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지음, 조계원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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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91. 일본 관동 지방 남부에 대지진이 엄습했다. 사람들은 미처 불도 끄지 못한 채 거리로 뛰쳐나왔고 도시는 곧 불길에 휩싸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들리는 땅, 타오르는 화염보다 유언비어에 더 큰 공포를 느꼈다. 일본 정부는 극도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고의로 유언비어를 퍼뜨려 분노한 민심의 희생양을 만들어냈다. ‘혼란을 틈타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일본인들을 살해했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그 결과 무고한 재일 한국인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했다. 일본 정부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으로도 모자라 그것을 스스로 사실로 단정하고 군경을 동원해 직접 조선인 사냥에 나섰다. 일본인들은 죽창이나 몽둥이, 총칼 등으로 닥치는 대로 조선인들을 학살했다. 조선인들을 나는 조선인입니다라는 팻말 옆에 묶어놓기도 했다. 그들의 학살 방법은 잔인함과 광기의 극치였다.

 

 

 

 

 

 

관동 대학살은 극한의 현실에 대한 인간의 막연한 두려움과 좌절을 힘이 약한 상대에 대한 분노로 전이시켜 배설하도록 만든 전형적 정치 선동이다. 아놀드 토인비가 말했듯 역사는 반복된다. 불행히도 잘못된 역사 또한 그렇다. 일본에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이란 극우 단체가 있다. 이들은 반한(反韓) 나아가 혐한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데 거침이 없다. 한국인에 대해 혐오 발언을 쏟아낸다. ‘조선인은 기생충’ ‘바퀴벌레 구더기 조선인들등 부당하게 한국인을 모욕하는 피켓과 구호가 난무한다. 재특회의 구성원은 젊은 층으로 이뤄져 있다. 저임금의 시간제 근로자 또는 최근 갑자기 늘어난 계약직 근로자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자신들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두려움을 잊기 위해 좌절감을 분출하는 것이 이들 단체의 목적이다.

 

인간은 늘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 선택의 부재, 대안 없는 시간에 대한 두려움. 이것이 심하면 죽음의 공포와 맞먹는다. 우리는 그것을 아예 모든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든가, 아니면 자신에게 두려움을 주는 대상을 거부해야만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두려움에 유도되어 행동한다. 그럴수록 찐득한 혐오의 그림자가 우리 몸에 달라붙는다.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는 오염에 대한 두려움에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심리학에서는 이미 동성애자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과 비합리적인 혐오와 공포를 호모포비아(Homophobia)라고 명명했다. 동성애란 말만 들어도 왠지 소름이 끼치고 역겹다는 생각이 들면서 동성애자가 자신의 곁에 있는 것조차 싫어하는 감정이나 그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세균이 분열하면서 번식하는 것처럼 호모포비아 분위기가 확산하면 혐오범죄로 이어진다.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괴롭히고 때리거나 심지어 죽인다. 동성애뿐만 아니라 여성과 외국인, 특정인을 비하할 때 등장하는 냄새나 분비물에 관한 표현은 대표적인 혐오 발언 사례다.

 

 

 

이 책의 두 번째 글 <주체화, 호러, 재마법화>(임옥희 편) 27~28쪽에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핵심 내용이 잘 정리되어 소개되었다. 혐오와 수치심의 두꺼운 분량을 감당하기 어려운 독자는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27~28쪽을 읽으면 된다.

 

 

 

인터넷에 서식하는 수많은 남성이 여성이라는 단어만 보면 부모님의 원수를 만난 듯이 발광한다. 여성의 성기와 벼슬아치를 합친 보슬아치란 비하 표현을 모르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보지 달린 게 무슨 벼슬이냐라는 의미다. 한국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인 김치녀는 그나마 점잖은 수준이다. 여성을 노골적으로 폄하해 인격체가 아닌 성적 대상으로 한정시키는 단어가 적지 않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지역감정에 휘둘렸다. 특정 지역이나 출신들을 맹목적으로 비하하며 편을 가르고 감정싸움을 벌여왔다. 인터넷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역감정은 전쟁 양상이다. 호남 사람들을 홍어로 비하한다. 이런 지역적인 특성을 이용해 삭힌 홍어가 풍기는 냄새를 호남 사람들의 인격과 동일시해서 비하하는 데 쓴다. 광주 민주항쟁 당시 시민군 전사자의 시신 썩는 냄새를 진압군이 홍어 삭힌 냄새에 비유한 데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사건 희생자들을 빗댄 통구이등도 경상도를 비하하는 말로 사용된다.

