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화를 많이 보지 않는다. 일 년 동안 봤던 영화를 세어보면 가까스로 10편을 넘긴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보다 집에서 보는 걸 더 좋아한다. 《고양이의 서재》(유유출판사, 2015)의 저자 장샤오위안은 영화 DVD를 모으는 영화광이다. 그는 자신의 영화 감상법을 ‘디스크파’라고 말한다. 디스크파의 장점은 보고 싶은 영화 장면을 되돌려 보는 것이다. 비록 나는 장샤오위안처럼 영화 DVD를 모으지 않지만, 합법적 영화 다운로드 사이트에서 영화를 내려받아 본다. 이쯤 되면 나는 ‘다운로드파’다. 한 번은 영화 서평을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적이 있었다. 3년 전에 알라딘 블로그에 영화 서평 한 편을 작성하려면 내려받은 영화의 특정 장면을 두세 번 이상 돌려 봤다. 영화를 한 번만 봤는데도 영화에 대한 감상을 제대로 정리할 수 없었다. 이런 방식이 익숙해지다 보니 집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편해졌다. 그러나 영화 서평 작성을 목적으로 영화를 보는 것은 무척 지루한 일이다. 봤던 영화 장면을 여러 번 돌려 보는 것도 귀찮다. 서평을 작성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영화는 그저 재미있게 즐기는 영상이다. 언제부터인가 영화 서평을 쓰지 않아서 이제는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페이스북의 타임라인에 흥행 영화 감상문을 종종 보곤 한다. 내가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한 글이라면 아예 눈길을 주지 않는다. 영화를 본 척하려고 감상문에 ‘좋아요’를 누르고 싶지 않다. 댓글에 짤막한 의견도 남기지 않는다. 술자리 대화를 하다가 영화 얘기가 나와도 마찬가지다. 한 번도 보지 않은 영화가 대화의 소재가 된다면 의견을 말하지 않는다. 그냥 듣기만 할 뿐이다. 괜히 아는 척하려고 대화에 끼어들다가 밑천이 드러나면 쪽팔린다. 그래서 영화를 좀 봤다는 사람의 영화평에 반박하지 않는다.

 

 

 

 

 

인터뷰 전문은 '여기'에 클릭하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다르다. 영화를 좀 본다는 강신주의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 모 남성패션잡지에 강신주의 인터뷰가 실렸다. 인터뷰어는 영화 <어벤져스>를 좋아하는 취향이 대중의 평균적인 수준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여기에 대해서 강신주는 <어벤져스>를 보는 것은 생각 없이 술집에서 여자랑 노는 것과 같고, 영화를 제대로 보는 것은 연애를 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사실 인터뷰어의 진행이 만족스럽지 않다. ‘대중의 평균적인 수준’의 의미가 이해되지 않을뿐더러 <어벤져스>를 좋아하는 개인적 감정을 전체의 감정과 동등하게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인터뷰어의 말 같지 않은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영화에 관한 입장을 피력하는 강신주의 모습도 답답하다. 강신주가 생각하는 ‘영화를 제대로 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어벤져스>의 어떤 장면이 강신주의 마음에 안 든 것일까? 말은 그럴듯하게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의미가 모호하다. <어벤져스>를 보는 것에 대한 문제점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영화를 제대로 보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고, 은근슬쩍 <어벤져스>를 좋아하는 사람의 감정을 무시한다. 혹시 ‘영화를 제대로 본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신 분이 있으면 댓글로 알려주시길.

 

그리고 ‘술집 가서 여자랑 노는 것’의 의미도 명확하지 않다. 여성 접대부가 있는 술집에서 노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 아니면 ‘여사친’(‘여자 사람 친구’의 줄임말, 연인 관계가 아닌 친구 사이로 지내는 여자)과 술집에서 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마도 강신주는 전자의 의미에 염두를 뒀을 가능성이 있다. 술집에서 노는 일은 생각 없이 시간을 허투루 쓰는 부정적 행동으로 봤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벤져스>를 보는 것도 생각 없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일과 동등한 의미가 된다. 영화 한 편을 재미있게 본 사람은 영화 관람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강신주 본인이 <어벤져스>를 안 좋게 봤더라도, <어벤져스>를 좋아하는 타인의 감정을 생각 없이 영화를 보는 수준 이하의 취향으로 말해선 안 된다. <어벤져스>를 한 번도 보지 않은 나조차도 불쾌하게 만드는 독선적인 발언이다.

 

강신주가 후자의 의미를 생각해서 말했어도 논리성이 떨어진다. 학창 시절 동창이었던 여사친과 오랜만에 술집에서 만나서 놀 수 있다. 사소한 만남을 연애와 거리가 먼 저급한 만남으로 보는 것은 자신만의 정의를 내세워 상대방을 비난하는 ‘은밀한 재정의의 오류’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연애를 하면 생각을 한다’는 말의 의미가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 ‘생각’이라는 단어를 적절히 사용하면 자신이 마치 ‘생각하는 철학자’라도 된 것처럼 여긴다. 인터뷰 전문을 보면 강신주는 생각 없이 말하는 사람 같다. 결국, 이 인터뷰는 젠체하는 바보들의 만남이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지금행복하자 2015-07-12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군요. 남자 강신주. 인간 강신주이면 좋았을건데..
어벤져스 류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런 스타일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비하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취향의 문제이니까요~~ 그것도 여자를 예를 들어서..... 굳이 왜 저런 비유를 했을까요~

cyrus 2015-07-12 21:11   좋아요 0 | URL
작년인가요? 강신주가 칼럼에 노숙자를 ‘좀비’라고 비유해서 비인격적 존재로 표현하는 바람에 물의를 빚은 적이 있었죠. 강신주는 비유하는 표현 능력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저도 문장 하나를 쓸 때 신중하게 생각해야겠습니다.

