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K대 근처에 위치한 헌책방에 들리게 되었다. 작년 여름에 딱 한 번 방문하고 책을 구입했으니 거의 5, 6개월만의 헌책방 방문이다. 확실한 경제적 여건과 기반이 없는 학생 신분이라서 헌책방을 자주 들려서 책을 구입하는 건 아니다.
살다보면 가끔은 지갑이 두툼해지는 시기가 찾아온다. 예를 들어서 명절 시즌이다. 다행히 학생 신분인데다 친척들 사이에서 나름 착하고 유능한(?) 이미지 덕분에 세뱃돈을 많이 받는 편이다.
이번에 받은 세뱃돈으로 어디에 쓸지 고민하다가 오늘 날씨도 풀린 김에 헌책방 나들이를 했다. 비록 옆구리가 시릴 정도로 찬 바람이 옷깃을 스쳤지만 책이 가득한 곳에 간다는 것은 항상 기대와 설레임으로 가득하다.
책 네, 다섯 권 정도 살 수 있을 정도로 비용을 여유롭게 챙겼던터라 지름신이 옆애서 부채질했다. 예전부터 읽고 싶었고 시중에 구할 수 없는 책들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책 구입만큼은 신중을 기하는 편이라 많이 구입하지 않았다.
헌책방 마니아들에게는 헌책방에서 책을 찾고 구하는 기준이 제각기 다를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읽고 싶은 책을 고르되 그 책이 지금이 절판인지 곰곰히 따져본다. 나름 헌책방에 관한 정보도 검색하면서 찾아보는 습관이 있고 알라딘 검색을 자주 이용한 덕분인지 이 책이 지금 절판 상태이며 헌책방에서도 구할 수 없는 '레어' 아이템인지 어느 정도 알아보는 편이다. 사실 바로 알아본다긴 보다는 직감과 추정으로 구분하는 정도이다. 실상 절판 도서인 줄 알고 구입했건만 알고 보니 시중에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버리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내가 다니는 K 대학교 근처 헌책방 같은 경우에는 한가롭게 책을 고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자주 헌책방에 드나들면 헌책방 사장님도 단골 고객을 알아보고 충분히 구입할 수 있도록 배려해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 곳을 일 년에 한 번 꼴로 방문하니 아직은 그런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 네 번째 방문인데도 사장님은 헌책방에 처음 오는 학생 손님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항상 나에게 "무슨 책, 찾기를 원하십니까?"하고 먼저 물어본다. 자주 들리지 않았지만 헌책방 구조가 어떤지 그리고 수많은 책더미들 사이에 나름 분야별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을 단 번에 구분하는 편이다. 항상 문학, 인문학, 과학, 예술 분야의 책들을 보는 편이라 건물 한 가득 쌓여 있는 헌책방 속에서도 소설 책이 어느 위치에 배치되어 있는지 알아 본다.
40분 정도 고른 끝에 딱 세 권 만 구입했다. 총 비용은 11000원.
더 구입하고 싶은 책이 세, 네 권 정도 있었지만 다음 기회에 구입하기로 했다.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직접 찾아보는 재미가 있기에 헌책방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야말로 수많은 책 더미 속에서 손에 먼지를 묻혀가며 고른다는 것은 자신만의 보물을 찾는 지적 모험자이다. 읽고 싶은 책을 한꺼번에 구입하게 된다면 다음 헌책방 모험에서 재미를 만끽할 수 없다.
