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의 리뷰를 확인할 때 100자평을 거른다. 한줄 평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한줄 평이든 100자평이든 짧은 리뷰 중에는 ‘평(評)’으로 보기 힘든 것이 있다. 책을 읽지 않고, 책에 대한 주관적인 생각을 100자평에 남기는 사람들이 있다. 마티 루티의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동녘사이언스, 2017)에 낮은 별점을 준 100자평은 실소를 자아낸다.

 

 

 

 

 

 

 

 

 

 

 

 

 

 

* 앨런 S. 밀러, 가나자와 사토시 《처음 읽는 진화심리학》(웅진지식하우스, 2008)

 

 

어떤 100자평 작성자는 책에 별점 한 개를 줬다. 그 사람은 아주 당당하게 자기 생각을 밝혔다. ‘과학적 사실의 좋은 점은 당신이 동의하든 안 하든 사실이라는 점이다.’ 진화심리학 분야에서 나오는 연구 결과들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학자들이 진화심리학 분야의 연구 결과들을 가지고 입씨름하는 것은 ‘가설’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일이다. 진화심리학 연구 결과를 비판하는 학자들의 목적은 다양하다. 한 가지 콕 집어 말하자면 가설을 지지할만한 증거가 불충분하기 위해서 비판한다. 연구 결과는 어떤 현상을 탐구하면서 확인하게 된 관찰 결과일 뿐이다. 가설을 재검증하는 절차를 통해 최종적인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함부로 ‘사실’로 결론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진화심리학자들도 연구 결과를 발표할 때 신중해진다. 《처음 읽는 진화심리학》(웅진지식하우스, 2008)를 펴낸 진화심리학자들은 이 책이 관찰 결과를 기술(記述) · 설명하고 있을 뿐이며 자신들은 관찰 결과로부터 어떤 결과나 결론도 끌어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과학에는 ‘당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1]

 

 

 

 

 

 

 

 

 

 

 

 

 

 

* 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사이언스북스, 2009)

 

 

과학자이든 페미니스트이든 신뢰할만한 과학적 증거를 가지고 나오면, 진화심리학의 연구 결과도 비판 대상이 될 수 있다. 또 가설을 동의하지 못해 거부할 수도 있다. 진화심리학이 가장 많이 받는 비판 거리 중 하나가 ‘생물학적 결정론’이라는 점이다. 진화심리학을 비판할 때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진화심리학자들이 생물학적 결정론을 옹호한다고 해서 그들을 불순한 동기로 이론을 정당화하는 ‘나쁜 놈’으로 몰아세우지 말 것.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에드워드 오즈번 윌슨(Edward Osborne Wilson)의 사회생물학을 정면으로 비판한 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진화생물학과 사회생물학의 공통점은 인류의 진화 과정에 깊숙이 자리하는 인간 본성의 실체를 밝히는 분야이다. 굴드는 윌슨의 사회생물학을 비판하면서도 그를 차별을 유도하는 악의 세력으로 험담하지 않았다. 굴드가 사회생물학의 등장을 우려한 진짜 이유는 사회생물학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상황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보수성이 강한 학자나 정치인이 진화심리학 가설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기성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진화심리학 가설이 주는 불편함을 못 느낀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간다. 진화심리학자들은 남자가 풍만한 가슴의 여자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흡족할 만한 여러 가지 가설을 내세웠다.

 

첫 번째 가설. 풍만하게 느껴지는 무거운 가슴은 작은 가슴에 비해 나이가 들수록 ‘처진 가슴’으로 변하기 쉽다. 남자는 여자의 가슴을 눈으로 보고, 여자의 나이를 판별할 수 있다. 젊은 여성은 풍만한 가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남자는 가슴이 풍만한 젊은 여자에게 매력을 느낀다. (프랭크 말로위의 주장, 《처음 읽는 진화심리학》 참고)

 

 

 

 

 

 

 

 

 

 

 

 

 

 

 

 

* 플로렌스 윌리엄스 《가슴 이야기》 (Mid, 2014)

 

 

두 번째 가설. 남자는 젊고, 건강하고, 임신 가능성이 높은 여자를 배우자로 선택한다. 그래서 남자는 가슴 형태를 건강한 배우자를 찾기 위한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여성의 가슴은 남성에게 잠재적인 배우자임을 알려주는 정보를 제공하는 신호이다. 첫 번째 가설과 일맥상통하다. (바너비 딕슨과 앨런 딕슨의 주장, 《가슴 이야기》 참고)

 

 

 

 

 

 

 

 

 

 

 

 

 

 

 

 

* 데즈먼드 모리스 《털없는 원숭이》 (문예춘추사, 2011)

* 데즈먼드 모리스 《벌거벗은 여자》 (휴먼앤북스, 2004)

 

 

 

마지막 가설. 앞서 언급한 두 개의 가설에 비해 오래된 것이다. 올해 데즈먼드 모리스(Desmond Morris)의 《털없는 원숭이》 출간 50주년을 기념하는 차원으로 (또 한 번) 언급해본다. 여자의 가슴은 남성을 유혹하기 위한 성적 신호이다. 자신의 주장이 비판받게 되자 모리스는 2004년에 출간한 《벌거벗은 여자》에 여자의 가슴은 양육(모유 수유)과 성(性), 두 가지 생물학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주장했다.

