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92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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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시선은 솔직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에는 가볍게 지나치기 어려운 특별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독자는 시인의 눈을 통해 때 묻은 상처를 치유하고 인간이 추구하는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황인숙 시인의 시집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는 시인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느낀 진실 된 작은 이야기들이다. 시인은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임을 마음의 깊은 눈을 통해 그 숭고한 뜻을 던져주고 있다.

 

 

 

하얗게

하얗게

눈이 시리게

심장이 시리게

하얗게

 

네 밥그릇처럼 내 머릿속

 

아, 잔인한, 돌이킬 수 없는 하양!

외로운 하양, 고통스런 하양,

불가항력의 하양을 들여다보며

 

미안하고, 미안하고,

그립고 또 그립고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55쪽)

 

 

 

톨스토이의 짧은 소설 <세 가지 질문>은 제목 그대로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일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일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소설 끝에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결론이 나오는데, 이 소설을 안 본 독자를 위해서 결론을 언급하지 않겠다. 이 소설을 읽지 않아도 세 가지 질문의 답이 무엇인지 짐작하리라.

 

늘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는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서 세상을 살고 싶어 한다. 실은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세상살이가 팍팍하다는 한탄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도 비록 잠깐이지만 언뜻언뜻 행복에 겨운 순간들을 경험하고 있다. 그렇지만 살다 보면 ‘행복한 지금 이 순간’은 ‘행복했던 시절’로 달라진다. 매일 수 시간을 행복했던 순간들을 기억하는 데 쓰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세월의 변화에 따라 머리카락이 점점 하얗게 변하는 것처럼 머릿속도 점점 하얗게 된다. 머릿속에 있었던 다양하고도 알록달록한 추억들은 시간이라는 흐름에 떠밀려 씻겨 내려간다. 좋은 것들이 사라지기 전에 우리는 살아오면서 행복했던 순간들을 가만히 되짚어본다. 그때의 느낌을 고스란히 지금 이 순간으로 가져와 다시 한번 그 순간을 그리워하면서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그때 무엇이 내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었던가. 생각건대,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감정이 ‘사랑’이다. ‘사랑’을 계속 마음속에 채워 넣으면서 살아도, 잠깐 뒤돌아보면 허전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허전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 단맛 쓴맛 보면서까지 사랑을 하고 싶은가 보다.

 

 

오늘 하루는,

나랑 약속을 잡아놓고도

또 친구를 만나러 가네

그렇게 됐으니 오늘 밤에는 꼭,

미룬 약속을

또 못 지키고 다른 친구를 만나러 가네

아, 정말!

맨날맨날맨날!

나한텐 언제 시간 내줄 거야?

우리가 진짜 ‘자기 사이’ 맞기나 하니?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해?

일찍 돌아올게

가책을 누르고 큰소리치며

친구를 만나러 가네

 

(『이렇게 가는 세월』, 145쪽)

 

 

 

『이렇게 가는 세월』은 아주 평범한 내용의 시다. 그렇지만 독자에게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보게 한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살면서 정말 소중한 것에 대해 소홀하지는 않았는지 뒤돌아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지나가는 세월은 우리를 위해 기다려 주지 않는다. 언제인가 이 모든 소중한 것들과 헤어진다. 그 소중한 것은 무척 다양한데 ‘나’와 가족 간의 화목한 관계도 되고, ‘나’와 친구 간의 우정일 수 있다.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곤란하다. 둘 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라도 사라지면 낙담한다. 와야 할 것이 안 오는 상황에 안타까워하고, 또 머물러야 할 것들이 떠나는 상황에 슬퍼하면서 우리는 결별의 아픔에서 잘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일이 닥쳐오면 눈앞의 어떤 즐거움보다는 더 깊은 곳에 있는 참된 부분에 더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이상하다

거품이 일지 않는다

 

어제는 팔팔했는데

괜히 기진맥진한 오늘의 나

거품이, 거품이 일지 않는다

 

쓰지 않아도 저절로

소진돼버리는

생의 비누의 거품

 

(『묽어지는 나』, 35쪽)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생의 거품이 천천히 소진돼서 편안히 눈을 감으면 좋겠지만, 그게 내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다. 단 한 번의 삶이기에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질 수밖에 없다. 세상을 더 오래 살지 못하고 죽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괴로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겨둔 채 혼자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불안한 감정을 삶의 활력소로 승화시킬 줄 아는 자세이다. 생의 거품이 더 일어나도록 사는 것이 쉽지 않지만, 적어도 사그라지지 않도록 살아가야 한다. ‘혼자’보다는 ‘함께’ 살 때 좀 더 수월하게 생의 거품을 만들 수 있다. 아무리 혼자 사는 것이 좋다고 해도 함께 사는 사람에 비해 생의 거품이 빨리 소진된다. 슬프게도 이 세상에 생의 거품뿐만 아니라 사랑마저 식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평범한 사랑은 가슴을 따뜻하게 만든다.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행복의 온기를 찾아낼 수 있는 게 사랑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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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02-10 1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조금 더 길다면, 좋을텐데, 아쉽네요.^^
cyrus님, 즐거운 금요일 저녁 되세요.^^

