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니 사이코 픽션
박혜진 엮음 / 클레이하우스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재미있게 읽고 싶다는 안달 내지는 기대가 있던 책이다.

간략하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 퍼니 앱솔루트 사이코 픽션.

평범한 세상 속에 숨겨져 있는 사이코적 면모에 대해 이 사회가 깊이 있게 이해해야만 한다는 점을 알지만
보통의 개인이 그럴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대체적으로 시절이 지난 작품들의 선별이니 그에 따른 예스러운 감성은 뭐 그렇다 치고
그게 이 시점에 어떻게 받아들여지나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 안 할 걸까 싶다.
시절이 지났다는 점은 성적 윤리 측면에서 덜컥덜컥 걸렸다.
세련되길 바랐다기보단 야만스럽지는 않았으면 싶은 마음.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 이 비틀린 인간들에 대한 묘사, 서사가 딱히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음이 사회의 어두운 면들에서 충분히 목격되고 있음도 안다.
그런 엽기적이고 어두운 범죄 사건들을 통해 지나치게 많은 비인간의 존재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문학을 즐기는 시간까지 이런 모음집을 읽는 일이 조금 과한 스트레스가 되는 듯하다.

이 책을 읽을 감정 상태가 아니었던 게 큰 패착 중 하나.
혹은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나쁜 소설들을 읽어도 충분히 즐겼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그저 세월에 지쳐 낡은 할미가 되는 과정이 아닌가 싶기도.... ㅡ.,ㅡ

어쨌든.
이런 잘못 고른 책들도 읽어야 재밌고 좋은 책이 더 좋을 테니까...라는 감상이 장점.

- '다채로운 사이코들을 한 권의 책에 모아야겠어.' 불시에 이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성진 감독이 연출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성난 사람들>을 본 직후였다. (...) 사람으로부터 상처받는 일은 흔하고 사람에게 상처 주는 일은 그보다 더 흔하다. 흔한 일들 속에서 삼십 대를 보냈다. 만남과 이별, 기대와 낙담, 불안과 강박, 상처와 트라우마. 진부한 테마인 걸 모르지 않지만 만만한 플롯은 하나도 없었다. 특히 내 경우엔 강박과 이기심이 뒤섞여 곁에 있는 사람들을 줄곧 소외시켰는데, 보이는 곳에서 상승하는 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강하고 있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나만이 아니었다. 돌아보니 주변엔 성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았다. 알고 보면 다 아팠다. 모두가 깨진 조각을 손에 쥐고 피 흘리고 있다고 느낄 때 이 '나쁜 소설'들이 떠올랐다. 다시 읽고 싶었다. 절망, 폭력, 거짓, 기만, 회피, 중독...... 통제할 수 없는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왜곡된 욕망 앞에서 나는 내가 갖고 있던 인간에 대한 기대를 거의 다 철회했더랬다. 다시 읽자 달리 보였다. 그들의 실패한 욕망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살아 있는 정의였다. 인간이란 모순, 무질서, 혼돈, 그리고 느닷없음의 동의어였다. - 프롤로그 중

- 일곱 편의 소설은 공통적으로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중반, 소위 세기말적 감수성 아래 창작된 작품들이다. 증폭된 불안과 우울이 시대 감성을 점유할 때 포착된 인간의 폐부란 그 시대의 눈에는 현실과 거리를 둔 징후적, 환상적 상징으로 읽히는 데 그쳤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 세대가 지난 오늘의 눈으로 바라볼 때 이 소설들은 더할 나위 없는 현실의 재현으로 다시, 그리고 다르게 읽힌다. 소설은 현실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현실을 예견한다. 불안과 우울이 더는 이례적 현상으로 인식되지 못하는 오늘, 과거에서 온 이 소설들은 현재에 쓰인 어떤 소설보다 더 현재적으로 인간의 심연을 증언한다. - 프롤로그 중

2026. aug.

#퍼니사이코픽션 #박혜진엮음 #클레이하우스 #송경아 #김이태
#안성호 #이평재 #채영주 #이응준 #박성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태양 아래 올리브 ㅣ Untold Originals (언톨드 오리지널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계속 질문하며 살아야 한다는 각성.
선을 긋는 일, 선을 넘는 일, 선을 지우는 일 
이 모든 것에 대한 질문이자 답을 찾는 이야기.

이레에게 닥친 위기를 오랜 인연의 솔민과 함께 풀어가는데, 반 정도에 이르기 전까지 여전히 모든 게 의문인 채로 지지부진하게 진행된다는 점이 약간의 단점이다.

