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당신이 죽는다면 - 괴짜 과학자들의 기상천외한 죽음 실험실
코디 캐시디 & 폴 도허티 지음, 조은영 옮김 / 시공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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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오스카상, 그래미상. 이름만 들어도 명예롭고 황홀감마저 느끼는 유명한 상이다. 반면, 이 상을 받는다면 너무나 창피해서 쥐구멍에 숨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수상자는 이 상을 받을 수가 없다.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윈상(Darwin Award)은 가장 황당한 죽음을 맞은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인류 진화의 발전을 위해 어리석은 유전자를 스스로 제거한 공을 기린다는 취지에서 진화론을 발견한 찰스 다윈의 이름을 따 만들어졌다.

 

죽음에 이르는 기상천외한 사고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그리고 당신이 죽는다면》(시공사, 2018)는 한 번 보면 농담 따먹기처럼 가벼운 책으로 오해하기 쉽다. 이 책의 공동 저자 중 한 명(폴 도허티)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유명한 과학관 수석 과학자란다. 이 책을 계속 읽어 보면 상상을 초월한 저자들의 호기심과 사고 실험, 그리고 촌철살인에 매료되고 만다.

 

 

 

 

 

백상아리의 공격을 받고도 목숨을 구할 방법은? 엘리베이터 케이블이 끊어져서 추락했을 때 살아남을 방법은? 블랙홀 한가운데에 뛰어든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춥고 긴 한파가 오는 겨울이 오면 ‘이불 밖은 위험해’를 외치며 이불 속에서 잠을 청하고 싶다. 아무것도 안 하고 계속 누워만 있으면 좋은 걸까? 비록 후대에 윤색된 전설이지만,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Empedoklcles)는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에트나 화산의 분화구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만약 화산 분화구에 몸을 던지면 어떻게 될까? 그밖에도 저자들은 끔찍하면서도 실현 불가능한 상상들을 총동원한다. 책이 갑자기 블랙홀로 변하는 상상도 한다. 아니, 무슨 마약을 먹었기에 이런 생각을 했는지‥…. 이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궁금증은 웃음 밖에 안 나온다. 세서미 스트리트(Sesame Street)쿠키몬스터처럼 쿠키를 우걱우걱 먹는다면?

 

저자들은 누구도 생각해본 적 없고, 또 대답해주지 않는 이 위험천만한 상황들이야말로 ‘제일 흥미로운 부분’이라고 말한다.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한 일이지만, 전혀 사소하지 않은 호기심을 누가 말리겠는가? 어마어마한 금액의 돈을 준다고 해도 이 책에 나오는 위험한 실험들을 체험하려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단지 호기심이 왕성해서 자신이 직접 실험대상이 된 ‘괴짜’가 있다. 마이클 스미스는 벌이 그의 고환을 쏜 황당한 사고를 경험했는데, 본인 말로는 생각했던 것만큼 아프지 않았다고 한다…‥. 바지 안에 들어가 고환을 쏘는 벌도 신기한데, 벌침을 맞고도 통증을 느끼지 않은 스미스 당신은 대체…‥. 강철 고환인가? 아무튼, 그 별난 사고 이후로 스미스의 머리에 궁금증이 스쳤다. ‘벌에 쏘였을 때 어느 신체 부위가 제일 아플까?’ 스미스는 매일 아침 벌침을 맞는 실험을 했다. 그는 벌침을 맞았을 때 느끼는 통증을 수치화하여 통증이 심한 부위를 알아냈다. 과연 벌에 쏘였을 때 제일 아픈 부위는 어디일까? 스미스의 실험 결과가 궁금하다면 책을 읽어보시길.

 

『이 책이 당신을 죽일 수 있다면?』 편은 애서가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내용이다. 저자들은 책을 ‘살인 무기’로 만드는 사고 실험을 시도한다. 놀랍게도 책도 살인무기가 될 수 있다. 대부분 애서가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2009)에 나온 살인 무기, 즉 독물이 묻은 책을 기억할 것이다. 그럴듯하지만, 이미 많이 알려진 소설 속 묘사이다. 책을 빨리 넘기면 손가락이 종이에 벨 수 있다. 실제로 종이에 베어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 다윈상 후보로 추천해도 될 만큼 황당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 글을 보고 있을 애서가 동지들이여, ‘슬로 리딩’을 생활화하자! 건강을 유지하면서 오래오래 독서를 즐기려면 종이에 손이 베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소한 상처도 다시 보자!