cyrus 2017-02-11 10:30   좋아요 1 | URL
시간이 참 빨리 흘러 갑니다. 벌써 오늘이 주말입니다. 정월 대보름 날인데 오곡밥 드셨습니까? 밥보다는 귀밝이술이 더 좋군요. ㅎㅎㅎ 주말 잘 보내세요. ^^

2017-02-10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11 10:34   좋아요 0 | URL
현실을 직시하면서 사는 것도 좋지만, 너무 어둡고 힘든 것만 보면 좋은 일에 대한 기억만 찾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지나쳐버린 좋은 일들이 있을 겁니다. 시간이 지나고나서야 그 때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transient-guest 2017-02-11 0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은 짧은데,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그리 많지 않네요.ㅎ

cyrus 2017-02-11 10:35   좋아요 0 | URL
저도 요즘 그렇게 느낍니다. 슬슬 관계를 유지하기가 버거워집니다. 잡생각도 많아지고요.. ^^;;

표맥(漂麥) 2017-02-11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텅~ 터엉~~~ 주말을 그렇게 보냅니다...^^

cyrus 2017-02-12 00:12   좋아요 0 | URL
주말에는 집에서만 쭉 있고 싶어도 가끔 밖에서 사람 만나서 놀고 싶기도 해요.. ^^;;

jeje 2017-02-13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월! 우리를 좀 기다려줄수도 있는거 아닙니까? 기다려주세요! 떼쓰고 싶은 밤입니다.

cyrus 2017-02-14 12:04   좋아요 0 | URL
가는 세월을 멱살 잡고 싶은 심정입니다. ㅎㅎㅎ

나비종 2017-02-16 04: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닷가에서 백사장을 바라보다보면 평범하게 펼쳐지던 모래들이 어느 순간 보석 가루처럼 반짝일 때가 있어요. 바라보는 각도가 절묘하게 맞았을 때죠.
평범 속에서 발견하는 행복도, 특별함을 느끼게 하는 사랑도 결국 그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생각해봅니다. 시인의 시선을 통해 잔잔하게 전해져오는 감동처럼요.

cyrus 2017-02-16 11:49   좋아요 0 | URL
역시 좋은 말씀으로 댓글을 남기시는 모습이 여전하십니다. ^^
 

 

 

 

 

 

 

 

 

 

 

 

 

 

 

 

 

 

 

 

지난 화요일에 프랑수아 비용의 《유언의 노래》(민음사, 2016년)와 《유언시》(문학과지성사, 1980년)에 공통으로 발견된 오류를 언급한 글을 쓴 적이 있다. 두 책은 『유증시』의 14연 8행시를 13연으로 잘못 소개했다. 그러나 번역자들의 실수라고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조금 부족했다. 어젯밤에 《유언시》를 다시 읽고 나서야 드디어 의문점이 풀렸다.

 

내 글에 인용된 원문의 출처는 ‘프로젝트 구텐베르크’다.

※ 링크 : http://www.gutenberg.org/files/12246/12246-h/12246-h.htm

 

 

XIII(13연)

 

Item, à Jehan Trouvé, bouchier,

Laisse le mouton franc et tendre,

Et ung tachon pour esmoucher

Le boeuf couronné qu‘on veult vendre,

Et la vache qu‘on ne peult prendre.

Le vilain qui la trousse au col,

S‘il ne la rend, qu‘on le puist pendre

Ou estrangler d‘un bon licol!

 

 

《유언시》를 번역한 송면 교수는 이 13연 8행시를 ‘22연’이라고 썼다. 프랑스어를 잘 모르는 분을 위해 번역문 중간에 원어를 표시했다.

 

 

또 하나, 푸주한 장 투르베(Jehan Trouvé)에게는

질이 좋은 부드러운 양과

팔려 내놓은 관을 쓴 황소(boeuf couronné)의

파리를 쫓는(esmoucher) 채찍 한 개와

그리고 암소(vache)를 남겨 준다.

이 암소를 어깨에 메는 나쁜 놈(vilain)이 있거든 잡아도 좋고

그리하여 돌려주지 아니하거든 단단한 고삐(licol)로

그 놈의 목을 졸라도(estrangler) 좋으리라.

 

(《유언시》 58쪽)

 

 

 

이제 남은 건 송 교수가 ‘19연’으로 잘못 소개한 8행시다. 이 구절은 19연이 아니라 22연이다.

