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표현 중에 '지적정직(知的正直, Intellectual Honesty)'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진리에 충실한 마음'이라고 풀이할 수 있는데, 모르는 것에 대해 아는 척하지 않은 솔직함을 뜻한다. 배움에 임할 때 지적정직의 원칙을 세운다면 적당히 짐작해서 답안을 작성하는 일을 결코 없을 것이다. 물론 틀렸다고 해서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분명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짐작으로 어설프게 아는 것이나 아는 척하는 것과 분명히 다르다. 그래서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고치고 확실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어 더 크게 발전할 수 있다. (pp 17)

 

 

 

 

 

 처음에 읽기 전에는 몰랐는데 오늘은 이 책 속 문장이 내 머리를 후려치는구나.

 

 지적정직의 원칙, 앞으로 공부하고 독서하는 데 있어서 절대로 잊지 말아야 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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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1-14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옳으신 말씀입니다.
저도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묻기를 주저하지 마시라...
물으면 그 순간만 쪽팔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묻지 않으면 계속 쪽팔리는겨~!!! ㅋ"

저 역시 묻는 순간에만 쪽팔리려고 노력 중 입니다 ㅠ.ㅠ

cyrus 2012-01-16 19:04   좋아요 0 | URL
차트랑공님, 혹시 직업이 교사이신가요?
랑공님이 학생들에게 해주시는 말도 머릿속에 새겨두어야 할 거 같은데요.
좋은 내용의 댓글 감사합니다. ^^

마녀고양이 2012-01-16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머리도 후려치네요... ^^

처음 알라딘 서재 시작할 때, 모르는 용어나 개념, 문장이 너무 많아서
정말 창피하고 말도 못 하곤 했던 기억이 문득나네요. 아는척하지 않는 솔직함,
기억하겠습니다.....

cyrus 2012-01-16 19:06   좋아요 0 | URL
ㅎㅎ 그래도 저는 마고님 서재에 들리면 심리학에 관한
내용을 알게 되는데요. 심리학에 관한 개념을 쉽게 설명하여
쓰신 페이퍼가 좋아요 ^^

차트랑 2012-01-17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학생들과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학생들로부터
외딴 섬의 낙도에가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건
어떠시냐는 제안을 자주 받고요 ㅠ.ㅠ
저도 그러고 싶은데 잘 안됩니다 ㅠ.ㅠ
 

 

 

 일진곰, 왕따곰, 선생님곰

 

 지난 주 일요일, 새해 첫 날 개그콘서트의 인기코너 '사마귀 유치원' 15회에서 학교 폭력 문제를 풍자하는 소재의 개그를 선보였다. 거기서 동요 '아기 곰 세 마리'를 패러디한 노래가 불러졌는데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곰 세 마리가 학교에 있어 / 일진곰, 왕따곰, 선생님곰

 

 일진곰은 괴롭혀, 왕따곰은 괴로워, 선생님곰은 나는 모른다

 

 으쓱으쓱 자란다

 

 

 

 TV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는 장면을 보면서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비록 웃음을 주기 위해 만든 패러디 가사라고 하지만 그 짧은 가사 안에는 현재 학교 안의 모습을 제대로 표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일진들은 자신보다 약한 왕따를 괴롭히고, 그들에게 당하기만 하는 왕따들은 학교 생활이 괴롭기만 하다. 그리고 선생님들은 학교 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폭력, 왕따 문제를 직접 발 벗고 나서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모른 척 할 뿐이다.

 

 

 

 

 침묵과 은폐가 만들어 낸 학교 폭력의 카르텔

 

 그렇다고 전국의 모든 학교 선생님들이 학생들의 폭력, 왕따 문제에 무조건 눈 감고 쉬쉬한다는 것은 아니다. 요즘 학교 폭력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을 뿐이지 오래 전부터 학교 폭력, 왕따 문제를 근절하는 데 앞장 섰던 분들이 많았으며 필자가 중학생, 고등학생 시절 때까지만해도 학교 내부 안에서는 학교 폭력, 왕따 문제를 방지하자는 홍보용 벽보 및 스티커를 볼 수 있었으며 1년 한 번씩은 각 학급 내에 학교 폭력 및 왕따 관련 실태를 조사하기도 했었다. 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학교 폭력 및 왕따 문제를 근절하려는 각종 훈육 프로그램과 홍보는 시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학교 폭력 및 왕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피해자 및 가해자 학생들 중심의 사후 처리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나 매뉴얼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학교 폭력 및 왕따 실태를 조사하고 난 뒤에 간단하게 훈육 방식으로 교육이 진행되었지만 학교 폭력의 심각성만 부각시켜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학교 폭력이나 왕따를 당했더라면 학생부장 선생님이나 상담실에 찾아오라거나 학교폭력 피해 관련 상담전화 번호만 알려줬다.

 

 정기적으로 학교 폭력 실태 조사를 하고 폭력, 왕따 방지에 대한 교육을 실시해도 일진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왕따는 자칫 자신의 처지를 선생님들에게 신고하면 피해가 커질까봐 신고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이런 학생들을 돌봐주고 보살펴야 하는 선생님들은 '나 몰라라' 한다. 성적과 대입을 중요시하는 교육 시스템 때문에 선생님들은 학교 폭력, 왕따 문제보다는 학생들이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특히 한 반에 30여 명 정도의 학생들을 돌봐야하는 담임 선생님 입장에서는 한 번에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학교 폭력, 왕따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기에는 벅차기만 하다.

 

 그러나 학교 폭력 문제를 선생님들이 직접 나서서 발본색원(拔本塞原) 하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학교 내 폭력과 왕따 문제는 완전히 해결하기는커녕 더욱 심각해진다.

 일진들은 더욱 기가 세져 약한 학생들만 골라 괴롭힌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으쓱한 곳에서 폭행을 가하며 그것을 목격한 동급생들마저도 자신들도 되려 피해받을까봐 모른척 한다. 그럴수록 괴롭힘을 당하는 왕따에게는 신체적, 정신적 상처가 더욱 깊어진다. 그리고 폭력에 대한 상처가 깊을수록 온전한 학교 생활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자신의 처한 상황을 알리고 싶어도 일진들의 보복이 더욱 두려울 뿐이다. 그들의 주먹질과 빌길질이 두려워도 가족과 선생님들에게 알리지 못한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직접 말 하지 않은 잘못된 관계를 모른 채 교실에 들어선다. 그리고 그런 불편한 관계의 진실을 눈치 챘어도 수수방관(袖手傍觀)한다.

 결국 학교 폭력과 왕따 문제는 일진, 왕따, 선생님들 간의 암묵과 은폐로 구성된 삼각 카르텔에 의해 만들어지고 점차 확대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담임·가해학생 부모 “당할만하니 당했겠지” 눈귀 닫아]

 

 한겨레 2012년 1월 12일

 

 

 

 

 

 

 

 학교라는 사회 내에서 존재하는 권력의 암묵적인 영향  

 

 

 

 

 

 

 

 

 

 

 

 

 

 

 

 

 

 

 

 

 오늘 자 한겨레에 실린 왕따 피해자 ㄱ군를 둘러싼 가해자들과 학교 당국의 모습은 학교라는 학생들로 이루어진 사회 속에서 왜곡된 권력 의식 구조와 거기서 잉태된 폭력 행태가 암묵적으로 횡행하는 이문열<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속에서 창조한 엄석대의 교실을 연상시킨다.

