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뒤락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9
애니타 브루크너 지음, 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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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 소설..

이런 소재가 '문제적'이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 그렇게 이해하는 걸로
이 이야기를 이해했다.

결혼에 대한 집착이 여성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던 시절.
호텔 뒤락에 유배당하듯, 도망치듯 도착한 후
직면해야 하는 자신의 상황은 외면하고
투숙객들을 관찰하는 일에 집중하는 주인공 이디스를 보면 흠...
회피형 주인공 그 자체 아닌지.

사랑으로 불거진 개인의 불행을 피해 자의와 타의로 유배 온 장소에서도 끊임없이 사랑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당시의 시대에서 여성의 운신의 범위가 무엇보다도 사랑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이지만,
그 모든 사유의 과정이 여성의 독립, 불합리한 세상 속에서 어렵게 자신을 합리화해야 하는 내면이 잘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결국 신의 없는 남성에 환멸을 느끼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엔딩이 되는 점은 좀 시답잖게 마무리 짓는 느낌이 들긴 한다.

진보적 관점으로 풀어내기보다는 그저 당시의 사회상이 거울처럼 반영된 이야기.

그리고 재미는 좀... 없는 편.

- 그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운 나쁘게 저지른 잘못은 잊고 신중하고 착실한 원래의 성품을 되찾을 것이었다. 그 잘못이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 시기에 집에 있어야 할 자신을 사람도 별로 없는 이곳으로, 잠시 동안의 유배생활로 내몰았다. - 10

- 호숫가를 따라 산책하며 이디스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불합리와 불가피성이 늘 같이하기 마련인 꿈속에서 말없이 걷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러듯 목적지가 뚜렷해질 때까지 이 글을 계속 걸어가야 할 것 같은 절망감과 어떤 파국으로 치달을 호기심이 동시에 느껴졌다. - 25

- 토끼들은 책 읽을 시간이 없어요. 그들은 경주에서 이기느라 너무 바빠요. 선전은 모두 다른 방향으로 하고 있지만 거북이야말로 위로가 필요한 존재들이에요.- 33

- 이디스는 깨달았다. 책을 쓰는 일을 입으로 하고 있어도 그것은 거북의 삶이었다. 바로 그것이 자신과 같은 거북들을 위해 소설을 쓰는 이유였다. - 35

- 환자처럼 무거운 몸으로 목욕을 하면서 이디스는 자신에게서 분별력을 뽑아내려고 애썼다. 우울증이 덮치기 전에 기선을 제압해야 했다. 글쓰기를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모든 걸 침착하게 받아들이자, 그녀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생각하지 말자. 문을 모두 닫자. - 75

-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몸이 떨려왔다. 자신이 저지른 부정한 행위에 생각이 미치자, 자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으면서 친구가 되어준 훌륭한 여자들을 하찮게 생각하는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나는 늘 여자에게는 너무 가혹했어,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남자보다는 여자를 더 잘 이해하기 때문일지도 몰라. 여자들의 경계심과 참을성과 스스로를 성공한 사람으로 광고해야만 하는 그 필요성까지도 알고 있기 때문에. 실패를 인정해서는 안 되는 여자들의 필요 말이야. 그 모든 걸 너무도 잘 알지.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이니까. - 103

- "당신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에 잘못 끌려가고 있으니까요 사랑한다고 수없이 고백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완전한 조화란 없다는 걸 아직도 모르나요? 단순히 감정의 단계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탓에 많은 시간과 추측을 낭비하며, 끊임없이 고뇌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요? 가볍게 알고 지내는 것이 깊은 열정보다 언제나. 실제로 더 유효하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입니까?"
"네, 알고 있어요." 이디스가 우울하게 말했다.
"그러니 그걸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일단 이 세상을 자기 것이라고 마음을 정하고 바라보면, 세상이 얼마나 희망적인 곳으로 바뀌는지 모를 거예요. 일단 자기중심적이 되고 나면 모든 게 다 건강해질 겁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아니면 차라리 하고 싶지 않은 게 무엇인지 결정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지요." - 111

-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디스."
"아니요, 난 틀리지 않았어요."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나는 사랑 없이는 살 수가 없어요. 내 말은 사랑 때문에 망가지고 괴상한 징후가 생기고 우스꽝스러워진다는 뜻은 아니에요. 내가 말하는 건 그것보다 훨씬 진지해요. 내 말은 난 사랑 없이는 잘 살아낼 수가 없다는 뜻이에요. 다른 어떤 힘이 있어도 사랑 없이는 생각할 수도,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없고 심지어 꿈도 꿀 수도 없어요. 살아있는 세상에서 배제되었다는 느낌이 들어요. 차가운 피가 흐르는 물고기 같은, 움직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려요. 안에서부터 파멸해버리는 거죠. 내가 생각하는 완전한 행복이란 저녁이면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올 걸 알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온종일 햇볕 따가운 정원에 앉아 책도 읽고 글도 쓰는 거예요. 매일 저녁 그 사람이 올 거라고요."
"정말 로맨틱한 사람이군요, 이디스." - 114

