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 파기의 즐거움 - 손가락 하나로 만나는 해방감
롤랜드 플리켓 지음, 박선령 옮김, 존 하이햄 그림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비염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요즘같이 선선한 날씨는 반가워하지 않는다. 콧물, 코 막힘이 일상생활에 큰 지장을 준다. 코를 훌쩍거리는 소리는 옆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소음이다. 조용한 독서실 같은 곳에서 유난히 코를 훌쩍거린다거나 코를 자주 풀면 본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집중력을 방해한다. 코가 막히면 코로 숨 쉬는 것이 불편하다. 특히 잠잘 때 입이 벌어져서 코를 심하게 곤다.

 

나는 비강 크기가 작은 데다가 비용 증세까지 있어서 콧속에 콧물이나 코딱지가 가득 있는 걸 싫어한다. 코가 막히면 일에 집중하기 어렵다. 어렸을 때 코를 자주 팠다. 무조건 집에서만. 어린 시절에 어떤 친구는 코딱지를 파다가 다른 친구에게 들키는 바람에 놀림 받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조심스럽게 빼낸 코딱지를 눈에 잘 띄지 않은 책상 밑에 몰래 붙여놓는다. 나도 그랬었다. 지저분한 이야기지만, 초등학생 때부터 사용한 책상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데, 책상 밑에 살펴보면 굳어진 코딱지 덩어리가 있다.

 

지금부터 지저분한 이야기가 나올 예정이니 비위가 약한 분은 이 글을 끝까지 읽지 않길 바란다.

    

 

 

 

 

괴도 놈팡의 첫 번째 괴작 도서는 코 파기와 관련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모든 사람이 눈치 없이 자유롭게 코를 팔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리하여 코 파기의 즐거움(씨앗을뿌리는사람, 2005)이라는 황당한 책을 펴내게 된다. 이 책은 황당한 저자 소개로 시작한다. 책을 펼치기 전에 저자 이력을 꼭 확인해보시라.

 

 

저자: 롤랜드 플리켓

 

1934년에 펜실베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성 코털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뒤 로스앤젤레스로 옮겨가, 코 파기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그 결과 <소낭><점액>을 펴내게 되는데, 이는 그 때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코털의 위치를 사상 처음으로 비과학(鼻科學) 주요 주제의 첫머리로 끌어올린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76년에는 <머나먼 콧날>을 출간했고, 1979년에 영국의 의학 잡지 란셋'면봉-어디로 갔나?'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코 풀기에 대한 고찰을 담은 연구 논문 '후루룩, 카악, '1989년에 나왔다. 모교의 코 고고학과 명예 교수이자, 2006 현재 옥스퍼드 코파막파 대학에 특별 연구원으로 초빙된 상태다. 결혼해서 아들을 한 명 두었는데 그 또한 열성적인 코 파기 애호가이다.

    

 

주황색 겉표지를 걷어내면 예사롭지 않은 그림이 있는 속표지를 만난다. 오른쪽 콧구멍에 손가락을 넣은 여자의 이름은 모나리자가 아니라 코나리자. 저자는 코 파기의 역사를 소개한다. 기원전 사람들은 옆 사람 눈치 볼 필요 없이 실컷 코를 팔 수 있었다. 고대 이집트인은 코파기 행위를 상형문자로 기록했다. 그러나 코 파기가 금기 행위로 인식하게 한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다. 영국의 웨섹스 지방을 통치하던 해럴드 왕은 코를 자주 파는 습관이 있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코 파는 습관을 권장하기도 했다. 1066년 노르망디 공국의 정복왕 윌리엄과 맞붙은 헤이스팅스 전투 중에 해럴드 왕은 전사하고 말았는데, 그의 죽음이 황당하다. 적군과 싸우는 도중에 해럴드 왕은 코 파기를 멈추지 않았는데, 자신에게 날아오는 적의 화살을 피하지 못해 그 자리에 죽고 말았다. 해럴드 왕의 죽음으로 인해 노르망디 공국은 승리했고, 윌리엄 왕이 영국 왕위를 차지한다. 윌리엄 1세가 되어 노르만 왕조를 연 그는 과거 해럴드 왕이 내세운 정책을 모두 폐지했다. 공공장소에서 코 파는 행위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 선포했다. 이 법을 어기는 백성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 이후로 영국인들은 자신의 몸을 안전하게 숨길 수 있는 실내에서 코를 파게 되었고, 다수 사람이 모여 있는 공공장소에서 코를 파는 행위를 삼갔다.

 

 

 

 

 

 

여기까지 들으면 코 파기 행위가 억압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역사라고 믿게 되겠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전부 이다. 코 파기의 역사를 다룬 책의 1장은 으로 시작해서 으로 끝난다.코 파기 애호가가 패러디 방식으로 만들어 낸 가짜 역사다. 저자는 우스꽝스러운 가짜 역사를 통해 인간의 원초적 행위인 코 파기가 허위의식으로 인해 불결한 행위로 여겨지는 현실을 비판한다.

    

 

 

 

 

 

2장부터 코 파기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코 파기에 관한 특이한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질문 못지않게 저자의 답변도 특이하다. 코 파기의 기본적인 기술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뭉쳐서 튕기기. 코딱지를 둥그스름한 알갱이처럼 만들어서 튕기면 된다. 아니면 코딱지를 먹어도 된다. 코를 파려면 엄지, 검지만 있으면 된다.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코를 파기 시작했으면 특별한 훈련 없이 자연스럽게 코 파기 능력이 숙달된다고 주장한다. 다만, 코가 붉게 부어오를 정도로 과도하게 코를 파는 행위를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타인의 코를 파는 행동을 금지한다. 그나마 이 내용이 정상적이다.