 단, 최근에 불거진 학교 내 일진이 학생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만 다를 뿐이다. 급장 엄석대는 단순히 폭력을 내세우는 억압적인 방법만으로 권력을 행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는 협박, 때로는 회유의 방식으로 자신에게 반항하는 학생들의 성원을 굴복시킨다. 특히 자신에게 맞서는 인물에 대해서는 강압적인 처벌성이 짙은 폭력을 행사하는 대신, 그의 주변 인물들을 괴롭히거나 집단 따돌림을 유도함으로써 철처하게 고립시킨다. 

 

 

 "급장이 부르면 다야?  급장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가서 대령해야 하느냐고?"

 

 그래도 나는 서울내기다운 강단으로 마지막 저항을 해 보았다. 그 때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 말이 떨어지자마자 구경하고 있던 아이들이 갑자기 큰소리로 웃어댔다. 내가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했다는 듯, 그때껏 나를 을러대던 두 녀석과 엄석대까지는 포함한 쉰 몇 명 모두가 홍소(哄笑)였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어 내가 한 말 어디가 웃게 만들었는지를 생각해 보고 있는데 미화부장이라는 녀석이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그럼, 급장이 부르는데 안 가?  어디 학교야?  어디서 왔어?  너희 반에는 급장도 없었어?"

 

 그런데 그 무슨 어이없는 의식의 굴절이었을까. 나는 문득 무엇인가 큰 잘못을 하고 있다는 느낌, 특히 담임 선생님이 부르시는데 뻗대고 있었던 것과 흡사한 착각이 일었다.

 

 

 - 이문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중에서 -  

  

 

 '나'(한병태)의 상식으로서는 급장은 단지 똑같은 반 친구이지 명령에 따라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전학한 반의 아이들에게 '엄석대'는 담임 선생님 같은 존재이다. 반 아이들에게는 오히려 이상한 존재는 '나'이다. 다수의 생각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소수'는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반 분위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엄석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권력을 인정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도 담임 교사와 학교 당국은 교실 내 분위기를 잘 알고 있지만 급장인 엄석대의 편을 들어 줌으로써 엄석대의 권력을 무참히 꺾어 버리는 새 담임 교사가 부임하기 전까지 그릇된 권력 행사를 묵인하고 있다.

 

 

 

 

 

 

 

 

 

 

 

 

 

 

 

 

 

 

 

 * 영화는 1981년, 임권택 감독에 의해 제작되었음 (원작 소설은 1980년에 발표)

 

 

 

 학급이라는 특수적 공간 속에서 형성되는 권력의 문제를 형상화한 작품으로는 이문열의 유명한 소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 속 배경과 인물이 전자의 작품과 유사하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와 같은 인물로 이 소설에서는 '최기표'라는 인물이 나온다. 그는 반 아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

 그러나 이문열의 소설과 다른 것은 <우상의 눈물>에 등장하는 담임은 폭력으로 교실을 장악하는 기표의 비행을 길들이기 위해서 정당하지 못한 과정을 동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담임은 기표와 어울려 다니는 '재수파'들로부터 기표를 고립시킬 계획을 세우며 자신의 묵인 아래 모범생들이 기표에게 시험을 돕기 위한 컨닝 쪽지까지 전달되는 일까지 벌어진다. 이것이 기표의 비위를 건드려 반장인 임형우가 재수파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입원하지만 형우는 기표를 고발하지 않는 등 자신을 부각시키고 기표를 점차 소외시켜 자신은 친구를 고발하지 않는 의리의 사도가 된다. 결국 기표의 재수파는 반장 임형우를 폭행을 가한 일 이후로 와해된다.

 형우와 담임은 마지막 결정타로, 기표의 어려운 가정형편을 밝히고 모금운동을 벌인다. 이 이야기는 퍼지고 퍼져 신문에 나가고 영화로까지 만들어지게 된다. 반장과 선생의 합법적이고 계획적인 보이지 않는 계략에 두려움을 느낀 기표는 결국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는 짤막한 편지를 남기고 실종된다.

 결국 담임의 계획대로 기표는 선량한 학생으로 개화할 수 있었지만 치밀한 계획과 조작에 의해서 기표가 선도되는 과정은 위선적인 지도의 한계를 노출시키고 있다. 오직 '우의와 신뢰 가득한 말'로 가장함으로써 기표를 동정의 대상으로 만드는 위선적인 술책이었던 것이다.

 

 

 

 

 학교 폭력의 삼각 카르텔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솔직히 언급하자면 필자도 학창 시절에 왕따를 당해본 적이 있으며 동급생이 왕따 당하는 것을 그냥 목도한 적이 있었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폭력의 상황을 선생님에게 알리게 된다면 가해자들에게 더욱 더 심한 보복을 당할까봐 두려워서 스스로 침묵하게 되며 피해자가 아닌 폭력의 목격자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을 신고했다가는 자신에게도 폭력의 피해를 고스란히 받게 될까봐 스스로 묵인하려고 한다. 그리고 학교 폭력 사건이 발각되어서도 자신과는 관련이 없다는 양 은폐하는 진술을 할 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폭력의 가해자들은 자신의 범죄가 발각되지 않는 한 졸업할 때까지 학교 내 권력자로 군림하게 된다.

 

 최근에 학교 폭력, 왕따 문제가 심각하게 부상됨으로써 정부와 학교 당국에서는 근절하기 위한 법적 조치와 제체를 마련하는 데 고심하고 있다. 폭력 가해 학생들을 강제 전학 조치를 내리는 법규가 시행된다고 하던데 울산의 학교폭력 가해자 2명이 학교의 강제 전학 조치를 불복하는 일이 발생하는 걸로 봐서는 강제 전학만으로는 학교 폭력 문제가 제대로 해결될 수 없으며 그저 '언 발에 오줌누기'식으로 만든 조치로만 보일 뿐이다. 강제 전학을 한 폭력 가해자들이 새로운 학교에서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학교 폭력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폭력 가해자, 피해자 또는 폭력을 목격한 제3자의 학생들 그리고 선생님들 간에 이루어지는 암묵과 은폐의 카르텔을 무너뜨려야 한다. 사건이 제대로 공론화되지 못하면 <도가니>의 장애학생 성폭행 사건처럼 지나가는 시간 속에 영영 묻혀지는 불편한 추억으로 남게 되며 학교 폭력은 다음 학년의 학생들에게 되물림되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이를 무너뜨릴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이 마련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폭력 가해자들에게는 자신들이 행한 행동들이 '범죄'로 규정되는 것이며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기 위한 강력한 법적 체제가 필요하며 폭력을 당한 피해자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들의 가족까지 포함하여 폭력으로부터 야기된 정신적 상처들을 치유할 수 있도록 보장되어져야 한다.