파트라슈 2015-07-13 0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벤저스 보더라도 연애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텐데요..

cyrus 2015-07-13 20:0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어벤져스> 나 <매트릭스 >같은 SF 영화도 철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으니까요.
 
반 고흐 : 고독 속에 피워낸 노란 해바라기 위대한 예술가의 생애 3
엔리카 크리스피노 지음, 정지윤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데생(소묘 혹은 드로잉)은 화가의 미적 표현이 구체화하여 나타난 최초의 조형표현이다. 이 때문에 거칠기는 하지만 생생하고 원초적인 작가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장르이다. 앵그르, 드가, 피카소 등 서양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대가들도 데생을 통해 작품의 아이디어를 수정해나갔던 것을 보아도 데생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데생은 유화의 그늘에 가려진 채 밑그림의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고흐는 100점이 넘는 유화를 남겼다. 우리는 고흐를 멋진 유화를 남긴 화가로만 기억할 뿐, 그가 1000점 이상의 데생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고흐의 그림이 컬렉션들에 주목받으면서 그의 데생 또한 값어치가 제법 상승했다. 만약에 고흐가 유명해지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데생은 홀대를 받았을 것이다.

 

 

 

 

 

고흐  「삽질하는 사람」 (1882년)

 

 

극빈했던 고흐에게 데생은 최고의 화가가 되기 위한 최후의 보루였다. 목사의 꿈을 포기하고, 무작정 전업 화가의 길로 뛰어들었던 고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목사였던 아버지와 갈등을 더욱 깊어져만 갔고, 고흐를 위한 경제적 지원도 줄어들었다. 미술도구를 살 돈이 없어서 마음껏 유화를 그릴 수 없었던 고흐는 데생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1881년에서 1885년 사이 네덜란드에 거주하는 동안 상당히 많은 데생을 남겼는데, 고흐의 작품 연보를 논할 때 이 기간을 네덜란드 시기라고 말한다.

 

 

 

 

 

고흐  「손수레 끄는 여인」 (1883년)

 

 

 

색채의 효과를 처음으로 알기 시작했던 파리로 이주하기 전이라서 네덜란드 시기의 고흐 작품들은 화려하지 않다. 1880년대 유럽은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며 활력 넘치는 도시사회로 빠르게 변화하던 반면, 시골은 마치 정지한 듯 거의 변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고흐는 가난한 농민과 광부, 직조공들의 생활상을 그렸다. 특히 인물화는 고흐가 특히 매력을 느꼈던 장르였다. 가끔 보이는 어설픈 인물처리나 묘사는 입문 초기 표현기법의 미숙함에 기인하는 것도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투박한 모습을 꾸밈없이 묘사하려는 정직함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고흐는 한때 종교에 심취했었던 시절에 성경과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을 탐독했으며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목회활동을 하는 것이 자신의 미래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비록 목사의 꿈은 접었어도 고흐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종교적 감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이 남아 있었다. 고흐는 도덕적 신념을 예술에 반영했다. 밀레를 흠모했던 고흐는 밀레의 그림을 십여 차례나 반복적으로 모사하며 그를 닮아가고 싶어 했다. 네덜란드의 고흐는 밀레처럼 소박한 그림을 그리는 농촌화가가 되고 싶었다.

 

 

 

 

 

고흐  「잡초를 태우는 농부」 (1883년)

 

 

 

반 고흐 : 고독 속에 피워낸 노란 해바라기는 고흐의 데생 작품을 비중 있게 소개한다. 사실 초창기 작품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고흐 책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대부분 고흐의 예술적 황금기라고 일컫는 아를 시기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고흐의 데생은 그의 삶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데생을 고집하는 이유를 밝혔다.

 

 

내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데생을 한다는 점을 네가 알아주기 바란다. 첫 번째 이유는 보다 정확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싶어서고, 두 번째 이유는 유화와 수채화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야.” (18927, 44쪽 인용)

 

 

고흐는 모델의 존재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사진과 같은 정확한 묘사를 싫어했다. 하지만 타고난 성정(性情)에 의해 세상을 도덕주의자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고흐는 그림의 대상을 인생이라는 상징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취급했다.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이름 없는 농촌 이웃들, 가난하게 사는 광부들의 모습을 담아놓았다. 그래서 고흐의 데생은 차분하게 감정을 드러낸 캐리커처에 가깝다.

