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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지능 - 공감의 시대를 위한 다윈의 지혜
최재천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피카츄는 '진화'할 것인가, 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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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또는 9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라면 '포켓몬 신드롬'을 일으켰던 일본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어느 생태계에도 속하지 않는 이 수수께끼 특수생명체들이 등장하는 일본의 만화는 전국 모든 어린이들을 열광케했다. '뽀로로'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어린이들이 가장 사랑했던 캐릭터가 피카츄가 아닐까 싶다. 귀엽고 앙증맞은 외모에다가 만화 주인공과 함께 등장했었기에 100여 종이 넘는 수많은 포켓몬스터들 중에서 단언 인기가 많았고 '포켓몬스터'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피카츄였다.
만화 '포켓몬스터'가 일본에 처음으로 소개되었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의 열풍 못지 않게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100여 개가 넘는 포켓몬 캐릭터(오리지널 포켓몬스터 1기 방영 당시 포켓몬의 수는 151종이었다. 지금도 포켓몬의 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포켓몬 빵에 포함되어 있는 스티커를 모았기 때문이다. 현재도 다양한 버전의 시리즈가 나오고 있는데 아마도 지금까지 나온 만화를 포함하면 포켓몬스터의 수는 수천여 종이 넘을 것이다)가 매 한 편의 에피소드마다 등장함으로써 흥미를 유발했을 뿐만 아니라 몬스터들 간의 대결 구도 그리고 그러한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좀 더 강한 몬스터로 업그레이트하여 '진화'를 해야한다는 구도가 만화를 시청하는 어린이들에게 '경쟁심'과 '소유욕'을 유발하도록 만드는 은근한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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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일으킨 포켓몬스터 스티커 열풍은 단지 캐릭터 이미지의 대중적인 호감도만은 아니라 스티커를 모음으로써 자신도 만화 속 주인공 지우처럼 몬스터를 잡으려고 하는 소유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가상의 소유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스티커에 집착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아이들의 심리에는 '소유욕', '경쟁심'이라는 코드가 있는 만화의 스토리텔링의 영향이 컸다.
포켓몬스터와 관련해서 사람들마다 재미있는 추억 하나가 있기 마련인데 그 중 하나가 포켓몬스터 빵 안에 들어 있는 스티커를 모으는 것이다. 151종의 포켓몬스터 스티커를 다 모으기 위해 하루에 수십번 문방구에 드나들며 빵을 구입한 사람이 많았다. 오로지 빵을 먹기 보다는 조그마한 스티커를 모으기 위해서다. 얼마나 스티커에 집착했냐면 어떤 아이들은 스티커만 가져간 채 한 입 베어 물지 못한 빵을 쓰레기통에 버렸을 정도였다. 이러한 포켓몬스터 캐릭터 빵과 스티커의 성공은 타 제빵회사의 마케팅에 그 영향을 미쳤다. 그 후로 캐릭터가 그려진 스티커가 들어있는 빵들이 등장했지만 포켓몬스터 스티커의 열풍만큼 미치지 못했다. 캐릭터 이미지가 들어간 제품이 망할 수 있었던 것은 포켓몬스터 빵의 인기를 받쳐 준 만화의 영향력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아이들이 포켓몬스터 스티커를 모은 이유는 단지 그 캐릭터 이미지가 호감이 가서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은 가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진짜 세상에서 실제로 구현하고 싶어하려는 마음이 있다. 실제로 되지 않더라도 그것과 관련되거나 유사한 대상을 통해서 욕구를 충족시키려 한다. 만화 에피소드에 빈번이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몬스터 사냥 그리고 자신이 잡은 몬스터를 키우고, 다른 몬스터 간의 대립 설정 등 만화 속에서만 가능하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한 실제 세계에 살고 있ㄴ는 어린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포켓몬스터 스티커를 모으는 것 밖에 없다. 결국 만화 속 이야기에 설정된 전개 구도, 즉 스토리텔링의 힘이 아이들을 조그만한 스티커에 열광하도록 만든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만화 '포켓몬스터'는 단순히 재미있는 만화를 넘어서 만화 속에 등장하는 몬스터를 갖고 싶은 소유욕을 불러일으킨다는 점, 그리고 진화를 거듭하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몬스터들은 어린이들에게 또 다른 힘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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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서, 만화 포켓몬스터의 에피소드 속에는 어린이들의 감정을 자극할 정도로 '경쟁'과 '소유욕'이라는 코드를 은근슬쩍 심어 놓았다고 설명했는데 그러한 의도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바로 1기 초창기 때 '피카츄와 라이츄'의 대결구도가 등장했던 편이다.
