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기 선생 1951~2024,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직접 불렀다. 김민기 선생이 직접 부른 노래로는 '상록수'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일인이다. 가을 편지는 최양숙 선생의 손을 들어드린다. 김민기 선생님, 죄소송~ . 김민기 선생은 언(言)과 행(行)의 궤적이 일치했던 一人이다. ]]] 



작았던 괴물이 자신의 작품을 등에 업고 덩치가 커졌다. 그러자 권력이 생겼다. 권력이 생기자 함부로 행동하고 죄책감없이 더 나쁜 짖을 저질렀다. 그 권력 앞에서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런 괴물의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고 용서해서도 안된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작품이 살아있는 한, 누군가는 그를 저주할 것이다. 이것은 괴물에게 주는 또다른 벌이다. 


노털상을 발표하는 날이 되면 카메라를 든 대한민국 기자들은 파카를 입고 밤새 괴물의 집 앞에서 장사진을 쳤다. 행여나 한림원이 그의 이름을 불러줄까 기대를 하면서. 매년 그랬다. 물론 매년 기자들은 허탕을 쳤다. 

다행히, 최영미 선생의 시에 등장하는 그 괴물이 노털상을 받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 최영미 선생이 이 세상을 떠나 살아야하는 진짜 더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그런 참극이 발생했더라면, 고상하고 우아한 나의 입술로 더러운 욕설을 터트려 내 입을 내 스스로 더럽혔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오로지 한림원의 탁월한 선구안 덕분이 아닐까 추억해본다. 이참에 스웨덴의 한림원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최영미 선생의 시는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로 끝을 맺는다. 시인의 고뇌와 무기력을 담은 시문이다. 그 괴물은 어떻게 되었을까? 잡았을까?  잡지 못했을까? 잡지 못했다. 아니 잡지 않았다. 쉽게 말해 그냥 놔준셈이다. 시인 최영미의 '괴물'은 영화 속의 '괴물'이 한강을 유영하듯 큰 어려움없이 사회를 휘저으며 유영했다. 잠시 숨죽이고 있다가는 다시 언제 그런 일이 있었지? 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우리 사회는 왜 그 괴물을 잡지 않았을까.....영화 속의 '괴물'과 '물괴'는 잘도 잡던데, 정작 우리 사회 현실 속의 괴물은 어찌 잡지 못한 것일까. 영화 속에서 백날 괴물을 잡으면 뭣하나!! 현실에서는 괴물이 활개를 치고있는데!!



일반적으로 카르텔은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권력에 상처를 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권력과 계급 의식 그리고 우월 의식에 상처를 내는 일은 자신들의 손실과 등가물이다. 결과가 가져올 손익 계산서를 바라보면서 방관과 침묵으로 일관한다. 언(言)과 행(行)의 궤적이 불일치하는 이유이다. 



괴물을 잡지 않으면 우리 사회에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될까. 다들 뻔히 잘 알고 있는 결과를 발생시킨다. 괴물이 새끼를 낳고 또 새끼를 낳아 사회를 전보다 더 더럽히게 되어있다. 시인 최영미 선생처럼 이 더러운 세상을 떠나고 싶어지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게 된다.



시인 최영미 선생이 뜻을 결단하기에 이르른 것에는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괴물'을 발표하기 전까지 곪고 곪았다는 뜻이다. 최영미선생은 10년 전에 썼어아할 시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건 최영미 시인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다른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20년 전에 썼어야할 시였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괴물의 덩치가 커지자 박선생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결국 곪아 썩은 부위를 시인 최영미 선생이 바늘로 아주 살짝 건드렸고 그리하여 풍선보다 더 커진 고름주머니를 터트린 것이다. 혼자서 총대를 멘 시인 최영미 선생, 과연 대한민국 문단은 이 한 사람에게 총대를 메게 할 일이었던가?



최영미 선생의 시 중에서 가장 빡이 치는 대목은 맨 마지막이다.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이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운 독백인가. 시인은 덩치큰 괴물과 홀로 마주하고 있다. 보나마나 시인은 그 덩치큰 괴물을 감당할 힘이 없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라고 말하고는 얼른 도망쳐야 할만큼 무력한 사람이었다. 시인은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도망쳤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 말은 진실이 아닐 것이다.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도 자신을 편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무력감을 저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무력감인가. 맨 마지막은 "곧 사람들이 도우러 몰려오겠지, 조금만 버텨보자!!" 라고 써있어야 할듯 한데, 그렇지가 않다. 시에서 최영미 선생의 희망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는 고독감, 무력감, 희망 없음이다. 이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괴물이 살고 있는 동굴의 벼랑끝에 시인 혼자 서있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에 빡이 칠 뿐이다!  