 

반 고흐 : 고독 속에 피워낸 노란 해바라기에서 독자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내용으로 귀를 자른 고흐의 자해 사건과 자살 사건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다. 저자는 고흐가 잘린 귀를 창녀에게 주는 이유를 고흐가 소의 귀를 잘라 미녀에게 선사하는 투우사의 모습을 흉내 낸 것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다. 또 고흐의 광기 이미지를 굳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칼 야스퍼스의 주장을 반박하는 저자의 주장도 흥미롭다. 야스퍼스는 고흐가 정신분열증에 앓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 저자는 자해 소동 이후에도 비판적 분별력이 남아있었던 고흐의 정신 상태를 고려한다면 야스퍼스의 주장이 모순된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고흐가 보리밭에서 자신의 가슴에 총 겨누었던 사건의 당시 정황을 설명하면서 가셰 박사를 의심하기도 한다. 고흐와 친분이 있었던 가셰 박사가 총상을 입은 고흐에게 어떠한 조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고흐와 가셰 박사의 우정은 우리가 아는 것과 달리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고흐는 박사의 능력을 의심했고, 그 이후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소원했다. 고흐의 죽음을 둘러싸고 완벽한 자살이라는 구체적인 증거는 학계에서도 밝히지 못한 상황이다.

 

 

 

 

※ 저자는 고흐의 그림을 ‘예술 작품과의 완전한 합일과 예술의 삶의 융화로 표현되는 독특한 상징주의’(110쪽)라고 말하면서도 그다음 문장에서 고흐가 상징주의 미술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했다. 전후 문장의 의미가 상반된다. 저자는 고흐를 독특한 상징주의자로 평가하고 싶은 것 같은데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실제로 고흐는 자신이 상징주의자로 소개한 평론을 읽고 나서 평론가에게 편지를 보내어 반박했다. 

 

※ 37쪽은 고흐에게 영향을 준 헤이그파를 소개한 글이 있다. 여기서 헤이그파 화가들을 소개하는 과정에 ‘야코프 형제(1837~1899), 마테이스 마리스(1839~1917), 빌렘 마리스(1844~1910)’이라고 적혀 있다. 마리스 삼 형제 중 장남인 야코프 마리스를 ‘야코프 형제’라고 잘못 적었다.

 

※ “태양이 내 방의 노란 커텐을 스쳐 지나갈 때 이 꽃들은 금빛으로 넘치고...” (76쪽) ⇒ ‘커텐’을 ‘커튼’으로 고쳐야 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딩 2015-07-11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급 하신것 처럼 고흐에게 초기 중기 데생은 실력 향상과 유화의 비쌈을 피해갈 수 있는 안식처 같더군요. :) 그리고 농민들과 광부들의 투박하고 정감가는 모습들이 배어 있어서 좋았습니다. :)

cyrus 2015-07-12 20:16   좋아요 0 | URL
고흐가 남긴 데생 작품들도 훌륭한데 유화 작품에 대한 대중의 관심 때문인지 책에서 만나기가 쉽지 않아요.

페크pek0501 2015-07-12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 고흐에 대한 글 시리즈네요. 흥미롭게 잘 읽었어요.
한때 제가 고흐의 그림을 흉내 내고 싶어서 그의 스케치를 따라서 연필화를 그린 적이 있어요.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때이기도 했고 그림을 그릴 때의 화가의 정서를 알고 싶었던 이유도 있어요. 아직도 그 연필화를 가지고 있는데 우습답니다. 엉터리라서 말이죠.ㅋ

cyrus 2015-07-12 20:19   좋아요 0 | URL
고흐는 모델을 구하기 힘들어서 길을 지나가다 마음에 드는 장면을 발견하면 그 자리에 바로 스케치를 했다고 합니다. 페크님처럼 선배 화가들의 그림을 모사하기도 했고요. 페크님은 화가의 정서를 근접하게 이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

sslmo 2015-07-12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님의 글들이 다 좋은데 말이죠. 특히 이렇게 그림 관련, 화가얘기... 깊이와 애정이 느껴져서 더 좋아요~^^

cyrus 2015-07-12 20:20   좋아요 1 | URL
예전에는 고흐 책 한 권만 봐도 고흐를 다 아는 느낌이었는데, 관련 책을 더 찾아보게 되니까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고, 화가의 삶에 대해서 더 애정이 느껴졌어요. 고흐의 편지를 읽을 때면 가슴이 뭉클해져요.
 
100년의 기록 - 버나드 루이스의 생과 중동의 역사
버나드 루이스.분치 엘리스 처칠 지음, 서정민 옮김 / 시공사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터키인들은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생각한다. 터키는 유럽에 속하지만 터키어는 한국어와 같은 알타이어족으로 어순이 같다. 터키 군인들이 6·25전쟁 때 참전했기 때문에 터키에서는 한국을 아주 친밀한 형제의 나라로 여기고 있다. 식사 때 가장 웃어른이 먼저 수저를 드는 것, 나이 많은 사람들을 존경하는 것 또한 같다. 그런데 한국을 친밀하게 여기는 터키에서 최근 한국인 여행객들이 시위대의 공격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중국의 위구르 족 무슬림 탄압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한국인 관광객들을 중국인으로 오인하여 벌어진 일이다. 위그르 족은 중국 서북부 신장위구르 자치주에 거주하고 있다. 터키와 신장위구르 자치주는 지역상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 터키는 왜 중국에 반감을 품게 된 것일까?

