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킨슨의 법칙 - 왜? 직원 수가 늘어도 성과는 늘지 않을까
노스코트 파킨슨 지음, 김광웅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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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작년부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겠다는 마음을 다진 이후로는 공무원 채용 인원 모집과 채용 증가에 대한 소식과 관련된 뉴스를 하나도 지나치지 않은 채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며칠 전에 접한 정보에 의하면 올해 2012년도 지방공무원 신규 채용 인원은 총 10,330명으로 전년 대비 436명이 증가되었는데 지방공무원 직종별 채용규모면에서 살펴보자면 이번 채용 인원 증가는 사상 최대 파격적인 규모라고 한다. 이러한 정보에 맞춰 공무원 고시학원에서는 공개채용시험 일정에 맞게 빠르게 시험을 준비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내용으로 공시족이 되려는 젋은 청춘들을 유혹하고 있다. 한 달 전에 대구에서 알아주는 유명 공무원 고시 학원에 상담 차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을 상담원에게 듣은 적이 있었다. 올해에 지방공무원 신규 채용 인원이 증가했기 때문에 대구 본적으로 되어 있는 내가 대구 등의 지방에 위치한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방공무원 채용 인원 수가 늘어났다고 해도 공무원이 되는 길은 낙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 비정규직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2, 30대들은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고 최근에는 공무원 시험에 40대 이상 고령자들은 대거 몰리고 있는 추세다. 고용 불안이 가중되면서 안정적인 직장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20대부터 40대 이후까지 전 세대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업의 고용불안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직장을 그만두고서라도 공직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환경에 의해서 공무원 시험 경쟁률은 해마다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올해 국가직 9급 공무원 채용 경쟁률이 72.1대 1이다. 선발 인원이 대폭 늘어나면서 지난해 보다 경쟁률이 소폭 완환됐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공무원 신규 채용 인원 증가는 비단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공시족들에게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공무원 채용 인원의 수가 과다하게 되면 신규 인원을 받아들여야 하는 공무원 집단에서도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다. 자동차가 고속도로 위에 올라서면 질주본능에 빠지기 쉽다. 마찬가지로 정부가 됐든 기업이 됐든 조직은 끊임없이 커지려는 확장본능을 갖고 있다. 조직이론에서는 '관료제의 폐해'나 '대기업병'을 조직의 병리현상으로 다룬다. 조직이 거대화하고 전문화하면서 관료화와 분업화, 공식화, 집권화의 늪에 함몰하곤 한다는 것이다.

 

조직이 규모를 무한히 확대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쉬움을 설명할 때 단골로 나오는 것이 '파킨슨의 법칙'이다. 영국의 역사학자였던 시릴 노스코트 파킨슨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 해군에서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관료제의 본질을 꿰뚫는 이 법칙을 창안했는데 제1법칙과 제2법칙으로 이루어져 있다.

 

1914년 영국 해군의 병력은 15만 명이었고, 군함 수리창 관리와 사무원이 3천 200명이었다. 여기에 근로자가 5만 7천 명 가량 딸려 있었다. 그런데 14년 뒤인 1928년에는 해군 병력이 10만 명으로 감축되고 군함 역시 62척에서 20척으로 줄었음에도 수리창 관리와 사무원은 1천200명이 오히려 더 늘었다. 해군본부의 관리자 또한 2천 명에서 3천560여 명으로 증가하는 기현상을 보이더라는 것이다.

 

발표 당시엔 흥미로운 사회생태학적 가설 정도로 인식되던 이 법칙은 이후 큰 정부의 비효율성을 논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한다. 공직사회엔 출세기회 확대와 조직 보호를 위해 부하를 늘리려는 경향이 있어 일의 유무나 경중과 관계없이 공무원 수가 매년 증가한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밝혀낸 그의 통찰력은 지금 봐도 놀랍다.

 

국내에 번역된『파킨슨의 법칙』이 알라딘에서는 '경영' 분야의 도서로 분류되어 있지만 이러한 법칙이 꼭 경영에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공무원 신규 채용 현황을 비추어 본다면 역시나 조직으로 이루어진 공직 사회에서도 파킨슨의 법칙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행정학도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이 법칙을 꼭 알아야 할 중요한 내용이기도 하다.

 

 

정치인들과 납세자들은 공무원 수가 많아지는 만큼 업무량도 당연히 늘어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믿음에 의문을 품은 냉소주의자들은 공무원 수가 증가하면 반드시 빈둥거리는 사람이 생기거나 아니면 근무 시간이 줄어들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양측의 믿음과 의심은 모두 잘못된 전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공무원 수와 업무량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전체 공무원 수의 증가는 파킨슨의 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그 수는 업무량이 늘어나거나 줄어들거나, 혹은 업무가 아예 없어져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 노스코프 파킨슨 『파킨슨의 법칙』에서, 21세기북스, pp 25 -

 

 


파킨슨의 법칙은 '조직이란 주어진 역할이나 업무와는 상관없이 항상 사람을 증가시키려는 속성이 있다'는 내용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를 관료제에 적용시켜 본다면, 공무원의 수는 업무 양에 무관하게 증가하고 출세를 위해서는 부하가 많아야 하므로 숫자를 자꾸 늘린다. 이것을 파킨슨의 제1법칙 또는 부하배증의 법칙이라고 한다. 그리고 업무가 과중할 때 부하의 수를 늘리긴 원하지만 라이벌은 원하지 않는다거나 공무원은 서로 자기들을 위해 일거리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발생하는데 이것이 파킨슨의 제2법칙 또는 업무배증의 법칙이다. 부하가 배증되면 과거 혼자서 일하던 때와는 달리 지시, 보고, 승인, 감독 등의 파생적 업무가 창조되어 본질적 업무의 증가 없이 불필요한 업무량만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파킨슨의 법칙은 기업에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효율성 추구와 이윤 극대화를 최대목표로 삼는 기업일수록 작은 기업에서 큰 기업으로 성장하려는 본능을 갖고 있어 내실을 뒤로 미룬 채 규모 확대의 유혹에 빠져들기 쉽다. 성장지상주의에 몰입하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조직 중독 증세를 보이다가 급기야 '대기업병'에 걸리고 마는 것이다.

 

조직이 비대해짐에 따라 내부의 경고와 대처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조직혁신이라는 이름으로 거액의 돈을 들여 혁신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요란을 떨지만 2~3년이 지나면 혁신은 사라지고 별다른 내용의 변화없이 원점으로 돌아가고 경우가 적지 않다. 조직을 설계할 때는 오로지 기능과 업무량만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기존의 조직을 참조하거나 특정한 인물을 염두에 두고 그림을 그리는 경향이 많다. 그 결과 거듭되는 개편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체질은 그 나물에 그 밥마냥 별다른 변화를 기대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공무원 조직 사회에서는 아직 파킨슨이 지적한 문제점에 대한 조짐이 보이지 않고 있다. 예전 참여정부 시절 말기 때 중앙과 지방, 가릴 것 없이 공무원이 마구 늘어 100만 명에 육박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넌 여론으로부터 '공공기관 몸집 불리기'라는 지적을 받곤 했었는데 참여정부가 공무원 증원을 취직자리 늘리는 사회복지 개념에서 접근한 것이 오히려 조직 관료제의 문제점을 낳게 되는 현상이 발생했던 것이다. 하지만 파킨슨의 저주는 과거 참여 정부 시절에서만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는 아니다. 경기가 장기적으로 불황기를 겪게 되면 일자리 창출을 위한 정책들이 나오게 된다. 특히 안정적인 공무원 직종 같은 경우에는 정부가 신규 채용을 늘리면 늘릴수록 취업에 목마른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매력적인 기회로 보일 수 밖에 없다. 일자리 창출 목적으로 인한 공직 채용 증가를 추진하는 현 정부의 모습이 전 정부가 했던 것을 그대로 절차를 밟게 되는 우려가 있다.