- 이디스가 지친 듯 말했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나는 네빌 씨나 그의 돈을 좇지 않아요. 돈은 내 손으로 직접 벌어요. 돈은 어른이 되면 누구나 버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후보자를 탐색하는 여자들의 시각이 나는 싫어요"
"그게 왜 나쁜지 모르겠네요." 모니카가 열의 없이 대꾸하더니 조금 쉬었다 덧붙여 말했다. "남자들도 그러는데요." - 171

-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게 신경 쓰이진 않나요?"
"아니요. 도리어 안심이죠. 난 당신의 감정이 짐이 되는 건 원치 않아요. 낭만적인 기대 없이도 이 모든 일은 가능해요."
이디스는 그를 향해 돌아섰다. 머리카락이 마구 휘날렸고 눈빛은 어두웠고 입매는 씁쓸해 보였다.
"그리고 당신도 나를 사랑하지 않고요?"
네빌 씨가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모호함이 전혀 없는 슬픈 미소였다. - 196


2026. jul.

#호텔뒤락 #애니타브루크너 #문학동네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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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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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사둔 책이고, 손이 가지 않아 너무 묵힌 책인데.

갑자기 눈에 띄어 후루룩 읽었다.

큰 감흥이라기보단 
흠... 일본 문학... 이라는 감상이다.

꽤 익숙한 감성이랄까.
고풍스럽고, 모호한 환상성이 가미되어 있는 약간 미친 이야기들.

- 이 마을에는 불지 않는 바람이다.
그것은 강의 수원지 부근에서 사과꽃 향기를 실어 온다. 언젠가 어른이 되었을 때, 나는 야에코와 함께 그 사과밭에 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살 것이다. 그런 느낌이 든다. 백구도 데려갈 것이다.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말이다. 다른 사람은 절대 안 된다. 그곳에서는 나와 야에코 그리고 백구만 살 것이다. - 달에 울다, 26

- 조금씩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따위는 보지 않고도, 사과와 더불어 20년을 살아 온 것만으로 인간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아버지 같은 남자들이 대륙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짐작이 간다.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변명은 거짓말이다. 사람들은 온갖 짓을 다 저지르고도 나중에 입을 싹 닦고 잘 살아간다. 인간이란 그런 동물이다. 말하자면, 야에코 아버지 일로 괴로워하는 마을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런 것이다. - 달에 울다, 38

- 솔직히 말해 나는 그녀가 부러웠다. 그런 식으로 마을을 떠날 수 있는 그녀가 전혀 비참하다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어난 지 30년 만에 그녀는 겨우 해방된 것이다. 그 시기가 너무 이른 것인지 너무 늦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다. - 달에 울다, 74

- 내친 김에 나는 이런 질문을 했다.
"개도 정신병에 걸리나요?"
"그럼." 수의사는 나를 외면하며 말했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미치게 마련이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모두들 조금씩은 이상하니까." 그는 구부러진 주삿바늘을 펴면서 덧붙였다. "이상하지 않으면 이런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지." - 조롱을 높이 매달고, 111

- 어쩌면 나는 세상에 장단 맞추는 것을 그만둘 기회를 오랫동안 노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드디어 그 일에 성공한 것일지도 모른다. - 조롱을 높이 매달고, 117

2026. jul.

#달에울다 #마루야마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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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세트 - 전4권 (양장)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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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무엇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질문을 던지는 유쾌하고 장대한 판타지 서사.

오랫만에 도파민 최대치의 독서.
재밌고 흥미진진해서 감정의 고양이 일어난다.

이런 옛날 옛날에 스타일의 이야기에 두근대다니 ㅋㅋㅋ

케이건 드라카, 티나한, 비형, 사모 페이, 륜 페이....
정말 잘 만든 캐릭터 아닌지 감탄에 감탄을 했다.

비형.... 너무 취향의 도깨비. 소리 내서 5번쯤 웃었음.

유료 도로당의 뭔가 멋짐에 대해서도. :)

전반부가 지나고 4년이 흐른 시점의 이야기에선 또 다른 무드의 비감이 느껴지는 게 좋았다.

지난하고, 잔혹하다 할 수 있는 광경들을 지나 부서진 이들이 다시 일어서려 하는 노력.
그리고 그들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게 아니고
결국 또 반목하고 대결하고 견제하는 변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는 점도.

그냥 그저 판타지 소설이 아닌 현실의 반영 같아서 더 와닿는 서사시.

그리고 얼른 50년 후의 피를 마시는 새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며 ....