#1 노르베르토 보비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문학과 지성사, 1994년 (4쇄)
이 책은 알라딘에 판매되고 있다. 초판이 1992년에 나왔는데 지금은 정가가 11000원이다. 알라딘 온라인에서는 9000원으로 할인 판매되고 있다. 시중에 판매되어지고 있는 정가 가격만으로 헌책방에서 책 세 권을 구입한 셈이다. 10년 전에는 이 책이 5500원으로 판매되었는데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책이 사진 속 표지처럼 똑같은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알라딘 검색 정보에 표지 이미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와 내용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지만 확실한 것은 조국 교수가 이 책을 추천한 걸로 알고 있다. 알라딘 서재 오른쪽 상단에 보면 명사의 추천도서가 소개되는 코너가 있는데 조국 교수가 이 책을 추천하게 된 이유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몰락한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와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한 얼치기 좌파가 읽어야 할 필독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와 관계,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관계에 대한 냉정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알라딘 '명사추천도서' [조국 교수 편] 중에서)
우리나라 사회에는 여전히 역사의 시간 속으로 사라진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좌파'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좌파'가 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 보비오의 책을 일독하고 싶었다. 그보다도 이 책을 더욱 읽고 싶게 만들었던 것은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관계'라는 구절 때문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사회에 때아닌 '자유민주주의' 대 '민주주의' 개념 논쟁이 있었다. 비록 역사학계 내에서 이루어진 사회적 쟁점이었지만 우리 사회에서 자주 거론되고 언급되는 '-주의'들 간의 이념적 관계와 차이점을 정립하지 못한다면 역사학계의 진흙탕 싸움이 사회 전체, 즉 정치판으로 확대될 우려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싸움판에 대중들마저도 이념 정의 및 그 이념에서 주장하고 있는 입장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면 6.25 전쟁 이후 시작된 이념 논쟁이 야기된 좌우파 간의 갈등은 계속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이념 대립은 곧 사회 통합을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
헌책방에서 판매되는 책들에는 헌책방 한구석에서 시간의 먼지 속에 파묻히고 있지만 그들도 한때 주인들의 손길을 경험한 이력이 있으며 사연을 가지고 있다. 간혹 헌책방에 구입한 책들 중에는 이름 없는 책의 주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책의 이력이 독특하다. 책 옆면에 '경주교도소 도서' 날인이 찍혀 있다. 책 하단에 '문학 800-930' 이라는 일련 번호가 쓰여진 스티커가 붙여 있는 걸로 봐서는 교도소에 소장된 문고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몇 페이지에는 볼펜으로 밑줄 친 흔적이 남아 있다. 사회권 운동을 하다가 교도소에 수감된 무명의 사람이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밑줄을 그었으리라 상상해본다.
#2 물타툴리 <막스 하벨라르> 문학수첩, 1994년 초판
이 책의 제목과 저자를 보게 된다면 생소하게 느껴지는 독자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사실 알라딘 검색망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헌책방에서조차도 구하기 힘든 책이니깐.
영어 표기법에 따라 발음의 차이가 있는데 네이버 백과사전에서는 '물타툴리, <막스 하벨라르>'로 표기되어 있다. (여기서는 '물타툴리' , '막스 하벨라르'라고 통일하여 사용하겠다)
원형 사진 속 인물이 책의 저자 '물라툴리',
그리고 하단에는 그의 자녀와 아내의 사진이 있는데
소설 속에 등장한 인물들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참고로 이 책은 소설이다. 네덜란드 출신의 '물타툴리'라는 작가의 대표작인데 '물라툴리'는 필명으로 본명은 에두아르드 다우스 데케르(1820~1887)이다.
'물타툴리(Multatuli)'는 라틴 어로 '나는 수난을 겪었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필명의 뜻도 그렇겠지만 저자의 이력 역시 독특하다. 19세기 중반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에서 20여 년간 공무원으로 근무했으며 그 곳에서 부지사로도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력만 보자면 식민지의 영토에서 근무한 관리로만 볼 수 있지만 멀타툴리는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 통치와 그 곳 식민지 내에서의 가혹한 수탈에 극심한 경멸을 느꼈다고 한다.
결국 자신의 의견이 묵살되고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자, 스스로 관리직에서 사퇴하고 본국인 네덜란드로 귀국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경험 그리고 그동안 알려지지 못했던 식민지 통치가 만들어 낸 가혹한 환경을 묘사한 한 편의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막스 하벨라르>인 것이다. 단 한 권의 소설로 '멀타툴리'라는 예명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저자의 소개란에 보면 멀타툴리를 '네덜란드의 셰익스피어'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네덜란드에서도 그의 동상이 세워질 정도로 지금까지도 문학적인 가치가 인정되고 있는 듯하다.
책 속에 실려 있는 인도네시아 식민 정부 예산안 통과와 관련된 신문 삽화
(1876년 10월 26일자)
왼쪽에 한 손에 '막스 하벨라르'라는 이름이 쓰여진 책을 든 사람이 물타툴리다.
삽화 속 대사를 통해서 멀라툴리의 소설이 네덜란드 식민 정책에 끼친 영향을 알 수 있다.
"16년 전에 부르짖었던 주장이 이제 드디어 의회에서 관철되었노라!"