 

《장미의 이름》의 윌리엄 수도사진리로 사람을 웃게 하는 것이야말로 인류가 사랑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이로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정확한 실험이 이루어지는 과학이라는 진리는 누가 어떻게 소개하느냐에 따라 사람을 웃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이 죽는다면》은 연구실에 파묻혀 지내는 과학자들의 딱딱한 실험 보고서가 아닌 유쾌하고(?) 위트 넘치는 과학과 예능을 결합한 버라이어티로 읽힌다. 낄낄대며 읽다 보면 불현듯 궁금한 게 많아지리라. 단, 이 책에 나오는 실험들을 절대로 따라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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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3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05 20:4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아라비안나이트>에도 유사한 설정이 나오는 이야기가 있어요. ^^

transient-guest 2018-06-07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TV에서 ‘1000 ways to die‘란 프로가 있었는데 황당하게 죽은 사건만 모아서 재현했던 프로그램입니다. 책의 취지와는 좀 다르지만 등장사건의 희생자들 중 다윈상후보가 여럿 있을 겁니다.ㅎㅎ

cyrus 2018-06-07 11:26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방송 프로그램이 생각났어요. 우리나라 케이블 채널에 방영된 적이 있어요. ^^

페크pek0501 2018-06-10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대로 따라하지 않겠습니다. ㅋ
흥미로운 책이군요. 호기심은 많을수록 좋다고 하던데요.

cyrus 2018-06-11 07:48   좋아요 0 | URL
이 책에 나오는 내용 대부분이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호기심을 다룬 것이라서 재미있습니다. ^^
 

 

 

 

이토 준지 컬렉션 12화 첫 번째 이야기

궤담(潰談: 터지는 이야기)

 

 

 

 

 

 

오기는 남미의 정글을 여행하다가 운 좋게 그곳에 사는 원주민들을 만난다. 원주민들은 오기를 반갑게 맞이했고, 그에게 특별한 선물로 을 준다. 귀국한 오기는 자신의 친구들(스기오 일행)을 초대해 남미 원주민들에게 받은 꿀을 공개한다. 그러면서 오기는 원주민들에게 들은 ‘기이한 당부’를 친구들에게 알려준다.

 

 

 

 

 

 

 

 

 

 

 

 

 

 

 

 

* 이토 준지 《어둠의 목소리 궤담》 (시공사, 2008)

 

 

 

꿀을 먹으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아야 한다. 그러니까 이 꿀은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먹어야 하며 꿀을 먹은 사실이 ‘누군가’에게 들키면 ‘재앙’이 생긴다. 그런데 오기의 친구들은 오기의 말을 무시하고 꿀을 먹는다. 친구들은 세상에 맛본 적이 없는 꿀의 맛에 푹 빠졌고, 꿀을 더 먹으려고 한다. 꿀의 맛을 잊지 못한 친구들은 다시 오기의 집에 찾아간다. 그러나 집에 오기는 보이지 않고, 친구들은 이때다 싶어 꿀에 손가락을 찍어 먹는다.

 

 

 

 

 

친구 중 한 명이 집안을 둘러보다가 벽면에 달라붙은 정체불명의 얼룩를 발견한다. 친구들은 이 얼룩의 정체가 오기라는 것을 직감하게 되고, 찝찝한 기분을 뒤로 한 채 꿀이 든 단지를 챙기고 나온다. 오기가 없다는 사실을 안 친구들은 남은 꿀을 각자 나눠서 가져가기로 결정한다(매정한 친구들 같으니라고…‥). 그리고 각자가 가진 꿀을 또 먹는다…‥.

 

 

 

 

 

야스민이라는 이름의 친구는 꿀을 먹다가 ‘펑’하는 소리를 내면서 순식간에 터져버린다. 야스민의 몸은 오기의 집에서 발견한 납작한 형체처럼 변한다. 사실 오기도 꿀을 먹다가 터져 죽은 것이다. 끔찍한 상황에 직면하자 친구들은 멘붕에 빠지고, 이 와중에 리루코는 또다시 꿀을 먹기 시작한다. 그러자 리루코도 알 수 없는 뭔가에 의해 짓이겨져서 죽는다. 스기오는 오기가 알려준 ‘기이한 당부’를 기억해낸다. 오기, 야스민, 리루코는 꿀을 먹다가 누군가에게 들켜서 끔찍한 봉변을 당한 것이다. 꿀의 맛을 알아버린 자는 꿀의 저주에 빠지게 되고, 이 저주에 벗어나려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꿀을 먹어야 한다. 과연, 남은 생존자들은 꿀의 저주를 피하면서 꿀을 먹을 수 있을 것인가?

 

궤담(潰談)을 우리말로 해석하면 ‘터지는 이야기’라는 뜻이 된다. 궤담의 일본어발음이 괴담(怪談)의 일본어 발음과 비슷하다고 한다.