 학교 폭력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엄석대가 다닌 학교처럼 학교 당국이 사건을 은폐하고 침묵해서는 안 되며 기표의 담임처럼 호의를 가장한 위선으로 안일하게 폭력 가해자들을 길들여서는 안 된다. 선생님들은 폭력 가해자에게는 교화에 중점을 둔 징벌을, 피해자들에게는 폭력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 학생들을 좋은 대학교에 보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사회 내에서 제대로 된 '인간'이 될 수 있도록 교육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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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2-01-13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왕따 문제의 가장 큰 책임을 선생님이 져야 한다는 건 반대입니다. 아이에게 공부만 잘 하면, 대학만 가면 뭐든 것을 용서하는 부모가... 선생님은 애 공부나 시키고 애 학원 갈 시간만 보장시켜주면 된다는 부모가... 그리고 그런 괴물 부모를 만들어낸 이 사회의 그늘을 먼저 봐야 하는 건 아닐까요?

cyrus 2012-01-13 10:43   좋아요 0 | URL
맞아요, 학생의 인성보다는 성적 중심의 대입을 우선시하는 교육 시스템이
문제지 비단 선생님들만 왕따 문제를 책임져야 하는건 아니죠.
모든 부모님들의 그런 건 아니지만 요즘에는 가해자 부모님들도
자녀들의 행위에 대해서 반성하도록 유도하지 않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까우면서도 씁쓸하더군요. 학교폭력 문제에 대해서 저와 다른
생각을 알 수 있었습니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

차트랑 2012-01-13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의 모든 관계자들이 침묵하는 데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겠습니다만
그 중 하나는 '인사고과 시스템'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교내에서 발생한 문제가 심각한 경우 소송으로 확대되기도 하는데요
사건이 소송으로 진행될 경우
외부에 알려지게 될 가능성이 높고
학교의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 뿐아니라
관련 학생들의 담임선생님은 인사에서 불리해집니다.
장학사를 꿈꾸는 교장선생님의 경우도 다르지 않아서
교내의 불편한 진실들을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노력하게 됩니다.
교내 관계자들이 소송까지 진행되는 상황을 막기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유입니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사건을 은폐한다거나 축소시키는 것이
관행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뭃론 모든 선생님들과 학교가 그러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교내 폭력의 원인은 다양할 것입니다.
미봉책이 아닌
근본적인 치료를 위한 연구가 절실 한 이 때에
널리 알리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매우 좋은 페이퍼를 써주셨습니다.
한 방 말고 두 방짜리 추천 시스템은 없나요?^^
추천을 한 방만 날려드리려니 서운해서요 ㅠ.ㅠ

cyrus 2012-01-13 10:53   좋아요 0 | URL
제가 학교 내 인사 시스템에서 모르고 있었는데 차트랑공님이 쓰신
댓글이 제가 몰랐던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사 간의 인사 시스템에서도 성과가 중요시하다보니 학교 입장에서는
학교 폭력 문제 해결에 소극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다고 생각이 드네요.

맥거핀 2012-01-13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말씀도 맞지요. 침묵과 카르텔의 문제도 있습니다만, (위에 조선인님도 얘기하셨듯) 아마 궁극적으로는 현재 학교폭력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는건, 이 사회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말할수도 있을 겁니다. 사회에서 어떠한 문제든지 돈이나 권력의 힘으로 해결되고, 결정되는 것을 이미 애들은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나쁜 일을 저지른 사람들이 결국 이 사회에서 별로 처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을 보니까 그대로 그 행태들을 배우는 거겠지요. 그러니 이것을 학교폭력 처벌, 청소년 처벌을 강화한다고 해결되지는 않을 겁니다. 사회는 그대로 엉망인데, 애들만 잡는다고 될까요..그게..

암튼 학교폭력은 현재 조직화되어 있고, 권력의 문제와 합쳐져 있다고 보여지니까요. 좀 다른 얘기겠지만, 박노자 님이 본인 블로그에서 학교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박노자 님 말로는 예전 자신이 어릴때 학교를 다니던 러시아에서도 학교폭력의 문제가 있었지만, 그것은 노동자의 자녀들이 인테리 자녀들을 괴롭히는 형태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것도 좀 웃긴 얘기긴 하지만) 박노자 자신도 그들의 심리를 이해하고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네 학교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게 도리어 부유한 애들이 가난한 애들을 괴롭혔으면 괴롭혔지, 그 반대는 아니죠.(학교폭력을 쉬쉬하고 학교에서 무마하려고 하는 이유도 그런 것과 관련이 있고..) 그러니 당하는 애들한테는 출구가 없죠. (<돼지의 왕>이라는 영화에서 잘 드러나지만요.) 법 집행마저도 현재는 경제력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도 공공연한 사실이고, 학교폭력을 하는 아이들도 그걸 잘 알고 있으니, 괴물같은 사회를 먼저 교정하지 않고서는 학교폭력은 해결로 나가기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cyrus 2012-01-16 19:08   좋아요 0 | URL
<돼지의 왕>이라면 맥거핀님 서재의 영화리뷰에 언급한 영화 맞죠?
언급하신 영화도 볼 수 있으면 봐야겠어요. 정말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단면적인 부분의 문제점만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교정해야되는데 말이죠. 학교 폭력 문제 해결이 어떻게
진행될지 두고봐야될거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12-01-14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대법원에서도 학교폭력으로 피해입은 학생이 생기면 가해학부모와 학교(교사 포함)도 책임이 있다고 했습니다.피해학생의 학부모가 학교 측과 접촉하면서 학교의 불성실한 태도에 또다른 상처를 받는 이가 많죠.그래서 그런 학부모들 거의 대부분이 분한 마음에 학교 측에 손해배상을 요구합니다.

2012-01-14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2-01-16 19:12   좋아요 0 | URL
교사의 자녀라는 걸 오늘 처음 알았어요. 학교 폭력 문제와 관련된
언론의 소식이 자주 들려올수록 학교라는 교육의 공간이 학생들을 위한
폭력의 장으로 변하게 된다는 게 무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만 하네요.
그런 장소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 입장에서는 일 할 의욕도
떨어지게 되겠고요..

마녀고양이 2012-01-16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문제는 결국 사회 문제와 직결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사회적 어려움이나 고통, 문제의 반영이 학교에서 재학 중인 학생 및 시스템에 그대로 반영된죠. 빈부 격차의 심화, 취업난, 그로 인한 공부 제일 주의, 챗바퀴에서 도는 현대 부모의 스트레스, 시스템적으로 관리하려는 학교 정책...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손대야하는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교과서 문제만 봐도 그렇습니다.

가해자 학생들에게만 떠넘기는 것, 가해자 부모나 교사에게 책임을 묻는 것,
과연..... 이게 모두 이분들만의 책임일지, 우리는 다들
제3자처럼 말만 하고 있는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cyrus 2012-01-16 19:1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최근에는 폭력 가해자 학생들의 성적부에 폭력 범죄 사실을
기록하겠다는데 결국에는 또 가해자 학생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게 되는 정책이 될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결국에는
눈에 보이는 단면적인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급급하다보니 정작
그것을 야기하는 사회 전체적인 문제점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과정이 씁쓸하기만 하네요/
 
꿀잠 삶의 시선 17
송경동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1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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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하기 참 힘들다, 노동자들의 비참한 일상을...

 

 어제 서울 역삼동에서 건물붕괴 현장에서 매몰됐던 인부 한 명이 끝내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는 비보를 접했다. 건물 바닥을 철거하는 리모델링 공사를 하다가 건물이 무너져버리는 바람에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박웅현<책은 도끼다>라는 책에서 본 내용이었는데 마르셀 프루스트는 신문 읽기를 '가증스럽고 음란한 행위'라고 말함으르써 혐오했다고 한다. 24시간 동안에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 사고 등과 같은 불행한 일들을 신문 독자들로 하여금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오락거리'로 변형시키고 있다고 봤다. 

 무엇보다도 프루스트가 신문기사를 싫어했던 것은 특정 사건에 대해서 '모든 문맥을 빼버리고 말하는' 방식의 문제점에 있다. 사건이 발생하는 발단, 과정 그리고 결과를 단 몇 줄로 압축시켜버리는 신문 기사의 내용이 독자들을 무감정적으로 변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모닝커피를 음미하면서 소파에 앉아 읽으면서 몇 만 명이 죽은 테러 사건을 보면서 희희낙락하거나 둔감한 반응을 보이는 우리 '위선적인' 독자를 프루스트는 싫어했다.