후반에 '준'의 존재와 그와 관계된 인물들이 모이면서 몰입도가 올라가게 되지만.

마음을 갖게 되는 준의 존재를 보면서
영혼을 갖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 이런 외곽 지역은 공식 관측망이 멀리 떨어져 있어 측정 사각지대가 넓다는 점에서 필요성은 높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설치에 손도 많이 가고, 무엇보다 자료가 1년 치는 쌓여야 도움이 될 터였다. 이레조차 확신 없이 왔다는 점에서 이장님이 '젊은 사람들의 무책임함'을 지적한 건 사실 방향이 맞았다. 그래도 이레는 이런 일도 가끔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가능성을 믿고, 일단 해보는 일들. - 18

- 조금 허전하긴 했지만 이레는 올리브나무의 행방을 굳이 묻지 않았다. 원래 거기 없어야 할 것이니까. 이레는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편이었지만, 이 세상에는 관심이 필요한 일들이 이미 너무 많았다. 나무보다는 사람의 일들 말이다. 마음이 있고, 슬퍼하고, 도움이 필요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 20

- 이레의 합성뇌를 둘러싼 논쟁은 물질 자체보다 소위 '영혼'이라는 문제로 향해 있었다. 가톨릭계가 관심을 두는 지점도 거기였다. 한마디로 합성뇌에도 영혼이 깃들 수 있느냐는 질문.
그러니까, 영혼을 증명하는 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 106

- 목소리는 나직하게 이레를 다독였다.
이해할 수 없어도 괜찮다고.
세상은 너무 넓고 한 사람의 마음도 세상만큼 넓어서, 작은 인간의 영혼은 그 안에서조차 길을 잃는 것이 당연하다고.
지쳐서 비명조차 지를 수 없고 무언가를 물을 기력마저 바닥난 그 순간, 이레는 문득 너무나 무한해서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떠올렸다. 그 존재는 이레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레를 알았고 끝까지 사랑하겠다고 약속했다.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공허한 마음으로 어떤 갈망이 흘러들기 시작했다.
이레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세상에 무언가 환한 것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절대적으로 환하고 밝은 것이요.
그리고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의미 없는 모든 것을 견딜 수가 없어요.
그 모든 죽음이, 그 모든 사랑이, 그 모든 오해가 무의미하지 않다고 말해주는 어떤 영속적인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241

- 있잖아. 가끔은 문제가 너무 크고 압도적이어서, 거기 눌려서 숨을 못 쉴 때가 있어. 그러면 나는 작은 것부터 보려고 해. 잘게 쪼갠 조각 같은 거. 더 단순한 질문. 큰 문제를 풀려고 하지 말고, 그냥 작은 문제를 푸는 거야. 그러면 그게 어디로 가야 할지 말해 주기도 하니까...... - 261

- 당신은 이 세상에 대해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영원히 알아낼 수 없을 것들.
어쩌면 죽음은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암흑 속에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여기에 존재하게 된 것에는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에게는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영혼이 필요하다.
죽음 이후에도 이어질 영혼이.
또다시 사랑한다고 소곤거리는 목소리들. 지지직거리다 식어 버리는 말들. 붙잡아도 달아나버리는 웃음들.
어떤 지식도 당신에게 영혼이 있다고는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당신의 마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미지근한 포옹. 옅은 숨결. 쏟아지던 빗소리. 축축한 손.
전부 허구였지만 당신에게만큼은 진실했던 그 모든 순간들.
당신은 이 여정이 향해가는 곳을 알 것 같다.
불빛이 꺼지기 전, 당신은 생각한다.
유기물 덩어리 위에 일어난 단 한 번의 점화.
천천히 타오르다 마침내 사그라드는 불꽃.
이 지극한 재현 불가능성이 영혼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란 말인가? - 305

- 내가 속한 공기에 대해 생각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이 결함 많은 관점과, 그 결함을 알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작은 수조 속. 그래도 그 밖에 무언가 다른 게 있다는 걸 알고 싶었다. 나의 언어로, 나의 믿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 그럼에도 거기 있다고 신호를 발신해오는 것들.
증명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끝내 믿기로 선택하는 일에 대해 생각하며 썼다. - 작가의 말 중

2026. aug.

#태양아래올리브 #김초엽 #자이언트북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노 피플 존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늘한 현실의 모습들을 그보다 더 서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단편들.

일단 다른 루트를 통해 이미 읽은 단편이 여럿이지만, 다시 읽어도 좋았다.

