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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필요한 여자
라비 알라메딘 지음, 이다희 옮김 / 뮤진트리 / 2026년 2월
평점 :
베이루트 노년 여성 알리야의 삶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거부할 수도 없이 떠밀려 온 초년의 인생이 다행히도?? 4년 만에 이혼을 해준 남편 덕에...
그녀만의 삶이 되는 아이러니.
삶에 필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도 '위엄'이라는 점을 일깨워 준다.
비단 여성의 삶 뿐 아니라 베이루트의 남성 역시 끔찍한 선택의 길 뿐이었다는 비극이 담담하게 그려져 더 깊이 있게 다가왔다.
언제 비명횡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전시의 베이루트에서 늙음이라는 결코 우아하지 않은 삶의 과정을 되뇌이며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하던 사람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조금씩 열리는 과정을 보는 일도 작은 행복을 준다.
삶은 그렇게 외롭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알려주는 적당히 거리를 두는 적당히 참견쟁이에 적당히 다정한 사람들이 둘러보면 늘 주변에 한 둘은 있는 것이다.
세 마녀 만세!
노년 여성의 내면, 여성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문화권에 대한 깊은 이해, 여성들 간의 연대를 그려내는 시선이 너무나도 여성적이라서 작가 라비 알라메딘이 59년생 남성이라는 사실이 놀랍다고 느껴졌고, 다른 책들이 더 없는지, 작가는 어떤 사람인지 검색을 해보다 그림을 포함한 다양한 예술 활동, 성적 지향이 이런 깊이 있는 이해가 아마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른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은데, 2009년 출간된 적 있는 하카와티는 이미 절판된 것 같고, 다른 책은 더 없다는 게 조금 아쉽다.
진짜로!! 아쉬워!!
- 책을 읽고 쓰는 일은 아마도 인간의 존엄성에 남은 마지막 무기일 것이다.
신마저 증발하고 없는 이 끝없는 굴욕의 시대 이전에
신이 우리에게 일깨워주었던 사실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사실. 우리에게 영혼이 있다는 사실.
더욱이 그뿐만이 아니라는 사실. 아니면 말고. - 리처드 플래너건, <굴드의 물고기 책>
- 정신이 팔린 이유에 대해 가벼운 변명을 해보자면 이렇다. 연말이 되면, 나는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그해 완성한 번역본을 읽어본다. 최종적으로 소소한 수정작업을 하고 페이지를 순서대로 놓은 뒤 상자에 넣는다. 레드 와인 두 잔을 마시며 치르는 일종의 의식이다. 고백하자면, 마지막으로 다시 읽어보면서 비로소 나 자신을 격려하고 작업을 잘 끝낸 것을 자축한다. 올해에는 소설 <아우스터리츠>를 번역했다. W.G.제발트의 작품은 두 번째다. 오늘 원고를 읽으면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마도 주인공의 고독한 절망 때문이었겠지만 한나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 14
- 성인이 된 후 거의 매해, 정확히는 스물두 살 이후로 거의 매년 1월 1일 번역을 시작했다. 이날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공휴일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해 첫날 일을 하지 않는 쪽을 택한다는 것을 나도 물론 알고 있다. 하루는 베토벤 소나타 필사본을 뒤적이는데, 끝에서 두 번째 작품인 작품 번호 110, 가장 훌륭한 내림 가장조 소나타에만 우측 상단에 날짜가 적혀 있는 게 보였다. 마치 작곡가가 1821년 성탄절에 일을 하느라 바빴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리고 싶어 한 것 같았다. 나 또한 공휴일에도 일을 하는 편을 택한다. - 15
- 책을, 묶이지 않은 상태의 번역본을, 상자에 넣는 일. 그것이 내 삶이다. -16
- 나는 이미 오래전에 글에 대한 맹목적인 갈망에 나를 맡겼다. 문학은 내 모래 놀이터이다. 나는 그 안에서 놀고, 요새와 성을 쌓고, 황홀한 시간을 보낸다. 날 힘들게 하는 것은 놀이터 바깥의 세상이다. 나는 눈앞의 세상에 온순하게, 그러나 관습적인 방식과는 다르게 적응해왔다. 내 안의 책 세계에 큰 불편 없이 은거하기 위해서였다. 모래의 비유를 변형해 보자면 문학은 내 모래 놀이터, 현실 세상은 나의 모래시계이다. 모래는 한 톨 한 톨 빠져나간다. 문학은 내게 삶을 주고, 삶은 나를 죽인다. 하긴 삶은 누구든 죽인다. - 16
- 나는 혼자다.
이것은 내가 내린 선택이지만, 다른 선택지도 거의 없었다. 당시 베이루트 사회는 아이가 없는 이혼녀에게 그다지ㅣ 다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누울 자리를 보았고 다리를 뻗었다. 소박하고 편안하고 적당한 자리였다. - 20
- 쿠란의 내용이 유치하고 고압적이라고 조롱할 수는 있지만, 쿠란의 문체는 다르다.