 

한국사회는 그동안 성장에 있어서 숨가쁘게 달려왔다. 개인에겐 출세와 부가 공통의 지상과제처럼 여겨졌다. 근면 성실 이데올로기로 자신과 타인 그리고 조직을 다그친 결과 이만큼이나마 잘 살게 됐다는 긍정적 평가가 대세이지만 '더 크게, 더 빠르게'에 너무 경도돼왔지 않느냐는 지적에도 성찰의 눈길을 주어볼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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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3-03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저는 지금은 공무원 숫자를 좀 더 늘려야 한다고 보는 입장인데..꼭 일자리창출을 위한 차원에서 보다는, 복지국가로 가기 위해 상당수 늘려야 하지 않나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물론 불필요한 업무를 만들어내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요. 조직이 효율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프로세스의 문제이지, 숫자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cyrus 2012-03-03 01:01   좋아요 0 | URL
사실 공무원 인원 증원에 대해서 파킨슨의 법칙을 들어서 반대하는 입장이
있는 반면에 오히려 늘어야 한다는 찬성론도 있답니다. 맥거핀님 말씀처럼
조직의 비효율성은 그 조직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업무 프로세서에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죠. 어떻게 본다면 좋은 의도로 일자리를 늘리면
좋지만 많으면 많을수록 그에 대한 문제점도 같이 발생하게 되는 거 같습니다. ^^

아이리시스 2012-03-03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킨슨 법칙을 설명한 책도 있네요! 시루스님은 행정학과라서 별 걸 다 알아요^^

맥거핀님 말이 맞아요. 선진국 그러니까 OECD 국가 중에서 공무원 1인당 국민수가 가장 많은 나라가 한국이에요. 그래도 자꾸 공무원 줄이자고 나서는데, 이것저것 다 이해는 되지만 분명한 건 복지국가로 가기 위한 길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말씀대로 조직 내의 '번문욕례' 같은 문제가 행정비용을 더 상승시키는 거죠. 정작 책상놀음으로 일하는 데에는 공무원수가 분명 많지만 직접 발로 뛰어다니게 되면 분명히 모자란 숫자이기도 하거든요.

이 책 흥미로워요.^-^

cyrus 2012-03-03 14:51   좋아요 0 | URL
OECD 통계는 저도 모르고 있었던 내용이에요. 번문욕례,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

이 책에는 파킨슨의 법칙에 대한 사례가 많아요, 이 법칙을 강의시간에
가르쳤을 때 교수님들이 이런 책을 소개하면 학생들이 이해하는 데
훨씬 쉬웠을텐데 말이죠. 그리고 저처럼 이제 3학년이 행정학과 학생들 중에서
파킨슨의 법칙에 대한 내용을 제대로 설명하는 사람 별로 없어요.
공부를 제대로 안 하니까요 ^^;;
 
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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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571] 시계태엽 오렌지

 

 

 

 

 

 폭력과 범죄 행위가 많아지고 있는 우리 사회

 

요즘 뉴스를 보면 종종 엽기적인 사건들을 접하게 된다. 한 중년 여성이 슈퍼마켓 안에서 여중생에게 심한 욕설과 폭행을 가한다거나 지하철 안에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노인에게 반말로 막말을 하는 등 눈살 찌푸리게 하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 경제의 호불황과 사람들의 분노에는 어떠한 상관 관계가 있는 것일까?  경기가 좋지 않을수록 우리나라 사람들이 표출하는 분노의 형태가 도가 지나치고 있다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뿐만 아니라 살인이라는 단어도 뉴스나 언론에서 볼 수 있다. 어마어마한 빚을 감당하지 못해 자신의 친가족들을 살해하고 마는 가장에서부터 아무 죄도 없는 자식들을 무참히 폭행한 끝에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 마는 일까지. 다행히도 요즘은 그런 사건이 터지지 않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묻지마 살인', '연쇄 성 범죄 사건'으로 인해 전국이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 이런 끔찍한 사건들은 일본 또는 다른 나라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우리나라도 지극히 정상적인 사회라고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만약에 한 사회에 '도덕' '윤리'. 이런 가치들이 영원히 사라진다면 그 사회는 악의 무리들이 판을 치는 고담 도시보다 더 심한 생지옥처럼 변할 것이다. 생각하기도 싫은 저주받은 사회의 모습은 배트맨이 살고 있는 고담 도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앤서니 버지스의『시계태엽 오렌지』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시계태엽 오렌지』는 원작 소설보다 스탠리 큐브릭의 동명 영화가 더 유명하다. 소설 속 엽기적인 장면들을 영상으로 담아냄으로써 원작보다 더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는 평이 많았으며 개봉 당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강한 폭력 묘사와 약물복용, 강간장면 등을 이유로 영국에서는 수십년간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다. 이 유명한(?) 영화를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그 영상의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겠지만 원작이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는 엽기와 충격 역시 무시 못한다. 충격 정도는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윤리적인 만행만큼이나 읽는 독자들을 분노케 할 수 있다.

 

 

 

 폭력성 짙은 소설로만 볼 수 없는 『시계태엽 오렌지』

 

원작 소설에서도 과도한 폭력과 노골적인 성 묘사가 등장한다.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라나고 무비판적으로 그러한 사회폭력의 일부로서 작용하는 16세의 알렉스는 환락과 성(性), 물질적 욕망의 본성에 충실하게 폭행, 강도, 마약, 강간 등을 서슴지 않고 자행한다. 특히 소설 초반부에 알렉스와 그의 일행등인 소설가의 부인을 윤간하는 장면은 아마도 세계문학 사상 최악의 장면일 것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원칙에 반발하려는 악동 기질이 보이고 있는 알렉스의 모습은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홀든 콜필드를 연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알렉스에 비하면 홀든의 악동 기질은 새 발의 피다. 알렉스는 자신이 하는 행동의 결과에 대해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고 그저 매번 비행을 저지를 뿐이다. 급기야 살인을 저지르고 14년 형을 언도받고 교도소에 수감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교도소에 수감된 알렉스는 교도소 생활을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요량으로 국가에서 시험적으로 시도하는 새로운 교정 방법에 자원하게 된다. 루도비코 요법이라고 이름붙여진 이 실험은 일종의 조건 반사적인 세뇌훈련을 통해서 인간의 폭력성을 억제하는 강력한 거부반응들을 알렉스의 몸에 각인시켜 놓는다. 짧은 시간내에 범죄자들을 '개조'하여 교도소에서 방출시키고 남는 공간에 사상범들을 수용하려는 루도비코 프로젝트는 인간의 자유의사와는 무관한 국가 권력의 인간 의식영역에 대한 지배기제에 다름 아니다. 알렉스 개인의 자기반성과 교화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그저 마치 감겨진 시계태엽처럼 외부의 공권력에 의해 주입되어지고 프로그램 되어진 것일 뿐이다. 범죄적 속성을 통제할 수 있다는 국가권력의 극단적인 믿음이 만들어 낸 무시무시한 형벌인 것이다. 이처럼 강요된 선(善)은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앗아가버린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인생을 개척해가는 인간 본연의 모습은 파괴하게 된다.

 

제목인 '시계태엽 오렌지'(Clockwork Orange)는 '시계태엽'과 과일 '오렌지'를 합친 말로, '조직화된 사회에서 마치 기계의 일부분처럼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해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나타나는 폭력과 그것을 억압하고 통제하려는 국가의 인권침해, 인간의 본성마저도 바꾸려는 현대의학의 오만함과 정치행정의 부도덕함, 그것을 놓칠세라 이용하는 현대 언론의 선정주의를 풍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소설 제목이 말해주고 있듯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바라보는 버지스의 시선은 무척 냉소적이다.

 

 

 

 

 위험한, 너무나도 위험한 사회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개조'하거나 '무력화'해서 아예 범죄를 저지를 생각도 못하게 하는 루도비코 요법은 이제는 소설 속 엽기적인 치료 방법이 아니다. 성 범죄자들이 더 이상 재발 범죄 행위를 일어나기 않기 위해서 화학적 거세를 시행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에 대해서 지금도 논란이 남아 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당연한 일이지만, 격분하게 된다. 처참하게 희생당한 피해자를 생각하면 짐승 같은 범죄자에게 어떤 처벌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화학적 거세는 물론 만일 세상에 실제로 존재한다면 '루도비코'를 병째 투약하고 싶은 심정이 든다. 그러나 성폭행 범죄자에 대한 대중적 증오감에 편승한 법제화는 인권 침해 우려가 있다는 비판적인 입장도 있다.

 

버지스에게 있어서 루도비코 제도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해하고 억업하는 수단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소설 속 알렉스보다 더 악랄하고 지능적인 범죄 행위가 일어나고 이상 그에 대한 상응한 처벌 수단도 필요하다. 그야말로 루도비코의 역설이다.

