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기담집 (하나레이 에디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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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페이, 이 세계의 온갖 것들은 의지를 갖고 있어. 이를테면 바람은 의지를 갖고 있어. 우리는 평소에 그런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지.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을 저절로 깨닫게 돼. 바람은 단일한 의지를 갖고 당신을 감싸고 당신을 뒤흔들어. 바람은 당신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 바람뿐만이 아니야. 온갖 다양한 것들이. 돌도 그중 하나겠지? 그들은 우리를 아주 잘 알아.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다. 어느 순간이 찾아오고, 우리는 그것을 문득 깨달아. 우리는 그런 것들과 함께 살아나갈 수밖에 없어. 그런 것들을 받아들여서 우리는 살아남고 그리고 점점 더 깊어져가는 거야.-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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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10-25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레일라 님, 무라카미 하루키 책 전작해요? ^^ 인용하신 글 좋아요!!

LAYLA 2020-10-26 12:41   좋아요 0 | URL
라로님!!! 읽다 보니 점점 이어져서 여기까지 왔어요 ㅋㅋ 근데 사실 무서운건 무라카미 하루키 책 중 많은 수를 이미 예전에 읽었더라구요. 읽고 스르륵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글인데 그게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여기까지 읽고 잠시 다른 책들로 넘어가보려구요. 일년기록을 보니 생각보다 책을 적게 읽어서 연말에 조금 분발해보려고 해요^^;;;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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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랫동안 묵히고 미뤄두었던 이 책을 큰 숙제를 한다는 느낌으로 읽었다. 읽는 동안 한숨이 나올 정도로 부끄러운 부분들도 많았고(손발이 오그라드는 부분이라는 의미) 별볼일 없는 남주가 섹스의 신처럼 크고 단단한 자지로 등장하는 거의 모든 여자들과 자거나 성적인 행위를 한다는 내용(그것도 여자들이 먼저 원해서)측면에서는 내가 이 책을 기피했던 이유가 무척 합리적이었단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출간되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왜 그리 인기를, 특히나 한국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나 이해가 되기도 하였다. 


한국 초판이 89년도에 출판되었는데 일본문화를 폐쇄해서 텔레비전으로 일본 방송을 볼 수도 없고 인터넷도 없었으니, 주 6일 출근하며 먹고 사는 것에도 허덕이던 한국 사람들에게 무라카미 하루키가 제시하는 '청춘'의 모습 (대학을 다니고 기숙사에 살고 위스키를 마시며 여자들과 어울리고 원하면 훌쩍 기차여행도 떠나는) 그리고 연애라는 소재를 통해 '상실'이라는 개념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신선하고 충격적이었을거 같다. 민주화 운동으로 문학과 예술의 소재와 범위가 지극히 좁아져버린 상황에서 한국문학이 소외와 외로움을 다룬 작품이래야 '서울 1961년 겨울' 뭐 그런게 아니었을까? 그 상황에 하루키가 세련된, 잘 사는 나라의 인텔리 대학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상실이란 것이 무엇인지, 너도 힘들지? 해주니 문화적으로 척박하던 한국 독자들의 눈에 얼마나 멋져 보였을까. 마치 서울 처음 상경한 시골 소년이 받는 충격같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특히나 성에 대해 가볍게 묘사하는 부분, 비정상적으로 개방적인 여성 인물들은 쓰여질 당시에도 하루키의 판타지로 쓰여졌을 인물들이고 지금 시대의 눈으로 보면 쓰레기 같은 내용들도 많지만 (죽은 아버지의 영정 앞에서 아버지의 정자로 만들어진 몸이니 다 보세요, 하며 발가벗는 여자 등장인물에 대해 쓰레기 같은 내용이라고 말할수 밖에 없다) 어쨌든 그 당시엔 쿨함으로 와 일본은 저렇구나 하고 버무리하며 남성 독자들의 판타지를 1000%정도 충족시켜 주었으리라 생각한다...일본에 가본 사람도 잘 없던 시절이니까. 일본은 엄청 부자나라고, 일본엔 이런것도 있다더라, 저런것도 있다더라, 이런 소문만이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시절이니까. 그리고 요즘 시대엔 중2도 쓰지 않을것 같은 감상적인 문장들. 비맞은 원숭이처럼 외롭고 숲의 나무가 다 쓰러지는 그런 문장들은 지금이야 우습지만 그 당시엔 그 시대의 독자들을 뒤흔들었으니 충분히 대단한 업적이라 할 만하다 싶다. 다만 나는 당시 그 문장을 한국어로 번역하였던 유유정 선생님의 평이 궁금하기는 하다. 60대 후반의 나이에 그런 문장들을 번역할 때, 그 시절 한국의 정서와 사회적 배경에서 그런 문장들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짐작이나 하셨었는지.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 책은, 시대의 감수성이 달라진 지금에는 감성적으로 와닿는 접점이 많이 사라졌고 하루키 특유의 여성 캐릭터는 비난받을 부분이 많으며 별 볼일 없는 남주가 자꾸 여자들하고 자는 내용은 스토리의 개연성을 떨어뜨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뛰어난 소설로 평가받는 건 한 권으로서 담아내고자 하는 작가의 주제의식이 명확했다는 점 그리고 문장과 구성의 측면에서 완성도가 높았다는 점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가가 일생동안 같은 주제를 새로운 소설로 변주하며 커리어를 쌓았기에 결과적으로 그의 장대한 커리어 시작점에 위치하는 이 책이 스테디셀러로 긴 생명력을 가지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평생 소설가로 열일하는 행위 자체가 상실의 시대에 대한 영업이 된 셈이랄까. 생각해보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국을 휩쓸던 시절 그 말고도 잘나가고 세련된 작가들은 많았고 청춘을 그린 작가들도 많았다. 작품 하나하나를 따져보자면 하루키보다 더 잘 쓴 작가들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작가들이 중년을 지나며 활동을 줄이고 서서히 잊혀진 작가가 되다 보니 그 작품들 역시 이제는 잊혀진 작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어찌 말하자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저력은 작품 하나하나로 말할 수 있는게 아니라 평생 단절없이 소설을 써내는 그의 장인정신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의 작품이라 팔리는 것이다. 