 

 

 

 

 

 

 

이토 준지 컬렉션 12화 두 번째 이야기

소문

 

 

 

 

 

 

<이토 준지 컬렉션> 마지막 이야기의 주인공은 소이치. 그는 『소이치의 제멋대로 저주』(1화 첫 번째 이야기), 『봉제 인형』(5화 두 번째 이야기)에 이어서 세 번째로 등장한 주인공이다. 소이치는 여전히 고약한 취미를 버리지 않았다. 자기보다 잘생기고 인기 많은 동급생에 질투심을 느끼면 그를 불행에 빠뜨리는 저주를 내린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저주를 내릴 만큼 비범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나 친구들은 소이치를 만만하게 본다.

 

 

 

 

 

 

 

 

 

 

 

 

 

 

 

 

 

* 이토 준지 《이토 준지 공포 박물관 6 : 소이치의 저주일기》 (시공사, 2008)

 

 

 

어느 날부터 학교에서 소이치와 관련한 소문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소이치가 착한 일을 한 사실이 미담으로 전해지고, 심지어 그가 유명한 연예인의 사촌이라는 소문까지도 퍼진다. 소문이 알려진 이후로 소이치는 인기인이 된다. 그런데 사실 이 황당한 소문들의 출처는 소이치다. ‘헛소문 제조기’ 소이치는 자신과 여학생 사키야마와 사귄다는 소문을 흘리고, 소이치의 장난을 알아차린 사키야마는 이 사실을 폭로한다. 망신살 뻗친 소이치는 부리나케 도망치고, 그 일이 있고 난 뒤 교실에 ‘기분 나쁜 모습을 한 모델’ 사진이 붙어져 있다. 사진 속 주인공은 『패션모델』(2화 첫 번째 이야기)에 나온 후치. 후치와 관련된 괴소문이 학교 전체에 퍼진다. 소문에 따르면 후치가 학생들 앞에 불쑥 나타나 자신이 예쁘냐고 묻는다고 한다. 후치의 그로테스크한 외모에 깜짝 놀란 학생들은 도망치고, 후치는 도망치는 학생들을 쫓아가 잡아먹는다.

 

『소문』은 이토 준지 작품의 인기 있는 주인공 소이치와 후치가 모두 등장하는 작품이다. 소이치가 나오는 이야기가 그렇듯 『소문』도 개그성 짙은 묘사가 나온다. 개인적으로는 <이토 준지 컬렉션> 마지막 이야기의 주인공이 토미에(9화 첫 번째 이야기 『화가』 등장인물)가 아니라서 아쉽다. 혹시 다음에 나올 2기를 위해 토미에 이야기를 작화하지 않은 것일까? 2기가 제작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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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8-06-03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름도 다가오고 이토 준지 만화 좀 봐야겠어요^^

cyrus 2018-06-03 21:50   좋아요 0 | URL
볼만한 재미있는 공포만화를 찾아봐야겠어요. ^^

서니데이 2018-06-03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토준지는 만화책으로 볼 때보다 애니메이션이 덜 무서운 것 같은데, 밤에 텔레비전으로 보면 무서울 것 같기도 하고요.^^;
오늘 많이 더웠는데, 주말 잘 보내셨나요.
cyrus님, 편안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cyrus 2018-06-03 21:52   좋아요 1 | URL
원작 만화를 보고 애니메이션을 보면 덜 무서워요. 다음 장면이 뭘 나올지 알고 있어서요. 오늘 지인이 선거 후보로 출마해서 선거 운동 도왔어요. 오늘 정말 더웠습니다. ^^;;

transient-guest 2018-06-07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토 준지는 정말 기괴한 작가죠.ㅎㅎ 그 일상의, 평범한 가운데 벌어지는 사건,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점이 정말 기괴합니다.ㅎ

cyrus 2018-06-07 11:31   좋아요 1 | URL
러프크래프트와 이토 준지 작품의 공통점은 기괴한 사건에 휘말린 인물들이 자신의 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점입니다. 결말에 이르러서야 멘붕에 빠지게 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죠.

Tempus_fugit 2018-06-10 0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토 준지의 만화중 소이치시리즈가 가장 재미있었어요 어떻게 보면 소이치가 귀엽기도 하고 ^^

cyrus 2018-06-11 07:49   좋아요 1 | URL
소이치 시리즈가 이토 준지 작품 중에 덜 무섭고 개그 요소가 많아요. ^^
 
선을 넘어 생각한다 - 남과 북을 갈라놓는 12가지 편견에 관하여
박한식.강국진 지음 / 부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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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의 변화를 이처럼 뚜렷이 국민에게 각인시킨 건 실로 오랜만이다. 4·27 남북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가 큰 폭으로 변화하고 있다. 6월 12일 북·미 정상회담 등 대형 이벤트도 줄줄이 이어진다. 보수 정부가 집권한 9년간 얼어붙었던 과거(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비롯한 ‘불확실한 미래’를 희망으로 확 바꿔버린 순조로운 분위기를 보고 있자니 국민으로선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성공의 기대는 다른 형태의 불안과 맞닿아 있다. 이 소중한 희망의 불씨를 끝까지 살려낼 수 있을까. 북한은 정말 변화한 것인가,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로 인해 ‘4·27 판문점 선언’이 휴지가 되는 건 아닐까, 남북 모두 평화통일의 자체적 역량 결집은 가능한가 등 반신반의의 자문이 그치지 않는다. 그 근저에는 정전 협정 이후 65년간 쌓인 남북 간의 불신과 안보를 정치에 악용하는 ‘안보장사꾼’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이 도사리고 있다.