보다못한 시인 류근이 SNS를 통해 그 괴물에게, 아니 우리 사회에 직격을 날렸다.

류근이 쓴 글의 제목은, 아 다들 '몰랐다고?' 이다. 다음은 류근이 빡이쳐서 SNS에 게시한 글이다.



"몰랐다고?


고은 시인의 성추행 문제가 '드디어' 수면 위로 드러난 모양이다. 최영미라는 시인께서 지난 가을 모 문예지의 페미니즘 특집에 청탁받아 쓴 시가 새삼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이다. 놀랍고 지겹다.


6~70년대부터 공공연했던 고은 시인의 손버릇, 몸버릇을 이제서야 마치 처음 듣는 일이라는 듯 소스라치는 척하는 문인들과 반응이 놀랍고, 하필이면 이 와중에 연예인 대마초 사건 터뜨리듯 당하는 듯한 정황 또한 지겹고도 지겹다.


솔직히 말해 보자. 나는 한 번도 끼어들지 못한 소위 '문단' 근처에라도 기웃거린 내 또래 이상의 문인들 가운데 고은 시인의 기행과 비행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 얼마나 되나.


심지어는 눈앞에서 그의 만행을 지켜보고도 마치 그것을 한 천재성이 끼치는 성령의 손길인 듯 묵인하고 지지한 사람들조차 얼마나되나. 심지어는 그의 손길을 자랑스러워해 마땅해야 한다고 키득거린 연놈들은 또얼마나 되나."


침묵한 문인들이여!!!  반성하라!  


시인 류근의 글로 판단하건데, 저 글을 그자리에서 일 순간에 갈겨쓴 글일 것이다. 류근 시인이 빡이 친 만큼, 빡이 친 감정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게다가 위 글은 다듬어지지 않았다. 류근은 시인이다. 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글을 전혀 다듬지 않았다. 이 말은 순식간에 일필로 갈겨썼다는 뜻이다. 그리고 갈겨썼음을 숨기지 않고 자신이 얼마나 빡이 쳤는지를 고스란히 전달한 것이다. 그 마음이 내 마음에 든다 진짜!!!  






[[[ SNS에 글을 써준 류근 시인의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이 노래의 가사는 류근 시인이 쓰고, 고 광석형이 곡을 입혔다. 광석형의 노래야 말할 필요가 없음을 잘 안다. 그리고 박새별도 커버를 했는데....1절은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2절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별처럼 빛나는 박새별의 2절 노래는 광석형의 노래를 순간 잊게 만든다. 나는 박새별이 부르는 2절 때문에 이 노래를 듣는다. 물론 지극히 사적인 생각일 뿐이다. ]]]


   

침묵은 금(金), 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읽을 적이 있다. 분명 침묵이 금일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 침묵이 사회를 병들게 할 수도 있다. 침묵은 그 특성상 결코 중립일 수 없다. 침묵은 어쩌면 적극적인 동조이자 협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 불의에 가해지는 침묵은 적극적인 협조이자 동조이다.


그 결과 수많은 문인들의 침묵은 작았던 괴물을 덩치큰 물괴로 만들었다. 시인 최영미선생이 입을 다문 박선생을 분명하게 지적해준 이유이다.


방관은 결코 방관이 될 수 없다. 방관은 가해와 등가이다. 그리하여 방관은 동조이며 협력이다. 방관은 비난을 받을 자격이 있다. 



노래 듣다가 2017년 있었던 일로 빡이치는데 너무 뒤늦은 북이라 뻘쭘하기는 하다 ㅠ

그러나 가을 편지를 들으면 나의 뇌리 속에서 그 물괴가 스믈스믈 다시 기어나오니 어쩌겠는가....  

때로 침묵은 결코 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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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10-06 2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벼락을 소환한 건 다 이유가 있습죠. 저런 en을 단죄할 사회적 역량이 안되니 신화의 힘이라도 빌려야죠. 다시 한번 벼락을!!!

차트랑 2026-10-07 09:22   좋아요 0 | URL
기왕이면 마른 하늘에 날벼락으로 해주옵소서~
 





지난 여름은 그 어느 해의 여름보다 유독 더 뜨겁고 더웠다.
아싸~ 날더운데 땡땡이 치자~!

그렇게 마음 먹으니 산책하기를 거의 빼먹다시피했다. 본격적인 여름이 오자, 아예 발길을 끊었다. 가을 바람이 불기 시작했지만 다시 시작하는 일은 이런 저런 핑계로 늦어졌다.

연휴가 끝나가는데, 매봉산아 다시보자, 드디어 오늘 다시 시작이다!! 이렇게 작심을 해야 일관성을 유지해갈 수 있다.