오래전부터 이영도 작가의 작품을 한 번쯤은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종범의 스토리캠프에서 설명회를 한 영상을 보고
정말이지 대단한 이야기꾼.....
바로 영업당해 결제 클릭클릭하고 순식간에 읽어 내려갔다.

덕분에 7월에 독서량도 평균치를 웃돌았고, 읽는 뇌 세팅에도 무진한 도움이 되었다.

피마새도 바로 읽으려고 했지만.... 조금 아끼는 마음으로 살짝 미뤄본다. 책은 이미 책장에 있음... 든든함... ㅋㅋㅋ

<1권>

- 하늘을 불사르던 용의 노여움도 잊혀지고
왕자들의 석비도 사토 속에 묻혀버린
그리고 그런것들에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생존이 천박한 농담이 된 시대에
한 남자가 사막을 걷고 있었다. - 1권 서문

-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 - 해묵은 금언

- "그런 걱정은 하지 말게. 케이건의 분노는 모조리 나가들에게 돌려져있어. 그리고 그에게 다른 분노를 살 수도 없어."
"분노를 살 수 없다고요?"
"그래. 서신에서 본 것처럼 그에겐 더 뺏을 수 있는 것도 없어. 나가들이 모조리 다 빼앗아갔으니까. 역설적으로 들릴 테지만 나가를 제외한 자들에게 있어서 케이건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분노하게 할 수 없으니까."
"슬픈 말씀이군요." - 51

- <인간들도 꿈을 믿어.>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지. 어리석기로는 거기서 거길 테니.>
<그리고 나도 믿고 싶은데.>
화리트는 정신을 닫은 채 친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60

- 그제야 케이건은 한계선 이북과 이남이 얼마나 오랫동안 단절되어 있었는지를 절감했다. 수백 년 전 나가들의 폭풍 같은 북진이 기온이라는 절대적 한계에 부딪혀 중단되고 마침내 대확장 전쟁이 끝났을 때 세계는 두 동강이 나버린 셈이다. 나가들의 땅 키보렌과 그 북쪽의 땅. 뒤 쪽의 세계는 산이나 황야, 사막, 초원, 숲, 빙하 등이 있는 정상적인 세계다. 그러나 앞쪽의 세계에는 밀림뿐이다. 키보렌이라는 단 하나의, 세계의 반을 뒤덮은 숲.
케이건은 거기서 희극의 요소를 발견했다. 오직 단 한 사람, 한계선에 가장 근접한 도시 카라보라의 최남단에 나가를 도축, 가공, 요리할 수 있는 시설과 장비를 완비해 두고 매일같이 나가를 잡아먹으며 사는 인간 한 명을 제외한다면, 이제 모든 이들에게 나가들과 그들의 땅 키보렌은 전설 속의 존재나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만약 나가들이 그들 이외에 그들을 증거해 줄 자를 찾아내야 한다면 그들은 그들을 가장 증오하는 자를 찾아와야 할 것이다. 대사원의 영리한 승려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증오란 원래 그렇다. - 99

- <나가 살육자?>
나가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한계선 근처에 출몰하며 나가를 잡아먹는 괴물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그 괴물은 바라기라 불리는 쌍신검을 휘두르며 추위와 함께 나타난다. 그리고 추위 때문에 꽁꽁 얼어붙은 나가를 얼음 깨어먹듯이 씹어 먹는다고 한다. 지금껏 사모는 그 나가 살육자가 한계선의 추위를 상징하는 상상의 괴물일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는 그 이야기 속에서 묘사하는 것과 똑같은 인간이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은 채 달려오고 있었고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고 니르기엔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 232

- 사모는 대답하지 않은 채 앞쪽의 어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카루는 결국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닐렀다.
<페이. 돌이 식기 전에......>
<이자들이 왜 신을 잃었을까?>
사모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카루는 약간 당황했다.
<에? 자신들의 오만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건 나도 알아. 구체적으로 어떤 오만이라는 거지?>
<글쎄요. 신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 아닐까요? 혹은 자신들이 신보다 낫다고 생각했다거나.>
사모는 통로의 벽과 천장, 바닥을 죽 둘러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자들이 이런 것을 만들 수 있을까?> - 305

- "네 마리의 형제 새가 있소. 네 형제의 식성은 모두 달랐소. 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 독약을 마시는 새, 그리고 눈물을 마시는 새가 있었소. 그 중 가장 오래 사는 것은 피를 마시는 새요. 가장 빨리 죽는 새는 뭐겠소?"
"독약을 마시는 새!"
고함을 지른 티나한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자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물을 마시는 새요."
티나한은 벼슬을 곤두세웠고 륜은 살짝 웃었다. 피라는 말에 진저리를 치던 비형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의 눈물을 마시면 죽는 겁니까?"
"그렇소. 피를 마시는 새가 가장 오래 사는 건, 몸 밖으로 절대로 흘리고 싶어 하지 않는 귀중한 것을 마시기 때문이지. 반대로 눈물은 몸 밖으로 흘려보내는 거요. 얼마나 몸에 해로우면 몸 밖으로 흘려보내겠쇼? 그런 해로운 것을 마시면 오래 못 사는 것이 당연하오. 하지만."
"하지만?"
"눈물을 마시는 새가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고 하더군."
륜과 티나한은 알 듯 모를 듯하다는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비형은 환한 표정이 되었다. - 369