 

서울신문 강국진 기자가 묻고 국제관계학 전문가 박한식 교수가 답한 대담집 《선을 넘어 생각한다》(부키, 2018)냉전적 사고의 틀 안에 만들어진 열두 가지 편견을 거론하고, 그 편견들에 대해 반박한다. 박한식 교수는 50여 차례 북한을 방문할 정도로 현장 경험이 풍부하다. 그의 대표적인 공로는 지미 카터와 빌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의 방북을 중재한 일이다.

 

우리에게 문화적으로, 언어적으로, 관습적으로 남아 있는 가장 질긴 편견이 바로 ‘북한의 악마화’ 프레임이다. 반공 만화영화 <똘이 장군>에서 김일성 주석은 사악한 돼지로 묘사되었고, 그가 죽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아버지보다 권력욕이 많은 ‘악마의 자식’, 또는 ‘독재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집권 초기부터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미사일을 쏘아 올리고 핵실험을 거듭하면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던 시절을 생각해 보라.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김정은을 ‘로켓 맨’, ‘미치광이’라고 조롱했다.

 

‘북한의 악마화’ 프레임 다음으로 오래된 편견은 ‘북한 붕괴설’이다. 북한 내부의 이상 조짐이 알려지면 국내 언론과 다수 전문가는 ‘북한은 머지않아 붕괴할 것’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북한은 주적이며 안보를 철저하게 내세우는 보수 정당은 과거 정부(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지원 정책을 물고 늘어져서 ‘북한 핵무기 개발을 위한 퍼주기’라고 비난했다. 이 세 가지 프레임은 남북 관계 개선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대표적인 편견이다. 이러한 편견이 만들어진 프레임은 북한 문제를 냉철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접근해야 할 정책결정자들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특히 북한을 너무나도 잘 모르는 일반 시민들도 이 프레임의 덫에 걸리기 쉽다.

 

박 교수는 쿠데타가 일어난다고 해도 절대로 북한은 붕괴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북한은 ‘1인 독재 체제’로 작동되는 국가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북한을 움직이게 하는 건 조선노동당이다. 조선노동당은 민족 단결과 집단주의를 강조한다. 숙청과 처벌로 권력 중심부의 인사가 교체되더라도 그 빈자리에 새로운 얼굴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최고 지도자가 죽는다고 해도 북한은 무너지지 않는다. 북한 지도부를 ‘악의 축’, ‘미치광이’, ‘주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북한과의 대화를 어렵게 만든다. 박 교수는 이러한 시각을 바탕으로 한 대북 정책을 ‘안보 접근법’이라고 말한다. 그는 군비 증강 능력을 내세워 북한을 견제하는 안보 접근법을 비판한다. 안보 접근법이 반영된 대표적인 대북 정책이 경북 성주에 배치된 사드(THAAD)다. 군사적 압박에 직면했던 북한은 미국의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핵 무력·경제 건설 병진 노선’이라는 전략적 노선을 고집했다. 남북 간의 갈등이 지속되었을 때 군비 지출이 늘어났다. 박 교수는 통계 자료를 공개하면서 ‘퍼 주기’ 프레임의 허상을 지적한다. 2011년 연평도 폭격 이후 국회는 군사력 구축을 위해 추가예산을 증액시켰는데, 대북 지원 예산의 2배가 되는 돈이다.

 

결국,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실천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남한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북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박 교수는 남과 북 모두 필요한 것은 동질성을 강조하는 통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남북 모두 서로 ‘마음의 경계’를 만들지 않으려면 이질성을 수용해야 한다. 남북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가 북한의 이질성을 수용하려면 오래된 냉전적 사고방식과 종북 프레임을 털어내야 한다.