 

황당한 질문과 답변을 몇 개 골라봤다.

    

 

Q. 엄마에게 코 파는 법을 물어봐도 될까?

A. 귀싸대기를 맞고 싶지 않다면 참는 편이 낫다.

 

Q. 어째서 그런가?

A. 대부분의 여성이 그렇듯 여러분의 어머니도 자기가 코를 판다는 사실을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59)

 

Q. 코를 파기에 가장 적당한 시간은 언제인가?

사실 하루 중 어느 때나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앞에 있을 때가 가장 좋다. 점심시간이나 차 마시는 시간, TV 시청 도중이 코 파기 제일 좋은 때이며 교실, 버스, 기차, 지하철 안이나 사무실 등이 코딱지를 튕길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고 볼 수 있다. 또 공식적인 만찬이나 환영회, 임관식, 무도회 등은 그야말로 코를 파기에 가장 완벽한 기회라고 볼 수 있다.

 

(60)

 

Q. 코 파기를 용인하는 조직들 중에 가입할 만한 곳이 있나?

A. 다음 단체들은 단순히 코 파기를 용인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국회, 덕수궁 보존 협회, 남산도서관 학생회, 한강고수부지 관리협회

 

(63)

 

 

국회를 제외한 나머지 조직명은 번역자가 국내 독자의 웃음 코드를 맞추기 위해 원문을 그대로 옮기는 대신 국내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조직명으로 바꿨다. 외국 만화를 우리나라 정서에 맞도록 번역할 때 많이 사용하는 방법으로 현지화 또는 로컬라이징(Localizing)’이라고 한다. 외국 단어를 억지로 한국 언어에 맞추다 보면 어색한 느낌이 날 때가 있다. 그 예가 바로 남산도서관 학생회. 우리나라 공공도서관에 학생 독서회는 있어도, 학생회는 없다. 학생회는 학교 내에 만들어지는 학생들의 모임이다 

 

Q. 누군가 코를 파지 말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할 수 있을까?

A. 우선 용기를 가져야 한다! 사람들에게 코 파기 장면을 목격 당했다면상황을 여러분에게 유리하게 바꾸기 위해 다음과 같이 대꾸하면 된다.

 

이 멋진 색깔/크기/모양을 좀 봐!”

조용히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내 코딱지를 달라고 할 거야.”

넌 코가 끊임없이 근질거려서 계속 만지고 싶어지는 그런 날 없어?”

이렇게 나서주다니 고맙기도 해라. 안 그래도 내 코딱지는 다 떨어진 참이었어.”

    

 

 

 

 

 

 

저자는 독자가 코 파는 기술을 이해할 수 있게 글로 설명하는 대신 간단한 그림으로 만들었다. ‘코르시카식 찌르기는 프랑스의 코폴레옹(저자는 코를 파는 나폴레옹을 코폴레옹이라고 우습게 패러디했다)’이 선호하는 코 파기 방식이다. 참고로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코 파는 기술은 맴맴 하강법이다. 손가락을 소용돌이처럼 돌려서 코딱지를 빼낸다. 사실 맴맴 하강법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자주 하는 방식이다. 특이하게 코를 파고 싶다면 삼지창 공략법을 추천한다.

 

다음부터 코를 파다가 사랑하는 이성에게 들기면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해보라. “넌 코가 끊임없이 근질거려서 계속 만지고 싶어지는 그런 날 없어?” 이성이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서 당신의 코 파기를 사랑해주는 진정한 반려자인지 확인할 수 있다. 이성이 코를 만지고 싶어 하는 날이 있다고 인정하면 헤어지지말고 끝까지 잡아라. 당신의 코딱지를 사랑해줄 수 있는 여자다. 반대로 당신의 질문을 듣고 이성이 불쾌한 표정을 지은 채 당신의 뺨을 날린다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사람을 만나 보시길. 그리고 코 파는 모습을 연인에게 들키지 않도록 항상 주위를 잘 살펴봐야 한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15-11-04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연필보다 더 특이한데요,^^;
cyrus님, 편안한 밤 되세요^^

cyrus 2015-11-05 18:32   좋아요 0 | URL
비밀독서단에 소개된 연필 책은 안 읽어봐서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코 파기 책이 더 특이합니다. 정말 읽고 나면 황당한 웃음이 나올 겁니다. ^^

북다이제스터 2015-11-04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내, 이런 책도 있었군요^^
쉬운듯 흥미를 끄는 내용은 모두 cyrus님 리뷰 덕분인 것 같습니다. ^^

cyrus 2015-11-05 18:33   좋아요 0 | URL
종이와 잉크가 아까운 책이었습니다. 빨리 절판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 책의 원서도 절판되었더라고요. ㅎㅎㅎ

yureka01 2015-11-04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넵 큰거 나오면 시원 하거든요 ㅎㅎㅎㅎ재밌는 책입니다..ㅎ

cyrus 2015-11-05 18:34   좋아요 1 | URL
큰 코딱지를 ‘왕건’이라고 부릅니다. ㅎㅎㅎ

인디언밥 2015-11-04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악 배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진지하게 읽으면서 ˝헉 진짜야?! 사형?!˝ 이랬는데, 바로 밑에 뻥이라고 ㅋㅋㅋㅋㅋ
그리고 그림 엄청 웃기네욬ㅋㅋㅋㅋㅋ 코 후비는 사람 표정이 심각해서 더 웃긴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yrus 2015-11-05 18:35   좋아요 0 | URL
글과 그림 모두 특이한 책입니다. 다 읽고 나면 헛웃음이 나옵니다. ㅎㅎㅎ

transient-guest 2015-11-05 0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코파기를...시도때도 없이...즐긴답니다..