<2권>

- 하지만 그 시점에서 사모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은 유료도로당의 사람을 보는 관점이었다.
이곳에서는 사람을 사람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모든 요소가 무시되고 있었다. 여행자의 품성과 지성과 감성 따위는 유료 도로당에게 조금도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오로지 여행자가 통행료를 지불하느냐 지불하지 않느냐의 이분법만이 존재했다. 사람에 대한 가장 큰 모욕일 수 있는 그 장면에서, 그러나 사모는 동시에 정반대의 의미도 발견했다. 여행자의 외모와 종족과 고향 같은, 어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본질적으로 사람다움과는 별 관련이 없는 것들 또한 유료 도로당의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다.
보좌관은 말했다. '저 두억시니들은 통행료 안 냈다.'
사모는 그 말을 뒤집어 보았다. '통행료를 내면 저들은 여행자다.' - 116

- "여행자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길을 걷는 자들입니다."
"그럼 우리 유료 도로당은 무엇인지 말해 주겠소?"
"우리는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
"누구를 위해?"
"자신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 120

- 철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시구리아트 유료 도로당의 당주 보좌관은 당 일지를 작성하고 있었다.
'사모 페이는 두억시니들의 통행료를 지불한 다음 그들을 유인하며 관문을 통과하였다. 신을 잃은 그들 두억시니들에게 신의 가호를 바랄 수는 없으니, 나는 사모 페이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의 어진 마음이 저 가엾은 자들을 긍휼히 여기길 바란다.' - 141

<3권>

- 기약 없는 구원이 현존하는 고통의 대가가 될 수 있습니까? 고통을 받는 것은 사람들입니다. 신들이 아닙니다. - 129

- "제 생각에는 그럴 것 같지 않군요. 또 한 명의 케이건 드라카가 겨우 4년 만에 만들어질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케이건 드라카를 잘 알아?"
"그분을 잘 아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 140

- 사모는 더 이상 니를 수 없었다. 참으로 거대한 니름이 그녀를 향해 노도처럼 쏟아져왔다.
<살아가, 제발. 살아가!>
거기에 애정이 있었다. 사모는 받아본 적 없는 거대한 애정에 놀랐다. 니름이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애정과 관심이, 그리고 수단이 아닌 목적인 호의가 있었다. 웃음, 즐거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완전한 기쁨. 사모는 이해할 수 없었다. 멍청한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를 온통 적셔버리는 환희는 사모마저도 즐거움에 넘치게끔 만들었다. 유해의 폭포는 영원히 사라지지만 그것은 절대로 슬픈 일이 아니었다. 정신적 홍소, 폭소라도 터뜨리고 싶은 기분 좋은 소멸. 유해의 폭포는 마지막으로 농담처럼 닐렀다.
<제발, 자기 완성을 위해 살아간다는 자를 조심해...... 하하하!>
사모는 커다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지복에 찬 소멸이었다. - 455

<4권>

- 사모는 침묵한 채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곧 륜을 다시 만날 거야.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언젠가 륜에게 해줬던 일을 다시 해줄 수 있을까."
"공작님을 한계선 북부로 데려가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요스비에게 해줬던 일을 해줘."
케이건은 말없이 사모를 바라보았다. 사모는 고개를 약간 들어 올려 케이건의 이마 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친구가 되어주라고."
"왜 제게 부탁하시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너보다 더 적격인 자가 없으니까." - 133

- "네가 원했던 것이 무엇이냐?"
"사랑하기 위해 사는 삶."
사모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
"왜 이해할 수 없을까? 입장을 바꿀 수는 없을까? 길지 않은 생, 가슴에서 피비린내를 풍기며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우리의 서로 다른 겉모습은 광적인 증오의 원인이 아니라 다시 없이 커다란 축복이 아닐까? 사람은 새로움 속에 살아간다. 모든 것은 항상 바뀌어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늘이 덮인 저 남부의 이방인들을 우리의 의식과 지혜를 발전시킬 새로운 자극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가장 고마운 선물이 아닐까? 대상이 없는 사랑은 없다. 그리고 새로운 대상은 새로운 사랑을 약속한다. 남쪽에서 온, 비늘 덮인 그들은 나의 또 다른 형제며 혈육이다. 그리고 축복이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 싶다. 그들은 얼마나 고마운 자들인가.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상대를 하나 더 얻었다."
케이건은 스스로에게 보내는 조소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다."
사모는 이런 거대한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르다는 것이 증오의 원인이 아니라 거대한 축복의 원인이 될 수 있는, 혹은 그러했던 사람이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 294

-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거라는 어떤 가능성도 없다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남을까?"
아이의 말은 케이건이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케이건은 불만스러운 듯이 말했다.
"내일을 계속 오늘로 만들면 돼." - 334


2026. jul.