 

 

 

 

 

 

 

 

 

 

 

 

 

 

 

 

* 나탈리 앤지어 《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 (문예출판사, 2016)

 

 

남자가 여성의 가슴을 선호하는 것에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이를 진화의 관점으로 남자들의 행동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젊은 여성이 큰 가슴을 가진다고 주장했고, 모리스는 가장 완벽한 반구 모양의 가슴이 완성되는 여성의 나이를 25세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공통으로 여성이 점점 나이가 들기 시작하면서 가슴 형태가 처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들이 놓친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임신기(姙娠期)와 수유 기간이 되면 원래 가슴 형태와 상관없이 무조건 가슴이 커진다. 임신한 작은 가슴의 여성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작은 가슴의 여성이 남성의 배우자 선택에 불리하다고 볼 수 없다. 가슴 크기로 나이를 판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25세 여성 모두가 풍만한 가슴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의 가설대로 여성의 가슴이 남자들을 위한 신체적 신호가 되어야 한다면, 가슴의 크기가 거의 같아야 한다. 나탈리 앤지어(Natalie Angier)는 처진 가슴을 나이 든 여성과 연관 짓는 주장에 반대한다. 젊은 나이에 가슴이 처지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가설 모두 여성 가슴의 필요성을 오로지 남성의 기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가슴은 아기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진화한 신체 부위이다. 물론, 수유 목적으로 가슴이 발달했다는 주장 또한 가설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세 가지 가설을 마치 설득력 있는 사실인 것처럼 믿는 경우이다. 이를 비판하면서 양육 기능으로서의 가슴이 존재할 수 있는 근거를 떳떳하게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일부 남성들은 그런 비판 입장을 페미니스트의 분노로 생각한다. 이렇다 보니 가설을 검증할 기회가 축소되고, 다른 의견을 인정하지 못하는 깊숙한 도그마(Dogma)의 함정에 빠져버린다.

 

이 글의 결론을 내리자면, 여성이 가슴이 생긴 이유와 남성이 풍만한 가슴을 선호하는 이유를 명확히 설명해줄 이론은 없다. 앞에서 설명한 이론들은 ‘과학적 지식에 입각한 추측’, 즉 과학적 가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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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 페미니즘 서에 대한 신경증적 반응들 혹은 별점 테러
    from 마음―몸―시공간 Mind―Body―Spacetime 2017-03-22 09:59 
    마티 루티의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동녘사이언스, 2017)에 별점 테러 혹은 ‘100자평’ 테러를 저지르는 분들 논조를 보면 아주 단정적이고, 독단적이고, 훈계조이고, 혹은 꽤 전투적입니다. 아마도 제가 추측하기에 이들 과격주의자(?)들은 대부분 이덕하 씨가 운영하는 《진화 심리학 카페》(http://cafe.naver.com/evopsy2014)에서 온 분들 같습니다. 이덕하 씨의 페미니즘에 대한 전투적이고 과격한 견해에 영향을
 
 
2017-03-21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22 11:36   좋아요 0 | URL
‘어엽다’가 ‘어렵다+귀엽다’가 합친 말입니까? ㅎㅎㅎ

마립간 2017-03-22 08: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다시 꼼꼼히 읽고 숙고해야겠지만, 진화론에 대한 비판( 예를 들면 창조론)과 진화심리학에 대한 비판이 어떻게 다른지 얼른 납득이되지 않는군요.

cyrus 2017-03-22 11:39   좋아요 0 | URL
마립간님은 제 글을 보고 특별한 생각을 하셨군요. 제가 이제 막 진화론을 공부하기 시작한 터라 계속 관련서적들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

고양이라디오 2017-03-22 19:10   좋아요 0 | URL
날카로운 지적이네요^^

마립간 2017-03-22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개의 문장을 제 페이퍼에 인용합니다.

cyrus 2017-03-22 11:40   좋아요 0 | URL
네, 알겠습니다.
 
다윈 이후 사이언스 클래식 14
스티븐 J. 굴드 지음, 홍욱희.홍동선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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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적인 광인은 적어도 재미있기라도 하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고루한 인간은 오직 가엾을 뿐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 [1]

 

 

 

진화론인가, 창조론인가. 이 해묵은 주제는 잊을만하면 등장한다. 창조론은 성경의 기록에 근거해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이고, 진화론은 처음 하등동물에서 시작해 점점 인간의 형상으로 됐다는 것이다. 19세기 전반만 해도 창조론이 대세였다. 창조론의 대표적 이론가인 영국 신학자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는 동물의 눈을 시계에 비유하고 시계의 설계자가 있는 것처럼 눈의 설계자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주장한 설계자는 하느님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고도의 능력을 갖춘 어떤 존재, 즉 신의 설계 때문에 탄생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창조론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진화론을 내놓으면서 창조론은 흔들리게 된다. 이후 진화론을 뒷받침하는 이론들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고 창조론자들은 숨을 죽여야 했다. 인류의 기원을 화석이나 DNA 분석을 통해 추적하는 과학적 방법에 종교적 세계관이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진화론자와 창조론자 간 대결에 주저 없이 나선 학자이다. 그는 창조론이 과학적 · 논리적 허구를 교묘히 감춘 주장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2002년 굴드가 타계한 이후에도 창조론자들은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 복음주의 기독교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미국 일부 지역에선 성서를 문자 그대로 따르는 과학적 창조론자라고 부르는 그룹이 등장하면서 진화론에 대한 공세를 펼친다.

 

진화론과 창조론자들의 전투는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국정 교과서 논란이 연일 화제가 되다 보니 일부 기독교단체가 생물 교과서에서 진화론 부분을 개정 · 삭제해 달라는 요구한 사실이 덜 알려졌다. 게다가 한 번도 아닌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요구해왔다. 굴드는 1940년대에 진화 이론의 핵심이 본격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봤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너무 한참 멀었다. 생물 교과서가 진화 이론의 핵심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으면, 학생들이 진화 이론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줄어든다. 이 틈을 타 ‘한국창조과학회’ 소속 종교인 및 학자들은 중·고등학교 생물 교과서에 진화론과 함께 창조론도 수록하도록 교과서 개정 운동을 펼치고 있다. 현재의 양상은 여전히 창조론이 득세하던 1920~1930년대 상황과 유사하다.

 

역사뿐만 아니라 기초과학을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성공적인 미래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과거의 낡은 사고를 깨치고 나아가는 용기 있는 결단과 도전이 필요하다. 굴드가 필력과 토론으로 창조론자들과 적극적으로 맞서 싸운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낡은 사고방식에 얽매인 ‘희망적인 사고’를 경계했다. 일부 진화론자는 진화와 진보를 동일한 의미로 이해했다. 그래서 인류의 진화가 희망적인 진보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신념을 갖게 됐다. 하지만 굴드는 진화와 진보를 혼동하는 진화론자들을 비판한다. 진화는 인류를 지구상의 완벽한 존재로 만들어준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 다윈도 진화와 진보를 혼동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회발전을 설명하려는 열망이 강한 진화론자들은 진화를 ‘발전의 원동력’으로 해석했다. 이게 바로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을 내세운 사회진화론이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진화의 개념은 ‘사회진화론’에 가깝다. 유럽 진보주의자들은 이 담론을 통해서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제국주의자로 변신했다. 《다윈 이후》는 온갖 오해와 핍박으로 곤욕을 치른 진화론의 역사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은 진화론에 대한 왜곡과 오해를 넘어 진화론의 세계관에 대해 진정한 이해를 돕는다는 점에서도 일독할 가치가 있다.