cyrus 2015-11-05 18:36   좋아요 0 | URL
솔직하게 고백하실 줄이야... ㅎㅎㅎ

stella.K 2015-11-05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 파기나 귀 파기가 묘하게도 쾌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야.
근데 귀 파기는 몰라도 코 파기는 정말 사람들 앞에서는 잘 못하겠더라.
근데 초등학교 때 대놓고 코를 파는 아이들이 몇있었어.
그들의 대범함과 자유로움이 혐오스러우면서도 부럽더라구.ㅋㅋ

cyrus 2015-11-05 18:38   좋아요 0 | URL
아이들은 순진해서 코를 파는 것과 코딱지 먹는 걸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아요. 부모님이 그걸 더러운 행위로 가르치는 순간, 아이들은 혼자서 몰래 코를 파요. 저도 코딱지 먹는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
 
소리 없는 빛의 노래
유병찬 지음 / 만인사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들은 새 소리는 묻지 않고서도 듣기 좋아하면서, 그림만은 왜 그토록 물으려 하는가.” 피카소는 자신의 그림에서 “보이는 것이 없다”고 투덜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질책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저렇게 투덜대는 사람이 없다. 그림을 감상하는 대신 바삐 스마트폰을 꺼내 그림을 사진으로 찍고 저장한다. 인상 깊은 이미지를 고이 간직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겠으나 그 순간에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놓쳐버린다. 원하는 이미지를 언제 어디서나 저장하고 다시 열어 볼 수 있는 이면에 진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낳는다. 아름다움은 지식과 관계없는 직관에 의한 반응이다. 사물이나 감정은 그것이 무형의 것과 관계가 깊을수록 그 매력은 더욱 강하고 오래 지속한다. 아름다움이란 마음속 깊은 곳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더 깊게 느껴질 수 있다.

 

세상의 아름다움. 이것은 어렸을 때 보았던 상냥하고 온화한 색깔들로 동산이 그려져 있던 동화책 표지의 아름다움과는 다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잘 알아볼 수 없는 아픔과 같이한다.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어릴 적 책 속에서 보았던 그 아름다움보다는 좀 가혹하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정지시켜 그 ‘껍질’만 마음 곳곳에 저장할 뿐, 진짜는 늘 놓치고 만다. 우리가 저장한 것은 사물의 잔영이고 기억일 뿐이다. 그러나 우습게도, 우리는 그 잔영이 많고 적음에 따라 우리의 교양과 인격이 달라진다고 믿는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는 그 잔영을 씻고 말리고 포장하여 쉽게 돈과 맞바꾼다. 사실 ‘예술’이라는 거창한 이름도 바로 이 앎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색채는 건반이다. 눈은 현을 두드리는 망치다. 영혼은 많은 현을 가진 피아노다. 예술가란 그 건반을 이것저것 두들겨서 사람의 영혼을 진동시키는 사람이다.” 칸딘스키는 자신의 그림에 음악성을 부여하려고 했다. 누군가는 칸딘스키의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면 노랫소리가 들린다고 말한다. 믿거나 말거나. 하지만 사진을 보면 노랫소리가 들린다는 사실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유병찬의 《소리 없는 빛의 노래》는 우리가 살면서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삶의 진실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의 사진은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그가 카메라 렌즈에 담은 것들을 우리 주변에 쉽게 볼 수 있다. 건물 창문(「창문」), 누군가가 옷 수거함 위에 버린 곰 인형(「반전 곰돌이」)이 찍힌 사진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침 바다, 산골짜기 같은 멋진 자연 풍경 사진도 몇 장 있지만, 전율과 감탄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작가의 사진은 내적 성찰이 돋보이는 글을 만나면서 특별한 노래가 된다. 작가가 바라보는 세상은 여러 가지 빛의 음표로 이루어진 거대한 악보다. 작가의 카메라가 피아노라면, 셔터는 건반이다. 글은 감미로운 노랫말이 된다. 이러한 요소들이 잘 어우러져 신선한 화음을 잘 구현해 낸 작품이 바로 「맛 좋은 연주」다. 작가는 닭 콩팥 꼬치가 불에 구워지는 과정을 보면서 노랫소리를 들었다.