실패담 크루에 등장하는 실패담 모임 구성원들은 사실 스스로의 실패를 되돌아보며 각성할 필요가 없는 종류의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일종의 여흥으로 이 모임을 이어가고 있고 그 불편한 틈새를 예민하게 느끼는 화자의 감정이 공감되었다.
실패가 기회가 되는 사람들과 실패가 그 자체로 실패로 끝나고 마는 사람들의 간극.
동화 같은 이야기라면 이들의 화합으로 마무리될 테지만, 
정이현은 끝끝내 그 모임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은 화자라고 말한다.
현실이 그러하니까.

그리고 곳곳에서 등장하는 특징적인 인물들이 있다.
타인의 감정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들.
현대 사회는 좀 무심하게 살아야 몸도 마음도 편하겠지만,
타고나길 주변의 미묘한 다름을 크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다지 외향적인 사람이 아님에도 모임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을 보면 절로 먼저 말을 걸게 되고,
표정이 조금 차분한 사람만 보여도 혹시 무언가 기분이 상한 게 아닌지 살피게 되고....
누가 그럴 필요는 없다, 그냥 편하게 있어라 충고한다 해도 그런 성향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나도 좀 그런 사람이 아닌가 늘 생각해 왔는데,
그래서 이런 인물들의 서사에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게 된다.

요즘의 경향을 보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딜레이 없이 말하는 것을 성격상의 단점으로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내 기분이 나빠, 그건 싫어라는 말보다는 타인에 대한 미안함, 걱정 같은 경우가 더 그러하다.
전자의 경우는 내 권리를 위해 말해야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내 유불리를 따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왜 저럴까는 분명 알겠는데, 그러지 않는 편이 더 좋은 퍼스널리티라는 것을 어떻게 알려줘야 하나 고민한다.
가정교육의 문제일까. 사회화의 미완이 문제일까.

불쾌하게 구는 인간들이 너무 많이 등장하다 보니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되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복잡해지는 이야기들.


- 페이스트리는 뜻밖에 정치적인 빵이다. 겹겹이 쌓인 층과 층 사이, 선처럼 얇은 틈이 숨어 있다. 한입 베어 물면 버터 향이 입안에 퍼지고, 부스러기는 겹의 바깥으로 바스스 쏟아져 내린다. 당신은 이미 어디에든 속해 있다. - 9, 실패담 크루

- 극복하고 넘어서고 미래를 기약하는 건 너무 힘들잖아요. 굳이 안 그러고 싶은 실패도 있으니까. 그냥 실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삶의 일부로 남은 실패. 그걸 이제 남 앞에서 편히 말해보자는 취지예요. 일종의 담백한 공유랄까. 재미도 있고요. - 26, 실패담 크루

- "하긴, 예뻤으면 내가 기억 못 할 리 없지."
큰오빠는 당연하다는 듯이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웃다가 뒤통수가 서늘해졌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와야 해. 그렇게 말하던 언니의 목소리가 떠올라서였다. 언니의 목소리는 기운차고 선량했다. 그런데 나는 왜 웃었을까. 왜 따라 웃고 말았을까. 언니는 더없이 친절했는데. 우리 남매에게 티끌만큼의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가 곤혹스럽게 느껴졌다. 이날의 일이 마치 흰 타일 위에 연하게 밴 카레 얼룩처럼 지워지지 않은 채 마음에 오래 남아 있다. - 55, 언니

- "나는 있잖아, 이 일이 참 재밌다. 그래서 어떻게든 꼭 잘 해내고 싶어."
낙관도 비관도 없이 스스로의 의지로 걷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 65, 언니

- 만약 아무것도 없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인간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그건 자신이 낳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과는 다르다. - 123, 빛의 한가운데

- 아들들 엄마가 언니 같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아요.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집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안희는 골똘히 그 말을 곱씹었다. 혹시 미령은 딸의 엄마이고 자신은 아들의 엄마라고 선을 긋는 것일까. 자신이 무심히 꺼낸 화제가 미령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수도 있었다. 만일 그렇다면 기분을 상하게 한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지 안희 자신은 영원히 알지 못할지도 몰랐다. 어떤 얘기를 꺼낼 때 상대에 따라 더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음은 익히 알고 있었다. - 128, 빛의 한가운데

- 차려주는 거 꼭 먹고 가. 공부는 체력이다.
혁이 고개를 까딱했다. 남편의 말에서 '차려주는'의 주체는 안희였다. 자기 손으로 차리는 게 아닌데 그는 왜 주어를 생략하는 어법을 사용하는가. 그러나 안희는 그 생각을 밖으로 표출하지도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그런 데 낭비할 에너지와 시간이 없었다. - 134, 빛의 한가운데