 

 

 

 

 

 

혐오는 수치심을 유발한다. 부정적 수치심은 자기 파괴적 힘을 가진다. 오랫동안 혐오 발언에 시달렸던 재일 조선인들은 극우 세력의 무차별 폭력 및 혐한 시위에 소극적으로 대응한다. 현재까지도 지워지지 않은 낙인은 재일 조선인들의 활동을 제약한다. 차별과 강압의 부당성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려면 일본인들의 보복을 감당해야 한다. 재일 조선인들은 언제 또 다시 공격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무차별 폭력이나 혐한 시위에 소극적으로 대응한다. 부정적 수치심에 사로잡히면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적극적으로 개선하려는 의지가 상실된다. 반면 재특회의 혐한 시위에 반대하는 오토코구미의 행동대장 다카하시는 혐한 시위를 보고 있으면 수치스럽고 부끄럽다고 말했다. 다카하시는 한때 반한 감정을 가진 우익이었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편견을 고집하면서 재일 조선인을 차별하는 재특회의 무지함에 부끄러움을 느껴 오코토구미에 들어가게 됐다. 이처럼 혐한 시위를 반대하는 일본인들은 혐오의 감정이 사회적 약자에게만 광적으로 표출하는 잘못된 일본 사회에 수치심을 느낀다. 이는 수치심도 긍정적으로, 건설적 방향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독특한 사례다.

 

자유주의라는 이름을 내세워서 자신들 기준대로 종북타령하는 사람들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하고, 테러방지법 시행을 찬성한다. 이미 반국가활동을 규제하는 국가보안법이 있는데, 이와 유사한 테러방지법을 도입하자고? 그들은 국가보안법으로 대통령을 음해하는 종북 세력을 처벌하고, 테러방지법으로 간첩 활동을 하는 종북 세력의 군사적 행동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과거에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무고한 진보 세력을 간첩으로 만들어버린 사례가 있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실체 없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에 사람들 머릿속에 공산당은 빨갱이 괴물로 자리 잡았다. 예나 지금이나 우파 세력은 좌파 세력을 극도로 혐오해서 법적으로 통제하려 든다. 심지어 표현의 자유마저 침해한다. 일베의 혐오 발언의 심각성을 지적하면 표현의 자유운운하면서 일베를 옹호하고, 정부를 비판하는 의견을 종북으로 몰아세우는 우파의 이중성. 우파인 나도 그들 보기가 부끄럽다. 그들은 자신들이 완벽하고 이성적인 자유주의자라고 착각한다. 자신들의 단점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점을 은폐하기 위해서 '정신승리'에 가까운 변명만 늘어놓는다.  

 

일부 자유주의 학자들은 수치심을 주는 처벌이 있어야 공동체의 도덕의식이 형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누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이 하위 집단에 대한 지배 집단의 통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을 반대한다. 집단적 혐오는 파괴적이다. 역사적으로 지배 집단은 혐오라는 감정을 이용해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반대 세력을 억압했다. 관동 대학살, 나치의 유대인 학살 등 극단적인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하여 혐오 감정을 위악적으로 배설해서 생긴 비극은 생각보다 잔인하고 심각하다. 사회는 다양성과 자유의 목을 졸라 여기저기에 족쇄를 채운다. 그리고 차이차별로 키우고 모든 걸 정상비정상으로 나누어 힘의 서열을 매긴다. 부당한 차별은 사회 내의 정의와 평등에 어긋난다. 편견에서 비롯된 혐오가 전염된 사회는 자유주의를 병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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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6-09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일련 소개 글 보면
혐오, 증오에 관심 많으신 거 같습니다. ^^

cyrus 2016-06-10 13:12   좋아요 0 | URL
내용, 주제가 겹치는 책을 같이 읽고 있습니다. 진짜 독서의 목적은 이벤트 응모입니다. ㅎㅎㅎ

2016-06-09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6-10 13:14   좋아요 1 | URL
우리나라에도 비겁한 사람들이 많아요. 자신보다 약한 사람 앞에서 갑질하거나 분노를 표출합니다.

북깨비 2016-06-10 0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의로 유언비어를 퍼뜨려 분노한 민심의 희생양을 만들어내다 라는 대목을 읽으니 문득 미미여사의 외딴집이 생각납니다. 기나긴 인류 역사속에 얼마나 많은 희생양들이 있었을까요. 끔찍합니다.

cyrus 2016-06-10 13:18   좋아요 1 | URL
유언비어와 편견을 맹목적으로 믿는 대중심리가 정말 무섭습니다. 잘 알지 못하면서 무고한 사람을 마녀사냥합니다. 자신들의 믿음이 허위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언제 그랬냐는듯이 침묵합니다. 악성 루머를 만들고 퍼뜨리는 자는 따끔하게 법으로 잡아 족쳐야합니다.