 

 

XXII(22연)

 

Item, au chevalier du guet,

Le heaulme luy establis;

Et aux pietons qui vont d'aguet

Tastonnant par ces establis,

Je leur laisse deux beaulx rubis,

La lenterne à la Pierre-au-Let.,

Voire-mais, j'auray les Troys licts,

S'ilz me meinent en Chastellet.

 

 

또 하나, 야경대장(夜警隊長, au chevalier du guet)에게는

투구를 주기로 정해 두고

가게의 대를 어루만지며 야경을 도는

사보(徙步)의 야경 대원들(pietons)에게는

훔친 멋있는 물건(rubis)

피에르 오 레(Pierre-au-Let) 가(街)의 초롱(lenterne)을 남겨 준다.

그리하여 만약(Voire-mais) 그들이 나를 샤틀레 감옥(Chastellet)으로 연행하면

나는 세 개의 백합 무늬의 방을 차지하리로다.

 

(《유언시》 56쪽)

 

 

 

정말 희한한 일이다. 어떻게 비용을 전공한 두 명의 불문학자가 똑같이 8행시의 머릿수를 잘못 적는 실수를 저질렀을까? 두 사람이 번역을 위해 참고한 원서는 같은 책이 아니다. 8행시 순서를 잘못 적은 원서를 그대로 옮기는 바람에 불문학자들이 그 오류를 발견하지 못할 수 있고, 아니면 내가 참고한 ‘프로젝트 구텐베르크’에 입력된 원문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

 

 

 

 

 

 

 

※ 수정 · 첨언합니다 (2017년 2월 10일 작성)

 

 

제가 2월 7일, 그리고 오늘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유언의 노래》 13연 8행시에 문제를 제기하는 글을 썼습니다. 오늘 오전에 ***님(의 댓글이 ‘비밀’로 되어 있어서 실제 닉네임을 거론하지 않았습니다)께서 제 의견에 대한 이견을 내놓았습니다. ***님의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제가 참고했던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원문이 잘못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원문은 1860년대에 나온 것이고, 그 후로 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반영된 시의 순서와 머릿수가 체계적으로 정립되었습니다. 《유언시》의 송면 교수와 《유언의 노래》의 김준현 교수는 새롭게 정리된 원본 시집을 참고해서 번역했을 겁니다. ***님이 2012년에 나온 불영 대역본 시집의 시의 순서와 머릿수가 두 권의 번역본과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프로젝트 구텐베르크’는 과거 자료를 디지털화해서 옮겼기 때문에 최근의 연구 성과를 반영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글므로 제가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원문을 가지고 두 권의 번역본에 대해 문제점이 있다고 주장한 의견이 잘못되었음을 밝힙니다. 잘못 전달될 소지가 있는 내용은 '취소선'으로 그었습니다. 좋은 의견을 주신 ***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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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 1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10 12:43   좋아요 1 | URL
그래도 모국어의 시가 더 좋습니다. ^^

레삭매냐 2017-02-13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구텐베르크 프로젝트를 이용해서
불어 번역에 대해 의문점을 제시했었는데,
번역판이 다르다는 그런 대답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출판사 내부 사정을 자세히 모르고, 또 언어
에 대해서는 영어 정도 밖에 모르니 이견을
제시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저자의 이름 건에 대해서도...

예를 들어 존 버저의 경우도 자신의 이름도
자신이 버저라고 하는데 왜 굳이 우리나라
출판사에서는 꾸역꾸역 존 버거라고 하는지
모르겠더군요.

틀렸으면 고치는 게 정상인데 말이죠.

cyrus 2017-02-13 15:27   좋아요 0 | URL
번역 문제는 번역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저처럼 어설프게 구글 번역기 돌리면서 하면 전문가에게 제대로 털리기 마련입니다.. ㅎㅎㅎ