알고는 있었지만 AI 에게 물어봤다. 매봉산의 높이는?
답은 아래와 같았다.
"해발 95m, 둘레길 2.5 km"  
山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그래서인지 괄호 열고 닫고 근린공원이라고 써있다.

"10분 이내에 정상에 오를 수 있다" 고 알려준다.

뭐 10분? 그건 AI 니생각이구~~!!!

사실 내게 95m 짜리 매봉산은 에베레스트(8,848 m)와도 같은 산이었다.

건강이 더 나빠지자 95m의 뒷동산도 에베레스트만큼 상대하니 어려운 산이었다. 오르내리며 쉬어가기를 마치 950m의 가파른 산을 오르는 것처럼 했다.
문제는 산이 아니라 나의 저질 건강이었던 것이다.



[[[ 산 정상에는 돌탑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건 저의 신발이 아닙니다. 누구의 신발인지 저는 모릅니다 ㅠ ]]]

 


매사가 그러하다. 문제는 늘 본인에게 있는것이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해결 방안이 나오고 문제를 개선시키기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하루 하루 매봉산을 오르내리며 정신을 차려갔다. 그리고 수년이 흘렀다. 일관성있는 뒷동산 오르내리기는 그에 맞는 결과를 내게주었다.


상태가 좋아지자 게으름을 피우기 시작한다. 게으름 역시 그만한 결과를 내게 가져다준다. 모든 것에는 반드시 인과가 함께한다. 원인 없는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 것이 이치이다.

오늘 부터 시작이다.





사실, 10 수년 전부터 몇 년 전까지 매봉산에 토끼들이 살고 있었다. 개체 수가 적지 않았다.

사연은 이러했다. 어린 토끼를 귀여워한 누군가가 한쌍의 토끼를 집으로 데려가 키웠다. 점점 자라 토끼가 어른이 되자 감당하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매봉산에 방생했다. 그 토끼들은 죽지 않고 생존에 성공했다. 토끼에게도 방생한 장본인에게도 모두 천만 다행한 일이지 않은가.... 방생한 장본인은 속으로 분명 죄책감에 사로 잡혔을 것이다. 살이있는 생명체를 죽음으로 내 몰았다는 양심의 소리가 자신의 내부에서 들려왔을 것이다. 밤마다 토끼가 나오는 꿈을 꾸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향한 누군가의 비난은 자신이 떳떳할 때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면 남들이 모르는 일일지라도 자신의 양심이 스스로를 아프게 찔러오는 비난을 듣는 사람은 무척이나 괴로운 법이다. 그런 점에서, 자신이 내다버린 생명체들이 잘 생존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서서히 그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이는 토끼에게도 자신에게도 모두 다행한 일이다.  


여하튼, 개체수가 점점 늘어났고 이들을 돌보는 사람도 생겨났다. 그 사람이 축사도 지어주었다. 겨울에 먹이도 제공했다. 해가 가면서 소문이 동네에 퍼지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산에 토끼들이 산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더불어 의견도 분분해졌다. 토끼를 원치 않았던 누군가가 구청에 민원을 넣었다. 구청 직원이 와서는 민원이 들어왔고,  축사는 불법 건축물이라며 철거해야한다고 말했다.



[[[ 매봉산 토끼, 사진 출처 ㅡ 네이버 블로그 루나의 정원 ]]] 


그러자 토끼를 보살피던 주민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그렇게는 못하겠소! 하며 구청에 강력한 항의를 했다. 이들은 구청에 찾아가 항의했다고 전한다. 주민들의 강한 반발을 이기지 못한 구청에서는 결국 축사 철거를 포기했다. 눈 딱 감고 모르쇠 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곳은 서서히 명소가 되었다. 주말이면 남녀노소 모두가 모여들었다. 특히 부모의 손을 잡고 어린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어린 아이들의 놀이터로 좋다는 소문이 났던 것이다. 유모차들이 북적였다. 아이들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토끼들에게 풀을 뜯어주며 가까이 지내는 것을 즐거워했다. 주말이면 공원은 사람들이 북적이며 마치 활기찬 시장같은 분위기 였다.  도심 한 복판에 이런  곳이 있다니, 믿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주말, 작은 광장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정말 보기 좋았다. 토끼들이 여기저기서 풀을 뜯거나 졸고 있었다. 아이들과 숨박꼭질하는 토끼들도 있었다.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그 토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토끼들이 사라졌다. 그 많던 토끼들이 말이다.
어찌된 일이더란 말인가!!!



[[[ 매봉산 토끼, 사진 출처 ㅡ 네이버 블로그 그린러버의 세상이야기 ]]]



전하는 말로는 고양이들에게 모두 잡혀먹었다고들 했다. 이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고양이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다시 AI에게 물어봤다. "그 귀엽던 매봉산 토끼들은 죄다 어디로 간가지?" 라고. AI가 답해준다, "공원정비 과정등에서 토끼들을 철수 및 이동하여 지금은 토끼들을 산책로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럼 그렇지... 이제 납득이 간다. 우쒸~!!!