 

북한에 대한 불신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문제는 우리 내부에 있다. TV를 켜면 북한학 교수, 기자, 정치인, 심지어 북한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정치평론가들이 나와서 북한과 남북관계에 대한 의견을 밝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한심스럽기만 하다. 여전히 ‘보수-진보 진영’ 논리로 북한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단선적인 해석과 논의는 판 전체가 달라진 현 상황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물론 지금 이 순조로운 남북 관계의 분위기를 계속 유지하려면 북한 문제에 대한 합의와 이념을 초월한 건설적 논쟁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당연히 거쳐야 한다. 다만 논쟁과 검증이 소모적으로 흘러 본말을 전도시킨 사례가 적지 않았던 우리의 경험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으로 남는다. 북한에 향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요즘, 앞으로는 ‘(북한을)모르는 것이 약이다’가 아니라 ‘모르는 것은 독’이 될 수 있다. 이제는 객관적으로 북한을 바라보면서 정확하게 얘기해야 할 시점이다. 더 많은 이들, 특히 통일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많이 알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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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us_fugit 2018-06-02 2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한은 형이하학적 가치를 중시하는데 반해 북한은 형이상학적 가치를 중시한다는 점과 저자가 말하는 ‘변증법적 통일론‘이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cyrus 2018-06-03 12:21   좋아요 1 | URL
이 책을 읽기 전에는 통일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했어요.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도 없었어요. 앞으로 한반도의 정세가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변화 분위기를 어느 정도 감지하려면 북한을 공부해야겠어요. ^^

레삭매냐 2018-06-02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십 년 동안 앵무새처럼 북한 스스로 붕괴론
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그 많은 전문가
들이 입을 닫고 있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최근 D일보에서 무속인을 동원해서 신종 참언
을 신문에 게재한 사건은 대한민국 언론사에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일이었습니다.
양식이 있는 기자들이라면 데스크와 사주에게
마땅히 항의해야 할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결어를 읽어 보니 어쩌면 남북관계는 부부관계
와도 같은 게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
습니다.

cyrus 2018-06-03 12:30   좋아요 0 | URL
전문가들은 자신의 잘못된 주장에 대해 인정하지 않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니까요. ^^;;

생각보다 북한 붕괴설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사람들은 북한이 불리한 소식을 접하면 ‘곧 북한도 망하겠구나‘하면서 ‘지금이야말로 북한을 무너뜨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합니다. 북한과의 전쟁을 참 좋아해요. 전쟁이 일어나서 미국 등과 연합한 남한이 승리한다고 해도 우리 역시 잃을 게 많아요. 북한이 쿠데타로 무너져도 후폭풍을 남한이 감당해야 합니다. 골치 아픈 일이죠. 북한이 스스로 무너지거나 북한을 공격해서 통일을 원하시던 분들이 북한 붕괴 후를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합니다. 과연 어려워진 북한 주민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까요? 먹고사니즘에 익숙한 분들이라서 또 반대할 것입니다. 남한 주민들 살기 힘든데 북한 사람들 많이 챙겨준다고 불만을 늘어놓을 거예요. 하여튼 북한 문제만 나오면 자기주장이 강하고, 남의 의견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좆문가‘에요.


레삭매냐 2018-06-03 14:51   좋아요 1 | URL
지금 정부는 몰라도 지난 9년 동안 보수정부의
무능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을 잃었습니다.

엠비시절에 연평도 포격으로 연평도 주민들이
인천으로 피난나왔을 때만 해도 정부에서 무
대책으로 일관해서, 인천 찜질방 주인장이 주
민들에게 자신의 찜질방을 무료로 제공했었습
니다.

그런데 갑자기 통일이 되어 북한 주민이 수백
만 명이 남한으로 내려 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진짜 대책없습니다.

전쟁으로 해결하자는 무지막지한 발상의 제공
자 중의 한 명은 중앙일보 논설위원인 김가짜
(패러디입니다*)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전쟁으로 3일만 버티면 이길 수 있다는 헛소리
를 해서 놀란 적이 있습니다.

강남대로에 미사일 한 방만 떨어져도 생지옥이
될 텐데, 1분에 만발이상 포격할 수 있는 장사정
가 불을 뿜으면 그 잘난 강남의 아파트숲과 빌딩
은 온전하게 무사할 수 있을까요. 무대책 무대안
으로 무장한 어느 정당의 미래를 보는 것 같은
기시감이 드네요.

짜라투스트라 2018-06-02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북한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cyrus 2018-06-03 12:31   좋아요 0 | URL
아마도 조만간에 출판사들은 북한과 트럼프 관련 책들을 만드느라 바빠질 것입니다. ^^

이하라 2018-06-03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만큼의 노력이 더해져야할지는 모르겠지만 화해와 타협의 시간이 될거라는데는 믿음이 가고 있습니다. 이런 날들이 북한에 대해 알아야겠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아요.

cyrus 2018-06-03 12:33   좋아요 0 | URL
과거에는 ‘적을 아는 마음‘으로 북한을 이해했지만, 이제는 ‘협동 파트너를 아는 마음‘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