 

 

노변(路邊)의 이름없는 피아노 연주자는 자극적인 향을 피웠다. 그의 건반은 쉴 새 없이 두드리듯 뒤집고, 리듬의 멜로디 대신 향이 가득한 연기로 익혀내며 단음으로 능숙한 손놀림의 연주를 한다. 어느 누군가가 꼬치로 된 건반의 연주를 듣고 군침을 흘려 본 적이 있었던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맛이 익어가는 연주의 유혹에 발걸음이 붙잡혔다. (「맛 좋은 연주」 중에서, 20쪽)

 


사진만 봐도 꼬치구이가 불에 익힐 때 나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그동안 군침을 돋게 하는 노변의 피아노 연주자의 꼬치 건반 연주 공짜로 들으면서, 꼬치구이를 음미하고 있었다. 노변의 연주자는 시즐 효과(Sizzle effect)의 힘을 알고 있었다. 꼬치 익는 소리만 내도 손님의 발길을 멈출 수 있다. 이런 맛 좋은 연주를 작가가 놓치지 않고, 피아노와 같은 사진기로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사진만 봐도 ‘지글지글’ 꼬치 건반 소리가 들려오고, 입안에 침이 고인다.

 

작가가 부르는 사진 노래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조용하다. 우리도 언제 어디서든 작가가 발견한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작가에게 사진과 글은 그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이다. 농부가 모내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쌀 한 톨이 주는 생존의 의미를 깨닫고(「쌀 한 톨의 의미」), 카메라 앞에서 기꺼이 자세를 잡아준 나무 한 그루에 애정과 존경심을 드러낸다(「애목」). 이러한 사진과 글은 작가의 내면에 오랫동안 남게 될 소중한 추억의 문신이다. 성찰의 계기로 나타나는 자연은 쉽게 사라져도 그것을 매개로 한 사진 작품은 오랫동안 빛이 난다. 작가가 카메라를 통해 모방하고자 하는 것은 피상적인 자연미가 아니라 우리가 평소에 보지 못했던 현실적인 자연 그 자체다. 유병찬 작가의 사진 작품은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맑고 깨끗한 거울이다. 사진으로 부른 작가의 노래를 들었으니, 나도 그 노래를 한 번 불러본다. 감히 카메라를 목에 걸면서 허튼 자세를 취하기보다는 주변을 돌아보면서 빛의 음표를 찾아보련다.

 

 

 

※ 저자로부터 받은 책이라서 별점 다섯 개를 주면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몇몇 분들이 있을까 봐 굳이 이 책에 대해 아쉬움 하나 알리고자 한다. 책 35쪽에 「침묵에 대한 저항」 사진은 입을 한껏 벌린 마른명태들을 찍은 것이다. 근접하게 찍어서 그런지 입 벌린 명태들의 모습이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졌다. 페이지를 넘기다가 명태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책을 읽을 분들에게 알린다. 35쪽을 조심하시길.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다이제스터 2015-11-01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편으론 시와 같고 한편으론 수채화 같은 리뷰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책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cyrus 2015-11-04 21:10   좋아요 0 | URL
평범한 일상의 풍경을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보게 만드는 책입니다. 아주 좋습니다. ^^

yureka01 2015-11-14 00:11   좋아요 0 | URL
알라딘 이웃인데..왜 주소를 안주셨어요? 재고 몇권있는데 보내드려야겠습니다..ㅎㅎㅎ(전문적 작가는 아니라 밥벌이로 하지 않고 나눠 볼려고 만든 책이라서 ^^_)

:Dora 2015-11-01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태사진 앞에 놓고 피아노 연주해드리고 싶네요

cyrus 2015-11-04 21:10   좋아요 1 | URL
어떤 음악이 나올지 궁금하네요. ^^

2015-11-01 2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4 2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슬비 2015-11-02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사진들도 마음에 들었지만, 전 `명태`사진이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ㅎㅎ

cyrus 2015-11-04 21:13   좋아요 0 | URL
저는 명태 사진의 글이 좋았어요. ^^

yamoo 2015-11-04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리뷰가 인상깊네요~ 읽어보고 싶은 책이지만, 제겐 쌓여 있는 책이 산더미인지라...리뷰로 대신~^^;;

cyrus 2015-11-04 21:13   좋아요 0 | URL
분량이 얇아서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길 때 읽으면 좋습니다. ^^

인디언밥 2015-11-04 2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움은 잘 알아볼 수 없는 아픔과 같이 한다는 말씀 참 와닿네요.
고레에다 히로카즈님을 만나고 온 뒤라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이 책 꼭 봐야겠습니닷
 

 

 

 

 

 

O tvN 비밀독서단 7(1027일 방송)를 본 사람이라면 특이한 주제를 다룬 책 한 권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제목이 재미있다. 연필 깎기의 정석(프로파간다, 2013). 전국에 있는 수포자(수학 포기자의 준말)’들을 분노케 한 <수학의 정석>이 생각나는 제목이다. 이 책의 저자는 연필 깎기 장인이라고 한다. 그는 주머니칼을 비롯한 각종 도구로 연필을 깎는 기술을 선보일 줄 안다. 실제로 이 사람의 직업은 연필 깎는 일이다. 이런 괴짜가 쓴 책은 독자의 웃음을 유발한다. 혹시 비밀독서단방송에서 김범수 아나운서의 추천 책으로 연필 깎기의 정석이 소개되었을 때 나온 멘트를 기억하시는가. 방송 자막은 ‘2013A서점 선정 올해 가장 놀라운 괴작으로 나왔지만, 방송을 다시 보면 김범수 아나운서가 ‘A서점알라딘이라고 말한 목소리를 또렷이 들을 수 있다. (그런데, 2013년에 알라딘에서 올해의 괴작 도서를 선정한 적이 있었나? 어리둥절?)

 

 

 

 

 

사람들이 괴작을 즐겨 찾는 이유는 분명하다. "등신같지만 멋있어."