 

우리 사회에 벌어지고 있는 극악무도한 범죄를 강력하게 처벌할 수 있는 규제를 도입하느냐 안 하느냐에 떠나서 이 소설을 읽으면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모든 인간은 제 아무리 강력한 외부 통제를 받더라도 완벽한 개조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수 차례 범죄 전력이 있는 사람들 중에는 오랜 복역 생활 후에 제2의 인생을 살아가기도 한다. 비록 전과자 이력이 사회 진출에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기는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반성하거나 다시 한 번 새로운 인생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범죄자에 대한 통제가 재발 범죄 행위를 막을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더라도 잊지 말아야하는 것은 그 사람을 완벽하게 '착한 사람'으로 변하게끔 만들 수 있다는 허황된 믿음은 금물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선과 악, 이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실체를 분명하게 구분하려고 한다. 특정 사람의 행동을 통해 우리는 저 행동에 대해서 '선하다, 악하다'라고 구분할 수 있다. 한 여자가 갑자기 옆에 지나가는 사람을 무심코 폭행을 가한다면 분명 그 여자는 잘못된 행동이며 악의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그 여자가 폭력을 가하기 전까지는 그 사람이 과연 선한지 악한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결국에는 행동에 의한 실천에 의해서 구분할 뿐이다.  공동체의 규범이나 법률적 규칙은 인간이 오랜 세월동안 실천을 통해 체득한 결과를 형상화한 것이다. 결국 선이라 함은 인간이 다수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사회통제 장치가 고도화된 현대에서는 개인들이 점차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유 공간이 좁아지게 된다면 자신의 행위에 대한 반성의 기회가 그만큼 박탈된다. 주체적인 반성의 능력을 잃어버린 사회는 윤리와 도덕에 무감각해지게 된다.

 

'처벌'과 '통제'가 옳다고 보는 대중의 인식은 범죄자 스스로 반성할 수 있는 기회만 박탈되는 것이 아니라 본의 아니게 그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범죄자가 된다. '막말녀', '폭행녀'로 한 번 낙인찍힌 가해자는 수많은 네티즌들로부터 인신공격성 비난을 받을 뿐더러 강제로 옷이 발가벗겨지는 것처럼 개인 신상 정보마저도 낱낱이 공개되고 만다. 자신들이 이러한 행동들인 비윤리적이면서도 악의적인 행동에 대한 마땅한 처벌이라고 인식하지만 한낱 익명성을 이용한 '언어'로 이루어진 폭력이다.  범죄자라고 해도 그 사람의 신상 정보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은 엄연히 인권 침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집단적 통제는 개인의 자유 의지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완전한 삶을 송두리째 박탈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잇단 비윤리적인 사건들이 발생하는 사회도 '위험한 사회'이지만 대중의 증오 감정에 휩쓸려 외부 통제만 가지고 범죄자의 인권은 묵살하거나 침해해도 좋다는 식의 사회 흐름 역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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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단련하다 - 인간의 현재 도쿄대 강의 1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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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발적인 교양 공부를 하지 못하는 대학생들

 

개학날을 코앞 둔 며칠 전에 오랜만에 안부 인사할 겸 대학 동기에게 전화를 했다. 그 친구와 10여 분 간 정도 전화를 하다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O.T) 이야기나 나왔다. 순간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다. '내일 모레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있는데 안 올래?'  그 친구가 학과 생활을 하지 않는 나와 깊은 친분이 있어서 예의상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어차피 참석하지 않을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정중하게 거절했다. 학과 생활 안 하는 아웃사이더가 갑자기 신입생들이 모이는 곳에 간다는 게 나나 학과 학생들 입장에서는 서로 어색하면서도 눈치 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와의 대화를 화제를 돌릴 겸 오리엔테이션에 대해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후배들이 신입생들 시간표 짜냐?"  친구는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신입생 시간표 짜는 거 간단하고 말했다. 신입생들이 수강해야 할 단대별 필수 교양 과목으로 시간표를 만들면 된다고 했다. 나는  '시간표 짤 때 교수님이나 조교 선생님들은 가끔 조언도 해주시냐? " 고 물어봤다. 그러자 그는 당연하다듯이 아니라고 말했다. 신입생 시간표는 선배들이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친구와 통화를 끝나고 난 뒤, 문득 다른 대학교 신입생들이 시간표를 만드는 방법이 궁금했다. 우리 학과처럼 타 대학교 학과도 직접 선배들이 손수 만들어 주는 것일까? 

 

학칙에 의하면 신입생이 수강신청을 하거나 시간표를 구성할 때는 학과 또는 학부 지도교수의 지도를 받은 뒤 정하는 걸 알고 있다. 물론 이미 학부생 경험이 많은 선배들이 도움을 주는 것도 좋은은 방법이다. 하지만 신입생들은 자신이 대학교에서 무엇을 공부하는지에 대해서 모른 채 대학교 캠퍼스에 온다. 왜냐하면 그것을 모른 채 선배들이 만들어 준 시간표대로 강의 수업을 듣기 때문이다. 특히 신입생 시간표는 오리엔테이션 전날 또는 당일에 만들어지게 되는데 아직 고등학생 티가 역력한 대학 신입생들이 대학교 강의에 대해서 제대로 알 리가 없다. 이렇다보니 학부생들은 신입생들을 위한 시간표 만드는 것을 선배라면 해야 할 일종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정작 지도교수의 도움을 통해 시간표를 구성한다는 자신이 다니고 있는 학교의 학칙을 모른 채 말이다. 사실 학칙대로라면 신입생들이 자신이 듣고 싶은 강의를 골라 시간표를 만들되, 지도교수 혹은 선배들이 조언을 통해 도움을 주면 좋겠지만 실제로 이런 방식을 하기가 어렵다. 교수들은 자신이 맡고 있는 연구나 학술과 관련된 이부 활동 때문에 바쁘고 학부생들은 새로 들어올 신입생들을 맞이하기 위해 여러가지 신경 쓰고 준비하다 보니 시간표 만드는 것을 소홀히 하게 된다.

 

수능시험을 치고 난 뒤, 고등학생들은 본격적으로 대학생이라고 할 수 있는 3월까지는 시간적으로 여유가 많다. 수능시험이 끝나고 나면 고등학교는 일정상 수업을 하지만 예전처럼 타이트하게 공부하는 그런 정상 수업이라고 볼 수 없다. 수업 시간에 영화를 본다거나 곧 대학생이 될 학생들을 위해 특별 활동식으로 수업이 진행되기도 한다. 어찌 보면 수능시험 끝난 고3 학생들을 위한 시간 때우기 수업시간인 것이다.

 

그래서 고3 학생들을 위해서 대학교에서 교양강좌를 한다거나 대학교 교양수업을 2학점 정도 신청하여 미리 수업을 듣어볼 수 있는 '고교-대학 연계 학점 인정 프로그램'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좋은 교육 프로그램이 있는지 모르는 학생들이 대다수이고 알면서도 자발적으로 하지 않는 학생들도 많다. 그리고 수시로 이미 대학교 전형에 합격한 학생들에게는 좋은 프로그램이지만 정시 모집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합격 발표를 기다려야한다거나 수능이 끝난 뒤에도 논술고사를 준비해야하는 학생들에게는 대학 연계 학점 인정 프로그램을 신청할 겨를도 없거니 쉴 여유마저도 없다.

 

 

 

 

 대학 신입생들의 고민

 

대학 신입생들은 너나 할것 없이 '후회없는 대학생활을 보내고 싶다' 고 말할 것이다.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정해 실천하려고 계획을 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막상 정하는 게 쉽지가 않다. 비록 계획을 정한다고 해도 작심삼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바랐던 것과는 달리 선배들과 술모임에서만큼은 완벽한 출석율을 자랑하지만 성적에서만큼은 '선동율 방어율'에 맞먹는 점수를 받게 된다.

 

그러나 대학생활이 실패하는 원인이 비단 대학생들의 능력과 의지에서만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제 대학교는 사회에 나가서 올바른 교양과 지식을 함양할 수 있는 학문의 장이 아니라 오직 취업을 목표로 하는 취업 준비생 양성소가 되었다. 이렇다보니 대학교에서 듣게 되는 강의들도 대부분 취직을 전제로 한 특정분야에 치우쳐 있게 되며 당연히 학생들은 교양과 전문지식을 아우르는 균형잡힌 능력이 부족하게 된다.

 

먼저 대학생활을 경험한 인생의 선배뿐만 아니라 대학 신입생 시절을 겪어 본 나 역시 공통적으로 느낀 점은 좋은 대학생활을 보내기 위해서는 대학교 1학년이 되어서 배우게 되는 기초과목을 잘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적성과 취미를 고려하지 못한 채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 친구 및 선배 따라 수업을 듣는다면 친구, 선배 간의 우정은 돈독해질 수 있지만 최악의 성적표를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친분 중심의 모임이 강한 학과 생활에만 치중한다면 성적 관리를 소홀히 할 수 밖에 없다. 학과 생활을 적절히 참여를 하고 있다면 친한 친구들과 같이 수업을 안 듣는다고 해서 우정에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신입생 시절은 윗 선배들의 강요를 어길 수 없는 학과 내 위치다. 최근에는 어느 모 학교에서는 단합을 강조하는 학과 생활을 거부하는 학생들은 교내장학금 수혜 혜택에 불리하게 하여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이런 폐해는 비단 특정 학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다니는 학교를 포함해서 은밀하게 카르텔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되는 신입생들은 학교 생활을 하게 되면 이런 여러가지 상황들이 맞물리게 되기 때문에 자신이 계획했던 대학생활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게 된다.