정비를 한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토끼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정비였다. 너무나도 속이 상한다. 구청에서 결국 뜻을 관철시킨 것이다. 
구청장이 누구더냐???  이 매정하고 인간미 없는 인간아!!!
그 토끼들이 주민들에게 어떤 기쁨을 주면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기나 하냐??
그리고, 꼭 그래야만 했냐??? 꼭 그래야만했냐구!!! 


이제는 유모차도 어린 아이들도 찾아오지 않는다. 텅빈 도시 한 복판의 허전함이 느껴진다. 삭막한 그 쓸쓸함 말이다. 활기있던 곳이 텅 빈것만 같다. 있다가 없으면 처음부터 없었던 상황과는 많은 차이가 느껴진다. 살아있는 동물들이 움직이는 모습 바라보는 기쁨을 다들 아실것이다. 부산에 상어가 나타나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도 같은 이치가 아니던가. 토끼들아, 어디서 잘 살고는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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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아이인가 2026-10-05 2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청장은 목소리 큰 사람들 말을 반영합니다...민주주의
들먹이며 다수의 의견이니 어쩔 수 없다. 일하는 분들
뱃속으로 갔을 수도 있겠네요!
˝다수가 정한 일이 반드시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쇼펜하우어의 말입니다.

차트랑 2026-10-05 21:0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지금은 선물님,
저의 서재를 찾아주시어 고맙습니다.

말씀을 들으니 더욱 속이 상하는군요.
사라진 토끼들이 어린이들에게 주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구요.
아이들 부모님들도 좋아했거든요.

그 기쁨을 강탈당한 이 느낌...
속이 쓰립니다 ㅠ

말씀해주신 쇼펜하우어의 통찰이 오늘 따라 제게는 더
크게 들리는군요 ㅠ

편안한 저녁되십시요 지금은 선물님~



잉크냄새 2026-10-05 2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뭇생명과 공존할 수 없는 존재인가 봅니다. 인간이 멸종시킨 생명들이 어마어마하죠. AI나 로봇에 집착하는 것도 생명없는 것들에 대한 동경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뭇생명들에게 미안한 마음입니다.

차트랑 2026-10-05 21:29   좋아요 1 | URL
오... 이런....
잉크냄새님의 말씀을 읽으니 정말 그런것 같습니다.
뭇생명과의 공존만이 인간이 살아갈 바른 길인데 말입니다 ㅠ

만약 인간이 AI를 동경한다면 .....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1인 입니다.

AI가 스스로 사고하는 순간,
인간의 멸종은 1순위가 될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거든요.

국가이든 개인이든
소멸은 스스로에게 원인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듯 합니다.
가뜩이나 태생이 저질 건강인 저도
제 스스로 제 건강을 해치며 살았거든요 ㅠ






 






요즘 영화 암살자(들)이 지면과 전파망을 강타하고 있다. 사무실에서 조차도 화제거리다. 왕사남이 일으키던 것과는 그 성질이 전혀 다르다. 보수 정당 정치인들과 단체들의 반작용이 매우 거세니 말이다. "역사 왜곡, 저급한 프로파간다, 음모론 조장, 표현의 자유로 정당화 될 수 없는 패륜." 등등, 예사롭지 않다. 보수 모 의원의 관련 발언 수위는 너무나도 큰 나머지 폭탄급이라고도 언론은 전하고 있다.


그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 또한 매우 당황스러운 입장에 처해있는 모양이다. 모 의원의 출연 배우에 대한 인신 공격성 발언은 태어나 처음 들어본 표현이었다. 영화와 관련한 멘트를 남긴 배우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아도 그들이 현재 어떠한 일을 겪고 있는지 다들 잘 아실것이다.


영화가 정치적인 이슈가 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쉽게 냉각될 것 같아보이질 않는다. 정치색을 띄면 정당만의 문제로 제한되지 않는다. 국민인 지지자들에게까지 확산된다. 그 치열함이 가속되고 격렬해지게 되어있다. 국민들에게도 상반되는 이슈로 다가가는 것이다. 결국 국민들끼리 서로를 할퀴고 생채기를 주고 받을 것이다. 


특히 심각한 것은 정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영화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과 국민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정치인이 특정인에 대한 좌표 찍으면, 지지자들은 집단 린치를 가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자유라는 이름의 폭력과 다름이 없다.