 

과학은 원인과 결과가 있는 학문이다. 또 여러 사람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수십 년 만에 혹은 수백 년 만에 새로운 이론이 탄생한다. 그래서 하나의 현상을 한 줄로 딱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 진화론을 설명하더라도 라마르크(Lamarck)의 용불용설, 라이엘(Lyell)의 지질학 이론, 그리고 멘델(Mendel)의 유전 법칙 등을 언급해야 제대로 된 개념을 전달할 수 있다. 결국 대중을 위한 과학서는 읽는 이로 하여금 복잡한 내용을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다윈 이후》는 이미 폐기되어버린 사소한 이론에서 출발해 복잡한 이론을 설명하는 방식을 택했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해석은 오늘도 진화하고 있다. 이타주의에 대한 다윈주의적 해석이 논란에 휩싸이는가 하면 진화를 ‘본성’으로 설명하려는 진화심리학이 주목받기도 했다. 이렇다 보니 진화론자들 사이에서도 의견 충돌이 빚어진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 진화론을 허술한 이론으로 보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의견이 다르더라도 진화론자들은 스스로 과학적인 검증을 주도하고 있다. 그만큼 진화론은 건강한 이론이다. 무조건적 믿음을 고수하는 창조론자들과 차원이 다르다. 이래도 진화론에 거부감이 느껴지는가? 굴드 사후 15년이면 이제 충분하지 않은가?

 

 

 

※ 서평 제목의 원문 :

“다윈 이후 100년이면 이제 충분하지 않습니까?” 1959년 미국의 저명한 유전학자 허먼 조지프 멀러가 볼멘소리를 했다. (《다윈 이후》 7쪽)

 

[1] 《다윈 이후》 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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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1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21 17:50   좋아요 0 | URL
과학과 대립하는 종교를 비난하기보다는 종교가 진실인 것처럼 주장하는 비합리주의를 비판해야 합니다.

북프리쿠키 2017-03-21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이러스님 다윈의 <종의기원> 출판사 추천좀 부탁드립니다.^^

cyrus 2017-03-21 17:58   좋아요 1 | URL
예전에 <종의 기원>을 해설한 책에서 본 내용입니다. <종의 기원,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 소멸의 자연학>이라는 책을 쓴 박성관 씨는 시중에 나와 있는 <종의 기원> 번역본 중에 제대로 된 번역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펴낸 시기가 2010년이고, 그 이후로 한길사의 <종의 기원> 번역본이 나왔습니다. 한길사 판본이 믿고 읽을 만한 책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종의 기원> 완역본 읽기에 도전하기보다는 <종의 기원>을 충실하게 해석한 관련 도서 몇 권 읽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한길사 판본이 나오기 전에 ‘동서문화사’ 판본을 읽어봤어요. 솔직히 재미없었습니다. 한길사 판본으로 다시 도전해봤는데, 너무 지루해서 읽다가 포기했어요. 믿을만한 <종의 기원> 해설서가 몇 권 있습니다.

<How to read 다윈>, <종의 기원을 읽다>, <종의 기원 이펙트> 그리고 제가 앞서 언급한 박성관 씨의 책입니다. 정말 <종의 기원> 독서에 한 번 도전해보고 싶다면, 해설서 먼저 참고하는 것이 좋습니다.

2017-03-21 1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21 17:59   좋아요 1 | URL
제가 무교라서 머릿속에 깊이 박힌 종교적 신념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학자들도 검증 절차를 무시하면서까지 창조론을 옹호할 정도면 종교 신념의 위력이 무섭게 느껴집니다.

AgalmA 2017-03-21 17: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운동법칙 ˝무거운 것이 먼저 떨어진다˝를 갈릴레오가 깨기까지 2천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갈릴레오와 뉴턴의 결정론적 세계도 확률을 제기한 양자역학이 나오기까지 300년 동안 독보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결정론적 세계관이 완벽히 깨졌느냐 아니잖아요. 과학자조차도 환원적이고 결정론적 세계관 믿는 사람들 많잖아요^^;
인류 역사에게 가장 오래된 이데올로기인 ‘신‘이 단 100년으로 깨질 수 있겠습니까ㅎ; 진화론은 역사를 통해 볼 때는 아직 어린 수준입니다. 비하가 아니라 그 역사적 기간으로 볼 때 사람들의 인지도와 신뢰도에서 아직까지 밀릴 수밖에 없다는 것. 안 믿겠다는 데 어쩔ㅎ;;
그렇다면 철저한 교육? 계몽?
<신의 입자>보면 리언 레더먼이 하버드를 졸업하는 학생들 강연에서 지구의 겨울과 여름의 차이가 왜 생기는지 물어보죠. 대부분 ˝태양이 가까워서?˝ 등으로 태양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 때문이라고 정확하게 말한 비율은 15% 남짓이었죠. 리언 레더먼은 무려 하버드가! 하면서 개탄ㅎㅎ 제가 이 일화를 가져온 건 교육, 관심, 노력 모든 게 총체적으로 맞물려가야 어떤 변화든 가능하다는 걸 말씀드리는 것.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죠.
유발 하라리가 그러더군요. 다윈의 진화론의 가장 뛰어난 점은 그 기원으로 신을 상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 동감입니다.

cyrus 2017-03-21 18:06   좋아요 2 | URL
Agalma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죽고 나서도 진화론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ㅎㅎㅎ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한 시기가 1856년이니까 1940년대에 진화론이 제대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 어떻게 보면 행운일 수도 있겠어요. 그리고 스티븐 제이 굴드처럼 종교 도그마에 대항할 수 있는 학자들이 많았었죠. 이들 덕분에 어느 정도 창조론의 위세가 약화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굴드는 세상을 떠났고, 그의 역할을 대신할 새로운 학자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도킨스도 이제 고령에 접어들었고요.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신’이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 힘들어질 것 같습니다. 점점 세계가 불안해질수록 종교에 의지하려는 심리가 생기니까요.