 

 

 

 

 올바른 지(知)의 체계가 필요하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도쿄대 학부 강의 모음집인『뇌를 단련하다』에서 대학 담장 너머는 참호 속을 뛰어다니며 24시간 내내 총을 쏴야 하는 최전선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대학 졸업생들이 21세기 최전선으로 내던져지려고 하는데도 그들의 머릿속은 여전히 19세기 이전의 것들로 가득 차 있고, 20세기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실정이라고 개탄한다.

 

매일 전사자가 나오는 최전선에서의 생존능력을 기르기 위해 대학이 제시하는 커리큘럼 이수를 넘어서 균형 잡힌 교양 습득을 제안한다. 균형 잡힌 교양은 우주 생명 의학 철학 종교 역사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인류사를 거시적인 눈으로 총괄할 때 얻어진다. 이는 학문을 사랑하는 철학자 정신으로 현대사회의 지적 토대가 되는 자연과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통해 가능해진다. 급변하는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현대문명을 이해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현대는 과학 위에 구축된 세계이고 과학에 의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 사회의 근간인 지(知)의 도달점인 자연과학 위에 구축돼 있고, 현실 작동이 이에 따라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치사상과 경제사상, 사회사상 등과 달리 과학지식은 전 세계에서 동일한 지식이 공유되고 있다.

 

그는 인간의 역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사나 경제사가 아니라 '지(知)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에 따르면 인간의 '지'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둘러싼 이 세계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결국 인간의 '지'란 인간 자신 및 자신을 둘러싼 타자 또는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이해라는 것이다. 자연과학에 대한 공부 역시 이런 '관계'에 대한 전반적이고도 정확한 이해를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일본 문과대 학생의 과학 교양은 중학생 수준에 머물러 있다. 운동, 가속도, 질량, 열, 파장, 소립자 등 세계 존재의 근본과 관련된 가장 기초적인 개념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일본 대학생들에 국한되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의 실정도 마찬가지다. 저자의 지적처럼 자기 입맛에 맞거나 자기 전공분야에만 한정해서 공부하다보면 소위 이과형 인간, 문과형 인간들로 굳어지게 된다는 게 더 큰 문제다.

 

 


 

 20살은 자신의 뇌에 책임져야 할 나이

 

인간이 가진 지식은 일천하다. 아이작 뉴턴은 자신의 업적을 위대하다고 찬양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나님의 눈에는 진리라는 큰 바다를 앞에 두고 바다 쪽으로는 눈길도 돌리지 못하고 주변에 굴러다니는 조약돌이나 조개껍데기 한두 개를 주웠다고 기뻐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행위에 불과하다."

 

 “여러분은 조금은 우쭐해서 나도 이제 한 인물이 되었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아직 어느 누구도 아닙니다. 노바디(Nobody)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대학이란 '노바디'(Nobody)를 '섬바디'(Somebody)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요컨대 그는 “빨간 신호등이라도 모두 함께 건너면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마흔 살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지만, 나는 스무 살이 넘으면 자기 뇌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자는 도쿄대의 젊은 학생들에게 스무 살 무렵의 뇌는 아직 성인의 뇌가 아니라 왕성하고도 유연하게 성장하고 있는 과정의 뇌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뇌가 말랑말랑할 때일수록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저자는 정신적으로 더욱 건강해지기 위해서 젊을 때 최대한 많은 사상적 외도를 하라고 권유한다. 다른 것과 달리 사상에서는 이꽃 저꽃을 옮아 다니는 나비처럼 변덕을 부리라는 제안이다. 대학생 때의 지적 탐험이 중요한 것은 뇌의 유연성과 관계가 깊다. 저자는 그냥 그렇다고 하지 않고, 자연과학 지식을 동원해 이를 치밀하게 설명한다. 경험에서 우러나는 다치바나의 대안들은 인상 깊다. 심지어 영양가 없는 강의는 과감히 제치라고 한다. 닳아서 너덜너덜해진 젊은 시절의 독서 노트는 그 자체로 독자들에게 던지는 지식의 자극제다. 대학입학을 공부지옥으로부터의 해방쯤으로 여기는 일본과 한국 대학 신입생들이 경청할 만한 내용이 가득하다.

 

다치바나의 조언대로라면 신입생들은 어떻게 공부해야 될까?  그는 일부러 휴학을 해서라도 특정 기간을 잡아 그 기간동안 제대로 된 교양 공부를 해야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사실 교양에 목마른 대학생들에게는 정말 매력적인 제안이다. 하지만 곧 취업 준비를 해야하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태어난 모든 대학생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현실을 간과할 수 없다. 대학교를 졸업해서 사회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취업을 위한 준비도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취업 준비를 위한 토익 공부를 한다너가 따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면 휴학을 할 수 있다만 다치바나처럼 자신을 위한 교양 공부를 하기 위해서 휴학을 한다고 하면 그러한 의도를 제대로 이해해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말 좋은 취지의 휴학임에도 불구하고 취업에 목표를 두지 않는 공부는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고 여긴다.

 

지금 대학교가 원하는 교육 목표를 봐서는 아무래도 학생들이 '교양'을 쌓기 위한 제대로 된 교육 프로그램이 나오기는 어려울 듯하다. 학교가 그런 교육 환경을 구축할 때까지 학생들이 마냥 기다릴 수가 없다. 결국 자기 스스로 해나가는 방법 밖에 없다.  진부한 말 같지만 공부와 독서가 유일한 대안이다. 단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식의 편식을 경계해야 한다. 학문 간의 경계 없이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함께 공부하고 이해하는 균형 잡힌 지의 체계를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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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2-02-29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윽- 그렇다면 마흔살이 넘은 저는 뇌와 얼굴 모두 책임져야하는 거로군요. 어쩜 좋으까잉.. ㅠㅠ

cyrus 2012-02-29 23:20   좋아요 0 | URL
저자의 말에 너무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요. ^^;;

2012-02-29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29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홍홍 2013-01-13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가다가 우연히 들렸는데, 이렇게 좋은 글을 읽게 됐어요. 운명론 신봉자까지는 아니지만, 삶의 방향을 정하는 데 있어서 만약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여기저기서 안내표지를 발견하게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이 참 반갑네요. 이미 신입생 시절은 지났지만 지금이라도.. 하는 마음에 책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갈 길이 먼 저에게 바짝 힘내라고 확 꼬집어 주는 것 같아요. 추천 누르고 갑니다~
 
다윈 지능 - 공감의 시대를 위한 다윈의 지혜
최재천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피카츄는 '진화'할 것인가, 말 것인가?

 

 

 

 

 

 

 

88년 또는 9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라면 '포켓몬 신드롬'을 일으켰던 일본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어느 생태계에도 속하지 않는 이 수수께끼 특수생명체들이 등장하는 일본의 만화는 전국 모든 어린이들을 열광케했다. '뽀로로'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어린이들이 가장 사랑했던 캐릭터가 피카츄가 아닐까 싶다. 귀엽고 앙증맞은 외모에다가 만화 주인공과 함께 등장했었기에 100여 종이 넘는 수많은 포켓몬스터들 중에서 단언 인기가 많았고 '포켓몬스터'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피카츄였다.

 

만화 '포켓몬스터'가 일본에 처음으로 소개되었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의 열풍 못지 않게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100여 개가 넘는 포켓몬 캐릭터(오리지널 포켓몬스터 1기 방영 당시 포켓몬의 수는 151종이었다. 지금도 포켓몬의 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포켓몬 빵에 포함되어 있는 스티커를 모았기 때문이다. 현재도 다양한 버전의 시리즈가 나오고 있는데 아마도 지금까지 나온 만화를 포함하면 포켓몬스터의 수는 수천여 종이 넘을 것이다)가 매 한 편의 에피소드마다 등장함으로써 흥미를 유발했을 뿐만 아니라 몬스터들 간의 대결 구도 그리고 그러한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좀 더 강한 몬스터로 업그레이트하여 '진화'를 해야한다는 구도가 만화를 시청하는 어린이들에게 '경쟁심'과 '소유욕'을 유발하도록 만드는 은근한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전국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일으킨 포켓몬스터 스티커 열풍은 단지 캐릭터 이미지의 대중적인 호감도만은 아니라 스티커를 모음으로써 자신도 만화 속 주인공 지우처럼 몬스터를 잡으려고 하는 소유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가상의 소유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스티커에 집착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아이들의 심리에는 '소유욕', '경쟁심'이라는 코드가 있는 만화의 스토리텔링의 영향이 컸다.  