오랫동안 출판사에서 사용된 명칭, 작가 이름 같은 고유명사가 고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베르테르’의 표기가 잘못 돼서 ‘베르터’로 고쳐 쓰는 사람이 있어도 대부분 사람들은 익숙한 ‘베르테르’를 씁니다. ^^;;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을 읽으면 불쾌한 기분이 들었던 그 날이 생각난다. 4, 5년 전이었을 것이다. 조금 오래된 일이라 이제는 정확하게 묘사하기 힘들지만, 아직도 그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달아오른다. 페이스북에서 여성 시인 ‘임 씨’를 알게 됐다. 임 시인은 나에게 ‘친구 신청’을 하게 된 것을 수락한 계기로 서로 알기 시작했고, 실제로 만난 적은 없다. 한 번은 임 시인이 자신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장문에 가까운 글을 남겼다. 임 시인은 ‘문학 작품에 드러난 악(惡)’이 문학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이유가 있는지에 대해 의견을 밝혔고, 자신은 ‘악’이 하나의 문학적 소재로 사용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드러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반골 기질을 숨기지 못하는 못된 버릇은 여전한가 보다. 나는 그 글을 보는 순간, 임 시인의 입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내용의 댓글을 남겼다. ‘문학 작품에 드러난 악’도 충분히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으며 이를 근거로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을 언급했다. 아니, 그런데 내 댓글에 시인의 ‘페이스북 친구’ A가 답글을 달았다. 나는 A와는 일면이 없었다. 프로필 사진으로 봐서는 A는 중년층 남성이었다. A는 내 의견이 틀렸다고 지적했다. 내가 시집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면서, 보들레르가 악에 탐닉했다기보다는 기독교 정신도 수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보들레르의 시 제목 하나를 언급했는데, 지금은 그게 제목이 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A의 답글 하나로 인해 임 시인의 글을 지적했다가 도리어 제3자에게 지적당하는 굴욕적인 상황이 연출되었다.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시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새로운 사실을 알려줘서 감사하다는 식으로 좋게 답글을 남겼다. A의 반박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지만, 남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논쟁을 해봤자 어차피 내가 불리한 입장이 된다. 그때 나는 임 시인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었고, A와 임 시인은 서로 페이스북 글에 ‘좋아요’를 많이 눌러줄 정도로 오랫동안 친한 사이였다. 임 시인이 내 의견을 옹호해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임 시인은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답글을 달았는데, 역시 내 의견에 동의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 날 이후로 시집을 다시 읽었다. 시집은 윤영애 교수가 번역한 ‘문학과지성사’ 판본이다. 내가 잘못 안 건지, 아니면 A가 잘못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시집을 정독했다. 그런데 몇 번 읽어봐도 A가 알려준 시 제목이 ‘문학과지성사’ 판본에 없었다. 만약 A가 프랑스어로 된 시 제목이나 그 시가 수록된 시집을 알려줬으면 그게 무슨 시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A가 알려준 시를 찾아내지 못했다. 복수(?)의 기회는 그렇게 물 건너 가버렸다.

 

몇 년 지나고 나서야 여기서 A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나 자신이 쪼잔해 보인다. 그래도 이번에 보들레르의 시집을 다시 읽으면서 새로이 알게 된 생각만큼은 꼭 밝히고 싶다.

 

 

 

 

 

 

 

 

 

 

 

 

 

 

* 《악의 꽃》 (김붕구 역, 민음사, 1974년)

* 《악의 꽃》 (윤영애 역, 문학과지성사, 2003년)

* 《악의 꽃》 (황현산 역, 민음사, 2016년)

 

 

나는 지금까지 읽었던 보들레르의 《악의 꽃》 번역본은 ‘문학과지성사’ 판본(윤영애 역), ‘민음사’ 구판(김붕구 역), 그리고 구판을 절판시키고, 작년에 새롭게 선보인 ‘리뉴얼판(황현산 역)’이다. ‘문학과지성사’ 판본은 1857년 초판 출간 당시 윤리성 논란으로 삭제된 6편의 시뿐만 아니라 《악의 꽃》 2판에 실을 예정이었던 에필로그의 초고도 수록되었다. ‘민음사’ 구판과 ‘리뉴얼판’은 선집 형태이다. 한 권에 수록된 시의 편수가 적지만, 프랑스어 원문이 있어서 번역문과 비교해서 읽을 수 있다. 혹자는 번역이 다른 세 권의 시집을 굳이 읽을 필요가 있냐고 생각할 것이다. 세 권의 번역본마다 약간씩 번역 어휘의 차이점은 있다. 다만 그걸 비교하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복수의 번역본을 읽은 진짜 이유가 보들레르의 시를 바라보는 번역자들의 관점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원수』(L’Ennemi)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이 시는 세 권의 번역본 모두 수록되었다.

 

 

내 청춘 한갓 캄캄한 뇌우였을 뿐,

여기저기 눈부신 햇살이 뚫고 비쳤네.

천둥과 비가 하도 휘몰아쳐 내 정원에는

빠알간 열매 몇 안 남았네.

나 지금 사상(思想)의 가을에 닿았으니,

삽과 갈퀴를 들고 다시 긁어 모아야지,

홍수가 지나며 묘혈처럼 곳곳에

커다란 웅덩이를 파놓았으니.

누가 알리, 내가 꿈꾸는 새로운 꽃들이

모래톱처럼 씻긴 이 흙 속에서

활력이 될 신비의 양분을 얻을지를?

― 오 괴로워라! 괴로워라! 시간은

생명을 파먹고, 심장을 갉는 정체모를 원수는

우리 흘리는 피로 자라며 강대해지는구나!