그럼 무라카미 하루키는 고전이 될까요? 란 질문에는 글쎄. 지금은 작가가 계속 새책을 펴내고 영업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 10년 20년 후의 세대가 과연 이 책을 읽을까? K팝이 J팝보다 잘 나가고 일본의 여고생들이 한국식 화장을 따라하는 시대에? 하지만 그런 회의적인 시각과 함께 이 책이 지난 시절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었나 하는 객관적인 인정 또한 필요하다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며, 한국에서 선생님이라고 떠받드는 소설가들이 사실 하루키의 쿨한 대학생을 따라한 열화버전 상실의 시대를 썼었구나 깨달았을 때 정말 우스웠으니까. 그래, 하루키는 명성만큼 대단하지 않을 수 있지. 하지만 하루키만한 작가도 없었던게 지금까지의 현실이었다는 인정. 


어쩌면 평생동안 읽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책이기에 완독한 지금의 감상은 후련하다는 것. 정말 속이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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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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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내가 아직 젊고 그 기억이 훨씬 선명했던 무렵, 나는 그녀에 관해서 글을 써보려고 시도한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엔 단 한 줄도 쓸 수가 없었다. 첫 한 줄만 나와 준다면 그 다음은 무엇이든 술술 써질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 한 줄이 아무리 애써도 나와 주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하지만 이젠 안다. 결국에는 글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기억이나 불완전한 상념밖에 없다는 것을. - P46

나는 그런 공기 덩어리를 몸 속에 느끼면서 열여덟 살의 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심각해지지 않으려고도 노력했다. 심각해진다는 것이 반드시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어슴푸레하게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P72

나가사와는 몇 가지의 상반되는 특질을, 아주 극단적인 형태로써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때로는 나조차 감동하고 말 정도로 친절했지만, 그와 동시에 더럽게 심술궂은 데가 있었다. 깜짝 놀랄 만큼 고귀한 정신을 갖고 있음과 동시에, 별수없는 속물이기도 했다. 사람들을 이끌어 낙천적으로 거침없이 앞으로 나가면서도, 그 마음은 고독하게 음울한 진흙 구덩이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그의 이율 배반성을 처음부터 명백히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이 어째서 그의 그러한 면을 보지 못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사나이는 이 사나이 나름의 지옥을 안고 살았던 것이다. - P83

네가 이런 걸 허무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네가 정상적인 인간이라는 증거고 아주바람직한 일이야. 알지도 못하는 여자와 자고 다녀 봤자 얻는 건 아무것도 없지. 피곤하고, 자신이 싫어지게 될 뿐이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구.