 

 

 

포켓몬스터와 관련해서 사람들마다 재미있는 추억 하나가 있기 마련인데 그 중 하나가 포켓몬스터 빵 안에 들어 있는 스티커를 모으는 것이다. 151종의 포켓몬스터 스티커를 다 모으기 위해 하루에 수십번 문방구에 드나들며 빵을 구입한 사람이 많았다. 오로지 빵을 먹기 보다는 조그마한 스티커를 모으기 위해서다. 얼마나 스티커에 집착했냐면 어떤 아이들은 스티커만 가져간 채 한 입 베어 물지 못한 빵을 쓰레기통에 버렸을 정도였다. 이러한 포켓몬스터 캐릭터 빵과 스티커의 성공은 타 제빵회사의 마케팅에 그 영향을 미쳤다. 그 후로 캐릭터가 그려진 스티커가 들어있는 빵들이 등장했지만 포켓몬스터 스티커의 열풍만큼 미치지 못했다. 캐릭터 이미지가 들어간 제품이 망할 수 있었던 것은 포켓몬스터 빵의 인기를 받쳐 준 만화의 영향력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아이들이 포켓몬스터 스티커를 모은 이유는 단지 그 캐릭터 이미지가 호감이 가서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은 가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진짜 세상에서 실제로 구현하고 싶어하려는 마음이 있다. 실제로 되지 않더라도 그것과 관련되거나 유사한 대상을 통해서 욕구를 충족시키려 한다. 만화 에피소드에 빈번이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몬스터 사냥 그리고 자신이 잡은 몬스터를 키우고, 다른 몬스터 간의 대립 설정 등 만화 속에서만 가능하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한 실제 세계에 살고 있ㄴ는 어린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포켓몬스터 스티커를 모으는 것 밖에 없다. 결국 만화 속 이야기에 설정된 전개 구도, 즉 스토리텔링의 힘이 아이들을 조그만한 스티커에 열광하도록 만든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만화 '포켓몬스터'는 단순히 재미있는 만화를 넘어서 만화 속에 등장하는 몬스터를 갖고 싶은 소유욕을 불러일으킨다는 점, 그리고 진화를 거듭하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몬스터들은 어린이들에게 또 다른 힘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앞서서, 만화 포켓몬스터의 에피소드 속에는 어린이들의 감정을 자극할 정도로 '경쟁'과 '소유욕'이라는 코드를 은근슬쩍 심어 놓았다고 설명했는데 그러한 의도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바로 1기 초창기 때 '피카츄와 라이츄'의 대결구도가 등장했던 편이다.

 

지우와 피카츄는 전국에 위치한 체육관을 전전하면서 그 곳에서 체육관장들의 포켓몬들과 대결을 펼친다. 그리고 그런 대결에서 승리를 하면 일명 '포켓몬 배지'를 획들할 수 있다. 지우 일행은 여행을 하면서 포켓몬과의 대결에서 연전연승하는 라이츄를 훈련하고 있는 포켓몬 체육관장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여느 에피소드와 다름없이 패기가 넘쳤던 지우와 피카츄는 체육관장의 라이츄를 상대하게 되지만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한 채 지고 만다. 자신만만했던 대결에서 대패를 하게 되자 크게 좌절을 하게 된 지우는 한 때 포켓몬 체육관장으로 활동했던 동료들, 이슬이와 웅이 그리고 자신에게 크나큰 패배를 안겨준 체육관장로부터 똑같은 내용의 조언을 듣게 된다.  

 

"피카츄가 라이츄를 이기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카츄를 진화시킬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지우는 한동안 고민을 하게 된다. 여행길에서 동고동락하면서 정이 들었던 피카츄를 라이츄로 진화시킨다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피카츄가 라이츄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번개의 돌' 이 있어야 한다. 피카츄는 다른 포켓몬과 달리 아무리 능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도 라이츄로 진화할 수 없는 종이다. 단지 '번개의 돌'을 통해서만 라이츄로 진화할 수 있다. 하지만 라이츄로 진화하면 그토록 좋아했던 노란 피카츄의 모습을 이제는 볼 수 없으며 한 번 진화되면 원래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또 번개의 돌을 통해 진화할 수 있는 기회도 피카츄 그리고 그의 동료이자 트레이너인 지우의 입장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라이츄를 이기기 위해서는 피카츄는 좀 더 강한 라이츄로 진화시켜야 한다. 

 

과연 지우는 포켓몬 배지를 획득하기 위해서 피카츄를 진화시킬 것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피카츄를 위해서 진화의 작용을 포기하고 말 것인가?

 

 

 

 

 

 강하고 완벽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진화를 해야한다고?

 

'진화'와 관련해서 글의 초반부터 포켓몬스터 옛 에피소드까지 들먹이는 이유는 만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진화'라는 개념이 잘못 되었거니와 만화 시청을 통해 왜곡된 의미를 받아들이게 되는 문제점을 쉽게 압축해서 설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화'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적자생존', '약육강식'이다. '적자생존'은 간단히 말하자면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생물이나 집단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와 비슷한 것이 약한 생물이 강한 생물에게 잡아먹힌다는 뜻의 '약육강식'이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진화'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강하게 변화할 수 있는 과정이며 진화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종족 또는 생물들 앞에는 '미개'라는 단어를 붙여 '열성적 존재'로 바라보는 인식을 낳게 되었다.

 

결국 잘못된 대중들의 인식은 진화론을 주창한 다윈으로 엉뚱하게 불똥이 튀게 된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대중들은 그의 이론을 경쟁을 유도하며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강한 존재의 힘을 부각시켜 준다는,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기 마련이다. 잘못된 선입견의 전파는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다윈의 진화론을 인간사에 적용시킴으로써 '사회적 진보'를 내세웠고 그의 사촌인 프랜시스 골턴은 과학사에 있어서 최악의 학문이라고 평가받는 우생학을 만들 수 있었다. 다윈의 이론을 '적자생존'의 의미로 받아들인 골턴은 우수한 소질을 가진 인구의 증가가 많아야 하고 대신에 열악한 우성적 소질의 인구의 증가를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골턴의 우생학은 유태인 학실이라는 독일 나치스의 비인륜적 행동을 만드는 데 크게 일조했다.

 

진화론에 대한 대중의 왜곡된 이해는 비단 세계사적 착오의 사례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 비해 다윈의 사상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도 존재한다.『다윈 지능』을 쓴 최재천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나라는 제대로 된 다윈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후진국이다. 

 

최 교수는『다윈 지능』을 통해 학자와 대중들에 의해 입혀진 잘못된 옷에 가려진 다윈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잘못 알려진 다윈 관련 용어들도 바로잡을 권하고 있다. 사실 다윈은 단지 '경쟁의 원리'를 강조하기 위해서 진화론을 설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환경에 따라 생물의 모습들에서 드러나는 차이점에 대해서 호기심을 품었으며 그러한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진화의 원리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화'라는 단어의 사용에 대해서 나름 고심한 역력이 있었다. 다윈에게 있어서는 진화는 고등한 존재가 살아남는 데 유리한 경쟁 체제의 과정으로 보려고 하지 않았다.

 

 

다윈 자신은 원래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을 펼쳐 보인다'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evolvere'에서 파생되어 나온 'evolution'이란 용어의 사용을 꺼려했다. 그 대신 그는 '세대 간 돌연변이' 또는 '수정된 상속'이라는 표현을 주로 썼다. 『종의 기원』이 판을 거듭하며 다윈은 결국 너무나 굳어 버린 용어인 'evolution'을 받아들이지만, 그의 일기에는 이 세상의 온갖 생명체들을 논할 때 "나는 결코 어느 것이 하등하거나 고등하다고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 최채천 『다윈 지능』중에서, pp 68 -

 

 

  

 

다윈의 진화론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용어가 바로 '자연 선택론' 이다. 다윈은 부모가 가지고 있는 형질이 후대로 전해져 내려올 때 자연선택을 통해서 주위 환경에 보다 잘 적응하는 형질이 선택되어 살아남아 내려옴으로써 진화가 일어난다고 주장하였다. 생물 개체는 같은 종이라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변이가 나타내게 되는데, 이 변이 중에서 자신의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변이가 있어서 선택이 일어나서, 결국 후대로 전해져 내려간다는 것이다. 이 때 주위 환경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생물은 같은 종이나 다른 종의 개체와 경쟁을 해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생존경쟁이다. 즉 '자연선택론'은 강한 생물이 약한 생물보다 환경적응에 유리한 입장이라고 설파하고 있는 예정적이면서도 절대적인 관점의 이론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리뷰에서는 '자연선택론'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생물학 교과서에는 '자연선택설'로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최 교수는 이미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이 증명되었기에 가설의 의미가 담긴 '자연선택설' 대신에 '자연선택론'을 쓸 것을 제안한다.