#눈물을마시는새 #이영도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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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낙천적인 아이 오늘의 젊은 작가 50
원소윤 지음 / 민음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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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싸늘하게 관조하는 듯하지만
작가 원소윤은 낙천적인 면도 있고 냉소적인 면도 있는
사랑이 많은 아이인 것 같다.

유년기의 서술들을 따라가다 보면
나의 유년기도 한번 되돌아보게 되는데
유독 과거의 기억 방면에 문제가 있다 보니 
나라면 절대라고 까지는 아니지만 못할 작업이지 싶다.

생전 본적도 없는 이들에게 가족을 맡기는 심정을 서술한 부분에서 한참 멈춰 있기도 했다.
더불어, 세상이 좋아져서 상황이 괜찮아서 나는 누구의 짐도 되지 않고 안녕을 고할 수 있기를.
하는 생각도.

민음 북샵에서 구매해서 작가의 추천 레터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게 또 원소윤 작가의 귀여운 면모를 보여준다.

- 땀을 흘리고 닦는 작가가 될 거야!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하고 벌을 받는 작가가 될 거야! - 추천 레터 중

- 은행에 도착한 치릴로는 로무알다 손에 통장을 거칠게 쥐여 줬다. 여기 있는 돈을 정리해서 당장 다 가져가라고.
"내 돈 안 뜯어 간 사람 너밖에 없다. 나 죽으면 다 나눠 가질 테니, 그 전에 네 몫 챙겨라."
여기까지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나는 그것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치릴로가 깡패처럼 로무알다를 끌고 갔다는 발단 대목에서는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마음을 졸였기 때문이다. 치릴로가 은행을 털러 가는 길에 "아, 맞다! 인질이 필요하지!" 하고 만만해 보이는 로무알다를 고른 것도 아니고 보이스피싱에 연루된 것도 아니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다음에는 순조로운 전개를 맞겠구먼, 한시름 놓았다. - 21

- 무심한 조명 덕분에 우리에게 일어난 일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 만일 극복한다면 뭘 극복해야 하는 걸까. 심지어 극복이 무얼 위한 것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 32

- 나는 귀한가. 매 순간 느끼고 있는바에 근거해 말하자면 나는 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뿐 아니라 모두가 안 귀해 보였다. 솔직히 그것 자체는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 겪어 내는 고통의 크기가 측량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이었다. - 35

- 사람이 저렇게나 많은데 나는 한 사람과 만났고 오래 이야기했고 그럴 수 있어 기뻤다. 동시에 두려웠다. 살아가는 데에 특별히 필요한 게 없는 사람이 되려 했는데 꼭 필요한 뭔가가 생길 것 같았다. 꼭 필요한 뭔가가 생긴 삶은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지? - 171

- 그러고 보니 기가 찼다. 아까 병원 유니폼 입은 사람들, 그들이 누구인 줄 알고 엄마를 맡긴 걸까. 엄마를 마취하고 피부를 째고 뼈를 맞추도록 맡긴 걸까. 신용을 알 수 없는 이들에게 거금을 넘긴 기분이었다. 시간도 남아나겠다, 기도나 해볼까 싶었지만 신앙심을 잃은 지 오래여서 기도의 샘이 바짝 말라 있었다. 그 누구를 향한, 그 무엇을 향한 어떠한 믿음도ㅗ샘솟질 않았고 가장 믿을 수 없는 건 단연 엄마였다. - 199

- "장기를 줄 수 있는 상황이어야 장기를 줄 수 있는 거야. 나중에 아빠 장기가 기증되잖아? 그럼 참 잘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돼."
놀랍게도 그 얼렁뚱땅한 말이 내게 위안을 주었다. - 207

- 불광천에는 '바르게 살자'라는 구호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불광천에 들를 때마다 나는 비석 앞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비석은 '바르게살기운동중앙협의회'에서 세운 것으로 이 협의회가 '삼청교육대'의 후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늘 사진을 찍었다. 바르게 살자. 세상에 이보다 와닿는 말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226


2026. jul.

#꽤낙천적인아이 #원소윤 #민음사 #오늘의젊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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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필요한 여자
라비 알라메딘 지음, 이다희 옮김 / 뮤진트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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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루트 노년 여성 알리야의 삶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거부할 수도 없이 떠밀려 온 초년의 인생이 다행히도?? 4년 만에 이혼을 해준 남편 덕에... 
그녀만의 삶이 되는 아이러니.

