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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기록 - 버나드 루이스의 생과 중동의 역사
버나드 루이스.분치 엘리스 처칠 지음, 서정민 옮김 / 시공사 / 2015년 6월
평점 :
터키인들은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생각한다. 터키는 유럽에 속하지만 터키어는 한국어와 같은 알타이어족으로 어순이 같다. 터키 군인들이 6·25전쟁 때 참전했기 때문에 터키에서는 한국을 아주 친밀한 형제의 나라로 여기고 있다. 식사 때 가장 웃어른이 먼저 수저를 드는 것, 나이 많은 사람들을 존경하는 것 또한 같다. 그런데 한국을 친밀하게 여기는 터키에서 최근 한국인 여행객들이 시위대의 공격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중국의 위구르 족 무슬림 탄압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한국인 관광객들을 중국인으로 오인하여 벌어진 일이다. 위그르 족은 중국 서북부 신장위구르 자치주에 거주하고 있다. 터키와 신장위구르 자치주는 지역상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 터키는 왜 중국에 반감을 품게 된 것일까?
터키는 무슬림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나라인 데다 위구르족 공동체와 언어적, 종교적 연계를 공유하고 있다. 터키 내 민족주의자들은 중국 측이 위구르족들의 라마단 준수를 금지했다는 터키 언론 보도가 나오자 항의 시위를 벌였다. 중국 측에서는 무슬림들이 이슬람교의 가치를 따르는 것보다는 ‘중국 국민’으로서 정체성을 갖춰야한다고 맞대응했다. 아직 한국인의 인명 피해는 나오지 않았지만, 주요 관광 지역 곳곳에서 시위가 잇따르면서 터키를 찾는 동양인 관광객들의 안전이 우려된다. 이슬람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터키에서 일어나는 반중 시위의 원인이 중국 소수 민족이라는 사실에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터키의 반중 시위를 그저 남의 일로 생각하게 된다.
이제 곧 100세를 코앞에 둔 중동학자 버나드 루이스의 자서전 《100년의 기록 : 버나드 루이스의 생과 중동의 역사》를 읽지 않았더라면 나 또한 터키의 반중 시위를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소식으로 봤을 것이다. 이 책 덕분에 조금이나마 이슬람교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었고, 위구르 족을 둘러싼 터키와 중국 간의 대립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이슬람 세계에서 종교를 민족의 정체성이나 애국심보다 더 우위에 둔다. 무슬림들에게 국가와 민족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낯선 개념이다. 이러한 무슬림들의 인식은 반중 감정을 가진 터키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슬람의 정체성을 말살하고, 아예 위구르족을 강제로 중국 국민으로 포섭하려는 중국 정부의 태도가 터키 무슬림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비무슬림(중국)이 무슬림(위구르족)을 지배하는 상황은 이슬람 율법에서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비무슬림에 대한 적대감이 터키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과격한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100년의 기록》은 학자로서의 업적과 그동안 살아온 과정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단순한 자서전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부터 현재까지 치열하게 펼쳐진 중동의 역사까지 소개한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번역된 루이스의 책은 중동의 역사를 공부하는 독자들이 많이 찾는 역사서로 알려졌다. 중동 역사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거나 루이스의 책을 읽어보지 않은 독자가 《100년의 기록》을 먼저 읽는다면 중동에 대한 루이스의 생각과 유대인 및 중동의 역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루이스는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참여한 여러 가지 중동문제들을 꼼꼼하게 설명하고 이에 대한 비평을 곁들였다. 반면 루이스의 책을 좀 읽어본 독자는 에드워드 사이드를 비판하는 대목에 흥미를 더 느낄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자신의 책 《오리엔탈리즘》을 통해서 서양의 동양학자(orientalist)들이 동양에 대한 왜곡된 편견을 조장한다고 비판했다. 학계를 뒤흔들었던 오리엔탈리즘 논쟁에 루이스도 비껴갈 수 없었다. 그러자 루이스는 《100년의 기록》에서 자신과 관련된 오명에 반박한다. 사이드를 '중동의 역사뿐만 아니라 유럽의 역사'에 대해서도 무지한 학자라고 비판한다.
이슬람 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거의 중동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만큼 우리 머릿속에는 '이슬람=중동'이라는 등식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이슬람 세계를 가볍게 보는 인식이 만들어 낸 고정관념일 뿐이다. 유럽에서도 이슬람 세력이 권리를 행사하고 있다. 루이스조차도 최근 무슬림 공동체가 늘어나는 유럽의 미래를 예상하기 힘들다고 말할 정도다. 이슬람화 유럽 아니면 유럽화한 이슬람 세계가 나올 수 있다. 현재 무슬림들은 이슬람의 옛 영화를 되살리려고 한다. ‘이슬람 국가(Islamic State, 이하 IS)’가 저지르는 극악무도한 살상행위 역시 '비무슬림은 적'이라는 사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미디어와 학계는 비인간적인 행동을 일삼는 과격한 무슬림들을 ‘이슬람 원리주의자’라고 부르지만, 루이스는 이 명칭이 올바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원리주의'는 원래 성서를 절대적으로 믿는 일부 개신교를 가리켰으나 1980년대부터 이슬람 부흥 현상이 일어나면서 급진적 이슬람 세력들을 '원리주의자'로 통칭하게 되었다. 이슬람 과격파와 미국 개신교 원리주의자들 사이에는 어떠한 유사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리주의’는 이슬람 과격파에만 적용되었다.
루이스를 미국의 중동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친미적 전문가로 보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저자는 서구의 개입이 중동의 혼란을 더 악화시켰으며 중동 문제나 중동 역사는 중동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책의 ‘들어가는 말’에 루이스는 올바른 역사가의 책무를 강조한다. 도덕적인 책임감을 느끼고 과거의 진실을 정확히 밝혀내어 파악한 그대로 설명하는 것. ‘5장 왜 역사를 공부하는가?’는 역사학도라면 꼭 읽어봐야 할 내용이다. 이 책을 읽고 중동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역사학도가 많았으면 좋겠다. 루이스의 회고를 보면서 민감한 중동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대학교마다 중동 관련 학과 및 연구소를 설립하고, 각국의 전문가를 초청하고 조언을 들으려는 정부기관의 태도가 얼마나 부럽던지. 한국인이 중동에서 피살당하면 해당 국가를 관광 금지 국가로 규정만 하고 일단락 짓는 정부의 소극적 태도와 비교된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가 된 중동을 전 세계는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한국은 겁 먹은 어린아이처럼 혼자 저 멀리 떨어져서 힐끗 쳐다보기만 한다.
※ 《100년의 기록》은 훌륭한 책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사이드를 비판하는 루이스의 입장에 판단 보류하는 차원에서 별 네 개만 줬다. 이 책이 별 네 개인지, 다섯 개인지 평가하려면 나를 포함한 독자들은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중동의 역사를 다룬 루이스의 책을 같이 참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