 

 

다윈의 진화론을 아직도 '자연 선택설'이라고 부는 사람들이 있지만 앞으로는 그런 실례를 범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다윈의 자연 선택에 관한 설명은 더 이상 가설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다. 지난 150년 동안 혹독한 검증 과정을 거쳐 당당히 이론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반드시 '자연 선택론' 또는 '자연 선택의 원리'라고 부를 것을 주문한다.

 

 - 최채천 『다윈 지능』중에서, pp 31~32 -

 

 

 

이미 전세계적으로 다윈의 이론들이 검증되는 결과들이 많이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만 여전히 '자연선택설'로 쓰고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얼마나 다윈에 대해서 너무 무지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진화론에 관련해서 또 다른 왜곡의 논리는 자연 선택이 생물을 '완벽하게' 만들어 주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사실 자연선택설의 원리를 이해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생물은 오랜 세월동안 선택의 과정 끝에 결국 완벽한 존재로 가까워지는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 크게 반발했던 당시 영국의 종교계와 학계가 훗날 그의 이론에 대한 비난을 멈출 수 있었던 것은 진화론은 수긍했다라기보다는 오히려 다윈의 이론을 원숭이에서 '완벽한' 인간이 탄생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로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앞에서도 자연 선택론에 대해서 설명했듯이 인간 그리고 생물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유리한 번식의 과정을 선택하게 되는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환경'은 고정불변하지 않다. 그리고 제아무리 인간이 정보와 사회현상을 예측할 수 있는 원리와 특정 도구가 있다하더라도 환경의 변화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환경의 변화'는 생물을 완벽한 존재로 만들게끔하는 조건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환경의 변화에 인간과 생물은 정확하게 '맞춤식'으로 적응할 수도 없다.  

 

 

 

 

 

 '완벽함'을 위한 인위적인 변이의 위험성

 

앞서 이야기 하다 만 포켓몬스터 에피소드의 결론을 소개하자면 지우는 피카츄를 진화시키지 않은 채 그대로 '피카츄'의 모습으로 라이츄와 재대결하게 된다. 결국에는 만화 주인공 피카츄가 승리하고 만다. 그런데 첫 대결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피카츄가 자신보다 강한 라이츄와의 재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사실 피카츄와 싸웠던 라이츄는 단순히 포켓몬들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진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라이츄는 진화하기 이전 피카츄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공격 및 방어 기술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했으며 그러한 경험의 기회를 놓친 채 바로 라이츄로 진화해버렸던 것이다. 자신의 눈에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피카츄의 공격 기술에 라이츄는 이렇다 할 방어도 하지 못한 채 패배한다. 지우와 피카츄는 이러한 라이츄의 치명적인 약점을 간파하여 역으로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포켓몬 간의 대결에서 승리를 목적으로 '맞춤형'으로 진화해버린 라이츄의 사례는 '진화'에 대한 관점에서 본다면 눈 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피카츄에게 당한 라이츄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진화'는 완벽한 존재로 만들어질 수 있는 과정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강하고 우수한 품성을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진화 또는 변이는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우리나라에 키우고 있는 닭들이 조류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도 진화와 변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인식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양계장의 닭은 모두 달걀을 많이 낳기 위해서 '자연 선택'이 아닌 '인위적인 선택'을 통해 개량된 품종이다. 달걀을 많이 낳을 수 있는 우수한 품종의 닭만 키우다보니 달걀을 많이 낳지 못한 닭들 간의 경쟁이 사라지게 되고 종(種)의 유전적 다양성도 희박해진다. 이렇다보니 자연적인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개량 품종된 닭들은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견딜 수 있는 면역력조차 없으며 양계장 안에 바이러스가 감염되는 순간 모든 닭들이 죽게 된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인위적인 진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은 양계업에서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유전자의 구성을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질병의 위험을 미리 제거할 수 있다는 '맞춤 유전자'. '맞춤 아기' 도 치명적인 모순의 결함을 지니고 있다. 서울에 사는 모든 인구가 병에 걸리지 않는 정말 완벽한 유전자를 가졌다면 과연 이들중에 제 아무리 강력한 항생제에 살아남을 수 있는 무시무시한 바이러스 앞에서 살아남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지금 우리 사회는 '다윈 지능'이 필요해야 할 시점

 

진화는 철저하게 종족 번식을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자연현상의 원리에 대해서 우리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다윈은 벌과 개미와 같은 서로 돕고 사는 사회성 곤충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으며 그 후 다윈의 후계자들은 이기주의적 개체들이 구성되는 생태계에서도 이타주의적 개체들도 살아남는 이유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이타주의적 관점의 진화론을 소개하기에는 내용상 길어질 수 있고 자세한 내용은 책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기에 생략하겠다.

 

다만 자연 선택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타주의적 현상이 만들어 낸 진화의 산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쯤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현상은 진화는 번식 보존을 위한 경쟁 체제의 과정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 교수는 이제 우리 사회에는 '다윈 지능'(Darwinian inteligence)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다윈 지능'은 머리말에서만 언급될 뿐, 본문에서는 '다윈 지능'이 들어가는 문장을 찾아볼 수 없다. 문장 하나하나 마침표까지 읽어야 하는 독서 습관이 아니라서 놓칠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건 본문에서는 다윈의 진화론과 오늘날의 연구 성과들을 설명하고 있을뿐 '다윈 지능'의 정확한 정의 또는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 구체적인 설명조차 없다.

 

하지만 핵심 내용을 소개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 책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본문에서 소개된 다양한 진화 이론들을 통해서 독자는 옳고 그름을 따져가며 다윈의 진면목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다윈 지능이 어떤 방식으로 구현할 수 있을지 스스로 모색해봐야 한다.

 

책의 머리말에는 '다윈 지능'이 언급되기 전에 '집단 지능'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집단 지능'이란 협력하거나 경쟁을 통하여 얻게 되는 집단적 지적 능력을 말한다.  '집단 지능'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SNS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SNS을 통해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사회 현상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거나 타인의 의견에 동의 또는 비판을 한다. 결국에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소통'이라는 행위에 있기에 가능하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에게 소통을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행위 중의 하나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사회에서의 '소통'의 능력은 부재중이다. 권력면에서 우위가 있는 기득권층은 자신의 입장에 좀 더 유리한 방향으로 만들기 위해서 상대방과의 소통을 무시한다거나 아예 자신의 입장에 반하는 의견들을 암묵적으로 또는 공공연하게 차단하기도 한다. 사회 내에서 강하다고 하는 자들의 논리에만 집중하게 되는 사회는 또 다른 문제점을 양산해낸다. 무조건 '강하고 나쁜 자'들이 살아남아야 하는 인식 하에 경쟁을 유도하게끔 분위기로 변하게 된다. 특히나 신자유주의의 영향이 드세져만 갈수록 우리 사회에서 문제점과 폐단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친한 동료보다 내가 앞서야 하며 '조작', '은폐'도 거리낌없이 할 정도로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러한 비도덕적인 아노미는 사람들 간의 신뢰마저 무너뜨리게 되며 소통은커녕 서로 반목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우리 사회가 소통하기 위해서는 '공감'이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공감'이란 상대방의 의견과 마음에 동의한다는 사전적 의미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정말 다양한 의견과 생각이 공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알며 그것을 검증하면서 개선해나갈 수 있는 적극적인 토론 및 대화의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비슷한 형태의 획일적인 유전자만 있는 사회 또는 개체가 살아남을 수 없듯이 우리 사회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학문의 지식에만 내세울 줄 알고 다른 학문의 존재를 무시하려는 스페셜리스트보다는 모든 학문의 지식을 아울러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는 다양성을 지닌 제너럴리스트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최 교수가 항상 강조했던 화두, 바로 통섭(統攝)이다. 통섭은 서로 다른 지식과의 만남이다. 다양한 분야가 만나 오래된 궁금증의 해답을 찾아내기도 하고 새로운 인류의 미래를 예고하기도 한다. 전혀 다르다고 생각되는 다양성의 조호와 어울림이야말로 좀 더 발전되는 미래의 사회로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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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02-28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예전에 교회에서 가르치던 아이들과의 대화를 위해서 진화 계보도를 외웠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포켓몬이 재미있기도 하고요. 요즘 포켓몬은 왠지 짝퉁 냄새가 나서 과거만큼이지는 않지만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습니다. 저도 피카츄 진화하지마를 외쳤던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cyrus 2012-02-28 22:52   좋아요 0 | URL
ㅎㅎ 맞아요, 만화 내용이 재미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요즘에 나오는 시리즈는 보지 않지만 정말 초창기 시리즈가 무척 재미있게
봤어요. 그 때 동네 친구들과의 대화 주제에는 포켓몬이 빠질 수가 없었고요.
^^
 
르네 마그리트 시공아트 18
수지 개블릭 지음, 천수원 옮김 / 시공아트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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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치 나 이전에 그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생각한다.