AgalmA 2017-03-22 01:44   좋아요 2 | URL
그즈음 다윈이 진화론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고 해도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가 진화론을 가지고 나왔을 겁니다. 즉 진화론은 반드시 나오고야 말 이론이었다는 거죠.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힘이 커지면서 낙후된 체체주의(규율, 교리, 원죄론 기타 등등)로 변질된 종교는 힘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교의 성질상 멸절하진 않을 거고 이것도 하나의 수순인 거죠.
약화됐다 해도 신과 종교가 왜 지금까지 굳건하겠습니까. 인간은 진화론이라는 ‘사실‘보다 ‘의지‘할 게 더 필요한 나약한 존재입니다. 니체가 초인 얘길 멋부리려고 했겠습니까. 인간의 그런 점을 간파한 거죠. 합리론이니 경험론이니 인간이 왜 그런 지적 체계를 구축해겠습니까. 팩트 팩트 따지는 지금 세태 보세요. ‘사실‘ 또한 우리의 의지처이며, 우리의 속성입니다. 종교도 여러 ‘사실‘을 끌어와 ‘신‘으로 설명하면 그만입니다. 아무리 다른 사실을 들이댄들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신을 믿는 사람은 있을 겁니다. 종교의 ‘자유‘도 인권이잖아요. 암요.
문장이 좀 격앙되어 있는데 cyrus님께 따지는 건 아님^^; 제가 보기엔 그렇다라는 제 의견임.
 

 

 

매년 한 번쯤은 서평(Book review)의 정의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이 문제는 하나의 답변으로 결론이 나지 않는다. 또 서평의 기준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가변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당연히 ‘정답’이 나올 수 없고, 내 의견이 옳은 것이 절대로 아니다.

 

 

 

 

 

 

 

 

 

 

 

 

 

 

 

 

 

 

 

* 이원석 《서평 쓰는 법》 (유유, 2016)

 

 

 

그래도 맞든 틀리든 독자는 책에 대한 해석을 명확히 밝힐 줄 알아야 한다. 《서평 쓰는 법》의 저자 이원석에 따르면 서평은 ‘해석’이다. 독자의 해석은 다른 독자에게 다시 읽기(review)를 권한다. 이는 독자에게 말 거는 행위에 가깝다. ‘저는 이 책을 좀 다른 관점으로 읽어봤어요. 제가 해석한 대로 읽어보지 않으시렵니까?’ 서평은 독자와 저자 사이뿐만 아니라 독자와 다른 독자 사이를 대화할 수 있게 한다. 독자는 책의 내용에 대해 자기 생각을 튼실하게 덧붙인다. 이것이 바로 ‘해석’을 기본 뼈대로 완성된 한 편의 서평이다. 그러므로 서평은 독자 생각과 작가의 생각을 비교 · 판단하는 과정이 논리적으로 정리된 대화록이다. 독자들이 독서의 주체로서 책의 내용에 대해 질문과 답변을 반복할 때 적극적인 독자가 됨과 동시에 책에 대한 흥미도 더욱 크게 느낄 수 있다. 독자의 경험과 관점에 따라 같은 책을 읽었더라도 그것에 대한 견해는 서로 다르다. 이것은 책을 통해 얻은 자신의 해석과 새로운 경험을 서평 쓰기 및 읽기를 통해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사고로 연결해주는 고리 역할을 하게 된다.

 

서평의 기준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또 하나의 문제가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서평과 독후감을 구별하는 문제이다. 앞서 서평은 ‘저자와 다른 독자들에게 말 걸기를 시도하는 해석’이라고 했다. 독후감은 말 그대로 책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정리한 글이다. 서평이 ‘저자와 독자 간의 대화를 정리한 글’이라면, 독후감은 ‘일기’와 유사하다. 독후감은 책과 관련된 자잘한 생각들을 자유로운 형식에 따라 기록하는 글이므로 논리적인 해석을 강조하는 서평과 확연한 차이가 난다. 그래서 독후감은 서평보다 쓰기 편하다. 책에 대한 자기 생각을 다른 독자들에게 설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 역할은 서평가가 해도 되는 일이다.

 

그렇다 보니 독자 중에는 서평과 독후감을 구별하는 일을 전문가(또는 서평가)의 역할로 생각한다. 또 자신의 글이 서평인지 독후감인지 스스로 구별하는 일 자체를 꺼리기도 한다. 대부분 독자는 겸손하다. 자신의 글이 서평의 기준에 조금이라도 부합하는데도 전문성과 거리가 먼 독후감으로 인식한다. 나는 서평과 독후감이 전문성이라는 단순한 기준으로 구별되는 것을 반대한다. 독자도 서평을 쓸 수 있다. 서평은 서평가 또는 지식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애초에 서평이 전문가들이 쓰는 글이었다면, 《서평 쓰는 법》과 같은 책이 나올 이유가 없다.

 

서평과 독후감의 관계는 ‘가깝지만 먼 친척’에 가깝다. 그러니까 서평과 독후감은 서로 닮은 구석이 있으면서도 뚜렷한 차이가 있다. 궁극적으로 독서는 능동적인 글쓰기 활동으로 연결된다. 누구나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능력이 있으면 서평과 독후감을 쓸 수 있다. 결국, 서평과 독후감은 공통으로 자기 생각을 정립하는 글쓰기다. 서평은 독후감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의 글이 아니다. 독후감이 퇴고의 과정을 거친다면 서평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독후감은 서평의 원형, 즉 프로토타입(Prototype)이다. 혹시 내 비유에 대해 오해가 없길 바란다.

