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이 전업 작가가 되려면 글을 쓸 수 있는 자기만의 방과 적어도 연간 500파운드의 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예술과 페미니즘의 관계에 대해 많은 시사를 담고 있다. 울프가 말한 ‘방’이란 예술가로서의 창조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다. 울프는 가부장제 사회가 강요하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에 근본적인 이의를 제기하여 경제적 자립과 독립적 공간의 확보로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길 바랐다.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민음사, 2006)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펭귄클래식코리아, 2015)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민음사, 2016)

 

 

 

그렇다면 여성이 화가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기본적으로 그림 그리는 작업실, 물감, 화구(畫具)가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준비 요건을 모두 갖추려면 돈이 많이 든다. 높은 임대료 때문에 개인 작업실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과 맞물려 여성 예술가들의 사정이 조금은 나아졌으리라 기대한다면 갈 길이 아득히 멀다. 여성 예술가들은 갖가지 오해와 편견을 받는다. 또 가사와 양육으로 지속적인 예술 활동이 불가능하다.

 

 

 

 

 

 

 

 

 

 

 

 

 

 

 

 

 

 

 

* 크리스티나 하베를리크, 이라 디아나 마초니 《여성예술가》 (해냄, 2003)

* 주디 시카고, 에드워드 루시-스미스 《여성과 미술》 (아트북스, 2006)

* 프랜시스 보르젤로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 (아트북스, 2017)

 

 

 

예나 지금이나 예술계에도 유리 천장(Glass Ceiling)이 있다. 오늘날에 널리 알려진 여성 예술가들은 외부의 유리 천장뿐만 아니라 내면의 유리 천장까지 뚫으면서 예술가로서의 신념과 내면의 힘을 스스로 길렀다. 하지만 현실의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야망이 넘쳤고, 예술가가 지녀야 할 잠재력이 충분히 있음에도 끝내 재능의 날개를 펼치지 못한 채 요절한 여성 예술가도 있다. 그림을 그리려고 파리로 건너온 러시아의 젊은 화가 마리 바슈키르체프(Marie Bashkirtseff)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바슈키르체프는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다재다능한 러시아 귀족의 딸이었다. 열아홉 살의 바슈키르체프는 그나마 여학생 입학을 받아준 줄리앙 아카데미(Académie Julian)에 등록하기 위해 파리에 가기로 했다. 그녀의 파리 생활은 혈혈단신으로 시작했다. 그녀의 가족들은 돈을 들여가면서까지 파리에 정착하여 그림을 그리려는 바슈키르체프가 못마땅했다. 여학생이 내야 할 줄리앙 아카데미의 등록금은 남학생 등록금보다 두 배나 높았고, 또 해부학 강의를 들으려면 수강료를 내야만 했다. 이렇듯 19세기 여성이 마주해야 할 예술계의 진입 장벽은 너무나도 많았다. 전문 화가를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미술학교에 등록한 여학생의 수는 극히 적을 수밖에 없었다.

 

 

 

 

 

 

    

 

‘파리의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바슈키르체프에게 미술을 가르쳐준 사람이 로자 보뇌르(Rosa Bonheur)이다. 보뇌르는 화가인 아버지로부터 그림을 배웠고, 동물을 소재로 한 그림으로 명성을 떨쳤다. 1865년에 보뇌르는 여성 미술가 최초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여성의 미술계 진입 상황이 썩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림 교육을 받는 여성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미세한 시대적 변화의 흐름을 감지한 바슈키르체프는 ‘여성 화가의 작업실’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1881년 그녀는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 화가들의 염원을 담은 『작업실 안에서』를 제작했다. 바슈키르체프의 이 그림 속에 미술을 공부하는 열여섯 명의 여학생들을 그렸다. 물론, 이 그림에 바슈키르체프 본인의 모습도 있다. 그림 속에 화가를 찾아보시라. 힌트는 바슈키르체프의 ‘자화상’이다.

 

 

 

 

 

 

 

 

 

『작업실 안에서』는 여성 화가가 처한 열악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이 나오기 전까지 ‘화가의 작업실’은 남성 화가들의 연대가 이루어지는 ‘호모 소셜(Homo social)’의 장소로 묘사되었다. ‘화가의 작업실’을 주제로 한 쿠르베(Courbet)와 프레데릭 바지유(Frédéric Bazille)의 그림을 보라. 남성 화가의 개인 작업실은 넓고 쾌적하다. 작업실에는 화가의 작품뿐만 아니라 화가가 직접 사들인 동료 화가의 그림들도 걸려 있다. 여성보다 경제적 지위가 높고, 그림 그리는 재능을 가진 남성은 화가가 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 화가들은 남성의 경제적 지위에 의존해야만 미술을 배울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었다. 또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여성 화가들은 좁은 작업실에 모여서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쿠르베의 그림 중앙에 서 있는 누드모델은 ‘남성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Muse)’인 동시에 그림 내부 또는 그림 외부에 있는 남성 감상자들을 위한 성적 대상화가 된다. 그림 오른쪽에 부유해 보이는 여성 한 명이 있으나 그녀도 감상자일 뿐이다. 그녀는 남성 감상자 무리에 자연스럽게 동화된 상태다. 벌거벗은 누드모델과 화려한 옷을 입은 여성의 모습이 무척 대조된다. 경제 사정이 어려운 하층 여성(공장에 일하는 여성, 매춘부 등)들은 '투 잡(two job)'으로 누드모델 일을 했다. 쿠르베의 그림 속에 있는 두 여성은 19세기 프랑스 여성 인구의 극심한 빈부 격차를 보여주고 있다.