북다이제스터 2018-06-03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미국이 북한의 세계 8위 석유 매장량과 히토류 광물 가치에 눈독들이고 있거든요. ㅎㅎ 가치가 7천조 억으로 예상된다고 하니 과거 군비산업 경제를 훨씬 뛰어넘기에 대치국면을 이젠 분명 중단할 것 같습니다. ㅎㅎ

cyrus 2018-06-03 12:35   좋아요 0 | URL
제가 걱정을 하는 이유가 제 주변에 수구 세력의 프레임에 길들어진 사람들이 많아서 그래요. 제가 사는 곳이 대구예요.. ㅎㅎㅎ 이번 달 선거 결과 소식에 당선된 자한당 소속 정치인들을 안 봤으면 좋겠어요. ^^;;

2018-06-03 0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03 12:39   좋아요 0 | URL
이번 기회에 북한도 남한에 대해 천천히 알아가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남한 사람들이 북한을 신뢰할 수 있거든요. 일제 강점기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불행한 시대였지만, 반공 이데올로기가 당연시했던 유신 시대도 불행한 시대였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불행한 시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잖아요.

transient-guest 2018-06-07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이 전문가지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들이 더 많아요. 그저 TV에 나와서 돈되는 말을 하고 정치색에 따라 떠들어대는...알아야죠.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전두환-노태우때 어린 시절을 보낸 저는 반공학습이나 방위성금 같은 걸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납니다.

cyrus 2018-06-07 11:40   좋아요 1 | URL
이 책에 전두환의 대북 정책을 ‘일부’ 칭찬한 대목이 있습니다. 저자는 아웅산 테러 사건 이후에 전두환이 북한과의 대화를 적극적으로 시도한 행보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어요. 그리고 북한에 대한 평화접근법 계보를 ‘노태우-김대중-노무현’으로 잡고 있습니다. 이 내용에 대해선 독자들마다 의견이 갈릴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전두환-노무현 정권의 대북 정책이 권력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보여주기 식’ 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5월 마지막 날. 늘 그랬지만 시간 참 빨리 지나갑니다. 2018년 상반기 마지막을 책방 ‘읽다 익다’에서 보내게 됐습니다. 일찍 퇴근하자마자 책방으로 향했습니다. 퇴근 시간대인 오후 6~7시에 발생하는 교통체증을 피하고 싶었거든요. 책방이 있는 동네에 고산도서관이 있어요. 책방 가는 날에는 반드시 고산도서관에 갑니다. 제가 사는 동네 도서관에 없는 책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고산도서관에서 5분 정도 걸어가면 책방을 찾을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도서관에 도착했어요. 읽으려고 했던 책을 골랐는데도 시간이 남았습니다. 저녁 식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더 많은 책을 만나기 위해 저는 밥 먹는 시간도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배고픕니다. 새벽 12시까지 빈속으로 버틸 수 없을 것 같아서 식사를 하기 위해 도서관 근처에 있는 신매시장에 갔습니다. 시장 안에 국밥집이 있었습니다. 돼지국밥을 먹었습니다. 돼지국밥에 술이 빠지면 안 되죠. 맥주를 마셨습니다.

 

제가 ‘고독한 대식가’라서 배가 부를 정도로 먹은 느낌이 나지 않았어요. 밥 한 공기 더 주문하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밥을 다 먹고 책방에 향했습니다. 제가 책방에 도착한 시간은 6시 20분이었어요. 책방에 저보다 일찍 오신 분들이 계실 줄 알았어요. 저를 맞이 해준 건 텅 빈 책방이었습니다. 책방지기님도 안 계셨어요. 책방지기님은 집에 있는 아이들을 돌본 뒤에 책방으로 가겠다는 메모를 남겼어요. 결국, 제가 잠시 책방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책방에 혼자 있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여태까지 ‘읽다 익다’ 책방 내부를 사진에 담은 적이 없었어요. 일마치고 이곳에 가면 7시 조금 넘어서 도착했기 때문에 사진 찍을 겨를이 없었던 거죠. 우주지감 쌤들이 오기 전에 책방 구석구석 살펴보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우주지감 독서모임 후기는 책방 사진으로 대체하겠습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힘겹게 읽었고, 이 책에 관해서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아서 후기를 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어요. 그냥 마음 편안하게 수다를 떨고 싶더라고요. ‘서재를 탐하다’, ‘읽다 익다’ 책방에 오면 마음이 편해요. 일만 아니면 오전 독서모임도 참석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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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6-02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럽다. 이런 곳을 알고 있고 있으니.
나도 어딘가 찾아보면 있을 것 같지만
가까운 곳엔 없어. 멀리 나가야있지.
프로그램이 알찬 것 같다.

