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내 가뭄》 (동양북스, 2016년)
애너벨 크랩의 《아내 가뭄》 해제는 정희진 씨가 썼다. 해제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내용이 있다.
기본적인 교양을 갖추고 싶은 남성이라면 읽기를 권한다. 가장 사회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분야에 관심이 있는 남성도 읽기를 권한다. 아, 얼마 전 모 지역 평생학습관에서 만난 어느 남성 수강생에게도 권한다. 그는 '노총각'이라는 표현도 못 참을 정도로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듯했다. 그런 그가 내 강의를 신청한 이유는 "장가를 가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아서 일단 여자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여성주의는 여성에 대한, 여성에 관한, '결혼과 연애를 위한' 인식론이 아니다. 하지만 여성주의는 남녀 모두에게 자신과 사회를 아는 데 큰 도움을 준다. (14~15쪽)
나는 책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생각을 해봤다. 여성주의는 '기본적인 교양'이 될 수 있을까? 이 전제가 성립된다면, 결론으로 페미니스트는 '교양을 갖춘 사람'이 된다. 그런데 나는 결론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교양'과 '여성주의', 이 두 가지 개념의 광범위한 의미를 되짚어보면 성립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교양》 (들녘, 2001년)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현실 세계 편》 (한빛비즈, 2014년)
먼저 '교양'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자. 교양은 한 가지 의미로 정의되기 어렵다. 그리고 교양을 정의한 생각이 무척이나 다양하다. 팟캐스트 '지대넓얕'의 채사장은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현실 세계 편》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대화하고 소통하기 위해 필요한 건 언어가 아니라 공통분모다. 과거와 미래의 사람들까지 아울러서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공통분모. 그것을 교양, 인문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교양과 인문학은 단적으로 말해서 넓고 얕은 지식을 의미한다. 이 넓고 얕은 지식, 즉 최소한의 지식은 성인들의 대화 놀이에 참여하기 위한 기본적인 자격증이다. 성인들의 대화놀이에 참여하기 위해서도 기본적인 자격증이 필요하다. 그 자격증은 최소한의 지식이다. (5~6쪽)
채사장이 생각하는 '최소한의 지식'이란 '나'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시각이다. 그런데 채사장은 지식을 '성인들의 대화 놀이에 참여하기 위해 넓고 얕은' 것이라고 했다. 툭 까놓고 말하면, 교양이란 성인들의 대화 놀이에 눈치껏 참여하여 아는 척할 수 있는 기본 규칙이 된다. '지대넓얕' 열풍이 불기 이미 수십 년 전에 '교양'의 중요성을 역설한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교양을 '의사소통할 때 사용하는 규칙'이라고 말했다. 이는 채 사장의 생각과 비슷하다. 슈바니츠는 (의사소통을 채사장 식 표현으로 비유하자면) '성인들의 대화 놀이'를 '사회적 게임'으로 비유했다. 이 게임의 목적은 교육받았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이 알려준 대로 교양을 배워 사람들 만날 때마다 '아는 척', '배운 척'할 수 있다.
* 《페미니즘의 검은 오해들》 (현실문화, 2016년)
그런데 여성주의(혹은 여성학)가 교양의 범주가 들어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왜냐하면 여성주의는 남이 알려준 대로 배운다고 해서 얻는 지식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여성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단순히 교양을 '지식인이 중요하다고 알려준 지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인식하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대학교에 교양과목으로 '여성학' 강좌가 많이 생겨났다. 여성학에 생소한 남녀 대학생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여성학은 모든 남녀, 특히 남학생이 알아야 할 기초 교양이다.” 여성학을 가르치는 교수는 자신의 강좌에 수강 신청하는 남학생들의 수에 흡족해할 것이다. 그리고 교수는 강좌를 수료한 남학생들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만으로도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그런 교수가 정말로 있다면, 내가 한 번 묻고 싶다. "여성학을 배운 남학생들 중에 단 한 명이라도 성차별 문제 앞에서 여성주의자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나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여성주의 학자 레나테 클라인(Renate Klein)은 자신이 직접 대학에서 여성학을 가르치면서 '교양으로서의 여성학'의 한계를 확인했다. 그녀는 여성학을 배우는 남학생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첫 번째는 '전문가' 유형. 이 유형의 남학생들은 자신의 전공 분야는 잘 알고 있으나 여성이 사회적으로 억압받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여성주의를 왜 배워야 하는지 모른다. 두 번째 유형은 '낭만적 기교자' 유형이다. 이 남학생은 여성주의를 하나의 지식으로 이해한다. 여성주의가 남성을 비판해도 여성주의자들의 발언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어디 가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여성주의를 아는 척한다. 그래서 이 유형을 '수염 달린 페미니스트'라고 불리기도 한다. 마지막 유형은 '가여운 아이들' 유형이다. 이 유형의 남학생은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문제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을 도와달라고 말한다. 좋게 말하면 여성주의를 이해하려는 가상한 노력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여성주의는 누군가가 알려줘서 배워야 할 지식이 아니다. 여성이 불편해하는 각종 상황을 자기 일인 것처럼 이해하고,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 것이야말로 여성주의를 공부하는 진짜 목적이다.