 

 

 

 

 

 

 

 

 

 

 

 

 

 

 

 

 

 

 

* 줄리 마네 《인상주의, 빛나는 색채의 나날들》 (다빈치, 2002)

* 메릴린 옐롬 《아내의 역사》 (책과함께, 2012)  

 

   

 

바슈키르체프는 열세 살 때부터 스물여섯 살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일기를 썼다. 그녀는 일기를 통해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냈고, ‘여성’이라는 이름의 무거운 굴레에 속박되어 살아가면서 느낀 심정을 기록했다. 그녀 사후에 공개된 일기가 워낙 유명해지는 바람에 그녀는 ‘화가’보다는 ‘작가’로 더 알려지게 되었다. 메릴린 옐롬(Marilyn Yalom) 《아내의 역사》(책과함께, 2012)에 바슈키르체프를 ‘작가’로 소개했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여성화가 베르트 모리소(Berthe Morisot)의 딸 줄리 마네(Julie Manet)도 바슈키르체프의 일기를 즐겨 읽었다. 줄리 마네는 자신의 일기에 바슈키르체프를 ‘호기심 많은 여성’, ‘마음이 유연하고 머리가 좋은 여성’, ‘상상력이 풍부한 여성’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그녀의 적극적인 사교성과 비범한 능력에 거부감을 느끼는 남성들이 있었다. 특히 ‘여성 혐오’로 유명한 에드가 드가(Edgar De Gas)는 바슈키르체프 같은 여자는 ‘번화가에서 공개적으로 엉덩이를 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드가 선생, 애호박으로 맞아봤음?(코 찡긋) 성격이 착했던 줄리 마네는 드가를 ‘친절한 어른’으로 생각했다(실제로 드가는 베르트 모리소와 그의 딸을 무척 잘 대해주었다). 하지만 내가 책에서 본 드가는…‥ 그냥 한 20미터 정도 떨어져서 보기엔 좋은 사람일 것 같다. 친구로 지내라면 조금 힘든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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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7 1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28 08:38   좋아요 1 | URL
예술가들의 삶을 살펴보면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어요. 하나는 말씀하신, 예술가가 죽고난 후에 재평가받는 것, 또 하나는 생전에 인정받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지는 예술가. 다 빈치나 피카소처럼 천재 예술가는 살아있을 때 명성을 얻었도 죽어서도 본좌급 명성을 얻고 있죠.

서니데이 2017-12-27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날씨가 추웠는데 내일까지는 추운 날이 될 것 같아요. 좋은 저녁시간 보내세요.^^

cyrus 2017-12-28 08:40   좋아요 0 | URL
추운 날씨 때문에 오히려 퇴근길이 출근길보다 두렵습니다.. ^^;;
 
문주반생기
양주동 지음 / 최측의농간 / 2017년 12월
평점 :
품절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벽초 홍명희는 식민지 시대 조선의 ‘3대 천재라 일컬었다. 그들이 천재로 군림하던 시대에 이 세 사람을 능가하는 새로운 천재가 등장했다. 무애 양주동. 어려서부터 익힌 한학에 능통했던 그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향가 25수 전편을 해석했다. 선생은 생전에 스스로 천재이자 국보임을 내세웠다. 그의 언행을 요샛말로 하면 자뻑(자화자찬을 의미하는 은어)’에 가까운 셈이다. 그렇지만 선생은 자칭 국보라고 불릴 만큼 공부의 깊이나 재능이 비상한 사람이었다.

 

데카르트(Descartes)는 천재란 후천적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천재를 이미 태어날 때부터 선험적으로 알고 있던 지식을 통해 능력이 발휘되는 존재로 보았다. 그러나 양주동 선생처럼 후천적 노력으로 천재가 된 사람들도 있다. 선생의 수필집 문주반생기(최측의농간, 2017)를 선생을 위해서 제목을 다시 짓는다면, 나는 어떻게 천재가 되었는가라고 붙여주고 싶다. 천재성의 바탕에는 포기를 모르는 학구열이 있었다. 소년 시절 선생은 영어를 독학했는데 ‘3인칭이 이해되지 않아 겨울날 아침 20(7km)를 걸어 일본인 교사를 찾아간 일이 있었다. 교사의 설명을 듣고 집으로 돌아온 선생은 ‘3인칭의 뜻을 잊지 않기 위해 메모를 하고, 반복해서 읽었다.

