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이 전업 작가가 되려면 글을 쓸 수 있는 자기만의 방과 적어도 연간 500파운드의 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예술과 페미니즘의 관계에 대해 많은 시사를 담고 있다. 울프가 말한 ‘방’이란 예술가로서의 창조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다. 울프는 가부장제 사회가 강요하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에 근본적인 이의를 제기하여 경제적 자립과 독립적 공간의 확보로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길 바랐다.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민음사, 2006)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펭귄클래식코리아, 2015)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민음사, 2016)
그렇다면 여성이 화가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기본적으로 그림 그리는 작업실, 물감, 화구(畫具)가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준비 요건을 모두 갖추려면 돈이 많이 든다. 높은 임대료 때문에 개인 작업실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과 맞물려 여성 예술가들의 사정이 조금은 나아졌으리라 기대한다면 갈 길이 아득히 멀다. 여성 예술가들은 갖가지 오해와 편견을 받는다. 또 가사와 양육으로 지속적인 예술 활동이 불가능하다.
* 크리스티나 하베를리크, 이라 디아나 마초니 《여성예술가》 (해냄, 2003)
* 주디 시카고, 에드워드 루시-스미스 《여성과 미술》 (아트북스, 2006)
* 프랜시스 보르젤로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 (아트북스, 2017)
예나 지금이나 예술계에도 유리 천장(Glass Ceiling)이 있다. 오늘날에 널리 알려진 여성 예술가들은 외부의 유리 천장뿐만 아니라 내면의 유리 천장까지 뚫으면서 예술가로서의 신념과 내면의 힘을 스스로 길렀다. 하지만 현실의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야망이 넘쳤고, 예술가가 지녀야 할 잠재력이 충분히 있음에도 끝내 재능의 날개를 펼치지 못한 채 요절한 여성 예술가도 있다. 그림을 그리려고 파리로 건너온 러시아의 젊은 화가 마리 바슈키르체프(Marie Bashkirtseff)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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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슈키르체프는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다재다능한 러시아 귀족의 딸이었다. 열아홉 살의 바슈키르체프는 그나마 여학생 입학을 받아준 줄리앙 아카데미(Académie Julian)에 등록하기 위해 파리에 가기로 했다. 그녀의 파리 생활은 혈혈단신으로 시작했다. 그녀의 가족들은 돈을 들여가면서까지 파리에 정착하여 그림을 그리려는 바슈키르체프가 못마땅했다. 여학생이 내야 할 줄리앙 아카데미의 등록금은 남학생 등록금보다 두 배나 높았고, 또 해부학 강의를 들으려면 수강료를 내야만 했다. 이렇듯 19세기 여성이 마주해야 할 예술계의 진입 장벽은 너무나도 많았다. 전문 화가를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미술학교에 등록한 여학생의 수는 극히 적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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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바슈키르체프에게 미술을 가르쳐준 사람이 로자 보뇌르(Rosa Bonheur)이다. 보뇌르는 화가인 아버지로부터 그림을 배웠고, 동물을 소재로 한 그림으로 명성을 떨쳤다. 1865년에 보뇌르는 여성 미술가 최초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여성의 미술계 진입 상황이 썩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림 교육을 받는 여성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미세한 시대적 변화의 흐름을 감지한 바슈키르체프는 ‘여성 화가의 작업실’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1881년 그녀는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 화가들의 염원을 담은 『작업실 안에서』를 제작했다. 바슈키르체프의 이 그림 속에 미술을 공부하는 열여섯 명의 여학생들을 그렸다. 물론, 이 그림에 바슈키르체프 본인의 모습도 있다. 그림 속에 화가를 찾아보시라. 힌트는 바슈키르체프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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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안에서』는 여성 화가가 처한 열악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이 나오기 전까지 ‘화가의 작업실’은 남성 화가들의 연대가 이루어지는 ‘호모 소셜(Homo social)’의 장소로 묘사되었다. ‘화가의 작업실’을 주제로 한 쿠르베(Courbet)와 프레데릭 바지유(Frédéric Bazille)의 그림을 보라. 남성 화가의 개인 작업실은 넓고 쾌적하다. 작업실에는 화가의 작품뿐만 아니라 화가가 직접 사들인 동료 화가의 그림들도 걸려 있다. 여성보다 경제적 지위가 높고, 그림 그리는 재능을 가진 남성은 화가가 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 화가들은 남성의 경제적 지위에 의존해야만 미술을 배울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었다. 또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여성 화가들은 좁은 작업실에 모여서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쿠르베의 그림 중앙에 서 있는 누드모델은 ‘남성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Muse)’인 동시에 그림 내부 또는 그림 외부에 있는 남성 감상자들을 위한 성적 대상화가 된다. 그림 오른쪽에 부유해 보이는 여성 한 명이 있으나 그녀도 감상자일 뿐이다. 그녀는 남성 감상자 무리에 자연스럽게 동화된 상태다. 벌거벗은 누드모델과 화려한 옷을 입은 여성의 모습이 무척 대조된다. 경제 사정이 어려운 하층 여성(공장에 일하는 여성, 매춘부 등)들은 '투 잡(two job)'으로 누드모델 일을 했다. 쿠르베의 그림 속에 있는 두 여성은 19세기 프랑스 여성 인구의 극심한 빈부 격차를 보여주고 있다.
* 줄리 마네 《인상주의, 빛나는 색채의 나날들》 (다빈치, 2002)
* 메릴린 옐롬 《아내의 역사》 (책과함께, 2012)
바슈키르체프는 열세 살 때부터 스물여섯 살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일기를 썼다. 그녀는 일기를 통해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냈고, ‘여성’이라는 이름의 무거운 굴레에 속박되어 살아가면서 느낀 심정을 기록했다. 그녀 사후에 공개된 일기가 워낙 유명해지는 바람에 그녀는 ‘화가’보다는 ‘작가’로 더 알려지게 되었다. 메릴린 옐롬(Marilyn Yalom)은 《아내의 역사》(책과함께, 2012)에 바슈키르체프를 ‘작가’로 소개했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여성화가 베르트 모리소(Berthe Morisot)의 딸 줄리 마네(Julie Manet)도 바슈키르체프의 일기를 즐겨 읽었다. 줄리 마네는 자신의 일기에 바슈키르체프를 ‘호기심 많은 여성’, ‘마음이 유연하고 머리가 좋은 여성’, ‘상상력이 풍부한 여성’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그녀의 적극적인 사교성과 비범한 능력에 거부감을 느끼는 남성들이 있었다. 특히 ‘여성 혐오’로 유명한 에드가 드가(Edgar De Gas)는 바슈키르체프 같은 여자는 ‘번화가에서 공개적으로 엉덩이를 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드가 선생, 애호박으로 맞아봤음?(코 찡긋) 성격이 착했던 줄리 마네는 드가를 ‘친절한 어른’으로 생각했다(실제로 드가는 베르트 모리소와 그의 딸을 무척 잘 대해주었다). 하지만 내가 책에서 본 드가는…‥ 그냥 한 20미터 정도 떨어져서 보기엔 좋은 사람일 것 같다. 친구로 지내라면 조금 힘든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