-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쏘아붙였다. 남편이 간혹 농담이랍시고 던지는 그런 식의 말들이 무척 부적절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 140, 빛의 한가운데

- "그냥 아이 곁에 있어주는 게 한나 샘의 일입니다."
사실 처음부터 자신의 엄마가 한나의 사진을 보고서 점찍었다고 하유가 말해주었다.
"순해 보인댔어요."
순해 보인다는 표현은 갓난아기나 동물에게 쓰는 말이 아닌가. 한나는 의아했지만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 177, 단 하나의 아이

- 한나는 오른쪽 엄지로 지그시 눌러 앱을 삭제했다. 진한 초록색의 대문자 'K'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존재하지 않아도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단 하나의 아이에 대해 한나는 끝내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 187, 단 하나의 아이

- 세상엔 보기보다 미친놈이 많아. 또 한 번 말을 끊었다. 미친놈들이 길거리의 돌멩이를 괜히 막 발로 차는 줄 알아? 아니야. 찰 만하니까 그러는 거야. 만만하니까. 만만해 보이니까. 자기 발 다칠 거 같으면 절대로 안 건드리지. 생각해 봐, 누가 널 그렇게 보는 거 너도 싫잖아?
그런데도 왜 자신의 존재를 밝히지 않았느냐는 것이 그의 확고부동한 의문이었다. 산책로 저 멀리로 천천히 걸어가는 한 사람의 뒷모습이 아스라했다. 타인의 세계는 더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 236, 가속 궤도

- 지금 재연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텅 빈 불안을 단 한 사람에게라도 설명하고 이해받고 싶었다. - 289, 이모에 관하여

- 그때 나는 멀리 가면 빨리 갈 수 있다고, 빨리 가면 멀리 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빠르게 멀리 가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이유라고.
아주 멀리 온 것 같은데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었던 기분이다. - 304, 사는 사람

- 하나의 긴 실을 상상하곤 합니다. 어떤 구간은 직선으로 어떤 구간은 구겨진 채로 또 어떤 구간은 잔뜩 엉킨 채로 존재하지요. 저는 엉킨 부분 앞에서 영원히 끙끙대거나 깔끔하게 끊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굴복하는 대신, 그 매듭 아닌 매듭을 그냥 놔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생을 이어간다는 말의 무서움을 실감하는 중입니다. - 작가의 말 중


2026. jun.

#노피플존 #정이현 #단편집 #문학동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취미는 사생활 ㅣ 은행나무 시리즈 N° 15
장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묘한 지점에서 반항적이고 반사회적인 주인공.
그런 점이 쿨함이 되는 시절인가 싶다.
일반적인 듯하지만 인식이 약간 비틀려 비일상적인 인물이라 묘한 위화감이 생기고 그 틈에서 피식 웃음이 발생한다.

정상가족, 부동산, 안정되고 안락한 삶에 대한 집착이 요즘 한국 문학의 소재라는 점을 외면할 순 없지만,
좀 지겨운 면은 있다. 나만 지겨운가? 그러나 그런 나조차도 꾸준히 읽고 있고... 뭐 그렇다.

묘한 분위기의 이야기들의 조각보 같다고 느껴졌다.

- 은협은 이가 갈렸다.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어서 화난 게 아니었다. 가정이라는 조별 과제에서 혼자서만 쏙 빠져나가려 했다는 점이 은협을 몸서리치게 했다. - 48


2026. aug.

#취미는사생활 #장진영 #은행나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상상 속의 삶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The Imagined Life - andrew porter

40년간 왕래 없던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추적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야기.

아버지의 정신적 문제로 가정이 파탄 났던 걸까? 하는 확신에 가까운 의문을 가진 중년의 아들은
자신이 뭘 하려는지 잘 모르겠다면서도 천천히 아버지의 자취를 찾아간다.
이러한 추적의 원동력은 아마도 자신의 예민함과 부부 사이의 불화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아보려던 것에 기인할 수 있다.

결국 아버지는 떠났지만 그의 모든 배경과 지식의 정수를 자양분 삼아 자라난 아들의 뒤늦은 자아 찾기 랄 수 있겠다.
아버지라는 인물의 비대한 자아와 유약함이 주인공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준 지점이 안타까울 뿐.
"누구나 높이 나는 건 아니다."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스티븐의 변명, 자기변호는 결국
진실을 알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 자신이 현재의 자신과 가족을 망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죄책감, 아버지에 대한 완결되지 못한 용서와 그보다 더 크게 자리 잡은 분노 때문이었음을 보여주는데,

대단치 않은 삶으로 귀결된 모든 결론에 대한 원망도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애정하고 있다는 마음을 인정하면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

복잡한 심리이고, 딱히 공감이 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나를 치유하는 느낌을 받는다.