 

문주반생기를 읽어야지 한평생 문학의 숲에서 자유롭게 노닌 문학인의 진득한 진지함에 공감할 수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단언 양주동이지만, 그의 삶에 거쳐 간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선생은 이 책에서 2, 30년대 문인과 문단의 다채로운 풍경을 생생하게 되살려놓는다. 대구에서 항일 운동을 펼친 시인 백기만, 선생의 술 동무 횡보 염상섭, 잊힌 요절 시인 이장희, 선생이 사랑했던 문학소녀로 알려진 강경애 등 그와 함께 문학에 대한 열정을 나눈 문인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동안 문주반생기는 문고본 형태의 발췌본으로 남아 있어서 술을 중심으로 한 문인들의 일화를 담은 회고록 정도로 알려졌다. 사실 문주반생기범인(凡人)’으로서의 독자들이 읽기 힘든 책이다. 한시, 동양고전, 서양문학 등을 인용 · 언급한 문장은 선생의 박람강기한 재능을 보여주고 있으나 독서 몰입을 방해하는 단점이 있다. 요즘 잘 쓰이지 않는 우리말과 한문은 상세한 설명 없이는 도저히 그 뜻을 알 수 없다. 그리하여 최측의농간 출판사는 초판본 문체를 그대로 유지하되 문장 이해를 돕는 1,996개의 각주를 달았다.

 

지금은 조금 가라앉혔지만, 작년 출판계에 초판본 복간 열풍이 불었다. 저렴한 비용으로 원본의 진본성에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나 눈으로 보는 책의 근본적 한계도 여실히 드러났다. 초판 복각본은 독자가 소유하고 싶은 책일 뿐이다. 독자의 초판본 소유욕이 읽는 욕구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고 보기 어렵다. 최측의농간이 새롭게 편집한 문주반생기초판본 복간작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세대 불문하고 '읽는 독자를 위한 초판본이다. 문주반생기편집을 위해 출판사 관계자들은 오랜 세월 걸쳐 옛 판본을 읽었다. 수많은 국어사전, 참고문헌을 활용하며 꼼꼼한 교정을 거친 출판사의 노력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 독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읽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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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12-27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었구나. 그런데 좀 어려웠나 보군.
그러니까 나도 좀 주춤해지네.
그냥 너의 리뷰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cyrus 2017-12-27 16:18   좋아요 0 | URL
어렵다기 보다는 읽기가 힘들었어요. 선생이 너무 많이 인용을 하셔서... ㅎㅎㅎ

2017-12-27 1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27 16:21   좋아요 2 | URL
양주동 선생이 아주 어린 나이에 한문을 떼고(조금 과장된 면이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다섯 살 때부터 술의 맛을 알기 시작했을 정도면 조숙한 천재의 기질이 있었을 것입니다. 술을 많이 마시면 기억력이 떨어진다고 하던데, 애주가로 유명한 선생이 문장을 달달 외우는 것을 보면 선천적으로 타고난 천재인 건 확실합니다. ^^;;
 
오트란토 성 환상문학전집 2
호레이스 월폴 지음, 하태환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고딕(Gothic)은 중세에 세워진 뾰족한 첨탑에서 볼 수 있는 건축 양식이다. 지금도 이 건축물들은 세월의 때가 켜켜이 앉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런데 고딕이라는 단어는 인상파’, ‘빅뱅(big bang)’처럼 처음부터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 · 로마 미술 문화에 심취한 학자들은 고딕을 야만스러운 건축 양식이라고 비난했다. 고전주의와 이성 중심의 계몽주의가 굳건하게 유지되는 시대 속에서 고딕은 ‘B급 문화정도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중세 기사도 문학의 가치를 재발견한 낭만주의자들은 고딕 양식에 열광했다. 젊은 시절의 괴테(Goethe), 호레이스 월폴(Horace Walpole) 등이 고딕 건축물의 위엄에 감탄한 인물들이다.

 

 

 

 

 

월폴은 영국의 고딕 덕후였다. 그는 스트로베리 힐(Strawberry Hill)’이라는 이름의 고딕풍 별장을 세웠고, 그곳에서 생활했다. 별장 안에는 월폴이 직접 수집한 골동품으로 가득했고, 자신과 미적 취향이 비슷한 친구들을 초대해 함께 골동품을 감상하기도 했다. 월폴이 살았던 18세기 영국에 고딕 양식뿐만 아니라 고딕 소설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고딕 소설이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해서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고딕 소설의 정의를 아주 쉽게 말하면 중세풍 공포소설 또는 환상소설이다. 고딕 소설의 특징은 딱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 번째,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중세 시대의 고성이나 수도원은 고딕 소설에서 꼭 나오는 장소 배경이다. 두 번째, 고성과 수도원 안에서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초자연적 현상이 발생한다. 세 번째, 그 기이한 현상을 경험한 인물들은 이성을 상실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정신 줄을 놔서 미쳐 버린다…‥.