삶에 필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도 '위엄'이라는 점을 일깨워 준다.

비단 여성의 삶 뿐 아니라 베이루트의 남성 역시 끔찍한 선택의 길 뿐이었다는 비극이 담담하게 그려져 더 깊이 있게 다가왔다.

언제 비명횡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전시의 베이루트에서 늙음이라는 결코 우아하지 않은 삶의 과정을 되뇌이며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하던 사람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조금씩 열리는 과정을 보는 일도 작은 행복을 준다.

삶은 그렇게 외롭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알려주는 적당히 거리를 두는 적당히 참견쟁이에 적당히 다정한 사람들이 둘러보면 늘 주변에 한 둘은 있는 것이다.

세 마녀 만세!

노년 여성의 내면, 여성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문화권에 대한 깊은 이해, 여성들 간의 연대를 그려내는 시선이 너무나도 여성적이라서 작가 라비 알라메딘이 59년생 남성이라는 사실이 놀랍다고 느껴졌고, 다른 책들이 더 없는지, 작가는 어떤 사람인지 검색을 해보다 그림을 포함한 다양한 예술 활동, 성적 지향이 이런 깊이 있는 이해가 아마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른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은데, 2009년 출간된 적 있는 하카와티는 이미 절판된 것 같고, 다른 책은 더 없다는 게 조금 아쉽다.
진짜로!! 아쉬워!!


- 책을 읽고 쓰는 일은 아마도 인간의 존엄성에 남은 마지막 무기일 것이다.
신마저 증발하고 없는 이 끝없는 굴욕의 시대 이전에
신이 우리에게 일깨워주었던 사실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사실. 우리에게 영혼이 있다는 사실.
더욱이 그뿐만이 아니라는 사실. 아니면 말고. - 리처드 플래너건, <굴드의 물고기 책>

- 정신이 팔린 이유에 대해 가벼운 변명을 해보자면 이렇다. 연말이 되면, 나는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그해 완성한 번역본을 읽어본다. 최종적으로 소소한 수정작업을 하고 페이지를 순서대로 놓은 뒤 상자에 넣는다. 레드 와인 두 잔을 마시며 치르는 일종의 의식이다. 고백하자면, 마지막으로 다시 읽어보면서 비로소 나 자신을 격려하고 작업을 잘 끝낸 것을 자축한다. 올해에는 소설 <아우스터리츠>를 번역했다. W.G.제발트의 작품은 두 번째다. 오늘 원고를 읽으면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마도 주인공의 고독한 절망 때문이었겠지만 한나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 14

- 성인이 된 후 거의 매해, 정확히는 스물두 살 이후로 거의 매년 1월 1일 번역을 시작했다. 이날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공휴일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해 첫날 일을 하지 않는 쪽을 택한다는 것을 나도 물론 알고 있다. 하루는 베토벤 소나타 필사본을 뒤적이는데, 끝에서 두 번째 작품인 작품 번호 110, 가장 훌륭한 내림 가장조 소나타에만 우측 상단에 날짜가 적혀 있는 게 보였다. 마치 작곡가가 1821년 성탄절에 일을 하느라 바빴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리고 싶어 한 것 같았다. 나 또한 공휴일에도 일을 하는 편을 택한다. - 15

- 책을, 묶이지 않은 상태의 번역본을, 상자에 넣는 일. 그것이 내 삶이다. -16

- 나는 이미 오래전에 글에 대한 맹목적인 갈망에 나를 맡겼다. 문학은 내 모래 놀이터이다. 나는 그 안에서 놀고, 요새와 성을 쌓고, 황홀한 시간을 보낸다. 날 힘들게 하는 것은 놀이터 바깥의 세상이다. 나는 눈앞의 세상에 온순하게, 그러나 관습적인 방식과는 다르게 적응해왔다. 내 안의 책 세계에 큰 불편 없이 은거하기 위해서였다. 모래의 비유를 변형해 보자면 문학은 내 모래 놀이터, 현실 세상은 나의 모래시계이다. 모래는 한 톨 한 톨 빠져나간다. 문학은 내게 삶을 주고, 삶은 나를 죽인다. 하긴 삶은 누구든 죽인다. - 16

- 나는 혼자다.
이것은 내가 내린 선택이지만, 다른 선택지도 거의 없었다. 당시 베이루트 사회는 아이가 없는 이혼녀에게 그다지ㅣ 다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누울 자리를 보았고 다리를 뻗었다. 소박하고 편안하고 적당한 자리였다. - 20