내 눈을 뜨게 한 것은 결국 시였다. 쿠란이 아닌 시가, 보옥을 다듬는 그 기술이 나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졌다. 사랑의 발견이 꼭 시의 발견보다 더 아름다운지 나는 잘 모르겠다. 더 관능적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 같다.
그 불을 붙인 시인을 기억한다. 새카만 전사 시인 안타라였다. 죽을 위기의 언어가 소생되던 순간의 충격을 기억한다.
너를 기억했다 창끝이 내 안에서 갈증을 해소하고
흰 칼이 내 피를 뚝뚝 떨어뜨릴 때
나는 간절히 칼날에 입 맞추고자 했다
네 미소처럼 번득이던 그 칼날에 - 23
- 아버지는 나에게 줄 가르침이 없었다. 가족 누구도 나에게 건넬 말이 없었다.
나는 우리 집안의 맹장이다. 불필요한 부속 기관이다.
이 집안은 나를 열여섯에 시집보냈다. 학교를 유일한 보금자리로 삼았던 나를 설익은 상태로 따다 몸도 마음도 작은 사람에게 주었다. 청소년에게 결혼만큼 불쾌한 제도는 없다. 신혼집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아파트였는데, 남편은 4년도 채 지나기 전에 내 앞에 서서, 법의 요구에 따라, 그 무엇보다 짜릿한 선언을 했다.
"당신과 이혼한다."
이혼은 남편이 결혼 생활을 통틀어 보여준 가장 자기다운 결정이었다.
그 불능충은 문지방을 넘어 나갔고, 그 이후로 이 집 바닥에는 한 번도 그 자의 발이 닿은 적이 없다. 나는 어렸지만 눈물 한 방울 떨구지 않았다. 천성이 시키는 대로 했다. 밀고 닦고 치우고 살균해서 그 어떤 흔적도, 그 어떤 냄새도, 머리카락 한 올도, 손자국 하나도 남겨놓지 않았다. 그가 중후해 보이려고 피우던 냄새 지독한 파이프와 더러운 모자를 걸어두던 못들도 벽에서 뽑았다. 파이프 재에 그을려 여기저기 구멍이 난 장식용 깔개들은 바늘과 실타래로 빠짐없이 손질했다. 모기장은 표백제에 푹 담갔다.
나는 그의 냄새가ㅏ 저절로 빠지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싹 없애버렸다. - 27
- 수년 뒤인 1982년, 그 모든 것이, 문을 두드리고 욕을 하며 집을 내놓으라던 동생들의 외침이, 이스라엘의 베이루트 포위 공격과 함께 멈추었다. - 36
- 마침 주인이 짙은 색이 칠해진 거대한 참나무 책상에 앉아 있었는데, 바로 이것이 부싯돌이 되어 내 안에 불길을 지폈다.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스무 살 이혼녀에게 그런 책상 뒤에 앉는 것은 정말 위엄 있고 호화로운 일, 꿈꿀만 한 일로 여겨졌다. 내 삶에는 위엄이 필요했다. - 41
- 한나는 나에게 용기를 주려고 나타났는데, 나는 한나의 겉모습을 걱정하고 있었다. 부끄러웠다. 난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코앞에서 꽃 피는 기적도 놓치곤 한다. 흐릿한 별에 집중하느라 별자리를 놓친다. 빨래를 널어두었는지 걱정하느라 휘황한 폭풍우를 못 보고 지나간다. - 76
- 나는 읽는 사람이다. 그렇다, 성가신 허리 통증을 견디며 읽는 사람이다.
뼈가 쑤시거나 허리가 반항하면 수년 동안 몸을 소외시킨 데 대한, 심지어 멸시한 데 대한 처벌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 나는 나의 육체를 개탄했고 이제 나의 육체는 나를 개탄한다. 나이가 들수록 몸은 나로부터 정당한 관심을 요구한다. 권리를 주장한다.
한때는 몸보다 정신이었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높은 데 있는 알리야. 딸로 있는 알리야.
알리야, 만물의 위에 있는 알리야.