 

 일반 독자들보다 문학적인 감수성이 깊었고 압축적인 내용의 신문기사를 싫어했다던 프루스트라면 송경동 시인의 '설명하기 참 힘들다' 라는 시를 읽고 찬사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설명하기 참 힘들다 - 어느 지하생활자의 보고

 

 

 지하 토목공사 때 파 들어갈 땅 주변 붕괴를 막기 위해 수직 H형 철골빔들을 박는다. 이것을 파일이라 한다. 땅을 파 들어가며 이 파일들이 주변의 지압을 견디게 하기 위해 다시 철골빔을 마주본 파일 사이사이에 수평으로 대준다. 이것을 버팀목이라고 한다. 20~30m짜리 버팀목은 없어 두 토막 내지 세 토막을 이어야 하는데, 이 연결 마디의 꺾임을 막기 위해 두 버팀목이 맞닿는 부위에 패드처럼 쇠판을 얹는다. 이것을 연결판이라고 한다. 연결판은 서른 두개의 볼트로 두 토막을 이어 휨을 방지해 준다. 이때 볼트 구멍을 꼭 드릴를 사용해 뚫어야 한다. 산소절단기를 댈 경우 열변형으로 버팀 강도 저하가 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꼭 산소절단기를 이요해 그 구멍을 뚫었다. 붙잡을 것 하나 없는 허공에서 폭 30cm짜리 빔을 딛고 30kg이 넘는 핸드드릴을 사용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지만 작업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버팀부 주위에 전등을 많이 달지 않는 것도 이곳이 안전계단으로 다니는 감리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곳에서 오늘 유씨가 떨어져 죽었다. 재수가 없거나 발을 헛디뎠을 뿐이다. (pp 19)

 

 

  

 

 건축 공사 현장에서 노동 경험이 많은 시인답게 그의 시에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공사 관련 용어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수직 H형 철골빔', '연결판', '산소절단기' 등 건축 및 토목공사를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봄직한 단어들이다. 시의 중반부까지는 토목공사의 전체적인 장면이 설명되다가 마지막에서야 단 두 문장으로 토목공사에 참여한 인부의 이야기가 언급된다. 

 하지만 인부는 공사 현장에서 실족사하고 만다. 그리고 '재수가 없거나 발을 헛디뎠을 뿐이다'라고 서술하면서 시가 마무리되고 있다. 토목공사 노동자가 아니라면 직접 목격할 수 없는 불행한 사고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기에 독자들은 토목공사 노동자들이 겪게 되는 실상을 시를 통해서 생생하게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시의 부제는 '어느 지하생활자의 보고' 이다. '설명하기 참 힘들다'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인의 입장에서는 토목공사 노동 경험에 전무한 독자들에게 지하생활자들의 일상을 보고한다는 게 힘들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자들은 '노동'은 신체를 고되게 하고 힘든 행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삶과 관련이 없는 '노동자'의 고통스러운 일상과 슬픈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연애, 폭력, 부정부패. 가십거리 등과 같은 자극적이면서도 감각적인 기사만 제공하는 TV와 언론은 노동자의 추락사만 짤막하게 압축, 언급할 뿐 노동자들이 겪게 되는 작업환경을 나열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지상의 공간 속에 살면서도 경제적인 능력이 상실되었고 심지어 지상의 인간들에게 눈에 띄지 못하는 '지하생활자'인 것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노동자'는 죽어서 보험금을 남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낸 '지하생활자'들이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게 되고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계기가 아이러니하게도 죽고 난 이후부터이다. 안타까운 것은 짧으면서도 한 번뿐인 인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노동현장에서 불귀객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신문 지면을 통해서 노동현장에서 불귀객이 된 사연을 알게 된다. 그것도 하루 아침에 수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이승에서 잠시나마.

 

 

 뒷빽

 

 

 김씨가 H빔에서 떨어져 죽고 나서야
 나는 깜짝 놀랐다
 고작 시급 3천 원에 목메던 그의 몸값이
 1억이 넘는다니 도대체 이해가 안 됐다

 

 그 후 나 역시 자본주의를 우습게 아는
 든든한 빽을 가졌다
 김씨가 산 것은 50년이지만
 죽은 순간은 5초도 안 된다

 

 여차하면 죽어버리자
 내 삶의 짧은 5초도
 최소한 1억쯤은 된다는 것을 알려주자
 그간 내가 몇백 번의 죽음을 경혐했는지도
 말해주자

 

 (pp 90)

 

 

 

 노동자들은 죽어서 신문 지면상에 이름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매겨진 보험금도 남겨진다. 살아 생전 쥐꼬리만한 시급을 받으면서도 일상을 연명해오던 그들이 죽고 나서야 평생 모으기도 힘든 1억의 보험금을 받는 인생의 한 장면. 수십 년동안 돈을 벌어도 1억을 만들기 어려운 시대에 단 5초라는 죽음의 과정만 거치면 손에 쥐어보지 못한 채 얻는 보험금. 시인은 노동자들의 삶이 경제적으로 보장받지 못하는 자본주의의 현실을 냉소적으로 조롱하고 있다.

 

 

 

 

 처절한 노동작업 속에 발견한 희망과 연대

 

 송경동 시인의 시 속에는 사회로부터 외면받고 핍박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참한 일상과 남몰래 삼켜야만했던 사회에 대한 울분이 담긴 목소리가 담겨져 있다. 시라는 것은 프루스트가 혐오했던 압축적인 내용의 신문기사보다 시인이 바라보는 장면을 단 몇 줄로 표현해야 하며 이에 대한 감정도 절제하듯이 문장 속에 숨길 수 있는 특수한 글이다.

 하지만 송경동 시인의 시는 내용이 길지 않으면서도 노동자들의 고통스로운 감정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이 경험할 수 없는 처절한 노동작업이 이루어지는 '지하생활자'들의 세계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백무산 시인이 말처럼 그의 시는 '바보스러우면서도 정직하다'

 

  하지만 시인은 노동자들의 고된 일상만 바라본 것은 아니다. 힘들고 처절한 노동현장 속에서도 삶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노동자들의 공동체적 연대감을 정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쇠밥

 

 

 흙먼지에 섞어 먹는 밥 
 싱거우면 녹가루에 비벼 먹고 
 석면가루도 흩뿌려 먹는 밥

 

 체인블록으로 땡겨야 제 맛인 밥
 찰진 맛 좋으면 오함마로 떡쳐 먹고
 일 없으면 고층 빔 위에 혼자라도 서서 먹는 밥

 

 시큼한 게 좋으면 오수관 때우면 먹고 
 새콤한 게 좋으면 가스관 때우면 먹고 
 연장이 모자라면 이빨로 물어뜯어서라도 먹어야하는 밥


 무엇보다 나눠 먹는 밥


 1톤짜리 앵글 져다 공평하게 나눠 먹고 
 크레인 포클레인 지게차 기사도 불러 
 함께 비지땀 흘리며 먹는 밥

 

 석양에 노을이 질 때면
 아내와 아이도 모두 사이좋게 앉아 먹는
 그 쇠밥

 

  (pp 26~27) 

  

 

 

 흙먼지, 녹가루, 석면가루 등 몸에 좋지 않은 유해한 먼지가 묻은 밥이라도 노동자들에게는 힘든 노동 뒤에 먹는 밥은 꿀맛이다. 특히 3연 중에 '연장이 모자라면 이빨로 물어뜯어서라도 먹어야하는 밥'이라는 구절에서는 고된 작업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노동자 특유의 굳센 근성을 볼 수 있다.