 

고딕 덕후월폴은 자신의 취향을 반영한 소설 한 편을 발표했는데, 그 소설이 바로 오트란토 성(Castle of Otranto, a Gothic Story)이다. 이 작품 하나로 월폴은 고딕 소설의 창시자’, ‘영국 공포문학의 시조로 평가받는다. 오트란토 성은 이 소설의 무대인 중세의 고성이다. 이 성의 주인은 만프레드 대공이다. 가족관계로는 아내인 히폴리타와 슬하 11녀의 자녀(장녀 마틸다, 차남 콘라드)를 두고 있다. 열다섯 살의 콘라드는 만프레드 대공의 상속인으로 비첸자 후작의 딸 이사벨라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콘라드가 거대한 투구에 깔려 사망한다. 마침 사고 장소에 있던 농부는 콘라드의 죽음이 오트란토 성의 전 영주인 알퐁소 르 봉의 저주와 관련이 있다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언급한다. 그러자 대공은 농부의 말에 노발대발하고, 정신 줄을 놓게 된다. 알퐁소 르 봉과 관련된 어둠의 힘에 두려워하던 대공은 개차반이 돼가고 있다. 아들의 죽음을 아내 탓으로 돌리고, 마틸다를 자신의 새 아내로 삼으려고 한다. 대공의 광기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대공의 심기를 건드린 농부다. 사실, 그는 테오도르라는 인물로 알퐁스 르 봉 가문의 피가 섞인 영주의 후예이다. 소설 중반은 만프레드 대공과 테오도르의 대결 구도 양상으로 흘러간다.

 

한때 전국을 웃긴 개그도 시간이 지나면 유치하게 보이듯이 큰 인기를 얻은 공포소설도 지금까지 쭉 읽히는 건 아니다. 즉 공포소설의 고전이라고 해서 무조건 재미있다고 말할 수 없다. 요즘 같이 영상의 시대에 만들어진 공포영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고딕소설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오트란토 성번역본의 뒤표지에 있는 출판사 책 소개 내용을 보라. 과장 홍보’를 경계해야 한다.

 

 

박진감 넘치는 짧은 소설

오늘날에도 역사를 초월한 재미로 읽는 이를 사로잡을 것이다.

 

 

짧은 소설은 맞는데, 서양 고전문학을 좋아하는 내가 봐도 박진감 넘치는건 아니다. 이야기를 진행하는 데 지나치게 질질 끄는 묘사 몇 군데 보인다. 작가가 고딕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고딕 분위기 연출을 위한 묘사에 너무 힘을 들었다. 역사를 초월한 재미…‥? 에이, 그건 좀 아니다. 오트란토 성이 주는 공포감이 현대의 독자들(특히 공포’, ‘호러마니아들)에겐 만족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이 소설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보이지 않는 어둠의 힘에 점점 제압당하는 인물(만프레드 대공)의 심리 상태가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독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말고…‥.)

 

만프레드 대공은 가부장의 힘을 내세워 전처와 친딸을 내팽개치고, 죽은 아들의 약혼녀를 아내로 삼기 위해 자기합리화에 가까운 변명을 한다. 대공 입장에서는 어둠의 힘은 아들의 목숨을 빼앗아 만프레드 가문의 대를 끊어버린 무시무시한 존재이다. 그리하여 대공은 가부장의 힘으로 어둠의 힘앞에 저항해보지만, 속수무책이다. 전처를 외면하고, 아들의 약혼녀와의 결혼을 강제로 실행하기 위해 고집을 부릴수록 그는 광기에 사로잡혀 추잡한 욕망을 드러내는 독재자로 변한다. 대공은 사악한 충동을 절제하지 못해 비이성적인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는 이성의 시대를 거스르는 인물형이다. 월폴은 만프레드 대공을 통해 이성을 강조하는 문명인 속에 숨겨진 삶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려고 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대공의 똥고집(?)은 인간이야말로 똑똑하고, 합리적인 존재라고 자신감 넘치는 계몽주의자들에게 향하는 반발심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책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또 하나의 문제점이 번역 문장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는 문장 몇 개 보인다. 새로 번역한다면 매끄럽지 않은 문장을 다듬었으면 좋겠다.

 

 

“should pass from the present family, whenever the real owner should be grown too large to inhabit it.”