식민지 수탈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사회고발적 형식의 소설은 오늘날에 읽기에는 재미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네덜란드의 식민정책에 변화를 일으킬 정도라면 이 책 한 권이 일으킨 대중들의 관심은 대단했던가 보다. 하긴 한창 식민지를 개척해나가면서 제국주의의 힘을 문어발처럼 확장하고 있었던 그 당시 19세기 중반 때 반식민주의적 소설이 나온다는 것은 분명 유럽 전역에 반향을 불러일으킨 문제작으로 남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물라툴리의 <막스 하벨라르>에 대해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서 그나마 이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는 것은 피터 박스올의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뿐이다. 비록 간략하게나마 소개되고 있지만.
그리고 우석훈의 <문화로 먹고 살기>에서도 하벨라르의 소설에 대해서 잠깐 언급되기도 한다. 어디에 인용되는지 확인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자질구레한 정보 하나라도 기억을 잘 하는 편이라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혹시 이 책을 읽었거나 또는 소장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한 번 확인해보시길.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한 마디 덧붙이자면, 내가 다니는 공공도서관 세 군데에도 비치되어 있지 않다. 내가 알기로는 단 한 곳의 도서관에 이 책을 구할 수 있는데 재미있게도 내가 다니는 D 대학교의 도서관이다.
#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외 <상상동물 이야기> 까치, 1994년 초판
이번 헌책방 나들이 중에서 가장 큰 수확(?)이다. 헌책방에서도 구하기 힘든 책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알라딘에서도 절판 상태이고 아직까지는 중고샵에서도 판매되지 않고 있다. 이 책이 재판되지 않는 한 헌책방에서도 구하기 힘든 책으로 남게 될 것으로 보인다.
보르헤스의 <상상동물 이야기>에는 말 그래도 130여 가지의 동서양에 알려진 상상 동물들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상상 동물들에 대한 정보가 수록된 '백과사전'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한 가지 동물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보다 짧기 때문이다. 앞 표지에는 '그림으로 보는 서양판 산해경' 이라고 하는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인 <산해경>과 견줄하기에는 내용면에서는 부족하다. (동양신화를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한 정재서 교수의 번역본(민음사)을 포함해서 국내의 <산해경> 번역본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100가지 동물의 머리를 지닌 물고기
(보르헤스 <상상동물 이야기> 까치, pp 73)
비록 백과사전만큼의 내용에 따라가지 못하지만 책 속에는 간간이 상상동물을 표현한 일러스트가 실려져 있어서 읽는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준다. 책 속에 존재하는 대상들은 상상 속에 존재하는 '동물'이라기보다는 거의 재미있는 특이한 모습을 한 괴물에 가깝다. 그 중에 흥미로운 내용을 소개해본다.
고대 인도에서부터 전해내려온 전설에 의하면 브라만 계급 출신의 카필라라는 이름의 승려가 살았다고 한다. 그는 다른 승려들보다도 경전에 대한 지혜가 밝았으며 명석한 승려로 알려졌다. 그래서 카필라는 동료 승려들이 경전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에게 조롱이 담긴 욕설을 하면 놀려댔다.
'원숭이 대가리' , '여우 대가리' , '개 대가리' . '말 대가리' , 닭 대가리' , 호랑이 대가리' 등등... 그가 말한 동물 대가리만 해도 족히 100가지가 되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놀려대던 카필라는 죽게 되자, 이러한 욕설을 인한 이승의 업으로 인해서 그는 자신이 붙여주었던 모든 동물들의 대가리를 지닌 흉칙한 물고기로 다시 태어나고 말았다. 100개의 동물 머리를 가진 물고기로...
카필라 전설을 통해서 본 이 글의 생뚱맞은(?) 결론은...
상대방에게 함부로 욕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정신적인 상처가 될 수 있으며 자신이 일으킨 정신적 상처의 고통은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다시 돌아온다. '자신이 뿌린 씨앗은 반드시 자신이 거둔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말이다.
참고로 보르헤스의 책과 비슷한 것이 과학 칼럼니스트로 알려진 이인식의 <신화상상동물 백과사전>(생각의 나무)이다. 내가 고등학생 때 구판을 재미나게 읽은 기억이 있다. 동물 일러스트가 올컬러라서 좋았다. 그런데 출판사가 도산되는 바람에 이 책 역시 알라딘에서 품절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