 

 

 꿀잠

 


 전남 여천군 쌍봉면 주삼리 끝자락
 남해화학 보수공사현장 가면 지금도
 식판 가득 고봉으로 머슴밥 먹고 
 유류탱크 및 그늘에 누워 선잠 든 사람 있으리

 

 이삼십 분 눈 붙임이지만 그 맛
 간밤 갈대밭 우그러뜨리던 그 짓보다 찰져
 신문쪼가리 석면쪼가리 
 깔기도 전에 몰려들던 몽환

 

 필사적으로 필사적으로 
 꿈자락 붙들고 늘어지다가도 
 소혀처럼 따가운 햇볕이 날름 이마를 훑으면
 비실비실 눈감은 채로 
 남은 그늘 찾아 옮기던 순한 행렬  

 

 (pp 54)

 

 

 힘든 노동작업을 하고 난 뒤에 먹는 쇠밥이 '꿀맛'이라면 이삼십 분 새우잠은 '꿀잠'이다. 독자들에게는 지나치기 쉽고 외면해버리는 시간들이지만 이들에게는 고된 노동을 잠시나마 잊혀지게 만드는 달콤한 시간이다. 노동을 해보지 않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다. 노동자들에게 '꿀잠'은 신체적, 정신적인 휴식의 과정이 아니라 가난한 일상 속에서도 그들이 소망하는 희망의 삶을 꿈꾸게 만드는 행복한 망중한이다. '꿀밥'과 '꿀잠'이 있기에 노동자들은 남들보다 먼저 일찍 일어나 남들보다 더 힘든 일을,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윤과 생산을 더 많이 창출하도록 더욱 박차를 가하는 바쁜 자본주의의 일상이 노동자들에게는 삶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긍정적 자기위안의 기회마저 사라지게끔 만들고 있다. 

 전국의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추운 날씨 속에서도 투쟁을 하는 것은 단지 자신들의 경제적 지위만 되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꿀밥'을 먹을 수 있으며 '꿀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일만 하는 노동자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원한다.

 

 

싸우려면 끝까지 싸워야지
도중에 그만두면 영원히 찌그러진다는 것

 

 - 송경동「마음의 창살」중에서, pp 55 -

 

 

 

 시인이 쓴 저 구절처럼 노동자들은 잃어버린 생존권을 찾기 위해서 오늘도 자본가에 맞서 싸우고 있다. 경제적 자립성과 생존권은 이미 자본가들과 전경의 구둣발에 찌그러질대로 찌그러졌지만 남은 인생동안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는 희망의 기대감만큼은 그들에 의해 찌그러지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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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1-12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루스트가 정말 말은 잘했구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사람을 편협하게 만들고 오만하게 만들지.
신문나 뉴스 한번 본 걸 가지고 전체를 본듯 착각하게 만드는 거.
책은 도끼다. 제목이 특이한데 왜 그런 제목을 썼을지 궁금하긴 하다.
시집에 대해 얘기 안하고 엄한 책이 꽂히다니 나도 참...ㅠ

cyrus 2012-01-12 23:10   좋아요 0 | URL
한 번 읽어보세요, 책에 소개된 박웅현씨의 독서법도 좋고요..
책 속에 좋은 구절도 많이 볼 수 있답니다. 덕분에 이 책을 통해서
김훈과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어보려고 해요. ^^

차트랑 2012-01-12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적 가치의 최고봉이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이 노동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인적 가치를 창출해내는 노동자들은 정작 그에 알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아니, 대우해주지 않는 사회입니다.

누군가는 "당신의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라고 했다는데....
정녕 아름답게 생각하지 않는 사회는 도대체 어떤 사회란 말인가요...
가치관과 행동관이 일치하지 않는 사회에게 우리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하는 것인가요...

글을 읽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어 마음이 몹시 무겁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글을 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습니다.
고맙습니다..

cyrus 2012-01-12 23:14   좋아요 0 | URL
아니에요. 저도 아무 것도 몰랐던 어렸을 때에는 노동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이 무척 강했어요. 요즘 저 같은 젊은 세대들도
막노동을 힘들고 더럽고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는 식으로 인식하듯이 말이죠.
하지만 송경동 시인의 시를 읽고나니 노동이라는 것도 무조건 힘든 일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상 속에서도
삶의 희망을 찾고 비록 짧지만 휴식을 통해서 행복을 얻는 모습들이
노동을 접하지 못한 저로써는 무척 새로웠습니다.
요즘 이 분의 산문집이 많이 읽혀지고 있는데 독자들이 시집들도
많이 읽혀졌으면 좋겠어요. 송경동 시인의 시 속에서는 정말
우리가 몰랐던 노동자들의 삶을 볼 수 있거든요 ^^

잘잘라 2012-01-13 0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과 1년도 안 된 얼마 전까지 건축 공사 현장 감리를 했고 또 봄이면 그 일을 시작할 예정이라 이건 꼭 얘기를 하고 싶어요.

'재수가 없거나 발을 헛디뎠을 뿐이다'라는 말을 공사 관리 감독관 처럼 얘기했다고 하셨는데, 그건 그렇지 않거든요. 감리자가 제일 신경쓰는게 안전 관리예요. 안전모, 안전띠 착용, 안전판 설치.. 물론 공사 규모에 따라 감리자가 상주하는 현장도 있고 그렇지 않은 현장도 있지만 아무튼 현장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제일 먼저 조사 대상이 되는 사람이 바로 감리자거든요. 물론 감리자가 할 일 중에 부실공사를 막는 것도 큰 일이지만 그보다는 안전 공사를 하는데 더 큰 역할을 해야 해요.

말씀하신 것처럼 공사현장은 항상 공기(공사기간)에 쫓기기 때문에 시공사는 안전에 소흘하기 쉬워요. 그러나 감리자는 감리자의 업무 중에 안전관리가 들어있기때문에 공사현장에서 그나마 공기보다 안전을 우선 순위에 둘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감리자예요. 감리자와 별도로 감독관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일하는 분도 있어요. 제 느낌에는 cyrus님이 얘기하신 '공사 관리 감독관'이란 아마도 '현장 소장'을 얘기하시는 것 같아요.

감리자든 감독관이든 현장소장이든 아무튼 현장에서 사망 사고가 났는데 저렇게 태평스런 얘기를 하는 경우는 없어요. 소속은 달라도 모두가 피고용인이라는 입장은 같은 것이고 맡은 업무에 따라 현장에서 발생한 사고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사람들인데 저렇게 간단히 남 일 처럼 얘기할 수는 없지요.

저도 송경동 시인의 책 읽고 있는데 많은 부분 공감하는 부분도 있는 반면 너무 노동자를 별개로 격리된 존재로 부각시키는 면도 있다고 생각해요. 댓글이 너무 길어지네요. 리뷰 쓰면서 제 생각을 더 정리해야 할 것 같아요.

cyrus 2012-01-13 10:47   좋아요 0 | URL
제가 노동 경험이 없어서 모르고 있었어요. 공사 관리 감독관이라는 것도
있고 현장 소장이라는 직책도 있었군요. 포핀스님의 지적이 아니었다면
제 글 때문에 공사 관리 감독관이라는 직업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비춰질 우려가 있었어요. 문제가 되는 내용을 수정해야겠어요.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

그런데 건축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하신다니 다치지 않도록
몸 조심하셨으면 해요 ^^

차트랑 2012-01-13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리 포핀스님은 모르시는게 도대체 무엇인가요??
매우 해박하시다보니 감탄스러워서 건방지게 리플을 달았습니다 ㅠ.ㅠ
 

 

 

 오늘 모 포털 사이트 블로그에 작성한 모 님의 국가장학금제도에 대한 글을 읽게 되었다. 역시 필자처럼 국가장학금제도의 문제점에 대해서 쓴 글이었는데 필자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단 환영했지만 그것보다는 그 분이 지금 처한 상황이 너무 안타깝게 느껴졌다.

