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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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571] 시계태엽 오렌지

 

 

 

 

 

 폭력과 범죄 행위가 많아지고 있는 우리 사회

 

요즘 뉴스를 보면 종종 엽기적인 사건들을 접하게 된다. 한 중년 여성이 슈퍼마켓 안에서 여중생에게 심한 욕설과 폭행을 가한다거나 지하철 안에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노인에게 반말로 막말을 하는 등 눈살 찌푸리게 하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 경제의 호불황과 사람들의 분노에는 어떠한 상관 관계가 있는 것일까?  경기가 좋지 않을수록 우리나라 사람들이 표출하는 분노의 형태가 도가 지나치고 있다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뿐만 아니라 살인이라는 단어도 뉴스나 언론에서 볼 수 있다. 어마어마한 빚을 감당하지 못해 자신의 친가족들을 살해하고 마는 가장에서부터 아무 죄도 없는 자식들을 무참히 폭행한 끝에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 마는 일까지. 다행히도 요즘은 그런 사건이 터지지 않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묻지마 살인', '연쇄 성 범죄 사건'으로 인해 전국이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 이런 끔찍한 사건들은 일본 또는 다른 나라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우리나라도 지극히 정상적인 사회라고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만약에 한 사회에 '도덕' '윤리'. 이런 가치들이 영원히 사라진다면 그 사회는 악의 무리들이 판을 치는 고담 도시보다 더 심한 생지옥처럼 변할 것이다. 생각하기도 싫은 저주받은 사회의 모습은 배트맨이 살고 있는 고담 도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앤서니 버지스의『시계태엽 오렌지』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시계태엽 오렌지』는 원작 소설보다 스탠리 큐브릭의 동명 영화가 더 유명하다. 소설 속 엽기적인 장면들을 영상으로 담아냄으로써 원작보다 더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는 평이 많았으며 개봉 당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강한 폭력 묘사와 약물복용, 강간장면 등을 이유로 영국에서는 수십년간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다. 이 유명한(?) 영화를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그 영상의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겠지만 원작이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는 엽기와 충격 역시 무시 못한다. 충격 정도는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윤리적인 만행만큼이나 읽는 독자들을 분노케 할 수 있다.

 

 

 

 폭력성 짙은 소설로만 볼 수 없는 『시계태엽 오렌지』

 

원작 소설에서도 과도한 폭력과 노골적인 성 묘사가 등장한다.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라나고 무비판적으로 그러한 사회폭력의 일부로서 작용하는 16세의 알렉스는 환락과 성(性), 물질적 욕망의 본성에 충실하게 폭행, 강도, 마약, 강간 등을 서슴지 않고 자행한다. 특히 소설 초반부에 알렉스와 그의 일행등인 소설가의 부인을 윤간하는 장면은 아마도 세계문학 사상 최악의 장면일 것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원칙에 반발하려는 악동 기질이 보이고 있는 알렉스의 모습은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홀든 콜필드를 연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알렉스에 비하면 홀든의 악동 기질은 새 발의 피다. 알렉스는 자신이 하는 행동의 결과에 대해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고 그저 매번 비행을 저지를 뿐이다. 급기야 살인을 저지르고 14년 형을 언도받고 교도소에 수감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교도소에 수감된 알렉스는 교도소 생활을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요량으로 국가에서 시험적으로 시도하는 새로운 교정 방법에 자원하게 된다. 루도비코 요법이라고 이름붙여진 이 실험은 일종의 조건 반사적인 세뇌훈련을 통해서 인간의 폭력성을 억제하는 강력한 거부반응들을 알렉스의 몸에 각인시켜 놓는다. 짧은 시간내에 범죄자들을 '개조'하여 교도소에서 방출시키고 남는 공간에 사상범들을 수용하려는 루도비코 프로젝트는 인간의 자유의사와는 무관한 국가 권력의 인간 의식영역에 대한 지배기제에 다름 아니다. 알렉스 개인의 자기반성과 교화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그저 마치 감겨진 시계태엽처럼 외부의 공권력에 의해 주입되어지고 프로그램 되어진 것일 뿐이다. 범죄적 속성을 통제할 수 있다는 국가권력의 극단적인 믿음이 만들어 낸 무시무시한 형벌인 것이다. 이처럼 강요된 선(善)은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앗아가버린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인생을 개척해가는 인간 본연의 모습은 파괴하게 된다.