그럼 어째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겁니까?

그걸 설명하기란 어려워. 왜 도스토예프스키가 도박에 관해서 쓴 것 있지? 그것과 마찬가지야. 즉 말이지, 가능성이 주위에 충만해 있을 때, 그것을 그냥 두고 지나간다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 그걸 알겠어?- P87

부자의 최대 이점이란 게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돈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거예요.- P130

내 눈으로 보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악착같이, 허리가 휘도록 이랗고 있는 것 같은데요.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것입니까?

그건 노력이아니라 단순한 노동일 뿐이야. 내가 말하는 노력이란 그런 게 아냐. 노력이란 좀더 주체적이고 목적적으로 하는 것을 말하는 거야. - P338

하지만 최근에 이것으로 좋다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이게 우리 자신을 위한 본래의 생활이라고. 그러니 누구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한껏 기를 펴고 살면 된다고. 하지만 그건 정말 불안해써요. 몸이 이삼 센티미터 가량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에요. 이건 거짓이다, 이렇게 편한 인생이 현실에 존재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얼마 얼마 안 있어 ㅇ게 완전히 뒤집혀 엎어지는 날이 있을 것만 같아 둘이서 긴장을 풀지 못했어요. - P407

우리는 불완전한 세계에 살고 있는 불완전한 인간들이에요. 자로 깊이를 재고, 각도기로 각도를 재서 은행 예금처럼 빡빡하게 살아나갈 순 없어요. ...그런 식으로 고민하지 말아야. 내버려둬도 만사는 흘러갈 방향으로 흘러가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은 상처 입을 땐 어쩔수 없이 상처를 입게 마련이지요. 인생이란 그런 거예요. ...와타나베 군은 때때로 인생을 지나치게 자기 방식으로만 끌어들이려고 해요. 정신 병원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좀더 마음을 열고, 인생의 흐름에 자신의 몸을 맡겨 봐요. 나처럼 무력하고 불완전한 여자도 때로는 산다는 게 근사하다고 생각하고 산다구요. 정말이에요, 그건! 그러니 와타나베 군도 더욱더 행복해져야 해요. 행복해지려는 노력을 해봐요. - P434

와타나베 군은 누구도 염려하지 말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행복해지도록 해요. 경험에 의한 나의 생각이지만, 그런 기회란 인생에 두세 번 밖에 없고, 그것을 놓치면 일생을 후회하게 돼요. - P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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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10-18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오래전에 읽었는데 남자가 여러 여자와 잠을 잤다는 것만 생각나요.
그런데 이렇게 좋은 문장이 있었군요.
(즉 말이지, 가능성이 주위에 충만해 있을 때, 그것을 그냥 두고 지나간다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 그걸 알겠어?- P87)
자제력을 갖기 어렵다는 걸 멋지게 풀어서 쓴 것 같습니다.

LAYLA 2020-10-19 17:1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페크님
무라카미 소설은 밑줄긋기가 무척 적은데(작가도 밑줄긋기 당하는(?) 소설은 원하지 않는다고 하구요) 이 책은 초기작이라 그런지 그런 종류의 문장이 그래도 꽤 있더군요. 독자들에게 그게 더 쉽긴 한 거 같아요 :)
 
렉싱턴의 유령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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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에세이를 통해 하루키에 대해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면서도 소설에 관해서라면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왜 이렇게 많이 팔리는지, 왜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는지, '문운'이란 말 외에 이 현상을 설명할 방법이 있을까.라고까지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서 처음으로 하루키의 소설이 멋지고 빼어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의 수많은 책 중 이 책이 좋은 이유를 꼽자면


1. 단편이라서 산뜻하고 그 특유의 할랑한 문체가 더 잘 살아난다. 장편을 이런 문체로 진행하면 독자입장에선 지루할 때도 있고 길을 잃은 느낌이 들 때도 있는데 (이게 뭔 말이야? 이런 느낌) 단편에는 아주 잘 어울린다.


