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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문화 산책 - 신윤환의 동남아 깊게 읽기
신윤환 지음 / 창비 / 2008년 11월
평점 :
계몽 담론에서 벗어나, 열등함이 아닌 주체성 회복을 향하여
어떤 책을 읽고 서평을 쓸까 고민이 많았다. 제목만 보았을 때는 「맨발의 학자들」이 맘에 들었으나 아무래도 문화 인류학과가 아닌 나에게는 조금 집중하기가
힘든 책이었다. 동남아의 사회와 문화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가 있긴 했지만,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현지 조사를 할 때 어떤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주로 나와 있었기에
실제 현지 조사 경험이 하나도 없는 내가 소화하여 서평을 쓰기엔 무리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책을 찾아 보던 와중, 「동남아문화 산책」의 서문에서 한국 사람들은 무시하기 일수인 동남아가 지닌
힘에 대해 써보고 싶었다는 신윤환 씨의 말에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써보기로 결심했다. 나조차 수업을
수강하기 전까지는 동남아에 몇 개의 나라가 있는지도 몰랐을 정도로 무지했기에, 내가 가진 고정 관념을
깨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읽어 나간 책은 정치,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동남아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도와 만족스러웠다. 간간히 한국 사회와 비교하며 격해지는 저자의 감정도 느껴졌지만 어느 정도 동의 하며 읽어갈 수 있었다. 또한 책을 읽으며 느낀 점에 대해, 얼마 전에 읽은 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과도 연결시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중국인에 대한 한국인의 차별이나 편견에 대해 조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인을 무시하고 비하하는 자료에는 대개 동남아에 대한 비하가 함께
나와 있던 적이 많았다. ASEAN+3이 결성된 지금에도 우리나라는 아시아를 하나의 공동체로 여기기보다는, 동남아에 대한 차별,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중국과 역사적으로 주종관계에
놓였었던 일본에 대해서는 부러움과 시기라는 모순적인 감정을 보이고 있다.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남아
사람들에게 박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전쟁으로 황폐해 졌던 경제를 일으키고, 독재 정권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성취하고, 이제는 한류를 통해 문화적 저력을 내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눈에 동남아는 많은
천연자원에도 불구하고 낮은 경제수준과 ‘전근대적’으로 보이는
정치와 사회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한 나라의 우수성을 서구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편향된 사고가 존재한다. 프란츠 파농이 「검은 얼굴, 하얀
가면」에서 지적했듯, 우리나라 사람들 역시 제 1세계 국가들에
자신들을 ‘동화’시키고 반대로 제 3세계 국가들에 대해서는 차별을 하고 있다. 여기에 강한 민족의식이
더해져 시너지를 이룬 결과물이 직접적, 간접적인 동남아 비하인 것이다.
이러한 차별 의식은 일상 생활에서의 대화 속에 빈번하게 등장할
뿐만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서도 확산되고 재생산된다. 이
둘은 닭과 달걀처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차별을 우리의 인식에 각인한다. 예능에서 초라한 행색을 했거나
어딘가 촌스러운 사람을 동남아 사람 같다며 희화화하는 인종 비하 발언은 쉽사리 발견할 수 있다. 요즘
각국의 외국인 남성이 등장해 토론을 벌이며 인기 몰이를 하고 있는 예능 프로 <비정상회담>에서도 동남아에 대한 차별의식을 엿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
있는 외국인의 절대 다수가 동남아인임에도 불구하고 패널로 참여하는 잘생기고 젊은 외국인 남성들 중 동남아 국가 출신은 단 한 명도 없으며, 13명 중 7명이 유럽 및 영미권에 속한다.
그러나 이 책은 동남아는 정녕 후진 국가나 진보되지 않은 국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서구를 중심으로 확산된 근대적인 사고 방식과 정치,
사회 체계에서 동남아는 낮은 평가를 받을 지 몰라도, 그들은 그들 나름의 삶의 방식을 형성해
왔다. 특히 힌두교를 중심으로 번영했던 동남아 특유의 세계관인 만달라 세계관은 수직적이며 조직적인 근대의
관료 시스템과는 매우 다른 방사형 구조를 보인다. 개별적인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지닌 동남아 국가가 급작스런 서구식 근대화 앞에서 힘을 잃고 좌충우돌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인간의
본성이 하나이고 역사가 이러한 본성에 가장 이상적인 방향으로 진보한다면 동남아 국가는 계몽되어야 하는 존재이자 열등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클리포드 기어츠에 의하면 문화와 독립된 인간 본성 같은 것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의미 있는 상징체계인 문화 패턴을 통해 정보를 습득하며 비로소 형성된다. 유럽과는 다른 기후와 지리, 다른 역사, 다른 문화 패턴을 지닌 동남아가 서구식 발전 모델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 결과가 같지 않음은 자명한 것이다. 원칙이 덜 중시되고, 모든 것이 느긋하고, 권위주의적인 정부에 비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지
않는다고 하여 그들이 덜 발전된 것이 아니다. 여느 사회에나 문제는 항상 있어 왔으며, 민족간의 갈등, 불안한 경제, 부패한
권력 등 은 오히려 전혀 다른 문법을 지닌 서구식 사고가 동남아 세계에 침투하며 발생한 혼란이라고 볼 수 있다.