 

(『원수』, 김붕구 역)

 

 

이 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보들레르 연구가와 번역가들은 이 시의 제목인 ‘원수’의 정체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보들레르는 늘 ‘권태’를 느끼는 사람이었다. 시인은 헤어날 수 없는 권태와 지루함, 그리고 가슴속에 가득한 환멸을 떨쳐내려고 상상의 낙원을 설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들레르의 공상은 일시적인 도피처에 불과했고, 그는 시를 통해 증오와 환멸을 드러내며 폭력과 악의(惡意)를 언어로 표출했다. 시인은 자기 회한과 허무를 곱씹기만 하는 자신의 모습이 비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 길지 않은 시간이 흘러가는 과정이 시인의 입장에서는 ‘지옥의 시간’이었을 터. 윤영애 교수는 ‘원수’의 정체가 ‘생명을 파먹는 시간’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붕구 씨는 다른 견해를 밝혔는데, ‘권태’ 또는 ‘회한’이라고 했다. 리뉴얼판의 번역을 맡은 황현산 교수는 ‘원수’를 단수의 의미가 아닌 복수의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보들레르가 다른 시에서 두려운 존재로 언급된 ‘시간’, ‘죽음’, ‘권태’는 물론이고, 시인을 괴롭힌 질병인 ‘매독’까지 거론된다.

 

 

 

 

 

 

 

 

 

 

 

 

 

 

 

* 《프랑스 상징주의와 시인들》 (소나무, 2000년)

 

 

보들레르의 시 한 편을 바라보는 번역가의 시선이 다르듯이 《악의 꽃》을 딱 한 가지로 정의하기 어렵다. 내가 보들레르를 ‘추(醜)와 악의 미학을 발견한 시인’이라고 평가해도 맞다. A처럼 시에서 기독교 정신과 유사하다고 느꼈다면 그 의견 또한 맞다. 사실 보들레르는 어떤 시에서는 자신의 운명을 방해하는 신에 반항하고 모독하는 한편, 또 다른 시에서는 신을 찬양한다. 어느 불문학자는 보들레르의 시에서 마니교(Manichaeism)의 교리를 읽어내기도 한다.[1] 시집 전체의 일부를 말해도 좋으나, 그 일부를 전체로 말하는 것은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아집에 가깝다. 자신의 의견만 믿고, 상대방의 의견을 틀렸다고 지적하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식’이다. 《악의 꽃》 한 번 제대로 읽었다고해서 그 시에서 나는 향기를 맡았다고 볼 수 없다. 시를 읽을 때마다 '악의 꽃'에서 나는 향기가 달라진다.

 

 

[1] 김기봉 《프랑스 상징주의와 시인들》, ‘보들레르의 명증(明證)’ 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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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2-10 0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글을 쓰면 cyrus님 같은 상황은 늘 마주치게 되는 거 같습니다.
해석의 옹호보다 해석의 다양성을 위해 노력하시는 것에 늘 응원보내요 :)

cyrus 2017-02-10 10:45   좋아요 1 | URL
해석의 옹호에 매달리면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똑똑하다고 해도 독선적인 사람이 됩니다. 이런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경계하려고 합니다. ^^

마립간 2017-02-10 0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읽어지만 이해를 못해서,) 가지고 있지만,

cyrus 님이 제시한 반례로서 문학을 확장한 예술의 경우로 뭉크와 같은 악마파 그림이 어떠하였을까 생각합니다.

cyrus 2017-02-10 10:48   좋아요 0 | URL
보들레르와 뭉크는 상징주의에 분류됩니다. 여기에 마립간님이 말씀하신 악마파, 혹은 악마주의로 상징주의 문학 · 예술에 포함됩니다. ‘예술 작품에 드러난 악’에 대해서 논한다면, 뭉크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

잠자냥 2017-02-10 09: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쪼잔함이라기보다는 제대로 알고 싶은 지적 호기심 아닐까요? ㅎㅎ

cyrus 2017-02-10 10:50   좋아요 1 | URL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예전에는 번역본 한 권만 다 읽으면 그 책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착각했어요. 여러 권의 번역본을 읽어보니까 예전 생각이 잘못됐음을 깨달았습니다. 정말 소중한 경험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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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흔히 ‘우파’와 ‘좌파’라는 용어와 혼동되고, 상호 대립적이고 양립할 수 없는 정치적 가치와 사고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엉뚱하게도 우리나라의 자유주의는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와 반공주의와 손을 잡고 말았다. 잘못된 만남이다. 이로 인해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은 반국가 및 반체제세력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씌웠고, 반면 무소불위의 권력에 기댄 위정자들은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유신체제식 자유주의’를 펴나갔다. 억압적인 유신체제는 정부는 물론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허용하지 않았다. 자유주의의 기본적 원칙뿐만 아니라 주권 재민 사상, 인권 존중 이런 것들을 훼손시켜왔다. 유신체제의 반공주의는 ‘자유’를 지키자는 이념과 아주 거리가 멀다. 전체주의의 압력에서 벗어나서 개인의 자유를 찾으려는 이념이라기보다 북한과 사회주의에 향한 증오의 이념이었다.