 

 

 

 

 

 

 

 

 

 

 

 

 

 

 

 

 

* 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사이언스북스, 2009)

 

 

 

독후감이 퇴고의 진화를 거쳐 서평이라는 ‘완성형’으로 만들어진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미국의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진화를 완벽한 최종 단계로 거듭 발전하기 위한 진보의 과정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진화를 진보가 아닌 ‘다양성의 증가’를 증명해주는 신비로운 자연 현상으로 이해했다. 서평도 마찬가지다. 서평은 ‘하나의 해석’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완성형이 아니다. 한 권의 책에 딱 어울리는 완벽한 서평은 절대로 없다. 그 ‘완벽한 서평’이 잘 썼다고 말할 수 없다. 한 권의 책에는 여러 갈래의 다양한 해석으로 이루어진 서평이 많아야 한다. 서평 작성자는 다양한 해석을 만나면서 기존의 해석을 수정할 수 있다.

 

서평 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서평에 드러나는 해석들이 거의 같다면, 너무 재미없다. 독자와 독자 간의 대화를 시도할 수 없다. 관계 지향적인 서평의 특성상 또 다른 독자의 해석, 즉 다른 서평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자신의 서평이 전체 공개되어 다른 독자들을 설득하고 싶으면, 당연히 다른 독자들의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 다른 독자의 비판적 시선은 서평 작성자가 보지 못한 또 다른 관점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러면 서평 작성자는 기존 해석의 문제점을 파악한다. 기존 해석이 올바르지 않다면 서평을 통해 수정하면 된다. 아니면 과감하게 전면 폐기할 수도 있다. 작가 장정일이 독서를 통해 공부한 이유가 곧 서평을 써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공부만 하고 자기 입장이 없으면 그것은 그냥 사전 덩어리와 같은 것입니다. 또 공부는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입장만 가지게 되면 남과 소통할 수 없는 고집불통이나 도그마에 빠지게 될 겁니다. 공부해서 자기 입장을 만들고, 또 자기 입장을 깨기 위해 또 공부하고, 이런 것이 공부이고 그게 책 읽는 사람의 도리입니다. (《서평 쓰는 법》 102쪽)

 

 

한 번 쓴 서평을 쓰고, 또 고치고 하는 일이 서평 작성자의 도리다. 이러한 자기 수양의 과정이 이루어지려면, 예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어야 한다. 책을 여러 번 읽으면 그 책에 숨겨진 진가가 천천히 드러난다. 처음에 별로였던 책이 나중에 읽고 나서야 좋아 보이게 되고, 반대로 예전에 좋게 봤던 책이 다시 읽었을 때 크게 실망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독자의 해석이 이해되지 않거나 공감하기 어렵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자신의 서평에 향한 비판을 용납하지 못하는 독자가 있다. 그 독자는 고집불통이다. 다양한 해석을 존중하지 않는다. 자신이 서평에서 시도한 설득이 실패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서평 쓰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서평 읽는 일’이다. 여기 알라딘 서재에 ‘전제 공개’가 된 서평과 독후감은 누군가가 ‘읽기 위해’ 존재하는 글이다. 악의적인 비난이 아니라면, 해석을 비판할 자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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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욱 2017-03-20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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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21 11:54   좋아요 0 | URL
북플에서는 하트 표시가 뜨는데, 알라딘 서재에는 보이지 않는군요. 처음에 조승욱님 댓글이 제 메일에 왔을 때, 하트가 ‘?’로 되어 있었어요. 저는 처음에 조승욱님 댓글이 제 글을 조롱하는 의미인 줄 알았어요. 아무튼 제 글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stella.K 2017-03-20 18: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평이 그 책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라면 일반 독자가 서평을 쓰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우리가 쓰는 것의 거의 대부분은 독후감이 아닐까?
그런데도 독후감은 좀 옛말 같고, 서평이나 리뷰는 뭔가 있어 보이는 것 같고.
그런 거 아니겠어?후후.
작년인가 제 작년에 이 비슷한 글 쓰지 않았나?

난 요즘 하루키를 다시 보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루키는 섹스 빼면 뭐 할 말 있나?
낫게 보았는데 그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물론 그의 작품 모두가 다 좋은 건 아니고
굵직하게 잘 알려진 책들은 읽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cyrus 2017-03-21 11:56   좋아요 0 | URL
제가 예전에 이와 비슷한 주제의 글을 써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원석 씨의 주장에 공감했어요. 이 책은 진작 나왔어야 했습니다. ^^;;

박람강기 2017-03-20 1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록 하찮은 감상문이 될지라도 되도록이면 읽은 책에 대한 느낌을 기록해 두려고 노력하는 저에게 힘이 되는 글이네요..^^ 아무 기록도 안 남기는 것 보다는 약간의 감상문이라도 남겨야 겠습니다..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7-03-21 11:57   좋아요 0 | URL
기록하는 것 자체가 제일 중요합니다. 독후감과 서평 구분은 ‘아, 그렇게도 볼 수 있구나’하고 이해하고 넘어가면 됩니다. 사람들마다 구분하는 기준은 다르니까요. ^^

2017-03-20 2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21 11:59   좋아요 1 | URL
네, 그런 거 보면 기운이 확 빠집니다. 특히 책 속 사진만 잔뜩 올려놓고, 알라딘 책 소개 인용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프로작 네이션 - 우울에 빠진 한 여자의 심리 보고서
엘리자베스 워첼 지음, 김유미 옮김 / 민음인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우울증은 웃고 있는 사람들의 가면이다. 우울증을 얕보아서는 안 된다. 특히 가면을 쓴 우울증은 가벼운 우울증, 일시적인 슬픈 감정과 달리 심각한 양상일 가능성이 높다. 증세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기는 어려워 방치된 채 악화하기 쉽다. 우울증 환자들은 자신이 우울증에 걸려 있는지도 모른 채 마치 가면 뒤에 꼭꼭 숨어있는 듯 내면 깊숙이 틀어박혀 있다. 우울증이 전염병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과 마음이 가장 맞닿아 있는 가정에서는 그 어둠의 그림자가 그대로 가족들을 힘들게, 고통스럽게 한다.

 

엘리자베스 워첼의 《프로작 네이션》은 우울증을 가장 정확히 기록한 책이다. 변호사로 활동 중인 워첼은 자신의 우울증 경험을 상세하게 서술하여, 과소평가된 이 병이 한 인간을 어떻게 괴롭히는지를 실감 나게 소개하고 있다. 《프로작 네이션》이 ‘우울증은 누구나 걸릴 수 있으며 약으로도 치유 불가능한 병’임을 제대로 알려준 책이라는 데 큰 의의를 부여하고 싶다.