지우와 피카츄는 전국에 위치한 체육관을 전전하면서 그 곳에서 체육관장들의 포켓몬들과 대결을 펼친다. 그리고 그런 대결에서 승리를 하면 일명 '포켓몬 배지'를 획들할 수 있다. 지우 일행은 여행을 하면서 포켓몬과의 대결에서 연전연승하는 라이츄를 훈련하고 있는 포켓몬 체육관장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여느 에피소드와 다름없이 패기가 넘쳤던 지우와 피카츄는 체육관장의 라이츄를 상대하게 되지만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한 채 지고 만다. 자신만만했던 대결에서 대패를 하게 되자 크게 좌절을 하게 된 지우는 한 때 포켓몬 체육관장으로 활동했던 동료들, 이슬이와 웅이 그리고 자신에게 크나큰 패배를 안겨준 체육관장로부터 똑같은 내용의 조언을 듣게 된다.
"피카츄가 라이츄를 이기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카츄를 진화시킬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지우는 한동안 고민을 하게 된다. 여행길에서 동고동락하면서 정이 들었던 피카츄를 라이츄로 진화시킨다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피카츄가 라이츄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번개의 돌' 이 있어야 한다. 피카츄는 다른 포켓몬과 달리 아무리 능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도 라이츄로 진화할 수 없는 종이다. 단지 '번개의 돌'을 통해서만 라이츄로 진화할 수 있다. 하지만 라이츄로 진화하면 그토록 좋아했던 노란 피카츄의 모습을 이제는 볼 수 없으며 한 번 진화되면 원래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또 번개의 돌을 통해 진화할 수 있는 기회도 피카츄 그리고 그의 동료이자 트레이너인 지우의 입장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라이츄를 이기기 위해서는 피카츄는 좀 더 강한 라이츄로 진화시켜야 한다.
과연 지우는 포켓몬 배지를 획득하기 위해서 피카츄를 진화시킬 것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피카츄를 위해서 진화의 작용을 포기하고 말 것인가?
강하고 완벽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진화를 해야한다고?
'진화'와 관련해서 글의 초반부터 포켓몬스터 옛 에피소드까지 들먹이는 이유는 만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진화'라는 개념이 잘못 되었거니와 만화 시청을 통해 왜곡된 의미를 받아들이게 되는 문제점을 쉽게 압축해서 설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화'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적자생존', '약육강식'이다. '적자생존'은 간단히 말하자면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생물이나 집단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와 비슷한 것이 약한 생물이 강한 생물에게 잡아먹힌다는 뜻의 '약육강식'이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진화'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강하게 변화할 수 있는 과정이며 진화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종족 또는 생물들 앞에는 '미개'라는 단어를 붙여 '열성적 존재'로 바라보는 인식을 낳게 되었다.
결국 잘못된 대중들의 인식은 진화론을 주창한 다윈으로 엉뚱하게 불똥이 튀게 된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대중들은 그의 이론을 경쟁을 유도하며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강한 존재의 힘을 부각시켜 준다는,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기 마련이다. 잘못된 선입견의 전파는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다윈의 진화론을 인간사에 적용시킴으로써 '사회적 진보'를 내세웠고 그의 사촌인 프랜시스 골턴은 과학사에 있어서 최악의 학문이라고 평가받는 우생학을 만들 수 있었다. 다윈의 이론을 '적자생존'의 의미로 받아들인 골턴은 우수한 소질을 가진 인구의 증가가 많아야 하고 대신에 열악한 우성적 소질의 인구의 증가를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골턴의 우생학은 유태인 학실이라는 독일 나치스의 비인륜적 행동을 만드는 데 크게 일조했다.
진화론에 대한 대중의 왜곡된 이해는 비단 세계사적 착오의 사례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 비해 다윈의 사상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도 존재한다.『다윈 지능』을 쓴 최재천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나라는 제대로 된 다윈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후진국이다.
최 교수는『다윈 지능』을 통해 학자와 대중들에 의해 입혀진 잘못된 옷에 가려진 다윈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잘못 알려진 다윈 관련 용어들도 바로잡을 권하고 있다. 사실 다윈은 단지 '경쟁의 원리'를 강조하기 위해서 진화론을 설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환경에 따라 생물의 모습들에서 드러나는 차이점에 대해서 호기심을 품었으며 그러한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진화의 원리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화'라는 단어의 사용에 대해서 나름 고심한 역력이 있었다. 다윈에게 있어서는 진화는 고등한 존재가 살아남는 데 유리한 경쟁 체제의 과정으로 보려고 하지 않았다.