 

터키는 무슬림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나라인 데다 위구르족 공동체와 언어적, 종교적 연계를 공유하고 있다. 터키 내 민족주의자들은 중국 측이 위구르족들의 라마단 준수를 금지했다는 터키 언론 보도가 나오자 항의 시위를 벌였다.  중국 측에서는 무슬림들이 이슬람교의 가치를 따르는 것보다는 ‘중국 국민’으로서 정체성을 갖춰야한다고 맞대응했다. 아직 한국인의 인명 피해는 나오지 않았지만, 주요 관광 지역 곳곳에서 시위가 잇따르면서 터키를 찾는 동양인 관광객들의 안전이 우려된다. 이슬람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터키에서 일어나는 반중 시위의 원인이 중국 소수 민족이라는 사실에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터키의 반중 시위를 그저 남의 일로 생각하게 된다.

 

이제 곧 100세를 코앞에 둔 중동학자 버나드 루이스의 자서전 《100년의 기록 : 버나드 루이스의 생과 중동의 역사》를 읽지 않았더라면 나 또한 터키의 반중 시위를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소식으로 봤을 것이다. 이 책 덕분에 조금이나마 이슬람교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었고, 위구르 족을 둘러싼 터키와 중국 간의 대립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이슬람 세계에서 종교를 민족의 정체성이나 애국심보다 더 우위에 둔다. 무슬림들에게 국가와 민족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낯선 개념이다. 이러한 무슬림들의 인식은 반중 감정을 가진 터키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슬람의 정체성을 말살하고, 아예 위구르족을 강제로 중국 국민으로 포섭하려는 중국 정부의 태도가 터키 무슬림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비무슬림(중국)이 무슬림(위구르족)을 지배하는 상황은 이슬람 율법에서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비무슬림에 대한 적대감이 터키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과격한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100년의 기록》은 학자로서의 업적과 그동안 살아온 과정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단순한 자서전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부터 현재까지 치열하게 펼쳐진 중동의 역사까지 소개한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번역된 루이스의 책은 중동의 역사를 공부하는 독자들이 많이 찾는 역사서로 알려졌다. 중동 역사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거나 루이스의 책을 읽어보지 않은 독자가 《100년의 기록》을 먼저 읽는다면 중동에 대한 루이스의 생각과 유대인 및 중동의 역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루이스는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참여한 여러 가지 중동문제들을 꼼꼼하게 설명하고 이에 대한 비평을 곁들였다. 반면 루이스의 책을 좀 읽어본 독자는 에드워드 사이드를 비판하는 대목에 흥미를 더 느낄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자신의 책 《오리엔탈리즘》을 통해서 서양의 동양학자(orientalist)들이 동양에 대한 왜곡된 편견을 조장한다고 비판했다. 학계를 뒤흔들었던 오리엔탈리즘 논쟁에 루이스도 비껴갈 수 없었다. 그러자 루이스는 《100년의 기록》에서 자신과 관련된 오명에 반박한다. 사이드를 '중동의 역사뿐만 아니라 유럽의 역사'에 대해서도 무지한 학자라고 비판한다.

 

이슬람 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거의 중동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만큼 우리 머릿속에는 '이슬람=중동'이라는 등식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이슬람 세계를 가볍게 보는 인식이 만들어 낸 고정관념일 뿐이다. 유럽에서도 이슬람 세력이 권리를 행사하고 있다. 루이스조차도 최근 무슬림 공동체가 늘어나는 유럽의 미래를 예상하기 힘들다고 말할 정도다. 이슬람화 유럽 아니면 유럽화한 이슬람 세계가 나올 수 있다. 현재 무슬림들은 이슬람의 옛 영화를 되살리려고 한다. ‘이슬람 국가(Islamic State, 이하 IS)’가 저지르는 극악무도한 살상행위 역시 '비무슬림은 적'이라는 사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미디어와 학계는 비인간적인 행동을 일삼는 과격한 무슬림들을 ‘이슬람 원리주의자’라고 부르지만, 루이스는 이 명칭이 올바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원리주의'는 원래 성서를 절대적으로 믿는 일부 개신교를 가리켰으나 1980년대부터 이슬람 부흥 현상이 일어나면서 급진적 이슬람 세력들을 '원리주의자'로 통칭하게 되었다. 이슬람 과격파와 미국 개신교 원리주의자들 사이에는 어떠한 유사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리주의’는 이슬람 과격파에만 적용되었다.