근데 너의 열독은 식을 줄 모르는구나.
난 늘 마음에만 있지 점점 못 읽겠어.
나중에 늙으면 영화나 드라마만 볼까 해.ㅠ

cyrus 2018-06-02 20:23   좋아요 0 | URL
저도 요즘 힘들어요.. ㅎㅎㅎ 매주 한번 참석하는 독서모임에 활동해보니까 일정이 타이트한 느낌이 들어요.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고요. 하고 싶은 건 많은데 몸이 안 따라줘요.. ^^;;

오후즈음 2018-06-02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부럽네요. 오월을 앓아 누워 있었더니 한달이 없어진것같아 속상하네요.

cyrus 2018-06-02 20:25   좋아요 0 | URL
아파서 아무 것도 못하고 누워 있을 때 제일 속상하죠.. ㅠㅠ
아프면 집에 쉴 수 있어서 좋다고 하지만, 좋은 게 아니에요. 아프면 서러워요..
지금은 몸 상태가 회복되었어요? 건강이 중요합니다.

레삭매냐 2018-06-02 2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전에... 통풍으로 맥쥬 드시면
안된다고 하시지 않았던가요 ㅋㅋ

그런데 돼지국밥에 맥쥬를... 쏘주
아니었던가요.

이해합니다, 힘들 게 읽은 책일수록
리뷰 쓰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쓰셔야 합니다.

cyrus 2018-06-02 20:45   좋아요 1 | URL
한 달에 맥주 한 번 마셔도 괜찮을 거.. 예.. 요.. ㅎㅎㅎ
그 날 너무 기분이 좋아서 혼술했습니다. ^^

뭘 마실까 고민했어요. 막걸리, 맥주. 제가 이 두 가지 술을 엄청 좋아해요.
대구는 요즘 열대기후 모드라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싶었습니다. ㅎㅎㅎ

레삭매냐님은 달궁 때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요.
꾸준히 리뷰를 쓰시는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이 온라인 공간에서만 만난다는 게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레삭매냐님 글이나 댓글을 읽을 때나 독서모임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가끔 달궁 멤버들이 생각납니다.

재는재로 2018-06-02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임같은건 번거로워서 도서관에서 시집회같은데 관심없냐고 듣은적이있는데 모임 분위기는 어떤가요 책 고프다 주말을 잘보내시는것같네요 ㅋㅋ

cyrus 2018-06-03 12:49   좋아요 0 | URL
모임 분위기는 좋습니다. 일단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어서 좋아요. 내 생각을 글로 표현해서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경험과 생각을 직접적으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경험이 주는 느낌은 달라요.

원래 제가 집돌이인데다가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지금도 혼자 노는 것을 좋아해요. 특별한 일 아니면 도서관이나 서점은 저 혼자 갑니다. 여러 사람 모여서 서점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ㅎㅎㅎ

자주는 아니더라도 책 읽는 사람들과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건 정신 건강에 좋은 일입니다. 예전에 저도 그런 적이 있었는데요, 오랜 시간 혼자서 책 읽는 생활에 익숙해지면 상대방과의 사소한 대화조차 어려워해요. 그러니까 상대방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거죠. 대화를 못하니까 사람이 소심해지고, 내성적인 성격이 계속 유지됩니다.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게 되고, 말에서 묻어나는 상대방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눈치도 없어져요.

2018-06-03 0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03 12:50   좋아요 0 | URL
사진 책이 아니더라도 저녁 모임에 오셔도 좋습니다. ‘특별 손님‘으로 모시겠습니다. ㅎㅎㅎ
 
중세의 미학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손효주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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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는 자신의 첫 소설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2009)을 완성하기까지 10여 년의 세월을 보냈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인 중세를 생생하게 구축하기 위해 몇 달 동안 도서관에 파묻혀 지냈다. 에코는 그곳에서 방대한 분량의 중세 자료를 뒤적거렸다. 중세 수도원의 내부 구조를 정확하기 묘사하기 위해 건축 공부도 새롭게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게 바로 종이가 아깝지 않은 작가의 치열한 예술혼이다. 그런데 《장미의 이름》 원고를 읽은 편집자들은 소설의 시작부가 너무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에코에게 충고 비슷한 제안을 했다. 소설의 시작부에 해당하는 100쪽을 줄이는 게 어떻겠냐고. 에코는 그들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그는 그들에게 낯선 수도원에 일주일 동안 묵을 작정을 한다면 그 수도원 자체가 지닌 행보(行步, pace)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코가 말한 ‘행보’는 무슨 의미인가. 소설 읽기를 ‘등산’에 비유한 에코의 말을 살펴보면 행보가 무얼 뜻하는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소설로 들어간다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산을 오르자면 호흡법을 배우고, 행보를 익혀야 한다. 배울 생각이 없으면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게 낫다. (《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 64쪽)

 

 

어떠한 목적지에 다녀오기 위해 걷는 것을 행보라고 한다. 그렇다면 독자는 《장미의 이름》을 읽기 위해선 반드시 이 ‘목적지’를 다녀와야 하는데, 독자가 가야 할 ‘목적지’가 바로 《장미의 이름》의 무대인 중세 수도원이다. 수도원 내부 구조, 수도원의 규율 그리고 그곳에서 사는 수도사들이 주고받는 대화의 주제는 당대를 반영하는 하나의 문화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독자는 《장미의 이름》을 완독하려면 중세 문화 및 사상을 익혀야 한다. 사전 준비 없이 소설 읽기에 도전하면 시작부터 막히게 된다.