슬프도다, 슬프도다, 슬프도다. - 80
- 파디아를 향한 나의 감정의 매듭을 푸는 일은 프쉬케의 그 어떤 과업보다 힘들지만, 나를 향한 파디아의 감정을 이해하는 일은 더 어렵다. 이 아이는 어린 신부였던 나를 우러러보았지만 이혼녀가 된 나를 혐오했다. 그러나 함께 나이가 드는 동안, 저도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나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혐오하지도 않는다는 듯 예의를 갖추어 나를 대했다. 그리고 가끔은 매우 깊은 친절과 관용을 베풀어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전쟁으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타인으로 살 수가 없었다. 전투가 이어지는 동안 서로 돕고 지지해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관계가 익숙한 우정 같은 것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예의를 차려 무의미한 말을 나누는 것 이외에는 대화도 거의 하지 않았다. 드문드문 한 마디씩 섞을 뿐이었다. - 120
- "전쟁 중에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혼자 보내셨는지 항상 궁금했어요. 아, 그렇구나. 레바논 사람들이 피에 굶주렸을 때 책에 굶주리셨군요." 파디아의 웃음소리가 냇물처럼 졸졸 흐른다. 내가 웃어주지 않자 덧붙인다.
"인정하세요. 재치 있었잖아요."
"그래." 나는 인내심을 갖고 고개를 끄덕인다. - 133
- 살을 대고 있는 두 청소년은 더할 나위 없이 살아 있고 더할 나위 없이 밝다. 그 앞으로, 유리창에 창백한 은백색으로 반사된 나의 모습이 겹쳐진다. 나는 움찔한다. 불멸의 청춘 곁에 선 불멸의 노년.
그러나 당신께서 보낸 강력하고 성난 세월은 뜻대로 했고,
나를 쓰러뜨리고 망치고 야위게 했습니다. : 알프레든 테니슨, <티토노스> - 139\
- 나는 출간이 아닌 번역에 목숨을 건다.
이제, 작업이 끝나면 별 관심을 두지도 않으면서 왜 그토록 열심히 번역을 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뭐랄까, 나는 최종적인 결과물이 아닌 과정에 헌신한다. 난해하게 들릴 수 있고 그렇게 들리는 것도 싫지만, 어쨌든 내게 영감을 불어넣는 것은 그 행위, 작업 그 자체이다. 일단 책 한 권을 끝내면, 경이로움이 사라지고 수수께끼는 풀린다. 그러면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불안의 서>에서 페소아는 이렇게 말한다. "탁월한 인간에게 어울리는 태도는 오로지 이것, 스스로 쓸모없다고 여기는 활동을 지속하는 것, 무익한 질서를 유지하는 것, 지극히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특정한 철학적, 형이상학적 사유의 규범을 적용하는 것."- 165
- 갓 태어난 희망찬 조국이 독립 첫해를 맞은 1944년도 후반에 이르자, 한나는 계속 집에만 있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 시대의 젊은 중산층 여성이 뭘 할 수 있었을까? 학교를 나왔고 아랍어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영어로도 "하우 두 유 두?"라고 인사할 줄 아는 여성이? 고등학교 때에는 철학을 사랑하고 또 잘했던 여성이 뭘 할 수 있었을까?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
학교를 나왔고 두 개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세 번째 언어도 기본 정도로는 할 수 있는, 고교 시절 철학을 사랑하고 잘했던 젊은 중산층 여성은 병원은 어디에 배치했을까?
당연히 식당에서 배식을 하게 했다. - 203
- 아침은 지나갈 것이다. 슬프고 느린 걸음으로 지나가겠지만 지나갈 것이다. 내일과 내일, 또 내일도 이같이 하찮은 걸음으로 다가온다. - 241
- 내 무덤의 비석에는 어떤 내용이 담길까? 너무나 많은 가능성, 선택지가 있다.
"여기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이제는 죽고 없는, 여전히 홀로이고 여전히 두려움 가득한 알리야가 잠들어 있다."
"죽음이여, 자만하지 말지어다. 그대가 정복한 것은 작은 점 하나." - 259
- 가령 결혼하면 학교에 다닐 수 없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알았다면 수업 시간에 질문을 훨씬 더 많이 했을 것이다. 나는 강제로 번데기에서 분리되어 세상의 모진 빛과 위협적인 폭풍우와 마주해야 했던 나방이었다.
나에게 어떤 선택지가 주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알았다면 더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고 그 얼간이에게 좀 더 많은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놈이 거들먹거리며 피우던 그 담뱃대를 목구멍으로 쑤셔 넣어 버렸을 것이다. - 303
- 나는 무해함의 화신이다. 나는 사람들로부터 사랑이나 애정을 바라지 않고 어떤 감정도 기대하지 않는다. 적이 생길 만큼 눈에 띄는 존재가 되길 바란 적도 없다. 태생적으로 수줍은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늘 외톨이 신세지만 언젠가 참나리로 꽃 피어 요란하고 화려한 향기를 뿜고 싶다는 깊은 욕망을 품고 있는 사람도 아니다. 나는 단지 타인이 내 삶을 방해하길 바라지 않기 때문에 나 또한 타인의 삶을 방해하지 않고 살고자 한다. - 319
-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늘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무엇이 되고 싶다고 바랄 수조차 없다.
그와 별개로, 내 안에는 온 세상의 꿈이 다 있다. - 409
2026. m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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