페크pek0501 2016-06-10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27~28쪽을 읽으면 된다.˝
- 그래서 책을 들춰 봤어요. ㅋ

집단 망상이라는 것도 있으니 정신 바짝 차리고 살겠습니다.

cyrus 2016-06-11 11:05   좋아요 0 | URL
27~28쪽에 마사 너스바움이 정의한 혐오와 수치심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글쓴이가 700쪽 넘는 책 한 권의 주제를 간략하게 요약했습니다.

집단 망상의 힘이 위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나는 정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어. 잘못한 게 없다고’라고 착각합니다.

 

 

 

 

 

 

 

 

 

 

 

 

 

 

 

 

 

 

 

 

 

 마르시아스를 아는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르시아스(Marsyas)는 길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피리를 발견했다. 마르시아스는 피리를 주워 자신의 입에 갖다 댔다. 피리에 살짝 숨을 불어넣었는데 아름다운 피리 소리가 흘러나왔다. 감미로운 피리 연주를 들은 사람들은 마르시아스 주변에 우르르 몰려들었다. 피리 연주에 감탄한 사람들의 칭찬에 마르시아스는 기분이 좋아졌다. 주변의 칭찬에 으쓱한 그는 음악의 신과 겨루어도 지지 않으리라는 우쭐한 생각을 품었다. 사실 마르시아스가 주운 피리는 아테네 여신의 손길이 닿은 특별한 피리였다. 마르시아스는 자신의 연주 솜씨가 신령한 피리 덕인 줄도 모르고 우쭐댔다. 오만한 마르시아스는 음악의 신 아폴론과 연주 실력을 겨루고 싶어 했다. 무모하게 신에 도전하는 자는 불행하고도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다. 마르시아스와 아폴론 연주 대결의 심판을 맡은 뮤즈들은 아폴론의 손을 들어줬다. 연주 대결에 패한 마르시아스는 아폴론이 내린 형벌을 받았다. 아폴론은 마르시아스를 산 채로 나무에 묶어 살가죽을 벗겼다.

 

소설가는 자신의 글쓰기가 죽음을 불사하고 신에게 도전하는 창조정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밀레니엄을 맞아 국제화시대에 맞춘다며 새로운 필명을 만들었다. 마르시아스 심. 소설가의 필명은 신화 속 인물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는 기존의 순문학에서 좀처럼 드러내길 꺼렸던 ‘성’을 주제로 작품을 써내려갔다. 그의 도전은 성공했다.

 

 

 

 

 

하지만 소설가는 오만했다.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된 줄 착각하면서 살았다. 그는 내연녀의 얼굴에 주먹을 치면서 이렇게 외쳐댔다. “너 같이 거짓말 하는 사람은 신에게 벌을 받아야 한다. 내가 신 대신 벌을 주겠다.” 소설가는 내연녀를 폭행하고 감금을 시도한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마르시아스는 신 앞에 도전한 오만한 대가로 끔찍한 형벌을 당했다. 마르시아스 심은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벌을 받지 않았다. 그 대신 ‘소설가’라는 분신이 벗겨지는 천벌을 받았다.

 

 

마르시아스 심, 심상대를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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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6-09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마르시아스 심님이 이런분이였군용.

예명대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형벌을
받으셔도 될법한걸요 ^^

cyrus 2016-06-10 13:19   좋아요 0 | URL
징역형이 풀려나면 다시 작가 활동을 재기할 것 같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식으로요. ^^;;

2016-06-09 2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6-10 13:22   좋아요 1 | URL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출판업 종사자들은 작가들의 민낯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거만한 성격의 작가들도 있겠죠?

원더북 2016-06-09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적절하고 절묘한 글을 쓰셨습니다!

cyrus 2016-06-10 13:24   좋아요 0 | URL
심상대 작가의 소설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은 없지만, 필명이 독특해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루쉰P 2016-06-10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악이네요 ㅠ 종은 글 입니다 ㅎ

cyrus 2016-06-10 13:27   좋아요 0 | URL
더 최악인 건 이 소식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입니다. 종편 뉴스는 작가 실명을 알려주지 않은 채 이 사건을 비중있게 보도했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알았습니다.

stella.K 2016-06-10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이만하면 점잖은 줄 알았더니 소설가 망신은 혼자 다 시키는군.
그 예명이 그런 뜻이 있었군.
그런 줄도 모르고 그냥 본명 쓰지 무슨 마르시아냐 킥킥 웃었던 적이 있었다.ㅠ

cyrus 2016-06-10 17:13   좋아요 0 | URL
제가 중학생 2학년 때 마르시아스 심을 처음 알았습니다. 어떻게 알았냐면 <이윤기의 그리스로마 신화> 1권 아니면 2권을 읽었는데 마르시아스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 글에 이윤기 씨가 마르시아스 심을 언급했어요. 필명이 독특해서 지금도 잊지 않고 있었어요. 이윤기 씨가 작가의 앞날에 큰 기대감을 느꼈는데, 이렇게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네요.