 

 

 

괴작(怪作)의 정의를 아시는가. 국어사전에 없는 단어이다. 온라인상에서 만들어진 신조어다. 대중의 취향에 많이 벗어나 쓰레기취급을 받거나 B급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애니메이션, 영화, 게임 등을 가리켜 괴작이라고 한다. 싸구려’, ‘쌈마이(‘삼류를 의미하는 일본어)’, ‘병맛코드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괴작은 대체로 막장가까운 엽기적이면서 파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마추어에 가까울 정도로 심하게 부족한 면이 역력히 나는 작품도 괴작으로 취급한다. 이런 괴작들을 발굴하고, 세상에 알리는 블로거들(가장 대표적인 블로거는 페니웨이. ‘괴작열전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연재하고 있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그 덕분에 괴작을 직접 찾아서 보는 마니아가 생겨났다.

 

괴작 목록에는 거의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데 책이 포함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아직까지 괴작으로 분류되는 도서만 소개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혹시 활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알려주시라) 그래서 괴작 도서를 찾아내고, 세상에 알리고 싶은 열망을 느끼게 되었다. 헌책방에 다니다 보면 정말 특이한 책 한두 권씩은 발견할 때가 있다. 책값이 싸게 매겨져도 사는 손님은 없다. 표지와 내용만 봐도 사고 싶지 않은 책이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괴작 도서라 말할 수 있다. 오직 특이한 취향에 관심 있는 소수의 사람만이 그 책의 진가를 알아보며 책의 병맛 매력을 몸소 느낀다.

 

페니웨이님의 괴작 열전처럼 괴작 도서를 소개하는 글을 써보려고 한다. 목표 권수는 50. 특이하고 병맛스러운 책을 50권이나 찾는 일이 쉽지 않지만, 최대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야겠다. 연재 글 제목을 정하느라 나름 고민했다. 괴작 도서괴도(怪圖)’로 줄여서 부르기로 한다. 첫 번째 제목 후보는 괴도 열전’. 하지만 페니웨이님의 괴작 열전를 따라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패스. 두 번째 제목 후보는 세상에 이런 책이’. 신기한 사건들을 소개하는 방송 프로그램 제목과 요지경 박물관 시리즈로 알려진 책 <아니, 세상에 이런 일이>가 연상되어서 이것도 패스.

 

 

 

 

 

괴작을 소개하는 글에 어울리는 병맛스러운 제목이 필요하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정한 제목이 바로 괴도 놈팡. 모리스 르블랑의 추리소설 시리즈 주인공 괴도 루팡을 패러디해서 괴도 놈팡이라고 지었다. ‘놈팡이는 백수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앞으로 괴도 놈팡이라는 제목으로 싸구려 취급받는 책과 그걸 찾고 싶어 하는 놈팡이의 무모한 여정을 기록할 것이다. 진부한 서평만 나열되는 알라딘이 지루한 분들에게 소소한 재미를 주는 역할이 되었으면 좋겠다. 병맛스러운 책도 재미있다는 걸 보여주겠다. 기대하시라. (엠블럼으로 사용된 그림은 마그리트가 그렸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서니데이 2015-10-29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책을 고르실 지 궁금합니다.
cyrus님, 좋은 하루 되세요.^^

cyrus 2015-10-31 19:55   좋아요 1 | URL
열심히 찾아보겠습니다. 서니데이님도 주말 잘 보내세요. ^^

yamoo 2015-10-30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 님은 확실히 저와 관심 분야가 일치하는 듯합니다. 저도 이 비밀독서단을 보고 페이퍼를 써야지라고 생각했었더랬습니다. 1회 보고 든 생각이었는데, 게을러서 쓰지 못했는데, 역시나 사이러스 님이 써주시는 군요! 굿~입니다..ㅎ

cyrus 2015-10-31 19:56   좋아요 0 | URL
야무님, 특이한 소재를 다룬 책을 알고 있으시다면 제보해주셔도 좋습니다. ^^

stella.K 2015-10-30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기대가 되는구만.
니 덕에 싸구려 취급 받는 책이 빛을 보겠군.
나도 궁금하다. 기대할게.

근데 정말 알라딘이 그런 일을 한적 있었나?
방송이 너무 오버하는구만.
하긴 방송에 고정 패널로 다니시는 분이 그러는데
방송 큐 사인이 들어오면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더군.
그것의 진위여부는 나중 문제고 무조건 떠들과 봐야 한다는 거야.
그런데서 오는 패단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저기 만화 보니까 육룡이 나르샤에서 유아인이 신세경을 보면서
쟤 너무 낭만적이지 않아라고 했던 대사가 생각난다.
그때 유아인 표정 예술이었는데. 어찌나 웃기던지.ㅋㅋ

cyrus 2015-10-31 20:00   좋아요 0 | URL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서 조금은 부담되네요. 그래도 이틀동안 대략 20권 정도 찾았어요. 읽어보고 특이한 책이 아닌지 구별하려고요.

김범수 아나운서 발언은 즉흥적으로 나왔다기 보다는 미리 만들어서 준비한 것 같았어요.

물고기자리 2015-10-30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괴작들을 소개해 주실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cyrus 2015-10-31 20:00   좋아요 0 | URL
열심히 찾아보겠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5-10-30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유명하죠.... ㅎㅎㅎ.... 정말 뭐랄까.... 괴작이란 표현이 정황하겠네요.
괴작 코너라... 무지 흥미롭겠는데요.....