 

루이스를 미국의 중동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친미적 전문가로 보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저자는 서구의 개입이 중동의 혼란을 더 악화시켰으며 중동 문제나 중동 역사는 중동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책의 ‘들어가는 말’에 루이스는 올바른 역사가의 책무를 강조한다. 도덕적인 책임감을 느끼고 과거의 진실을 정확히 밝혀내어 파악한 그대로 설명하는 것. ‘5장 왜 역사를 공부하는가?’는 역사학도라면 꼭 읽어봐야 할 내용이다. 이 책을 읽고 중동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역사학도가 많았으면 좋겠다. 루이스의 회고를 보면서 민감한 중동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대학교마다 중동 관련 학과 및 연구소를 설립하고, 각국의 전문가를 초청하고 조언을 들으려는 정부기관의 태도가 얼마나 부럽던지. 한국인이 중동에서 피살당하면 해당 국가를 관광 금지 국가로 규정만 하고 일단락 짓는 정부의 소극적 태도와 비교된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가 된 중동을 전 세계는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한국은 겁 먹은 어린아이처럼 혼자 저 멀리 떨어져서 힐끗 쳐다보기만 한다.

 

 

 

 

※ 《100년의 기록》은 훌륭한 책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사이드를 비판하는 루이스의 입장에 판단 보류하는 차원에서 별 네 개만 줬다. 이 책이 별 네 개인지, 다섯 개인지 평가하려면 나를 포함한 독자들은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중동의 역사를 다룬 루이스의 책을 같이 참고해야 한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다이제스터 2015-07-09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터키 이슬람과 위그르족 사이에 그런 관계가 있었네요. 오늘도 감사하며 배웁니다. ^^

cyrus 2015-07-10 20:57   좋아요 0 | URL
저도 기본적인 사실만 알게 되었어요. 관련된 정보를 더 찾아보면서 공부해야 합니다. ^^

에이바 2015-07-09 2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만났던 위구르족들은 진짜 신비롭고 아름답게 생겼어요. 터키랑 중국 여권 둘 다 가지고 있더라고요. 최근 몇 년 간 자치구 독립운동으로 유혈상황이 빚어졌었죠..

cyrus 2015-07-10 20:57   좋아요 0 | URL
어제 위구르족이 궁금해서 처음으로 검색을 해봤는데 정말 예쁜 위그르족 여인 사진을 봤어요. ㅎㅎㅎ

지금행복하자 2015-07-10 0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려주지 않은 역사들이 많이 있죠~

cyrus 2015-07-10 20:58   좋아요 0 | URL
네, 알려주지 않은 역사를 발굴하고 소개하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이죠.

라스콜린 2015-07-10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야~ 좋은 책이군요~! 읽어봐야겠네요 . 리뷰 잘 읽고 갑니다 ^-^

cyrus 2015-07-10 20:5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중동에 관심이 있다면, 책을 읽을 때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을 겁니다. ^^

stella.K 2015-07-10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 읽어봐야겠네.
작년부터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선교사님들을 위한
기도 모임에 나가고 있거든. 지역별로 모이고 있는데
어찌어찌 하다보니 중동 지역 모임을 나가게 됐지.
그전까지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나가면서 관심을 갖게 되더군.
그런데 뭐 중동에 대해 아는 게 있어야 말이지.

김경집 교수는 중동이라고 부르지 말고 서아시아라고 해야 한다고
하더군. 그 이유에 대해 뭐라고 설명을 했다만 내가 기억할리는 없고
암튼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에서 그랬어.ㅋㅋ

cyrus 2015-07-10 21:00   좋아요 0 | URL
중동에 대해서 너무 모르다보니까 잘못된 정보를 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아요.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를 반쯤 정도 읽다가 말았는데 이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
 

 

 

 

※ 이미지는 황금가지 출판사 공식 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서평단 신청하기 (클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 개썅마이리딩(개썅+My reading) : 남들이 뭐라 건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책을 읽겠다. 단어의 원본은 ‘개썅마이웨이’(남들이 뭐라 건 내 갈 길을 가겠다).

 

 

 

 

교보문고와 같은 대형서점에 가면 바닥에 앉아 그 자리에서 책을 읽는 손님들을 볼 수 있다. 책값 부담이 커지면서 서점에 책을 읽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요즘은 나도 교모문고나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면 그 자리에 책 한 권을 읽는다. 물론 꼭 필요한 책은 산다. 식당에 혼자서 밥을 먹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은 있어도 서점 바닥에 앉아서 책을 읽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은 없다. 요즘은 혼자서 밥 먹는 사람이 늘어나서 ‘1인 식당’이 생겨나고 있지만, 다른 손님들의 눈치에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밥 먹는 일이 어려워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식당 내부보다 손님이 더 많이 드나드는 대형 서점 바닥에 앉아서 책 읽는 일은 여간 이상하지 않다. 다만 청결한 성격의 사람이라면 하루에 엄청나게 많은 손님의 발자국이 남은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책을 읽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겠다.