페크pek0501 2016-06-10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 문학상을 수상한 유명 작가가 어찌 그럴 수가 있나요?

이럴 때 인간이란 해석 불가능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가면을 쓰고 사는 사람만 그럴까요?

cyrus 2016-06-11 11:05   좋아요 0 | URL
처음에 이 사건이 보도되었을 때 ‘중견 소설가 A씨’라고 나왔습니다. 누군지 정말 궁금했어요. 종편 뉴스도 작가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는데, 소설가 수상 이력을 소개하더군요. 이건 A씨의 정체가 궁금한 시청자들에게 떡밥을 준 거죠. ㅎㅎㅎ 인터넷 뉴스는 실명을 거론했어요.

아마도 작가는 필명의 의미에 사로잡혀서 자신도 신인 줄 알았는가봐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신의 가면`을 썼을 겁니다.
 

 

 

여성은 오랫동안 남성이 만들어 놓은 여러 허상 속에 갇혀 지내왔다. “여자는 사회적으로 열등할 수밖에 없다는 통념은 여성에게 억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여성의 사회활동을 제약하는 것은 여성의 신체구조보다 사회 제도적 문제와 사회제도를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다. 굳이 페미니즘의 논의를 빌리지 않아도, 고착화되고 이데올로기화 된 성의 정체성이 인간에게 하나의 억압이고 굴레라는 것은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상식이다.

 

 

 

 

 

 

 

 

 

 

 

 

 

 

 

 

 

 

읽고 쓸 줄 아는 남성들은 남성을 위한 이데올로기를 만든다. 남자들은 지식을 향유할 수 권리를 독점했다. 글쓰기의 역사는 남근중심주의와 함께해왔다. 여자가 독서를 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권위주의(남성 우월주의)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다. 책을 읽은 여자는 자의식을 스스로 가지게 된다. 그리고 똑똑해진다. 여자는 책을 만남으로써 남성의 울타리 밖으로 나와 자신의 것을 구축할 수 있게 된다.

    

 

 

 

 

 

 

 

 

 

 

 

 

 

 

 

    

 

동문선의 메두사의 웃음/출구에 수록된 출구는 원래 카트린 클레망 공저의 새로 태어난 여성에 있는 글이다.

    

 

 

엘렌 식수(Hélène Cixous)여성적 글쓰기를 이렇게 정의했다. “여성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야 한다.” 여성은 스스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고 역사 속에 부각시켜야 한다. 이와 동시에 자신을, 자연 발생적으로 흘러넘치는 자신의 이야기를 텍스트로 표현해야 한다. 여성적 글쓰기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곳은 프랑스다. 1968년 프랑스에서는 가부장제 담론을 해체하는 포스트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에디시옹 데 팜(Édition des Femmes)’이라는 출판사가 설립되었다. 출판사 이름을 우리말로 옮기면 여성출판사. 에디시옹 데 팜은 여성 해방 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는 출판사로 프랑스 페미니즘의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사실 1970년을 기점으로 프랑스 페미니즘은 두 개의 분파로 나뉘어 형성되었는데, 글의 주제와 벗어난 내용이라 이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소피아 포카의 포스트페미니즘을 참고하면 된다) 엘렌 식수는 에디시옹 데 팜의 설립을 환영했으나 자신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거부했다. 왜냐하면, 가부장제 규범을 거부하여 자신의 사회적 위치의 정당성을 얻으려는 페미니스트들이 여성과 남성의 차이라는 이분법적 체계에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식수가 말한 여성적 글쓰기는 남성을 적으로 간주하지도 않고, 평등권 쟁취를 위하여 투쟁해야 할 대상으로 삼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우선 여성 자신의 내적인 성찰을 통해 여성적 특성을 찾아내 종이 위에 표현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여성은 남성 중심의 엘리트주의,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허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즉 여성 고유의 정신적·신체적 영역을 부각하는 것이다. 식수는 20세기 프랑스 작가 중에 여성적 글쓰기를 실천한 작가가 많지 않다고 봤다.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마르그리트 뒤라스, 그리고 장 주네, 이 세 사람만이 여성적 글쓰기를 실천한 프랑스 작가로 언급했다.