2. 이상한 성적 내용 없음. 밤에 갑자기 다 벗은 여자 나오는 꿈을 꾼다던지 하는 내용.


3. 비교적 젊은 시절(?)에 쓴 글이라 감수성이 말랑말랑하게 살아 있다. 동화 같은 단편들인데 개인적으론 100%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법 시절은 더 젊고 감수성이 부드러울 시절이지만 작가로서의 기량 역시 초보이던 시절이라. 어느 정도 글을 쓰고 난 다음 낸 이 단편집이 더 좋다고 느껴진다. 감수성과 기량이 적절한 밸런스를 이루고 있는 느낌.


4. 주제의식이 비교적 명확히 드러난다. 소설이 어떤 메시지를 너무 직구로 던진다는게 좋은 말은 아닌데 대중적인 독자를 염두에 둔다면 어느정도는 쉽게 던져줘야 하는 측면이 있고, 그런 면을 감안하면 이 책은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책이다. 


이런 이유들로 이 책을 하루키의 소설 중 처음으로 좋아하게 되었고 그냥 좋아하는게 아니라 두고두고 읽어야겠단 생각까지 했다.


지금까지 읽은 모든 하루키의 소설에 대해 큰 인상이 없고 심지어 무슨 책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단 걸 생각하면 무척 획기적인 일.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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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10-07 0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그렇단말입니까!! 저는 하루키의 소설을 읽어본 건 단 하나 [해변의 카프카]인데 뭔 얘기인지도 모르겠으면서 혐오감만 느낀 소설이라 저도 그의 명성을 운이라고, 아니면 트랜드인가 뭐 이랬는데 에세이는 너무 좋아했어요. 저도 이 책을 읽어봐야 겠어요. 레일라 님이 좋다고 한 책 안 좋은 것 없었으니까 믿읽(나도 함 만들어 봤어요. 믿고 읽는 ㅎㅎ)겠습니당. ^^

2020-10-18 0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렉싱턴의 유령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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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반년 가까이 케이시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전화가 몇 번인가 걸려와 통화는 했다. 제레미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그 과묵한 피아노 조율사는 그 후 줄곧 웨스트 버지니ㅏ 주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장편소설을 마무리 짓고 있어서, 부득이한 사정이 아닌 한 누군가를 만나거나 외출을 할 만한 여유를 갖지 못했다. 나는 그동안 하루에 열두 시간 이상씩 책상 앞에 앉아 일을 했고, 집 밖으로 나가도 1킬로미터 범위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 P33

지면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단순히 아오키를 이겨야 한다든가, 그런 생각은 아니었어요. 인생 그 자체에 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나 자신이 경멸하고 모멸하는 상대에게 간단히 짓눌려 찌부러질 수는 없다고 깨달은 거지요. - P90

얼음사나이가 창고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줄곧 혼자서 집 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했다. 원래 나는 바깥에 나돌아다니는 것보다 집 안에 있는 것을 더 좋아했고, 혼자 있는 것을 별반 싫어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나는 아직 젊었고, 그런 아무 변화 없는 일상의 반복이 점점 고통스럽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나를 괴롭힌 것은 지루함이 아니었다.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건 그 반복성이었다. 그런 반복 속에서 어쩐지 나 자신이 반복되는 그림자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 P109

나는 운다. 내 눈물이 그의 뺨에 떨어진다. 그러면 그는 잠에서 깨어나 나를 끌어안는다. 나쁜 꿈을 꿨어, 하고 나는 말한다. 그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그건 단지 꿈일 뿐이야, 하고 그는 말한다. 꿈은 과거에서 오는 거야. 미래에서 오는게 아니지. 꿈은 당신을 속박하거나 하지 않아. 당신이 꿈을 속박하고 있는 거지. 알겠어? 으응, 하고 나는 말한다. 그러나 나는 확신할 수 없다. - P114

모던재즈 시대가 가고, 프리재즈 시대가 되고, 이제 일렉트릭 재즈 시대가 되었지만, 다키타니 쇼자부로는 변함없이 옛날 그대로의 재즈를 계속 연주했다. 일류 연주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제법 이름이 알려졌기 때문에 늘 일거리는 있었다.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었고, 주위에 여자도 많았다. 불만이 있는가 없는가의 관점에서 인생을 본다면, 그것은 비교적 성공적인 인생이었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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