 

책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한 번쯤은 대형 서점 바닥에 앉아서 책을 읽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원에서 혼자 책을 읽어본 적은 있는가. 공원도 책 읽기에 적합한 장소다. 요즘 같은 활동하기 좋은 날씨에 그늘이 적당히 져 있고, 너무 과하지 않은 햇살이 내려오는 공원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으면 기분이 좋다. 나는 원래 사방에 책으로 둘러싼 밀폐된 서재에서 책을 읽는 것을 선호했다. 개인 서재에서 책을 읽으면 마음이 안정되고, 집중력이 높아진다. 그런데 요즘은 밖에서 혼자 책을 읽으려고 한다. 하루를 거의 독서실에서 지내다 보니 이제는 서재에서 책을 읽는 것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 서재는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이었다. 서재 안에 있는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으면 창문을 꼭 열어 둔다. 더운 날씨에 웬만하면 선풍기를 틀지 않는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책을 읽어도 충분히 더위를 잊을 수 있다. 창문 밖에는 우리 집 건물과 맞은편 건물 사이의 경계선이 되는 좁은 면적의 공터가 있다. 사람이 지나가지 않는 공터라서 조용하다. 그런데 작년부터 공터에 찾는 고양이의 수가 늘어났다. 한 마리가 아니라 두세 마리를 무리 지어 공터에 와서 일광욕한다. 고양이 우는 소리가 고요한 공터의 분위기를 흩뜨린다. 특히 밤에 고양이가 발정기 때 나는 울음소리를 들으면 마치 억울한 누명으로 원한의 통곡을 하는 노인의 울음소리가 떠올린다. 간혹 갓난아기 우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한밤중에 사람 우는 소리와 유사한 발정기 고양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신경이 곤두선다. 다행히 수면 방해를 할 정도는 아니지만, 새벽에 책을 읽기가 곤란하다. 고양이 울음소리를 안 들으려고 이어폰을 꽂은 채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을 수 있지만, 이런 독서를 하지 않는다. 고등학생 때부터 이어폰으로 음악을 많이 들어서 청각이 좋지 않은 바람에 이어폰 사용을 자제하고 있다.

 

공원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을 때도 이어폰을 사용하지 않는다. 공원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나 자동차 소리가 독서를 방해하는 소음이 되지만, 집 근처에 나는 공사장 소리나 고양이 울음소리에 비하면 참을 만하다. 햇빛과 그늘 그리고 시원한 여름 바람이 소음을 막아주는 것 같다. 공원에 가면 조용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벤치가 있다. 그래서 책 읽으러 공원에 가면 내가 찜을 해둔 벤치 한두 군데만 찾는다. 2, 3주 정도 지속해서 공원을 찾게 되니 내가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찾게 되더라. 공원에서 책 읽기의 큰 장점은 햇빛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날씨가 덥다고 무조건 선풍기, 에어컨 바람이 가득한 방 안에 있으면 건강에 좋지 않다. 특히 나처럼 몸이 냉한 사람은 체온을 따뜻하게 유지해야 한다. 적당량의 햇빛에 비타민 D가 있어서 최소 10분 이상 햇빛에 노출되면 좋다. 비타민 D는 천연 칼슘 보충제다. 비록 그 효과는 미미하지만, 운동량이 부족한 상태에서 야외 노출 횟수가 적을수록 비타민 D가 결핍되기 쉽다. 비타민 D 결핍은 비만의 원인이 된다.

 

그런데 공원에서 책 읽기를 방해하는 것도 있다. 어떻게 보면 공원에서 책 읽기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공원의 자연 상태가 좋다 보니 야산에서 볼 수 있는 벌레들을 만난다. 한 번은 주말에 여유롭게 공원 벤치에서 책을 읽다가 갑자기 책 가운데에 풍뎅이 한 마리가 날아와서 크게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너무 놀라서 읽고 있던 책을 휙 던질 뻔했다. 길바닥에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도 책에 몰입하는 데 방해한다. 벤치에 개미 한 마리가 지나가면 내 옷으로 들어갈까 봐 자꾸 시선이 개미한테로 향한다. 아직은 개미가 옷에 들어가서 피부를 무는 일은 없었다. 한 번은 책을 읽다가 목덜미에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손으로 목덜미를 만지니까 개미 한 마리가 잡혔다. 벌레에 민감한 사람에게는 공원 독서를 추천하고 싶지 않다.

 

 

공원에도 종교를 전도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혼자 다니는 사람은 매우 접근하기 쉬운 상대다. 실제로 지난 주말에 기독교를 전도하는 목사가 책 읽는 나에게 다가와서 10분 동안 하느님에 대해서 좋은 말씀을 하셨다. 나는 무교이지만, 질서 있게 전도를 진행하는 신자나 목사의 행동에 대해서 불만을 느끼지 않는다. 다만, 한 사람의 개인 시간을 방해하고, 상대방 배려도 없이 교리를 강요하는 것은 반대한다. 특히 지하철과 시장에서 시끄럽게 ‘불신 지옥 예수 천당’을 외치면서 전도하거나 10분 이상이나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하정듣(하느님의 말씀은 정해져 있고 넌 듣기만 하면 돼)’ 식 전도는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요즘은 세상이 흉흉해서 그런지 낯선 사람이 갑자기 접근하면 일단 겁부터 나기 마련이다. 내향적인 사람에게는 공원 독서를 하기가 쉽지 않다.