 

우리 사회의 오랜 과제는 자유와 평등, 이 두 개의 가치가 보장되는 것이다. 평등 문제와 관련된 자유민주주의적 이론 경향은 크게 ‘자유평등주의’와 ‘자유지상주의’로 나눌 수 있다. 존 롤스(John Rawls)는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사회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의론’을 집중적으로 연구, 자유주의에 평등주의의 장점을 도입했다. 그렇지만 자유지상주의자적 입장에서 롤스에 대항하는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은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할 수 있도록 국가의 역할이 제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사회민주주의는 부르주아적 지배질서의 한계 내에서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동시에 사회주의적 목표를 구현하려고 한다.

 

이탈리아의 정치학자 노르베르토 보비오(Norberto Bobbio)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정치적 구분과 대립이 인류의 발전에 커다란 구실을 해왔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좌우가 서로에 대한 차이점을 인정하지 않고, 대립하는 상황을 사회 분란의 원인으로 지적했다. 자유주의는 사회주의로부터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낙인찍혔다. 자유주의는 이미 허점이 드러난 이상적 공산주의 사회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마르크시즘(Marxism)과 전체주의적 권력에 근거를 둔 사회주의를 경계했다.

 

전통 사회주의의 한계는 명백히 지적돼야 하지만, 그렇다고 정의에 입각한 평등의 가치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이것은 자유주의적 평등이론의 사상적 기초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에도 뜻깊은 성찰을 제공해주는 개념이다. 마르크스는 모든 구조적 불평등을 철저히 분쇄해야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고 사회주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세울 수 있는 유일한 토대라고 했다. 그러나 자유라는 것은 각종 권리의 행사에 부당한 제약을 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회주의야말로 진정한 자유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체제이다. 보비오는 두 가지 이념 사이에 생긴 차이점의 간격을 줄이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장점을 결합한 ‘자유사회주의(Liberal socialism)’를 제안한다. 자유사회주의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참여적 민주주의를 수용하면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성과물이나 가치의 균등한 배분, 즉 사회적 시민권을 포함하여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형태이다.

 

일부 지식인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자유사회주의’가 그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결합해서 경제 불평등이 어느 정도 교정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 사회가 ‘자유사회주의’의 실효성을 검토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자유주의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바로 잡는 일이다. 자유주의의 중요한 가치인 ‘자유와 관용’은 기득권층에 흡수돼 버려 보수주의에서는 ‘질서와 안정’의 하위 개념이 되고 말았다. 자유주의에 대한 올바른 분석이란 자유주의에 대한 일방적인 예찬론에서 벗어나 자유주의가 발전 과정에서 보여준 문제점도 숨김없이 지적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주의의 원리와 가치를 존중한다면 개인적 자유, 정치적 자유, 관용 등을 배반하는 사실들을 정직하게 비판해야 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다수의 횡포’라는 것이다. 대중은 다수가 지지하는 여론에 쉽게 순응하는 경향이 있다. 정부가 이를 악용했을 때, 민주적 정치 문화에 많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한국 정치의 이념 대결은 매우 후진적이다. 진보와 보수가 서로 배제한 채 일방적 주장만 내세우면 민주사회의 통합과 균형이 파괴된다. 이런 점에서 진보와 보수는 극단주의와 거리를 두고 좀 더 현실적이고 온건한 정치적 지형으로 이동해야 한다. 두 가지 이념의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려는 사람들에게 ‘자유사회주의’는 여전히 매혹적인 정치적 기획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는 우리 사회는 한 단계 성숙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너무 멀기만 하다. ‘자유사회주의’의 수용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신중할 필요가 있다.

 

 

※ 패러디한 리뷰 제목의 원본 : 오모리 후지노의 라이트노벨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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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9 17: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09 21:39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제가 그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어요. 우리나라에 점점 커지는 이념의 돌연변이가 정말 심각합니다.
 

 

 

 

 

 

 

 

 

 

 

 

 

 

 

 

 

 

 

 

* 《아내 가뭄》 (동양북스, 2016년)

 

 

애너벨 크랩의 《아내 가뭄》 해제는 정희진 씨가 썼다. 해제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내용이 있다.