 

오트란토 성과 영주권은, 합법적 소유주가 너무 커져서 더 이상 거기서 살 수 없게 되는 날, 현재의 혈통으로부터 박탈될 것이다.” (26)

    

 

“Do I dream?” cried Manfred, returning; “or are the devils themselves in

league against me? Speak, internal spectre! Or,if thou art my grandsire, why

dost thou too conspire against thy wretched descendant, who too dearly pays for- ”

 

당신이 나의 조상이라면 왜 당신은 너무 비싼 값을 치르고 있는 당신의 불쌍한 후손에게 대적하려고...” (39)

 

 

번역본의 역자는 프랑스 저작물을 번역한 불문학 전공자. 어째서 불문학 전문 역자가 영문학의 고전 번역을 맡게 되었을까? 미스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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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12-22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2017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cyrus 2017-12-23 11:54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도 축하드립니다. ^^

2017-12-22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23 11:56   좋아요 1 | URL
‘취업’이 중요하니까 취업 준비에 유리한 학과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전공’이라는 단어가 무의미해졌어요. 학문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학과를 선택하는 예비 대학생들이 많지 않을 거예요. ^^;;

2017-12-23 0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3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7-12-23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2017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오트란트 성같은 작품은 아무래도 후대의 시선으로 본다면 그닥 재미없는 작품이라고 할수 있지요.왜냐하면 후대로 갈수록 그런 장르가 더 발전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불문학 전공자가 영문학을 번역하는 것은 그분이 영어도 잘하기 때문이겠지만 아무래도 불어번역보다는 영어번역의 일이 더 많아서 그런것이 아닐까 싶네요.

cyrus 2017-12-23 11:5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오트란토 성> 번역자가 번역한 책 중에 민음사에서 나온 <시뮬라시옹>과 들뢰즈의 책 한 권 있었어요. 이 분이 번역한 책이 그렇게 많지 않은데, 그 중에 유일한 영문 번역서가 <오트란토 성>입니다. ^^;;

깐도리 2017-12-23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2017 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친구 추가합니다...

cyrus 2017-12-27 13:1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깐도리님도 서재의 달인으로 선정되신거 축하드립니다. ^^

saint236 2017-12-24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요즘 알라딘 서재에 뜸했는데 낯익은 얼굴들이 여전히 계시기에 반가운 마음에 글을 납깁니다.

cyrus 2017-12-27 13:21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세인트님. 잘 지내시죠? 먼저 반가운 인사를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분들을 알라딘 서재에서 만나게 되니까 그 전에 만났던 분들과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뜸해집니다. 아무 말없이 서재 활동을 멈춘 분들이 많아요. 이럴 때 기분이 묘해요.

2017-12-25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27 13:23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성탄절에 집에서 푹 쉬었습니다. ^^
 

 

 

최근 뜬금없이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연애대위법》을 읽고 싶어졌다. 헉슬리의 초기작으로 분류되는 장편인데,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어서 《멋진 신세계》를 다시 읽어보려고 한다. 헉슬리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연애대위법》 번역본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현재 구할 수 있는 <연애대위법> 번역본은 딱 한 권뿐이다. 동서문화사《멋진 신세계, 연애대위법》이다. 동서문화사! 구설수가 많은 출판사다. 저작권을 위반한 채 뻔뻔하게 《대망》을 판매했으며(이 일로 동서문화사 대표 고정일 씨가 검찰에 기소됐다. 그런데도 《대망》은 절판되지 않았다), 기존에 나온 번역본을 표절한 것으로 의심되는 책들이 있다.[1] <연애대위법>이 수록된 동서문화사 번역본도 그냥 넘어가기 힘든 의문점이 남아 있다.

 

 

 

 

1. 《멋진 신세계, 연애대위법》 1판 1쇄 날짜는 1987년 7월 1일이다. 그런데 1판이 출간된 적이 있었는가?

 

 

 

 

 

 

번역본 발행정보에 따르면 1판 1쇄 발행일이 1987년 7월 1일, 2판 1쇄가 2013년에 나왔다. 발행정보 밑에 보면 깨알 같은 글씨가 적혀 있다.

 

 

이 책은 저작권법(5015호) 부칙 제4조 회복저작물 이용권에 의해

중판 발행합니다.

 

 

출판사는 이 번역본이 중판 발행임을 명시했다. 저작권법이 규정한 회복저작물 이용권’이란 무엇일까?

 

 

“회복저작물 등을 원 저작물로 하는 2차적 저작물로서 1995년 1월 1일 이전에 작성된 것은 이 법 시행 후에도 이를 계속하여 이용할 수 있다. 다만, 그 원 저작물의 권리자는 1999년 12월 31일 이후의 이용에 대하여 상당한 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 [2]

 

 

우리나라는 1995년에 세계 저작권 협약(베른 협약)에 가입했다. 2차적 저작물(번역본)을 출간하려면 앞서 원 저작물(외국인의 저작물)의 권리자와 정식 계약을 해야 한다. 즉 세계 저작권 협약을 맺음으로써 1990년대 초반까지 쏟아져 나오던 해적판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예외 조항이 있다. 그것이 바로 회복저작물 이용권이다. 1995년 1월 1일 이전에 나온 2차적 저작물이 정식 계약을 거치지 않은 해적판이라도 출판될 수 있다.

