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오랫동안 남성이 만들어 놓은 여러 허상 속에 갇혀 지내왔다. “여자는 사회적으로 열등할 수밖에 없다는 통념은 여성에게 억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여성의 사회활동을 제약하는 것은 여성의 신체구조보다 사회 제도적 문제와 사회제도를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다. 굳이 페미니즘의 논의를 빌리지 않아도, 고착화되고 이데올로기화 된 성의 정체성이 인간에게 하나의 억압이고 굴레라는 것은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상식이다.

 

 

 

 

 

 

 

 

 

 

 

 

 

 

 

 

 

 

읽고 쓸 줄 아는 남성들은 남성을 위한 이데올로기를 만든다. 남자들은 지식을 향유할 수 권리를 독점했다. 글쓰기의 역사는 남근중심주의와 함께해왔다. 여자가 독서를 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권위주의(남성 우월주의)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다. 책을 읽은 여자는 자의식을 스스로 가지게 된다. 그리고 똑똑해진다. 여자는 책을 만남으로써 남성의 울타리 밖으로 나와 자신의 것을 구축할 수 있게 된다.

    

 

 

 

 

 

 

 

 

 

 

 

 

 

 

 

    

 

동문선의 메두사의 웃음/출구에 수록된 출구는 원래 카트린 클레망 공저의 새로 태어난 여성에 있는 글이다.

    

 

 

엘렌 식수(Hélène Cixous)여성적 글쓰기를 이렇게 정의했다. “여성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야 한다.” 여성은 스스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고 역사 속에 부각시켜야 한다. 이와 동시에 자신을, 자연 발생적으로 흘러넘치는 자신의 이야기를 텍스트로 표현해야 한다. 여성적 글쓰기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곳은 프랑스다. 1968년 프랑스에서는 가부장제 담론을 해체하는 포스트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에디시옹 데 팜(Édition des Femmes)’이라는 출판사가 설립되었다. 출판사 이름을 우리말로 옮기면 여성출판사. 에디시옹 데 팜은 여성 해방 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는 출판사로 프랑스 페미니즘의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사실 1970년을 기점으로 프랑스 페미니즘은 두 개의 분파로 나뉘어 형성되었는데, 글의 주제와 벗어난 내용이라 이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소피아 포카의 포스트페미니즘을 참고하면 된다) 엘렌 식수는 에디시옹 데 팜의 설립을 환영했으나 자신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거부했다. 왜냐하면, 가부장제 규범을 거부하여 자신의 사회적 위치의 정당성을 얻으려는 페미니스트들이 여성과 남성의 차이라는 이분법적 체계에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식수가 말한 여성적 글쓰기는 남성을 적으로 간주하지도 않고, 평등권 쟁취를 위하여 투쟁해야 할 대상으로 삼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우선 여성 자신의 내적인 성찰을 통해 여성적 특성을 찾아내 종이 위에 표현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여성은 남성 중심의 엘리트주의,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허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즉 여성 고유의 정신적·신체적 영역을 부각하는 것이다. 식수는 20세기 프랑스 작가 중에 여성적 글쓰기를 실천한 작가가 많지 않다고 봤다.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마르그리트 뒤라스, 그리고 장 주네, 이 세 사람만이 여성적 글쓰기를 실천한 프랑스 작가로 언급했다.

    

 

    

 

 

 

 

 

 

 

 

 

 

 

 

 

 

철학자의 서재에 수록된 <‘알파걸은 결코 모르는 여성의 비밀>을 쓴 연효숙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남성적 글쓰기를 하지 않은 작가로 버지니아 울프, 제인 오스틴, 에밀리 브론테를 거론한다. 그런데 여기에 콜레트가 빠지면 여성적 글쓰기라는 단어를 처음 만든 식수는 불만을 표출했을 것이다. 국내 작가 또는 비평가들은 여성적 글쓰기 사례로 영미 작가들만 편중되어 소개하고 있다. 그것도 여성적 글쓰기가 프랑스에서 시작된 포스트페미니즘 운동의 한 방식이라는 사실을 쏙 뺀 채 말이다.

    

 

 

 

 

 

 

 

 

 

 

 

 

 

 

    

 

표지가 없는 책은 꼴레트-바가봉드(예전사, 1993),

'바가봉드'는 방랑하는 여인》의 원제.

    

  

 

콜레트의 방랑하는 여인은 여성적 글쓰기의 전범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설 제목인 방랑하는 여인은 주인공 르네 네레를 의미한다. 르네의 직업은 경력 3년 차인 뮤지컬 겸 연극배우다. 특히 팬터마임 공연에 능숙한 솜씨가 있다. 사실 콜레트도 팬터마임, 무언극 배우로 활동했다. 콜레트는 자신의 삶을 종이 위에 그대로 옮겼다. 르네는 그야말로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방황하는 여인이다. 그녀는 전남편과 이혼하여 자유로운 독신 생활을 누리고 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남성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 자리 잡고 있다. 르네는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막스의 청혼을 거절한다. 르네는 예전과 같은 결혼 생활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면 르네는 남편의 권위에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야 한다. 그녀는 자유로운 삶의 행복과 가정의 행복 사이에서 갈등한다.