 

 

 

 

 

 

프로작(Prozac)은 우울증 치료제이다. 미국에선 프로작 같은 우울증 치료제가 우리나라 감기약만큼 유명하다. 그만큼 환자가 많고 많은 사람이 관심을 두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미국 식품의약처(FDA)는 2004년에 프로작을 포함한 모든 항우울제에 대해 복용 시 청소년들이 자살 충동이나 행위에 빠질 위험이 높아진다는 내용의 경고문을 부착하도록 지시했다. 항우울제를 복용할 경우 자칫하면 청소년을 자살로 내몰고 있다는 우려가 오래전부터 제기됐다.

 

과거에는 아동기에 우울증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에 대하여는 학자들 간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 1980년에는 타당성이 인정돼 아동의 정신질환 분류에서 공식적으로 아동기에도 우울증이 존재함이 받아들여졌다. 어린이도 우울증을 앓는다. 어린이들은 자존심 저하, 자기 비하 등의 인지적인 요소가 전혀 동반되지 않은 슬픈 감정이 나타날 수 있다. 예컨대 부모가 이혼하면 일반 아이들은 단순히 슬픈 감정을 표현하지만, 우울증이 있는 아이들은 자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자기질책 또는 부모들에 대한 원망이 함께 나타날 수 있다. 워첼은 너무 이른 나이에 부모가 이혼으로 갈라서는 현실을 받아들였고,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워첼의 사례처럼 어린 시절 경험은 우울증의 주요한 원인이 된다.

 

워첼은 열두 살 때부터 십 년 넘게 우울증의 늪을 헤맸다. 약물치료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의사와 그녀의 어머니 때문에 겪었던 고통 등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그녀의 자서전은 우울증의 심리적 증상에 초점을 맞춘 우울증 자가 진단서이다. 사람들이 느끼는 우울의 정도는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세상 모든 일에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는 기분, 세상이 끝난 것처럼 미래를 비관하는 태도, 세상에 오직 나 혼자라는 가슴 사무치는 고독감 등을 느낀다. 우울증에 빠진 워첼은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친구들과 어머니는 워첼의 우울을 ‘약을 복용하면 재발하지 않는 증상’으로 반응하며 우울증이 가져다주는 고통을 그저 사소한 투정이라고 생각한다.

 

우울한 기분이 든다고 반드시 약물치료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이나 가정생활에서 우울 증상으로 문제가 생긴다거나 자살사고가 심하고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려 하는 경우,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야 한다. 우울증은 저절로 좋아지기도 한다. 그러나 상당히 긴 기간이 소요된다. 그 기간 환자가 받아들여야 할 불이익은 크다. 자살시도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으므로 일정기간 심각한 증상이 지속한다면 빨리 치료를 받아 불행한 결과를 막아야 한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위로다. 그다음이 격려다. 이는 관심과 공감과 이해에서 나온다. 심적 고통의 늪에 빠졌다가도 누군가가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내밀면 대부분 그 아픔에서 해방될 수 있다. 워첼은 우울증에 탈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심적 상태를 솔직히 인정하고,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정신력’에 믿음을 가지라고 당부한다. '내 마음이니까 반드시 내가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나의 삶’을 부정적으로 보는 끔찍한 상상에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울증 환자의 도움을 요청받은 사람은 삶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인식시키고, 용기를 북돋워 줘야 한다. 그 아픔에서 벗어나려는 우울증 환자들의 몸부림을 이해한다면, 극단적인 절망의 낭떠러지까지 내몰려 있는 몸과 마음을 살릴 수 있다. 우리의 관심과 포용력은 우울증의 늪에 빠진 이에게 생명을 구하는 귀한 밧줄이 된다.

 

 

 

 

 

 

* Trivia #1

 

 

홍보 문구를 만든 출판사 관계자가 워첼의 책을 제대로 읽었는지 의심스럽다.

 

 

 

* Trivia #2

워첼의 글에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실비아 플라스의 《벨 자》 등 유명 작가의 책이 잠깐 언급된다. 306쪽에 마거릿 앳우드(애트우드)의 《떠오르기(surfacing)》에 대한 워첼의 짤막한 평이 나온다. 《떠오르는 집》(서숙 역, 지학사, 1987)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늦은 후기’에 워첼은 우울증 체험을 자전적으로 기록한 윌리엄 스타이론의 《가시적 어둠》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이 책은 《보이는 어둠》(임옥희 역, 문학동네, 2011)으로 번역되었다.

 

 

* Trivia #3

 

 

 

 

 

워첼은 갑상선 기능 항진증이라는 병이 있었고, 그녀가 복용했던 조증 치료제인 ‘리튬’은 갑상선에 문제가 일으키는 부작용이 있다. 20대 시절 모습과 최근 모습을 비교하면, 외모에 큰 변화가 있는 걸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녀의 얼굴에 오랜 투병 생활과 약물 복용의 후유증에 시달린 흔적이 남아 있다. 2015년에 워첼은 유방암 판정을 받은 사실을 공개했다.

 

 

* Trivia #4

 

 

 

 

2015년에 열두 살 연하의 제임스 프레드와 결혼했다. 그녀의 결혼은 정말 축하할 일이다. 워첼은 만나던 남자에게 실연당했고, 자연 유산까지 겪는 등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녀의 행복한 미소가 오랫동안 쭉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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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8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20 15:15   좋아요 1 | URL
우리나라는 여전히 우울증을 가벼운 증상으로 생각합니다. 항우울제만 먹으면 금방 다 낫는 줄 압니다. 우울증이 ‘마음의 감기’라고 합니다. 한 번 걸린 감기는 감기약 먹으면 완치 가능하지만, 다시 감기가 찾아옵니다. 우울증도 그렇습니다. 평생 약물 치료로 살아가게 되는데, 문제는 약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건강이 악화될 수 있어요. 우울증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오해가 우울증 환자들을 더욱 괴롭게 합니다.

