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을 읽으면 불쾌한 기분이 들었던 그 날이 생각난다. 4, 5년 전이었을 것이다. 조금 오래된 일이라 이제는 정확하게 묘사하기 힘들지만, 아직도 그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달아오른다. 페이스북에서 여성 시인 ‘임 씨’를 알게 됐다. 임 시인은 나에게 ‘친구 신청’을 하게 된 것을 수락한 계기로 서로 알기 시작했고, 실제로 만난 적은 없다. 한 번은 임 시인이 자신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장문에 가까운 글을 남겼다. 임 시인은 ‘문학 작품에 드러난 악(惡)’이 문학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이유가 있는지에 대해 의견을 밝혔고, 자신은 ‘악’이 하나의 문학적 소재로 사용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드러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반골 기질을 숨기지 못하는 못된 버릇은 여전한가 보다. 나는 그 글을 보는 순간, 임 시인의 입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내용의 댓글을 남겼다. ‘문학 작품에 드러난 악’도 충분히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으며 이를 근거로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을 언급했다. 아니, 그런데 내 댓글에 시인의 ‘페이스북 친구’ A가 답글을 달았다. 나는 A와는 일면이 없었다. 프로필 사진으로 봐서는 A는 중년층 남성이었다. A는 내 의견이 틀렸다고 지적했다. 내가 시집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면서, 보들레르가 악에 탐닉했다기보다는 기독교 정신도 수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보들레르의 시 제목 하나를 언급했는데, 지금은 그게 제목이 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A의 답글 하나로 인해 임 시인의 글을 지적했다가 도리어 제3자에게 지적당하는 굴욕적인 상황이 연출되었다.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시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새로운 사실을 알려줘서 감사하다는 식으로 좋게 답글을 남겼다. A의 반박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지만, 남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논쟁을 해봤자 어차피 내가 불리한 입장이 된다. 그때 나는 임 시인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었고, A와 임 시인은 서로 페이스북 글에 ‘좋아요’를 많이 눌러줄 정도로 오랫동안 친한 사이였다. 임 시인이 내 의견을 옹호해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임 시인은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답글을 달았는데, 역시 내 의견에 동의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 날 이후로 시집을 다시 읽었다. 시집은 윤영애 교수가 번역한 ‘문학과지성사’ 판본이다. 내가 잘못 안 건지, 아니면 A가 잘못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시집을 정독했다. 그런데 몇 번 읽어봐도 A가 알려준 시 제목이 ‘문학과지성사’ 판본에 없었다. 만약 A가 프랑스어로 된 시 제목이나 그 시가 수록된 시집을 알려줬으면 그게 무슨 시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A가 알려준 시를 찾아내지 못했다. 복수(?)의 기회는 그렇게 물 건너 가버렸다.
몇 년 지나고 나서야 여기서 A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나 자신이 쪼잔해 보인다. 그래도 이번에 보들레르의 시집을 다시 읽으면서 새로이 알게 된 생각만큼은 꼭 밝히고 싶다.
* 《악의 꽃》 (김붕구 역, 민음사, 1974년)
* 《악의 꽃》 (윤영애 역, 문학과지성사, 2003년)
* 《악의 꽃》 (황현산 역, 민음사, 2016년)
나는 지금까지 읽었던 보들레르의 《악의 꽃》 번역본은 ‘문학과지성사’ 판본(윤영애 역), ‘민음사’ 구판(김붕구 역), 그리고 구판을 절판시키고, 작년에 새롭게 선보인 ‘리뉴얼판(황현산 역)’이다. ‘문학과지성사’ 판본은 1857년 초판 출간 당시 윤리성 논란으로 삭제된 6편의 시뿐만 아니라 《악의 꽃》 2판에 실을 예정이었던 에필로그의 초고도 수록되었다. ‘민음사’ 구판과 ‘리뉴얼판’은 선집 형태이다. 한 권에 수록된 시의 편수가 적지만, 프랑스어 원문이 있어서 번역문과 비교해서 읽을 수 있다. 혹자는 번역이 다른 세 권의 시집을 굳이 읽을 필요가 있냐고 생각할 것이다. 세 권의 번역본마다 약간씩 번역 어휘의 차이점은 있다. 다만 그걸 비교하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복수의 번역본을 읽은 진짜 이유가 보들레르의 시를 바라보는 번역자들의 관점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원수』(L’Ennemi)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이 시는 세 권의 번역본 모두 수록되었다.