 

집에 홀로 남아있는 르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무엇인지 고뇌한다. 이 장면이 차지하는 분량은 그리 짧지 않다. 여기서 콜레트는 여성적 글쓰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 “... 이 단어를 되뇌며 마음에도 없이 거울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거기, 검붉게 칠하고, 눈 주위에 번들번들한 푸른색 띠를 두르고 있는 것은 분명 나 자신이다. 눈가의 테가 녹기 시작한다... 얼굴 나머지 부분까지 녹아내리도록 두어 버릴까? 그러면 내 모습에는 긴 눈물자국 같은 꽁꽁 얼고 찐득찐득한 얼룩만이 남을까?” (5~6)

 

* “오늘 밤 난 이 긴 거울과 마주 대하고 그토록 열심히 피했다가 받아들이고 도망쳤다 다시 붙들리던 독백과 마주칠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보다. 아무리 기분을 돌리려 해도 쓸데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느낀다.” (12)

 

* “난 신비스럽게 반사되는 방 안의 거울 속에서 길을 잘못 든 여류작가의 모습을 본다. 사람들은 내가 연기를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결코 배우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왜지? 그건 관객들이나 내 친구들이 내가 선택한 일에 대하여 등급을 부여하기를 예의상 거절하려는 미묘한 뉘앙스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생활은 바로 내가 선택한 것이다... 길을 잘못 든 여류작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 나, 글을 쓰는 사치, 쾌락을 스스로 거부하는 나... 그런데도 모두에게 그렇게만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14~15)

 

 

 

집에서 쓸쓸히 거울을 바라보는 르네의 모습은 남성들을 위한 가장 무도회가 끝난 뒤 휴게실에서 홀로 남은 여장 배우의 쓸쓸한 상황과 비슷하다. 르네는 남자들의 분위기에 맞추면서 연기하는 삶에 점점 염증을 느낀다. 그러면서 진짜 여자를 발견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이미 자신을 향한 남성의 시선에 익숙해진 르네는 자신의 참 모습을 바라보는 일을 두려워한다. 르네는 자신의 독백을 쓸데없는 일로 치부해도 자기 자신을 글로 쓰는작가가 되고 싶다. 그렇지만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는 르네를 길을 잘못 든 여류작가로 본다. 르네가 잠시 글쓰기를 중단하고, 배우 일에 전념하게 된 이유가 여성적 글쓰기를 인정하지 않는 남성들의 따가운 시선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콜레트는 <클로딘 시리즈>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엄청난 인기를 얻었지만, 남성 비평가들은 그녀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작가였던 그녀의 전남편 앙리 고티에 빌라르는 자신의 필명으로 콜레트의 작품을 발표했다. 콜레트는 남편의 강요에 못 이겨 <클로딘 시리즈>를 연달아 써야만 했다. 빌라르의 아내였던 콜레트가 이 시절 썼던 작품들은 그녀가 원하는 진짜 글이 아니었다. 빌라르와의 이혼은 콜레트가 여성적 글쓰기를 실행하기 위한 결정적인 출구였다.

 

식수는 남성들이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여성의 자유로운 생명력이라고 말한다. 남성은 여성의 신체와 마음 모두 자신의 기준에 따라 검열했다. 오래된 억압 속에 살아간 여성은 자신 고유의 신체와 마음 심지어 언어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생명력이 상실된 여성은 목이 잘려나간 메두사다. 그녀의 눈을 보는 사람은 돌로 변한다. 남성들은 자신을 당당하게 바라보는 메두사를 두려워했다. 메두사는 원래 괴물이기 전에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그런데 남성 같은아테네 여신의 저주를 받아 흉측한 괴물로 변했다.

 

 

메두사를 보기 위해서는 정면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메두사, 그녀는 치명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아름답다. 그리고 그녀는 웃고 있다.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메두사의 웃음’ 29) 

 

 

예나 지금이나 남성은 생명력 있는 여성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런 여성을 아무 이유 없이 성격이 못난 벌레또는 괴물로 만들어서 질투하고 혐오한다. 그러므로 여성은 자기 자신을 글로 써야 한다. 반이성적으로 여성을 왜곡하고 비하하는 기이한 사회 속에서 여성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기 위해 당당하게 글을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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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7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6-08 18:33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이다. 인생을 한 권의 책으로 비유하면 풍성한 경험과 사유의 기록들을 채워가면서 사는 것이 하나뿐인 인생 잘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

:Dora 2016-06-07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콜레트♥

cyrus 2016-06-08 18:34   좋아요 0 | URL
정말 콜레트는 멋진 언냐입니다. ㅎㅎㅎ

수이 2016-06-09 2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퇴근 전인데 집에 가서 다시 읽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