캐모마일 2017-03-18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고 저자가 궁금해서 검색해 봤는데, 유명한 분이었군요.... ㅎㄷㄷ 원서는 1994년에 출간됐고, 2001년에는 에세이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까지 나왔었네요. 꼭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그리고 영화로도 만나보고 싶습니다.

cyrus 2017-03-20 15:17   좋아요 0 | URL
동명 영화에서 워첼을 분한 연기자가 젊은 시절 워첼과 무척 닮았어요.

라온 2017-03-20 0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먹는 약이네요
 
UFO와 우주법칙
조지 아담스키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6년 5월
평점 :
절판


 

 

미확인 비행물체인 UFO를 둘러싼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쪽에서는 UFO가 외계인이 타고 온 최첨단 우주선이라는 주장까지 펼친다. 이와는 달리 다른 쪽에서는 UFO가 기존의 비행물체이거나 자연현상의 착각, 또는 환각, 심지어 사진조작의 결과라는 반론을 편다. 양쪽 모두 UFO의 존재를 완벽하게 설명하지는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UFO의 주인공인 외계인의 존재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우리가 사는 태양계가 아닌 멀리 떨어져 있는 외부행성에 지적인 생명체가 있으려면 지구와 비슷한 조건이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인간 이외의 생명체가 은하계에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확인하지 못한 상태다.

 

 

 

1953년, 조지 아담스키(George Adamski)는 자신이 외계인을 만났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탑승한 외계인의 우주선까지 사진으로 공개했다. 그가 목격한 UFO는 둥그런 접시처럼 생긴 물체였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아담스키형 UFO’로 알려졌다. 그의 UFO 사진 공개 이후로 전 세계 곳곳에 접시 형태의 ‘아담스키형 UFO’이 나타났다. 아담스키는 시나리오 작가 데스먼드 레슬리(Desmond Leslie)와 함께 『Flying Saucers Have Landed』를 공동 집필했다. 이 책으로 아담스키는 우주인 접촉자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1955년에 아담스키는 또다시 우주인을 만난 경험담을 정리한 ‘Inside the Space Ships’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이 책이 바로 지금부터 소개할 《UFO와 우주 법칙》이다.

 

 

 

 

《UFO와 우주 법칙》의 출판사는 정확히 20년 전 부도가 나서 사라져버린 ‘고려원’이다. 고려원은 8, 90년대 국내 단행본 출판업계 1위를 달렸던 ‘전설 아니고 레전드’ 출판사였다. 《UFO와 우주 법칙》은 1987년에 나왔고, 출판사가 완전히 문 닫기 일 년 전에 재출간됐다.

 

필자는 이 책을 작년 헌책방에서 구했는데, 운 좋게 아주 싼 가격으로 샀다. 내가 이 책을 고르더니 헌책방 주인은 아주 찾기 힘든 책을 골랐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매긴 책의 가격이 ‘2만 5천 원’이라고 했다. 정말로 2만 5천 원을 내야 했다면, 진즉에 구매를 포기했다. 헌책방 주인과 가격 흥정을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말주변도 없다. 손님이 원하는 대로 무조건 가격을 깎아주는 헌책방 주인이 좋은 게 아니다. 손님 입장에서는 좋지만,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주인 입장에서는 손해 보는 일이다. 나는 한쪽만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 정말 마음씨 착한 헌책방 주인은 헌책방 단골손님이 뭘 요구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챙겨준다. 비싸게 파는 책을 싸게 팔수도 있다. 헌책방 주인은 2만 5천 원으로 팔 수 있는 책을 ‘2천 원’에 팔았다. 나는 주인의 배려 덕분에 아주 귀한 책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 책을 포함해 5권의 책도 함께 샀는데, 합산한 가격이 2만 천 원이었다.

 

 

 

 

 

《UFO와 우주 법칙》이 ‘아주 귀한 책’인 건 맞다. 아담스키의 책은 UFO 옹호론자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이다. 그런데 나는 UFO와 외계인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이 책을 사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다. 나는 《UFO와 우주 법칙》이 ‘괴작’에 어울릴만한 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시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아담스키의 증언과 진술 대부분은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아담스키는 화성인, 금성인, 토성인을 만났다. 세 명의 우주인은 아담스키를 자신의 우주선으로 초대했다. 아담스키는 그곳에서 다른 우주인들이 어떻게 생겼고, 우주선 내부가 어떻게 구성됐는지 거의 완벽하게 설명했다. 우주인 성자를 만나 충격적인 정보들을 접한다. 우주인 성자는 태양계의 행성이 9개(2006년에 명왕성이 행성 목록에서 공식 제외되어 현재 태양계 행성의 수는 8개)가 아니라 12개라고 말했다. 11개 행성에 지구인과 흡사한 우주인이 존재하는데, 우주인 성자의 말에 의하면 지구가 가장 뒤떨어진 문명의 별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주인들은 지구에 일어나게 될 핵전쟁과 지축 변동을 지구인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UFO를 타고 지구에 나타났다. 그렇지만 지구인들은 우주인의 경고를 허무맹랑한 얘기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우주인은 자신들의 생각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고, 말이 잘 통하는 유일한 지구인으로 조지 아담스키를 선택한 것이다.

 

 

 

 

 

조지 아담스키는 정말 운이 좋았다. 소련이 최초로 쏘아 올린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호(Sputnik)는 1957년 10월에 발사됐다. 소련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Yurii Gagarin)이 우주선에 몸을 실으면서 “지구는 푸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던 해가 1961년이다. 그 후 8년 뒤에 인류가 처음으로 달에 착륙했다. 조지 아담스키는 미국과 소련이 하지 못한 일들을 완수했다. 그는 우주선에 탑승했고, 우주 한가운데에 있는 지구를 바라봤고, 달 표면까지 목격했다. 심지어 지구인보다 훨씬 수준 높은 우주인들을 만나 대화도 나눴다. 1950년대 사람들은 우주의 실체를 잘 몰랐기 때문에 아담스키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의 주장은 100% 신뢰하기 어렵다. 사실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UFO 연구는 유사과학에 가깝다. 확실한 검증 없이는 함부로 ‘법칙’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유사과학은 어떤 사실의 해석에서 실제 증거에 근거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해석하고 싶은 소망이나 착각에 의존한다. 1976년 바이킹 호가 화성탐사 임무를 수행한 뒤 보내온 화성의 이미지는 사람의 얼굴을 연상케 해 ‘화성인의 얼굴’이라는 이야기가 한동안 떠돌았다. 그러나 이는 화성 표면에 돌출된 바위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외계 우주선이나 외계인에 대한 목격담과 경험담은 조작임이 밝혀졌다. 이 가설이 과학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은 반증 불가능성 때문이다.