다윈 자신은 원래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을 펼쳐 보인다'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evolvere'에서 파생되어 나온 'evolution'이란 용어의 사용을 꺼려했다. 그 대신 그는 '세대 간 돌연변이' 또는 '수정된 상속'이라는 표현을 주로 썼다. 『종의 기원』이 판을 거듭하며 다윈은 결국 너무나 굳어 버린 용어인 'evolution'을 받아들이지만, 그의 일기에는 이 세상의 온갖 생명체들을 논할 때 "나는 결코 어느 것이 하등하거나 고등하다고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 최채천 『다윈 지능』중에서, pp 68 -
다윈의 진화론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용어가 바로 '자연 선택론' 이다. 다윈은 부모가 가지고 있는 형질이 후대로 전해져 내려올 때 자연선택을 통해서 주위 환경에 보다 잘 적응하는 형질이 선택되어 살아남아 내려옴으로써 진화가 일어난다고 주장하였다. 생물 개체는 같은 종이라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변이가 나타내게 되는데, 이 변이 중에서 자신의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변이가 있어서 선택이 일어나서, 결국 후대로 전해져 내려간다는 것이다. 이 때 주위 환경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생물은 같은 종이나 다른 종의 개체와 경쟁을 해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생존경쟁이다. 즉 '자연선택론'은 강한 생물이 약한 생물보다 환경적응에 유리한 입장이라고 설파하고 있는 예정적이면서도 절대적인 관점의 이론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리뷰에서는 '자연선택론'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생물학 교과서에는 '자연선택설'로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최 교수는 이미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이 증명되었기에 가설의 의미가 담긴 '자연선택설' 대신에 '자연선택론'을 쓸 것을 제안한다.
다윈의 진화론을 아직도 '자연 선택설'이라고 부는 사람들이 있지만 앞으로는 그런 실례를 범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다윈의 자연 선택에 관한 설명은 더 이상 가설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다. 지난 150년 동안 혹독한 검증 과정을 거쳐 당당히 이론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반드시 '자연 선택론' 또는 '자연 선택의 원리'라고 부를 것을 주문한다.
- 최채천 『다윈 지능』중에서, pp 31~32 -
이미 전세계적으로 다윈의 이론들이 검증되는 결과들이 많이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만 여전히 '자연선택설'로 쓰고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얼마나 다윈에 대해서 너무 무지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진화론에 관련해서 또 다른 왜곡의 논리는 자연 선택이 생물을 '완벽하게' 만들어 주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사실 자연선택설의 원리를 이해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생물은 오랜 세월동안 선택의 과정 끝에 결국 완벽한 존재로 가까워지는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 크게 반발했던 당시 영국의 종교계와 학계가 훗날 그의 이론에 대한 비난을 멈출 수 있었던 것은 진화론은 수긍했다라기보다는 오히려 다윈의 이론을 원숭이에서 '완벽한' 인간이 탄생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로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앞에서도 자연 선택론에 대해서 설명했듯이 인간 그리고 생물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유리한 번식의 과정을 선택하게 되는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환경'은 고정불변하지 않다. 그리고 제아무리 인간이 정보와 사회현상을 예측할 수 있는 원리와 특정 도구가 있다하더라도 환경의 변화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환경의 변화'는 생물을 완벽한 존재로 만들게끔하는 조건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환경의 변화에 인간과 생물은 정확하게 '맞춤식'으로 적응할 수도 없다.
'완벽함'을 위한 인위적인 변이의 위험성
앞서 이야기 하다 만 포켓몬스터 에피소드의 결론을 소개하자면 지우는 피카츄를 진화시키지 않은 채 그대로 '피카츄'의 모습으로 라이츄와 재대결하게 된다. 결국에는 만화 주인공 피카츄가 승리하고 만다. 그런데 첫 대결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피카츄가 자신보다 강한 라이츄와의 재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사실 피카츄와 싸웠던 라이츄는 단순히 포켓몬들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진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라이츄는 진화하기 이전 피카츄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공격 및 방어 기술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했으며 그러한 경험의 기회를 놓친 채 바로 라이츄로 진화해버렸던 것이다. 자신의 눈에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피카츄의 공격 기술에 라이츄는 이렇다 할 방어도 하지 못한 채 패배한다. 지우와 피카츄는 이러한 라이츄의 치명적인 약점을 간파하여 역으로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포켓몬 간의 대결에서 승리를 목적으로 '맞춤형'으로 진화해버린 라이츄의 사례는 '진화'에 대한 관점에서 본다면 눈 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피카츄에게 당한 라이츄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진화'는 완벽한 존재로 만들어질 수 있는 과정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강하고 우수한 품성을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진화 또는 변이는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우리나라에 키우고 있는 닭들이 조류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도 진화와 변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인식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양계장의 닭은 모두 달걀을 많이 낳기 위해서 '자연 선택'이 아닌 '인위적인 선택'을 통해 개량된 품종이다. 달걀을 많이 낳을 수 있는 우수한 품종의 닭만 키우다보니 달걀을 많이 낳지 못한 닭들 간의 경쟁이 사라지게 되고 종(種)의 유전적 다양성도 희박해진다. 이렇다보니 자연적인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개량 품종된 닭들은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견딜 수 있는 면역력조차 없으며 양계장 안에 바이러스가 감염되는 순간 모든 닭들이 죽게 된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인위적인 진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은 양계업에서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유전자의 구성을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질병의 위험을 미리 제거할 수 있다는 '맞춤 유전자'. '맞춤 아기' 도 치명적인 모순의 결함을 지니고 있다. 서울에 사는 모든 인구가 병에 걸리지 않는 정말 완벽한 유전자를 가졌다면 과연 이들중에 제 아무리 강력한 항생제에 살아남을 수 있는 무시무시한 바이러스 앞에서 살아남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지금 우리 사회는 '다윈 지능'이 필요해야 할 시점
진화는 철저하게 종족 번식을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자연현상의 원리에 대해서 우리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다윈은 벌과 개미와 같은 서로 돕고 사는 사회성 곤충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으며 그 후 다윈의 후계자들은 이기주의적 개체들이 구성되는 생태계에서도 이타주의적 개체들도 살아남는 이유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이타주의적 관점의 진화론을 소개하기에는 내용상 길어질 수 있고 자세한 내용은 책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기에 생략하겠다.