    

 

    

 

 

 

 

 

 

 

 

 

 

 

 

 

 

철학자의 서재에 수록된 <‘알파걸은 결코 모르는 여성의 비밀>을 쓴 연효숙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남성적 글쓰기를 하지 않은 작가로 버지니아 울프, 제인 오스틴, 에밀리 브론테를 거론한다. 그런데 여기에 콜레트가 빠지면 여성적 글쓰기라는 단어를 처음 만든 식수는 불만을 표출했을 것이다. 국내 작가 또는 비평가들은 여성적 글쓰기 사례로 영미 작가들만 편중되어 소개하고 있다. 그것도 여성적 글쓰기가 프랑스에서 시작된 포스트페미니즘 운동의 한 방식이라는 사실을 쏙 뺀 채 말이다.

    

 

 

 

 

 

 

 

 

 

 

 

 

 

 

    

 

표지가 없는 책은 꼴레트-바가봉드(예전사, 1993),

'바가봉드'는 방랑하는 여인》의 원제.

    

  

 

콜레트의 방랑하는 여인은 여성적 글쓰기의 전범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설 제목인 방랑하는 여인은 주인공 르네 네레를 의미한다. 르네의 직업은 경력 3년 차인 뮤지컬 겸 연극배우다. 특히 팬터마임 공연에 능숙한 솜씨가 있다. 사실 콜레트도 팬터마임, 무언극 배우로 활동했다. 콜레트는 자신의 삶을 종이 위에 그대로 옮겼다. 르네는 그야말로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방황하는 여인이다. 그녀는 전남편과 이혼하여 자유로운 독신 생활을 누리고 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남성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 자리 잡고 있다. 르네는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막스의 청혼을 거절한다. 르네는 예전과 같은 결혼 생활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면 르네는 남편의 권위에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야 한다. 그녀는 자유로운 삶의 행복과 가정의 행복 사이에서 갈등한다.

 

집에 홀로 남아있는 르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무엇인지 고뇌한다. 이 장면이 차지하는 분량은 그리 짧지 않다. 여기서 콜레트는 여성적 글쓰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 “... 이 단어를 되뇌며 마음에도 없이 거울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거기, 검붉게 칠하고, 눈 주위에 번들번들한 푸른색 띠를 두르고 있는 것은 분명 나 자신이다. 눈가의 테가 녹기 시작한다... 얼굴 나머지 부분까지 녹아내리도록 두어 버릴까? 그러면 내 모습에는 긴 눈물자국 같은 꽁꽁 얼고 찐득찐득한 얼룩만이 남을까?” (5~6)

 

* “오늘 밤 난 이 긴 거울과 마주 대하고 그토록 열심히 피했다가 받아들이고 도망쳤다 다시 붙들리던 독백과 마주칠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보다. 아무리 기분을 돌리려 해도 쓸데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느낀다.” (12)

 

* “난 신비스럽게 반사되는 방 안의 거울 속에서 길을 잘못 든 여류작가의 모습을 본다. 사람들은 내가 연기를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결코 배우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왜지? 그건 관객들이나 내 친구들이 내가 선택한 일에 대하여 등급을 부여하기를 예의상 거절하려는 미묘한 뉘앙스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생활은 바로 내가 선택한 것이다... 길을 잘못 든 여류작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 나, 글을 쓰는 사치, 쾌락을 스스로 거부하는 나... 그런데도 모두에게 그렇게만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14~15)

 

 

 

집에서 쓸쓸히 거울을 바라보는 르네의 모습은 남성들을 위한 가장 무도회가 끝난 뒤 휴게실에서 홀로 남은 여장 배우의 쓸쓸한 상황과 비슷하다. 르네는 남자들의 분위기에 맞추면서 연기하는 삶에 점점 염증을 느낀다. 그러면서 진짜 여자를 발견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이미 자신을 향한 남성의 시선에 익숙해진 르네는 자신의 참 모습을 바라보는 일을 두려워한다. 르네는 자신의 독백을 쓸데없는 일로 치부해도 자기 자신을 글로 쓰는작가가 되고 싶다. 그렇지만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는 르네를 길을 잘못 든 여류작가로 본다. 르네가 잠시 글쓰기를 중단하고, 배우 일에 전념하게 된 이유가 여성적 글쓰기를 인정하지 않는 남성들의 따가운 시선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콜레트는 <클로딘 시리즈>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엄청난 인기를 얻었지만, 남성 비평가들은 그녀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작가였던 그녀의 전남편 앙리 고티에 빌라르는 자신의 필명으로 콜레트의 작품을 발표했다. 콜레트는 남편의 강요에 못 이겨 <클로딘 시리즈>를 연달아 써야만 했다. 빌라르의 아내였던 콜레트가 이 시절 썼던 작품들은 그녀가 원하는 진짜 글이 아니었다. 빌라르와의 이혼은 콜레트가 여성적 글쓰기를 실행하기 위한 결정적인 출구였다.