 

 

 

외계인이 온다고 하더라도 우주선을 타고 올 가능성은 약 0.01%에 불과하다. 가장 큰 문제는 지구와 다른 행성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도 4.2광년 떨어져 있다. 지금 로켓으로 8만 년 정도 비행해야 그 별에 도착하는 셈이다. 속도를 높이는 것도 한계가 있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물체가 빛의 속도에 다가서면 질량은 무한대로 늘어난다. 이런 우주선을 추진시킬 에너지는 현재로써는 우주에 없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날면 우주선이 우주에 떠도는 유성이나 소행성에 부딪혀 산산조각 날 수도 있다. 우리도 갈 수 없고, 외계인도 지구에 오기 힘들다. 아담스키가 만난 우주인들은 계속 쓰고도 남을 만큼의 전자기의 힘으로 우주선을 움직일 수 있으며, 방어막처럼 형성하는 전자기(電磁氣)를 뿜어내기 때문에 유성 충돌을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 NASA에서는 전자기 엔진으로만 추진되는 로켓 개발에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전자기의 힘만으로 로켓이 우주로 날아가는 것은 기본적인 물리학 법칙에 어긋난다.[참고]

 

우주에 가지 않더라도 지구가 ‘푸른 행성’임을 모르는 사람이 전혀 없다. 그런데 아담스키는 자신이 우주에서 바라봤던 지구가 ‘희미한 흰빛을 내는 행성’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똑똑히 보았다. 놀랍게도 우리의 지구가 흰빛을 내고 있었다. 달빛과 매우 닮았지만, 지구에서 올려다보는 맑은 밤하늘의 달빛만큼 맑지는 못했다. 희미한 유백색(乳白色) 광채가 지구를 둥글게 싸안고 있는 것이었다. 그 크기는 아침 일찍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태양에 견줄 수 있으리라. 우리 밑의 지구는 하나의 커다란 광구(光球)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UFO와 우주 법칙》 88쪽)

 

1950년대에 나온, 과학과 완전히 동떨어진 내용의 책이 30년 뒤에 우리나라에 뒤늦게 소개됐다는 것은 정말 ‘충격적’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있는 정말 웃긴 내용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겠다.

 

아프리카 제3연방의 <파라뉴스>라는 언론사가 금강산에서 한국 천문학자와 화성인과 인터뷰한 내용을 ‘특종’으로 보도했다. 그런데 이 특종 기사가 ‘2058년 8월 15일 자’로 되어 있다고 한다. 화성인은 2000년에 이르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한국의 젊은 박사는 총 30명에 이르며, 그밖에 의학상, 화학상을 받은 과학자들은 100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세계 최초로 과학혁명에 이어 종교혁명, 이어서 ‘영혼 혁명’까지 모두 일어남으로써 세계의 모범 국가로 발전한다고 예언했다.

 

독자 여러분, 자유로운 상상력을 마음껏 만끽하십시오. 그리고 (비)웃으십시오. 화성인은 우리나라에 ‘촛불 혁명’이 일어날 거라고 예언하지 못했으니까요.

 

 

 

[참고] 『연료 필요 없는 전자기 엔진, 물리법칙 허물었다』 중앙선데이, 2016년 1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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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7-03-17 23: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cyrus님 글이 저자의 책보다 재미있는것같아요. 덕분에 웃고갑니다. ㅋㅋ

cyrus 2017-03-18 16:35   좋아요 1 | URL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서 글의 분량이 길어졌습니다. 그래도 재미있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7-03-18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노벨상은 모르겠지만, 다른 면에서는 화성인의 말이 그렇게 틀린 것 같지는 않네요.ㅋ 과학혁명 -> 창조경제, 종교혁명 -> 영세교, 영혼혁명 -> 국정교과서(혼의 정상화)로 인해서 온 국민이 들고 일어나 세계민주주의사를 새로 썼으니, 세계의 모범 국가로 발전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ㅋㅋ 이상 화성인 변호인단이었습니다.

cyrus 2017-03-18 16:37   좋아요 1 | URL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군요. 겨울호랑이님의 탁월한 해석에 이마를 탁 치고 갑니다! ㅎㅎㅎ

북프리쿠키 2017-03-18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이면 과학. 예술이면 예술~
글 하나 쓰는데도 전 낑낑대는데
싸이러스님의 글은 긴데도 재미있고 논리적이세요^^

cyrus 2017-03-20 15:21   좋아요 1 | URL
제 글을 잘 읽어보면, 논리적 허점이 있습니다. 북플로 제 글을 정독하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비판 댓글이 많이 안 달립니다. 제 글이 잘 써서 비판 의견이 없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

jnanasri 2022-12-27 0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에 ‘정말 웃긴 내용‘이라며 덧붙이신 2000년대 한국에 관한 ‘반예언적‘ 내용은 아담스키의 책 내용의 일부가 아니라, 그 책을 출간하면서 출판사가 임의로 덧붙인 엣날 우리나라 신문기사의 내용 아니었던가요? 롹실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50년대 어느 신문기사이며, 실제 신문의 사진도 실려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담스키와는 관련없는 기사를 함부로 아담스키의 책에 삽입한 출펀사 측의 처사가 우선 문제이지만, 아담스키와는 아무 관련 없는 내용을, 마치 아담스키 저술의 황당함을 말해주는 방증인 양 하나로 엮어서 글울 쓰시는 것도 츌판사의 행위처럼 경솔하고 정직하지 못하다 생각합니다. 그의 책 내용에 대한 평가는 개개인의 몫으로 한다 해도 말이죠...

억만장자 2024-09-22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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