 

1987년에 나온 《멋진 신세계, 연애대위법》은 원 저작물의 권리자와 출판 계약하지 않은 번역본이지만, 이 회복저작물 이용권이 적용되어 중판 형태로 재출간할 수 있다. 그래도 미심쩍은 점이 있다. 정말로 1987년에 동서문화사의 《멋진 신세계, 연애대위법》 1판이 출간된 적이 있었는가?

 

국립중앙도서관동서문화사 판(2013년에 나온 중판)을 포함한 ‘연애대위법’ 번역본 총 12종이 소장되어 있다. 1959년 동아출판사를 시작으로 을유문화사, 삼성출판사 등이 <연애대위법> 번역본을 출간했다. 그런데 1987년에 나온 동서문화사 번역본은 없다! 중판으로 발행된 번역본만 있을 뿐이다.

 

나는 회복저작물 이용권이 정식계약을 하지 않은 책을 오늘날까지 나오게 만드는 ‘악법’이자 비양심적인 출판사들이 좋아하는 ‘편법’이라고 생각한다. 세계 저작권 협약 가입 이전에 나온 해적판의 번역 질은 그리 좋지 않다. 21세기에 요즘 잘 쓰지도 않는 단어,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 맞지 않은 외래어를 보는 것이 거북하다. 그런데도 동서문화사는 회복저작물 이용권이라는 ‘편법’을 이용해서 기존의 번역본 일부를 무단 도용하거나 아예 중판으로 출간한다. 편집 교정을 거치지 않은 채 질 떨어지는 해적판 번역본을 내놓는다는 것은 독자를 기만하는 일이다.

 

 

 

 

2. 책을 번역한 ‘이경직’은 누굴까? 설마, 당신도 유령 번역자’인가?

 

 

 

 

 

 

《멋진 신세계, 연애대위법》 번역자인 이경직의 약력이 의심스럽다. 국제대학 영문과 교수’라고 되어 있는데, 혹시 경기도에 있는 ‘국제대학교’를 말하는 것일까? 이 학교는 1997년에 세워진 사립 전문대학이다. 2006년에 ‘국제대학’으로 개명했다. 그런데 이 학교에 ‘영문학과’는 개설되지 않았다. 이거, 경력 위조인가?

 

이경직 씨가 ‘문예지 소설 <추운 밤>으로 등단’했다고 한다. ‘문예지 소설’이라면서 소설이 등재된 문예지 이름은 없는 것일까?

 

 

 

 

 

 

이경직 씨가 지은 책은 <영원과 사랑의 시>, 번역본으로는 윌리엄 사로얀(William Saroyan)의 <인간 희극>이 있다. 이 정보 또한 확실하지 않다. 실제로 <영원과 사랑의 시>라는 제목의 책이 1981년 문학출판사에 나온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일본 작가의 글을 번역한 것이고, 번역자 이름은 ‘이서종’이다. 또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인간 희극> 번역본 중에 이경직 씨가 번역한 것은 없다.

 

 

 

 

[1] [동서문화사 번역본의 불편한 진실] 2016년 3월 2일

http://blog.aladin.co.kr/haesung/8284417

 

[돈 내놔라! 출판사야!] 2017년 6월 18일

http://blog.aladin.co.kr/haesung/9402985

 

 

[2] 네이버 지식백과, <회복저작물과 출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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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2-22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의 눈이네요..회복저작물 이용권은 처음들어보는데..우리 출판풍토도 이런적폐를 없애야 독자에게 외면받지 않을텐데,한심한 노릇입니다^^.

cyrus 2017-12-22 17:48   좋아요 0 | URL
적폐 출판사들 때문에 정식 계약을 맺고 정당한 절차로 책을 만든 출판사들이 손해를 입습니다. 독자들은 적폐 출판사들의 실체를 모른 채, 허술한 책을 사게 됩니다. 출판 업계 사람들도 동서문화사의 구린 행보를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기호 씨도 자신의 블로그에 동서문화사를 여러 번 깐 적이 있었습니다.

이리스 2017-12-22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서문화사 저격수다운 예리함!안그래도 멋진신세게계 읽는중인데, 좀 열받네요. 아무리 세상은 넓고 읽어야하는 책이 많다지만 이런 책들이 버젓이 스리슬쩍 성업중이라는게...

cyrus 2017-12-22 17:49   좋아요 0 | URL
저격수까지는 아닙니다.. ^^;; 동서문화사 책값이 비교적 저렴한 편인데, 사실 저렴하게 만든 책을 많이 팔려는 저렴한 마케팅입니다.