괴작 으로 코파기의 즐거움인가 ? 왜 그 책 있잖습니까...

cyrus 2015-10-31 20:02   좋아요 0 | URL
왠지 곰발님은 저보다 괴작에 가까운 책을 더 많이 아시는 것 같습니다. ㅎㅎㅎ

20권 정도 후보도서를 모아봤는데 《코파기의 즐거움》도 포함되어 있어요. ^^

AgalmA 2015-10-31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괴도 놈팡단 안 만드십니까? 저도 좀 끼게ㅎㅎ...<연필깎기의 정석>을 최근 나온 <문구의 모험>과 비교해보고 싶기도 하더군요^^

cyrus 2015-11-01 19:30   좋아요 0 | URL
반응이 좋으면 단체(?) 설립을 생각해보겠습니다. ^^
 
인류의 기원 - 난쟁이 인류 호빗에서 네안데르탈인까지 22가지 재미있는 인류 이야기
이상희.윤신영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타임머신을 타고 한세대씩 조용히 거슬러 올라가 보자. 우리 눈앞엔 논밭 갈러 나가는 할아버지, 전쟁터에서 창과 칼을 들고 함성을 지르며 뛰어나가는 할아버지를 거쳐 한반도에 첫발을 내딛던 할아버지. 이러한 장면이 되감기를 한 영화 화면처럼 휙휙 지나간다. 찰스 다윈이 생각했던 인간과 유인원이 갈라지는 장면에까지 다다른다. 인류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은 연대기적 방식으로 재구성된다. 이미 널리 알려졌듯이 인간과 침팬지는 유전적 차이가 불과 2%에 불과하다. 우리가 흔히 유인원이라고 부르는 오랑우탄과 고릴라, 침팬지, 인간 가운데서 오랑우탄과 침팬지의 관계보다 침팬지와 인간의 관계가 더 가깝다.

 

그렇지만, 다윈 진화론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있는 오늘날에도 고인류학자들은 수백 년을 이어온 이 질문에 뚜렷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유력한 두 가지 가설을 내놓고 있을 뿐이다. 인류 조상이 아프리카에서 나타나 전 세계로 퍼졌다는 아프리카 기원설과 전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인류 조상이 나타나 이들 전체가 현대 인류의 유전자 풀을 이뤘다는 다지역 기원설이 그것이다. 지금까지 인류학계가 인정하고 있는 현생인류 직계 조상은 1974년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서 발굴된 ‘루시’이다. (루시의 학명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약 280만 년 전 지구에 출현한 유인원의 흔적을 근거로 학계는 인류가 호모 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 등의 진화 과정을 거쳐 약 10만 년 전 아프리카서 현생인류의 조건을 갖춘 뒤 4만 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전 세계로 대이동을 시작했다고 굳게 믿었다. 반면, 다지역 기원설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은 호모 에렉투스가 아프리카를 떠나온 것을 계기로 아시아와 유럽 등 여러 지역에서 인류가 독자적으로 진화해왔다고 본다.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인간이 침팬지에서 분리되어 인류라는 독특한 종으로 발전하게 된 연유를 묻는다면 대학을 나온 이라 해도 제대로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서점에는 인간의 진화과정을 다룬 책들이 유독 많이 나와 있다. 하지만 일부 책은 수십 년 전에 나온 학계의 정설 위주로 다루고 있어서 진화론의 폭넓은 범위를 제공하지 못한다. 고인류학 논쟁은 ‘해골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 조상의 화석이 잇달아 발견되면서 인류 진화설을 다시 써야 하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아르디’라는 애칭이 붙여진 화석을 아시는가. 학명은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 440만 년 전 아프리카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인류의 조상이다. 이 화석의 전체 골격이 발견되었던 그해에 <사이언스>지는 ‘올해의 발견’으로 선정했다.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따끈따끈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생물 교과서에 실리지 않고 있다.

 

《인류의 기원》. 제목만 보면 흔한 진화 관련 서적처럼 보인다. 심심한 제목이 아쉽지만(인터넷에 검색하면 호모 에렉투스의 발견자 리처드 리키가 쓴 동일한 제목의 책이 같이 나온다. 그밖에도 ‘인류의 기원’이라는 제목이 들어간 책이 수십 권 더 있다), 책을 펼쳐보면 교과서에서 보지 못한 흥미진진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1990년대 이후 등장한 고인류학의 최신 성과들을 가득 담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인류학 개론서들과는 전혀 다르다. 어려운 용어와 복잡한 가설이 많은 고인류학 지식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저자의 문체에 놀라고, 우리가 당연하게 알고 있는 상식들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또 한 번 놀란다.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 다음으로 사람들이 잘못 믿는 상식이 ‘원시인 식인종’이다. 2000년에 처음으로 네안데르탈인이 식인종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 이후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 화석을 분석한 과학자들은 극심한 굶주림과 식인의 흔적을 발견했다. 2009년에는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잡아먹었음을 추정케 하는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전 세계 언론들은 이 충격적인 발표 사실을 정확하게 확인하지 않고, 흥미 위주의 기사를 양산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우리 조상은 모두 식인종이었다?’라는 노골적인 제목이 붙여진 기사가 나왔다. 우리는 식인 풍습을 인간 이하의 야만적 행위로 본다. 식인 문화는 꽤 오래된 악습으로 남아 있었다. 물론 죄인을 벌주기 위한 목적이나 복수를 위해서 등 다양한 이유가 있었지만, 식인 풍습은 영원히 사라져야 할 악습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잔인한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잘못 알려진 것도 꽤 있다. 전쟁이나 재난, 기아와 같은 절체절명의 현장에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육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프리카나 태평양 지역에서는 죽은 가족의 시체를 먹어 그 사람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일종의 장례 문화로 식인 풍습이 존재했다. 네안데르탈인 또한 장례를 위한 목적으로 인육을 먹었을 거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네안데르탈인이 남긴 칼자국이 사냥감을 잡아먹기 위한 도살 흔적과 거리가 멀다.