 

 

- 르네 마그리트, 수지 개블릭『르네 마그리트』시공아트, pp 11 -

 

 

 

 

 

 

 

 내가 좋아하는 마그리트의 그림들

 

 

 

 

 

 

르네 마그리트  「모험 정신」 1960년

 

 

 

내가 제일 좋아하는 특별한 화가를 꼽으라면 르네 마그리트다. 블로그 메인사진이 마그리트의 그림이다. 그의 그림들은 아름답지도 않다. 그런데 블로그 메인사진으로 올릴 정도로 마그리트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지 그의 그림은 '어렵기' 때문이다.

 

 

 

 

 

르네 마그리트 「교장」 1955년

 

 

 

처음 알라딘 블로그 시작할 때 메인사진이 마그리트의「교장」이었다.  마그리트의 그림이라고 하면 여러가지 이미지들을 떠올릴 수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중산모를 쓴 남자의 뒷모습이다. 마그리트는 중산모를 쓴 남자의 뒷모습을 주제로 여러가지 작품들은 남겼는데「교장」과 「모험 정신」이 그러한 것들이다. 그림 속 중산모를 쓴 남자는 뒤돌아선 상태이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자신의 시선이 향하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황무지다. 그의 머리 위에는 하현달이 떠올려져 있다.

 

이 그림을 블로그 메인사진을 올리게 된 이유는 특별히 마그리트를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블로그라는 것을 처음으로 시작한 때가 2010년이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블로그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닉네임 설정 못지 않게 블로그 메인사진을 어떤 것을 쓸까 나름 고민을 많이 했었다. 결국 선택한 것이 마그리트의 그림이었는데 특별히 그의 그림을 좋아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마그리트의 '중산모 사나이'가 온라인 공간의 익명성과 부합된다고 생각해서 정했다. 온라인 공간은 하루에 수십명 또는 많게는 수백명 사람들과 동시에 접속, 교류할 수 있다. 하지만 오프라인과는 다르게 서로 얼굴을 모른 채 만난다. 세이클럽, 트위터, 페이스북 등 멀리 떨어져 있어도 수많은 사람들과 손쉽게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의 수단이 있지만 우리는 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음에도 그 행위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사람들마다 추구하는 성향이 각기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지 그리고 실명, 거주지 등 자신과 관련된 모든 정보들을 남들에게 드러나지 않으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고 과정(?) 도출 끝에 마그리트의 그림을 메인사진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전까지만해도 나는 마그리트를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마그리트가 어떠한 의도로 저런 그림을 그렸으며 심지어 블로그 메인사진에 있는 그림의 제목조차 모르고 있었다. 알라딘 서재이웃의 덕분에 그림의 제목을 알게 되었지만 왜 뒤돌아 선 중절모 사나이가 그려진 그림의 제목이 왜 하필 '교장' 이며 또는 '모험 정신'이라고 했는지 무척 궁금했다. (현재 블로그 메인사진을 「모험 정신」으로 변경, 설정한 이유는 단지 '모험 정신'이라는 제목에 혹해서 분위기 전환할 겸 바꾼 것이다. 메인사진을 변경하지 않은 채 오랫동안 유지하면 지루하기 쉽상이다. 기분에 따라 가끔씩 바꿔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메인 사진이 언제 바뀔지 모른다)

 

 

 

 

 

 

르네 마그리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1929년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에 대해서 너무 무기했기에 최근에 마그리트의 미술세계를 알 수 있는 수지 개블릭의『르네 마그리트』를 구입해서 읽게 되었다. 물론 마그리트의 미술을 이해하고 싶은 목적도 있었지만 사실은 이 책을 읽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마그리트의 또 다른 그림「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 대해서 분석한 미셸 푸코『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때문이다. 이 책이 작년에 나왔는데 나오자마자 바로 주문했다. 그리고는 읽지 않았다. 아니, '읽을 수가 없었다'라고 하는 표현이 적절하다. 마그리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자의 어리석은 행동이 푸코의 이 얇은 책을 가볍게 본 것이다.

 

사실 수지 개블릭의 책도 쉽지가 않다. 이 책은 마그리트의 미술 세계를 그가 표현했던 특정한 오브제들을 주제별로 분류해서 소개하고 있는데 특히 내가 제일 어려워한 내용이 바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장(제8장 '단어의 사용')이었다. 사실 그의 그림이 어려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는 붓을 쥐고 있는 '화가'이면서도 동시에 생각하는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철학자'가 되고 싶었던 화가

 

마그리트의 그림은 사회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뛰어난 상상이나 환상 등 인간의 무의식이 내포하고 있는 상상력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기발한 발상, 관습적 사고의 거부, 신비하고 환상적인 분위기, 시적인 조형성 등 고정관념을 깨는 소재와 구조로 작품을 제작하였다.

 

하지만 이런 개성 강한 화풍이 오히려 마그리트의 미술에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작용이 되기도 한다. 혹자들은 마그리트를 '초현실주의자'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생각하는데 맞는 사실이다. 당대 초현실주의자들이 마그리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는 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100% 초현실주의자라고 말할 수 없다. '초현실주의'에 마그리트의 미술을 포함할 수 있지만 반대로 마그리트를 '초현실주의'에 포함할 수 없는, 참으로 기묘한 관계다.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초창기 시절동안 마그리트는 그 당시 앙드레 브로통을 중심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었던 초현실주의자들과 교류를 맺은 적이 있다. 그러나 마그리트와 초현실주의자들 간의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마그리트가 추구하는 미적 경향과 달랐으며 특히 초현실주의자들을 이끌고 있었던 앙드레 브로통과의 불화는 그가 초현실주의와 결별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마그리트와 초현실주의자들. 이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 즉 이성의 지배를 벗어난 비합리적인 세계를 지향하여 '보여주기'와 '정형화된 아름다움' 등과 같은 기존의 미적 가치에 대한 반발심은 같았지만 그것을 토대로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이 달랐을 뿐이었다.  

 

 

 

 

 

 

 

르네 마그리트 「헤겔의 휴일」 1958년

 

 

 

초현실주의가 꿈과 무의식의 세계에 보다 비중을 두었던 것에 비해 마그리트의 작품은 환상적인 분위기가 나면서도 철저한 계산으로 만들어진 논리적이며 철학적인 근거를 가진다. 실제로 철학에 조예가 깊었고, 화가라는 이름 대신 '생각하는 사람'으로 불리길 원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단지 '보여주기' 식의 이미지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철학자처럼 끊임없이 존재와 세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그림을 통해 시각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마그리트의 작품은 단순히 보는 그림이 아니라 생각하는 그림, 상식을 뒤엎는 창의적인 사고를 자극하며 우리가 속해있는 세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하는 철학적인 그림인 것이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낯설게 하기의 즐거움

 

 

 

 

 

르네 마그리트 「사나워질 듯한 날씨」 1928년

 

 

 

마그리트는 사과, 토르소, 튜바, 담배 파이프 등 우리에게 친숙한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모순되거나 대립하는 요소들을 같은 화폭에 결합하거나, 어떤 오브제를 전혀 엉뚱한 환경에 위치시켜 시각적 충격과 신비감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이러한 기법을 '데페이즈망'(Depaysement)이라고 한다.

 

여성의 토르소는 그걸 제작한 조각가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용도가 있고, 튜바는 소리를 내기 위한 용도의 악기다. 그리고 의자는 우리가 앉기 위한 도구다. 우리가 보고, 사용하고 있는 모든 사물들에게는 고유의 용도가 있으며 그러한 용도에 의해 우리는 그 사물에게 정형화된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마그리트의 그림에서는 우리가 부여한 사물의 용도 및 의미는 불필요하다.  마그리트는 그러한 익숙한 감각에서 결별할 것은 주장하며 자신의 생각을 '철학 논문'으로 쓰는 대신에 그림으로 표현했다. 마그리트에게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사물의 의미들은 고정관념 또는 선입견에 불과한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 「피레네의 성」 1959년

 

 

 

하나하나의 사물은 극히 보통의 물체라도, 그것들이 일상적인 위치를 떠나서 만났을 때 사람들에게는 낯설면서도 강렬한 충동을 느낄 수 있다. 「피레네의 성」은 현실 세계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현상이다. 하늘 위에 있는 모든 것은 중력의 작용을 거스를 수 없다. 커다란 돌덩어리는 바다로 추락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여기서 마그리트는 중력의 작용을 의도적으로 배제한다. 이 그림을 보면서 '하늘의 돌덩어리가 바다 아래로 추락하지 않는 거지?  원래 중력에 의해서 떨어져야하잖아.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림이 어딨어?' 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과학자 또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선입견이 강한 사림일 것이다. '중력의 원칙'을 모르면 학창 시절에 공부를 소홀히 했다고 생각할 수 있어도 마그리트의 그림을 볼 땐 중력의 원칙을 몰라도 된다. 오히려 이 그림을 보면서 낯설었다거나 신기하게 느껴졌다면 마그리트의 그림을 이해했다고 보면 된다. 그것이 마그리트가 진정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원하는 '그림을 보는 방식'이다.