 

제목인 '시계태엽 오렌지'(Clockwork Orange)는 '시계태엽'과 과일 '오렌지'를 합친 말로, '조직화된 사회에서 마치 기계의 일부분처럼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해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나타나는 폭력과 그것을 억압하고 통제하려는 국가의 인권침해, 인간의 본성마저도 바꾸려는 현대의학의 오만함과 정치행정의 부도덕함, 그것을 놓칠세라 이용하는 현대 언론의 선정주의를 풍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소설 제목이 말해주고 있듯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바라보는 버지스의 시선은 무척 냉소적이다.

 

 

 

 

 위험한, 너무나도 위험한 사회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개조'하거나 '무력화'해서 아예 범죄를 저지를 생각도 못하게 하는 루도비코 요법은 이제는 소설 속 엽기적인 치료 방법이 아니다. 성 범죄자들이 더 이상 재발 범죄 행위를 일어나기 않기 위해서 화학적 거세를 시행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에 대해서 지금도 논란이 남아 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당연한 일이지만, 격분하게 된다. 처참하게 희생당한 피해자를 생각하면 짐승 같은 범죄자에게 어떤 처벌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화학적 거세는 물론 만일 세상에 실제로 존재한다면 '루도비코'를 병째 투약하고 싶은 심정이 든다. 그러나 성폭행 범죄자에 대한 대중적 증오감에 편승한 법제화는 인권 침해 우려가 있다는 비판적인 입장도 있다.

 

버지스에게 있어서 루도비코 제도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해하고 억업하는 수단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소설 속 알렉스보다 더 악랄하고 지능적인 범죄 행위가 일어나고 이상 그에 대한 상응한 처벌 수단도 필요하다. 그야말로 루도비코의 역설이다.

 

우리 사회에 벌어지고 있는 극악무도한 범죄를 강력하게 처벌할 수 있는 규제를 도입하느냐 안 하느냐에 떠나서 이 소설을 읽으면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모든 인간은 제 아무리 강력한 외부 통제를 받더라도 완벽한 개조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수 차례 범죄 전력이 있는 사람들 중에는 오랜 복역 생활 후에 제2의 인생을 살아가기도 한다. 비록 전과자 이력이 사회 진출에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기는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반성하거나 다시 한 번 새로운 인생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범죄자에 대한 통제가 재발 범죄 행위를 막을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더라도 잊지 말아야하는 것은 그 사람을 완벽하게 '착한 사람'으로 변하게끔 만들 수 있다는 허황된 믿음은 금물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선과 악, 이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실체를 분명하게 구분하려고 한다. 특정 사람의 행동을 통해 우리는 저 행동에 대해서 '선하다, 악하다'라고 구분할 수 있다. 한 여자가 갑자기 옆에 지나가는 사람을 무심코 폭행을 가한다면 분명 그 여자는 잘못된 행동이며 악의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그 여자가 폭력을 가하기 전까지는 그 사람이 과연 선한지 악한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결국에는 행동에 의한 실천에 의해서 구분할 뿐이다.  공동체의 규범이나 법률적 규칙은 인간이 오랜 세월동안 실천을 통해 체득한 결과를 형상화한 것이다. 결국 선이라 함은 인간이 다수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사회통제 장치가 고도화된 현대에서는 개인들이 점차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유 공간이 좁아지게 된다면 자신의 행위에 대한 반성의 기회가 그만큼 박탈된다. 주체적인 반성의 능력을 잃어버린 사회는 윤리와 도덕에 무감각해지게 된다.

 

'처벌'과 '통제'가 옳다고 보는 대중의 인식은 범죄자 스스로 반성할 수 있는 기회만 박탈되는 것이 아니라 본의 아니게 그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범죄자가 된다. '막말녀', '폭행녀'로 한 번 낙인찍힌 가해자는 수많은 네티즌들로부터 인신공격성 비난을 받을 뿐더러 강제로 옷이 발가벗겨지는 것처럼 개인 신상 정보마저도 낱낱이 공개되고 만다. 자신들이 이러한 행동들인 비윤리적이면서도 악의적인 행동에 대한 마땅한 처벌이라고 인식하지만 한낱 익명성을 이용한 '언어'로 이루어진 폭력이다.  범죄자라고 해도 그 사람의 신상 정보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은 엄연히 인권 침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집단적 통제는 개인의 자유 의지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완전한 삶을 송두리째 박탈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잇단 비윤리적인 사건들이 발생하는 사회도 '위험한 사회'이지만 대중의 증오 감정에 휩쓸려 외부 통제만 가지고 범죄자의 인권은 묵살하거나 침해해도 좋다는 식의 사회 흐름 역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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