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92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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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시선은 솔직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에는 가볍게 지나치기 어려운 특별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독자는 시인의 눈을 통해 때 묻은 상처를 치유하고 인간이 추구하는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황인숙 시인의 시집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는 시인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느낀 진실 된 작은 이야기들이다. 시인은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임을 마음의 깊은 눈을 통해 그 숭고한 뜻을 던져주고 있다.

 

 

 

하얗게

하얗게

눈이 시리게

심장이 시리게

하얗게

 

네 밥그릇처럼 내 머릿속

 

아, 잔인한, 돌이킬 수 없는 하양!

외로운 하양, 고통스런 하양,

불가항력의 하양을 들여다보며

 

미안하고, 미안하고,

그립고 또 그립고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55쪽)

 

 

 

톨스토이의 짧은 소설 <세 가지 질문>은 제목 그대로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일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일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소설 끝에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결론이 나오는데, 이 소설을 안 본 독자를 위해서 결론을 언급하지 않겠다. 이 소설을 읽지 않아도 세 가지 질문의 답이 무엇인지 짐작하리라.

 

늘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는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서 세상을 살고 싶어 한다. 실은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세상살이가 팍팍하다는 한탄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도 비록 잠깐이지만 언뜻언뜻 행복에 겨운 순간들을 경험하고 있다. 그렇지만 살다 보면 ‘행복한 지금 이 순간’은 ‘행복했던 시절’로 달라진다. 매일 수 시간을 행복했던 순간들을 기억하는 데 쓰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세월의 변화에 따라 머리카락이 점점 하얗게 변하는 것처럼 머릿속도 점점 하얗게 된다. 머릿속에 있었던 다양하고도 알록달록한 추억들은 시간이라는 흐름에 떠밀려 씻겨 내려간다. 좋은 것들이 사라지기 전에 우리는 살아오면서 행복했던 순간들을 가만히 되짚어본다. 그때의 느낌을 고스란히 지금 이 순간으로 가져와 다시 한번 그 순간을 그리워하면서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그때 무엇이 내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었던가. 생각건대,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감정이 ‘사랑’이다. ‘사랑’을 계속 마음속에 채워 넣으면서 살아도, 잠깐 뒤돌아보면 허전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허전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 단맛 쓴맛 보면서까지 사랑을 하고 싶은가 보다.

 

 

오늘 하루는,

나랑 약속을 잡아놓고도

또 친구를 만나러 가네

그렇게 됐으니 오늘 밤에는 꼭,

미룬 약속을

또 못 지키고 다른 친구를 만나러 가네

아, 정말!

맨날맨날맨날!

나한텐 언제 시간 내줄 거야?

우리가 진짜 ‘자기 사이’ 맞기나 하니?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해?

일찍 돌아올게

가책을 누르고 큰소리치며

친구를 만나러 가네

 

(『이렇게 가는 세월』, 145쪽)

 

 

 

『이렇게 가는 세월』은 아주 평범한 내용의 시다. 그렇지만 독자에게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보게 한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살면서 정말 소중한 것에 대해 소홀하지는 않았는지 뒤돌아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지나가는 세월은 우리를 위해 기다려 주지 않는다. 언제인가 이 모든 소중한 것들과 헤어진다. 그 소중한 것은 무척 다양한데 ‘나’와 가족 간의 화목한 관계도 되고, ‘나’와 친구 간의 우정일 수 있다.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곤란하다. 둘 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라도 사라지면 낙담한다. 와야 할 것이 안 오는 상황에 안타까워하고, 또 머물러야 할 것들이 떠나는 상황에 슬퍼하면서 우리는 결별의 아픔에서 잘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일이 닥쳐오면 눈앞의 어떤 즐거움보다는 더 깊은 곳에 있는 참된 부분에 더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이상하다

거품이 일지 않는다

 

어제는 팔팔했는데

괜히 기진맥진한 오늘의 나

거품이, 거품이 일지 않는다

 

쓰지 않아도 저절로

소진돼버리는

생의 비누의 거품

 

(『묽어지는 나』, 35쪽)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생의 거품이 천천히 소진돼서 편안히 눈을 감으면 좋겠지만, 그게 내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다. 단 한 번의 삶이기에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질 수밖에 없다. 세상을 더 오래 살지 못하고 죽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괴로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겨둔 채 혼자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불안한 감정을 삶의 활력소로 승화시킬 줄 아는 자세이다. 생의 거품이 더 일어나도록 사는 것이 쉽지 않지만, 적어도 사그라지지 않도록 살아가야 한다. ‘혼자’보다는 ‘함께’ 살 때 좀 더 수월하게 생의 거품을 만들 수 있다. 아무리 혼자 사는 것이 좋다고 해도 함께 사는 사람에 비해 생의 거품이 빨리 소진된다. 슬프게도 이 세상에 생의 거품뿐만 아니라 사랑마저 식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평범한 사랑은 가슴을 따뜻하게 만든다.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행복의 온기를 찾아낼 수 있는 게 사랑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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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02-10 1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조금 더 길다면, 좋을텐데, 아쉽네요.^^
cyrus님, 즐거운 금요일 저녁 되세요.^^

cyrus 2017-02-11 10:30   좋아요 1 | URL
시간이 참 빨리 흘러 갑니다. 벌써 오늘이 주말입니다. 정월 대보름 날인데 오곡밥 드셨습니까? 밥보다는 귀밝이술이 더 좋군요. ㅎㅎㅎ 주말 잘 보내세요. ^^

2017-02-10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11 10:34   좋아요 0 | URL
현실을 직시하면서 사는 것도 좋지만, 너무 어둡고 힘든 것만 보면 좋은 일에 대한 기억만 찾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지나쳐버린 좋은 일들이 있을 겁니다. 시간이 지나고나서야 그 때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transient-guest 2017-02-11 0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은 짧은데,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그리 많지 않네요.ㅎ

cyrus 2017-02-11 10:35   좋아요 0 | URL
저도 요즘 그렇게 느낍니다. 슬슬 관계를 유지하기가 버거워집니다. 잡생각도 많아지고요.. ^^;;

표맥(漂麥) 2017-02-11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텅~ 터엉~~~ 주말을 그렇게 보냅니다...^^

cyrus 2017-02-12 00:12   좋아요 0 | URL
주말에는 집에서만 쭉 있고 싶어도 가끔 밖에서 사람 만나서 놀고 싶기도 해요.. ^^;;

jeje 2017-02-13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월! 우리를 좀 기다려줄수도 있는거 아닙니까? 기다려주세요! 떼쓰고 싶은 밤입니다.

cyrus 2017-02-14 12:04   좋아요 0 | URL
가는 세월을 멱살 잡고 싶은 심정입니다. ㅎㅎㅎ

나비종 2017-02-16 04: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닷가에서 백사장을 바라보다보면 평범하게 펼쳐지던 모래들이 어느 순간 보석 가루처럼 반짝일 때가 있어요. 바라보는 각도가 절묘하게 맞았을 때죠.
평범 속에서 발견하는 행복도, 특별함을 느끼게 하는 사랑도 결국 그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생각해봅니다. 시인의 시선을 통해 잔잔하게 전해져오는 감동처럼요.

cyrus 2017-02-16 11:49   좋아요 0 | URL
역시 좋은 말씀으로 댓글을 남기시는 모습이 여전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