+ 또 한 번의 읽어야 함 플래그가 떴는데. 그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평생에 걸쳐 여러 번 다시 읽을 수 있고 각기 다른 나이에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언급.(p. 77) 과연 읽게 될까..

+ FleetwoodMac - Rumours 아티스트와 음악을 알게 되어 좋았다.


- 어머니는 아버지를 공감과 연민이 뒤섞인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 순간 어머니가 느꼈을 감정을 굳이 짐작하자면, 그건 아마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확신할 수는 없으며 어쨌거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그날 밤 아버지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눈빛, 마침내 우리를 발견하고 이쪽을 돌아보던 아버지, 마당 가장자리의 그늘에 서서 우리에게 손을 흔들던 아버지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는 남자처럼, 우리에게 절대로 상처 주지 않을 남자처럼 온화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 40

- 나는 늘 아버지나 줄리언이나 앨리슨 같은 사람들을 선망했다. 나 자신은 그런 걸 가져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 목적 의식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대신 나는 언제나 벙커에 숨어 파편을 피하거나 허깨비 같은 기억과 꿈을 좇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인생의 절반 정도는 내가 실재한다는 느낌도 없이 살아왔다. 마치 속이 텅 빈 채 내버려진 것처럼. 마치 다른 사람 인생의 찌꺼기가 된 것처럼. - 135

- 우리는 함께 웃음을 터뜨렸고, 어머니가 나를 한 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뭐, 말했듯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있진 않을 거야." 그리고 그건 어쩌면 어머니가 자신에게도 해왔던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렇게 선을 그어 그의 존재를 감당했을 것이다. 그가 영원히 곁에 있진 않을 거라고. "있잖아, 어떤 사람은 우리 삶에 잠시 들어왔다가," 어머니는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고, 물 위에 햇빛이 반짝였다. "그냥 그렇게-" 어머니는 머리 위로 손을 거칠게 내저었다. "그냥 그렇게, 사라지는 거야." - 146

- 아버지는 고개를 내저으며 잘생긴 얼굴을 연신 찡그리거나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에는 그즈음 거의 볼 수 없었던 희망과 낙관이 있었다. 이후 그것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겠지만 그날 밤 우리가 소파에 함께 앉아 있는 동안에는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그때 이유 없이 느껴지던 외로움도 기억한다. 마치 무언가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이 사라지기 직전에 감지하듯이,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그것이 사라지기 훨씬 전부터 그리워하기 시작하듯이. - 237

- 이십대와 삼십대 시절 내내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에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 내게 아이가 생겨서일 수도 있고, 세월이 흘러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 모두 타고난 결함이 있기에 이기심이나 그른 결정, 잘못된 판단과 같은 함정에 빠지기 쉽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어서일 수도 있다. - 292

- "문제는," 차우가 얼마 뒤에 말했다. "그런 일이 우리 중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다는 거야. 또는 우리가 아는 누구에게든. 우리가 아는 누군가가 갑자기 존재하지 않게 될 수 있어. 사라져버릴 수 있다고." - 329

- 우리 마음속에서 사람들은 즉시 죽지 않고 어떤 삶의 기운에 잠긴 채 남아 있는데, 그것은 진정한 불멸과는 관련이 없지만 이를 통해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계속해서 우리의 생각 속에 머문다. 마치 그들이 해외여행을 떠난 것처럼. - 337

- 엘리슨은 차분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음, 사실 이건 당신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스티븐."
"무슨 말이야?"
"당신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앨리슨이 말했다. "이건 당신 문제가 아니야." 그녀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모든 건 사실 당신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야." - 348

- 상상 속의 삶에서는 모든 것이 다르다. - 421

- 진정한 낙원은 우리가 잃어버린 낙원이다. - 423

- 그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누구나 높이 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선지 그들은 이 문구가 굉장히 우습다고, 너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 말 뒤에 살짝 감춰진 모욕 때문에, 혹은 미묘한 가혹함 때문에 그랬겠지만 확실히는 모르겠다. - 430

- 다시 해변을 내려다보니 앨리슨과 핀이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도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나서 한동안 그대로 앉아 바라보았다. 이제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이 금빛으로 빛났고 세상은 돌연 고요해졌다. - 441


2026. aug.

#상상속의삶 #앤드루포터 #문학동네 #theimaginedlife #andrewporte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