 

식수는 남성들이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여성의 자유로운 생명력이라고 말한다. 남성은 여성의 신체와 마음 모두 자신의 기준에 따라 검열했다. 오래된 억압 속에 살아간 여성은 자신 고유의 신체와 마음 심지어 언어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생명력이 상실된 여성은 목이 잘려나간 메두사다. 그녀의 눈을 보는 사람은 돌로 변한다. 남성들은 자신을 당당하게 바라보는 메두사를 두려워했다. 메두사는 원래 괴물이기 전에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그런데 남성 같은아테네 여신의 저주를 받아 흉측한 괴물로 변했다.

 

 

메두사를 보기 위해서는 정면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메두사, 그녀는 치명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아름답다. 그리고 그녀는 웃고 있다.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메두사의 웃음’ 29) 

 

 

예나 지금이나 남성은 생명력 있는 여성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런 여성을 아무 이유 없이 성격이 못난 벌레또는 괴물로 만들어서 질투하고 혐오한다. 그러므로 여성은 자기 자신을 글로 써야 한다. 반이성적으로 여성을 왜곡하고 비하하는 기이한 사회 속에서 여성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기 위해 당당하게 글을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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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7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6-08 18:33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이다. 인생을 한 권의 책으로 비유하면 풍성한 경험과 사유의 기록들을 채워가면서 사는 것이 하나뿐인 인생 잘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

:Dora 2016-06-07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콜레트♥

cyrus 2016-06-08 18:34   좋아요 0 | URL
정말 콜레트는 멋진 언냐입니다. ㅎㅎㅎ

수이 2016-06-09 2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퇴근 전인데 집에 가서 다시 읽어봐야지.
 
카운터스 - 인종 혐오에 맞서 싸우는 행동주의자의 시원한 한 방!
이일하 지음 / 21세기북스 / 2016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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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은 누굴까? 그들의 몸에 문신이 가득하다. 문신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엄연한 몸의 자유이지만, 이 사회에서 문신은 강렬한 폭력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영화를 보면 조직폭력배는 항상 문신하고 있다. 이들은 자기 과시나 결속력, 충성심의 표현으로 문신을 새긴다. 사진 속 남자들 모두 일본인이다. 큰 덩치로 봐서는 야쿠자 조직원들 같다. 이들이 문신을 보여주면서 한자리에 모인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 사진은 길거리 시위에 나선 일본인들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서양식 양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온 시위대원에 눈길이 간다. 시위 현장에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지만, 평범한 시민처럼 보인다. 사실 문신에 새긴 남자들은 야쿠자가 아니라 시위대원이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온몸 가득 문신한 네오나치 시위대를 연상한다. 두 번째 사진에 나온 푸근한 모습의 시위대원과 대조된다. 첫 번째 사진 속 남자들이 과격한 몸싸움을 벌이는 시위대로 보일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일본에서 격한 반한(反韓) 감정을 드러내면서 가두시위를 벌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을 품은 극우주의 세력이다. 대부분이 재특회(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와 관련되어 있다. 이 단체 조직원들은 웹사이트를 통해 시위 시간과 장소 등 정보를 공유하고 있고, 시위 관련 비디오 등을 사이트에 올리고 있다. 일명 넷우익이라 불리는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일본과 일본인뿐이다. 넷우익 활동을 하는 이들은 가히 조직적이며 공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인터넷에서 한국인인 척 가장하며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대해 공격적인 말을 해대는가 하면, 역사를 왜곡한다. 일본뿐 아니라 여타의 다른 나라에서도 반한 감정을 갖게 하는 것이다.