 

아프리카 기원설은 최근 유전학의 연구 결과에 의해 더욱 설득력 있는 자료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다지역 기원설도 고고학적 자료에 의해 아프리카 기원설의 모순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있다. 어느 하나가 명백히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학문적 차이는 앞으로 유전학과 고고학의 접목으로 그 격차가 점차 좁아질 것으로 생각된다. 인류의 기원을 명쾌하게 밝힐 수 있는 연구는 이제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동물의 진화 역사만 다시 쓰이는 것은 아니다. 현생 인류의 역사야말로 끊임없이 수정 가필되는 ‘가장 뜨거운 역사’다. 다음 세대는 현재와 다른 교과서를 보게 될 것이다. 오늘도 고인류학자들은 현생 인류의 화석을 관찰하면서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혹은 ‘인간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와 같은 질문들의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수백만 년 인류 조상이 우리에게 남긴 삶의 흔적들은 우리 자신들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주고 있는 소중한 거울과도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임 푸어 - 항상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을 위한 일 가사 휴식 균형 잡기
브리짓 슐트 지음, 안진이 옮김 / 더퀘스트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여러 공식 석상에서 한국의 교육을 예로 들면서 미국의 교육 현실을 비판하여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오바마처럼 한국의 교육과 같은 이야기를 꺼낸 경우는 흔치 않다. 한국 어린이들의 학교 가는 날이 미국 어린이들보다 많다고 언급하면서 미국 어린이들이 더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공부할 것을 요구했다. 그의 이러한 언급은 우리의 ‘교육열’에서 뭔가를 배우라는 것이다. 그리고 공교육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교사들에 대한 성과급제를 확대하고, 전국 단일의 엄격한 학력평가제 도입 등의 교육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한국교육을 본받자는 발언에는 미국 학부모나 교사가 교육에 더 깊은 열정을 가져 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오바마는 자신의 성공배경에는 교육에 대한 가족들의 헌신이 밑바탕이 됐음을 고백한 적 있다. 오바마의 엄마는 매일 아침 어린 오바마를 새벽 4시에 깨웠다고 한다. 엄마는 출근하기 전까지 3시간 동안 미국 또래아이들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내용을 직접 과외를 시켰다. 잠이 온다고 투정을 부리면 엄마는 어린 오바마를 혼냈다고 한다. 이런 경험이 오바마에게 자녀교육에 대한 ‘부모의 열정’에 관심을 크게 했던 것 같다. 이렇게 오바마 가족사를 보면, 자식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하는 한국의 부모들과 너무나 흡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오바마의 엄마와 한국 부모는 아이 교육에 관한 한 ‘힘과 권위’를 내세운다. 부모 결정이 아이의 선호보다 우선이다. 에이미 추아 예일대 로스쿨 교수는 자녀의 자율성을 살려주는 서구식 교육법 대신 혹독하게 가르치는 ‘타이거 맘’ 교육법의 우수성을 설파한다. 실제로 에이미 추아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6시간까지 연습시키고 피아노 연습을 게을리하면 밥도 안 주는 무서운 엄마로 알려졌다. 하긴, 이런 엄마는 우리로선 새로울 것도 없다. 대치동 학원가에 흔하다.

 

오바마 대통령의 언급이 한국인의 근면성과 교육열을 높이 평가한 점에서 환영할 만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교육보다 사교육이 더 활성화된 한국교육의 현실을 알면 이런 말을 못한다.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입학하면 무조건 밤 9시까지 자습하고 학원에 가서 12시까지 공부하다 오는 세상이다. 초등학생은 중학생들이 배우는 과목을 미리 배우고 있다. 학생들, 그리고 부모들도 사교육으로 병들고 있다. 오바마의 한국교육 칭찬은 한국의 교육 현실을 총체적으로 보지 못한 채 수박 겉핥기식으로 일부만 보고 전체 교육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오류다. ‘교육열’이 높다고 해서 좋은 교육성과를 내는 것이 아니다. 과도한 교육열은 부모와 자식에게 정신적 압박으로 느껴질 수 있다. 엄마는 바쁘다. 특히 워킹맘은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집안일, 회사일 그리고 자녀 교육까지. 자신만의 여가를 가져보지 못한 채 매일 ‘집, 가족, 회사’를 위해서 궂은일을 맡는다.