Falstaff 2019-08-17 1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국제대학˝은 1980년대까지 서대문 로타리에 있었던 ˝야간대학˝이었습니다. 당시 공부는 잘하지만 집이 가난한 학생들이 주로 덕수상고, 경기상고에 입학했는데 사무실이 서울시내에 있던 (그러니 유명 공업고등학교 졸업생들은 다니기 힘들었고요) 직장인들이 많이 다녔던 학교입니다.
머리 좋은, 그러나 가난한 학생들이 많이 다녀서 그 학교 졸업생들이 보통 도전적이고 투쟁적인 경향이 좀 있었습니다. 직장에서 일 하나는 똑부러지게 하지만. 지금은 은퇴한 고위 공무원 가운데 국제대학 출신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이젠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지요.) 국제대학 후신이 성북구 정릉동으로 언덕 꼭대기에 있는 예전 대일고등학교 자리로 옮긴 서경대학교입니다.
저도 더 이상 <연애 대위법>의 새로운 번역을 기다리지 못해 이 책을 구입했습니다. 저는 이 책이 일본어 중역판이 아닐까를 의심하고 있습니다만.

cyrus 2019-08-17 12:18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저자의 약력을 속이는 출판사의 행보 때문에 국제대학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곳이 아닐까 의심한 적이 있어요... ^^;;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 - 여성 예술가는 자신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프랜시스 보르젤로 지음, 주은정 옮김 / 아트북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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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제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거나 관심을 가지면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 한 것은 인류 역사에서 오래되지 않은 습관이다. 자화상은 그냥 화가 개인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 아니다. ‘화가로서의 나라는 고유명사를 그리는 것이다. 얼굴에는 한 사람의 삶의 발자취, 감정과 욕망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반성이며 성찰이다. 사실 자기 내면에 대한 성찰을 이야기하는 것은 미술의 역할이 아니라 철학의 역할이다. 그렇지만 자화상은 자기의 눈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며 세계를 바라보는 창구다. 자화상을 그리는 화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붓으로 대답한다.

 

누구나 와 타자의 외면 및 내면세계, 그리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붓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서양에서 여성이 미술의 세계에 동참한 역사가 생각보다 짧다. 미술은 남성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 미술가들은 눈부신 재능으로 명성을 떨치기도 하고, 연인이거나 경쟁 상대 격인 남성 미술가들의 그늘에 가려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기도 한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는 아시리아의 적장 홀로페르네스(Holofernes)의 목을 자르는 이스라엘의 여성 영웅 유디트(Judith)를 그리며 남성의 우월성에 반기를 드는 도발적인 그림을 남겼다. 아르테미시아는 남자 미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고 왕성한 활동을 했지만, 오랫동안 남성중심주의의 미술사에서는 잊혀 왔다. 프리다 칼로(Frida Kahlo)는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자신의 세계를 그려냄으로써 페미니즘 미술의 씨앗을 뿌렸다. 생전에 서른 번 넘은 수술을 받은 프리다는 다양한 고통의 표정을 간직한 자화상을 많이 남겼다.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여성 자화상속 여성의 이미지를 탐구한 책이다. 남성 우월적 시선에 대한 통시적 분석과 비판을 담은 이 책은 미술사의 조역이었던 여성을 공동 주역의 위치로 격상시킨다는 점에서 확실히 페미니즘적이다.

 

 

여성은 자신을 남성과 동등한 전문가라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남성은 그들을 미술가로서 뿐만 아니라 여성으로서 보았고 여성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뒤섞인,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태도로 그들을 대했다. (중략) 미술가란 무엇인가? 만약 그 답이 그저 미술을 실행하는 사람이라면 여성 미술가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록된 역사에 의해 미술가는 항상 남성으로 전제되며 여성 미술가는 예외적인 영재에 해당한다. [1]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은 남성중심주의 미술사 속에서 상실되고 매몰되어왔던 여성 이야기의 재발견이라는 커다란 페미니즘의 틀 안에서 출발한다. 페미니즘 미술 영역 중의 하나가 저평가받고 알려지지 않은 여성 미술가들의 이야기, 그녀들의 항변, 남성 못지않은 위대한 창조성 등을 재발견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여성 자화상은 14세기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유명한 여성에 대하여>[2]에 실린 삽화다. 이 삽화에 마르시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여성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화상을 그리는 모습이 있다. 여성 미술가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6세기 여성 미술가들은 자신의 미적 감각을 과시하고 입증할 수 있는 자기 묘사 방식을 선호했다. 17세기 여성 미술가의 자화상은 이전 세기 자화상보다 자신감이 넘치는 분위기가 있다. 아르테미시아는 자신의 모습을 회화로 의인화하는 소재로 선택, 자화상을 제작했다. 아르테미시아 이전에 남성 미술가들은 여성을 남성 미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조력자뮤즈(Muse)로 형상화했다. 아르테미시아는 고전적 · 남성적 여성 형상 방식을 거부하고 여성 미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부각했다.