동남아의 특성이 원래 열등하여 서구로부터 지배를 받고 계몽을 당한 것이 당연하며 앞으로도 개선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일제가 조선을 식민
지배함으로써 조선이 근대화를 할 수 있었다는 식민담론과 일맥상통하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했던 계몽의 물결은 이성 중심, 합리성을 강조하는 사고의 한계가 곳곳에서 드러남과 동시에 역사에서 후퇴하고,
자기 계발 담론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계몽의 위험성은 그 다름 아닌 계몽을 행하는
주체의 의도와 상관 없이, 오히려 선한 의도 때문에 객체의 주체성이 상실된다는 점이다. 계몽 당한 객체는 더 이상 그 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동시에 그가 바라던 세계로도 진입할 수 없다. 지배계급의 사고 방식과 문화를 익힌다고 하여도 계급의 이동에는 장벽이 존재하며, 그 장벽은 단순히 그들의 삶을 흉내 내어 넘을 수 없는 것이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의도치 않게 계몽을 당한 객체는 이도 저도 아닌 존재로 남으며, 이때
계몽을 행한 주체는 도움을 주었다는 자기만족을 할 뿐 아무런 책임의식도 느끼지 않는다.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흑인들은 프랑스인으로 인정 받지 못하고, 농촌 계몽 운동으로 깨우침을 얻은 농민이 연고주의에
의해 주변부에 위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소설 「피그말리온」에도 이러한 계몽의 갈등이 나타난다. 음성학 교수인 히긴스와 피커링 대령은 하류층의 꽃파는 아가씨였던 엘리자 둘리틀의 거칠고 속물적인 말투를 교정시킴으로써
상류층 여성으로 변모시킨다. 둘리틀 양은 그저 꽃 가게를 갖고 싶었을 뿐이었으며, 히긴스 교수의 어머니인 히긴스 부인이 교육 후 달라질 둘리틀 양의 인생을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며 히긴스 교수를
말림에도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데에 잔뜩 흥분한 그는 완벽한 교육을 통해 둘리틀 양의 발음을 교정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둘리틀 양은 자신을 하나의 존재로 보지 않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도구로만 보았던 히긴스 교수와 피커링 대령에게 분노하며 자신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냐며, 이
말투로는 꽃을 팔 수 없다고 소리친다. 뿐만 아니라 히긴스 교수의 장난으로 졸지에 벼락 부자가 된 둘리틀
양의 아버지도 히긴스 교수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자신을 중산층의 감옥에 몰아 넣었으며 자신은 더 이상
자유를 누릴 수 없다고 한탄한다. 히긴스 교수와 피커링 대령의 관점에서 둘리틀 양과 둘리틀 씨는 오히려
지위 상승을 가능하게 해준 그들에게 고마워 해야 하지만, 둘리틀 양과 둘리틀 씨는 배은 망덕하게도 그들을
원망하며 불행해 한다. 그들이 삶의 터전으로부터 자신들을 추방시켰으나 약속된 땅에는 전혀 젖과 꿀이
흐르지 않고, 전과 똑같이 여러 문제가 존재하였으며, 거기에
자신과 맞지 않는 환경이었던 것이다.
동남아는 두 차례에 걸친 계몽의 시기를 겪는다. 첫 번째는 제국의 식민화이다. 정상적인 식민지운영을 위해 제국은
선교사와 관료들은 동남아 현지인들을 자신들의 식대로 교화하고 계몽한다. 이 과정에서 국가나 영토의 개념이
없던 동남아는 처음으로 근대 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두 번째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끝나고, 식민 국가들이 독립 국가로 재탄생하며 선진 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급에 의한 계몽 운동이다. 애써 선진 문물을 받아 들이고,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 국가를
세우고 자체 정부를 수립했음에도 둘리틀 양은 여전히 자리를 잡지 못하며 과거로 돌아가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지니는 저력, 「동남아문화산책」에서 언급되었던 그들 고유의 문화 패턴과 의미 체계 안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적어도 예속된 구조에서는 벗어나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동남아문화 산책」, 신윤환, 창비, 2008
「피그말리온」, 조지 버나드 쇼, 열린책들, 2011
「문화의 해석」, 클리포드 기어츠,
까치, 2009
「검은 피부, 하얀 가면」, 프란츠
파농, 아프리카, 2014
**수업 시간에 썼던 서평이다. 어설픈 점도 많지만, 기록해 두는 데 의의를 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