 

<워싱턴포스트> 기자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브리짓 슐트는 일과 가사 노동에 지쳐가는 자신의 삶에 스스로 문제를 제기한다. 얼마나 바쁘게 살았으면 여가에 대한 기억마저 없다. 직장 일과 가사를 병행하느라 지친 독자라면 누구나 그녀의 대답에 동병상련을 느낄 것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여가는 어떤 시간이죠?” 나는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대답했다. “아픈 날이요.” (23쪽)

 

과거 경제 발전의 목표에 따라 허리띠 졸라매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만이 사회에서 인정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삶의 목표를 일하는 것에 두었다. 경쟁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빨리빨리’를 외친다. 속도전은 성과주의, 무한경쟁시대, 고도성장시대의 아이콘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시간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게으르거나 바쁘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낀다. 마음을 재충전하려고 잠깐 일을 그만두면 ‘백수’ 소리를 듣는다. 한창 열심히 일해서 생계를 위해 돈 벌어야 할 마당에 여행이나 다닐 여유가 있느냐고 핀잔 듣기도 한다. 사람들은 ‘바쁜 척한다. SNS에서 자신이 이런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진을 올리면서 너무 바빠서 힘들다는 심경의 글을 쓴다. 현대인은 해야 할 일이 많은 자신의 상황에 힘겨워하면서도 남들에게 근면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바쁜 삶’은 일종의 강박으로 자리 잡아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한다. ‘열심히 일하는 당신, 떠나라!’라는 카드회사의 광고 문구가 한때 유행어가 된 적 있었지만, 여가에 대한 환상만 한껏 부풀린 공허한 문구가 되고 말았다.

 

우리에게 여가생활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분명 있다. 그런데도 바쁘다는 이유로 그럴 여유를 누리지 못해 불만이 많다. 이러한 사람들을 ‘타임 푸어(Time poor)족’이라고 한다. 시간에 쫓기는 삶은 뇌와 신체 건강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스마트폰 같은 첨단기술은 시간을 부족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스마트폰에 들여다보는 횟수가 많으면 간단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자투리 시간이 줄어든다. 좋은 일이라면 무조건 해야 한다는 믿음은 ‘역할 과부하’ 현상을 불러온다. 자식의 성공과 출세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과잉 모성이 강한 부모는 역설적으로 ‘더 많은 노동’으로 내몬다. 자식의 과외 및 학원비, 그리고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한다.

 

시간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은 정말 간단하다. 쉴 수 있을 때 쉬는 것이 좋다. 업무 스트레스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본다. 그래야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기회가 찾아온다. 저자는 적절하게 쉬면서 노동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업무보다 여가를 누리는 데 중점을 맞추도록 국민의 삶을 보장해주는 제도가 많은 나라가 덴마크다. 덴마크인들은 정해진 시간 안에 자신이 맡은 업무를 끝내며, 자신이 필요할 때 휴가 제도를 신청할 수 있다. 누구나 아는 해법이라서 조금 실망하는 독자가 있겠지만, 넘치는 여가 문화의 홍수 속에서 제대로 닻을 내리지 못한 채 거센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고 있지는 않은가를 이 시점에서 냉철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시간 관리를 잘하자,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기회를 찾자. 이런 해법들이 너무 무책임한 말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결국 삶의 질을 높이게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다. 아무리 내가 하고 싶은 여가활동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시작하지 않으면 평생 그것을 하지 못한 아쉬움 속에서 인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여가 즐기기의 귀찮음에 대한 이유의 무덤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5-10-26 21: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나타 살레츨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에서 언급된 스포츠 선수 키우기, 교육 열풍을 떠올려 봅니다. 타이거 맘이 여기서도 언급되고요.
한 명의 ˝사라포바˝ 같은 선수(한국으로 치면 김연아)가 되기 위해, 만들기 위해 너무 어린 시절부터 전 인생을 걸게 되는 욕망을요. 하지만 성공하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죠. 그 과정에서 실패한 혹은 낙오된 이들의 인생은 오로지 자신의 몫으로만 남습니다. 실력이 안 되어서 라거나 자업자득이라고 가볍게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세상엔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늘 있는 법이니까요. 우리 역시 크고 작을 뿐 성공 욕심이 없다고 부정할 수 없고요. 사람들이 연예인이나 성공한 사람들을 선망의 눈으로 보는 것도 자신의 좌절된 혹은 숨겨진 욕망을 대입시켜보는 대리만족도 있을 겁니다.
자기의 꿈, 미래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주위를 의식한 욕망은 아닌지 잘 살피고 잘 다스릴 줄 알아야 진정한 휴식이 오겠죠.

cyrus 2015-10-27 19:46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가 매스컴에 많이 알려지고, SNS이 활성화될수록 자신의 삶의 위치를 남과 비교해서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 스스로 정해지는 경향이 많아졌어요.

북다이제스터 2015-10-26 21: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PISA, 국제학생성취도평가,에서 핀란드와 한국이 매년 1, 2위를 다투는데요, 중요한 건 핀란드가 한국의 학습 시간에서 1/3도 되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이건 뭔가 오바마 엄마식 방법에 문제가 있는 거 같습니다. 타이거 맘, 첨 들어보지만 현상에 의미있는 개념어 인거 같습니다^^

cyrus 2015-10-27 19:48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사실이 에이미 추아가 우리나라 포럼에 참석했을 때 우리나라 교육이 북유럽 방식처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적 있습니다. ^^

yamoo 2015-11-04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읽으려고 도서관에서 빌려 왔습니다....끝까지 읽을 수 있을지 우려되지만 몇 장이라도 읽어볼 요량으로~^^

cyrus 2015-11-04 21:16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문화와 차이가 있는 외국 사례가 많은 편이라서 그 부분만 속독하거나 넘겨도 괜찮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