 모 님은 신청기간을 잘못 알아버리는 바람에 인터넷 접수로만 가능하는 신청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국가장학금 인터넷 신청기간은 1월 4일까지였다.

 

 '국가장학금 미신청 시 모든 교내장학금 수혜대상 제외'라는 조건 아래 국가장학금 신청을 '의무화'하는 학교의 홍보가 비단 필자가 다니는 학교에서만 하는 줄 알았는 데 생각보다 전국 곳곳의 대학교에서도 학생들 사이에서 강요성(?) 있는 홍보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모 님이 다니는 학교도 그런 규정이 있다면 75만 원 정도 주는 국가장학금을 신청하지 못해서 교내장학금 200만 원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공부 열심히 해서 우수한 성적을 받아 과에서 1등을 했는데도 국가장학금을 신청하지 못해서 전액 장학금을 받지 못하는 상황, 누구나 이런 입장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너무나 억울하고 분할 것이다..

 

 며칠 전에 쓴 국가장학금 관련 글에서도 밝혔지만 국가장학금 신청기간이 끝난 지금도 필자가 다니는 모 대학교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여전히 성적우수장학금 제도 변경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학생들이 오히려 더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가끔 학교 게시판을 읽곤 하는데 어느 학생이 남긴 글이 지금 성적장학금 변경 제도에 대한 학생들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다.

 

 

 아 진짜 공부할 의욕 안생긴다..........

 1등했는데 기쁘지가 않다.......

 아 열심히 해서 받는 장학금이랑 소득이랑 뭔 상관인지 ........ 어의없네요

 

 

 

 필자도 처음에 교내성적우수장학금 변경 제도 소식을 접하면서 한순간에 기분이 맥 빠졌다. 거의 3년 만에 과 학년 내 1등을 해서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거라고 장담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제도가 바뀌는 바람에 전액이 아닌 70%만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국가장학금을 신청해서 수혜를 받는다면 나머지 30%는 받을 수 있지만 아직 수혜대상 결과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장담할 수가 없다.

 

 

 어떻게 보면 재수 없는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

 

 성적 잘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국가장학금 제도 도입으로 인한 교내장학금 변경 규정을 반기지 않고 있다. 특히 정말 며칠 간 집에 안 들어가고, 밤을 새가면서까지 도서관에서 공부를 열심히 했던 학생들에게는 정말 의욕 떨어지게 만드는 규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며칠 전에 쓴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존 롤즈의 정의의 제2원칙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학교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하려고 한다. 저소득층 학생들을 위해서 등록금 재원을 확충하기 위한 목적으로 교내장학금 범위를 축소하는 정책 규제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련다.

 

 

 

 다만...

 

 국가장학금 사연을 쓴 모 님의 사례처럼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학생들을 위한 국가장학금 본연의 의미가 퇴색될 우려가 있다.

 

 (1) 만약에 cyrus가 국가장학금을 신청하지 못해 교내 성적우수장학금 300만 원을 받지 못했다고 가정하자.

 

 (2) 그렇게 된다면 국가장학금을 지원하는 정부 입장에서는 제정비용비가 감소되어지고 대학교 입장에서는 cyrus에게 지급되어야 할 300만 원을 회수하게 됨으로써 이득을 볼 수 밖에 없다.

 

 (3) 그렇다면...  결국 국가장학금제도의 목적과 다르게 cyrus는 300만 원의 비용부담이 생기게 되어 그 적지 않은 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적은 시급의 알바를 해서라도 말이다.

 

 좀 웃긴 상황이지만..  국가장학금 신청 한 번 안한 것 때문에 좋지 않은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글에서 정작 말하고 싶은 것은 국가장학금 제도 내용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보다는 신청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구제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접수를 하지 못한 학부생들을 위해서 인터넷 접수 기간을 늘리던가 가능한 한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 내에서라도 오프라인 접수가 할 수 있도록 접수창구의 기회가 확대되어야 한다.

 필자의 개인적 경험상 '한국장학재단' 사이트에서만 가능하는 인터넷 접수도 문제점이 있었다. 신청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이름으로 된 공인인증서를 만들어야 한다. 공인인증서는 USB나 본인 컴퓨터 내 폴더에 따로 저장할 수 있지만 개인 휴대폰 메모리카드에도 저장할 수 있다.

 필자 같은 경우에는 USB가 구비되지 않아서 개인 휴대폰에 따로 저장했다. (휴대폰에 공인인증서를 저장하면 이와 관련된 어플이 설치된다) 그런데 국가장학재단 내 보안 프로그램 때문인지 몰라도 휴대폰에 저장된 공인인증서로는 인터넷 신청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방식으로 신청을 하면 프로그램이 강제로 종료되곤 했다. 그래서 휴대폰에 저장된 공인인증서로도 접수가 불가능한 점이 아쉬웠다.

 

 그리고 전국의 수많은 학생들이 신청하는 국가장학금제도라는 것을 감안해서 고객센터 전화상담서비스도 확대되어야 한다. 오늘도 필자는 국가장학금에 대해서 궁금한 부분이 있어서 고객샌터에 세 번을 전화를 했는데 통화량이 많아서 받을 수가 없었다.

 지난 주 인터넷 접수 기간에도 필자의 친구가 고객센터에 전화를 한 적이 있었는데 통화량이 많다는 이유로 전화를 받지 못했다고 들었다. 사실 접수 기간에는 통화량이 폭주하여 민원접수를 하지 못하는 경우는 당연하다. 그런데 인터넷 접수 기간이 끝난지 5일이 지났는데도 통화량이 많아서 민원접수를 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3월 달부터 올해부터 대학교를 다니게 되는 신입생을 대상으로 하는 국가장학금 신청 기간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이번에 드러난 국가장학금 제도의 미흡한 부분을 보완하고 학생들의 민원을 고려하여 좀 더 내실 있는 장학금제도로 발전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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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1-10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쉬운게 없군요~

그나저나 cyrus님 대단해요! 학년 1등은 어떻게 하면 되는거죠?^^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래요. 노력한 만큼 보답 받을 수 있는 사회라는걸 경험할 수 있음 좋겠는데 말이예요.

cyrus 2012-01-11 18:54   좋아요 0 | URL
그냥 열심히 공부했을 뿐입니다. 현맘님 말씀처럼 올해에도
노력한만큼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순오기 2012-01-10 0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엇이든 처음 실시할 때는 시행착오가 생기고, 추가로 구제책을 마련하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해요. 성적우수장학금은 소득과 관계없이 지급되어야 마땅하다 생각되네요. 결국 국가장학금 때문에 피해를 보는 학생들도 속출할 상황이라니~ 어'의'가 아니라 어'이'가 없네요.ㅜㅜ