*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청어람미디어, 2002년)
* 《남자는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창비, 2015년)
* 《나쁜 페미니스트》 (사이행성, 2016년)
나는 '수염 달린 페미니스트'를 다른 유형의 남학생과 상대할 때보다 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학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남성들, 그리고 나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주의를 아는 척하는 사람들은 화려한 언변으로 여성주의의 장점을 잘 얘기하지만, 실상 여성 문제 앞에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러니까 그들은 '말보다는 행동'을 하지 못한다. 지적 허영심이 강한 '수염 달린 페미니스트'는 맨스플레인(mansplain)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여성학을 사람이 알아야 할 교양으로 소개한 디트리히 슈바니츠도 교양을 갖춘 남성의 우월감을 경계했다.
남성들에게 몸에 밴 나쁜 습관들 중 하나가 호언장담이다. 남성들은 잘난 척하기 좋아하며 허세를 부린다. 자신들이 잘났다고 으스댄다. 남성들은 여자, 재물, 명성,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들을 쟁취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기 때문에 그렇게 규정되었다.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교양》 683쪽)
'성인들의 대화 놀이'나 '사회적 게임'에 나서는 '수염 달린 페미니스트'는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그럴듯한 말로 여성주의를 대화의 소재로 삼을지도 모른다. 대화 도중에 '수염 달린 페미니스트’들이 불쑥 퀴즈를 내서 상대방을 무안하게 만들 수 있다.
"cyrus씨. 벨 훅스의 책을 읽어보셨습니까? 뭐라고요? 그것도 안 읽어봤어요? 그러면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신 거예요?"
그렇게 해서 지적 우월감에 빠진 남자는 재수 없는 '교양 있는 페미니스트'가 된다. 그리고 겉만 포장된 교양미를 뽐내 여성으로부터 환심을 얻으려고 한다. 정희진 씨가 《아내 가뭄》 해체에서도 밝혔듯이 여성주의는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서 노총각이 배워야 할 교양'이 아니다. 여성을 공략하기 위한 여성주의는 '가짜 여성주의'다. 미셸 푸코의 말을 빌리자면 여성주의는 교양이 아니다. 여성주의는 남성과 여성 모두 힘들게 만드는 각종 사회 문제(가부장제, 성차별, 여성 혐오 등)를 문제 삼고 반성하는 방법이다.[1] 이게 내가 스스로 질문한 생각에 대한 답변이자 이 글의 결론이다.
책으로 여성주의를 이해하는 방법도 좋지만,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다 본 책을 덮고 나서 일상생활에 마주하는 여성 문제에 목소리를 내야 한다. 여성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이든, 페미니스트든 지적받아도 된다. 비난이든 비판이든 외부의 시선에 절대로 움츠러들어선 안 된다. 나는 얕은 여성학 지식으로 전문가인 척하는 '가짜 여성주의자'가 아닌 합리적 비판을 수용하면서 차근차근 배우는 '나쁜 여성주의자'가 되고 싶다. 당연히 이 글에 드러난 내 생각에도 허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이 글이 ‘수염 달린 페미니스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
[1] 원문 : "철학은 지식이 아니다, 철학은 모든 것을 문제로 삼고 반성하는 방법이다." (미셸 푸코의 말, 다치바나 다카시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1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