대한민국은 일제 강점기 친일파들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 그 결과가 지금껏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시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의 조사에 대한 납득할 만한, 투명한 발표가 없었다. 의문과 의혹을 남겼던 것이다. 그 결과 후대에 이런 분열과 쟁점의 씨앗이 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친일파들의 돌팔매가 날아오는 것도 현실이다. 이 또한 제때 제대로 정산하지 못한 탓이다. 


종합하면, 정치적인 이슈가 뜨거울 수록 권력을 가진 정치인들의 손에는 이권이라는 손익 계산서가 쥐어져있지만, 국민들의 가슴에는 상처만이 남게 된다는 것이다.







[[[ 육영수 여사 1925~1974  사진 출처 ㅡ 신현두 칼럼 ]]]



[[[ 육여사가 어떤 분이었는지 궁금하여 관련한 자료를 찾다가 흥미로운 논문 하나를 발견했다.

그 논문은 [ 퍼스트 레이디의 역할정립에 관한 연구 ] 이다. 제출 년도는 2008년, 제출자는 이화여자대학교 정책과학 대학원 이민정이다. 


육영수 여사는 "만민의 어머니라는 국모의 이미지가 아직도 국민들의 마음 속에 각인되어 있다" (p.76) 라는 논문의 글이 눈에 띈다.  

"사회 봉사활동에 적극적이었으며 청와대로 쏟아지는 각종 민원에 일일이 답장을 보냈다" (p.77)


논문에 따르면 육여사는 사회 모든 분야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고 국민들에게 매우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국민을 아끼고 사랑했던 여사의 미담들은 셀수 없이 많았다. 그래서일까 국민들의 여사에 대한 인식은 무척이나 긍정적이었다. 


인터넷에서 본 내용에 따르면 "여사가 손을 대면 상처가 낫는다" 는 소문까지 있었다고 하니, 말 다했다. 


다양한 자료들을 찾아본 결과를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대통령 박정희는 동지도 많았고 적도 많았다. 많은 국민들은 그가 독재자라는 인식을 가지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적들 조차도 여사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박정희에게 핍박을 받았던 야당 정치인도 여사의 험담을 한 사람은 없었다.

국민을 아끼고 사랑한 만큼 국민들도 여사를 사랑하고 존경했다. (김연아도 안티가 있다던데, 육영수 여사에게 그 흔한 안티가 없었다니....) 당시 국민들이 육여사를 언급할 때 여사의 이름만 부르는 경우는 없었다. 성과 이름 뒤에 반드시 '여사'를 붙였다. 남녀노소 그 누구라도 도 그랬다.


관련 자료들을 살핀 후의 느낌은 이렇다.

육영수 여사는 전 세계의 어느 퍼스트 레이디도 받아보지 못한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뜻밖에도 놀라운 검색 결과였다. ]]]




==== 스트라이샌드 효과 Streisand Effect ====  


2003년, 미국의 가수이자 연기자였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Joan Streisand, 1942)는 소송을 제기했다. 말리부에 있는 자신의 저택이 찍힌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안 침식을 알리느라 촬영한 사진 속에 자신의 저택이 함께 찍혔던 것이다. 이에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인터넷에서 사진을 내려줄 것을 요구함과 동시에 손해를 배상하라는 5만달러 짜리 소송을 제기했던 것이다.





그런데 뜻 밖의 현상이 발생했다.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사람들이, 그래? 하면서 이 소식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혀 몰랐을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게되는 효과를 초래한 것이다.

검색하면 죄다 나오는 얘기지만, 2017년, 터키는 위키디피아 접속을 차단했다. 그러자 접속을 안하던 사람들조차도 접속을 시도하는 일이 발생했다. 접속 폭증을 유발한 것이다.

하지 말라고 하면 안하던 사람들도 하고싶어진다. 통제와 검열은 반작용과 호기심을 증폭시킨다. 특히 정치인들은 이 점을 아주 잘 알고있을 필요가 있다.



지난 2017년, 대선 TV 토론 당시 순진한 안철수 후보는 문재인 후보에게 묻는다, "제가 MB 아바탑니까?" 라고. 안 후보는 상대방이 어떤 답을 해주리라 생각하고 이렇게 물었을까. 
그러자 문재인 후보가 답한다, "안철수 후보가 말하는 그런 이야기를 제 입에 올린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라고. 문 후보는 안 후보가 원하는 답을 교묘하게 피해갔다. 그리고 문 후보는 사실상 일을 크게 만드는데 일조하는 답을 내놨던 것이다.