 

 

 

 

두 장의 사진 중 하나는 재특회 시위와 관련되었다. 일본의 반한 시위 풍경을 본 적이 없는 한국인들은 문신을 새긴 남자들이 재특회 회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진짜 재특회 시위대원은 두 번째 사진 속 남자다.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선 안 된다. 양복 입은 남자가 바로 재특회 설립자이자 회장으로 활동했던 사쿠라이 마코토다. 사쿠라이는 고등학교 졸업 후 아르바이트와 비정규직으로 생활하던 소심한 성격의 사람이었지만 ‘혐한류’로 장사하는 출판사와 일부 방송국으로 인해 한순간에 떠오른 ‘관심종자’다. 그는 위안부에 대해 “매춘부였던 사람들이 70년 지난 뒤에서야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며 떼를 쓰고 있다”고 망언을 했다. 강제 징용된 이들에 대해서도 “돈을 벌기 위해 지원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일본 내에서도 재특회의 과격한 행동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많지만 그들 자신은 폭력과 폭언으로 점철된 자신들의 행동에 자부심을 느낀다.

 

 

 

 

 

 

반한 극우 시위에 맞서는 반대 시위도 이어지고 있다. 첫 번째 사진 속 남자들의 정체는 혐한 시위에 반대하는 ‘오토코구미(男組)’라는 단체 소속 시위대원이다. 이들은 누구이고 왜 반대 시위에 나선 것일까. 재특회와 마찬가지로 이들도 인터넷상에서 만나 혐한반대 맞불 시위를 준비한다. 혐한 감정을 부추기는 혐오 발언을 반대하는 이들을 가리켜 ‘카운터스(counters)’라고 한다. 카운터스의 활동은 혐한 반대 시위에 그치지 않고 아베 정권의 안보법안 개정과 평화헌법 개정 시도에 맞서는 시민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15년 전 유학을 떠난 후 줄곧 일본에서 지내온 이일하 씨는 오토코구미의 활동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고, 영상에 담지 못한 기록들을 책으로 정리했다.

 

《카운터스》는 시위라는 어두운 주제만 다루지 않는다. 시위 현장 밖에 있는 오토코구미 대원들의 진솔한 모습까지 보여준다. 오토코구미의 혐한 반대 시위 선봉장에 나서는 다카하시는 전직 야쿠자 출신이다. 무력으로 시위를 저지하는 집단인 오토코구미가 특이할뿐더러, 대장인 다카하시도 범상치 않다. 나쁜 놈이 더 나쁜 놈을 잡는 상황이 이채롭다. 혐한 시위가 공권력 보호를 받고 카운터스 움직임이 오히려 경찰로부터 제지받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부터 오토코구미는 ‘조용한 운동’이었던 일본 시민운동의 역사를 바꿨다. 오토코구미는 혐한 시위 목소리가 거리를 뒤덮지 않게 하려고 확성기를 사용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또 혐한 데모 행진을 저지하고자 온몸으로 도로를 점거한다. 재특회가 먼저 오토코구미 시위대에 폭력을 가하는 부득이한 상황이 발생하면, 다카하시 같은 덩치 큰 조직원들이 나서야 한다. 이들이 있어야 조직원들을 보호하고, 재특회의 과격한 진압을 막을 수 있다. 폭력을 미화할 수 없지만, 혐오 발언을 일삼는 자들을 응징하는 오토코구미 조직원들은 정의의 카운터펀치(counterpunch)다.

 

 

 

 

재특회의 도를 넘어선 과격한 혐오 발언과 행동은 외려 자기네 주장에 근거도 확신도 없다는 점만을 부각할 뿐이다. 폭력은 거짓을 감추려는 행동일 뿐 자신들의 주장이 확실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카하시도 우익이다. 그는 극우세력의 반한 시위가 인간으로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고 지적한다. 오토코구미는 일본 사회가 보편적 이성과 인간성으로부터 일탈하려는 상황을 막고 있는 셈이다. 만약 그들이 행동으로 나서지 않았으면 일본 시민들은 반한 시위를 방조했을 것이다.

 

재특회는 민족주의도 우익도 아니다. 오토코구미는 좌익도 우익도 아니다. 서로 다른 두 단체에 속한 사람들은 평범한 보통사람들이다. 재특회는 일본의 오랜 경기 침체와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 퇴조가 초래한 산물이다. 회사 여직원이거나 호감이 가는 청년, 집 안에서는 좋은 아빠인 이들이 시위 현장에선 과격한 말을 쏟아낸다. 반면 일상화된 혐오 발언과 폭력 시위가 방치되는 최악의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시민들은 오토코구미 시위에 자발적으로 동참한다. 이들은 이념의 차이를 떠나 반한 시위의 부당함에 공감하고, 행동으로 연대한다. 평화와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오토코구미의 모습은 혐오 발언에 무감각해진 우리 사회가 본받아야 할 점이다. 흔히 사람들은 혐오 발언 및 사회적 약자 차별 문제를 ‘놔두면 해결될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도 일본처럼 간과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혐오 발언은 자유의 선을 넘은 비인간적인 표현이다. 이를 알면서도 우리는 조금쯤 옆으로 비켜선 채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며 옹졸하게 반항한다.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글쓴이 주)  결단력이 없으면 행동주의자가 되는 일이 어렵다. 이 책 마지막에 나오는 오토코구미 일원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처음 재특회가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닐 때 나섰어야 했어. 코리아타운에 오기 5년 전부터 알았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한국도 미리미리 막아야 할걸?” (231쪽)

 

 


※ 글쓴이 주 : 김수영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구절 일부를 인용했습니다.