 

한 달 동안 공원 독서를 하면서 느낀 것은 정말 공원에서 책 읽는 사람을 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책 안 읽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시대가 될수록 공원에서 책 읽는 사람은 특이한 부류로 취급될 것이다. 작년 독서 커뮤니티 게시판에 지하철 안에서 독서를 하다가 서너 명의 중학생들에게 방해를 받은 사연의 글을 본 적이 있다. 당사자 입장에서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모욕감을 받았다. 이래서 책을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겠나. 바쁜 시간에 틈틈이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불쌍하다. 그들은 시간에 쫓기어 살았으니 개인 시간의 중요성을 알 리가 없다. 책 읽는 사람들을 무조건 시간적 여유가 넘치는 ‘시간 부자’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남아돌아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나만을 위한 시간을 만들어서 책을 읽는다. 이 불쌍한 SNS의 노예들아!

 

 

 


댓글(22)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Juni 2015-07-08 18: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끔 딸아이랑 놀이터 갈때 책을 들고 갑니다. 그런데 정말 책 읽는 사람이 없어서 제가 이상한 사람으로 느껴져요 ~~ 공원에서 책 읽는 사람을 많이 만났으면 좋겠네요

cyrus 2015-07-09 17:40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공원에서 아이와 책 읽는 부모를 저도 본 적이 없어요. 아무래도 아이들이 집에서 스마트폰만 가지고 놀게 되니까 공원에 찾는 가족을 보는 일도 드물어졌어요.

북다이제스터 2015-07-08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처에 대학 캠퍼스 있다면, 그곳도 추천 드립니다.^^ 전 애용합니다. ^^

cyrus 2015-07-09 17:42   좋아요 0 | URL
제가 다녔던 대구대 캠퍼스가 땅이 넓고 광경이 좋은 데가 있습니다. 방학이 되면 캠퍼스 전체가 조용해서 벤치에 앉아서 책 읽기에 딱 좋습니다. 사람들 신경 안 써도 되고요. 다이제스터님 말씀을 듣게 되니 학부생 때 술 먹고 놀았던 것이 후회됩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소중하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거든요.

해피북 2015-07-08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서 밥먹지 못하는 일인 추가요~~ㅋㅂㅋ,

cyrus님 벌레에 당황하셨다는 글에 큭큭 거리게됩니다 저도 벌레라면 식겁을 하지만, 공원에서 책읽는건 꼭해보고 싶어요 ^~^

cyrus 2015-07-09 17:44   좋아요 0 | URL
의외로 그늘이 있는 공원 벤치에 앉으면 시원해요. 에어컨 바람을 오래 쐴 일 없고, 전기세를 절약할 수 있어요. 진짜 벌레나 말 걸어오는 사람만 아니면 공원에서 혼자 책 읽는 것도 좋습니다.

간서치 2015-07-08 2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원에서 책 읽는 사람 없죠.. 책 읽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정말.. 걱정이에요.. 앞으로가..

cyrus 2015-07-09 17:47   좋아요 0 | URL
교실에서 고등학생이 책을 읽으면 공부 안 하고, 성적에 관심 없는 무사태평한 아이로 취급합니다. 그 얼마 안 되는 학생의 자유로운 개인 시간을 무시하는 거죠.

sslmo 2015-07-08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공원이랑 다른 의미의 공원이지만, 전 요즘 공원이라면 경기 들 일이 있어서요.전 공원에서 읽을 책을 따로 나누진 않아요.
요즘은 공원이든 어디든 혼자 앉아 있으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아서 말이죠~(,.)

cyrus 2015-07-09 17:4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식당에서 혼자 밥 먹는 사람보다 더 이상하게 봅니다. ㅎㅎㅎ 여전히 혼자 있는 사람들을 상당히 소심하고, 내향적인 사람으로 생각해요.


qualia 2015-07-08 22:1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대형 서점에 가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을 많이 봅니다. 위에서 cyrus 님도 지적하(시다가 만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셨지만, 서점 바닥에서 완전 통로를 막다시피 하고, 그런 자신의 행동을 전혀 거리낌 없다는 듯이, 오히려 애써 피해가는 사람들을 자기 독서를 방해하는 귀찮은 존재 쳐다보듯, 불쾌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은 정말 이해하기 힘듭니다. 대형 서점 바닥에 죽치고 앉아 독서하는 사람들 유형은 남자/여자 가릴 것 없이 한 70~80% 이상은 저런 행태를 보여줍니다. 과연 책 100권 읽어서 어따 쓰겠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

어떤 분들은 아예 진열대 책들 위에 가방과 소지품을 올려놓은 채, 육중한 자기 윗몸까지 신간 서적들 위에 지탱하면서, 필요한 책을 찾는 다른 손님들 불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잘난 독서 삼매경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운전대만 잡으면 ‘개’가 된다고 하는데, 그에 못지않게 한국 사람들은 서점에서 책만 잡으면 안하무인이 되나 봅니다. 과연 책 100권 읽어서 어따 쓰겠다는 건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

또 어떤 아주머니들께서는 책방으로 아이들 나들이 시켜주러 왔는지 자기 아이들이 막 여기저기 휘젖고 다니며 소란을 피워도 눈 하나 까딱 않고 책만 읽습니다(아저씨들도). 하도 정신 사나워서 누군가 아이한테 살짝 주의라도 줄라치면 오만상을 찌푸리며 뉘 집 귀한 아들딸인데 이래라저래라 하느냐 하는 표정입니다. 도대체 이런 분들 책 100권 읽어서 어따 쓰겠다는 건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