문재인 후보는 왜 하필 이렇게 답을 했을까. 두가지 의도가 숨어있을 것으로 추정해본다. 먼저, 안 후보의 질문을 국민들께 더욱 각인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국민들과 나는 당신을 엠비 아바타라고 생각하고있지만, 그런 말을 내 입으로 말한 적은 없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또한 안 후보의 뼈를 때리는 훈육의 뜻이 담겨있을 것이다. 문후보는 '철수형, 스트라이샌드 효과도 모르면서 정치를 하려고 덤비는거야 지금? 그런 말을 스스로 입에 올려서는 안된다구 이 애송이야!' 라고 가르치는 중이다. 분명 문재인은 그 효과를 알고 있었고, 반대로 안철수 후보는 이를 모르고 있었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당시 안철수 후보의 캠프는 대체 뭐하고 있었을까. 어째서 안후보가 이런 바보같은 질문을 하도록 내버려뒀단 말인가...



어느 날, 윤석열은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말한다, "아주 탄핵시킨다~ 워 이런 얘기까지 막 나옵니다~ 하려면 하십쇼~! "


이 발언은 윤석열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하늘을 날아다니며 입으로 불을 내뿜는 뱀은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 생각지도 마십쇼!!" 라고 말하는 순간, 상대방은 즉각 하늘을 날아다니며 입으로 불을 내뿜는 뱀을 머릿 속에서 상상하게 된다. 진실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 돈을 훔치지 않았어요!! 라고 말하는 순간, 의심의 눈초리가 본인에게 쏠리는 것이 인간 삼리이다.


탄핵이라는 말은 본인이 결코 입에 올려서는 안되는 말이었다. 윤석열 역시 안철수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전국민이 지켜보는 카메라 앞에서 자기들 입으로 아바타, 탄핵을 입에 올렸으니.... 말 다했다.

모르고 있던 국민들마저도 '안철수는 엠비 아바타래, 윤석열 탄핵시키래'를 아주 자연스럽게, 쉬쉬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입에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국민들의 뇌리속에는 아바타와 탄핵이라는 말이 각인되기 때문이다.


폭력으로 억압하여 지우려하면 되려 역사에 새겨지는 법이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은 대신 자신의 돈을 들여서 이를 깔끔하게 증명해냈다. 스트라이샌드 효과, 에 따르면 영화 암살자(들)은 대한민국 영화사에 영원히 기록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논란과 저항이 전국을 강타하는 사이 박스오피스 수치는 치솟고 있다고 한다. 뜨거운 공방과 열기 속에서 관람객의 수는 늘어날 것이고 투자자들은 미소를 짖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진실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부디 국민들이 분열하는 피해를 입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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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10-04 1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역사의 비극을 돈벌이로 이용하려는 제작자들과 이를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이 문제죠.이들은 진실 여부는 상관이 없고 오로지 이익과 자신의 유불리만 따질 뿐이죠.이 정도로 음모론이 성공한다면 조만간 노무현 대통령도 영화로 나올 겁니다.사건수사에서 범인은 살인으로 가장 큰 이익으 본 인물이란 것이 클리세인데 이해찬 스스로가 자신들은 폐족으로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질 것이라고 했던 민주당이 지금 이렇게 떵떵거리며 살아 있는 것은 오로지 노무현 대통령의 불행한 서거 덕분이니까요.
음모란의 무서움이 바로 이런 것이죠.

차트랑 2026-10-04 19:4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카스피님,
저의 서재를 찾아주시어 고맙습니다.

좋은 말씀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해주신 내용에 공감하는 바입니다.

편안한 저녁되세요 카스피님~

잉크냄새 2026-10-04 2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원래 이 영화를 볼 계획이 없었는데 ‘기생오라비상‘의 어느 정치인에게 ‘북한상‘이라는 유일무이한 관상학적 테러를 당한 유해진 배우를 응원하려 관람하러 갈 예정입니다. 이것도 스트라이샌드 효과겠죠.

차트랑 2026-10-04 20:24   좋아요 0 | URL
북한상, 이라는 인신공격은 태어나 처음 들어봤는지라. 하.......

그러나 기생오라비상 이라는 관상학적 인신 칭찬은 많이 들어본적이 있지요!!!!

강하게 타격할수록 스트라이샌드 효과는
그만큼 더 커지지얂을까 싶습니다.

나아가 역사에 남지 않아도 될 영화를 영화사에 새겨넣게 생겼습니다.
다 기생오라비 덕분아니겠어요.
캄사해요 오라버니~~~

좋은 저녁되십시요 잉크냄새님!

 


때가 되면, 일부러 찾아 듣지 않아도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들이 있다. 비발디 선생의 '사계' 는 거의 계절마다 들려오는 듯 하고, 위대한 베토벤 선생의 교향곡 9번은 연말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온다. 또한  '시월의 마지막 밤'은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 대중 가요 중 하나 일 것이다. 이런 곡들의 수명은 대부분 길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특정 시기가 되면, 또 계절이 바뀌면 누군가는 사적 호감도가 높은 노래들을 찾아 듣기도 한다. 내게 '가을 편지'는 그런 노래 중 하나이다. 가을이 오면 어김없이 찾아듣는 노래, '가을 편지'. 그러므로 적어도 내게 이 노래의 수명은 나의 그것과 함께 할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애정하는 '가을 편지'는 심히 유감스럽게도 마음을 편치못하게 하는, 나의 내적 부정합을 일으키는 곡이기도 하다.