 

마그리트는 '생각하는 자'답게 익숙한 대상의 의미를 배제시키면서도 지금까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을 창조하여 낯설음과 혼란의 미학을 만들고자 했다. 마그리트의 그림에는 어떤 사물을 원래 있던 환경에서 떼어내 엉뚱한 곳에 갖다놓는 '고립’, 독수리를 돌의 재질과 같이 변형시키는 식으로 사물이 가진 성질 가운데 하나를 바꾸는 '변경', 성채와 나무 밑동을 결합하는 식의 '사물의 잡종화', 작은 사물을 엄청난 크기로 확대하는 식의 '크기의 변화', 평소에는 만날 수 없는 두 사물을 나란히 붙여놓는 '이상한 만남', 두 사물을 하나의 이미지로 응축하는 '이미지의 중첩',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사물이 한 그림 안에 존재하는 '패러독스' 등의 방법으로 다양하게 등장한다.

 

 

 

 

 

 마그리트를 좋아하세요

 


 

 

 

 

 

자신이 제작한 「야만인」옆에 포즈를 취하고 있는 마그리트 (1938년에 촬영,

 

수지 개블릭『르네 마그리트』시공아트, pp 56) 

 

  

 

현대미술 특히 '초현실주의'라고 하면 그림들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맞다. 어려운 건 사실이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이상한 형체들이 난무하는 그림들을 보면 이런 그림을 그린 화가들의 머릿속이 궁금하게 된다. 마그리트 역시 그렇다. 『르네 마그리트』를 쓴 저자 수지 개블릭은 마그리트가 생전에 살아있을 당시 8개월동안 함께 지냈다. 그러한 경험이 있었기에 마그리트의 미술 세계를 상세하면서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 한 권만 가지고 마그리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마그리트의 미술은 익숙한 사고방식을 배제해야하며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물음을 요구한다. 특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의 해석은 철학 배경 지식 없다면 그것을 이해하는 데 어려우며 많은 시간이 할애된다. 푸코와 같은 철학자들이 유독 마그리트의 그림을 좋아하고 분석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을 어렵다고 해서 좌절하지 말 것. 우리는 어떤 화가의 그림을 보면 그 그림 속에 그려진 대상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해석함으로써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의도를 알게 된다. 그러나 마그리트의 그림은 예외다. 중산모를 쓴 남자의 그림이 왜 하필 제목이「교장」인지, 하늘에 둥둥 떠 있는 바위의 성이 도대체 무엇을 설명하려고 하는지 머리 아프게 생각하지 마라. 마그리트는 그림을 보는 관객에게 생각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러한 요구에 대해 머리 아프고 어렵다고 생각하면 회피하면 된다. 그것은 선택의 몫이다. 마그리트의 그림 앞에서 오랫동안 생각해야 하는 감상법은 철학자들에게 맡겨두자. 그 대신에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낯설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느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 1954년

 

 

 

 

 

 

우리가 믿어 왔던 상식이나 철학 등을 뒤흔들어 놓는 일대 변혁을 가져다준 '마그리트 미학'을 최근 기업들이 창의력 개발에 이용하려는 사례들이 늘고 있다. 또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디자인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는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만큼 마그리트의 그림은 한 번 보고 나서도 머릿속에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화가들 대부분은 일반 사람들과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며 문제가 있을 정도로 성격적 결함이 있기 마련이다. 마그리트도 그러한 예술가적 천운을 피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자살은 마그리트 평생 고통스러운 트라우마로 자리잡았다. 그러한 불행의 원인은 그를 우울증에 고통스러워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림을 통해서 그러한 마음의 고통을 벗어나고자 했다. 비관주의자 쇼펜하우어가 삶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철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뜻이 마그리트는 그림을 그리되 거기에 철학을 덧붙였다.

 

그는 여느 화가들과 다르게 대중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꺼렸으며 자신의 예술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튀는' 행동을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한 마그리트의 익명성 덕분에 중산모를 쓴 남자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르네 마그리트 「심금」 1960년

 

 

 

그러나 마그리트는 쇼펜하우어처럼 비관주의자이요 고독을 심취한 외톨이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유머를 구사할 줄 아는 장난끼 넘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을 잘못 이해했더라도 너그러이, 쿨하게 받아들일 줄 알았다. 자신의 그림을 해석했다는 사람들에게는 마그리트는 항상 '당신이 저보다 더 운이 좋으십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겸손한 척 하면서도 자신의 그림을 해석하려는 선입견으로만 바라보는 자들을 은근히 조롱하는 마그리트다운 유머다.

 

마그리트의 그림들은 유쾌한 수수께끼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공존이 불가능한 두 영역의 병치적 발상은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심금」속 유리잔 위에 담겨진 흰 구름 같이 의외로 신선하면서도 평화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마그리트가 사람들에게 전달해주고 싶은 유쾌한 장난이면서도 낯설게 하기의 즐거움이다. 그래서 그의 어려운 그림을 좋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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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2-27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피레네의 성>을 좋아한답니다. 거대한 돌섬이 떠있는 광경은,
이상하게 가슴을 뛰게 하거든요... 아마 제 동경이겠지요.

오랜만에 시루스님의 메인 타이틀 그림을 다시 보는군요. 첨에 봤을 때
저 매끈한 뒷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그리고 달도. 저는 초생달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제게 <교장>이라는 그림의 제목을 붙이라 한다면, 초월이라 붙이겠어요!

저는 온라인 세상, 오프라인 세상을 선긋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그렇지 않아요. 인연이 된다면 충분히 온라인 세상의 사람들도 오프라인에서 교류하고 지낼 생각이 있답니다. 또한 온라인 세상의 사람에 대해 환상을 품는 경향이 상당한데, 그것은 깨버려야할 과업이라는 생각도 있구요... ㅋㅋ

cyrus 2012-02-27 20:32   좋아요 0 | URL
저도 제일 좋아해요. 사실 글에서 소개한 그림 말고도 정말 좋은 그림
많아요. 진짜 그의 그림이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아서,, 그래서
좋아할 수 밖에 없는거 같아요.

ㅎㅎ 초월이라는 제목이 잘 어울리는데요. 단순히 달이라는 의미도 있고
나의 존재에 대해서 초월하겠다는(?) 의미도 있는건가요? ^^

온라인과 오프라인 세상을 구분하지 않는 마고님의 생각이
마그리트의 생각가 유사한데요, 마그리트도 틀에 박힌 이분법적 사고를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

차트랑 2012-02-27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들어서기만 하면 정신을 못차리게하는 마그리트...
초현실은 거의 독화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ㅠ.ㅠ
진중권의 미학오디세이를 읽고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면에 철학을 깔아 놓고는
그 구멍으로 기어들어오거나 말거나...
뭐 그런 도발 정신의 화신 ㅠ.ㅠ
그러나 사고의 틀을 완전하게 벗어나게 하는 자유로움을
그야말로 선물하는 사람 마그리트...
전 여전히 머리가 아프죠 ㅠ.ㅠ
그러나 글에 추천을 하지 않을 수는 없군요^^

cyrus 2012-02-27 20:34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에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덕분에 마그리트라는 화가를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도 여러 번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가
어려웠어요. 제가 읽은 마그리트 개론서만 해도 두 세번 정도 읽었을
정도니까요. ^^;;

꽃도둑 2012-02-27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일할 때 아예 책을 사버렸잖아요...
기억나세요? 아바타에 대해 물었더니 마그리트 그림이라고 해서...
검색을 하다보니 아,,특이한 거예요. 마침 얼마 있다가 세일을 하길래 그림책을 사버렸잖아요..암요, 좋아합니다...^^

cyrus 2012-02-27 20:34   좋아요 0 | URL
혹시 세일할 때 산 책이 마그리트 그림들 모아놓은 책 맞죠?
저도 구입했어요, 세일하고 있었을때요 ^^

꼬마요정 2012-02-27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판다님이 마그리트 그림이랑 사진이랑 자주 올려주셨어요.
그 때 보면서 친숙해졌는데... 오늘 여기서 마그리트를 만나네요~^^
옛날 생각나요...

cyrus 2012-02-27 20:36   좋아요 0 | URL
제 글이 요정님에게 알라딘의 추억을 불러일으켜줬네요.
기회가 된다면 마그리트 그림에 소개하는 글을 써봐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