- 쿠란의 내용이 유치하고 고압적이라고 조롱할 수는 있지만, 쿠란의 문체는 다르다.
내 눈을 뜨게 한 것은 결국 시였다. 쿠란이 아닌 시가, 보옥을 다듬는 그 기술이 나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졌다. 사랑의 발견이 꼭 시의 발견보다 더 아름다운지 나는 잘 모르겠다. 더 관능적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 같다.
그 불을 붙인 시인을 기억한다. 새카만 전사 시인 안타라였다. 죽을 위기의 언어가 소생되던 순간의 충격을 기억한다.
너를 기억했다 창끝이 내 안에서 갈증을 해소하고
흰 칼이 내 피를 뚝뚝 떨어뜨릴 때
나는 간절히 칼날에 입 맞추고자 했다
네 미소처럼 번득이던 그 칼날에 - 23

- 아버지는 나에게 줄 가르침이 없었다. 가족 누구도 나에게 건넬 말이 없었다.
나는 우리 집안의 맹장이다. 불필요한 부속 기관이다.
이 집안은 나를 열여섯에 시집보냈다. 학교를 유일한 보금자리로 삼았던 나를 설익은 상태로 따다 몸도 마음도 작은 사람에게 주었다. 청소년에게 결혼만큼 불쾌한 제도는 없다. 신혼집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아파트였는데, 남편은 4년도 채 지나기 전에 내 앞에 서서, 법의 요구에 따라, 그 무엇보다 짜릿한 선언을 했다.
"당신과 이혼한다."
이혼은 남편이 결혼 생활을 통틀어 보여준 가장 자기다운 결정이었다.
그 불능충은 문지방을 넘어 나갔고, 그 이후로 이 집 바닥에는 한 번도 그 자의 발이 닿은 적이 없다. 나는 어렸지만 눈물 한 방울 떨구지 않았다. 천성이 시키는 대로 했다. 밀고 닦고 치우고 살균해서 그 어떤 흔적도, 그 어떤 냄새도, 머리카락 한 올도, 손자국 하나도 남겨놓지 않았다. 그가 중후해 보이려고 피우던 냄새 지독한 파이프와 더러운 모자를 걸어두던 못들도 벽에서 뽑았다. 파이프 재에 그을려 여기저기 구멍이 난 장식용 깔개들은 바늘과 실타래로 빠짐없이 손질했다. 모기장은 표백제에 푹 담갔다.
나는 그의 냄새가ㅏ 저절로 빠지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싹 없애버렸다. - 27

- 수년 뒤인 1982년, 그 모든 것이, 문을 두드리고 욕을 하며 집을 내놓으라던 동생들의 외침이, 이스라엘의 베이루트 포위 공격과 함께 멈추었다. - 36

- 마침 주인이 짙은 색이 칠해진 거대한 참나무 책상에 앉아 있었는데, 바로 이것이 부싯돌이 되어 내 안에 불길을 지폈다.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스무 살 이혼녀에게 그런 책상 뒤에 앉는 것은 정말 위엄 있고 호화로운 일, 꿈꿀만 한 일로 여겨졌다. 내 삶에는 위엄이 필요했다. - 41

- 한나는 나에게 용기를 주려고 나타났는데, 나는 한나의 겉모습을 걱정하고 있었다. 부끄러웠다. 난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코앞에서 꽃 피는 기적도 놓치곤 한다. 흐릿한 별에 집중하느라 별자리를 놓친다. 빨래를 널어두었는지 걱정하느라 휘황한 폭풍우를 못 보고 지나간다. - 76

- 나는 읽는 사람이다. 그렇다, 성가신 허리 통증을 견디며 읽는 사람이다.
뼈가 쑤시거나 허리가 반항하면 수년 동안 몸을 소외시킨 데 대한, 심지어 멸시한 데 대한 처벌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 나는 나의 육체를 개탄했고 이제 나의 육체는 나를 개탄한다. 나이가 들수록 몸은 나로부터 정당한 관심을 요구한다. 권리를 주장한다.
한때는 몸보다 정신이었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높은 데 있는 알리야. 딸로 있는 알리야.
알리야, 만물의 위에 있는 알리야.
슬프도다, 슬프도다, 슬프도다. - 80

- 파디아를 향한 나의 감정의 매듭을 푸는 일은 프쉬케의 그 어떤 과업보다 힘들지만, 나를 향한 파디아의 감정을 이해하는 일은 더 어렵다. 이 아이는 어린 신부였던 나를 우러러보았지만 이혼녀가 된 나를 혐오했다. 그러나 함께 나이가 드는 동안, 저도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나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혐오하지도 않는다는 듯 예의를 갖추어 나를 대했다. 그리고 가끔은 매우 깊은 친절과 관용을 베풀어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전쟁으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타인으로 살 수가 없었다. 전투가 이어지는 동안 서로 돕고 지지해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관계가 익숙한 우정 같은 것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예의를 차려 무의미한 말을 나누는 것 이외에는 대화도 거의 하지 않았다. 드문드문 한 마디씩 섞을 뿐이었다. - 120