 

 

기본적인 교양을 갖추고 싶은 남성이라면 읽기를 권한다. 가장 사회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분야에 관심이 있는 남성도 읽기를 권한다. 아, 얼마 전 모 지역 평생학습관에서 만난 어느 남성 수강생에게도 권한다. 그는 '노총각'이라는 표현도 못 참을 정도로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듯했다. 그런 그가 내 강의를 신청한 이유는 "장가를 가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아서 일단 여자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여성주의는 여성에 대한, 여성에 관한, '결혼과 연애를 위한' 인식론이 아니다. 하지만 여성주의는 남녀 모두에게 자신과 사회를 아는 데 큰 도움을 준다. (14~15쪽)

 

 

나는 책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생각을 해봤다. 여성주의는 '기본적인 교양'이 될 수 있을까? 이 전제가 성립된다면, 결론으로 페미니스트는 '교양을 갖춘 사람'이 된다. 그런데 나는 결론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교양'과 '여성주의', 이 두 가지 개념의 광범위한 의미를 되짚어보면 성립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교양》 (들녘, 2001년)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현실 세계 편》 (한빛비즈, 2014년)

 

 

먼저 '교양'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자. 교양은 한 가지 의미로 정의되기 어렵다. 그리고 교양을 정의한 생각이 무척이나 다양하다. 팟캐스트 '지대넓얕'의 채사장은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현실 세계 편》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대화하고 소통하기 위해 필요한 건 언어가 아니라 공통분모다. 과거와 미래의 사람들까지 아울러서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공통분모. 그것을 교양, 인문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교양과 인문학은 단적으로 말해서 넓고 얕은 지식을 의미한다. 이 넓고 얕은 지식, 즉 최소한의 지식은 성인들의 대화 놀이에 참여하기 위한 기본적인 자격증이다. 성인들의 대화놀이에 참여하기 위해서도 기본적인 자격증이 필요하다. 그 자격증은 최소한의 지식이다. (5~6쪽)

 

 

채사장이 생각하는 '최소한의 지식'이란 '나'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시각이다. 그런데 채사장은 지식을 '성인들의 대화 놀이에 참여하기 위해 넓고 얕은' 것이라고 했다. 툭 까놓고 말하면, 교양이란 성인들의 대화 놀이에 눈치껏 참여하여 아는 척할 수 있는 기본 규칙이 된다. '지대넓얕' 열풍이 불기 이미 수십 년 전에 '교양'의 중요성을 역설한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교양을 '의사소통할 때 사용하는 규칙'이라고 말했다. 이는 채 사장의 생각과 비슷하다. 슈바니츠는 (의사소통을 채사장 식 표현으로 비유하자면) '성인들의 대화 놀이'를 '사회적 게임'으로 비유했다. 이 게임의 목적은 교육받았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이 알려준 대로 교양을 배워 사람들 만날 때마다 '아는 척', '배운 척'할 수 있다.

 

 

 

 

 

* 《페미니즘의 검은 오해들》 (현실문화, 2016년)

 

 

 

그런데 여성주의(혹은 여성학)가 교양의 범주가 들어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왜냐하면 여성주의는 남이 알려준 대로 배운다고 해서 얻는 지식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여성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단순히 교양을 '지식인이 중요하다고 알려준 지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인식하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대학교에 교양과목으로 '여성학' 강좌가 많이 생겨났다. 여성학에 생소한 남녀 대학생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여성학은 모든 남녀, 특히 남학생이 알아야 할 기초 교양이다.” 여성학을 가르치는 교수는 자신의 강좌에 수강 신청하는 남학생들의 수에 흡족해할 것이다. 그리고 교수는 강좌를 수료한 남학생들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만으로도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그런 교수가 정말로 있다면, 내가 한 번 묻고 싶다. "여성학을 배운 남학생들 중에 단 한 명이라도 성차별 문제 앞에서 여성주의자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나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여성주의 학자 레나테 클라인(Renate Klein)은 자신이 직접 대학에서 여성학을 가르치면서 '교양으로서의 여성학'의 한계를 확인했다. 그녀는 여성학을 배우는 남학생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첫 번째는 '전문가' 유형. 이 유형의 남학생들은 자신의 전공 분야는 잘 알고 있으나 여성이 사회적으로 억압받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여성주의를 왜 배워야 하는지 모른다. 두 번째 유형은 '낭만적 기교자' 유형이다. 이 남학생은 여성주의를 하나의 지식으로 이해한다. 여성주의가 남성을 비판해도 여성주의자들의 발언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어디 가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여성주의를 아는 척한다. 그래서 이 유형을 '수염 달린 페미니스트'라고 불리기도 한다. 마지막 유형은 '가여운 아이들' 유형이다. 이 유형의 남학생은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문제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을 도와달라고 말한다. 좋게 말하면 여성주의를 이해하려는 가상한 노력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여성주의는 누군가가 알려줘서 배워야 할 지식이 아니다. 여성이 불편해하는 각종 상황을 자기 일인 것처럼 이해하고,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 것이야말로 여성주의를 공부하는 진짜 목적이다.