甲돌씨를 사랑한다면서도 정작 시집은 乙돌씨에게 가버리는 여인이 있다면 이는 내적 부정합의 경우에 해당한다. 언(言)과 행(行)이 서로를 이탈해 따로 존재하는 이 모순된 시추에이션! 이는 정녕 황당하고 믿기 어려운 상황이 아니겠는가.


'가을 편지'를 기억하는 한 나는 이 노래의 가사를 쓴 사람의 이름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글에 곡을 입힌 훌륭한 작곡가의 이름을, 이 노래를 정말 잘 부른 멋진 가수의 이름을 또한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 가을 편지는 최양숙 선생이 부른 버전이 특히나 돗보인다. 쉽게 만날 수 없는, 특유의 매력적인 바이브레이션을 가진 가수 최양숙 선생, 가을 편지는 오직 최양숙 선생을 위해 태어난 노래이지 싶다. 최양숙 선생이 힘을 빼고 전달하는 이 곡은 정말로 유려하고 근사하다. ! 최양숙 선생은 힘뺀 예술에 레가토(Legato - 음과 음사이를 끊어지지 않게 연결하는 주법)를 덧 붙이는데.....내게는 중독성이 강하다 ! 아... 이 노래는 정녕 최양숙 선생의 것이로다, 하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주인을 제대로 찾은 '가을편지'는 최양숙 선생을 통해 그 퀄러티를 한층 더 드높인다.


최초 레코딩은 LP를 썼다. 사적인 견해이지만 LP는 음을 허공으로 산란시키는, 음의 공중 부양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탁월하다. 반면 CD는 음을 공중으로 산란시킨다. 심지어 금속성 음을 내기도 한다. CD의 시대를 맞이하여 적응이 어려웠던 이유이다. ]]]




위에서 언급한대로 이 노래는 나에게 내적 부정합을 일으키게 한다. 내게 무척이나 아름다운 노래이면서 동시에 무척이나 아름답지 못한 감정을 느끼게하는 이 노래, 애정하면서도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좋으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다. 누군가는, 안들으면 그만이지!! 누가 들으래? 라고 말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의 귀에 착착 붙는 최고의 노래인데, 듣지 않고 어찌 배겨낼 수 있겠는가! 하고 답할 듯 하다. 이런걸 자가당착이라고 하는 것이겠다.


결국 "노래에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라며 스스로 합리화해본다.



言(언)과 行(행)의 정합은 중요한 것인가? 

영향력이라고는 1도 없는 나와 같은 하찮은 필부라 할지라도 언과 행의 정합은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홀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면 정치(政治)와 정합(整合)은 피해 갈 방법이 없다. 정치와 정합은 상호 관계의 기점인 동시에 관계의 종점이기 때문이다. 한 순간 삐끗하면 관계가 불안해지고 관계에서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대부분 원치않는 환경의 지배를 받게한다.



하물며 사회에 큰 영향력을 가지는 인물의 언행은 파급 효과가 그만큼 더 클 수 밖에 없다. 자신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말이다. 심지어 특정 인풀루언서가 스스로 선택한 극단의 결과 조차도 모방이라는 현상을 가져올 정도로 영향력이 크지 않던가.

그리하여 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는 자의 사회적 책임은 그만큼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그 영향력이라는 것이 자신 스스로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사회적 현상은 본인의 의지와 전혀 무관한 것이라도 발생할 수 밖에 없다.



갑작스런 글의 전환 이지만, 2017년 견디다못한 시인 최영미 선생은 결국 아래와 같은 시를 발표하기에 이르른다.



괴물 ㅡ 최영미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ㅡ 2017 ㅡ




최영미 선생은 "너무 늦게써서 미안하다"고, 

"10년 전에 썼어야할 시",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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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10-02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영미 시인의 용기에 박수를!!!
En, 요 벼락 맞을 늙은이에게 벼락을!!!

차트랑 2026-10-03 10:04   좋아요 0 | URL
제우스 신에게 부탁 한 번 잘 해보겠습니다.
저의 부탁을 들어 줄지는 모르겠지만요.

좋은 하루 되세요 잉크냄새님~~
 


사주에서 간여지동이라는 이론이 있다. 천간과 지지가 같은 오행을 뜻한다. 갑인(甲寅), 을묘(乙卯), 병오 (丙午), 무술(戊戌), 경신(庚申), 신유(辛酉), 임자(壬子) 등(이 외에도 있지만)이 간여지동이다. 이들은 대가 세기로 정평이 나 있다.


