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미학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손효주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는 자신의 첫 소설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2009)을 완성하기까지 10여 년의 세월을 보냈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인 중세를 생생하게 구축하기 위해 몇 달 동안 도서관에 파묻혀 지냈다. 에코는 그곳에서 방대한 분량의 중세 자료를 뒤적거렸다. 중세 수도원의 내부 구조를 정확하기 묘사하기 위해 건축 공부도 새롭게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게 바로 종이가 아깝지 않은 작가의 치열한 예술혼이다. 그런데 《장미의 이름》 원고를 읽은 편집자들은 소설의 시작부가 너무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에코에게 충고 비슷한 제안을 했다. 소설의 시작부에 해당하는 100쪽을 줄이는 게 어떻겠냐고. 에코는 그들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그는 그들에게 낯선 수도원에 일주일 동안 묵을 작정을 한다면 그 수도원 자체가 지닌 행보(行步, pace)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코가 말한 ‘행보’는 무슨 의미인가. 소설 읽기를 ‘등산’에 비유한 에코의 말을 살펴보면 행보가 무얼 뜻하는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소설로 들어간다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산을 오르자면 호흡법을 배우고, 행보를 익혀야 한다. 배울 생각이 없으면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게 낫다. (《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 64쪽)

 

 

어떠한 목적지에 다녀오기 위해 걷는 것을 행보라고 한다. 그렇다면 독자는 《장미의 이름》을 읽기 위해선 반드시 이 ‘목적지’를 다녀와야 하는데, 독자가 가야 할 ‘목적지’가 바로 《장미의 이름》의 무대인 중세 수도원이다. 수도원 내부 구조, 수도원의 규율 그리고 그곳에서 사는 수도사들이 주고받는 대화의 주제는 당대를 반영하는 하나의 문화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독자는 《장미의 이름》을 완독하려면 중세 문화 및 사상을 익혀야 한다. 사전 준비 없이 소설 읽기에 도전하면 시작부터 막히게 된다.

 

에코가 26세 때 쓴 《중세의 미학》(열린책들, 2009)중세를 향한 행보를 익히는 데 유용한 기준점과 같은 책이다. 에코는 암흑의 천막에 가려진 중세의 시대를 열어젖혀 고전 시대(고대 그리스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해낸 중세인들의 미적 감수성을 소개하고 있다. 흔히 중세는 ‘암흑시대’로 알려져 있고, 그 시대를 상징하는 수도원에 대해서는 세상과 단절된, 폐쇄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기에 십상이다. 그러나 깜깜한 시대로 대변되는 중세는 ‘근대’의 눈으로 본 것이다. 근대인이 덮어씌운 암흑의 천막을 벗긴 중세는 ‘생기 넘친 감각적 세계’였. 그동안 우리는 중세를 크게 오해하고 있었다.

 

고전 시대의 미학을 물려받은 중세인들은 비례와 조화로 어우러진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향했다. 비례는 아름다움의 수학적 증명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조각가 폴리클레이토스(Polykleitos)가 제시하고 고대 로마 시대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Vitruvius)가 확립한 비례는 균제 즉 조화라는 미적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중세 교회의 유리창을 장식하는 스테인드글라스는 가장 오묘한 빛을 내는 유리로 만들어진다. 중세 신학자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공식으로 ‘빛과 색깔’을 강조했고, 스테인드글라스는 자연의 빛을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최고 수준의 기법으로 발전했다. 성서를 해석하는 일에 몰두한 교부와 신학자들은 ‘신의 눈’으로 세계를 보았으며 그 세계 속에 숨겨진 신의 섭리를 찾으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신성한 신의 섭리를 알레고리(Allegory)란 형식으로 표현했다. 알레고리는 설명할 수 없는(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신학 지식을 신자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중세는 종교적 권위의 결별을 선언한 근대가 도래하면서 점점 균열하기 시작했다. 인문주의자들은 부패한 세속 교회를 무너뜨리고, 수도원의 지식 독점을 해체하기 위해 신학과 스콜라 철학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그들에게 신학과 스콜라 철학은 신의 권위가 막강했던 중세를 대표하는 학문이다. 신학과 스콜라 철학이 반영된 중세 미학은 한때 서구 지성사의 반열에도 끼지 못했다.

 

에코는 중세 미학을 불러들이면서 중세에 대한 복권도 시도한다. 과연 중세는 엄격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유지한 청교도적인 시대였는가에 대해 에코는 회의한다. 고전 미학은 중세 고유의 학문과 종교를 통해 여러 차례 수정되다가 미적 수준을 갖춘 중세 미학으로 발전했다. 중세인의 미적 전통은 고전 문화의 부흥을 뜻하는 르네상스로 이어졌다. 중세인들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중세 미학은 학문과 예술의 부흥을 견인하는 역할을 했다. 《중세의 미학》은 역사에서 중세와 근대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 선상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6-01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02 17:16   좋아요 0 | URL
현재에 있는 사람은 과거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잘 봐요. 지금 우리도 시간이 흘러 ‘과거’가 된다면 ‘현재’에 있는 사람(우리 시점에서는 그들은 미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죠)들은 우리의 단점을 가지고 평가할 것입니다.. ㅎㅎㅎ 문득 미래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네요.

레삭매냐 2018-06-02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중세는 근세/르네상스의 도래로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아온 게 사실입니다.

일단 중세에 대해 보다 심도 있게 살펴 보기 위해서
는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부터 읽어야 하는데...
항상 생각만 하도 실천에 옮기질 못하고 있네요.

<장미의 이름>도 이번에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
문트>를 읽다 보니 다시 한 번 읽어 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cyrus 2018-06-02 20:50   좋아요 0 | URL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중세와 관련이 있나요? 레삭매냐님이 <장미의 이름>을 읽고 싶어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네요. 우주지감 쌤들이 오전에 인문학 책 읽기 모임을 해요. 5월에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어서 완독했고요, 이번 달부터 읽게 될 책이 단테의 <신곡>입니다. 이 책도 중세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읽어야 책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