 

 

 

 

 

 

 

 

 

 

 

 

 

 

 

 

 

 

*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청어람미디어, 2002년)

* 《남자는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창비, 2015년)

* 《나쁜 페미니스트》 (사이행성, 2016년)

 

 

나는 '수염 달린 페미니스트'를 다른 유형의 남학생과 상대할 때보다 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학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남성들, 그리고 나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주의를 아는 척하는 사람들은 화려한 언변으로 여성주의의 장점을 잘 얘기하지만, 실상 여성 문제 앞에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러니까 그들은 '말보다는 행동'을 하지 못한다. 지적 허영심이 강한 '수염 달린 페미니스트'는 맨스플레인(mansplain)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여성학을 사람이 알아야 할 교양으로 소개한 디트리히 슈바니츠도 교양을 갖춘 남성의 우월감을 경계했다.

 

 

남성들에게 몸에 밴 나쁜 습관들 중 하나가 호언장담이다. 남성들은 잘난 척하기 좋아하며 허세를 부린다. 자신들이 잘났다고 으스댄다. 남성들은 여자, 재물, 명성,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들을 쟁취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기 때문에 그렇게 규정되었다.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교양》 683쪽)

 

 

'성인들의 대화 놀이'나 '사회적 게임'에 나서는 '수염 달린 페미니스트'는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그럴듯한 말로 여성주의를 대화의 소재로 삼을지도 모른다. 대화 도중에 '수염 달린 페미니스트’들이 불쑥 퀴즈를 내서 상대방을 무안하게 만들 수 있다.

 

"cyrus씨. 벨 훅스의 책을 읽어보셨습니까? 뭐라고요? 그것도 안 읽어봤어요? 그러면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신 거예요?"

 

그렇게 해서 지적 우월감에 빠진 남자는 재수 없는 '교양 있는 페미니스트'가 된다. 그리고 겉만 포장된 교양미를 뽐내 여성으로부터 환심을 얻으려고 한다. 정희진 씨가 《아내 가뭄》 해체에서도 밝혔듯이 여성주의는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서 노총각이 배워야 할 교양'이 아니다. 여성을 공략하기 위한 여성주의는 '가짜 여성주의'다. 미셸 푸코의 말을 빌리자면 여성주의는 교양이 아니다. 여성주의는 남성과 여성 모두 힘들게 만드는 각종 사회 문제(가부장제, 성차별, 여성 혐오 등)를 문제 삼고 반성하는 방법이다.[1] 이게 내가 스스로 질문한 생각에 대한 답변이자 이 글의 결론이다.

 

책으로 여성주의를 이해하는 방법도 좋지만,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다 본 책을 덮고 나서 일상생활에 마주하는 여성 문제에 목소리를 내야 한다. 여성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이든, 페미니스트든 지적받아도 된다. 비난이든 비판이든 외부의 시선에 절대로 움츠러들어선 안 된다. 나는 얕은 여성학 지식으로 전문가인 척하는 '가짜 여성주의자'가 아닌 합리적 비판을 수용하면서 차근차근 배우는 '나쁜 여성주의자'가 되고 싶다. 당연히 이 글에 드러난 내 생각에도 허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이 글이 ‘수염 달린 페미니스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

 

 

 

 

[1] 원문 : "철학은 지식이 아니다, 철학은 모든 것을 문제로 삼고 반성하는 방법이다." (미셸 푸코의 말, 다치바나 다카시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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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8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09 10:38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사실 레나테 클레인은 남학생 유형을 소개하면서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되기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저는 그 입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런 입장이 강화될수록 남성은 페미니즘을 멀리할 겁니다. ‘남성은 절대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어!’라고 단정하는 페미니스트가 있다면 저는 반박하고 싶습니다. 남성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2017-02-09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09 16:52   좋아요 0 | URL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밝혀주셔서 고맙습니다. ***님의 생각이 저와 비슷합니다. 제 생각이지만, ***님 같은 분처럼 페미니즘을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분은 상대방의 의견을 수용할 줄 알고, 자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파악하려고 합니다. 비판이든 비난이든 내 생각과 다른 의견과 충돌하면, 의사를 밝히기 위한 목소리가 위축되거나 최악의 경우, 반목의 감정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의 검은 오해들>의 저자가 일부 페미니스트의 독단적 태도를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저자의 입장에 동의해서 ‘남자는 절대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어!’라는 주장에 반대합니다. 페미니즘은 죽을 때까지 알아야 하는 내용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정설로 믿어진 페미니즘 이론들을 반박하는 새로운 페미니즘 이론이 등장할 거고, 그렇게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질 겁니다. 이 흐름에 따라가지 못해서 과거의 이론만 안다면, 사회가 변화해서 생기는 새로운 남녀 간 문제에 대응하지 못합니다. 저도 많이 부족해서 계속 알아가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