 

 

 

 

 

 

 

18세기에 뛰어난 기량을 발휘한 여성 미술가들이 활동했다. 로살바 카리에라(Rosalba Carriera), 앙겔리카 카우프만(Angelika Kaufmann)[3], 엘리자베트 비제르브룅(Elisabeth Vigee-Lebrun) 등이 대표적인 전문 화가들이다. 비제르브룅은 루벤스(Rubens)의 초상화를 의도적으로 모방하여 자화상을 그렸다. 루벤스의 초상화 속 여성은 다분히 남성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그녀의 자세, 그리고 남성 감상자를 향해 요염하게 바라보는 듯한 그녀의 시선은 남성 감상자를 만족스럽게 하는 클리셰이다. 하지만 자화상 속 비제르브룅은 적극적인 자세를 유지하면서 남성 감상자를 바라본다. 그녀의 한 손에 들고 있는 붓과 팔레트는 비제르브룅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만약 남성 감상자가 자화상을 보면서 그림 속 여성의 미모가 아름답다고 말한다면 자화상을 제대로 보지 않은 무지한 감상이며 여성 미술가에게는 실례가 되는 발언이다. 루벤스의 여성은 코르셋(corset)을 착용한 상태다. 코르셋은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신체를 억압하는 의복이다. 비제르브룅은 코르셋이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녀는 코르셋이 만드는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불쾌하게 여겼고 항상 코르셋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 또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누드화라면 으레 20대의 늘씬한 모습만을 연상하는 남성들에게 질리언 멜링(Giliian Melling)나와 나의 아기(1992년 작)는 확실히 여성의 신체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자화상이다. 임신으로 불룩 튀어나온 배, 축 처진 가슴을 드러낸 그녀의 그림 앞에서 남성 관람객들은 일반 누드화를 대하는 감상을 전혀 할 수 없다. 이 그림에는 미술에 대한 경험, ‘여성의 정체성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이 그림에 남성이 즐겨 사용하는 아름다움이란 단어가 절대로 들어올 수 없다.

 

여성 자화상의 매력은 여성 미술가의 내면과 이미지로 형상화된 목소리를 읽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자화상 속 여성 미술가들은 남성 감상자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한다. 이 그림에 네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여성은 없어.” 여성 자화상의 매력은 남성 감상자의 모습을 똑바로 비추는 거울로 작용하기도 한다. 거울은 성찰의 은유적 대상이다. 거울은 분명 외모를 비추지만 우리는 거울 안에 비친 제 모습으로부터 내면을 찾으려고 한다. 남성 감상자는 거울이 된 여성 자화상을 바라보면서 내면에 들어앉아 있는 남성성의 문제점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반응을 통해 남성은 여성을 전시하고, 품평하고, 눈요기 대상으로 묘사한 남성 미술가의 그림을 비판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여성 자화상은 남성 감상자에게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여성의 눈으로 그림을 보는 것도 예술 이해의 기본이다.

 

 

 

 

 

[1] 서문, 34

[2] 보카치오의 유명한 여자들(임옥희 역, 나무와숲)이라는 제목의 번역본이 있다.

[3] 안젤리카 카우프만으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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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2-21 2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술평론지에 실릴만한 글 이네요. 칭찬과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어요^^.

cyrus 2017-12-22 11:43   좋아요 0 | URL
저는 미술을 아는 것을 즐기는 딜레탕트입니다. 사실 요즘 국내 화단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몰라요. 저한텐 미술평론을 쓸 수 있는 수준이 없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1 2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에도 말씀 드렸던 것 같은데 사이러스 님 글은 글을 완성하는데 꽤 시간이 걸리는 글입니다.
자료 찾고 인용하고 그러닌 게 사실 글쓰기의 팔 할은 소비되는 것 같거든요..
항상 정성스러운 글들이라 아껴 읽게 됩니다.

cyrus 2017-12-22 11:45   좋아요 0 | URL
아껴 읽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이런 글, 하루 공개하고 나면 잊혀질 건데요. 리뷰를 당장은 보지 않겠지만, 누군가가 책을 검색하다가 제 글을 보겠죠. 리뷰라는 게 그런 겁니다.. ㅎㅎㅎ 다들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알라딘 서재에 활동하는 분들 모두 나름 글 한 편을 정성스럽게 씁니다. ^^

sprenown 2017-12-21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술은 잘 모르는데 프리다 칼로 얘기가 나오니 트로츠키가 생각나네요ㅎㅎ

cyrus 2017-12-22 11:46   좋아요 0 | URL
네. 두 사람의 인연도 꽤 유명하죠. ^^

AgalmA 2017-12-21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궁금했는데 cyrus 님이 별 다섯 개 줄 정도면 신뢰 확보구만요 :)

cyrus 2017-12-22 11:48   좋아요 0 | URL
별 네 개, 다섯 개 수준의 책입니다. 화가의 자화상을 주제로 한 책은 있어도 여성 화가의 자화상과 그 그림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책은 없었어요. ^^

수이 2017-12-21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이거 계속 사고싶었는데 미루었는데 사야지!

cyrus 2017-12-22 11:50   좋아요 0 | URL
이 책의 ‘20세기 여성 미술가’를 소개한 내용이 이 책의 하이라이트입니다. 독창적인 그림들을 만나볼 수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