순오기 2012-01-10 05:17   좋아요 0 | URL
제 서재 방명록과 아래 글에 남기신 답변 잘 봤어요.
신청기간 놓치지 않게 탁상일기에 적어뒀어요. 고맙습니다~ ^^

cyrus 2012-01-11 18:56   좋아요 0 | URL
그렇죠. 학교측에서는 성적우수장학금 수혜범위가 교내 장학금 중에서
많다는 이유만으로 변경을 불가피할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
학생들 입장에서는 수긍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처음 시행하는 제도라서 피해를 보는 학생들이 속출돌 수 밖에
없을거 같아요

꽃도둑 2012-01-10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학제도는 미국과 우리나라 밖에 없다고 들었습니다.
형평성에서도 그렇고 접근성에서도, 문제가 많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우리도 유럽처럼 등록금 상한제와 후불제를 도입하면 어떨까 싶은데...
공평하고 아주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아ㅡ 우리나라 대학관계자들이 촛불집회하려나?..ㅎㅎ
1등 하고도 별로 달갑지 않다면 장학금 제도의 본디 모습을 잃는 거겠죠,,
본디 성적순이었잖아요, 그게 아니라면 복지쪽으로 가던가...
반값 말고,,,후불제와 상한제로 말이죠. 지금 상황은 양다리를 걸치겠다는 속셈으로 비치는 데요?,,,잘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보여요.

cyrus 2012-01-11 18:58   좋아요 0 | URL
여야에서 반값 등록금 도입을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안 되니깐
나온게 국가장학금 제도에요. 이제 막 시행하는 단계라서
국가장학금 제도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과 이의제기는 아직
공론화되지 못했는데요.. 일단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지켜봐야 될거 같아요 ^^;;

saint236 2012-01-10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무슨 꼼수일까요? 정책을 홍보하기 위한 꼼수인가요?

cyrus 2012-01-11 19:0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여당이 추진하고자 했던 반값등록금 도입이 실행되지 못한
'포퓰리즘'으로 남게 될까봐 어떻게든 학생들의 불만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국가장학금을 도입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해요.
그래서 전국의 대학교뿐만 아니라 언론, 방송을 통해서도 국가장학금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고요..

굿바이 2012-01-10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맛! 등록금 정책은 조금 더 봐야 알 것 같은데
cyrus님이 이렇게 좋은 성적을 얻었군요!!!!
우와~ 장해요!!!!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액수와 상관없이 진심으로 축하해요^______^

cyrus 2012-01-11 19: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굿바이님 ^^
액수가 줄어들었어도 열심히, 올바른 과정으로 노력한 끝에 좋은 결과를
얻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만족합니다. ^^

마녀고양이 2012-01-10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이 행정 공부를 하시잖아요....
그래서 잘 아시겠지만, 정부 기관에서 어떤 시스템을 만들 때 참 졸속으로 빠르게 해치울 때가 많다는 것을 종종 느낍니다. 만일 하나의 프로세스를 만든다면, 그 프로세스를 시행할 때 발생하는 경우의 수를 따져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하나씩 검토하고 시행령을 내려야하는데 그렇지 못 하단 말이죠.

제가 그것을 많이 느낀 이유는, 제가 금융권 전산직이었기 때문이죠. 어느날 갑자기
정부에서 어떤 규정을 고친다고 내려오면서, 번개불에 콩 굽듯이 해내라고 난리가 나요.
그래서 밤샘하면서 시스템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보면, 경우의 수가 막 비어요. 어떤 때는 부작용도 일어나요. 그럼 거꾸로, 시스템을 만드는 사람이 입안자에게 이런 경우는 어쩌냐고 올라가요... 진짜 웃기지요?

하나를 해도 차근차근 하면 될 것을, 승질도 진짜들 급하고, 엉터리고. ㅉㅉ

그나저나,,,, 이번 시험 성적 엄청 좋다구요,,, 역시, 시루스님, 아자!

cyrus 2012-01-11 19:05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정책을 도입할 때도 그 정책으로 인해서 발생하게 될
예상 시나리오를 따져보고. 만약 도입한 정책이 결과가 좋지 않으면
피드백을 통해서 점검해야 되는데 우리나라는 현실적으로
이 두 가지 과정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다는게 흠이죠 ^^;;

그리고 위에 세인트님 댓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여당이 자신들이
먼저 언급한 반값등록금 도입이 실패하자 어떻게든 학생들의 불만을
달래주기 위해서 언발의 오줌 누기 식으로 국가장학금 제도가
도입되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인간 등정의 발자취 - 개정판
제이콥 브로노우스키 지음, 김은국. 김현숙 옮김, 송상용 감수 / 바다출판사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르네상스형 괴물, 켄타우로스 케이론

 

 

 

 

 

폼페오 바토니  <아킬레우스를 가르치는 케이론>  1746년

 

 

 

 켄타우로스는 상체는 인간이고 하체는 말의 형태를 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이다. 그들은 야만적이어서 인간이라기보다는 동물에 가까운 난폭한 성질을 지녔다. 또한 음탕할 정도로 여색을 좋아해서 종종 님프(nymph)나 신족들 앞에서 추태를 부리기도 한다. 몸에서 말(馬)의 부분은 태양에 속하는 남성적인 힘을 나타내며, 이 힘을 다스리는 정신이 상반신을 이루는 사람 부분에 있다. 요컨대 켄타우로스는 덕성과 판단력이라는 인간의 고귀한 본성과 대비되는 인간의 저열한 본성을 상징한다.

 그러나 모든 켄타우로스가 호전적이고 난폭한 건 아니다. 케이론이라는 이름의 켄타우로스는 선량하고 정의를 존중하는 온화한 성격을 지녔다고 한다. 의술, 음악, 수렵, 예언에 능통하여 헤라클레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 등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많은 영웅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아킬레우스를 가르치는 케이론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은 대부분 활을 쏘는 기술을 가르치고 있는 장면이 많다. 그러나 케이론은 수많은 영웅들에게 궁술, 수렵만 가르쳤던 것은 아니다. 케이론은 켄타우로스 일족 중에서 유일하게 박학다식한 현자였다.

 폼페오 바토니가 묘사한 장면에서 케이론은 아킬레우스에게 수금을 켜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젋은 아킬레우스 뒷편에는 지구의가 있는 걸로 봐서는 케이론은 지리학도 가르쳤나보다. 하지만 지구의가 존재하기에는 아킬레우스가 활동하던 신들의 세계는 지리학, 천문학이라는 학문도 존재하지 않았던 너무 먼 옛날 시절이다. 바토니는 지구의를 조그맣게 그려넣음으로써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학문들을 가르칠 수 있는 케이론의 박학다식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비록 아킬레우스는 성인이 되면서 수금 연주를 통해 음악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보다는 그리스의 오랜 적국인 트로이를 공략하는 데만 열을 올렸지만 말이다.

 

 앞에서 켄타우로스를 날 것 그대로의 야만성과 덕과 정신이 다스리는 인간의 본성이 결합된 혼합적인 존재라고 한다면 케이론은 인간이라면 알아야 할 학문과 예술이라는 지식의 분야를 동시에 습득하고 있는 르네상스형 인간, 아닌 '괴물'로 볼 수 있다.

 르네상스형 인간이란 한 분야가 아닌 다양한 곳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을 말한다. 누구보다도 더 호기심과 탐구력이 강하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문학이던 과학이던 예술이던 골고루 습득하고 서로 다른 분야의 지식들 간의 링크가 잘되어 있다.