독서 삼매경에 빠지면 이성/지성이 마비되는가 봅니다~ ^^

cyrus 2015-07-09 17:53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을 막으면서까지 독서를 하면 꼴불견이에요. 지나가는 점원들이 말려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냥 듣기만 하고 무시해요. 저는 서점 벤치에 자리가 없으면 사람들이 지나가지 않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습니다. 서서 책을 읽을 때도 지나가는 사람들과 접촉하는 횟수가 적은 구역을 찾습니다. 책을 읽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서점 문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페크pek0501 2015-07-09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위의 사진 속 주인공의 배짱이 부러운 걸요.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나의 길을 가겠노라, 잖아요. ㅋ 저 같이 타인을 많이 의식하며 사는 사람은 흉내를 내지 못할 일이에요.
저는 침대에 앉아 스탠드 켜고 책 보는 편한 자세가 정해져 있어요. 등을 기대어 앉아야 편해요.
그런데 가끔 가방에 책 넣어 다닐 때가 있어요. 가방 속에 책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지요. ^^

sojung 2015-07-09 01:02   좋아요 0 | URL
중딩때 제 친구중에 아이큐가 140이 정도(?)되는 애가 있었는데.. 확실히 그런애들은 저같은 애랑은 사고방식이 많이 다르더군요..
그때 워크맨이 유행해서 귀에 이어폰 꽂고 그냥 고래고래 노래부르며 지나가는 어떤 청년을 보면서 저는 `미쳤네 미쳤어` 그러면서 혀를 찼는데..그 친구는 `왠지.. 꿋꿋해...고집이 있어..멋지지 않아?` 그러더군요..
저런걸 보는 것도..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는거 같아요..

qualia 2015-07-09 01:47   좋아요 0 | URL
저 사진은 걍 연출하고 찍은 거 아닌가요???
‘개썅마이웨이/개썅마이리딩’ 세태를 풍자하기 위한 연출극 같은데요.
몰겠습니다. 실제 상황일지도~ㅋ

암튼 cyrus 님 덕분에
‘개썅마이웨이/개썅마이리딩’
‘하정듣’ 등등 따위
세태 풍자 재치 만발 신조어 많이 알게 되네요.
책 100권을 읽어도 요런 고급진 정보는 못 얻을 듣요~ㅋ

페크pek0501 2015-07-09 11:54   좋아요 0 | URL
1.happy^-^girl 님
제가 영광스럽게도 아이큐 140인 사람과 비슷한 생각을 한 것입니까?
참고로 저는 아이큐가 높지 않아요. 낮을 거예요 아마...
그냥 제가 가지지 못한 점을 가졌다는 점에서 생각한 것이고
저에게도 저런 배짱이 있다면 세상 살기가 좀 편해지지 않을까 싶어서요.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건 따로 생각할 점이고요. 우선 그 배짱이 부러워요.
좋은 하루 되세요.^^


2. qualia 님
실제 상황이 아닐 수도 있겠군요. 저는 실제 상황인 줄 알았어요.
신조어, 저도 배웁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cyrus 2015-07-09 17:55   좋아요 0 | URL
pek님 / 사실 저 사진은 아무 곳이나 공부를 하는 모범생을 희화화한 것입니다. 역시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인 습관을 하나씩 가지고 있군요. 저도 가방에 읽을 책 한 권 없으면 허전해요.

cyrus 2015-07-09 17:57   좋아요 0 | URL
happy님 / 학창 시절에 꼭 쉬는 시간마다 크게 노래를 부르는 녀석 한 명씩 있었어요. 그렇게 노래를 잘 부르는 편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노래를 못 부르는 친구들이 이어폰을 귀에 꽂고 노래를 불렀다죠. ㅎㅎㅎ


cyrus 2015-07-09 18:01   좋아요 2 | URL
qualia님 / 저 사진이 어디서나 공부만 하는 모범생을 희화화한 것입니다. 연출한 사진일 겁니다. ‘개샹마이웨이’는 포털 사이트 게시판 댓글에 종종 볼 수 있고요, ‘하정듣’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요즘 준말로 된 신조어가 많잖아요. 인터넷에 보면 재치 넘치는 신조어가 널렸습니다. 비록 우리말 원칙에 어긋나는 것도 있지만, 진짜 이런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능력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

간서치 2015-07-09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저도 학창시절에 책 읽다가 선생님께 책으로 머리 맞았던 기억 나네요.. 학교에서 배운지식 써먹지도 않는데.. ;;

Bluessom 2015-07-11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공감합니다! 조용히 책장의 감촉을 느끼며 공원의 풀벌레 소리나 잔디에서 나오는 벌레의 발자국 소리도 듣고, 그때 부드러운 바람이 뒷목에서부터 돌아 책을 잡은 손까지 훑고 지나가면 저엉말 행복해요!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cyrus 2015-07-12 20:25   좋아요 0 | URL
Bluessom님도 공원 독서의 장점을 잘 아시는군요. 맞아요, 안 해 본 사람은 잘 몰라요. 공원 독서의 느낌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