- "전쟁 중에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혼자 보내셨는지 항상 궁금했어요. 아, 그렇구나. 레바논 사람들이 피에 굶주렸을 때 책에 굶주리셨군요." 파디아의 웃음소리가 냇물처럼 졸졸 흐른다. 내가 웃어주지 않자 덧붙인다.
"인정하세요. 재치 있었잖아요."
"그래." 나는 인내심을 갖고 고개를 끄덕인다. - 133

- 살을 대고 있는 두 청소년은 더할 나위 없이 살아 있고 더할 나위 없이 밝다. 그 앞으로, 유리창에 창백한 은백색으로 반사된 나의 모습이 겹쳐진다. 나는 움찔한다. 불멸의 청춘 곁에 선 불멸의 노년.
그러나 당신께서 보낸 강력하고 성난 세월은 뜻대로 했고,
나를 쓰러뜨리고 망치고 야위게 했습니다. : 알프레든 테니슨, <티토노스> - 139\

- 나는 출간이 아닌 번역에 목숨을 건다.
이제, 작업이 끝나면 별 관심을 두지도 않으면서 왜 그토록 열심히 번역을 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뭐랄까, 나는 최종적인 결과물이 아닌 과정에 헌신한다. 난해하게 들릴 수 있고 그렇게 들리는 것도 싫지만, 어쨌든 내게 영감을 불어넣는 것은 그 행위, 작업 그 자체이다. 일단 책 한 권을 끝내면, 경이로움이 사라지고 수수께끼는 풀린다. 그러면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불안의 서>에서 페소아는 이렇게 말한다. "탁월한 인간에게 어울리는 태도는 오로지 이것, 스스로 쓸모없다고 여기는 활동을 지속하는 것, 무익한 질서를 유지하는 것, 지극히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특정한 철학적, 형이상학적 사유의 규범을 적용하는 것."- 165

- 갓 태어난 희망찬 조국이 독립 첫해를 맞은 1944년도 후반에 이르자, 한나는 계속 집에만 있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 시대의 젊은 중산층 여성이 뭘 할 수 있었을까? 학교를 나왔고 아랍어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영어로도 "하우 두 유 두?"라고 인사할 줄 아는 여성이? 고등학교 때에는 철학을 사랑하고 또 잘했던 여성이 뭘 할 수 있었을까?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
학교를 나왔고 두 개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세 번째 언어도 기본 정도로는 할 수 있는, 고교 시절 철학을 사랑하고 잘했던 젊은 중산층 여성은 병원은 어디에 배치했을까?
당연히 식당에서 배식을 하게 했다. - 203

- 아침은 지나갈 것이다. 슬프고 느린 걸음으로 지나가겠지만 지나갈 것이다. 내일과 내일, 또 내일도 이같이 하찮은 걸음으로 다가온다. - 241

- 내 무덤의 비석에는 어떤 내용이 담길까? 너무나 많은 가능성, 선택지가 있다.
"여기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이제는 죽고 없는, 여전히 홀로이고 여전히 두려움 가득한 알리야가 잠들어 있다."
"죽음이여, 자만하지 말지어다. 그대가 정복한 것은 작은 점 하나." - 259

- 가령 결혼하면 학교에 다닐 수 없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알았다면 수업 시간에 질문을 훨씬 더 많이 했을 것이다. 나는 강제로 번데기에서 분리되어 세상의 모진 빛과 위협적인 폭풍우와 마주해야 했던 나방이었다.
나에게 어떤 선택지가 주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알았다면 더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고 그 얼간이에게 좀 더 많은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놈이 거들먹거리며 피우던 그 담뱃대를 목구멍으로 쑤셔 넣어 버렸을 것이다. - 303

- 나는 무해함의 화신이다. 나는 사람들로부터 사랑이나 애정을 바라지 않고 어떤 감정도 기대하지 않는다. 적이 생길 만큼 눈에 띄는 존재가 되길 바란 적도 없다. 태생적으로 수줍은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늘 외톨이 신세지만 언젠가 참나리로 꽃 피어 요란하고 화려한 향기를 뿜고 싶다는 깊은 욕망을 품고 있는 사람도 아니다. 나는 단지 타인이 내 삶을 방해하길 바라지 않기 때문에 나 또한 타인의 삶을 방해하지 않고 살고자 한다. - 319

-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늘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무엇이 되고 싶다고 바랄 수조차 없다.
그와 별개로, 내 안에는 온 세상의 꿈이 다 있다. - 409



2026. may.

#불필요한여자 #라비알라메딘 #강력추천도서
#anunnecessarywoman #rabihalameddine #뮤진트리 #이다희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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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26-08-19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 좋았던! 하카와티 중고책 사놓긴 했어요.

hellas 2026-08-19 14:36   좋아요 1 | URL
다른 책도 읽고싶어요 :) 올해의 책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