다만 자연 선택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타주의적 현상이 만들어 낸 진화의 산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쯤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현상은 진화는 번식 보존을 위한 경쟁 체제의 과정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 교수는 이제 우리 사회에는 '다윈 지능'(Darwinian inteligence)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다윈 지능'은 머리말에서만 언급될 뿐, 본문에서는 '다윈 지능'이 들어가는 문장을 찾아볼 수 없다. 문장 하나하나 마침표까지 읽어야 하는 독서 습관이 아니라서 놓칠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건 본문에서는 다윈의 진화론과 오늘날의 연구 성과들을 설명하고 있을뿐 '다윈 지능'의 정확한 정의 또는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 구체적인 설명조차 없다.
하지만 핵심 내용을 소개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 책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본문에서 소개된 다양한 진화 이론들을 통해서 독자는 옳고 그름을 따져가며 다윈의 진면목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다윈 지능이 어떤 방식으로 구현할 수 있을지 스스로 모색해봐야 한다.
책의 머리말에는 '다윈 지능'이 언급되기 전에 '집단 지능'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집단 지능'이란 협력하거나 경쟁을 통하여 얻게 되는 집단적 지적 능력을 말한다. '집단 지능'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SNS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SNS을 통해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사회 현상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거나 타인의 의견에 동의 또는 비판을 한다. 결국에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소통'이라는 행위에 있기에 가능하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에게 소통을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행위 중의 하나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사회에서의 '소통'의 능력은 부재중이다. 권력면에서 우위가 있는 기득권층은 자신의 입장에 좀 더 유리한 방향으로 만들기 위해서 상대방과의 소통을 무시한다거나 아예 자신의 입장에 반하는 의견들을 암묵적으로 또는 공공연하게 차단하기도 한다. 사회 내에서 강하다고 하는 자들의 논리에만 집중하게 되는 사회는 또 다른 문제점을 양산해낸다. 무조건 '강하고 나쁜 자'들이 살아남아야 하는 인식 하에 경쟁을 유도하게끔 분위기로 변하게 된다. 특히나 신자유주의의 영향이 드세져만 갈수록 우리 사회에서 문제점과 폐단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친한 동료보다 내가 앞서야 하며 '조작', '은폐'도 거리낌없이 할 정도로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러한 비도덕적인 아노미는 사람들 간의 신뢰마저 무너뜨리게 되며 소통은커녕 서로 반목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우리 사회가 소통하기 위해서는 '공감'이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공감'이란 상대방의 의견과 마음에 동의한다는 사전적 의미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정말 다양한 의견과 생각이 공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알며 그것을 검증하면서 개선해나갈 수 있는 적극적인 토론 및 대화의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비슷한 형태의 획일적인 유전자만 있는 사회 또는 개체가 살아남을 수 없듯이 우리 사회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학문의 지식에만 내세울 줄 알고 다른 학문의 존재를 무시하려는 스페셜리스트보다는 모든 학문의 지식을 아울러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는 다양성을 지닌 제너럴리스트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최 교수가 항상 강조했던 화두, 바로 통섭(統攝)이다. 통섭은 서로 다른 지식과의 만남이다. 다양한 분야가 만나 오래된 궁금증의 해답을 찾아내기도 하고 새로운 인류의 미래를 예고하기도 한다. 전혀 다르다고 생각되는 다양성의 조호와 어울림이야말로 좀 더 발전되는 미래의 사회로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