 

에코가 26세 때 쓴 《중세의 미학》(열린책들, 2009)중세를 향한 행보를 익히는 데 유용한 기준점과 같은 책이다. 에코는 암흑의 천막에 가려진 중세의 시대를 열어젖혀 고전 시대(고대 그리스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해낸 중세인들의 미적 감수성을 소개하고 있다. 흔히 중세는 ‘암흑시대’로 알려져 있고, 그 시대를 상징하는 수도원에 대해서는 세상과 단절된, 폐쇄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기에 십상이다. 그러나 깜깜한 시대로 대변되는 중세는 ‘근대’의 눈으로 본 것이다. 근대인이 덮어씌운 암흑의 천막을 벗긴 중세는 ‘생기 넘친 감각적 세계’였. 그동안 우리는 중세를 크게 오해하고 있었다.

 

고전 시대의 미학을 물려받은 중세인들은 비례와 조화로 어우러진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향했다. 비례는 아름다움의 수학적 증명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조각가 폴리클레이토스(Polykleitos)가 제시하고 고대 로마 시대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Vitruvius)가 확립한 비례는 균제 즉 조화라는 미적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중세 교회의 유리창을 장식하는 스테인드글라스는 가장 오묘한 빛을 내는 유리로 만들어진다. 중세 신학자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공식으로 ‘빛과 색깔’을 강조했고, 스테인드글라스는 자연의 빛을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최고 수준의 기법으로 발전했다. 성서를 해석하는 일에 몰두한 교부와 신학자들은 ‘신의 눈’으로 세계를 보았으며 그 세계 속에 숨겨진 신의 섭리를 찾으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신성한 신의 섭리를 알레고리(Allegory)란 형식으로 표현했다. 알레고리는 설명할 수 없는(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신학 지식을 신자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중세는 종교적 권위의 결별을 선언한 근대가 도래하면서 점점 균열하기 시작했다. 인문주의자들은 부패한 세속 교회를 무너뜨리고, 수도원의 지식 독점을 해체하기 위해 신학과 스콜라 철학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그들에게 신학과 스콜라 철학은 신의 권위가 막강했던 중세를 대표하는 학문이다. 신학과 스콜라 철학이 반영된 중세 미학은 한때 서구 지성사의 반열에도 끼지 못했다.

 

에코는 중세 미학을 불러들이면서 중세에 대한 복권도 시도한다. 과연 중세는 엄격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유지한 청교도적인 시대였는가에 대해 에코는 회의한다. 고전 미학은 중세 고유의 학문과 종교를 통해 여러 차례 수정되다가 미적 수준을 갖춘 중세 미학으로 발전했다. 중세인의 미적 전통은 고전 문화의 부흥을 뜻하는 르네상스로 이어졌다. 중세인들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중세 미학은 학문과 예술의 부흥을 견인하는 역할을 했다. 《중세의 미학》은 역사에서 중세와 근대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 선상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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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1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02 17:16   좋아요 0 | URL
현재에 있는 사람은 과거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잘 봐요. 지금 우리도 시간이 흘러 ‘과거’가 된다면 ‘현재’에 있는 사람(우리 시점에서는 그들은 미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죠)들은 우리의 단점을 가지고 평가할 것입니다.. ㅎㅎㅎ 문득 미래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네요.

레삭매냐 2018-06-02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중세는 근세/르네상스의 도래로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아온 게 사실입니다.

일단 중세에 대해 보다 심도 있게 살펴 보기 위해서
는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부터 읽어야 하는데...
항상 생각만 하도 실천에 옮기질 못하고 있네요.

<장미의 이름>도 이번에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
문트>를 읽다 보니 다시 한 번 읽어 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cyrus 2018-06-02 20:50   좋아요 0 | URL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중세와 관련이 있나요? 레삭매냐님이 <장미의 이름>을 읽고 싶어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네요. 우주지감 쌤들이 오전에 인문학 책 읽기 모임을 해요. 5월에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어서 완독했고요, 이번 달부터 읽게 될 책이 단테의 <신곡>입니다. 이 책도 중세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읽어야 책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