당에. 어쨌든 나는 중년 커플을 바라보면서, 내가 스물다섯의 젊은 남자와 있는 이유는 내 또래 남자의 주름진 얼굴, 나자신의 늙은 얼굴을 내내 앞에 두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A의 얼굴 앞에서는 내 얼굴도 그처럼 젊었다. 남자들은 이 사실을 언제나 알고 있었고, 나는 내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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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가을 2023 소설 보다
김지연.이주혜.전하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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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어느 순간이고 욕먹을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자기 검열은 자기 연민보다 훨씬 쉬운 자동 반사 같은 일이었다. - P63

시인은 노인과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의외로 죽어가는 자들을 상대하는 일에 적성이 있음을 깨달았고 - P70

윤미는 이제 할머니구나.

...

이제 겨우 아줌마에 무감해졌건만.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하나의 문이 열린다더니. 숙희는 삶이 제공하는 이 끝없는 개념적 공격에 좀 억울하고 피곤한 마음이 들었다. 인류의 반이 필히 경험하는 것인데도 왜 이토록 힘겹고 외로운 싸움으로 느껴지는 것인지. 두 달 전 마흔아홉 살이 된 숙희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줌마‘라는 단어와 치열한 내적, 외적 다툼을 벌여오다가 이제 겨우 ‘정착‘이랄까 ‘평화‘랄까 그 비슷한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우연찮게 면전에서 아줌마라 불리더라도 상처받지 않을 만큼 자신의 감정을 잘 추스를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말은 쉽지만 그게 그렇게 만만한 과정은 아니었다. - P117

칠십대면 칠십대 여성이라 하고, 팔십대면 그냥 팔십대 여성이라 지칭하면 될 것이지, 그도 아니면 서양식으로 이름을 부르든가 단순히 나이가 들었다고 아무에게나 할머니라고 대충 불리고 싶진 않았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숙희 어린이‘와 비슷한 어감으로 ‘숙희 할머니‘하고 자신을 부르며 제멋대로 친근한 척 이래라저래라 선을 넘어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괴로웠다. - P126

그는 보고 있기 즐거운 남자였다. 처음 만났을 때 보다 살이 조금 찐 듯했지만 찬영은 여전히 젊은이의 몸을 갖고 있었다. 숙희는 문지방에 서서 상체를 반쯤 벽에 기댄 채 찬영의 몸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아름답다 느꼈던 많은 것들이 그것을 붙잡는 순간 곤란함이 되어 곁에 남았다.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엔 예전에 비해 전반적으로 에너지가 딸린다는 느낌이었다. 나이가 들어 할머니 취급을 받게 되는 건 상상만 해도 싫었지만, 젊은 남자들이 점점 더 어린애처럼 보이는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뭐가 되었든 무언가에서 또다시 멀어지고 있다는 이 생생한 느낌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모든 것에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이 생경함. 그것만큼은 새롭다고 숙희는 자조했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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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에 찾은 선술집엔 디제이 박스가 있었다. 입석 테이블에 서서 하이볼을 마시며 디제이가 틀어주는 시티팝을 들었다. 오너가 권한 사케를 마셨다. 다음 술은 뭘 마실까요. 내가 묻자 그는 또 다른 술을 내어주었다. 기분이 좋았다. 


시티팝은 어느새 90년대와 2000년대의 한국가요로 바뀌었고 나는 동행과 함께 가벼운 춤을 췄다. 자연스레 옆의 남자와 어깨가 부딪혔다. 그는 나만큼 올드 케이팝을 좋아했다. 성시경과 임재범과 박진영과 쿨 핑클... 좋아하는 노래가 나올 때마다 감탄하고 환호하는 그가 귀엽다 생각했다. 


나는 그가 나와 비슷한 또래일거라 생각했다. 이렇게나 올드 케이팝에 즉각적으로 환호할 수 있단 건 정말로 그 노래와 청춘을 함께한 같은 세대가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어깨가 스치다가 건배를 하고 같이 춤을 췄다. 몇 살이세요? 먼저 물은 건 나였다. 저, 서른이요. 강아지처럼 순하게 웃는 얼굴이 귀여워서 서른이란 나이가 어색하지 않긴 했지만 나는 되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노래를 다 알아요? 그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저 이런 노래 좋아하거든요. 인터넷에서 보았던, 이전 세대의 노래를 유튜브로 배우고 애정한다는 요즘 청년인듯 하였다. 마치 어린 내가 내 이전 세대가 사랑했던 홍콩 영화를 한 철 지나 사랑하였듯이. 


다시 또 같은 리듬에 고개를 까딱이다 그가 물었다. 몇 살이세요? 나는 웃었고 내 동행이 대신 답했다. 많아요. 아주 많아요. 그는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저 보다 많다구요? 술집은 꽤 어두웠다. 정말로 몇 살이에요? 눈을 동그랗게 뜬 그에게 나는 내 출생년도를 말했고, 그는 말했다. 정말로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기분이 특별히 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의미가 있는 말이 존재할 공간도 상황도 아니니까. 이 노래들 좋아해서 우리 나이가 비슷한 줄 알았어요. 내 말에 그는 무슨 소리냐는 듯 답했다. 우리 같은 노래 세대잖아요. 에이치오티, 핑클, 에스이에스. 그렇지 않아요? 그에겐 이국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교포들 특유의 해사하고 밝은 웃음이랄까, 그리고 약간은 어눌한 발음까지. 음악이 시끄러워 그에게 다가서 말을 하다 그의 귓볼에 내 입술이 스쳤고 그는 자신이 교포는 아니라 말했다. 저 광고해요. 컨텐츠 만들구요. 


오너가 마감하고 같이 한 잔 더 하자고 해서 기다리는 사이에 그 역시 계산을 하고 업장을 나가기 전 나의 인스타그램을 물었다. 나의 인스타그램. 나의 인스타그램... 비공개 계정인 나의 인스타그램엔 술집에서 만난 남자에게 보여주기엔 애매한 것들이 많았다. 부모의 죽음, 사업상의 사고와 어려움, 그래서 내가 언제 어떻게 슬펐는지에 관한 감상적인 문장들, 기타 등등. 나는 내 인스타그램을 말하는 대신 내 폰을 내밀고 그의 인스타그램을 먼저 받았다. 그의 인스타그램은 힙했다. 쿨이 아니라 에스파나 뉴진스와 더 어울렸다. 그의 나이와 외모와 업계가 그러하듯이. 나는 그의 친구신청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대로 놔두었다.


2차 술자리까지 다 마친 다음 올라탄 택시가 빠르게 달리는 동안 변호사 미팅 녹음파일을 들었다. 내가 처한 현실은 이런 것이다. 소송과 강제경매와 돌아서면 돌아오는 직원들 월급날짜와 대출금 이자. 서른인 친구는 너무도 귀엽지만 그와 나 사이에 어떤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까. 임재범의 이 밤이 지나면의 클라이맥스에서 함께 립싱크를 할 수 있단 것 외에. 하지만, 난 분명히 그런 생각을 했다. 강제경매를 막고 성공적으로 엑시트 한다면, 그래서 현생의 번뇌의 고통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이런 귀여운 남자아이와 춤이나 추고 술이나 마시고 그가 환한 낯에 내 얼굴의 그늘을 발견한 뒤 마음이 변하기 전까지는 함께 재미있게 놀겠다고.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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