 <인간 등정의 발자취>의 저자 제이콥 브로노우스키는 20세기의 마지막 르네상스형 인간인 동시에 과학과 예술 간의 밀접한 지적 사유 과정을 집대성할 줄 아는 현대의 케이론이다. 그의 마지막 지적 활동의 결과물로 남게 된 <인간 등정의 발자취>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독자들에게 읽혀지고 있는 인류의 정신 및 지성사를 체험할 수 있는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진보'라는 인간의 등정이 지성사에 미친 영향

  

 브로노우스키는 인류 지성의 진보적 발전을 '인간 등정'으로 비유하고 있다. 인간의 체력으로는 높은 산 정상까지 뛰어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산 정상에 빨리 오르고 싶은 마음에 처음부터 빠른 걸음으로 산에 오르게 되면 체력적 소비가 많아져 정상에 도달할 수 없다. 비록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한걸음씩 한걸음씩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어느새 산 정상에 도착하게 된다.

 산에 오르는 과정을 인류의 진보에 비유하자면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여기는 것들은 단 한 번만에 세상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하나의 봉우리가 또 다른 봉우리의 발판이 되는” 유기적 여정을 거친 끝에 만들어졌다.

 아기는 걸음마를 떼고 스스로 일어서면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갈 기본적인 준비를 마친다. 인간의 조상도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인간이 되었다.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커진 두뇌와 자유로워진 두 손은 창조의 모체가 된다. 인간은 과학과 예술 등 다양한 영역에서 놀라운 창조물들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인류의 진보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는 최초의 과정이다.

  나무와 돌을 깎기 시작했을 때 인류는 다시 한 번 진보했다. 브로노우스키는 ‘사물을 쪼개고 깎는 것은 흙을 뭉쳐 토기를 빚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일’이라고 말한다. 깎는 행위를 통해 인간은 사물의 본성을 파헤쳐 구조와 법칙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돌덩이 내부에 있는 형상을 망치로 해방시킨다’고 생각했던 조각가 미켈란젤로처럼 인간은 깎으며 분석하고 이때 발견한 법칙을 토대로 사물을 재구성했다. 연금술 역시 금속의 숨겨진 구조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인간 등정의 일보 중 하나였다.

 이뿐만 아니라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부터 잉태된 진보는 예술과 종교 등의 영역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르네상스 미술을 발전시킨 원근법은 단지 중세 미술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원근법은 신의 관점으로 사물을 배치하는 중세의 예술관을 붕괴시켰고, 수학을 시간과 연동되는 역동적 사유양식으로 발전시켰다. ‘눈에서 빛이 나오는 게 아니라 물체에서 빛이 나온다’는 이슬람 물리학자 알 하젠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원근법은 예술을 넘어 과학과 종교, 세계관의 붕괴로 이어졌다.

 

 

 

 

 '도덕적 상상력' 없이는 인류의 진보는 없다

 

 케이론은 비록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반인반마(半人半馬)이지만 그는 이성과 지혜를 두루 갖춘 박학다식한 현자였기에 오늘날에는 포악한 짐승에 가까운 켄타우로스 일족과 구분하고 있다. 케이론은 수금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할 수 있었지만 켄타우로스 일족은 그저 술만 마시고 아무 님프나 잡아서 추태 부리는 짐승에 가까운 행동을 한다. 

 이처럼 브로노우스키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을 상상력의 자질에서 비롯된 창의적인 정신의 능력이라는 기준으로 구분하고 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창의적인 정신의 능력은 예술과 과학이라는 분야를 통해서 구현하고 있는데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하나의 귀한 선물'인 것이다. 이런 믿음 하에 브로노우스키는 인류의 진보를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사실 브로노우스키의 관점은 오랫동안 서구 사회를 지배해 온 인간중심적 사고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인간은 과학과 예술을 통해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인간의 진보를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을 절대 지식으로 여기는 인류의 오만과 무지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절대적인 확실성을 신봉하는 독재자들의 신념으로 과학과 인류 진보가 후퇴해서는 안 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현대로 오면서 핵물리학의 발전이 오히려 인류를 파괴할 수 있다는 레오 실라드의 진언과 현실로 나타난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통해 과학의 오용 가능성에 대한 물음과 해답을 찾고자 한다.

 특히 책이 쓰여진 지 30년이 지났지만 그는 인간의 고유한 정신을 배반하면서까지 목적보다는 수단을 정당화하는 데 과학을 이용하는 사회적 흐름을 우려하고 있다.

 

 

“인간이 현실적으로 시험해보지도 않고서 절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때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 인간이 신의 지식을 갖고자 할 때 이런 짓을 하는 것이다. 과학은 지식의 그야말로 인간적인 형태이다. 우리는 항상 알려진 것의 첨단에 있으면서 바라는 것을 향해 나아가고 싶어 한다. (중략) 우리는 절대 지식과 절대 힘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pp 416~420)

 

 

 

 오늘날의 과학은 사회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과학의 고삐를 쥐고 흔들기를 원하는 정부와 갈등을 빚게 된다. 이 때문에 과학이 할 일은 지상의 부(副)가 아니라 도덕적 상상력을 계승하는 데 놓여야 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도덕적 상상력이 없이는 인간과 믿음, 과학은 함께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케이론과 같은 존재가 있어야 사회의 발전은 물론이고 훌륭한 인재가 탄생하듯이 브로노우스키는 이와 같은 과학의 바탕이 확립될 때 진보의 ‘인간 등정’도 여전히 가능하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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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1-10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대 신, 인간, 자연을 서로 분리시키고, 자연을 인간이 정복해도 좋은 대상으로 바라본 서구의 사상적 배경은 서로 충돌할 수 밖에 없는 경쟁의식을 잉티했대고 저는 봅니다.

아, 그리고 '절대 지식과 절대 힘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제가 해당 책을 읽지 못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는 것이랍니다)

아주 좋은 글 잘 일었습니다.

cyrus 2012-01-11 19:14   좋아요 0 | URL
제가 인용한 문장에서 중간 내용을 일부러 생략해서 이해를
어렵게 만들었네요 ^^;;

저자는 원시 시대부터 원자폭탄이 등장하는 현대까지(이 책이 1970년대쯤에
다큐로 만들어진 것을 토대로 출판된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조망해보면서
인간이 과학과 예술을 다룰 줄 아는 능력 덕분에 무시무시한 원자폭탄까지
제조할 수 있는 진보가 이뤄질 수 있다고 보고 있어요. 그래서
인간의 이러한 능력을 예찬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능력,
예를 들어서 과학의 힘을 절대적으로 보며 맹신하게 되면
결국에는 인간 우리 스스로 파멸하는 길로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어요.
원자폭탄 같은 경우에도 결국 과학의 힘으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고
믿은 정치세력들의 탐욕이 만들어 낸 위험한 무기가 되었잖아요.

그래서 과학을 인류의 진보를 위한 인간만의 절대적인 지식 또는 힘이 아니라
인류의 모든 존재가 서로 상생하는 도덕도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어요.
이 책이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많이 추천되는 책이고 과학 분야 도서치고는
어렵지 않은 게 장점이에요. 기회가 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해요 ^^


차트랑 2012-01-11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간 생략을 해서 죄송합니다.
(맥락을 무시한 생략은 큰 오해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 인정합니다)

제가 인용한 부분은 "(중략) 우리는 절대 지식과 절대 힘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pp 416~420)"입니다.

아, 그리고 좋은 말씀해주시고
독서 목록에 포함 시킬 수 있도록 해주신 점
고맙습니다.

그리고 좋은 글을 써주셔서 역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