그 고집은 하늘을 찌르고 기상은 그만큼 드높다.  에너지 역시 그만큼 강하다. 자기 소신은 말할것도 없다. 자기 철학이 확고하고 그것을 지키려는 힘이 막강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간여지동의 사람을 꺽으려하지 마라. 간여지동은 휘어지려 하지 않는다. 간여지동은 휘어질 바에는 차라리 부러짐을 택한다. 백여대의 장을 맞고 무릎의 뼈가 으스러지는 압슬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입을 열지않는 사람들이 있다. 만고의 충신 박태보는 온 몸을 벌겋게 달아오른 인두로 전신을 지지는데도 신음 한마디 내놓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렇게 차라리 죽음을 택한 사람들은 간여지동일 확률이 아주 높다하겠다. 때로는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차 싶은 순간에도, 이를 인정하려들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간여동의 사람들이기도 하다. 과연 간여지동은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들이다. 자존심에 죽고 사는 사람들을 간혹 만난다. 일을 성사시킬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간여지동을 대할 때는 특히 신중해야 한다. 


그러므로 간여지동은 일이 어렵게 되기 전에 반드시 설득을 해주어야한다. 그것도 자존심을 살려주면서 말이다. 간여지동과의 일처리를 이렇게만 한다면 일은 다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간여지동은 사실 쿨 하기 때문이다. 한번 쿨하게 일처리를 하면 그 다음 번 일은 그만큼 수월하다. 신뢰를 한번 얻으면 쉽게 바꾸지 않는 사람들이 또 간여지동의 특징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럼 간여지동에 태어난 사람들만 그런 것이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간여지동 못지 않게 꼿꼿하며 대가 쎈 사람들이 또 있으니 월지에 양인(陽刃) 혹은 양인(羊刃)을 놓은 사람들이다. 간여지동과 양인은 모두 물러섬이 없다는 특징을 가진다.


묘월(卯月)의 갑목(甲木), 오월(午月)의 병화(丙火), 자월(子月)의 임수(壬水)등등이다. 중추(仲秋)의 경금(庚金) 또한 양인에 해당한다. 

이 양인들 또한 간여지동 못지 않다. 대차고 기운이 있으며 에너지 또한 고강하다.  여러모로 간여지동 못지 않다.
일이 이러하니 내가 상대해야 할 사람이 혹여 간여지동이거나 양인을 둔 사람인지 알고 대처하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편이라 할 수 있다.



양인으로 이름난 중추(仲秋)의 경금(庚金)은 유월(酉月) 경금일(庚金日)에 태어났다는 뜻이다. 중추의 경금은 그 누구보다 소신이 확실하고 의기로우며 불의를 보면 참지를 않는다. 금기운이 강한 사람들 앞에서 의롭지 못한 행동을 결코 하지마라. 임전 무퇴인 그들은 의에 죽고 의에 사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행여나 그들 앞에서 불의한 일을 했다면 그 후를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이 경금 양인의 결기는 질긴 쇠가죽이고 자존심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는다. 그러나 신월(申月)의 신금일(辛金日)보다는 감성적이며 온정을 간직하고 있다.


이에 비해 맹추 신월(申月)의 신금(辛金)은 같은 금이지만 성질은 꽤나 차이가 난다. 무협지에서나 볼 수 있는, 그 무엇도 베어낼 수 있는 천하의 보검인지라 그 성질의 결단이 더 강하다. 흔히 보검에 비유되는 신월의 신금에게 자비란 거의 없다. 신월의 신금은 뭐든지 단칼에 정리를 마친다. 그야말로 신속하며 깔끔하고 서늘해서 오싹한 기운마저 감돈다. 눈이부시며 희다못해 시퍼런 칼날인 辛에게 자비를 기대하는 것은 뭘 모르고 하는  일이다.


이러한 신월의 신금에 비하면 그나마 온정이 남아 있는 것이 유월의 경금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중추절 酉月이다. 중추의 庚金에게 잘못보였다가는 뼈도 못추린다. 온정이 남아 있으나 그 숙살은 한번 갈라지면 그것으로 끝을 낸다. 아, 신월의 신금과는 달리 그나마 중추의 경금은 한 번은 봐줄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걸 깜박하면 손실이 매우 크다. 나처럼 말이다. 나는 중추의 경금을 잘못 건드린 댓가를 톡톡히 치루고 있고 후회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절감하고 있다.


중추의 경금이여!!  
부디 건강하시고 안녕하시기를.....

비록 큰 댓가를 치루고 있고, 뼈저린 후회를 하고 있지만 중추의 경금에대한 경애를 드리는 마음에는 조금의 변화가 없음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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