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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란토 성 ㅣ 환상문학전집 2
호레이스 월폴 지음, 하태환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고딕(Gothic)은 중세에 세워진 뾰족한 첨탑에서 볼 수 있는 건축 양식이다. 지금도 이 건축물들은 세월의 때가 켜켜이 앉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런데 고딕이라는 단어는 ‘인상파’, ‘빅뱅(big bang)’처럼 처음부터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 · 로마 미술 문화에 심취한 학자들은 고딕을 ‘야만스러운 건축 양식’이라고 비난했다. 고전주의와 이성 중심의 계몽주의가 굳건하게 유지되는 시대 속에서 고딕은 ‘B급 문화’ 정도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중세 기사도 문학의 가치를 재발견한 낭만주의자들은 고딕 양식에 열광했다. 젊은 시절의 괴테(Goethe), 호레이스 월폴(Horace Walpole) 등이 고딕 건축물의 위엄에 감탄한 인물들이다.
월폴은 영국의 ‘고딕 덕후’였다. 그는 ‘스트로베리 힐(Strawberry Hill)’이라는 이름의 고딕풍 별장을 세웠고, 그곳에서 생활했다. 별장 안에는 월폴이 직접 수집한 골동품으로 가득했고, 자신과 미적 취향이 비슷한 친구들을 초대해 함께 골동품을 감상하기도 했다. 월폴이 살았던 18세기 영국에 고딕 양식뿐만 아니라 고딕 소설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고딕 소설’이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해서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고딕 소설의 정의를 아주 쉽게 말하면 ‘중세풍 공포소설 또는 환상소설’이다. 고딕 소설의 특징은 딱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 번째,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중세 시대의 고성이나 수도원은 고딕 소설에서 꼭 나오는 장소 배경이다. 두 번째, 고성과 수도원 안에서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초자연적 현상이 발생한다. 세 번째, 그 기이한 현상을 경험한 인물들은 이성을 상실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정신 줄을 놔서 미쳐 버린다…‥.
‘고딕 덕후’ 월폴은 자신의 취향을 반영한 소설 한 편을 발표했는데, 그 소설이 바로 《오트란토 성(Castle of Otranto, a Gothic Story)》이다. 이 작품 하나로 월폴은 ‘고딕 소설의 창시자’, ‘영국 공포문학의 시조’로 평가받는다. 오트란토 성은 이 소설의 무대인 중세의 고성이다. 이 성의 주인은 만프레드 대공이다. 가족관계로는 아내인 히폴리타와 슬하 1남 1녀의 자녀(장녀 마틸다, 차남 콘라드)를 두고 있다. 열다섯 살의 콘라드는 만프레드 대공의 상속인으로 비첸자 후작의 딸 이사벨라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콘라드가 거대한 투구에 깔려 사망한다. 마침 사고 장소에 있던 농부는 콘라드의 죽음이 오트란토 성의 전 영주인 알퐁소 르 봉의 저주와 관련이 있다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언급한다. 그러자 대공은 농부의 말에 노발대발하고, 정신 줄을 놓게 된다. 알퐁소 르 봉과 관련된 ‘어둠의 힘’에 두려워하던 대공은 개차반이 돼가고 있다. 아들의 죽음을 아내 탓으로 돌리고, 마틸다를 자신의 새 아내로 삼으려고 한다. 대공의 광기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대공의 심기를 건드린 농부다. 사실, 그는 테오도르라는 인물로 알퐁스 르 봉 가문의 피가 섞인 영주의 후예이다. 소설 중반은 만프레드 대공과 테오도르의 대결 구도 양상으로 흘러간다.
한때 전국을 웃긴 개그도 시간이 지나면 유치하게 보이듯이 큰 인기를 얻은 공포소설도 지금까지 쭉 읽히는 건 아니다. 즉 공포소설의 고전이라고 해서 무조건 재미있다고 말할 수 없다. 요즘 같이 영상의 시대에 만들어진 공포영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고딕소설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오트란토 성》 번역본의 뒤표지에 있는 출판사 책 소개 내용을 보라. ‘과장 홍보’를 경계해야 한다.
이 박진감 넘치는 짧은 소설은
오늘날에도 역사를 초월한 재미로 읽는 이를 사로잡을 것이다.
‘짧은 소설’은 맞는데, 서양 고전문학을 좋아하는 내가 봐도 ‘박진감 넘치는’ 건 아니다. 이야기를 진행하는 데 지나치게 질질 끄는 묘사 몇 군데 보인다. 작가가 고딕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고딕 분위기 연출을 위한 묘사에 너무 힘을 들었다. 역사를 초월한 재미…‥? 에이, 그건 좀 아니다. 《오트란토 성》이 주는 공포감이 현대의 독자들(특히 ‘공포’, ‘호러’ 마니아들)에겐 만족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이 소설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보이지 않는 ‘어둠의 힘’에 점점 제압당하는 인물(만프레드 대공)의 심리 상태가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독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말고…‥.)
만프레드 대공은 가부장의 힘을 내세워 전처와 친딸을 내팽개치고, 죽은 아들의 약혼녀를 아내로 삼기 위해 자기합리화에 가까운 변명을 한다. 대공 입장에서는 ‘어둠의 힘’은 아들의 목숨을 빼앗아 만프레드 가문의 대를 끊어버린 무시무시한 존재이다. 그리하여 대공은 가부장의 힘으로 ‘어둠의 힘’ 앞에 저항해보지만, 속수무책이다. 전처를 외면하고, 아들의 약혼녀와의 결혼을 강제로 실행하기 위해 고집을 부릴수록 그는 ‘광기에 사로잡혀 추잡한 욕망을 드러내는 독재자’로 변한다. 대공은 사악한 충동을 절제하지 못해 비이성적인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는 이성의 시대를 거스르는 인물형이다. 월폴은 만프레드 대공을 통해 이성을 강조하는 문명인 속에 숨겨진 삶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려고 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대공의 똥고집(?)은 인간이야말로 똑똑하고, 합리적인 존재라고 자신감 넘치는 계몽주의자들에게 향하는 반발심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책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또 하나의 문제점이 ‘번역 문장’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는 문장 몇 개 보인다. 새로 번역한다면 매끄럽지 않은 문장을 다듬었으면 좋겠다.
“should pass from the present family, whenever the real owner should be grown too large to inhabit it.”
“오트란토 성과 영주권은, 합법적 소유주가 너무 커져서 더 이상 거기서 살 수 없게 되는 날, 현재의 혈통으로부터 박탈될 것이다.” (26쪽)
“Do I dream?” cried Manfred, returning; “or are the devils themselves in
league against me? Speak, internal spectre! Or,if thou art my grandsire, why
dost thou too conspire against thy wretched descendant, who too dearly pays for- ”
“당신이 나의 조상이라면 왜 당신은 너무 비싼 값을 치르고 있는 당신의 불쌍한 후손에게 대적하려고...” (39쪽)
번역본의 역자는 프랑스 저작물을 번역한 불문학 전공자다. 어째서 불문학 전문 역자가 영문학의 고전 번역을 맡게 되었을까? 미스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