내 청춘 한갓 캄캄한 뇌우였을 뿐,
여기저기 눈부신 햇살이 뚫고 비쳤네.
천둥과 비가 하도 휘몰아쳐 내 정원에는
빠알간 열매 몇 안 남았네.
나 지금 사상(思想)의 가을에 닿았으니,
삽과 갈퀴를 들고 다시 긁어 모아야지,
홍수가 지나며 묘혈처럼 곳곳에
커다란 웅덩이를 파놓았으니.
누가 알리, 내가 꿈꾸는 새로운 꽃들이
모래톱처럼 씻긴 이 흙 속에서
활력이 될 신비의 양분을 얻을지를?
― 오 괴로워라! 괴로워라! 시간은
생명을 파먹고, 심장을 갉는 정체모를 원수는
우리 흘리는 피로 자라며 강대해지는구나!
(『원수』, 김붕구 역)
이 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보들레르 연구가와 번역가들은 이 시의 제목인 ‘원수’의 정체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보들레르는 늘 ‘권태’를 느끼는 사람이었다. 시인은 헤어날 수 없는 권태와 지루함, 그리고 가슴속에 가득한 환멸을 떨쳐내려고 상상의 낙원을 설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들레르의 공상은 일시적인 도피처에 불과했고, 그는 시를 통해 증오와 환멸을 드러내며 폭력과 악의(惡意)를 언어로 표출했다. 시인은 자기 회한과 허무를 곱씹기만 하는 자신의 모습이 비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 길지 않은 시간이 흘러가는 과정이 시인의 입장에서는 ‘지옥의 시간’이었을 터. 윤영애 교수는 ‘원수’의 정체가 ‘생명을 파먹는 시간’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붕구 씨는 다른 견해를 밝혔는데, ‘권태’ 또는 ‘회한’이라고 했다. 리뉴얼판의 번역을 맡은 황현산 교수는 ‘원수’를 단수의 의미가 아닌 복수의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보들레르가 다른 시에서 두려운 존재로 언급된 ‘시간’, ‘죽음’, ‘권태’는 물론이고, 시인을 괴롭힌 질병인 ‘매독’까지 거론된다.
* 《프랑스 상징주의와 시인들》 (소나무, 2000년)
보들레르의 시 한 편을 바라보는 번역가의 시선이 다르듯이 《악의 꽃》을 딱 한 가지로 정의하기 어렵다. 내가 보들레르를 ‘추(醜)와 악의 미학을 발견한 시인’이라고 평가해도 맞다. A처럼 시에서 기독교 정신과 유사하다고 느꼈다면 그 의견 또한 맞다. 사실 보들레르는 어떤 시에서는 자신의 운명을 방해하는 신에 반항하고 모독하는 한편, 또 다른 시에서는 신을 찬양한다. 어느 불문학자는 보들레르의 시에서 마니교(Manichaeism)의 교리를 읽어내기도 한다.[1] 시집 전체의 일부를 말해도 좋으나, 그 일부를 전체로 말하는 것은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아집에 가깝다. 자신의 의견만 믿고, 상대방의 의견을 틀렸다고 지적하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식’이다. 《악의 꽃》 한 번 제대로 읽었다고해서 그 시에서 나는 향기를 맡았다고 볼 수 없다. 시를 읽을 때마다 '악의 꽃'에서 나는 향기가 달라진다.
[1] 김기봉 《프랑스 상징주의와 시인들》, ‘보들레르의 명증(明證)’ 2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