 

※ 흑백 사진은 21세기북스 출판사 공식 홈페이지에서 가져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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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as 2016-06-07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이상한 짓을 할때 나섰어야 했다는 말이 참 와닿네요. :0

cyrus 2016-06-07 19:29   좋아요 1 | URL
일베 회원들이 세월호 유가족 단식 시위를 하고 있을 때 방해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들도 언젠가는 어버이연합처럼 단체 시위로 나설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좀 걱정됩니다. 일베 회원들의 몰상식한 행동과 혐오 발언을 심각하게 바라보기만 할뿐 확실히 대처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ㅠㅠ

2016-06-07 2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6-07 20:10   좋아요 0 | URL
아마도 정신 못 차리는 일베 회원들이 나이가 들어서 어버이연합 비슷한 단체를 만들 것 같습니다.

박람강기 2016-06-07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극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는 모습이 멋지네요..

cyrus 2016-06-08 18:37   좋아요 0 | URL
혐한 시위 반대하는 사람들이 처음에 자발적으로 모여서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조직적으로 시위를 하는 단체가 생겼습니다. 정말 대단한 시민들입니다.

transient-guest 2016-06-08 0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지막에 인용하신 부분이 맘이 닿습니다. 이곳에서는 힐러리 vs 트럼프의 구도로 갈 것 같습니다. 트럼프 같은 놈이 나오기 시작할 때 잡았어야 하는데 무능하고 무력한 공화당 지도부는 초반에 주도권을 빼앗긴 후 다시 찾지 못했지요. 지금이라도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않으면 그런 놈은 계속 나올 것 같습니다. 일베나 어버이연합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지금이라도 더 적극적이고 조직적으로 대항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cyrus 2016-06-08 18:46   좋아요 0 | URL
극우세력 시위, 일베의 혐오발언 문제 등의 심각성을 누구나 알고 있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제재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담론이 형성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심각성을 깨달으면 자발적으로 대항할 겁니다. 그러지 못하고 `시위 대 시위` 양상으로 가면 물리적 충돌만 일어날 뿐입니다.

transient-guest 2016-06-08 23:09   좋아요 1 | URL
개인적으로 일베나 어버이연합 사람들은 좀 맞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폭력 vs 폭력의 구도로 물타기 되는 건 막아야겠죠..ㅎ
 

 

 

 

 

서울경기지역 출판지부는 6월 11일부터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마다 오후 1시~7시 동안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자음과모음 규탄 시위를 하려 합니다. 여러분, 함께 해주시길 요청드립니다. 이 싸움으로 윤정기 조합원의 정상적인 업무 복귀와 원청의 직접고용이라는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유일한 목표는 아닙니다. 독자와 시민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에게 자음과모음의 탄압과 부당함에 맞서는 출판노동자와 윤정기의 싸움이 정당하다는 것을 알리고 확인하는 것 역시 우리가 이 싸움을 시작한 목적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다짐하려 합니다. 여러분, 우리 함께합시다.

 

피케팅은 6월 11일 토요일부터 매주 토, 일요일에 진행합니다. 아래에 성함과 연락 가능한 전화번호, 피케팅에 참여할 날짜를 알려주시면 스케줄 조정 후 개별 연락드리겠습니다.

 

문의: happybooknodong@gmail.com / 010-2618-9561

 

 

 

* 피케팅 참가 신청서(링크)

 

https://docs.google.com/forms/d/1KBsEEz1jzoQFij0T29ZwEq5QnEHizDNu6XT0KUWUlso/viewform?c=0&w=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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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6-08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케팅을 같이 못 해드려 죄송합니다. 저 역시 자음과 모음 책은 사지 않겠습니다. 힘 내세요! 윤정기 조합원의 복귀를 기원하겠습니다. 투쟁!

cyrus 2016-06-08 18:48   좋아요 0 | URL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대구에 거주하고 있어서 피케팅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평범한 독자들이 할 수 있는 건 출판사의 부당 행위와 부당한 대우를 받은 직원들을 기억하는 것이고, 해당 출판사의 책을 사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